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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삼국지에 나오는 비중있는 모든 인물 소개
youn**** 조회수 3,955 작성일2004.11.13
삼국지를 읽다보면,,(좀,, 쉬웜쉬웜 읽다보면,,)
인물들이 너무 많아서
누가 조조편이고 유비편이고를 구분 못해서,,
잘 안 읽히고 그러잖아요,,
황석영씨가 쓴 삼국지에서는 1권에 인물들에 대한 설명이 자세히 나오던데,,
전 이문열 삼국지밖에 없거든요,,
좀,,
가능한 많은 인물을,,
설명해주시면 안될까요?
서로의 관계도 같이 곁들여서,,
기다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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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 맹덕(曹操 孟德 155~220)
●출신지 : 패국 초현
●직위 : 낭 - 대장군 - 승상 - 위왕
●영웅성 : ★★★★★


삼국시대 위왕조를 세운 인물. 자는 맹덕(孟德). 묘호는 태조. 시호는 무황제. 패국의 초 사람.
환관의 양자의 아들인데, 황건난 평정에 공을 세우고 두각을 나타내어 마침내 헌제를 옹립하고 종횡으로 무략을 휘두르게 되었다. 화북을 거의 평정하고 나서 남하를 꾀했는데, 건안 13년 손권, 유비의 연합군과 적벽에서 싸워 대패, 이후로 그 세력이 강남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같은 해 승상, 동 18년 위공, 동 21년 위왕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정치상의 실권은 잡았으나 스스로는 제위에 오르지 않았고, 220년 정월 낙양에서 죽었다. 조조는 또한 문학을 사랑하여 많은 문인들을 불러들였으며, 자신도 그 아들 조비, 조식과 함께 시부의 재능이 뛰어나, 이른바 건안문학의 흥륭을 가져오게 하였다. 후세에 조조는 간신의 전형처럼 여겨져 왔는데, 근년에 이르러 중국 사학계에서는 그의 재평가를 둘러싼 논쟁이 일기도 하였다.


●조인 자효(曹仁 子孝 168~223)
●출신지 : 패국 초현
●직위 : 행려봉교위 - 대장군 - 대사마
●영웅성 : ★★★★☆


조조의 사촌동생. 젊은 시절부터 궁술과 마술, 수렵을 좋아했다. 조조와 함께 동탁 토벌에 나서고, 후일 장수와의 전투에서나 원소와 관도 전투에서 대치할 때에도 사자처럼 맹활약해 전투를 승리로 이끈다. 형주를 공략할 때 행정남장군에 임명되어 강릉에서 오의 주유와 싸웠는데, 부하 우금 이하 3백 명의 병사가 수천의 적병에게 포위된 것을 보고 직속 정예 기병 수십 명을 이끌고 적의 포위망을 뚫고 보기좋게 구출한다. 귀환하자 성에 있었던 진교 등이 '장군은 참으로 하늘이 내려주신 분이시다.'고 탄성했다고 한다.
조인은 어린 시절에는 성격이 거칠었으나 성장 후 무장이 되자 법률을 엄격히 지키고 남의 모범이 되었다. 대장군의 지위에 올라서는 임영 합비에 주둔하여 오나라의 침략에 대비했다. 나중에 대사마로 승진했으나 223년에 사망했다.



●하후돈 원양(夏候惇 元讓 ?~220)
●출신지 : 패국 초현
●직위 : 비장 - 절충교위 - 대장군
●영웅성 : ★★★★★


전한 하후영의 후예. 14세 때 자신의 스승을 모욕한 자를 살해한 이후 과격한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졌다. 조조가 거병할 당초부터 비장으로서 정벌에 나서고, 190년 조조가 행분무장군이 되었을 때 사마에 임명되어 조조와는 별도로 백마에 주둔한다. 그 후 절충교위 동부태수로 승진한다.
조조가 서주로 돌아오자 하후돈도 여포 토벌에 나섰는데, 전투도중 날아온 화살에 맞아 왼쪽 눈을 잃고 만다. 그래서 그때부터 병사들은 하후돈을 '애꾸눈 하후'로 불렀다.
하후돈은 하북 평정에서 전공을 세운 것을 시작으로, 각지에서 승전보를 울려오면서 조조의 신임을 얻는다. 219년 조조가 양양에서 조인을 포위하고 있던 관우 공격군을 보낼 때 특별히 소환되어 같은 마차에 타고 침실까지 출입하는 것이 허가된다. 조비가 황제에 즉위하자 대장군으로 임명되지만 몇 개월 후 사망한다. 하후돈은 진영에 있으면서도 스승을 불러 친히 강의를 들었고, 성격은 청렴하고 신중했다. 남는 재화가 있으면 언제나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부족한 경우에는 상부에서 지급받아 재산 축재를 일절하지 않았다.


●순욱 문약(筍彧 文若 163~212)
●출신지 : 영천군 영음현
●직위 : 수궁령 - 시중, 광록대부
●영웅성 : ★★★★★


명문 출신으로 조부 순숙, 부친 순곤, 숙부 순상 등이 모두 이름 높은 인물들이었다. 어릴적부터 '황제를 보좌할 제목'으로 칭송 되었다. 순욱은 처음에 원소에게 몸을 의탁하지만 그가 큰 재목이 아님을 알고, 조조 밑으로 몸을 의지한다. 조조는 크게 기뻐하며, '나의 자방(子房, 전한 고조의 모신인 장량을 가리킴)이다.'고 말하며 사마에 임명한다.
순욱은 서주의 유비와 여포를 서로 싸우게 하려고 유비에게 관직을 주고 그 담보로 여포를 치게 하는, 이른바 두 표범이 서로 싸우게 하는 '이호경식지계(二 虎競食之計)'를 내놓는 일. 그리고 유비와 원술을 다투게 해 서주를 지키고 있는 여포의 변심을 꾀어내는, 이른바 호랑이를 몰아내고 이리를 삼키는 '구호탄랑지계(驅虎呑狼之計)'를 거는 등 계략가로서 그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후일 여포 토벌과 서주의 유비 공격 , 관도 전투 등에서도 계략으로써 활약한다.
212년 동소 등이 조조를 위공(魏公)의 지위에 오르게 하려고 획책하자 순욱은 이에 반대, 이 사건으로 그는 조조에게서 멀어지게 된다. 이때 손권 정벌이 행해지는데, 순욱은 초군의 군위로 파견되어 시중 광록대부로서 군사에 참여. 조조군이 유수에 도착했을 때 병으로 쓰러져 수춘에 잔류하고 근심과 고민 속에서 50세로 사망한다. <위씨춘추>에 의하면 조조는 순욱에게 위문하는 품(品)을 보냈는데, 열어보니 속은 비어 있었다. 품은 형식일 뿐, 내용물이 없다는 것은 '귀공과의 사이는 서로 예만 갖출 뿐 마음은 없다.'는 의미다. 순욱은 사태를 깨닫고, 독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곽가 봉효(郭嘉 奉孝 170~207)
●출신지 : 영천군 양작현
●직위 : 사공군제주 - 유양정후
●영웅성 : ★★★★☆


어릴 때부터 장래를 내다보는 식견을 가지고 있었고, 성과 이름과 행적을 감추고 은밀하게 영웅들과 교제하며 세간 사람들과는 교류하지 않았다. 순욱의 추천으로 조조를 섬기게 되었으며, 조조는 조정에 상표하여 사공군제주로 발탁한다. 이때 그는 원소와 비교해 열가지 면(道, 義, 治, 度, 謀, 德, 仁, 明, 文, 武)에서 조조가 뛰어나다고 대답하고 있다.
여포 토벌 때는 기수와 사수를 끊어 성을 물로 공격하는 작전을 내놓는다. 또한 조조가 '보리밭을 어지럽힌 자는 참수형에 처한다.'고 군율을 정해놓았는데, 조조의 말이 비둘기가 날아오르는 것에 놀라 보리밭을 마구 짓밟고 말았다. 이때 곽가는 <춘추>의 '법은 고귀한 자에게는 가하지 않는다.'는 구절을 들어 조조를 납득시키고, 조조의 머리카락을 잘라 얼버무린다. 최후는 하북 토벌 중에 풍토병에 걸려 역주에서 요양하지만 병사하고 만다. 사후에 남겨진 편지에서는 공손강에 의해 원희, 원상이 토벌되는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
조조는 곽가가 38세의 나이로 죽자, 장례식 때 순유 등에게, '운명은 참으로 얄궂다. 우리들 가운데 가장 젊고, 후사를 부탁하려고 생각하고 있던 곽가가 요절하다니...'하고 애석해 마지 않는다. 나중에 적벽 전투에서 대패한 조조는 '봉효만 살아 있었다면 오늘 내가 이런 꼴을 당하지 않았을 것을...'하고 탄식했다 한다.



●가후 문화(賈珝 文和 147~223)
●출신지 : 무위군 고장현
●직위 : 낭 - 좌풍익 - 상서 - 태위
●영웅성 : ★★★★★


<정사>에서는 '책략에 실수가 없고, 사태 변화를 꿰뚫고 있었다.'고 평가되고 있는 책사. 많은 인물을 섬겼으나 가는 곳마다 재능을 인정받았다.
동탁이 장안에서 권세를 장악하고 있을 무렵, 가후는 동탁의 부하이자 사위인 우보의 참모였다. 동탁이 여포에게 살해되자 동탁의 부하 이각, 곽사, 장제 등이 동요하여 군사를 버리고 도망가려했으나, 가후는 그들을 설득하고 단결시켜 장안을 습격하고 여포를 추방했다. 이후 장수에게 몸을 의지했으나 장수가 조조에게 패하자, 그는 조조의 부하가 된다. 가후의 귀순 소식을 들은 조조는 가후의 손을 잡으며 '나에게 천하 사람들의 신뢰를 가져다 준 사람이 바로 당신이다.'고 말하며 집금오에 임명했다.
조조를 받들게 된 가후는 수많은 책략을 내놓는다. 관도 전투에서는 결전을 앞에 두고 망설이는 조조에게 결단을 촉구하여 승리로 이끌고, 서량에서 마초와 한수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는 그들에게 '이간책(二間之策)'을 써서 사이를 벌려놓고, 통제가 안되는 곳을 습격해 토벌에 성공한다. 또한 후계자 문제에 대해 조조가 상담을 했을 때에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원소와 유표의 일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하며, 장남을 후계자로 선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멸망한 사례를 들어 태자의 지위를 확정시킨다.
가후는 자신의 재능에 경계심을 품지 않도록 조용히 생활하고, 사적인 교제를 절대 하지 않고, 자녀들의 결혼 상대도 명문 가족을 고르지 않았다고 한다. 조비가 문제로 즉위하자 그는 태위로 임명된다. 이후 천수를 다하고 77세로 사망했으며, 숙후라는 시호가 내려진다.



●허저 중강(許楮 仲康 ?~?)
●출신지 : 초국 초현
●직위 : 도위 - 중견장군 - 모향후
●영웅성 : ★★★★★


신장이 8척(약 184cm)이 넘고, 허리 둘레는 10위(圍, 약 115cm)나 되고, 용모는 우람하고 의연하며 무예와 완력이 아주 뛰어났다. 허저가 조조 밑으로 들어가자 조조는 그를 보고, '이자는 나의 번쾌(樊快,한 고조의 부하 맹장)이다.'고 그의 용감함에 감탄하여 곧바로 도위에 임명했다.
연주에서는 여포의 장수 이봉을 토벌하고 양봉, 한섬과의 전투, 장수와 여포의 정벌, 관도 전투 등에 참가한다. 후일 신야의 유비 토벌에도 출진하지만 제갈량의 계략에 빠져 패퇴. 적벽 전투에서 패하자 조조를 호위하며 허도로 철수한다. 이윽고 조조 토벌을 계획한 마등이 사로 잡혀 처형되자 부친의 원수를 갚으려는 마초와 무시무시한 일 대 일 기마 전투를 연출하고, 투구를 벗어던지고 맨몸으로 싸우지만 승부가 나지 않는다. 한중 공략 때에는 당시 장로에게 몸을 의지하고 있던 방덕과 일 대 일 싸움을 펼치고, 50합이 넘게 싸우지만 쓰러지지 않자, 그를 자기편으로 만들려고 일부러 져서 함정에 빠뜨린다. 나아가 장로의 동생 장위를 토벌한다.
허저는 호랑이와 같은 힘이 있었으나 평소에는 조금 멍한 상태였기 때문에 군사들에게 '호치(虎癡)'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또한 그는 사람됨이 신중하고 법률을 잘 준수했으며, 소박하고 엄숙해 말수가 적었다. 조조가 죽자 크게 울부짖으며 피를 토했다고 한다. 그가 사망하자 장후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장합 준예(張합 儁乂 ?~231)
●출신지 : 하간군 막현
●직위 : 사마 - 교위 - 정서거기장군
●영웅성 : ★★★★★


원래 원소의 부하였으나 관도 전투때 곽도가 모함했기 때문에 조조에게 귀순한다. 조조는 '한신(전한 고조의 장군)이 한(漢)으로 들어온 것 같다.'고 기뻐하며 편장군에 임명하고 도정후에 봉한다. 그후 각지를 전전하며 원담을 비롯해 한수, 장로를 토벌하는데 공적을 세운다. 한중 쟁탈전에서도 장합은 파동, 파서 두 군을 평정하고, 유비의 야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눈부신 활약을 보인다. 유비는 하후연보다 장합을 두려워하고 있었으므로, 전사한 하후연 대신 군의 총대장이 되어 각 진영을 거느렸다. 제갈량의 제 1차 북벌 때에는 가정에서 마속을 격파하지만, 제 3차 북벌 때에는 기산에서 적에게 포위 당한다. 그러나 창을 휘둘러 포위망을 뚫어 제갈량을 감탄시킨다. 사마의의 충고도 듣지 않고 퇴각하는 제갈량을 추격하다가 위연과 관흥에게 목문도까지 유인당해 화살이 비오듯 쏟아지는 속에서 어이없게도 최후를 마친다.
장합은 어떠한 사태에 빠져도 임기응변으로 대응할 수 있고 진영을 잘 정비하며, 전쟁의 상황과 지형을 파악하고 있었으므로 계획대로 되지 않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제갈량도 그를 두려워 했다고 한다.


●악진 문겸(樂進 文謙 ?~218)
●출신지 : 양평군 위국현
●직위 : 장하 관리 - 행유격장군 - 우장군
●영웅성 : ★★★☆☆

처음에는 조조의 장하의 괸리(기록계)였는데, 체구는 작아도 담력이 있었다고 한다. 복양의 여포, 옹구의 장초, 고(苦)의 교유와의 전투에서는 선두에서 전공을 세워 광창정후로 발탁된다. 그후로도 안중의 강수, 사견의 휴고, 패의 유비를 모두 격파. 관도 전투에서는 원소의 부하 순우경을 쳐부수고, 여양의 원담, 원상과의 전투에서는 대장 엄경을 토벌하는 등 맹활약해 행유격장군으로 승진한다.
이후 고간 정벌, 형주 공략에도 참가해 양양에 주둔한다. 관우, 소비 등을 격파해 패주시켰기 때문에, 남군의 산간에 있었던 만민(蠻民)들도 악진 밑으로 귀순한다. 또한 유비의 부하이자 임저의 우두머리인 두보, 정양의 수령 양대까지 완전히 격멸한다. 이윽고 장료, 이전과 함께 합비에 주둔했을 때, 절(節)을 받고 손권과의 전투에서도 활약한다. 영읍은 1,200호가 되고, 너무 많은 전공을 세웠기 때문에 5백 호를 한 단위로 분할해 제후를 세우고, 자신은 우장군으로 승진할 정도였다. 218년에 사망하고 위후라는 시호를 받는다.



●우금 문칙(于禁 文則 ?~221)
●출신지 : 태산군 거평현
●직위 : 군사마 - 안원장군
●영웅성 : ★★☆☆☆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포신을 따라 전투에 나서고, 조조가 연주를 다스리자 동료와 함께 출두. 군사마에 임명되어 각지를 전전하며 수훈을 세운다.
옛 친구 창희가 반란을 일으켜 잡혀 왔을 때, 여러 장수의 반대를 물리친 후 조조의 지시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처형했다. 이처럼 매우 엄격하고 냉철하기 짝이 없어서 인심을 사로잡을 수 없었다.
219년 번성의 구원에 나서나 장마로 한수가 넘쳐 군대가 수몰했기 때문에 관우에게 항복한다. 이때 같이 있었던 방덕은 끝내 지조를 지키며 죽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조조는 '내가 우금을 안지 30년이 되었지만, 오히려 생각지도 않던 위험에 처하여 방덕만도 못하단 말인가.'하고 탄식했다 한다.
관우가 패하자 오나라에 있다가 다시 위로 돌아가는데, 조비는 우금이 목숨을 구걸하는 벽화를 그리도록 지시해 이를 본 우금이 수치와 분노가 치밀어 사망하게 만든다.


●장료 문원(張遼 文遠 165~221)
●출신지 : 안문군 마읍현
●직위 : 군리 - 기도위 - 중랑장 - 관내후 - 진양후
●영웅성 : ★★★★☆

본래 섭일의 자손인데, 흉노의 복수를 피하려고 성을 바꾼다. 동탁이 죽자 여포를 따라 서주로 도망쳐 각지를 전전한다. 조조가 하비에서 여포를 격파하자 군세를 이끌고 조조에게 항복, 중랑장으로 임명되고 관내후라는 작위를 받는다. 관도 전투에서는 장기를 무찌르고, 원소가 죽은 후에는 저곡과 오환족의 답돈을 토벌하여 북방 평정에 힘을 쏟는다. 적벽 전투에서는 조조를 습격하던 황개에게 화살을 쏴서 구원한다. 퇴로에서 복병으로 나타난 관우에게 이전의 은혜를 상기시켜 탈출을 묵인받고 무사히 귀환한다. 후에 합비를 수비하여 오의 손권과 수 차례나 전투를 벌인다. 처음 공방에서는 오나라 장수 송겸과 태사자를 토벌하고, 마침내 오군 10만에게 공격당했을 때는 소수 병력으로 손권을 궁지에 빠뜨린다. 이 전투로 오나라 사람들에게 이름이 알려져 장료라는 이름만 들어도 밤에 우는 아이들이 울음을 그쳤다고 한다. 그러나 224년 8월, 오와 촉의 동맹에 분노한 조비가 오 토벌에 나서고 그는 대장의 한 사람으로 종군한다. 하지만 오나라 서성의 계략으로 위군이 대패, 장료 또한 허리에 정봉의 화살을 맞고 그 상처가 깊어져 사망한다.
일찍이 장료는 손권과의 전투중 병이 들었는데, 그때 손권은 여러 장수에게, '비록 병에 걸렸지만 우리 적은 장료이니 주의하라.'고 명령한다. 손권이 얼마나 장료를 두려워 했는가를 알 수 있다.



●서황 공명(徐晃 公明 ?~227)
●출신지 : 하동군 양현
●직위 : 기도위 - 평남장군 - 양평후
●영웅성 : ★★★★★

어릴적부터 용맹이 남달라 주위로부터 '너는 크면 장군이 될 것이다.'라고 칭송 받는다. 처음에 서황은 양봉을 따라나서 적을 토벌하지만, 옛 친구인 만총의 설득으로 조조를 섬기게 된다. 비장군으로 임명된 후 서황은 여포 토벌에 종군하고, 별군으로 여포의 장수 조서와 이추를 항복시킨다. 또한 원소와의 전투에서는 유비, 안량, 문추 등을 연이어 격파하고, 사환과 함께 원소의 병량 수송대를 고시에서 습격하는 등 크게 활약. 원소가 죽은 후 계속해서 원담과 원상을 추격해 남피에서 원담을 격파하고 평원에서 반란군을 제압한다. 형주 정벌에서는 별군으로서 번에 주둔하며 중로, 임저, 선성의 황건적을 토벌. 만총과 함께 한진에서 관우를, 조인과 함께 강릉에서 주유를 각각 격파한다.
서황은 관우가 번성의 조인을 공격했을 때 구원에 나서는데, 그는 완성의 적에 대해서 배후를 차단하는 것처럼 꾸며 후퇴시키고, 적진 위두와 사총의 둔영에는 위두를 공격한다고 선전해두고서 비밀리에 사총을 공격한다. 이것을 눈치채고 구원하러 달려온 관우 군사 5천 명도 격파한다. 조조는 '적이 에워싼 참호와 방호벽은 10중이나 되었다. 이 포위망을 뚫고 수많은 적을 물리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라고 감탄하며, 7리 앞까지 서황을 마중하고 큰 연회를 베푼다.
서황은 조심스럽고 신중한 성격으로, 군사를 이끌고 있을 때는 반드시 먼 데까지 파수를 보내 경계하고, 사전에 실패할 경우까지 대비하고 싸웠다. 227년 '내가 죽으면 당시 의복 그대로 몸을 덮어주라.'고 유언하고 병사. 장후라는 시호가 내려진다. 조조는 서황에게, '서장군은 전한(前漢)의 명장 주아보(周亞父)의 품격이 있소.'라고 말했다고 한다.










●조비 자환(曹丕 子桓 187~226)
●출신지 : 패국 초현
●직위 : 오관중랑장 부승상 - 승상 위왕 - 황제
●영웅성 : ★★★★☆


조조와 변황후 사이에 출생한 적자. 태어날 때 하늘에 푸른 뭉게구름이 피어올라 후광처럼 머리 위를 감쌌다고 한다.
조비는 문무에 뛰어났지만 너무 다재다능했으므로 경시되고 만다. 하지만 마침내는 조조가 총애하던 조식을 제치고 31세때에 태자로 책봉된다. 그후 황제를 선양받아 문제가 된다. 조비는 황제 즉위 후 선정을 베풀고 국력증강에 노력한다. 위 왕조는 조비 시대에 최전성기를 누려 제갈량 조차 문제가 살아있을 때는 침공하지 못했다.
227(황초 7)년 조비는 갑자기 병이 들어 위독하게 되어, 조예를 태자로 지명하고 조진, 조휴, 사마의, 진군에게 후사를 부탁하고 세상을 뜬다. 제위에 오른지 겨우 7년, 나이 40세의 한창 때였다.
<정사>의 저자 진수는 '드넓은 도량을 갖추고, 공평한 마음으로 정사에 힘쓰고, 도의 정립에 노력을 기울이고, 충실하게 성덕을 쌓아갈 수 있었다면 고대의 현군과 견줄 만한 존재로 될 수 있었다.'고 마지막에 평가한다.



●조앙 자수(曹昻 子脩 ?~197)
●출신지 : 패국 초현
●직위 : 불명
●영웅성 : ★★★☆☆


조조의 맏아들. 자는 자수(子脩).
생모인 유부인이 일찍 죽어 정부인에게 양육되었다. 197년, 조조를 따라 남양의 장수 정벌에 참가하여 항복받았으나, 이 해 장수의 두번째 반란때 살해되었다.


●조창 자문(曹彰 子文 ?~223)
●출신지 : 패국 초현
●직위 : 언릉후 - 북중랑장· 효기장군 - 임성왕
●영웅성 : ★★★☆☆


조조와 변황후 사이의 2남. 젊은 시절부터 궁술과 마술이 뛰어나고, 완력이 보통사람 이상으로 맹수와 격투할 정도였다고 한다. 조조는 독서를 권했으나 학문을 좋아하지 않고 '장수가 되어 사졸들의 선두에 서서 싸우고 싶다.'고 말해 후계 쟁탈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218년에 대군의 오환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토벌을 명령받고, 스스로 전투에 참가하여 활을 쏠 때마다 반드시 적병을 쓰러뜨리는 용맹함을 보이고 있다. 도망가는 적을 추적하는 동안 원거리를 행군하여 말과 병사 모두 피로에 지치고 말았으나, 그는 지칠 줄 모르고 추격해 적을 산산조각으로 격파했다. 장병에게는 평소의 두 배가 되는 포상을 주었기 때문에 모두 기뻐했다고 한다. 이 보고를 들은 조조는 '우리 황수아(黃鬚兒, 황색 수염이 나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부름), 쓸 만하구나.'하고 칭찬했다.
그후 조비가 제위에 오르면서 임성군에 봉해지지만, 그의 무략을 두려워했는지 하는 일마다 박해를 받아 223년 불우한 나날속에 병사하고 만다. <세설신어>에서는 조비에게 독살된 것으로 묘사되었다.



●조식 자건(曹植 子建 192~232)
●출신지 : 패국 초현
●직위 : 평원후 - 안향후 - 진사왕
●영웅성 : ★★★★☆


위나라의 시인. 자는 자건(子建). 안휘성 사람. 조조의 세째 아들이며, 문제 조비의 아우이다.
그들 세 사람을 삼조라 하며, 함께 건안 문학의 중심적 존재로서 중국 문학사상의 주공, 공자라 칭송되었다. 맏형 조비와 태자 계승 문제로 암투를 하다가 29세 때 아버지가 죽고 형이 위의 초대 황제로 즉위한 뒤 시인 정의 등 그의 측근자들은 죽임을 당했고, 그도 평생 정치적 위치가 불우하게 되었다. 그의 재우와 인품을 싫어한 문제에 의하여 그는 거의 해마다 새 봉지로 옮겨 살도록 강요당하였고 엄격한 감시하에 신변의 위험을 느끼며 불우한 나날을 보내다가, 마지막 봉지인 진에서 죽었다. 그는 공융, 진임 등 건안 칠자들과 사귀어 당시의 문학적 중심을 이루었고 오언시를 서정시로서 완성시켜 문학사상 후세에 끼친 영향이 크다. 위, 진을 거쳐 당나라의 두보가 나오기까지 그는 시인의 이상상이기도 하였다.


●조홍 자렴(曹洪 子廉 ?~232)
●출신지 : 패국 초현
●직위 : 단춘 현령 - 응양교위 - 표기장군
●영웅성 : ★★☆☆☆


조조의 사촌 동생. 원래 단춘의 현령이었는데, 조조의 동탁 토벌을 위한 의용군에 가담한다. 조조는 형양에서 동탁의 대장 서영에게 산산이 격파되어 도망가는 중에 말을 잃고 만다. 이때 조홍이 자기 말에서 내려 '천하에 저는 없을 지라도 장군은 없어서는 안됩니다.'하고 말하면서 조조에게 말을 건내 주었다. 조홍은 도보로 뒤따라가서 변수 근처까지 도달했다. 강물이 깊어 건널 수 없었으나 조홍은 강가를 걸어가 배를 구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조홍은 재산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재물에 인색했다. 일찍이 문제가 어렸을 때 조홍에게 재물을 빌려달라고 청했으나 거절당한 적이 있었다. 문제는 이 일에 앙심을 품고, 조홍의 식객이 법을 어긴 것을 구실로 투옥해 처형하려고 했다. 여러 신하들이 도우려고 해도 도울 수가 없었는데, 변태후가 곽황후에게 '조홍을 처형한다면 황후 자리에서 끌어내리겠다.' 고 협박했으므로 지위를 낮추고 영지를 삭감하는 것으로 수습했다.
명제(조예)시대에 표기장군이 되고, 특진의 지위를 부여받고 232년에 사망했다.


●조진 자단(曹眞 子丹 ?~231)
●출신지 : 불명
●직위 : 편장군 - 진서장군 - 대사마
●영웅성 : ★★★☆☆


조조의 조카. 자는 자단(子丹).
일찌기 고아가 되어 조조에게 양육되었다. 중군 대장군 때 조비의 유언을 받고 조예의 후견인 중의 하나가 되었다. 228년, 제갈량의 침공 때 군대를 이끌고 선전했고, 230년에는 촉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이듬해 제갈량이 다시 침입하자 이를 막다가 갑자기 병으로 죽었다.


●조휴 문열(曹休 文烈 ?~228)
●출신지 : 불명
●직위 : 기도위 - 중령군 - 대사마
●영웅성 : ★★★☆☆


조조의 조카. 자는 문열(文烈). 조조의 아들.
조비를 섬겨 정동대장군이 되고, 조비가 죽을 때 그 아들 조예의 보필을 부탁받았다. 228년, 대사마로서 오나라 방위를 담당하다가 손권의 유인 작전에 말려 대패하고 도망했으나, 등에 생긴 악성 종양으로 죽었다.







●순유 공달(筍攸 公達 157~214)
●출신지 : 불명
●직위 : 황문시랑 - 상서령
●영웅성 : ★★★★☆


순욱의 조카지만 나이는 여섯 살 위다. 처음에는 하진의 부름을 받아 황문시랑으로 임명되었지만, 그후 조조가 헌제를 맞아 도읍을 허창으로 옮겼을 때 부름을 받고 여남태수를 시작으로 순조롭게 출세해 군사로 임명된다.
198년 장수 정벌을 수행할 때, 무리한 공격을 피해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것을 진언하는데, 조조는 이를 듣지 않고 패배. 그 이후 조조는 순유를 존중한다. 207년에 중군사로 전임. 위 건국 후에는 상서령이 된다. 순유는 사려 깊고 치밀하며, 일을 처리하는 판단력과 신체의 위험을 피하는 지략을 겸비해 계략을 세운 후 누구에게도 누설하지 않았다. 조조도 '겉으로는 둔하고 겁이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지략과 용기를 지니고 있다.'고 칭찬하고, 조비에게 그를 본보기로 삼으라고 이야기한다.
214년 손권 정벌을 진행하는 중에 58세로 사망. 조조는 그를 이야기할 때마다 눈물을 흘리고 슬퍼했다고 한다. 순유가 쓴 <기책20종(奇策二十種)>은 종요만이 알고 있었는데, 순유가 한창 저작을 편집하던 중에 죽게 되어 세간에는 순유의 비책이 전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정욱 중덕(程昱 仲德 ?~?)
●출신지 : 동군 동아현
●직위 : 수장령 - 분무장군 - 위위
●영웅성 : ★★★★☆

본명은 '입(立)'이었으나, 어릴 적에 태양을 받드는 꿈을 꾸었다는 이야기를 조조가 듣고 '일(日)' 자를 더해주었다고 한다. 신장은 8척 3치로 턱과 뺨에 근사한 수염이 나 있었다.
순욱의 추천으로 조조에게 초빙되어 관직에 나서고 곽가를 추천한다. 유비를 죽이라고 진언하기도 하고, 조조에게 제위에 오르도록 권유하는 등 비정한 군사(軍師)로 묘사된다. 또한 하비 공격에서 유비의 처를 인질로 잡고서 관우를 항복시키기도 했다. 후일 창정에서 복병을 10대(隊) 배치하는 '십면매복지계(十面埋伏之計)'로 원소군을 격파하고, 기주를 평정한 조조에게 강남 평장을 진언. 유비의 참모 선복의 정체가 서서임을 간파하자 서서의 모친을 속여 성으로 불러들이고, 모친의 필적을 본따 거짓 편지를 써서 서서를 빼내는데 성공한다. 적벽 전투에서는 적의 화공에 주의하도록 진언하고, 황개의 투항이 거짓임을 간파했으나 때는 이미 늦어 위군이 대패. 퇴로를 관우에게 차단당한 조조에게, 의리를 존중하는 관우의 성격을 이용해 위기를 모면토록 진언하고 무사히 빠져나가게 한다.
적벽 전투 후 중원을 평정한 조조는 연회석에서 '이전에 연주에서 여포에게 패했을 때 귀공의 진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오늘의 나는 없었다.'고 말했는데, 정욱은 이 자리에서 '충족을 아는 자는 치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며 사퇴를 표명. 병사를 물려주고, 문을 굳게 잠그고 외출하지 않았다. 성격이 강직해 남과 충돌하는 일이 많고, 모반을 꾀한다는 밀고를 받은 적도 있었으나 조조의 총애와 대우는 점점 깊어졌다.
문제때 위위로 취임하고, 이어 공(재상)으로 임명되지만 얼마되지 않아 80세를 일기로 사망, 숙후라는 시호가 내려진다. <세설신어>에서는, 일찍이 정욱이 식량이 부족한 조조에게 3일분의 식량을 공급했는데 마른 고기 속에 인육을 섞었다고 해 조정에서 신임을 잃어 공의 지위에 오를 수 없었다고 한다.



●모개 효선(毛介 孝先 ?~?)
●출신지 : 진류군 평구현
●직위 : 치중종사 - 상서복사
●영웅성 : ★★★☆☆

조조의 모사. 자는 효선(孝先). 평구 사람.
조조가 연주목으로 있을 때 순찰관으로 초빙되었다. 이때 천자를 받들어 불신을 다스리고, 농경을 일으켜 군량을 비축하라는 등 진언을 하여 조조의 천하 평정 계획에 중요한 시사를 주었다.


●진군 장문(陳군 長文 ?~235)
●출신지 : 영천군 허창현
●직위 : 어사중승 - 상서령 - 사공
●영웅성 : ★★★☆☆


조부 진식, 부친 진기, 숙부 진심과 함께 후한의 명사. 어릴 적부터 재기가 있어 노나라의 공융조차 인정했을 정도였다. 유비가 예주를 지배하자 부름을 받아 별가가 된다. 도겸이 죽은 후 유비가 서주의 후임으로 영입되자, 진군은 '원술과 여포가 있어 위험하다.'고 충고하지만, 유비가 받아들이지 않아 대패. 그후 조조의 부름을 받고 사공서조연속이 되고, 어사중승으로 승진한다. 조조가 위왕이 되었을 때, 코 베기와 다리 자르기 등과 같은 육형을 부활시키려 하자 진군이 이에 반대, 결국 중지시킨다.
진군은 사람을 보는 눈이 뛰어나고 공정한 판단력이 있으며 도의를 존중하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또한 문제를 태자 시절부터 보좌해 '나의 안회(顔回, 공자의 수제자)'라고 평가받는다. 조비는 제위에 오르자 진군의 건의로 '구품관인법(九品官人法)'을 제정한다. 문제가 죽은 후에는 사마의 등과 함께 명제의 보좌를 부탁받고 정치와 촉과의 전쟁에서 활약, 사공의 지위까지 오른다.


●종요 원상(種繇 元常 151~230)
●출신지 : 영천군 장사현
●직위 : 상서랑 - 전군사 - 태위 - 태부
●영웅성 : ★★★☆☆


어린 시절 숙부 종유와 낙양으로 향하던 중 관상쟁이에게 '이 아이는 출세할 상이 있지만, 물을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과연 10리도 못 가서 강에 빠져 죽을 뻔했기 때문에 종유는 그를 소중하게 길러 학문에 전념하게 만든다. 마침내 효렴으로 추천되고, 삼공(三公) 관청에 소환되어 정위정 황문시랑이 된다.
헌제가 장안에 있을 때에는 헌제를 장안에서 탈출시키는 데 비밀리에 활약하고, 어사중승에 임명되어 시중, 상서복야로 승진한다. 당시 마등과 한수가 서로 다투고 있었는데, 산동에서 싸우고 있어 배후의 움직임을 걱정했던 조조는 종요를 서방으로 파견한다. 종요는 마등과 한수에게 편지를 보내 설득하고, 두 사람 모두 각각의 자식을 인질로 삼아 조정으로 보낸다. 관도 전투에서는 말 2천 여 필을 군에 공급하며, 조조는 종요를 '한(漢)의 소하(蕭何, 한 고조의 심복으로 유명한 정치가)에 필적한다'고 편지에 쓰고 있다.
위가 건국되자 상국으로 임명된다. 그뒤 위풍이 모반을 꾀한 일이 있어 그를 추천한 책임을 물어 면직당한다. 조비가 왕위에 오르자 다시 대리가 되고, 문제가 즉위하자 태위로 승진한다. 명제 시대에는 태부까지 오른다. 230년에 죽고 성후라는 시호를 받는다.



●만총 백녕(滿寵 伯寧 ?~242)
●출신지 : 산양군 창읍현
●직위 : 독우 - 종사 - 양무장군 - 태위
●영웅성 : ★★★☆☆

18세 때 군(郡)의 독우가 되지만 관직을 버리고 귀향, 조조가 연주를 평정하자 부름을 받고 종사가 된다.
원소와의 싸움과 형주 공략에서 공을 세워 여남태수와 분위장군을 겸직, 그후 관우가 조인의 번성을 포위했을 때 장마로 성벽이 물에 잠기자, 조인은 성에서 탈출하는 것을 고려했다. 이에 만총은 '물이 빠지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진언하면서 농성을 계속해 지원군 서황과 함께 관우를 격파했다. 문제가 왕에 오르자 양무장군이 되고, 오의 손권 침략을 몇 번이나 격퇴. 234년 손권이 합비의 신성을 공격했을 때는 수십 명의 용사를 모집해 손권 진지를 야습하고 성곽 공격 무기를 불태워 적을 퇴각시킨다.
238년에 노령으로 소환되어 태위로 승진하고, 242년에 사망하는데 재산에 무관심했기 때문에 남은 재산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유엽 자양(劉曄 子楊 ?~?)
●출신지 : 회남군 성덕현
●직위 : 사공창조연 - 주부 - 태중대부
●영웅성 : ★★★★☆

후한 초대 황제인 광무제의 아들 유연의 후예. 말년에는 군사(軍師)로 알려지지만 젊은 시절에는 모친의 유언으로 측근을 살해하고, 양주의 도적 정보를 참살해 병사를 흡수하는 등 무법자였다.
한 왕실이 점차 쇠퇴해지는 것을 보고 왕족의 후예인 자신이 병사를 갖는 것을 바라지 않고, 노강태수 유훈에게 병사를 맡긴다. 그후 유훈이 손책에게 정벌당하고 조조 밑으로 도망치자 이어 유엽도 조조에게 부름을 받고 사공창조연이 된다. 관도 전투에서는 원소군이 망루에서 공격해오자 발석거(發錫車)로 대항하고, 또 적이 지하도를 파서 진지로 쳐들어오자 땅을 파 수로를 만들어 방어한다. 또한 유엽은 사람을 보는 눈이 뛰어나 맹달이나 공손연이 모반을 일으킬 인물임을 예견했는데, 그의 예측대로였다.
유엽은 한 왕실의 일족이라는 신분 때문에 조정 안에서는 거의 친교를 갖지 않고 232년 병 때문에 태중대부로 임명된다. 그뒤 2년 정도 대홍로로 있다가 다시 작위를 물려주고 태중대부로 재임 중 사망. 경후라는 시호를 받는다.



●동소 공인(董昭 公仁 156~236)
●출신지 : 제음군 정도현
●직위 : 영도장 - 거록태수 - 사도
●영웅성 : ★★★☆☆


처음에는 원소를 받들고 거록군 평정으로 활약. 동생 동방이, 대립하던 장막의 부하였던 인연으로 원소에게 목숨을 위협받아 하내의 장양 밑에서 몸을 의지한다. 그후 조조가 헌제를 맞이하러 서진했을 무렵 장양과 함께 귀순. 조조의 본거지에서 가까운 허창으로 천도할 것을 진언한다.
조조가 위공, 위왕의 칭호나 구석(九錫, 큰 공이 있는 신하에 대한 아홉 가지 특혜)을 받을 수 있도록 상소하기도 하고, 번성에서 관우를 무찌르는 책략을 내는 등 군사와 정치 양면에서 종종 활약하고 있다.
문제 시대에는 오나라를 토벌할 당시 조언을 아끼지 않아 위위로 승진한다. 명제 때에는 사도 본관이 되어 풍속 폐해에 대해 상소를 올려 법을 철저히 준수하도록 했다.



●양수 덕조(楊修 德祖 175~219)
●출신지 : 홍농군 화음현
●직위 : 낭중 - 창조속주부
●영웅성 : ★★★☆☆

후한의 태위였던 양표의 아들. 폭넓은 지식과 재능을 지녔으며 건안 연간에 효렴으로 추천되어 낭중에 임명된다. 나중에 조조의 요청으로 창조소속주부에 임명되고, 군사와 국정 안팎의 문제를 모두 취급했는데, 종사한 일마다 독서를 깊이 하여 조조의 의중을 잘 꿰뚫었다고 한다. 반면 조조에게 경계되는 점도 있었던 것 같다. 조조가 한중에서 철퇴할 때 '계륵(鷄肋)'으로 포령한 일화가 유명한데, 누구도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 양수만이 '닭의 늑골은 국물을 우려내는 데는 좋으나 먹기는 어렵다.' (버리기에는 아까우나, 쓸 데는 없다는 의미로 한중을 비유함)라고 이해, 퇴각할 준비를 시작했다고 한다.
이밖에도 <세설신어>, <연의>에서는 조조가 공사 중인 문에 '활(活)'자를 써놓고 가자, 양수가 '문(門)에 활(活)자를 쓴 것은 넓다(闊)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문을 작게 하라.'고 작업자에게 명령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또한 조조가 하사한 요구르트에 '합(合)'이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고, 양수가 '사람(人)에 한 입(一口)을 더하면, 더할 합(合)이 되므로 이것은 한 입씩 시음하라는 의미라고 해석하는 일화가 남아있다.
양수는 조식과 친해 정의, 정이 형제와 함께 조식을 후계자로 만드는데 협력했다. 그러나 조식이 조조에게 소외되자 위험시되고, 또한 양수가 원술의 조카뻘이 된다는 점에서 219년 죄를 뒤집어쓰고 처형된다.



●화흠 자어(華欽 子魚 157~231)
●출신지 : 평원군 고당현
●직위 : 상서랑 - 의랑 - 태위
●영웅성 : ★★★☆☆

영제 사후 정태, 순유 등과 함께 하진에게 초빙되어 상서랑에 임명된다. 그후 동탁, 원술, 마일제를 거쳐 손책을 섬긴다. 손책이 죽은 후 조조의 추천으로 헌제의 소명을 받는다. 손권은 넘겨주고 싶지 않았으나, 화흠이 '중간다리 역할을 한다.'고 설득했기 때문에 쾌히 보내주었다.
위 건국 때에는 어사대부에 임명되고, 문제가 즉위하자 사도로 승진한다. 평소 청빈한 생활을 하고, 봉록과 하사품을 친척과 친우들에게 나누어줘 집안에 재산을 축적하지 않았다. 하사받은 여자 노예조차도 모두 신분을 해방시켜 시집을 보내주었다고 한다. 명제가 즉위하자 태위가 되고, 231년 75세로 사망. 경후라는 시호가 내려진다.
<연의>에서는 <정사>의 인물상과 정반대로 출세를 위해 서라면 어떤 일이든 하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진교 계필(陳矯 季弼 ?~237)
●출신지 : 광릉군 동양현
●직위 : 위군태수 - 상서 - 사도
●영웅성 : ★★★☆☆

광릉태수 진등의 친구. 광릉이 손권에세 포위당하자 구원을 요청하는 사자로 조조에게 달려간다. 그뒤 조조의 부름을 받고 사공연속에서 위군태수가 되고, 한중 정벌에도 종군한다.
문제(조비)와 명제(조예) 2대를 받들어 사도까지 승진한다.


●손례 덕달(孫禮 德達 ?~?)
●출신지 : 탁군 용성현
●직위 : 사공군모연 - 상서 - 사공
●영웅성 : ★★★★☆

조조가 유주를 평정했을 때 부름을 받고 사공군모연으로 등용된다. 승진을 거듭해 각지의 태수를 역임하는데, 노산에 있는 수백 명의 도적이 부근 주민을 괴롭히고 있었을 때 부지미(扶持米)를 주어 관민을 동원. 도적의 우두머리에게 현상을 걸고, 항복,귀순하는 자를 불러들인다. 그러자 곧바로 도적들이 서로 배반하여 다시 평화를 되찾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후 중앙에 들어가 상서가 된다. 또한 용맹 과감한 모습도 보이는데, 명제가 사냥하러 대석산에 갔을 때 황제 앞에 튀어나온 호랑이를 말에서 내려 베어 죽이기도 한다. 또한 오의 전종이 침공했을 때 수적으로 불리했지만 하루 종일 끝까지 싸워 이를 물리칠 정도였다고 한다. 명제의 유언으로 조방이 즉위하자 조상의 보좌역이 되는데, 성실하고 타협하지 않았으므로 조상과는 사이가 나빴다. 그래서 청하와 평원의 경계 다툼을 해결했을 때 조상에게 내쫓겨 5년의 금고형을 받는다. 조상이 주살된 후 다시 중앙에 들어와 사공까지 승진한다.





●전위(典韋 ?~197)
●출신지 : 진류군 기오현
●직위 : 사마 - 도위 - 교위
●영웅성 : ★★★★★

자(字)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용모가 당당하고 완력이 세며, 강한 지조와 의협심을 가진 인물이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진류태수 장막의 부하였으나, 진지 군사와 충돌해 수십 명을 죽이고 산중으로 도피생활을 하던 중, 마침 호랑이를 쫓고 있는 광경이 하후돈에게 띄어 조조에게 추천된다. 그후 여포에게 두 번이나 포위당한 조조를 구해냈으며 황건적 토벌 때에는 허저와 단기필마로 싸워 승부가 나지 않았다. 이에 조조는 일부러 져주라고 명령한 뒤, 결국 허저를 유인해 함정에 빠뜨려 아군으로 만든다.
완에서 장수(張繡)가 항복하자 전위는 조조와 함께 그곳에 주둔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참모 가후의 책략으로 조조를 기습한다. 이때 전위의 무용을 두려워해 미리 부관 호거아에게 명령하여 그를 술에 곯아 떨어지게 하고, 무기인 쌍철근도 빼앗아 두었다. 이상한 기미를 눈치챈 전위는 조조를 도망가게 하기 위해 정문에서 사자처럼 분전한다. 수십 군데나 상처를 입으면서도 조금도 기가 꺽이지 않고, 적병 두 명을 양팔에 끼고 죄어 죽였으나, 상처가 깊어 입을 벌리고 눈을 부라린 채 큰 소리로 적에게 고함지르다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 무음으로 도망간 조조는 전위의 소식을 듣고는 대성통곡했다 한다.
전위는 매우 충직하며 신중했고, 항상 낮에는 종일 조조 곁에 서서 대기했다. 조조는 훗일을 돌아볼 때 '내 생애 애석한 것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봉효를 잃은 것이며, 하나는 전위를 잃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다.



●하후연 묘재(夏候淵 妙才 ?~219)
●출신지 : 패국 초현
●직위 : 별부사마 기도위 - 정서장군
●영웅성 : ★★★★☆


하후돈의 사촌동생. 조조가 거병하자 하후연은 별부사마 기도위에 임명되어 각지를 전전. 원소를 관도 전투에서 격파한 후 연주, 예주, 서주의 군량미를 관리하며 식량이 부족했던 조조군에게 차질 없이 양곡을 수송하였기 때문에 조조군은 세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동작대 낙성식 여흥에서는 이미 과녁에 꽂힌 4개의 화살 한가운데에 화살을 다시 명중시키는 궁술을 보여준다. 마초가 공격해 왔을 때에는 동관 오른쪽 성을 수비하고, 궁지에 몰린 조조를 구원하러 나서 위수 북쪽 해안에서 마초의 장수 성의를 물리친다. 마초가 도망친 후에는 조조의 명령으로 장안에 머물면서 자신이 추천한 장기와 함께 장안을 지킨다. 급습이 장기였던 하후연은 언제나 적이 예상하지 못한 곳을 공격했기 때문에 군사들은 '전군교위 하후연은 사흘에 5백리, 엿새에 1천리를 간다'고 말할 정도였다.
218년 오나라의 합비 공략에 대응하기 위해 조조가 귀환하자 하후연은 정군산의 수비를 위해 한중에 남는다. 유비군의 황충을 맞아 공격하지만 대산을 점령 당하고 만다. 결국 법정의 신호에 일제히 촉군이 몰려 오고, 자신은 황충과 싸우다 전사하고 만다.



●이전 만성(李典 曼成 ?~?)
●출신지 : 산양군 거야현
●직위 : 중랑장 - 비장군 - 파로장군
●영웅성 : ★★★☆☆

초평 연간에 군세를 이끌고 조조의 부하가 되고, 황건적의 난을 시작으로 원술과 여포 토벌 등 각지를 전전한다. 관도 전투에서는 곡물과 비단을 수송하는 역할로 활약. 또한 여양의 원담, 원상을 공격했을 때는 정욱 등과 함께 배로 식량을 운송하다가 원상의 부하 고간에게 수로를 차단 당하지만, 이전은 적이 방심하고 있는 것을 보고 이를 격파한다. 후일 유표가 유비에게 명하여 북방을 침공할 때는 하후돈, 이전 등이 반격에 나서는데, 유비가 이유 없이 퇴각하는 것을 보고 '복병이 있다.'고 경고. 그러나 하후돈과 우금이 이를 무시하고 유비를 추격하다 복병에게 포위당하고 만다. 이때 이전이 구원에 나서고 유비는 퇴각한다.
이전은 군사보다 학문을 더 좋아해 다른 장수와 공적을 다투지 않았다. 또한 훌륭한 사대부를 존경하고 겸허한 태도를 취해 병사들에게도 평판이 좋았다고 한다. 36세로 사망하고, 문제(조비) 시대에 민후라는 시호가 내려진다.



●가규 양도(賈逵 梁道 174~228)
●출신지 : 하동군 양릉현
●직위 : 군리 - 민지령 - 건위장군
●영웅성 : ★★★☆☆

위의 장수. 자는 양도.
홍농군태수로 있다가 조조에게 인정을 받아 간의관으로 작전에 임했다. 문제때는 예주를 다스려 명자사로 이름을 날렸고, 다시 명제를 섬기면서 오나라 토벌에 공을 세웠으나 중도에 병으로 죽었다.


●방덕 영명(龐德 令明 ?~219)
●출신지 : 남안군 훤도현
●직위 : 종사 - 입의장군 - 관문정후
●영웅성 : ★★★★☆


젊어서는 군(郡) 관리, 주(州)의 종사였고 초평 연간 마등 휘하의 장수로 출전해 반란을 일으킨 강족, 저족을 토벌하는 등 연이어 전공으로 승진을 거듭해 교위가 된다. 이후 조조가 한중을 평정하자 그는 군사를 이끌고 항복. 조조는 이미 그의 용맹을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입의장군에 임명하고, 관문정후로 등용해 3백 호의 영읍을 준다.
조조를 받들게 된 방덕은 조인과 함께 완의 반란을 진압. 그대로 남하해 번에 주둔하며 관우와 대치한다. 번에 있던 장수들은 형 방유가 한중에 있다는 점을 들어 의심했으나, 방덕은 '나는 국은을 받고 있는 몸이며, 도의로 보아 목숨을 바치지 않으면 안된다. 내가 죽는가, 아니면 관우가 죽는가, 둘 중 하나다.'라고 말하고, 전투에서 관우의 이마에 화살을 쏘아 맞혔다.
조인은 번성에서 북방 10리에 걸쳐 주둔했는데, 10일 넘게 장마가 계속되어 한수가 범람해 방덕은 우금과 함께 관우에게 생포된다. 우금은 항복하지만, 항복을 강요하는 관우를 꾸짖다가 처형되는데, 이 소식을 들은 조조는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다. 이후 문제 때에 장후라는 시호가 내려진다.



●곽회 백제(郭淮 伯濟 ?~255)
●출신지 : 태원군 양곡현
●직위 : 평원부승 - 진서장사 - 양곡후
●영웅성 : ★★★★☆


자는 백제(伯濟). 태원군 양곡현 사람.
건안 연간에 효렴으로 천거되었고 평원부승으로 임명되었다. 조비가 오관중랑장이 되었을때 중앙부서에 임명되었다. 이후 서북 방면의 전투에서 큰 공로를 세웠는데 황초 원년(220) 곽회는 조비가 제위에 오른 것을 축하하는 사자로서 허도로 향했다. 도중 병이 나서 제시간에 도착할 수가 없었다. 도착하였을때는 신하들이 즐겁게 연회를 열고 있었으므로 조비가 곽회를 꾸짖으며, "옛날 우가 제후들을 모이게 했을때, 방풍이 뒤에 도착하자 사형에 처했고 지금 하늘이 함께 축하하고 있는데 그대는 오히려 가장 늦게 왔소, 무엇 때문이오?" 곽회가 대답했다. "이제 성군을 맞이했는데 방풍인들 죽겠습니까." 조비는 그의 말을 듣고 칭찬하고 옹주자사를 겸임하도록 하였으며 사양정후로 봉하였고 나중에 실제로 옹주자사로 임명됐다. 변방을 다스리는데 강족과 오랑캐가 투항해오면 곽회는 항상 먼저 사람을 보내 그들의 천척관계나 남녀의 수효를 탐문하도록 했다. 회견할때 한두가지 일로부터 그들의 사정을 하나하나 이야기해줘서 그들을 감탄시켰다. 하는일이 상세하여 제갈량의 북벌을 저지하는 데 큰 몫을 했다.


●학소 백도(학昭 伯道 ?~?)
●출신지 : 농서군 태원현
●직위 : 부곡독 - 잡호장군
●영웅성 : ★★★★☆


젊어서 군대에 들어가 부곡독이 되고, 싸울 때마다 전공을 세워 잡호장군으로 승진한다.
228년 12월, 제갈량은 위에 침공해 학소가 지키는 진창성을 포위하고, 그와 동향 사람인 근상을 파견하여 귀순을 권했다. 그러나 학소는 결사항전의 각오를 보이고 마침내 격렬한 공방전이 전개된다.
제갈량의 군세는 수만이었고, 학소의 병력은 수천에 불과 했다. 그러나 학소는 제갈량의 운제와 충차 공격을 막아내고, 제갈량이 정란을 만들었을 때에는 이중 성벽을 쌓아 대항. 결국 20여일 동안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위의 원군이 도착하여 촉군은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명제는 학소의 공적을 치하하며 열후의 직위를 하사, 학소가 귀환하자 그를 불러 노고를 위로했다. 학소가 병이 들어 죽게되자 그의 아들 학개를 불러 '살아 있는 인간에게만 거처가 있고, 죽은 자에게는 어디에도 거처할 곳이 없다. 조상 대대로 묘에서 멀리 떠나 있는데, 동서남북 어디든 네가 좋은 곳에 묻어주면 좋겠다.'고 유언한 뒤 사망한다.



●등애 사재(鄧艾 士載 ?~264)
●출신지 : 남양군 조양현
●직위 : 도위학사 - 상서랑 - 태위
●영웅성 : ★★★★★


위나라의 명장. 자는 사재(士載). 극양 사람.
사마의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농정, 통운에 업적을 올리고 오나라에 대한 전략으로 둔전책을 성공시켰다. 255년, 관구검, 문흠 등의 반사마씨 거병때 연주자사였던 그는 기동대를 이끌고 진압 작전에 참가하여 승리의 계기를 만들었다. 263년, 촉을 정벌하는데 있어서는 서쪽 방면의 침공대를 지휘하여 산을 깎고 하천에 다리를 놓는 등 험한 길을 개척하여 대번에 성도에 육박했다. 10월에 들어 사찬과 아들 등충을 격려하며 제갈첨, 장준 등의 목을 베고 유선의 항복을 받아 드디어 성도 입성을 성취했다. 그러나 이듬해 반란의 기색이 보인다는 사찬, 종회 등의 무고로 자식과 함께 처형되었다.



●하후패 중권(夏候覇 仲權 ?~?)
●출신지 : 불명
●직위 : 편장군 - 우장군 - 거기장군
●영웅성 : ★★★☆☆
위의 장수. 하후연의 아들 4형제 중의 맏이. 자는 중권(仲權).
사마의의 천거로 그의 수하에 들어 촉한과의 대전에서 잘 싸우고 옹주의 수비를 맡았었다. 조상이 사마의에게 죽은 뒤 신변의 위험을 느껴 촉한에 항복하였다. 그곳에서 강유의 지우를 입어 여러차례 고락을 같이하며 위군을 막았으나 조양성을 치다가 등애의 계교에 빠져 난전에 죽었다.



●종회 사계(種會 士季 225~264)
●출신지 : 영천군 장사현
●직위 : 비서랑 - 사도
●영웅성 : ★★★★☆
위 태부 종요의 막내아들. 어릴 적부터 신동 기질을 발휘하고, 성인이 되어서는 논리학에 정통해 이름이 알려진다.
257년 제갈탄이 수춘에서 반역하자 종회는 사마소를 따라나서고 계략을 써 제갈탄 구원을 위해 달려온 오의 전역 등을 귀순시키는 등 반란 진압에 활약. 사마소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아 당시 사람들에게 자방(전한의 책사 장량)으로 알려진다.
263년 가을. 종회는 마침내 촉 토벌군을 일으키고 수십만의 병사와 등애, 제갈서 두 부대의 각각 3만여 병사가 촉으로 향한다. 검각에서 강유의 격렬한 저항을 맞고 있는 사이에 별동대 등애가 성도에 들어가 유선을 항복시킨다. 결국 강유는 종회에게 항복하지만, 종회는 부하들을 엄하게 단속해 촉의 관료들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강유와 매우 친밀한 사이가 된다.
그후 종회는 자립하겠다는 야심을 품고, 등애를 모함해 도성으로 보낸다. 혼자 대군세를 통솔할 수 있게 되자 강유와 함께 계획을 짜지만, 믿었던 구건의 배반으로 호열 등의 군사가 폭동을 일으켜 강유와 함께 살해된다. 나이는 40세였다. 한편, 사마소는 종회가 반역할 것을 알고 있었고, 더욱이 반역후의 일까지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고 힌다.

2004.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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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네이버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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