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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역사요~!
lu**** 조회수 769 작성일2009.05.09

역사에 대한 사진좀 올려 주세요

관계없이"책을 읽으셈"이나 "나이좀 먹으면 알게 됨" 말하면 신고

 

내공냠냠 신고 초뒹이냐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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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연표)  v  d  e 
선사 (유적)
구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
환인
환웅 (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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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조선 - 단군
진국
삼한

 



 
 
 


 
 
 


  

  



고려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삼별초의 항쟁
홍건적의 고려 침공
조선
역대국왕 / 조선왕조실록
임진왜란 / 병자·정묘호란
경복궁·창덕궁·종묘·화성
대한제국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정기
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한국의 역사 [한반도의 통치자, 한국 역사, 강단사학, 한국사]

 

 

한국의 역사(韓國의 歷史)는 구석기 시대 이후의 주로 한반도와 만주, 넓게는 동아시아 지역을 배경으로 발전되어 온 한민족의 역사이다.

 선사 시대

 

기원전 4000년 경 빗살무늬 토기, 서울 암사동 선사 유적지 출토

한국의 선사시대구석기 시대 후기로부터 시작되며, 약 70만 년 전에서 청동기 시대까지의 시기에 해당된다. 한국 고고학계에서는 한반도에서 발굴된 유물 및 유적을 바탕으로 동아시아의 발굴 성과와 연계하여 연구하고 있다.

[편집] 구석기 시대

한국의 구석기 시대는 70만 년 전에서 약 1만 년 전의 시기에 해당된다. 약 70만년전 부터 한반도에 사람들이 정착하여 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약 4만 년 전에 현생인류가 출현하면서 주변 환경에 적응하면서 작은 씨족 사회가 서서히 생겨난 것으로 보고 있다.

한민족의 기원은, 원주민들은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다른 부족들이 유입되었다는 주장, 원주민이 이동 없이 진화하였다는 주장, 원주민과 유입된 주민들이 혼합되었다는 주장 등의 이론이 있다.

[편집] 중석기 시대

한국의 중석기 시대(또는 고신석기 시대)는 약 1만 년 전 부근의 구석기 시대에서 신석기 시대로 진행하는 과도기에 해당되며, 학자에 따라서는 중석기를 인정하지 않기도 하는 등, 동아시아 중석기 시대의 구분과 함께 다양한 이론(異論)이 존재한다.[2][3][4]

[편집] 신석기 시대

한국의 신석기 시대는 기원전 약 1만 년 전에서 4천 년 전의 시기에 해당된다.

이후 후기 신석기시대(기원전 약 200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에 사람들의 군집 생활의 유적지가 여러 곳에서 발굴되고 있어 씨족을 중심으로 생활하였고 점차 다른 씨족이나 먼 지역과 교역이 이루어지고 인구가 늘어나면서 부족사회로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는 '국가'에 해당되는 특징적인 유적이 없어 국가 형태는 이 시기까지 세워지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문헌상으로는 한국의 첫 국가인 '고조선'이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된 것으로 되어 있다.

[편집] 상고 시대

상고 시대는 기원전 약 2000년 ~ 서기 300년경의 시기에 해당된다.

[편집] 청동기 시대

청동기 시대는 기원전 약 2000년 ~ 기원전 300년의 시기에 해당된다.

단군 왕검에 의해 이른바 단군조선이 기원전 2333년에 세워진 이후 한민족의 역사가 첫 장을 열었으며 이 시대를 흔히 고조선 시대라고 부른다.[5]

이 시기는 농경의 발달로 잉여 생산물이 생기고 청동기가 사용되면서 사유 재산 제도와 계급이 발생하였고, 그 결과, 부와 권력을 가진 족장(군장)이 출현하였고, 성읍국가로 발전되었다고 추측된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고인돌, 비파형 동검, 미송리식 토기 등이 있다. 부족장은 세력을 키워 주변 지역을 아우르고, 마침내 국가를 이룩하였다.

[편집] 고조선

이 부분의 본문은 고조선입니다.

고조선(古朝鮮)은 청동기 시대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국가이다. 성읍국가를 중심으로 발전하면서 부족연맹체를 형성하게 되는데, 대동강 유역에서 요하 유역에 이르는 영토를 차지하였다.

[편집] 건국 연도

고조선이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되었다는 것은, 동국통감에 따른 것이다. 동국통감에서는 고조선 건국 연도가 요임금 즉위 25년에 건국되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요임금의 실존여부도 확실하지 않다. 학자들 중에서는 그 때에는 아직 신석기시대에 머물러 있었던 것을 들어 고조선의 건국 연도를 기원전 7~8세기 정도로 추측하기도 한다.

[편집] 기자조선에 관한 논란

조선 시대 이전에는 은나라에서 건너온 기자가 세운 기자조선이 정식 역사로서 인정되었으나, 일제강점기를 전후로 점차 부인되어 현재에는 대한민국북조선의 역사학계 모두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최근에 요서 지방에서 발굴되는 이 시기의 유물과 관련하여 기자조선의 성격에 대한 검토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있다.

[편집] 철기 시대

철기의 한국 전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한국의 철기시대는 기원전 300년경 ~ 서기 300년경의 시기에 해당되며, 전기와 후기로 구분된다.[6]

기원전 4세기경 한국에 철기가 보급되었고, 특히 고조선은 철기 문화를 수용하면서 중국 한나라와 대립할 정도로 발전하였으며, 만주와 한반도 각지에는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 등 여러 나라가 성립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었다.

[편집] 위만조선

이 부분의 본문은 위만조선입니다.
위만, 한사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위만조선(衛滿朝鮮)은 (燕)나라 사람으로 고조선에 망명하여 준왕(準王)을 쫓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여 건국된 나라이다. 위만조선은 활발한 정복 사업으로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였고, 중앙 정치 조직을 갖추고 있었으며 한나라와의 중계무역을 독점하여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였다.

위만의 손자 우거왕(右渠王)은 중국의 망명자를 많이 받아들이고, 예(濊)나 진국(辰國) 등 주변 소국들이 한나라(漢)와 직접 교섭하는 것을 막았다. 한나라의 무제(武帝)는 기원전 109년 섭하(涉何)를 보내 우거를 달래려 하였으나 우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이에 분노한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침공했고, 결국 위만조선은 기원전 108년에 멸망하였다.

이후 한 무제는 옛 조선의 지역에 군현을 설치하였다. 한군현은 고구려 미천왕낙랑군(樂浪郡)과 이후에 설치된 대방군(帶方郡)을 병합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편집] 여러나라의 성장

대륙으로부터 전파된 금속문화는 대체로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전 4세기 무렵 이후에는 한강 이남으로 전래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이 지역에서의 원시사회는 부족 사회로 전환되었다. 북부 사회보다는 뒤늦게 그 형식이 변모된 남방식 고인돌이 이 시기에 각처에서 축조되었으며, 또 그러한 사실은 부족 사회의 성립이 그만큼 뒤늦었음과 그 발전 과정이 북부사회의 그것과 비슷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철기문명을 받아들인 각 나라들은 철기를 이용하여 농업을 발전시키면서도 독특한 사회 풍습을 유지하였다. 많은 소국들이 경쟁하는 가운데 일부는 다른 나라를 병합되었고, 다시 연맹 왕국으로 발전하여 중앙 집권 국가를 형성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기원전 3세기경부터 예맥(濊貊)계의 부여족(夫餘族)이 세웠던 부족 국가인 부여(夫餘, 扶餘)는 지금의 쑹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지금의 만주 일대를 지배한 나라이다. 동은 읍루(挹婁), 남은 고구려 및 현도군, 서는 선비(鮮卑), 오환(烏桓)과 인접하였었다. 부여는 북부여, 동부여로 구분된다.

부여는 전국을 사출도(四出道)라 칭하는 지역으로 나누어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猪加), 구가(狗加)와 같은 제가(諸加)가 일부 지역을 맡아 다스렸다. 사출도 중의 큰 지역은 그 인구가 수천 호(戶), 작은 것은 수백 호가 되었다. 피지배계급인 하호(下戶)는 모두 노예에 속하였다고 한다. 또한 부여에는 영고(迎鼓)라는 제천행사가 있었고, 풍속이 매우 엄격하여 도둑질, 간음 등에 대해 특히 엄벌하였다. 북부여와 동부여는 모두 고구려에 흡수되었다.

동해안에 면한 지역에는 옥저(沃沮)와 동예(東濊)라 불리는 부족 사회가 할거하고 있었다. 이들은 예맥족의 한 지족(支族)으로 고구려와 언어·풍속이 비슷하였다.

옥저는 지금의 함경도 일대에 위치했던 나라이며, 예맥족의 부족사회였다. 또한 중앙의 왕이 없고 각 지방의 맹주인 현후(縣侯)가 군림하였다. 현후 밑에 삼로(三老)가 하호를 지배하였다. 자원이 풍부하였으며 이 때문에 이웃인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동예(東濊)는 한반도 동해안에 거주하던 부족사회로 농사를 주업으로 하였고, 직조기술도 발달하였다. 산과 하천을 경계로 읍락이 구분되어 각 읍락을 삼로가 통치했다. 옥저와 마찬가지로 고구려에 흡수되었다.

기원전 2세기경 위만이 고조선의 지배권을 장악할 무렵 이 지역에는 진국이 있었고, 이들은 중국의 군현 세력에 저항하면서 점차 부족 연맹 세력을 형성하여 갔다. 그 결과 삼한(三韓)이라고 통칭하는 마한·진한·변한 등 세 무리의 부족 사회가 생겨, 기원후 3세기경에는 대방군에 공격을 가하기도 하고 직접 진(晉)과 교섭하기도 했다.

삼한마한, 진한, 변한으로 구성되었으며, 세 나라 모두 한반도 남부에 위치하였다. 농경과 철기 기술이 발달하였으며, 별읍인 소도와 이를 주관한 것으로 추측되는 천군(天君)이 있었으며, 파종 이후인 5월과 추수기인 10월에 각각 기풍제와 추수감사제를 지냈다.

일찍이 유력한 세력으로 등장했던 목지국(目支國)은 기원후 3세기 전반에 이르러 소멸된 것 같다. 이리하여 고구려로부터 망명해 온 백제(伯濟)가 그 지배권을 대신하였다. 전설상 온조가 영도한 백제는 마한 세력을 결합하여 백제왕국(百濟王國)의 기초를 다졌다. 한편으로 진한의 여러 부족 중에는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중심으로 한 사로(斯盧)가 경주평야의 6촌의 씨족 세력을 기반으로 신라로 발전해 갔다. 한편 변한에서는 구야국(狗邪國)이 가야로 발전하였다.

[편집] 고대

한국의 고대는 1세기 - 900년의 시기에 해당된다.

[편집] 삼국시대

이 부분의 본문은 삼국시대입니다.
황금으로 만든 삼국시대 왕의 허리띠 장식

삼국시대(三國時代)는 여러 소국들 중 중앙집권적 국가로 발전한 삼국과 그 판도에 영향을 끼친 가야 연맹을 포함한 4개 국가가 정립된 시대를 일컫는다. 삼국시대의 전반은 고구려와 백제가 주도했으나 진흥왕 이후 국력이 막강해진 신라가 삼국시대 후기를 주도하고 결국 삼국 통일을 이루고 남북국시대를 열었다. 각국의 전성기는 백제 4세기, 고구려 5세기, 신라 6세기 순이다.

[편집] 고구려

이 부분의 본문은 고구려입니다.

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서 서기 668년까지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를 지배한 고대 국가이다.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주몽이 이끄는 부여족의 한 갈래가 압록강 지류인 동가강(佟佳江) 유역에 건국함으로써 성립되었다. 고구려는 초기부터 한족(漢族)과의 투쟁 과정을 통해 강대해졌다. 1세기 태조왕 대에 들어서 고구려는 중앙집권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한 태조왕은 동예와 옥저를 복속시키고, 낙랑군과 현도군은 압박하여 영토를 넓혔다. 고국천왕은 왕위의 부자상속제를 마련하였고, 5부의 행정구역을 설정하는 등 체제 정비를 단행하여 왕권이 보다 강화되었다.

미천왕은 서안평을 확보하고, 낙랑군대방군을 정복하여 한반도에서 한사군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 고조선의 옛 땅을 회복하였다. 고구려는 고국원왕백제전연의 공격으로 일시적인 국가적 위기를 겪었으나, 소수림왕 대에 들어서 고구려는 태학(太學)을 설립하고 불교를 국가적으로 공인하였으며, 율령을 제정함으로써 중앙집권국가를 완성시키고 다시 나라를 정비하였다.

5세기, 고구려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광개토왕은 백제의 수도인 한성(漢城)을 침공하여 남쪽 영토를 임진강과 한강까지 확장시켰고, 신라내물왕을 원조하여 왜구를 격퇴하였다. 또한 북으로 후연을 쳐서 요동을 완전히 차지하고, 아울러 요서 지방의 일부까지 진출하였다. 광개토대왕은 숙신동부여를 복속시켜 만주와 한반도에서 우월한 위치를 확보하였다.

그의 아들인 장수왕은 중국의 남북조와 통교하였고, 유연(柔然) 등 새외(塞外) 민족과도 통교하면서 외교관계를 확대하여 중국을 견제하였다. 427년 남하정책의 일환으로 수도를 평양으로 천도하여 중앙 집권적 정치기구를 정비하였다. 475년 고구려는 백제의 한성을 침공하여 함락하고 개로왕을 죽여 고국원왕의 한을 풀고 남쪽의 아산만(牙山灣)까지 지배하였다. 이때 백제는 수도를 웅진으로 옮겼고, 함께 공격당한 신라는 죽령(竹嶺) 이북의 땅을 잃었다.

6세기 중반에 들어서 내우 외환에 시달리던 고구려는 국력이 크게 쇠약해졌다. 신라의 진흥왕나제동맹(羅濟同盟)을 깨고 고구려에게서 빼앗은 한강 유역을 독차지 하였으며, 지금의 함경도 지역 일부에까지 진출해 고구려를 압박하였다.

589년 중국에 새로 들어선 수나라는 고구려를 4차례에 걸쳐 침공하였다. 고구려-수 전쟁에서 고구려는 612년 을지문덕이 이끈 살수 대첩과 같은 중요한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수나라의 침공을 막아낼 수 있었다. 이 전쟁은 수나라의 멸망의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곧이어 중국을 통일한 당나라태종연개소문의 대당강경책을 구실로 고구려를 침입하여 요동성 등을 함락시키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으나 안시성에서 성주 양만춘(楊萬春 혹은 梁萬春)에게 대패하였다.

이처럼 고구려는 중국 세력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으나, 공격을 받으며 국력이 쇠퇴해갔다. 특히 연개소문 사후 지배층이 분열되어 정치 상황이 어지러웠고 민심이 혼란해져 있었다. 668년 나당연합군은 혼란해진 고구려를 공격하여 수도인 평양을 차지하고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당나라는 고구려의 옛 땅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고, 고구려 영토의 일부는 신라로 들어갔다. 그러나 고구려의 공백은 후일 그 계승국인 발해로 이어진다.

[편집] 백제

이 부분의 본문은 백제입니다.
백제의 왕관 장식

백제(百濟)는 서기전 18년 온조에 의해 하남 위례성에 건국되었다. 삼국지[7]에는 백제가 마한의 일부였다고 한다. 백제는 3세기 경 충청도, 전라도 일부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또한 북쪽으로의 진출은 고구려와 중국 군현 사이의 영토적 분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4세기 근초고왕 때는 황해도 일부지역과 중국의 요서, 진평에 백제군을 설치하고 일본 규슈에 진출하는 등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후 고구려와 신라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기는 등 수난을 맞았다. 성왕은 신라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협공하여 한강 유역을 되찾았으나 신라의 배신으로 모두 허사가 되고 결국 관산성에서 전사했다.

그 후 백제는 부흥을 위해 노력했으나 660년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 공격을 받고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며 멸망하였다. 백제의 문화는 대체로 세련되고 섬세한 것이 특징으로, 이러한 백제의 문화는 왜 등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편집] 신라

이 부분의 본문은 신라입니다.
신라의 석굴암

신라(新羅)는 경주 지역에서 기원전 57년 경에 건국되었다. 신라는 삼국 중 가장 먼저 세워졌지만 국가의 틀을 세우는 데는 가장 늦었다. 그러나 6세기진흥왕 대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으며 660년 백제,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 통일을 달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말기에 이르러 왕과 귀족이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정치를 제대로 돌보지 않아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 결국 경순왕 대에 국가고려에 넘겨주게 된다. 신라는 법흥왕 때 불교를 받아들여 왕권 강화와 국민의 단결을 꾀하였으며 섬세하고 화려한 불교 유적과 유물들을 남겼다.

[편집] 가야

이 부분의 본문은 가야입니다.

가야(伽倻 혹은 加耶 伽耶)는 한반도 남부에 위치해 있던 부족국가의 연맹체이다. 2~3세기경에 김해 등지에 있던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대가야, 성산가야, 아라가야, 고령가야, 소가야의 5개국이 합쳐져 전기 가야 연맹이 성립되었으나 고구려의 공격으로 인해 금관가야가 큰 피해를 입자 5~6세기 경 피해를 거의 입지 않은 대가야를 중심으로 후기 가야 연맹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 역시 신라와 백제의 사이에서 위협을 받으며 서서히 무너져가 결국 562년 멸망한다. 삼국과 달리 제대로 된 국가가 만들어지지 못하고 부족국가의 연맹으로 전락한 것이 멸망의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가야는 김해 지방에서 생산되는 질 좋은 을 바탕으로 국력을 키웠으며 왜 등지와 교역을 하기도 했다.

[편집] 삼국시대의 경제, 정치

[편집] 경제

기록상으로는 삼국 초기부터 화폐가 사용된 것으로 보이나 유물이 발굴된 것은 없으며, 물품화폐가 주를 이루었다고 여겨진다.[8] 신라에서는 5세기 말과 6세기 초, 도읍인 경주에 시장을 열고 감독하는 기관을 두기도 하였다.[9]

[편집] 정치

삼국의 정치는 기본적으로 중앙집권체제를 토대로 한 전제왕권 또는 귀족정치였다. 고구려는 5부족 연맹체로 시작하여 태조왕 이후 중앙집권체제를 갖추었다. 백제는 마한의 작은 소국에서 발전하여 3세기 고이왕 때 중앙집권국가의 틀을 갖추게 되었다. 신라는 이보다 늦은 시기에 중앙집권화 되었으며, 귀족회의는 각각 고구려의 제가회의, 백제의 정사암 회의, 신라의 화백 회의이다.

[편집] 남북국시대

이 부분의 본문은 남북국시대입니다.

신라가 대동강 이남까지의 영토를 확립하고 고구려 유민이었던 대조영이 세운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하여 남북국의 형세를 형성한 시기로, 남북국시대라 부르기도 한다.

[편집] 통일신라

이 부분의 본문은 통일신라입니다.

한반도를 통일한 신라는 9주 5소경을 설치하고 고도의 중앙집권체계를 확립하였다. 집사부 장관인 시중의 권한이 강화되어 왕권의 전제화가 실현되었다. 신문왕은 녹읍을 폐지하였으며, 유학 교육을 위해 국학을 설립하였다. 진골귀족과 대결 세력이었던 득난세력(6두품)이 왕권과 결탁하여 상대적으로 부각되었으나, 골품제는 유지되었고 진골귀족의 고위직 독점은 여전하였다.

[편집] 발해

이 부분의 본문은 발해입니다.
발해의 석판

발해(渤海)는 고구려를 계승하여, 한반도 북부와 만주 동부 및 연해주에 걸친 광범위한 지역에 위치해 존속하였던 국가이다. 696년 영주(榮州)에서 거란(契丹)족의 반란이 일어나 이 지역에 대한 당나라의 세력이 쇠퇴해졌다. 옛 고구려의 장수인 대중상(大仲象 혹은 乞乞仲象)과 그의 아들인 대조영(大祚榮)은 이틈을 노려 고구려 유민과 걸사비우(乞四比羽)가 이끄는 말갈 세력을 규합한 후 영주에서 탈출하였다. 그 과정에서 대중상과 걸사비우가 죽자 고구려 유민과 말갈 세력의 지도자가 된 대조영은 이해고가 이끄는 당나라의 추격군과의 천문령 전투에서 승리한 뒤 698년에 지금의 중국 지린 성 돈화시에 위치한 동모산(東牟山) 기슭에 발해를 세웠다.

제2대 무왕(武王)은 연호를 인안(仁安)으로 정하고, 강력한 대외정책으로 국토를 넓히는 데 주력하였다. 무왕은 흑수말갈(黑水靺鞨)을 압박하였다. 또한 말갈을 압박하는 과정에서 동생 대문예(大門藝)가 무왕의 명을 어기고 당으로 망명하자, 무왕은 장문휴(張文休)로 하여금 당의 등주를 공격하여 당에 대항하는 면모를 보였다. 이것은 발해가 당을 공격하여 성공한 사례로, 당으로 하여금 발해를 멸시하지 못하게 하였고, 또한 발해 북쪽의 흑수말갈과의 유대관계를 약화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제3대 문왕(文王)은 연호를 대흥(大興)으로 하였다. 문왕은 영토 확장보다는 주로 내치와 외교에 주력하였다. 문왕은 발해의 수도를 중경 현덕부(中京顯德府), 상경 용천부(上京龍泉府), 동경 용원부(東京龍原府) 순으로 옮기며 경제적, 외교적 이익을 얻는 데 주력하였다. 발해는 일본과의 외교관계와 교역을 도모하였다. 그리하여 일본에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외교는 물론 관무역의 경제적 발전을 꾀하였다. 발해는 당과도 사신을 수시 파견하여 친당외교를 폈고, 공무역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신라와는 활발한 교류를 하지 않았다.

그 후 여러 왕들이 단명하다가, 제10대 선왕(宣王)은 영토를 넓히고 내치를 충실히 하여 발해 역사상 중흥의 시대를 열었다. 또한 문왕 때의 3경 외에 2경을 더 개척하여 서경 압록부(西京鴨綠府)와 남경 남해부(南京南海府)를 둠으로써 전국이 5경 15부 62주의 행정구역을 갖추었다. 그리하여 과거 고구려의 대부분 영토를 회복하는 것을 넘어 북쪽 연해주 지역으로 더 진출한 형세를 갖게 되었다. 이로서 발해는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고 불릴 정도의 국세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발해는 제15대 왕인 대인선(大諲譔)에 치세에 멸망하였다. 10세기에 들어 세력을 확장하던 거란은 926년 발해를 공격하였고, 발해는 15대 220년간의 역사를 남긴 채 사라졌다.

발해는 문화적으로 고구려의 문화를 바탕으로 불교 문화와 당의 문화를 수용한 문화국가였다.

[편집] 후삼국시대

이 부분의 본문은 후삼국시대입니다.

후삼국시대892년 ~ 936년의 시기에 해당하며 견훤궁예의 신라에 대한 반란과 백제, 고구려 부흥운동의 결과 형성된 세력들이 존속했던 시기를 일컫는다.

신라 말기에 들어서 중앙 정부의 무능력으로 인해 전국이 극도로 혼란스러워 졌고, 골품제의 폐단이 속출했다. 각 지방의 유력한 호족이 실권을 장악하고 스스로 장군이라 칭하며, 중앙 정부에 봉기하였다. 이 중 가장 큰 세력이 었던 견훤과 궁예는 각각 후백제후고구려를 건국하였다. 태봉으로 국호를 변경한 후고구려는 왕건이 세운 고려에 의해 멸망하였다.

고려는 신라를 흡수한 뒤, 후백제까지 멸망시켜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편집] 고려

이 부분의 본문은 고려입니다.
고려의 청자칠보투각향로

918년 ~ 1392년의 시기에 해당된다. 한국사에서는 고려시대를 중세로 보고 있다.[10]

[편집] 역사

[편집] 고려의 성립과 후삼국 통일

이 부분의 본문은 후삼국 시대입니다.

후고구려의 궁예가 실정을 거듭하여 민심을 잃고 쫓겨났다. 이에 918년 송악 지방의 호족 출신이었던 왕건은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임금의 자리에 올라 국호를 고려, 연호를 천수(天授)라고 하고, 서울을 송악(개성)으로 옮겼다. 왕건은 궁예와는 달리 친(親)신라 정책을 썼다. 견훤을 타도하기 위하여 신라와 우호를 맺은 것이다. 이는 또 한편 신라의 전통과 권위의 계승자로서의 지위를 얻으려고 한 것이었다.

이런 왕건의 정책으로 말미암아 고려와 후백제 사이에서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결국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귀순하고, 고려는 후백제를 멸망시켜 936년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한편 926년 발해요나라의 침략을 받고 멸망하자, 유민들을 대거 받아들임으로서 통일을 이루었다.

[편집] 광종의 개혁 정치

태조의 뒤를 이은 혜종정종 때에는 왕권이 불안정하여 황족들과 외척들 사이에 계승 다툼이 일어났다. 이러한 왕권의 불안정은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호족 세력을 규합하기 위하여 취하였던 혼인 정책 때문에 나타난 부작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광종은 왕권의 안정과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정책을 추진하였다. 광종은 노비안검법(956년)과 과거 제도(958년)를 시행하였다. 두 제도를 통해 호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국가의 수입 기반을 확대하였으며 유학을 익힌 신진 인사를 등용하여 신구 세력의 교체를 도모하였다. 과거제도의 실시는 왕권의 강화를 위한 새로운 관료 체제 설정의 기초 작업이었다. 또한 관리의 복색을 제정함으로써 귀족층을 안정시키고 위계 질서를 확립하게 된다.

일련의 개혁을 통하여 자신감을 갖게 된 광종은 본격적으로 공신과 호족 세력을 제거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또한 광종은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개경을 황도, 서경을 서도(西都)라 칭했으며, 광덕(光德)·준풍(峻豊)이라는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였다.

광종의 개혁은 경종 때의 경제 개편으로 이어져 중앙 관료들의 경제적 기반을 보장하기 위한 전시과 제도가 실시되었고, 성종 때의 지배체제 정비로 이어져 통치 체제가 확립되었다.[11]

[편집] 문벌 귀족 사회의 성립

성종 이후 중앙 집권적인 국가 체제가 확립됨에 따라 중앙에서 신라 말기 지방 호족 출신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고위 관직자들을 배출해온 문벌 귀족들이 새로운 지배층이 되었다. 이들은 정치 권력과 경제력을 거의 독점하여 정국을 주도해 나갔다.

한편 목종(穆宗)이 서북면 순검사(西北面巡檢使) 강조(康兆)에게 폐위(廢位)당하고 그에 대신하여 현종(縣宗)이 즉위하는 등 왕권은 아직도 그 기반이 확고하게 자리 잡히지 않았으며,

거란이 세운 요나라가 고려의 친송정책(親宋政策)에 반감을 품고, 두 나라의 외교관계를 단절시켜 자신들의 영향하에 두고자 하는 등 11세기에 들어와서는 선대 이래 해결하지 못한 어려운 숙제들이 현실 문제로 부각되어 진통을 겪어야만 하였다.

10세기 말에는 거란이 내침하여 고려를 무력으로 굴복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서희(徐熙)의 외교 수완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오히려 강동 6성(江東六城)을 확보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고려는 송과 여전히 친선관계를 유지하는 등 거란에 성의있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결국 1010년에 거란의 성종은 대군을 이끌고 내침하여 이듬해까지 고려의 수도 개경(開京)을 비롯 광대한 지역을 점령하기에 이른다. 현종은 멀리 전라도 나주(羅州)까지 피난을 갔다. 그 뒤에도 거란은 수차례 고려를 침략했으며 고려에서는 거국적 항전을 계속하였다. 예를 들면 1019년의 강감찬(姜邯贊)에 의한 귀주대첩이 있다. 그 뒤 고려와 거란은 화평을 되찾아 비교적 평온한 외교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고려에서는 점차 그 사회와 문화를 향상시켜 나갔다. 10세기 말에 성종이 시행한 제도정비는 주로 당을 모방한 것이어서 고려의 현실에 부합되지 않는 요소가 드러나 11세기 고려사회의 실정에 맞추어 부분적 개편을 마침으로써 고려 일대의 제도정비를 완성하게 되었다. 문종(文宗) 때에 이루어진 일련의 시책이 그 예다.

이와 함께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은 문종의 넷째 아들로서, 일찍이 송에 가서 불교의 깊은 경지를 터득하고 돌아와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여 당시 동양의 불교문화를 집대성하는 등 문화적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리고 다른 북방민족인 여진족(女眞族)과의 관계도 묘하게 전개되고 있어서, 때로 여진족의 침략을 받기도 하였으나, 세력이 강하지 못해 고려에 복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점차 강성해지면서 12세기 초부터는 고려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편집] 요나라의 침공
이 부분의 본문은 고려-거란 전쟁입니다.

10세기 초에 요나라송나라를 공격하기에 앞서 송나라를 고립시키기 위해 발해 유민이 세운 정안국을 토벌하고 고려와의 관계를 개선하려 하였다. 그러나 고려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북진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여 수차례 외교적 충돌이 있었다.

처음 요나라는 80만의 대군으로 고려를 침공했다(993년). 요나라는 고구려의 옛 땅을 요구하는 것과 함께 송나라와의 교류를 끊고 자신들과 교류할 것을 요구하였다. 고려는 청천강에서 요나라의 공격을 저지하는 한편, 서희가 요나라와의 협상에 나섰다. 이 때 요나라로부터 고려가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인정받고, 고구려의 옛 땅인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를 확보하는 한편, 요나라와 교류할 것을 약속하였다.

요나라가 군대를 거둔 뒤 고려는 송나라와 친선 관계를 계속 유지하면서 요나라와 교류하려 하지 않았다. 이에 요나라는 강조의 정변을 빌미 삼아, 강동 6주를 넘겨줄 것을 요구하였다. 요나라 성종은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 고려를 침공했다(1010). 그러나 양규가 이끄는 고려군에 요군은 곳곳에서 패퇴하였다. 이에 요군은 고려와 강화하고 물러갔다.

여러 차례 소규모의 침입을 시도하던 요나라는 다시 10만의 대군으로 침공해 왔다(1018년). 개경 인근까지 침입했던 요군은 고려군의 강력한 반격을 받아 본국으로 패퇴하던 중 귀주에서 강감찬이 지휘하는 고려군에게 섬멸되었다(1019년). 이를 귀주 대첩이라 한다.

결국 고려가 요나라와 싸워서 승리함으로써 고려, 송나라, 요나라 사이에는 세력의 균형이 유지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 고려는 국방 강화에 더욱 노력하였다. 강감찬의 주장으로 개경에 나성을 쌓아 도성 수비를 강화했고, 북쪽 국경에 천리장성을 쌓아 외세의 침입을 저지코자 하였다.[12]

[편집] 이자겸의 난과 서경 천도 운동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인종(仁宗)초부터 고종(高宗) 즉위 전후, 문신 귀족 전성기의 타성과 부패 속에서 여러 모순과 상극적 요소가 자라 차례로 폭발되었다. 대표적으로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천도 운동이 있다.

대표적 문벌 귀족인 경원 이씨 가문은 왕실의 외척이 되어 80여 년간 정권을 잡았다. 경원 이씨는 이자연의 딸이 문종의 황후가 황후가 되고 손자인 이자겸이 예종인종의 외척이 되어 집권하였다. 특히 이자겸은 예종의 측근을 몰아내고 인종이 왕위에 오를 수 있게 하면서 그 세력이 막강해졌다. 이자겸의 횡포를 증오한 인종은 1126년(인종 5년) 측근 세력을 결집하면서 이자겸의 권력 독점에 반대하고 나섰다.

이에 이자겸은 반대파를 제거하고 척준경과 함께 난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였다(1126년). 교만해진 이자겸은 인종을 폐하고 스스로 왕이 되려는 야심을 품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도리어 일당인 척준경과의 불화로 실각되고, 이자겸을 몰아낸 척준경마저도 정지상의 탄핵으로 제거되니 귀족의 발호는 일단 진압되었다. 이자겸의 난은 중앙 지배층 사이의 분열을 드러냄으로써 문벌 귀족 사회의 붕괴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자겸의 난 이후 인종은 정치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자겸 일파, 즉 개경 귀족 세력의 제거에 앞장섰던 묘청·정지상 등 서경 세력과 김부식을 중심으로 개경 세력 사이에 대립이 벌어졌다.

묘청 세력은 풍수지리설을 바탕으로 서경에 대화궁(大華宮)을 짓고 도읍을 옮기면 주변국이 모두 복속해올 것이라 주장하였고, 금나라와의 사대관계를 청산하고 칭제건원하는 한편, 금나라를 정벌하자고 주장하였다. 이는 개경 세력을 누르고 자신들 서경 세력이 정권을 잡으려는 책모였으므로 금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한 어떤 계획도 수립하지 않는 등 현실 상황에 맞지 않았다.

반면 김부식을 중심으로 하는 개경 세력은 유교적 이념을 받아들여 사회 질서를 확립하자고 주장하였다. 아울러 이들은 민생 안정과 현실 상황을 미루어 요나라와 송나라를 정복한 신흥 강국 금나라와 형식적인 사대 관계를 맺었다. 결국 이러한 정치 개혁과 대외 관계에 대한 의견 대립이 지역 간의 갈등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서경 세력은 서경 천도 운동이 무산 되자 1135년(인종 13년) 서경에서 유참·조광 등과 더불어 나라 이름을 대위국(大爲國), 연호를 천개(天開), 그 군대를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 칭하고 난을 일으켰으나 내분이 일어났고, 김부식(金富軾)의 진압군에 1136년(인종 14년) 2월 평양성이 함락되어 1년 만에 평정되었다.

[편집] 무신정권의 성립

무신정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2세기 들어 문벌 귀족과 측근 세력 간에 대립이 치열해지기 시작해 정치가 혼란스러워지게 되었다. 이러한 때에 평소 문신들만 우대받는 것에 불만이 고조되었던 무신들은 정중부, 이의방 등을 중심으로 1170년에 정변을 일으켜 다수의 문신들을 죽이고 의종을 폐하여 거제도로 귀양 보낸 후 허수아비 임금인 명종을 내세워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를 무신정변이라고 부른다.

무신정변 이후 무신들은 조정의 주요 관직들을 모두 독점하고 부를 늘려갔으며, 저마다 사병을 길러 서로 권력을 뺏고 빼앗기는 쟁탈전을 벌였다. 이 때문에 중앙 정부의 통제력은 갈수록 약화되어갔고 백성들에 대한 수탈은 더욱 심해져 여러 차례 봉기가 일어났다.

또 이러한 지배체제에 대한 반발적 운동이 무신 상호간의 상극, 각 지방의 농민 및 노비의 반란이란 형태를 띠고 일어났다. 이리하여 고려는 혼란 속에 휩싸이게 되었다.

1196년에 장군 최충헌과 그의 아우 최충수가 이의민을 살해하여 정권을 독점했다. 이리하여 최충헌 일대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최씨 정권의 기초는 그의 아들 최우(崔瑀)에 이르러 더욱 강화되어 무인정권의 기구가 정비되기에 이르렀다.

최우에 의해 최씨 정권이 더욱 강화된 결과 정방(政房)·서방(書房)이 설치되고 최충헌이 조직한 도방은 더욱 확대되었다. 최우는 또한 교정도감을 존속시켜 권신(權臣)의 막부로 삼았으며, 이에 따라 교정별감의 관직도 역대 권신의 필수직이 되었다.

[편집] 농민과 노비의 난

의종 때의 사치와 유락(遊樂)은 재정의 파탄을 가져왔고, 이는 농민 수탈의 강화를 초래했다. 이에 농민들은 신분 해방과 지배층의 압박·수탈에 항거하기 위하여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이리하여 12세기 초부터 집단적인 도적이 되어 산발적으로 각지를 소란케 하던 유민들은 무신정변을 전후하여 전국에서 벌떼처럼 일어났다.

1172년(명종 2년) 평안도 등지에서 지방관의 횡포에 분격하여 반란이 일어났고, 그 뒤 묘향산을 근거로 조위총(趙位寵)의 남은 무리가 농민들의 호응을 받아 반란을 계속하였다.

남쪽의 반란은 1176년(명종 7년) 공주 명학소(鳴鶴所)에서 망이·망소이가 난을 일으킴에 이르러 크게 번져갔다. 경상도에서는 손청(孫淸)과 이광(李光) 등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1182년(명종 12년) 전주에서 군인과 관노(官奴)들이 난을 일으켰다. 이러한 초기 반란은 대체로 자연 발생적인 것으로, 지방관이나 향리들의 억압에 반항하여 농민이나 군인 혹은 노비들이 일으킨 것이었다. 그들의 목적은 부당한 압박의 제거와 신분 해방 등이었으나 아직은 개별적인 요구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1193년(명종 23년) 김사미·효심의 난에서부터 반란군은 연합 전선을 펴며, 지속적인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리하여 명주(溟州, 강릉)의 농민 반란군은 동경(東京, 경주)의 반란군과 합세하였고, 진주(晋州)의 노비 반란군은 합주(陜州, 합천)의 부곡 반란군과 연합하여 공동 전선을 폈다. 또 신라 부흥을 외치며 일어난 동경의 반란군은 운문(雲門)·울진(蔚珍)·초전(草田) 등 각지의 반란군과 연합하였다. 경상도 일대에는 서로 밀접한 연락을 가진 반란군의 연합 전선이 이루어져 10여 년간 세력을 떨쳤다. 이러한 반란은 지방뿐만 아니라 개경에서도 일어났다.

1198년(신종 1년)에 일어난 만적의 난은, 신분 해방은 물론 더 나아가서 정권 탈취를 위해 계획된 것이었다. 이들 반란은 모두 진압되었으나 이들의 주장은 정책에 반영되었다.

[편집] 몽골과의 전쟁

이 부분의 본문은 고려-몽골 전쟁입니다.
고려의 대몽항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3세기 초 오랫동안 부족 단위로 유목 생활을 하던 몽골족이 통일된 국가를 형성하면서 금나라를 공격하여 북중국을 점령하였다.

이 때 금나라의 예하에 있던 거란족의 일부가 몽골에 쫓겨 고려로 침입해 왔다. 고려는 이들을 반격하여 강동성에서 포위하였고, 거란족을 추격해 온 몽골 및 두만장 유역에 있던 동진국의 군대와 연합하여 거란족을 토벌하였다. 이후 몽골은 자신들이 거란족을 몰아내 준 은인이라고 내세우면서 지나친 공물을 요구해 왔다.

마침 고려에 왔던 몽골 사신 저고여가 피살된 것을 구실로 몽골군이 침입해 왔는데(1231년), 이른바 고려-몽고 전쟁의 시작이었다. 의주를 점령한 몽골군은 귀주성에서 박서의 저항에 부딪히자 길을 돌려 개경을 포위하였다. 이에 고려는 몽골의 요구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몽골군도 큰 소득 없이 물러갔다.

그러나 당시 집권자인 최우는 몽골의 조공 요구와 간섭에 반발하여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고 방비를 강화하였다. 이에 몽골군이 다시 침입해 왔으나 처인성 전투 에서 장수 살리타김윤후가 이끄는 민병과 승병에 의해 사살되자 퇴각하였다. 이후 고려는 7차에 걸친 몽골 침략을 끈질기게 막아 내며, 약 30년간의 장기 항전에 들어갔다.

한편, 지배층들은 부처의 힘으로 외적을 방어하겠다는 마음으로 팔만대장경을 조판하였다.

강화도의 고려 조정은 수로를 통하여 조세를 걷어 들여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장기간의 전쟁으로 국토는 황폐해지고 수많은 문화재가 소실되었다.

이에 문신들은 몽골와의 강화를 주장했다. 문신들은 외세를 이용하여 무인세력을 견제하려고 한 것이다. 결국 최씨 정권이 무너지고, 김준(金俊)·임연(林衍) 등 무인들의 반대도 노골화하였으나 1270년 개경 환도와 더불어 몽골과 강화를 맺고 전쟁은 끝이 났다.

그러나 고려 조정이 개경으로 환도하자 대몽 항쟁에 앞장섰던 삼별초는 배중손의 지휘 아래 반기를 들었다. 이들은 장기 항전을 계획하고 진도로 옮겨 저항하였고, 여몽 연합군의 공격으로 진도가 함락되자 다시 제주도로 가서 김통정의 지휘 아래 계속 항쟁하였다.[13]

[편집] 원의 내정 간섭

이 부분의 본문은 원의 간섭기입니다.

원나라의 침략을 받은 고려는 약 30년 동안 항전을 벌였으나 결국 강화가 성립되었다. 몽골과의 항전을 주도하던 최씨 무신정권은 붕괴되었다. 이와 함께 왕정이 복고되었지만, 고려는 몽골의 정치적 간섭을 받게 되었다.

고려는 원나라와의 강화 이후에 많은 시련을 겪어야 했으니, 특히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에 걸친 일본 정벌은 고려에 막대한 피해를 끼쳤다. 그 후 고려 왕실은 원 왕실과의 결혼정책을 취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려 했으며, 그 결과 고려에는 몽골의 풍속이 많이 들어왔다. 또한 제주도에는 몽골에 대한 항쟁을 계속하던 삼별초를 제거한 뒤 탐라총관부를 설치하고 목마장을 경영하였다.

고려 임금은 몽골 공주와 결혼하여 몽골 황제의 부마가 되었고, 황실의 호칭과 격이 제국에서 제후국으로 것으로 격하되었다. 아울러 관제도 개편되었으며 역시 격이 낮추어졌다. 한편 원은 일본 공략을 목적으로 설치한 정동행성(征東行省)을 통하여 고려의 내정에 간섭하려 했으며, 또 고려의 영토 일부를 직속령(直屬領)으로 하였다. 곧 화주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여 철령 이북의 땅을 빼앗았으며, 자비령 이북의 땅도 차지하여 서경에 동녕부를 설치하였다. 원의 고려에 대한 경제적 요구도 고려의 농민에게 커다란 부담을 지웠다. 또 원은 남만주 일대를 관할하기 위해 충선왕(忠宣王)을 심양왕(瀋陽王)에 봉하고 후에 그의 후계자를 이용하여 고려를 견제하는 정책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고려는 이러한 원의 정치·경제적 간섭과 요구에도 끝내 독립왕국의 지위를 유지했고 이에 완강히 대립했다.

오랜 전쟁이 끝나고 사회가 변화·안정되면서 새로운 지배 세력이 등장하였다. 이러한 여러 변화는 지배 체제의 문란을 초래했고, 이것은 또한 사회·경제면에서 새로운 양상으로 나타났다. 농장(農莊)이 확대됨에 따라 국가의 공전(公田)이 침식되고 이에 따라서 국가재정의 곤궁과 궁핍이 초래되었다. 이때 권문세족이 등장하는데, 고려 전기부터 있던 문벌귀족 일부와 무신 집권기에 성장한 가문, 그리고 몽골어 통역관으로 출세하는 등 몽골과의 친선 관계를 통해 새로 등장한 가문으로 구성되었다. 권문세족은 권력을 앞세워 민중의 토지를 빼앗아 광대한 농장을 만들고 양민을 억압하여 노비로 삼는 등 사회 모순을 다시 격화시켜 고려의 정치는 비정상적으로 운영되었다.

권문세족의 불법행위로 말미암아 피해를 입은 일반 백성들은 살던 곳을 떠나 떠도는 신세가 되었고, 이것은 국가의 통치질서를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편집] 신진 사대부의 성장

고려 후기에는 지배질서의 문란을 틈타 귀족들의 사전(私田)이 점차 확대되어 전시과(田柴科)의 붕괴를 가져왔다. 사전(私田)은 무인정권이 타도된 뒤에 더욱 진전되어 갔던 것으로 농장(農莊)이라고도 한다. 농장의 경작은 전호(佃戶)나 노비(奴婢)가 담당하였다. 농장의 증대는 국가 재정을 고갈케 했고, 그 결과 관리의 녹봉(祿俸)이 폐지되었다. 이에 농장을 가지지 못한 신진 사대부 관리들은 권문세가에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무인정권으로 말미암아 귀족정치가 붕괴된 이후에 학문적인 교양을 갖추었으며 정치 실무에도 능한 사대부(士大夫)들이 등장했다. 이들의 사회적 진출은 고려의 정치를 변화시켰다.

권문세가들의 세력은 원나라의 강대한 세력을 뒷받침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원이 점차 쇠퇴할 즈음 즉위한 공민왕(恭愍王)의 개혁으로 대외적으로는 반원정치(反元政治), 대내적으로는 권문세가의 억압이라는 두 가지 정책이 채택되었다. 공민왕은 신돈(辛旽)을 등용하여 국정을 관할하게 하였다. 신돈은 이공수(李公遂) 등 권문 출신을 축출하고, 문벌이 변변하지 못한 자를 등용하였다. 또한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권문세가의 경제적 기반을 박탈하였다. 이러한 개혁은 권문세가의 반대로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나, 신진 사대부의 진출을 용이하게 하였다.

[편집] 고려 말 개혁정치와 멸망

신돈이 제거되고 공민왕이 시해되는 등공민왕 때의 개혁 노력이 실패하자 정치기강이 문란해지고,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지는 등 고려 사회의 모순은 더욱 심화되었다.

권신(權臣)인 이인임(李仁任)이 10세의 우왕(禑王)을 옹립함으로써(1374년), 권력은 다시 권문세가의 손에 들어갔다. 이인임 일파는 신흥 사대부들을 억압하고 노골적으로 토지겸병을 자행하였다. 반원정책도 수정되어, 원나라와 명나라에 대한 등거리 외교가 추구되었다.

한편 14세기 이후 왜구가 도처에서 잔혹하게 노략질을 하여 세곡(稅穀) 수송망인 조운(漕運)까지 마비시킬 정도가 되자 1377년(우왕 3년)에 최무선(崔茂宣)의 노력으로 화통도감이 설치되어 화포가 제작되었다. 1380년(우왕 6년)에는 금강에 침입해 온 왜구 5백여 척의 배를 화포공격으로 모두 불태워 퇴로를 차단하였고 내륙으로 침투한 외구들도 이성계(李成桂) 등이 완전 소탕하였다. 또한 1389년(창왕 원년)에는 박위(朴葳)가 이끄는 고려군이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하였다.

1388년(우왕 14년) 음력 1월에는 악명 높은 권문세가인 이인임이 대대적으로 숙청되었다. 이 숙청은 권문세가 출신이지만 청렴하고 강직했던 최영(崔瑩)이 우왕과 상의하여 집행하였고, 신흥세력인 이성계 장군이 힘을 더하였다. 이로써 권문세가의 기세가 꺾이고 신흥 사대부들이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미온적인 정책을 추진하던 최영과 적극적인 개혁을 원하는 신흥 사대부 간에는 틈이 있었다.

같은 해에 명나라가 철령위(鐵嶺衛) 설치를 빌미로 쌍성총관부 지역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자 최영은 명나라의 요동 정벌을 추진하였다. 이성계는 반대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원정군을 이끌고 출병한 이성계는 위화도(威化島)에서 군사를 개경으로 돌려 최영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1388년). 요동 정벌은 중도에 그쳤으나, 명나라의 철령위 설치는 취소되었다.

이성계의 집권 후 신흥 사대부들은 권문세가나 사원이 보유한 농장을 몰수하기 위해 사전(私田)개혁을 추진하였다. 반발도 적지는 않았으나 이성계 일파가 우왕에 이어 창왕마저 폐위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옹립하자(1389), 정치는 완전히 신흥 사대부가 주도하였다. 사전 개혁으로 국가재정이 확충되고, 관료들에게도 과전(科田)이 지급될 수 있었다. 공양왕 3년 현직관리들을 중심으로 수조지인 과전을 분급하는 과전법(科田法)이 공포되었다. 신흥 사대부들은 점차 개혁을 확대하였고, 마침내 이성계를 왕으로 옹립함으로써 고려에서 조선(朝鮮)으로 왕조가 바뀌게 되었다.

[편집] 고려의 정치

고려는 새로운 통일 왕조로서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고려의 성립은 고대 사회에서 중세 사회로 이행하는 한국사의 내재적 발전을 의미한다.[14] 또한 외세의 도움 없이 한민족이 단결하여 세운 최초의 진정한 통일 국가였다. 신라말의 6두품 출신 지식인과 호족을 중심으로 성립한 고려는 골품 위주의 신라 사회보다 개방적이었고, 통치 체제도 과거제를 실시하는 등 효율성과 합리성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정비되었다. 고려 전기는 사상적으로 유교 정치 이념을 수용한 중앙집권적 귀족정치사회였다.

고려 시대는 거란과 몽고, 홍건적, 왜 등 외부의 침입이 많았던 시기였으나, 줄기찬 항쟁으로 극복하여 자주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12세기 후반에 귀족과 문신 위주 정치에 대한 반발로 무신들이 일으킨 무신정변은 종전의 문신 귀족 중심의 사회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어 신분이 낮은 사람도 정치적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이후, 무신 집권기와 원나라 간섭기를 지나 고려 후기에 이르러서는 새롭게 성장한 신진 사대부를 중심으로 성리학이 수용되어 합리적이고 민본적인 정치 이념이 성립되었고, 이에 따른 사회 개혁이 진전되었다.

[편집] 고려의 경제

고려는 후삼국 시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전시과 제도를 만드는 등 토지 제도를 정비하여 통치 체제의 토대를 확립하였다. 또, 수취 체제를 정비하면서 토지와 인구를 파악하기 위하여 양전 사업을 실시하고 호적을 작성하였다. 아울러 국가가 주도하여 산업을 재편하면서 경작지를 확대시키고, 상업과 수공업의 체제를 확립하여 안정된 경제 기반을 확보하였다.

농업에서는 기술의 발달로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었고, 상업은 시전을 중심으로 도시 상업이 발달하면서 점차 지방에서도 상업 활동이 증가하였다. 수공업도 관청 수공업 중심에서 점차 사원이나 농민을 중심으로한 민간 수공업을 중심으로 발전해 갔다.

[편집] 고려의 사회

고려의 사회 신분은 귀족, 중류층, 양민, 천민으로 구성되었다. 고려 지배층의 핵심은 귀족이었다. 신분은 세습되는 것이 원칙이었고, 각 신분에는 그에 따른 역이 부과되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는데, 향리로부터 문반직에 오르는 경우와 군인이 군공을 쌓아 무반으로 출세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백성의 대부분을 이루는 양민은 군현에 거주하는 농민으로, 조세, 공납, 역을 부담하였다. 향, 부곡, 소 같은 특수 행정 구역에 거주하는 백성은 조세 부담에 있어서 군현민보다 차별받았으나, 고려 후기 이후 특수 행정 구역은 일반 군현으로 바뀌어 갔다. 흉년이나 재해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국가는 의창과 상평창을 설치하고, 여러 가지 사회복지정책을 실시하였다.

[편집] 고려의 문화

고려 시대에 해당하는 중세 문화는 고대 문화의 기반 위에서 조상들의 노력과 슬기가 보태져 새로운 양상을 보였다.

유교가 정치 이념으로 채택, 적용됨으로써 유교에 대한 인식이 확대 되었으며, 후기에는 성리학도 전래 되었다. 불교는 그 저변이 확대되어 생활 전반에 영향을 끼쳤다. 이런 가운데 불교 사상이 심화되고, 교종과 선종의 통합운동이 꾸준히 추진되었다.

중세의 예술은 귀족 중심의 우아하고 세련된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건축과 조각에서는 고대의 성격을 벗어나 중세적 양식을 창출하였으며, 청자와 인쇄술은 세계적인 수준을 자랑하고 있다. 그림과 문학에서도 중세의 품격 높은 멋을 찾아 볼 수 있다.

[편집] 조선

이 부분의 본문은 조선입니다.

조선시대는 근세에 해당된다.[15] 조선시대는 전기·후기가 아닌 초기·중기·후기로 나뉘어지기도 한다.

[편집] 역사

[편집] 전기

[편집] 개국과 왕자의 난
태조 이성계의 영정.

1392년 이성계의 5남인 이방원정몽주를 제거하고 그해 음력 7월 17일 개경의 수창궁(壽昌宮)에서 고려 공양왕의 왕위를 물려받아 새 왕조를 개국하여 태조가 되었다.

1393년 음력 2월 15일에는 나라의 이름을 고려에서 조선(朝鮮)으로 고치고 1394년 음력 1월에는 서울로 천도하였다. 또한 법제를 개혁하여 나라의 기틀을 닦았다. 태조는 고려 때에 큰 폐단이 되었던 불교 대신 유교를 정치·교육의 근본이념으로 삼았다. 한편 명(明)에 대해서는 사대정책을 써서 국호를 고칠 때에도 명나라의 승인을 받았다. 따라서 서로 사신의 내왕이 잦았으며, 이를 통하여 조공(朝貢)·회사(回賜) 형식의 국가 간의 무역이 행하여졌는데, 이 두 정책은 조선의 근본정책으로서 계속 계승되었다.

태조는 8번째이자 막내 왕자의안대군 방석왕세자로 삼았으나 개국 당시 공이 컸던 5번째 왕자 정안대군 이방원은 이에 불만을 품고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1398년 이방원은 왕세자 방석과 7번째 왕자 무안대군 방번, 그리고 왕세자를 지지했던 정도전 일파를 살해했다. 그리고 생존해 있던 태조의 아들 중 가장 위인 2번째 왕자 영안대군 이방과에게 왕세자 자리를 양보하여 그해 음력 9월 태조는 왕위를 이방과에게 물려주었고, 이방과는 정종이 되었다.

그러나 왕위에 야심을 품고 있던 또다른 왕자 회안대군 방간박포와 공모하여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방간은 유배되고 박포는 처형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종은 정안대군 이방원을 왕세제로 삼고 음력 11월에 이방원이 등극하여 태종이 되었다.

[편집] 제도의 정비와 문화 융성

태종은 왕권을 강화하고 임금 중심의 통치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관료 제도를 정비하였다. 사병을 혁파했으며 양전 사업과 호구 조사를 통해, 조세 제도와 호적 제도를 개혁하였다. 그리고 도평의사사를 폐지하고 의정부를 설치하였고, 또한 왕실 외척과 공신 세력을 숙청하여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시켜 정치를 안정시켰다. 또 언론 기관인 사간원을 독립시켜 신하들을 견제하게 하였다.

다음 등극한 세종대왕은 학문·군사·과학·문화 등 모든 면에서 큰 업적을 이룩하였고 정치는 안정되어갔다. 이 시기에는 주자학이 국가 이데올로기로 정착하였으며, 고려 말에 들여온 면화가 보급되었다. 4군과 6진을 개척하여 국경선을 확정시켰으며, 화포 제작 및 조선 기술 발전 등을 통해 왜구의 약탈을 방지하였다. 또한 궁중 안에 정책 연구 기관인 집현전을 설치하여 학문을 진흥했다. 또한 한글을 창제하고 측우기금속활자를 개량하였으며 아악을 정리하였다. 개량된 금속활자로 여러 가지 책을 간행하기도 하였으며, 의서 편찬(《향약집성방》)을 통해서 의료 관계 개선이 집약적으로 이루어졌다.

세종의 맏아들 문종이 짧은 치세 뒤에 서거하고 문종의 아들 단종이 뒤를 이었으나 어린 나이에 보위에 오른 단종은 곧 병권을 장악한 수양대군에게 빼앗겼다. 세조는 아버지 세종이 채택한 의정부 서사제를 폐지하고, 조부 태종이 주창한 육조 직계제를 부활시켜 왕권을 더욱 강화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사육신을 비롯한 많은 신하가 숙청당하고 많은 학자를 양성하였던 집현전을 폐지하였다. 세조는 태종처럼 신하의 권력을 제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호패법을 다시 복원하고, 《동국통감》, 《국조보감》 등을 만들기도 하였다.

세조의 손자인 성종은 개국 이후의 문물 제도를 정비하였다. 성리학을 기반으로 유학을 장려하여 사라진 집현전의 기능을 담당한 홍문관을 설치하고, 수많은 역사책을 편찬했으며, 세종 때부터 이어온 법전 편찬 사업이였던 《경국대전》 의 편찬을 완성하였다. 성종은 《경국대전》의 편찬을 반포함으로써 조선 사회의 기본 통치 방향과 이념을 제시하였다. 또한 영남의 사림파를 등용하여 공신 세력인 훈구파를 견제하였다. 이로써 조선 왕조의 통치 체제가 확립되었다.

15세기 말부터 지방의 사림 세력이 정계에서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연산군의 거듭된 실정에 견디지 못해 사림파를 중심으로 일어난 중종 반정을 통해 중앙 정계에 대거 진출한 사림파는 명종 때 비로소 훈구파를 몰아내고 조정의 실권을 잡았다. 이 때부터 사림은 동인서인으로 나뉘어 붕당정치가 시작되었다.

[편집] 중기

그러나 시대가 내려오면서 제도의 결함이 드러나게 되고, 특히 지배계급의 경제적 기반인 토지제도의 문란에 따른 훈구 재상의 대토지 소유는 토지분배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신진 사류의 불만을 사게 되어, 여러 번에 걸쳐 사화라는 참극을 빚어냈다.

처음에는 신진 사류들이 빈번히 화를 당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지방에 내려가 학문에만 열중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선조 때에는 이들을 등용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사류들이 승리를 거둔 셈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류들 사이에 다시 대립이 생겨 자기 일파만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대대로 서로 싸우게 되니, 이를 당쟁이라 한다. 이렇게 되자 처음에는 지방 자제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세워진 서원이 나중에는 모두 넓은 토지를 소유하여 지방 세력의 중심을 이루고 끈덕진 당쟁의 기반이기도 하여 심한 폐단을 나타내었다.

[편집] 경제 체제의 해이

양반 관리들은 국가로부터 우선 과전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공신전·별사전(別賜田)을 받았는데, 이러한 것들은 결국 모두 세습되어 갔다. 게다가 양반 관리들은 또 매입(買入)·겸병(兼倂)·개간 등의 각종 방법으로 그들의 소유지를 확대시켰다. 그들은 특히 비옥한 삼남 지방의 넓은 공전(公田)을 침식하여 갔다. 직전법조차 폐지되자 그들의 토지에 대한 욕구는 농장(農莊)의 확대를 가져왔고, 따라서 토지를 잃고 유망(流亡)하는 농민의 증가는 점차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었다.

한편 양반 관리들의 사치를 위한 지방 특산물과 수공업제품의 공납(貢納)이나 진상 또한 농민들의 커다란 고통이었다. 더구나 이런 농민들의 고통을 이용한 방납까지 생겨 그 피해는 극심해져 있다. 이런 폐단을 개혁하기 위하여 이이(李珥)는 수미법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채용되지 않았다.

또 환곡 제도에 의하여 정부는 농민을 상대로 한 일종의 고리대를 하기도 했다. 환곡은 원래 의창이 담당하는 일이었으나 의창이 제 구실을 다하지 못하자 상평창에서는 이를 맡게 되었다. 이리하여 원래 농민 진휼정책(賑恤政策)에서 발단했던 환곡은 점차 변질되어 갔던 것이다.

특수직에 종사하는 직역(職役) 외에 양인에게 부과되는 신역(身役)은 주로 군역이었다. 그런데 이 군역 또한 신역의 포납화(布納化) 경향을 촉진하여 그 제도를 해체시켜 갔다. 초기에 있어서 군역의 대가로 바치는 포(布)는 상당히 고가(高價)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수포대역(收布代役)의 제(制)가 관행되면서 포납은 정남(丁男)에 대한 인두세(人頭稅)와 같이 되었으며, 평가도 절하되어 갔다. 그리하여 그 공정액은 당시 전세(田稅)의 약 3배에 해당하는 것으로 양인들에게는 극히 과중한 부담이 되었다.

이와 같은 과정을 겪으면서 원래의 신역은 붕괴되어 갔다. 이러한 결과로 농민들의 생활은 지극히 불안정하게 되었다. 많은 농민들이 유민(流民)이 된 관계로 농촌은 황폐하여 갔으며, 각지에는 도적의 무리가 횡행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자가 임꺽정이었다.

[편집] 정치 구도의 변화

중종1506년 음력 9월 2일, 연산군의 폭정에 반발한 성희안(成希顔), 박원종(朴元宗), 유순정(柳順汀)등이 일으킨 중종반정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다. 그래서 초반 중종의 왕권은 미약하였다. 중종은 왕권 강화보다는 왕권의 안정성을 이루는 데 주력하였는데, 그 방책으로 조광조갑자사화로 밀려났던 사림파를 중심으로 철저한 유교적 개혁정치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과격한 조광조의 개혁 정책은 보수적인 기득권층인 훈구 세력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을 뿐 아니라 그를 절대적으로 신임하고 지지하던 중종마저도 차츰 싫증을 내게 되었다.

특히 조광조의 반정 공신 명부 정리 작업(공신 명부에 올라온 공신들이 진짜 공을 세웠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으로 다수의 공신들이 명단에서 이름이 삭제되는 일이 벌어지자 훈구파들의 위기감은 극에 달한다. 결국 중종은 1519년 남곤심정 ,홍경주 와 계획해서 조광조를 비롯한 다수의 사림들을 실각시켰고, 조광조와 사림파는 죽음을 당하게 된다(기묘사화). 그 다음에는 외척 세력이 새로이 등장하여 중종의 치세 중기와 후기에는 외척 세력과 반정 공신들 간의 정권 다툼으로 인해 크고 작은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 정국이 편안할 날이 없었다.

1545년, 명종이 조선 13대 왕으로 등극하자 어머니 문정왕후대왕대비로서 수렴청정했다. 당시에는 어좌를 두고 파평 윤씨 일가의 당쟁이 극에 달하였는데 윤임을 중심으로 하는 대윤과 윤원형을 중심으로 하는 소윤이 세자경원대군을 내세웠다. 하지만 인종이 보위에 오른 지 1년 채 안 되어 승하를 한 후에 명종이 보위에 오른 후 대윤을 몰아내는 사건인 을사사화가 일어나 대윤 세력을 모두 숙청하고 그에 연루된 인명까지 피해를 입었다.

그 후부터 윤원형의 세력이 조정 내에서 활개를 쳤고 문정왕후의 극단정치가 시작됐다. 문정왕후는 당시 수많은 인명들을 사사함으로 인해 큰 질책을 느꼈던 문정왕후로서는 종교를 신앙하게 되었고 숭유배불을 중심으로한 유교 사회인 조선 최초로 불교의 승려인 보우판선교 양종사도 대선사라는 정2품 직책에 앉혀 불교 중흥에 힘썼고 도첩제를 실행해 승려를 뽑게 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이때 문정왕후는 수많은 질책과 비난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의지를 꺾지 않았다.

이 섭정시대는 1553년에 종결을 내렸으나 이미 정세는 문정왕후의 세력에 기울어 있었고, 문정왕후의 정치간섭이 이루어져 명종은 문정왕후가 죽기까지 자신의 의사대로 친정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선비가 죽어 주변에는 모두 소윤 대신들이 권력을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명종은 신하 앞에서도 임금으로서의 권한을 실행할 수 없었다. 약 12년간 이런 행위가 이루어졌으며 문정왕후도 쇠약해지고 있었다.

1565년 문정왕후의 죽음으로 정치는 안정을 되찾았고, 윤원형과 정경부인 정난정의 관직과 직위를 삭탈함으로써, 명종은 왕권을 펼칠 기회가 왔으나 기울던 조정은 이미 부패한 상태였다. 또한 명종 스스로도 어머니 문정왕후가 죽은 지 2년 만에 생을 달리하였다. 이 시기로 인해 조선의 정치 구도가 흐트러진 것은 사실이나, 이는 전적으로 사림들의 시각에서 비춰진 관점이므로 이러한 부정적인 시각을 완전히 수용하기는 어렵다.

1552년 왕위에 오른 선조이황, 이이 등 사림을 대거 중용하였다. 선조는 사림을 통해 자신의 취약한 권력 기반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또한 기묘사화 때 당쟁으로 억울하게 희생된 조광조를 비롯한 수많은 유학자들을 복권시켰으며, 훈구 대신인 남곤, 윤원형 등을 대역죄로 단죄하여 관작을 추탈하고 삭훈하여 민심을 안정시켰다. 그러나 후에 사림이 김효원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모인 동인심의겸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모인 서인으로 분리되어 붕당이 형성되자, 선조는 어느 한 쪽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하였고, 이에 따라 정국이 단번에 교체되는 일이 잦았다.

거듭되는 사화 속에서도 사림들은 서원과 향약을 토대로 발전하여 갔으며, 드디어 선조 때에는 재차 정치무대에 등장하였다. 그러나 이들 속에서 또다시 당쟁이 일어나게 되어 정쟁은 파노라마처럼 되풀이되었다. 당쟁의 발단은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 양파의 전랑직(詮郞職)을 에워싼 암투에서 비롯되었다. 이 양파의 대립 과정에서 동인과 서인이 생겼으니 일찍이 이준경(李浚慶)이 붕당의 징후가 보인다고 한 예언이 적중한 셈이다.

[편집] 외적의 침입
이 부분의 본문은 임진왜란, 병자호란입니다.

1592년, 일본열도를 통일하고 내부 갈등을 통합해야 할 필요를 느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철저한 준비 끝에 20만 병력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해 왔다. 이를 임진왜란이라고 한다. 미처 전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조선군은 대규모 조총 부대를 앞세운 일본군에 크게 고전하여 선조가 서울을 버리고 의주까지 피난을 가야 했다. 그러나 한 번도 패배하지 않고 일본 수군을 대파한 이순신이 지휘한 조선 수군에 의해 일본 육군은 보급이 끊기다시피 하여 곤란을 겪었고, 전국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조직된 의병들의 활약과 명나라의 지원으로 조선군은 7년만에 일본군을 몰아냈다.

선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광해군은 일본과 두 차례의 전쟁을 치른 후 피폐해진 국토를 정비하기 위해 사림 정치를 배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성곽과 무기를 수리하고, 군사들을 매일 훈련시켜 국방을 강화하였고, 호적을 다시 정비했으며, 전쟁 기간에 불에 탄 사고를 재정비했다. 또한 실리를 중시한 외교를 펼쳐, 새롭게 떠오르는 청나라와 망해가는 명나라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표방하였다. 그러나 광해군과 그를 지지하는 북인에 의해 정계에서 배제된 서인남인은 권력을 획책하기 위해 연합하여 광해군을 몰아내어 인조를 옹립하였다(인조반정). 사림파의 지지를 받고 즉위한 인조는 다시 명나라와의 친선 정책을 펼쳤고, 이에 자극받은 청나라는 1627년(정묘호란)과 1636년(병자호란) 두 번에 걸쳐 조선에 침입하였다. 조선은 이 전쟁에서 패하여 청나라에게 항복을 선언하고 청나라를 대국으로 섬기게 되었다.

전란이 계속되고, 붕당이 심해지는 이 시대에도 의학자 허준은 《동의보감》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 책은 1597년과 1608년에 발간했다. 이 책은 우리 나라의 동의학을 기준으로 하여, 대부분 의학서를 참고하고 만들었다. 다양한 약재와 치료법을 소개하고있다.

한편 이와 같이 조선사회 자체의 모순과 분열 대립에 곁들여, 7년에 걸친 왜란과 호란(정묘·병자)으로 대대적인 침략·파괴 행위로 그 피해는 막심하여 국토는 황폐해지고, 국가 재정은 고갈되었으며, 백성들은 비참한 생활을 강요당하였다. 이렇게 파탄에 직면한 사회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는 병제(兵制)와 세제(稅制)의 개편이 불가피하게 되었으며, 한편으로는 백성들에 대한 부당한 과세(課稅)가 성행하였는데 이로 인해 농촌사회는 극도로 황폐하게 되었으며 정부에 대한 반항의식을 조장시켰다.

[편집] 북벌론과 북학론의 대두

병자호란이 종식되어 청나라와 군신 관계를 맺게 된 조선은 겉으로는 청나라에 사대하였으나, 실제로는 은밀하게 국방 강화에 힘을 기울이면서 청나라에게 복수할 생각으로 북벌을 준비하고 있었다. 효종은 “청나라를 정벌하여 문화대국인 조선이 문화가 낮은 오랑캐인 청나라에게 당한 수치를 씻자” 며 청나라를 혐오하여 강력히 배척한 송시열, 이완 등 주전파를 중용하여 군대를 대량 양성하고 성곽을 수리하는 등 북벌을 준비했다. 이러한 북벌론(北伐論)은 1659년 출병 직전 효종이 서거하자 사실상 일단락되었다. 효종 이후에도 남인을 중심으로 청나라의 정세 변화를 살펴봐서 북벌 움직임이 다시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그것은 효종 때와는 달리 일시적인 현상이었다. 현실적으로 봤을 때 북벌은 어렵다는 판단하에 계속 보류되어 결국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이후 북벌론은 병자호란 때에 자신들이 자초한 패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던 서인들이 책임을 회피하고 남인들의 정계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자신들의 집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었지만, 전란 후의 민심을 수습하고 국방력을 강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외부 세계와의 고립을 초래하여 고립화의 길을 걸어 조선 사회의 낙후를 가속화하였다.

그에 반면, 당시 청나라는 중국 대륙을 장악한 뒤 국력이 크게 신장되었으며, 화포·자명종·만국지도 등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문화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이에 따라 조선에서는 청나라를 무조건 배척하지만 말고 이로운 것은 적극적으로 배우자는 북학론(北學論)이 대두되었다.

[편집] 후기

[편집] 붕당 정치의 변질
이 부분의 본문은 붕당입니다.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들의 정치력은 근본적으로 지주제에 토대하였기에, 그들의 개혁안은 일정한 한계를 지니는 것이었다. 따라서 서인 정권은 기층 사회의 움직임에 미봉적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었다. 서인 정권의 위기는 겉으로는 남인측의 도전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서인이 주도하는 정국에서도 남인은 꾸준히 진출하였다. 특히 현종의 스승이었던 윤선도가 남인 계열로서, 오랫동안 야당적 입장에 머물러온 남인의 지위를 부상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남인들은 서인 정권이 추구한 개혁의 부당성과 북벌 운동의 무모함을 지적하면서 예송논쟁(禮訟論爭)을 일으켜 서인들과 정치적으로 대립하였다. 더구나 예송논쟁이 정체(政體)문제와 관련을 가지면서 두 정파 간에 심각한 갈등을 자아냈다. 예론을 중심으로 한 붕당 사이의 대립은 예(禮)의 문제가 당시에는 사회질서의 기본적인 규범이었으므로 붕당정치의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예송논쟁은 효종인선왕후의 국상(國喪)에서 자의왕대비의 복제(服制)문제를 계기로 일어났는데, 차자로서 왕통을 이은 효종을 적통으로 보느냐 안 보느냐의 시비였다. 1659년(현종 원년)의 1차 논쟁에서는 서인의 주장이, 1674년(숙종 원년)의 2차 논쟁에서는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짐으로써 남인의 정치적 지위가 신장되었다.

그러나 경신환국에 의하여 1680년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 정권이 다시 수립되면서 붕당 사이의 대립양상은 크게 달라져갔다. 즉 다시 집권한 서인은 철저한 탄압으로 남인의 재기를 막았다. 이때, 서인은 아예 남인을 완전히 축출하자는 노론과, 남인과의 화해를 주장하는 소론으로 분열되었으며, 두 세력 사이의 대립으로 정국의 반전이 거듭되었다. 이로부터 견제와 균형, 공론에 토대한 붕당정치의 기본 원리는 무너지고, 상대 세력의 존재 자체를 아예 인정하려 들지않는 일당전제화의 추세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상대당에 대한 보복으로 사사(賜死)가 빈번하였고, 정쟁의 초점이 왕위 계승 문제로 비화되는 등 붕당정치가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하였다.

이 때 숙종은 상황에 따라 한 당파를 일거에 내몰고 상대 당파에 정권을 모두 위임하는 편당적인 인사 관리를 하는 환국을 일으켜 정국을 주도하는 붕당과 견제하는 붕당을 자주 교체하였다. 숙종의 잦은 환국은 경종 때에 이르는 동안에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이 대립하는 지경까지 발전하였고, 경종 때에는 왕세제가 된 연잉군의 대리청정 문제로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동향은 사회 경제적 변화를 바탕으로 일어났다. 17세기 후반 이후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정치 집단 사이에서 상업적 이익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이를 독점하려는 경향이 커졌다. 정치적 쟁점도 예론과 같은 사상적인 문제여서 군사력과 경제력 확보에 필수적인 군영을 장악하는 것으로 옮겨갔다.

한편, 향촌 사회에서는 지주제와 신분제의 동요에 따라 사족 중심의 향촌 지배가 어렵게 되어 붕당 정치의 기반도 무너지게 되었다.

[편집] 탕평 정치의 전개
정조가 건설한 수원 화성.

영조가 즉위한 당시, 조정은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과 그들을 몰아내고 다시 집권하려는 소론으로 나뉘어져서, 서로를 죽고 죽이는 극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러한 당파 싸움에 영조는 넌더리를 낸 나머지 조정을 어지럽히는 당쟁을 타파하기 위해 노론과 소론의 온건파를 기용하는 한편, 통치 이념으로 탕평론을 채택하였다. 탕평이란 정치를 할 때 편과 당을 좇지 않고 지극히 중립적이고 신념에 따라 올바르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후 탕평책은 영조 때 정국 운영의 가장 큰 원칙이 되었다. 영조는 노론을 한 사람 기용하면 상대 자리에는 소론을 기용하는 쌍거호대(雙擧互對)를 실시하는 것으로 탕평책을 실천했다.

영조의 이러한 노력으로 탕평정치는 그의 손자인 정조에게로 이어진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과 이를 둘러싼 시파와 벽파 간의 갈등을 경험한 정조는 할아버지인 영조의 탕평정치 의지를 받들어 더욱 발전시켜 나갔는데, 그 주요 조치를 살펴보면 대신 한 사람이 정승을 고발하거나 풍문에 의거하여 탄핵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는 당시 대간을 이용하여 상대당의 수뇌를 공격하는 파당의 전통적인 관행을 없애기 위한 조치였다. 또한 당시 붕당 조성의 주요 통로였던 인사권이 임금이 직접 개입함으로써 조정에서 당파의 영향력을 줄이고 임금과 정승들이 조정의 주도권을 확보해나갔다. 그리고 연좌법과 대역죄 적용 범위를 제한함으로써 대역죄를 빙자하여 다수의 상대당 인물을 일시에 탄핵하는 관행을 철폐시켰다. 뿐만 아니라 아예 조정에서 대신들이 당파를 지목하거나 당파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 자체를 금지함으로써 파당의식 자체를 없애고자 하였다.

또한 규장각을 붕당의 비대화를 막고 임금의 권력과 정책을 뒷받침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 기구로 육성하였다. 아울러 스스로 초월적 군주로 군림하면서 스승의 입장에서 신하들을 양성하고 재교육시키려 하였다. 특히, 신진 인물이나 중·하급 관리 가운데 능력 있는 자들을 재교육시키는 초계문신제(抄啓文臣制)를 시행하였다.[16]

[편집] 세도 정치의 전개

1800년, 정조가 갑작스럽게 서거하고 그의 어린 아들 순조가 즉위하자, 순조의 장인 김조순이 정권을 장악하여 안동 김씨 집안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이후 순조·헌종·철종 3대에 걸친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등 외척 세력의 세도 정치가 60여 년 동안 계속되었다. 영조와 정조의 탕평책으로 일시적으로 암흑기를 가졌던 당쟁과 일당독재체제는 정조의 뒤를 이어 어린 임금들이 연달아 등극함에 따라 절대적인 왕권이 사라지면서 특정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정치의 형태로 변질되었다. 이는 선조 이후 오랫동안 조선의 정치권력의 기본 구조였던 붕당정치가 완전히 붕괴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순조 때에 정권을 잡았던 안동 김씨 세력은 헌종이 즉위하면서 풍양 조씨 집안에게 잠시 권력을 내주었으나 철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정권을 잡아 세도를 떨쳤다. 60년간 이어진 세도정치의 영향으로 왕권은 한없이 나약해져갔고 백성들은 물론 왕족들마저도 안동 김씨의 눈치를 봐야 하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기형적인 정치 형태인 세도정치는 온갖 부정부패를 야기했는데 전정(田政)·군정(軍政)·환곡(還穀) 등 이른바 삼정(三政)의 문란이 그 대표적인 경우다.

외척들의 세도정치로 인한 사회적 혼란이 계속되자 이에 대항하는 민란이 여러 차례 일어났는데 이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순조 때의 홍경래의 난, 철종 때의 진주민란 등이다. 몰락한 양반홍경래의 지도하에 수많은 몰락한 농민들과 영세농들이 참가했다. 이들은 한때 청천강에서 의주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장악했으나 4개월 만에 관군에 의해 평정되었다. 홍경래의 난 이후에도 민란은 계속 이어져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도 정권의 탐학과 횡포는 날로 심해져 갔고 재난과 질병이 거듭되었다. 특히, 19세기에 들어와서는 이런 현상이 더욱 심해져 백성들의 생활은 그만큼 더 어려워져 갔다. 1820년의 전국적인 수해와 이듬해 콜레라의 만연으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비참한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 피해는 그 뒤 수년 동안 계속되었으며, 이에 따라 굶주려 떠도는 백성이 거리를 메울 정도였다.

이와 전후하여 천주교(天主敎)가 전래하였으나 박해를 당하였다.

[편집] 흥선대원군의 집권기

철종의 뒤를 이어 흥선군 이하응의 어린 둘째 아들이 순조의 양자로 하여금 왕위에 올라 고종이 되었다.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군은 대원군이 되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래서 정권을 잡자마자 가장 먼저 나라를 엉망으로 만든 세도 정권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민중들의 원망을 사고 있던 조세 제도를 개정하였다. 가장 말썽이 많던 환곡 제도를 사창제로 전환시켰고, 군역 제도를 고쳐 양반에게까지 군포를 부과하는 호포제를 실시하여 민심은 안정시키려 노력하였다. 또한 붕당의 온상으로 인식되어 온 사액서원을 제외하고 서원들을 대부분 철폐하여 유생들의 불만을 샀다. 나아가 왕권 강화의 일환으로 비변사를 폐지 수준으로 축소시켜,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을 회복시켰으며, 대전회통을 편찬하여 법전을 재정비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왕권을 바로 세워야 나라가 바로 선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재정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임진왜란 때 불타서 소실된 경복궁을 중건하는 데 재정을 투입하였다. 경복궁의 중건 외에도 의정부, 종묘, 종친부, 육조 이하 각 관서 및 도성, 그리고 북한산성의 수축도 함께 이루어졌다. 이로써 황폐해졌던 서울이 다시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으나, 그것을 위해 수많은 백성들이 세금과 강제 노동, 당백전으로 인한 엄청한 인플레이션에 큰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흥선대원군의 초상화

흥선대원군이 로마 가톨릭을 탄압하면서 프랑스인 신부들을 처형한 것을 구실 삼아 1866년, 프랑스가 군대를 파견해 강화도를 공격하였다. 프랑스는 조선에 대해 사과와 손해 배상, 그리고 통상을 요구하였다. 프랑스군은 강화도를 점령하고 서울로 진격하려 하였다. 그러나 조선군은 여러 곳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쳤고, 결국 프랑스군은 수많은 재물을 약탈한 뒤 철수하였다(병인양요). 이로부터 5년 뒤, 이번에는 미국이 조선을 침략하였다. 미국인들은 1866년 미국 상인이 대동강에서 행패를 부리다가 배가 불에 탄 사건을 추궁하였다. 그리고 사과와 통상 교섭을 요구하여 왔다. 흥선대원군은 이들의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결과 미군은 강화도를 공격하였고, 그들은 조선군의 끈질긴 저항에 못 이겨 결국 물러가고 말았다(신미양요). 미국과의 전쟁을 끝낸 후 ‘서양 오랑캐가 쳐들어왔는데, 싸우지 않으면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화친해야 하며,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넘기는 것’이라 적혀 있는 척화비(斥和碑)가 전국 각지에 세워졌다. 이후 강력한 쇄국 정책으로 서양과의 수교를 단호히 거부하여 흥선대원군의 집권 시절에는 외세가 감히 침범하지 못했다.

이러한 정책은 전통적인 통치 체제를 재정비하여 국가 기강을 바로잡고 민생을 안정시킴과 동시에 외세의 침략을 일시적으로 저지하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전통 체제 안의 개혁이라는 한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의 문호 개방을 늦추는 결과를 가져왔다.

[편집]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와 개항

1873년 음력 11월 고종이 친정을 선포하면서 10년간 정권을 쥐고 있던 흥선대원군이 실각하고 명성황후를 필두로 한 여흥 민씨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에 따라 자연스레 통상 개화론자들이 대두되면서 조선의 대외정책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1875년 음력 9월 20일 일본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조선에게 문호를 개방하라며 압박했다. 이에 대해 조선에서는 찬반 양론이 엇갈렸으나 결국 개항 찬성론자들의 입지가 강화되어 1876년 음력 2월 3일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여 문호를 개방하였다. 이어서 고종은 일본에 파견한 수신사 김홍집이 귀국할 때 가져온 《사의조선책략》이라는 책을 읽고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그에 따라 조선 조정은 부국강병을 목표로 개화파 인물을 등용하여 개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뒤이어 일본에 신사유람단을, 청나라에 영선사를 파견하였다.

조정에서는 개화정책을 전담하기 위한 기구인 통리기무아문을 두었고, 군사제도를 개혁하여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하였다. 1880년 음력 10월 11일 미국과 국교를 열었으며, 뒤이어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 서구 열강들과 외교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이들과 맺은 조약들은 모두 치외 법권을 규정하고 국내 산업에 대한 보호 조처를 거의 취할 수 없게 규정된 불평등 조약들이었다.

개화정책에 대하여 보수적인 유생층은 성리학적 전통질서를 지키고 외세를 배척하자는 위정척사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은 외세의 침략을 막으려는 반외세 자주 운동이었지만 전통적인 사회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여 시대의 흐름에 뒤떨어진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유생층 가운데서도 일부 혁신적 인사들은 유교 문화를 계승하면서 서양의 물질 문명을 부분적으로 수용하자는 동도서기론을 주장하며 개화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17]

[편집]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이 부분의 본문은 임오군란, 갑신정변입니다.

임오군란(壬午軍亂)은 1882년 음력 8월에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일본의 후원으로 조직한 신식군대인 별기군과 구식 군인에 대한 정부의 차별 대우, 봉급미 연체와 불량미 지급에 대한 불만 및 분노로 구 훈련도감 소속의 구식 군인들이 일으킨 항쟁이다. 처음에는 우발적이었으나, 나중에는 대원군의 지시를 받아 민씨 정권에 대항하면서 일본 세력의 배척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갑신정변(甲申政變)은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김옥균·박영효·홍영식 등이 청나라에 의존하려는 척족 중심의 수구당을 몰아내고, 개화정권을 수립하려 한 정변이다. 그러나 이 정변은 청나라의 개입으로 3일만에 무너졌으며, 일본에 지나치게 의존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기도 한다.

[편집] 갑오개혁
이 부분의 본문은 동학농민운동, 갑오개혁, 청일전쟁입니다.

조정의 개화 정책 추진과 유생층의 위정 척사 운동은 점점 격화되는 열강의 침략 경쟁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더욱이 근대 문물의 수용과 배상금 지불 등으로 국가 재정이 궁핍해져 농민에 대한 수탈이 심해졌고, 일본의 경제적 침투로 농촌경제가 파탄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농민층의 불안과 불만이 팽배해졌고, 정치·사회에 대한 의식이 급성장한 농촌 지식인과 농민들 사이에 사회 변혁의 욕구가 높아졌다. 인간 평등과 사회 개혁을 주장한 동학은 당시 농민들의 변혁 요구에 맞는 것이었고, 농민들은 동학의 조직을 통하여 대규모의 세력을 모을 수 있었다.

전봉준을 중심으로 고부에서 봉기한 동학 농민군은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제폭구민(除暴救民)을 내세우고 전라도 일대를 공략한 다음 전주를 점령하였다(1894). 농민군은 조정에 폐정 개혁 12개조를 건의하고, 산발적으로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며 개혁을 실천해나갔다. 그러나 조정의 개혁이 부진하고 일본의 침략과 내정 간섭이 강화되자 농민군은 외세를 몰아낼 목적으로 다시 봉기하여 서울로 북상하였다. 먼저 공주를 점령하려 한 농민군은 우금치에서 근대 무기로 무장한 관군과 일본군에게 패하고 지도부가 체포되면서 동학 농민 운동은 좌절되었다.[18]

한편 조선 정부가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였다는 명분으로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가 조선에 들어오고, 급기야 서로 무력 충돌을 일으키게 된다(→청일전쟁). 그 와중에 일본은 무력으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을 협박하여 친일적 개혁을 이루게 되는데, 이른바 갑오개혁이다.

[편집]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이 부분의 본문은 을미사변, 아관파천입니다.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지배권을 빼앗고, 요동반도를 할양받아 만주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였다(→시모노세키 조약). 이에 불안을 느낀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에 대한 삼국간섭을 시도하였다. 고종은 이에 미국, 러시아 등과 가까운 김윤식, 이범진 등으로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고 반일정책을 구체화하였다.

삼국간섭을 받은 일본은 요동 반도를 잃었고, 남하하는 러시아는 조선에 큰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는 흥선대원군을 옹립하여 조선에 친일 정권을 세우고자 일본군 수비대와 대륙낭인 등을 집합시켜 몰래 경복궁에 난입시킨 후 친러시아파인 명성황후를 암살하였다(→을미사변). 1895년 음력 8월에 일본의 강요에 따라 김홍집을 내각수반으로 하는 새로운 조정 내각이 구성된다. 이때 김홍집 내각의 개혁 정책 중 하나인 단발령은 전국에 있는 유생들과 백성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한편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미국인과 러시아인에게 목격되어 국제 문제가 되었다. 국제 사회의 비난 여론을 받고 일본 외무성은 명성황후 암살의 주동자인 미우라 공사 등을 소환하여 재판과 군법회의에 회부하였지만 증거 불충분임을 판시하고 전원 무죄를 선고하여 석방시켰다. 이에 조선에서는 반일 감정이 극도로 고조되었고, 위정척사를 주장하는 선비들의 주도 아래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하여 친일파와 일본의 상인 및 어인 등을 공격하고 일본군 수비대와 각지에서 교전하였다. 을미의병은 유인석, 김복한, 기우만, 이강년 등이 주도하였다. 일본군이 의병 토벌로 서울을 비우게 되자 고종은 1896년 2월 11일에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하였다.

[편집] 근대

한국사에서의 근대는 일반적으로 1863년 고종의 즉위와 흥선대원군 집권 후, 혹은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로 본다.

[편집] 대한제국

대한 제국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대한제국(大韓帝國)은 1897년(광무 원년) 10월 12일부터 1910년(융희 4년) 8월 29일까지 한반도와 인근의 도서와 해역을 통치하였던 제국이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韓日倂合條約)으로 일제(日帝)의 특별 행정 구역으로 들어가며 국권을 강탈당했다.

[편집] 일제강점기

이 부분의 본문은 일제강점기, 한국의 독립운동입니다.

일본 제국주의 세력(이하 일제)이 한반도를 강제적으로 점령하여 식민지로 삼은 시기로서, 제1기 무단 통치 시기, 제2기 문화 통치 시기, 제3기 민족 말살 통치 시기로 나뉜다.

[편집] 무단 통치 시기

조선을 영구히 통치하기 위해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고, 군대를 파견하여 의병 활동을 억누르고 국내의 저항 세력을 무단으로 통치한 시기이다. 언론, 집회, 출판, 결사의 자유 등의 기본권을 박탈하고, 독립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또, 헌병 경찰과 헌병 보조원을 전국에 배치하고 즉결 처분권을 부여하여 한국인을 태형에 처하기도 했다. 토지조사령을 공포하여 식민지 수탈을 시작하였고, 회사령을 공포하여 국내의 자본 세력을 억압하고 일본 자본 세력의 편의를 봐주었다. 이 시기의 한국인 노동자는 극악한 환경과 저임금, 민족적 차별까지 받으며 혹사되었다.

[편집] 문화 통치 시기

3·1 운동이 발발하자 일제는 무단통치로는 조선을 효과적으로 지배할 수 없다는 판단하에, 친일파를 육성하기 위한, 이른바 '문화통치'을 시행했다. 이 문화통치는 가혹한 식민 통치를 은폐하려는 술책에 불과했다. 헌병 경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전환하였지만, 경찰의 수와 장비는 오히려 증강되고, 독립운동가를 색출하기위한 '고등경찰제'를 도입하여, 더욱더 일제의 행태는 더욱 악랄해졌다.

그리고 일제는 무단통치시기에 금지되었던 언론`출판의 자유를 일부 허용하여 신문 발행을 허가하였다. 그러나 신문에 대한 검열을 통해 삭제, 정간, 폐간을 자행하였다. 또한 결사의 자유를 일부 허용하여 단체의 설립을 일부 인정하였으나, 1925년 치안유지법을 제정하여 조선인을 기만하였다.
또 조선인의 교육의 기회를 늘리겠다고 선전하였다. 그러나 식민지 노동력 양성을 위한 산학과 같은 초급 학문이나 기술 교육만을 허용하였고, 민립 대학 설립을 위한 운동도 탄압하였다. 그리고 지방 의회에 일부 조선인 참여를 허용하여 참정권을 일부 인정하였으나, 그에 참가한 세력은 친일파나 대지주, 자본가만 참여하여, 선거권을 제약하였고, 그 기관은 실권없는 자문 기관에 불과하여 조선인을 기만하였다.

즉, 일제는 조선인을 기만하고 식민통치를 은폐하려는 목적으로, 민족의 분열과 이간을 조장하였다. 결국, 실력양성운동을 주장하던 민족주의세력 내에서 자치론자가 등장하여, 일제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하였다.

[편집] 민족 말살 통치

20년대 대공황에 시달리던 일제는 그 타개책으로 식민지 확보를 통한 블록경제를 선택하였다. 그에 따라 1930년대 일제는 대륙침략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한반도를 대륙 침략의 병참기지로 삼았다. 또한, 1941년 일제가 미국진주만선전 포고도 없이 불법적으로 기습함으로써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였다.

조선에서는 일제의 강제 징용으로 한국인 노동력이 착취되었고, 학도 지원병 제도, 징병 제도 등을 실시하여 수많은 젊은이를 전쟁에 동원하였다. 또, 젊은 여성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강제 동원하여 군수 공장 등에서 혹사시켰으며, 그 중 일부는 전선으로 끌고 가 일본군 위안부로 삼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렇게 끌려간 조선인들 중에는 뜻하지 않게 전범으로 몰려 전쟁이 끝난 후 사형을 당하는 등 억울하게 처벌받는 사람도 많았다.

일제강점기는 제국주의 일본이 연합군에게 패망함으로써 1945년 8월 15일 종료되었다.

[편집] 현대

[편집] 대한민국

이 부분의 본문은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

[편집] 개관

한국은 태평양 전쟁에서의 연합군의 승리로 1945년 8월광복을 맞이하였다.

그런데, 한반도 분할 정책과 좌∙우익 세력의 갈등으로 인해 남북이 분단되어 통일 국가를 세우지 못하였다. 특히, 6∙25 전쟁을 겪으면서 분단은 더욱 고착화되고 기반시설은 대부분 초토화되어 남북 사이의 상호 불신이 깊어 갔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한 참상을 복구하고 1960년대 이후 유례없는 고속 성장을 이룩하며 북조선의 경제 수준을 추월하는 등 대한민국은 세계적인 경제 대국으로 변모하였다.

광복 후에 대한민국은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경제 발전을 이룩하였는데, 이는 커다란 사회 변화를 가져왔다. 농업 사회에서 공업 사회로, 다시 정보화 사회로 발전하면서 사람들의 생활양식과 가치관도 많이 변하였다. 4∙19 혁명5∙18 광주 민주화 운동, 6월 항쟁 등 수많은 민주화 운동으로 권위주의적 정치 문화가 점차 극복되고, 사회의 민주화도 꾸준히 이루어 졌다.

광복 이후에는 학문 활동이 활발해지고 교육의 기회가 크게 확대되었다. 그러나 미국을 비롯한 서구 문화가 급속하게 유입되면서 가치관의 혼란과 전통문화의 위축 현상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민주화와 더불어 문화의 다양화가 촉진되고, 반도체 등 몇몇 과학 기술 분야는 세계적인 수준까지 도달하였다.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19]

[편집] 역사

이 부분의 본문은 군정기입니다.

한국인은 1919년 3월 1일3·1 운동을 계기로 국내외에서 독립을 위한 운동과 무장투쟁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여 1919년 4월 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미국에 무조건 항복을 함으로써 독립을 되찾게 되었다.

즉, 광복 이후 정치적 혼란과 무질서 속에 있던 한국은 얄타회담에서 이루어진 비공식적 합의에 따라 소비에트 연방과 미국의 영향권하에 들어가, 한반도의 위도 38도선을 경계로 북쪽에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소련)의 영향 밑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남쪽에는 미국의 원조 아래 대한민국이 국가적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38선 이북에서는 소비에트 연방군이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이전까지, 38선 이남에서는 미국군이 1945년 9월 8일부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까지 한반도를 다스린 기간을 군정기라 부른다. 이 기간 동안 남한에서는 수많은 정치 단체들이 조직되어 이합 집산하였고, 제주 4·3 사건 등 좌우익이 심각하게 대립하였다. 38선 이북에서는 1946년 2월 8일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가 구성되어 사실상 정부의 구실을 하였다.

1947년 국제연합에서 제안한 남북한 총선 실시가 북한에 의해 거부되어, 1948년 남한만의 총선을 거쳐 제헌국회와 대통령이 선출되었으며, 국제연합은 대한민국만을 합법정부로 인정하였다.

북한에서는 공산주의 지배 체제를 확고히 한 뒤에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편집] 제1공화국
이 부분의 본문은 제1공화국입니다.

제1공화국은 1948년 7월 17일에 제정된 헌법에 의해 같은 해 8월 13일에 수립되어 1960년 4·19 혁명으로 붕괴되기 전까지의 시기로 대한민국 최초의 공화 헌정 체제이다. 집권 여당은 자유당이다. 1948년 국제 연합(UN)의 결의에 따라 남한에서만 5·10 총선거가 실시되어 대한민국 제헌 국회가 구성되고 자유민주주의 공화국 체제의 헌법이 제정되었다. 이어 8월 15일 대한민국 제헌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이 정부를 구성하고 대한민국(남한)의 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하였다. 건국 초기에는 국내 질서 확립과 일제 강점기의 잔재 청산이 시급한 과제였다. 그런 이유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만들었으나 무장경찰대에 의해 불법적인 방법으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는 해산되었다. 이로써 대한민국(남한)은 일제 강점기 잔재 청산에 실패하였다.

정부 수립을 전후 한 시기에 좌익우익 간의 대립이 격화되어 제주 4·3 항쟁여순 14연대 반란사건이 연달아 일어났다. 이승만 정부는 이러한 좌익과 우익 간의 갈등을 극복하고 사회 질서를 확립한다는 명분으로 반공주의 정책을 내세웠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시작된 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이의 한국 전쟁은 한반도와 한반도인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안겨 주었다. 전후, 이승만의 독재가 계속되었고 1960년 4·19 혁명으로 정권이 붕괴되었다.

[편집] 제2공화국
이 부분의 본문은 제2공화국입니다.

과도 정부는 헌법을 내각 책임제와 양원제 국회의 권력 구조로 개정하였다. 이 헌법에 따라 총선거가 실시되어 민주당장면 내각이 들어섰다. 장면 내각은 사회 질서를 안정시키고 국가의 안보 체제를 확립하면서 경제와 사회의 발전을 통하여 국력을 신장하고, 한민족의 숙원인 평화적 통일 정책을 내세웠다. 그러나 민주당 내의 정치적 갈등과 계속되는 시위 등으로 이러한 과업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편집] 5 ·16 군사 정변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부 세력은 사회의 혼란을 구실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이를 5·16 군사정변이라 한다. 군부 세력은 헌정을 중단시키고 국가 재건 최고 회의를 구성하여 군정을 실시하였다. 이들은 민정 복귀의 약속을 저버린 채 민주공화당을 창당하고,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와 단원제 국회의 권력 구조로 헌법을 개정하였다. 새 헌법에 따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편집] 제3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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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공화국은 1961년 5·16 군사정변에 의한 7개월 간의 군정 이후 1962년 12월 17일 국민 투표로 확정된 개정 헌법에 의해 설립된 공화 헌정체제이며, 대통령은 박정희였다. 박정희 정부는 조국 근대화의 실현을 국가 정책의 주요 목표로 삼고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여 공업을 발전시키고 수출을 비약적으로 증대시키는 등 획기적인 고도의 경제 성장 정책을 추진하였다. 또한 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하여 한일 협정을 체결하였다. 한편, 경부고속국도를 비롯한 도로와 항만, 공항 등의 사회 간접 시설도 확충하여 전국이 일일생활권에 들어갔다. 아울러 간척 사업이 진행되고 작물의 품종 개량이 이루어져 식량 생산도 증대되었다. 이 과정에서 국내 자본의 축적이 이루어져 외국 자본에 의존하던 자본 구조가 어느 정도 개선되었으나, 자본 집중이 심화되어 소수의 재벌들이 생산과 소득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고, 국내 산업의 수출 의존도가 심화되는 등 폐단이 나타났다.

또한 1970년대에 들어와서 국내 노동자 수가 크게 늘어나고 민주화 운동의 진전과 함께 국민들의 사회 의식이 높아지면서 노동 운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 임금 인상, 노동 조건 개선, 기업가의 경영 합리화와 노동자에 대한 인격적 대우 등을 주장하는 노동자들의 시위가 전국에서 거세게 일어났다.

박정희 정부는 반공주의를 국가 정책으로 내걸고 반공주의 교육을 강화하고 능률과 실질을 중시하는 기능 양성 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이런 상황에서 교육 자치제는 명목상으로만 존재하고 교육의 중앙 집권화와 관료적 통제는 계속되었다. 1968년에 발표한 국민교육헌장은 이 시기 교육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었다.

제3공화국은 1972년 10월 17일 헌법을 개정하여 유신체제로 전환하면서 끝났다.

[편집] 제4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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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헌법을 개정하면서까지 장기 집권을 추구하던 박정희는 1972년 10월 유신을 단행하여 민주적 헌정 체제를 부정하는 독재 체제를 구축하였다.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국민들의 독재 체제에 대한 끊임없는 저항 속에서 10·26 사건이 일어나 유신 체제는 막을 내렸다.

[편집] 제5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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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암살되자 새로 등장한 이른바 신(新)군부 세력은 1979년 12월 12일 병력을 동원하여 군권을 차지하였고, 광주 민주화 운동을 비롯한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무력으로 진압한 뒤 통치권을 장악하였다. 신군부 세력은 7년 단임의 대통령을 간접 선거로 선출하는 헌법을 공포하였고,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에 따라 국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기대는 다시 좌절되었다. 전두환 정부는 정의 사회 구현, 복지 사회 건설 등을 통치 이념으로 내세웠으나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고 인권을 유린하여 얼마 안 가 국민적 저항에 부딪히고 결국 1987년 6월 항쟁으로 제5공화국은 그 운명을 다한다.

[편집] 제6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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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노태우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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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군부 출신의 노태우6월 항쟁으로 계속된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여 6·29 선언이 발표하였다. 이를 계기로 5년 단임의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이 마련되었다.

노태우 정부는 소비에트 연방(소련), 중국공산주의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는, 이른바 북방 정책을 추진하여 큰 성과를 올렸다. 또한 국제 연합에 남한과 북조선이 함께 가입하였으며, 남북 고위급 회담이 열리고, 문화·체육의 교류가 이루어지는 등 적극적인 대북 외교를 펼쳤다. 한편, 정부의 주도와는 달리 민간 차원에서도 적극적인 통일 노력이 전개되어 평화 통일을 위한 논의가 활성화되었다.

[편집] 문민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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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성립된 김영삼 정부는 공직자들의 재산 등록과 금융 실명제 등을 법제화하여 부정부패 척결에 노력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5·16 군사 정변 이후 중단되었던 지방 자치제를 전면적으로 실시하였다.

1994년 남북 정상 회담을 위한 예비 접촉이 이루어져 남북 관계가 진전될 기미를 보였지만 김일성의 사망으로 남북 정상 회담이 무산되고, 김일성 조문 문제로 남북 관계는 다시 냉각되었다.

[편집] 국민의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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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성립된 김대중 정부는 외환 위기 극복과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 병행 발전을 천명하였다. 이를 위하여 국정 전반의 개혁, 경제난의 극복, 국민 화합 실현, 법과 질서 수호 등을 국가적 과제로 제시하였다.

또한 남북 화해 협력 정책을 추진하여 남북 교류를 크게 활성화시켰다. 이어 2000년 6월 15일 남북 정상 회담이 이루어져 6·15 남북 공동선언이 발표되고 남북 이산 가족이 만나는 등 남북 간의 긴장 완화와 화해 협력이 진전되었다.

[편집] 참여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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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에 성립된 노무현 정부는 국정 목표로 국민들과 함께 하는 민주주의, 더불어 사는 균형 발전 사회,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아 시대 등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보수, 진보 양 쪽으로부터 비판이 심하며, 평가도 좋지 못하다. 한나라당을 위시한 보수주의 세력들은 참여정부가 한미FTA를 제대로 추진하지 못한 점과 4대 개혁 입법을 비판한다. 반대로, 민주노동당진보주의 세력들은 이라크 전쟁 파병, 한미FTA 추진, 흐지부지한 4대 개혁 입법 등을 비판하였다.

[편집] 이명박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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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에 성립된 이명박 정부는 실용주의와 경제 성장, 자원외교 등을 추구하고 있다. 하지만 집권 초부터 한미 쇠고기 협상 논란 등에 휩싸이며 최저 7.4%의 지지율[20]을 기록하였고, 한반도 대운하 등의 핵심사업을 사실상 접는 등 어려움에 빠져 있다.

[편집] 정치

전두환 정권 시기에는 대통령 간접선거제도를 채택하고, 광주민주화운동과 같은 민주화 요구에 대해 무자비한 탄압이 자행되었으나, 각계 각층의 대중들이 참여한 1987년 6월의 민주 항쟁으로 대통령 직접선거제도를 공약한 6.29 선언을 이끌어 내어 이후 민주화가 상당히 진전되었다.

[편집] 경제

1960~70년대중공업의 과잉 투자와 1978년 2차 오일 쇼크로 국제 수지가 악화되고 높은 인플레이션과 마이너스 경제 성장을 배경으로 하였다. 그래서 전두환 정권은 중화학 공업에 대한 과잉 투자를 조정하고 부실기업을 정리하려고 하였으며, 자본 자유화 정책에 따라 금융 시장의 개방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 조정은 실패하였고 기업 재벌의 국민 경제의 비중은 확대되었으나, 3저 호황(원유`달러`금리) 바탕으로, 경제는 안정될 수 있었다.

[편집] 문화

군사 정변으로 정권을 획득한 전두환 정권은 기반을 닦고나서 국민에 대한 유화책을 펼쳤다. 그에 따라 통행금지 해제나 해외 여행 자유화, 교복 자율화, 과외 금지 등이 시행되었다.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을 개최하였고, 1988년에는 서울 올림픽 게임을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2002년에는 FIFA 월드컵을 일본과 공동 개최하였다.

[편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 부분의 본문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역사입니다.

2009.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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