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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울산을 빛낸 자랑스런 인물들
지윤 조회수 5,674 작성일2013.05.17

  울산을 빛낸 자랑스런 인물들중

 

1.예술가

 

2.운동선수

 

3.독립운동가

 

4.정치인

 

5.경제인

 

을 조사해 오라고 햐셔서요........

 

 

꼭 울산 사람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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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을 빛낸 자랑스러운 인물들)

 

예술가 : 오영수 (1909.2.11 ~ 1979.5.15)


호 월주. 울산에서 출생하였다. 판화가 오윤은 그의 아들이다.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고 도일, 1932년에 오사카 나니와 중학 속성과를 수료, 1939년에는 도쿄국민예술원을 졸업하였다. 만주 등지를 방랑하다가 8·15광복 후에 귀국, 경남여고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시와 소설을 《백민》과 《신천지》에 발표하기 시작했다. 1950년 《서울신문》에 단편 《머루》가 입선되면서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 1954년 첫 창작집 《머루》, 1956년 《갯마을》, 1958년 《명암》, 1960년 《메아리》, 1965년 《수련》 등 잇달아 창작집을 간행했다. 서민층 생활의 애환을 애정을 가지고 다룬 그의 작품세계는 현대 사회에서 상실되어 가는 인간성의 회복을 제시해 줄 뿐만 아니라, 각박한 현실에 따사로운 인정의 샘을 솟게 한다.


성품이 소박하고 낚시와 그림을 좋아했던 그는 만년에는 고향 근처로 낙향하여 요양과 창작에 정진하였으나 《문학사상》지에 발표한 단편 《특질고》로 인해 뜻하지 않은 파문을 일으켜 정신적인 타격을 받기도 했다. 90편 가량의 단편을 모아 현대서적에서 《오영수전집》 전5권을 그의 생전에 출간했다. 1955년 한국문학가협회상, 1959년 아시아자유문학상, 1977년 대한민국예술원상 등을 받았다.


운동선수 : 윤학길(1961. 7. 4 ~ )


울산 출신으로 전 한국 프로 야구 롯데 자이언츠의 투수이자, 롯데 자이언츠의 2군 감독이다.


1986년 연세대를 졸업하고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하였다. 통산 308경기의 출장중 231경기에 선발등판해서 100회의 완투를 했다. 통산 117승을 기록하였고 그 중 75승이 완투승이다.


윤학길은 최동원의 트레이드 이후 롯데 자이언츠의 마운드를 홀로 지켰다. 윤학길이 1선발로 활약하던 대부분의 시기 동안 롯데에는 뛰어난 구원 투수가 존재하지 않았고, 윤학길의 뒤를 받쳐줄 다른 뛰어난 선발 투수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통산 100번의 완투를 기록할 정도로 긴 이닝을 소화하며 마운드에서 고독한 싸움을 오랜 기간 이어갔고, 이로 인해 고독한 황태자라는 별명이 생기게 되었다.


윤학길에게 황태자라는 별명이 붙은 것은 그가 만년 2인자 였기 때문이다. 일단 윤학길은 해태의 선동열과 동시에 선수 생활을 했으며 그로 인해 단 한번도 최고 투수라는 칭호를 얻은 적이 없다. 다승왕은 물론이고 100완투라는 대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15승 이상과 3점대 평균 자책점을 밥먹듯이 기록했음에도 단 한 번의 투수 부문 골든 글러브조차 수상하지 못 했다.


팀내에서도 입단 당시에는 최동원에 밀려 별 주목을 받지 못 했고 최동원의 은퇴 이후에는 당시 역대 신인 최고 계약금을 받고 들어온 "슈퍼 베이비" 박동희로 인해 스포트라이트에서 또 한 발 밀려나게 된다. 또한 17승을 올리며 팀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끈 1992년에도 정규 시즌에서는 염종석에, 포스트시즌에서는 박동희에게 팬과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는 바람에 뛰어난 활약 만큼의 주목을 받지 못 한다.


이 "황태자"라는 말은 항상 누군가에게 밀려 만년 2인자 자리에 머물러야 했던 윤학길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선동열과 동시대에 활약했던 투수들 중에 이강철이나 한용덕 정도를 제외하면 우완투수중에는 비교 대상이 없을 정도로 빼어난 투수였고 꾸준함에 있어서는 가히 그 짝을 찾기 힘들 정도였다.


윤학길이 주무기는 당시로서는 광속구 수준이었던 140km대 초중반의 직구와 슬라이더, 그리고 커브였으며 흔희 알려진 사실과는 달리 제구력도 뛰어난 편이었다. 하지만 몸이 늦게 풀리는 편인데다가 경기 초반 실점이 많은 편이어서 많은 팬들에게 선동열처럼 경기를 완벽히 지배한다는 인상은 주지 못 했다. 그러나 100완투라는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웬만해서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 투수가 윤학길이었고 특히 초반 3이닝만 큰 위기없이 넘기면 어렵지 않게 경기를 승리로 매조지하는 선수이기도 했다.


윤학길의 불행이라면 그의 전성기 동안 팀을 같이 견인할 만 한 대형투수가 있었던 시절이 얼마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롯데 자이언츠는 1992년을 마지막으로 아직까지 한국시리즈 우승을 기록하지 못 하고 있는데 1992년의 경우에도 혜성처럼 나타난 고졸신인(염종석)과 정규 시즌에서의 부상과 부진을 털고 포스트시즌에서 시쳇말로 미쳐버린 박동희가 팬들의 뇌리에는 더 깊게 남아 있지만 그 해 무려 17번의 승리와 3점대의 평균 자책점을 기록했던 윤학길이 아니었다면 우승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독립운동가 : 박상진 (1884.12.7 ~ 1921.8.11)


본관 밀양. 호 고헌. 울산 출생이다. 1910년 국권피탈 후 대구에서 동지를 규합하여 활동하였으며, 또 채기중 · 유장렬 등이 조직한 대한광복단에도 가담하였다. 1916년 노백린 · 김좌진 등을 대한광복회에 가입시켜 광복단으로 개칭한 후, 조국광복을 위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듬해 채기중 등과 함께 친일파 부호 장승원 · 양재학 · 서도현 등에게 독립운동자금을 요구하다가 실패하자 이들을 사살하는 등, 친일파 근절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사형되었다. 정부에서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하였다.

정치인 : 김기현(1959. 2. 21. ~ )


울산출신으로 새누리당 소속 제17~19대 국회의원이다.


부산동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 졸업하고 1983년에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현재 새누리당 정책위의장이다.
 

2013.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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