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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헨리 8세
anti**** 조회수 3,294 작성일2008.11.17
헨리 8세는 영국중에서 가장긴 이야기를 남긴 사람중 한사람이라고 하는데요 헨리 8세의 이야기과 그 여섯부인들에 관해 이야기좀 해주세요 대도록 빨리부탁드리고요 혹시 이거에 관련된 좋은 책이 있으면 소개 시켜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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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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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1. 6. 28 런던 근처 그리니치~1547. 1. 28 런던.

잉글랜드의 왕(1509~47 재위).

16세기 남자 복식:벨벳 모자와 허리 부분이 잘록한 더블릿과 ...
잉글랜드의 초기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주도했다. 아라곤의 캐서린(나중에 메리 1세 여왕의 어머니), 앤 불린(나중에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어머니), 제인 시모어(헨리 8세를 계승한 에드워드 6세의 어머니), 클레브스의 앤, 캐서린 하워드, 캐서린 파와 차례로 결혼하여 6명의 아내를 맞이했다.

왕위계승

헨리는 튜더 왕조의 첫번째 왕이었던 헨리 7세와 단명한 요크 왕가의 첫번째 왕 에드워드 4세의 딸인 엘리자베스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 아서가 1502년에 죽자 헨리는 왕위계승자가 되었다. 그는 튜더 왕가의 왕 가운데 왕위계승을 조용히 기다리면서 어린시절을 보낼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때문에 그의 변덕스럽고 다혈질적인 성격에 위엄과 의로움에 대한 확신이 보태질 수 있었다. 그는 귀족사회가 즐겨 하는 육체적 운동뿐 아니라 책을 통해 얻은 지식도 뛰어났다. 그래서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 사람들은 많은 기대를 했다. 키가 183cm가량 되고 힘이 세었으며, 지칠 줄 모르는 운동선수였던 그는 사냥과 춤에도 능했다. 그는 긴 겨울 같은 헨리 7세의 치세가 끝난 후에 찾아온 봄의 기쁨을 잉글랜드에 약속했다.

헨리와 그의 대신들은 선왕이 왕권 성장을 정력적으로 추구함으로써 사람들에게 불러일으킨 혐오감을 이용했다. 즉 선왕 헨리 7세의 인기 없는 몇몇 제도와 몇몇 신하들을 주저 없이 희생시켜버릴 때 그런 혐오감을 이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인기가 없다 해도 왕국의 통치에 필요한 수단들은 필요했기 때문에 곧 다시 등장하곤 했다. 왕위에 오른 직후 헨리는 형수였던 아라곤의 캐서린과 결혼했다. 그리고 그에 따른 사치스러운 연회로 인해 탄탄하지 못한 왕의 금고는 비어갔다. 그러나 그보다 한층 심각한 것은 군사적 모험에 뛰어들려 했던 그의 결심이었다. 당시 유럽은 이탈리아 영토 지배권을 놓고 프랑스와 스페인 간에 벌어진 대립으로 들끓고 있었다. 헨리 8세는 나이가 많은 추밀고문관들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에 대항해, 또 위협받는 교황(그에게 헌신적인 헨리 8세는 오랫동안 거의 맹목적일 정도의 존경을 바쳤음)을 위해 장인인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의 싸움에 동참했다.

헨리 8세 자신은 군사적인 재능을 보여주지 못했으나 서리 백작이 스코틀랜드인의 침략을 맞아 플로든에서 승리를 거두었다(1513) (→ 플로든 전투). 이 전투가 아무런 소득도 가져다주지 않았으나 표면적인 성공은 사람들의 인기를 끌었다. 더구나 프랑스에서 최초의 군사원정을 조직했던 토머스 울지에게서 그는 뛰어난 대신(minister)감을 발견했다. 1515년까지 울지는 요크 대주교로서, 대법관으로서, 그리고 추기경으로서 왕을 섬겼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그는 왕이 국사의 수행을 주저없이 맡겼던 국왕의 가까운 친구였다는 사실이다. 물론 헨리 8세는 국왕으로서의 역할을 완전히 방기하지는 않았고 또 국사에 자주 간섭했다. 사람들은 영국이 추기경에 의해 통치되고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국왕 자신은 그가 원하면 언제라도 국사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사태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울지도 사람들의 생각이 올바른 것이라고 착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1515~27년 울지의 막강한 영향력이 두드러졌고 그의 국정 주도가 정치의 주조를 이루었다. 추기경 울지는 때때로 교황의 자리를 탐내곤 했는데, 이러한 욕심을 헨리 8세도 지지했다. 울지가 로마 교황 자리를 차지했더라면 그것은 잉글랜드에게는 매우 유리한 카드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그것은 마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가 죽은 후 황제의 자리가 그의 손자인 카를 5세에 의해 계승되었던 1519년 잠시 토론거리가 되었던 헨리 8세의 제위 선출 가능성이 전혀 없었던 것과 같았다. 카를 5세의 제위 승계는 유럽의 상황을 변화시켰다. 즉 스페인·부르고뉴(네덜란드도 포함됨)·오스트리아의 왕권이 카를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엄청난 권력을 형성했다. 이 엄청난 권력에 비하면 프랑스의 경우를 제외한 유럽의 모든 왕가들은 열등한 존재에 불과했다. 1521년부터 헨리는 카를 5세의 제권을 위한 전초기지 역할을 수행했다. 카를은 파비아에서 적대세력인 프랑스 세력을 일시적으로 분쇄했다(1525). 이렇게 적당하지 못한 순간에 동맹관계를 뒤엎으려고 한 울지의 시도로 인해 잉글랜드에게는 지극히 중요했던 네덜란드와의 직물교역이 보복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파비아의 승자와의 동맹관계를 통해 얻을 수 있었던 이득을 놓치게 되었다 (→ 이탈리아 전쟁).

지지 상실

유럽에서 잉글랜드의 세력이 미미해져갈 즈음 헨리 8세의 체제는 국내에서도 인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환상으로 가득 찬 초기의 기대는 오래 갈 수 없었던 것이다. 이는 현실에 입각한 어떤 조처가 취해져야만 했다. 사실 언론인과 문필가 들은 1517년부터 당시의 뛰어난 지성의 한 사람으로 국왕의 새 고문관이었던 토머스 모어의 도움을 구했던 왕에 대해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모어는 헨리 8세가 그와 유식한 대화를 나누는 일을 정책의 집행과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곧 알아차렸다. 당시에 울지의 권력에 타격을 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어떤 것도 없었다. 이는 울지를 지지하고 있던 왕에게는 심각한 약점이었다. 사람들의 불만은 점점 더해갔다. 고통을 치료하고자 하는 울지의 다양한 노력은 가난한 사람들을 만족시키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격앙시켰을 따름이었다. 1523~24년 사람들의 감정은 비등했다. 울지는 의회를 싫어했지만 1523년 의회 소집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의회가 동의해준 과세액은 필요로 하는 액수 이하였다. 다음해에 특별세를 거두려는 시도로 인해 치열한 저항이 일어나 왕은 이 시도를 포기했다. 왕과 추기경은 자신들에게 책임이 있었던 그 과세를 취소한 공적을 서로 차지하려고 했다. 헨리에게 비난할 울지가 있는 한, 헨리는 그러한 형편 없는 실수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추기경은 그럴 수 없었다. 1527년 외면적으로는 울지가 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왕이 주도한 정부정책은 파산을 무릅쓰는 것이었다. 대외적으로는 별 효력이 없었고 국내에서는 인기가 없었던 파산정책은 헨리 8세 체제로 하여금 실제로도 그러했던 것처럼 적극적인 의지가 없는 것으로 보이도록 만들었다.

바로 이 시점에서 왕은 정확하게, 그리고 극적으로 사태에 개입했다. 헨리의 실패 가운데 왕비 캐서린과의 사이에 왕위를 계승할 아들이 없었던 일은 매우 중대한 결과를 빚었다. 여러 차례의 유산과 유아기에 자식들이 죽는 바람에 왕위를 계승할 자식이라고는 메리 공주(1516 태어남)뿐이었다. 그리고 딸의 왕위계승이 가져올 왕가와 정치상의 불확실성을 생각해볼 때 아무도 메리 공주의 계승을 달가워 하지 않았다. 남자로서 헨리는 그 잘못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급속히 커가는 캐서린 왕비에 대한 싫증은 궁녀인 앤 불린(이전의 한 情婦의 자매였음)과 가까워질수록 더해갔다. 헨리는 결코 난봉꾼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상당한 정도의 품위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때때로 그는 훌륭하지만 몸이 아픈 부인과의 결혼생활로부터 도피하고자 했다. 그는 앤과 잘 맞는 짝이었다. 궁정 음모의 거친 분위기에서 자란 20세의 이 처녀는 왕의 정부 이상의 존재가 될 것이었다. 장차의 왕위계승 문제를 앞에 놓고 있는 헨리로서는 여하튼 그녀와 결혼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러나 결혼하기 위해서는 약 6년의 기간이 필요했다. 고의는 아니었지만 그는 혁명을 촉발시켰다. 1527년부터 헨리는 '왕의 큰 문제'로 알려진 캐서린과의 이혼을 추진했다. 그는 자신의 첫 결혼이 신의 법, 즉 형수와의 결혼을 금하는 성서의 가르침(〈레위기〉)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또한 태어난 아이들이 죽은 것은 이 결혼에 대한 신의 판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욕구를 신의 법으로 바꿔치기 하는 일에 재빨랐던 그의 성격으로 헨리는 자신이 캐서린과 함께 죽을 죄를 짓고 살아가고 있으며, 다시 신 앞에 떳떳이 서려면 그 죄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자신을 납득시켰다. 그리고는 로마에 결혼 취소를 선언해주도록 호소했다. 이런 일들에 있어서 교황들은 대개 왕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었다. 그러나 헨리는 그 시기와 그 사건을 잘못 택했다. 그는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카를 5세의 이모를 버리는 일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는데, 1527~28년에 황제의 포로나 다름없던 클레멘스는 결코 황제 카를을 거스르려고 하지 않았다. 황제가 갖고 있는 가문의 명예와 공적인 위신이라는 막강한 감정은 헨리의 소망에 대해 어떠한 양보도 용납하지 않았다. 더욱이 교황은 교황의 금고에 많은 돈을 가져다준 바 있는 그런 종류의 교황권 행사(헨리가 형수와 결혼하는 것을 허락해준)를 불법으로 선언하도록 부탁받고 있다는 점 때문에 망설임이 한층 더해갔다. 그래서 자신의 딜레마를 합법적으로 승인된 방식으로 해결하고자 했던 헨리의 시도는 그 출발부터 실패할 운명에 처해 있었던 셈이다 (→ 로마 가톨릭교).

불가능한 일에 성공함으로써만 자신이 권력에 머물러 있을 수 있다는 곤혹스러운 딜레마에 처해 있던 울지는 잉글랜드에서 그 사건을 다룰 수 있는 허가를 얻어냈다. 그러나 이는 로마의 명령에 따른 그의 동료 법관인 캄페노 추기경에 의해 좌절되었다(1529). 몇 주 만에 울지는 쫓겨났으나, 그가 사라졌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뒤를 이은 고문관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은 알고 있으나 어떻게 그것을 손에 넣을지 모르고 있는 왕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 대법관직은 이전에 헨리에게 자신은 이혼을 찬성하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으며 또 루터교라는 이단과의 싸움에 헌신하고자 하는 토머스 모어에게 넘어갔다. 로마를 윽박질러 첫번째 결혼의 심리가 영국에서 행해질 수 있도록 하리라는 희망과 한결 급진적인 성격의 책동(이는 바로 로마를 거부하는 것임)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있던 약 3년간 정부의 정책은 혼돈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로마를 내치는 것에 대해 때때로 언급하기는 했지만 어느 누구도 말을 어떻게 행동으로 옮길 것인가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 못했다.

로마와의 결별

행동은 혁명을 요구했으며, 혁명은 혁명을 구상하고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을 필요로 했다. 그 사람이 바로 토머스 크롬웰이었다. 그는 1532년 4월 대신회의를 주도하게 되었으며, 그 자리에 약 8년간이나 머물렀다. 혁명은 잉글랜드 교회가 로마로부터 분리해 지상에서 신의 대리자로서의 왕의 통치하에 있는 사실상의 한 국가부서로 된다는 결정으로 이루어졌다. 크롬웰이 의도하지는 않았던 혁명이었으나 왕은 그 소원을 성취할 수 있었다. 1533년 1월 그는 앤 불린과 결혼했다. 5월에는 새로 대주교가 된 토머스 크랜머가 결혼심리라는 형식적인 일을 맡아 헨리의 첫번째 결혼을 무효로 선언했다. 9월에 엘리자베스 공주가 태어났다. 교황은 파문으로 보복했으나 아무도 그것에 신경쓰지 않았다. 헨리가 잉글랜드 교회에 대한 지상에서의 최고 우두머리 지위를 얻고자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헨리 8세의 주요업적이 되었다. 이는 매우 광범위한 결과들을 초래했으나 직접적으로 왕과 관련된 것은 다음 2가지이다 (→ 영국국교회). 첫째, 교회의 우두머리라는 새로운 칭호는 왕권에 대한 헨리 자신의 생각, 즉 그가 언젠가 말한 적이 있는 것처럼 지상에서 그보다 높은 자는 없다는 신념을 굳게 만들었다. 그것은 신이 세운 왕권이라는 장엄한 관념을 완성했다. 헨리의 변함없는 야심은 복종하고 경외하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왕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둘째, 그것은 왕 자신에게 진실로 개인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전에 〈마르틴 루터에 대한 7성사의 옹호 Assertio septem sacramentorum adversus Martinum Lutherum〉(1521)라는 책에서 루터를 공격하고 교황권에 대한 깊은 충성을 표현했으며, 그로 인해 신앙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부여받았다. 그러나 이제 그는 교황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그의 행위는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을 조장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은 크랜머나 크롬웰에게는(그리고 아마도 앤 불린에게도) 매력적인 것이었으나 루터를 경멸한 헨리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새로 독립한 교회의 종교는 그 우두머리에게는 아직 결정되지 않은 것이었다. 따라서 신학적인 지식을 뽐내던 헨리는 여생 동안 진정한 종교의 성격에 대해 많은 시간과 생각을 들였다. 교황의 우위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자신이 그 속에서 자라온 신앙의 주요강령들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부적인 사항에서 그는 생각을 바꾸었으며, 자신이 만들어낸 일종의 절충에 이르렀다. 그 절충적인 종교에서는 화체설과 성직자의 독신조항이 교회의 세속권위에 대한, 그리고 인간이 성직자의 도움 없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한 급진적인 견해들과 뒤섞여 있었다 (→ 성공회).

국내개혁

크롬웰의 시대였던 1530년대는 수미일관된 일련의 정책들이 의식적으로 수행되었던 유일한 시기였다. 크롬웰의 작업은 특히 1536~40년에 해산된 수도원의 재산을 왕에게 돌리고 성직자들에 대한 새로운 세금을 신설함으로써 헨리의 권력을 크게 신장시켰다. 그러나 그의 작업으로 인해 왕은 이전 어느 때보다도 법과 의회의 입법우위권에 예속되었다. 헨리가 의회와 협력하는 방법을 알았기 때문에 즉각적으로는 예전보다 더 강력하게 보여졌으며, 그의 통치가 전제정의 모습을 띠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제정의 모습은 진실된 것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사실상 법의 지배가 군주의 단순한 의지를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제정의 외양은 모든 혁명에는 그 희생자들이 있다는 사실로 인해 강조되었는데, 이는 진실과 거리가 멀다. 희생자들의 머리가 베어짐에 따라 계몽과 학식의 주창자로서 왕이 이전에 얻은 명성은 피비린내 나는 사람이라는 지속적인 명성에 영원히 묻혀버렸다. 모어 같은 옛 친구들도 새로운 질서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반역죄로 몰린 50명의 다른 사람들과 같이 처형되었다. 1538~41년 폴가(家)와 커트니가는 잉글랜드에서 일어난 사태의 진로를 바꾸기 위해 외국에서 노력했다는 것과 연관되어 반역죄로 처형되었는데, 그 주된 이유는 그들이 왕가의 혈통을 주장할 수 있어서 자식을 잘 낳지 못하는 튜더 왕가에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왕은 자신을 괴물로 보이게 만든 동시에 웃음거리로 만든 일련의 결혼 모험을 시작했다. 그는 아들을 낳지 못하는 에게 곧 싫증이 났다. 1536년 앤은 반역적인 간통을 저질렀다는 혐의를 받고 궁정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내쫓겼지만 굴복하지 않았던 아라곤의 캐서린은 그 조금 전에 죽었다. 헨리는 곧 제인 시모어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아들 에드워드를 낳았으나 출산중에 죽었다(1537). 헨리는 그후 3년간 그녀를 이을 여자를 구하는 일로 보냈다. 선택된 신부는 클레브스 공작의 누이인 이었다. 그녀는 프랑스와 황제로부터의 위험을 예방하기 위해 고안된 유럽 북방동맹을 위한 크롬웰 정책의 인질이었다. 그러나 헨리는 그녀를 처음 보고는 질려버려 즉시 벗어나기를 원했고, 신속한 이혼이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게 만들었다.

육체적·정신적 쇠퇴

클레브스 소동으로 크롬웰은 파멸되었다. 그 소동을 계기로 크롬웰의 많은 적들은 왕으로 하여금 그에게 등을 돌리도록 만들었다. 1540년 7월 크롬웰의 목은 처형대에서 나뒹굴었다. 이제 헨리는 진짜 위험스런 인물이 되었다. 항상 모든 것을 숨기고 또 남을 의심하는 헨리는 이때부터 과대망상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이 모든 사람을 통제할 수 있다는 확신에 차 있던 그는, 사실은 그의 의심을 조장하고 자신은 옳다는 그의 생각에 영합할 줄 아는 사람들에 의해 쉽게 조종되었다. 경험은 풍부했지만(당시 유럽에서 가장 나이 많은 왕이었음) 신변의 일상적인 통치에 얽매이다보니 자신을 위대한 인물로 만들 수도 있었을 폭넓은 비전과 도량 있는 정신이 차츰 결여되어갔다. 그의 성격상의 결함들은 그가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불행들과 건강의 악화로 한층 심해졌다. 그는 엄청나게 뚱뚱해졌다. 그의 마음은 약해지지 않았으나 점점 더 침착하지 못하고 신경질적으로 되었으며 완전히 예측 불가능한 인물이 되었다. 종종 우울하고 울적했던 그는 대개 기분이 좋지 않았으며 항상 인내심이 없었다. 1540~42년 그는 20세의 캐서린 하워드와의 결혼으로 짧게나마 청춘을 회복했다. 그러나 어리석게도 이 여자는 다른 남자들과 난잡한 관계를 계속하여 왕비였음에도 불구하고 단두대에 목이 잘렸다. 이 일은 헨리를 진정 슬프고 환멸에 찬 노인에 불과하게 만들었다. 물론 1번 더 결혼해 조용하고 순종적인 캐서린 파에게서 어느 정도의 평화를 얻기는 했으나 육체적으로 완전히 지쳐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왕이었으며 크롬웰이 죽은(이를 헨리는 너무 늦게서야 후회했음) 후에는 유일한 정책결정자였다. 병들고 불행하며 광포한 사람의 손에서 나오는 정책이 양식 있고 순조로울 가능성은 없었다. 홀로 남은 그는 종교적인 분파들간의 분쟁이 점증함에도 불구하고 왕국의 통일성을 유지하는 일과 그 시대의 영광스러운 군주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는 일에 전력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들은 종종 백성들의 배은망덕함과 대신들에 대한 분노로 폭발했고 그의 첫사랑, 즉 왕들의 스포츠인 전쟁과 정복으로 향하게 만들뿐이었다.

1542년 황제와 프랑스 왕은 전쟁을 재개했다. 독립의 제스처를 보이다가 헨리는 다시금 황제 편에 가담했다. 스코틀랜드인들은 프랑스인 편에 섰다. 그리고 그들은 솔웨이모스의 전투에서 패했으며(1542) 스코틀랜드의 왕은 곧 죽었다. 이로 인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왕좌에 대한 어린 계승자들간에 결혼 동맹을 맺음으로써 스코틀랜드를 영구적으로 복속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 그러나 헨리 8세가 스코틀랜드를 거칠게 대함으로써 잉글랜드와의 동맹조차도 거부할 각오가 되어 있던 친프랑스파가 스코틀랜드에서 득세하게 되었다. 그결과 스코틀랜드에 대한 꿈은 무너져버렸다. 무력을 통한 정복은 헨리의 힘을 넘어서는 일이었다. 그는 개인적으로 전쟁과 이후의 협상을 어떻게든 꾸려나갔다. 그뿐 아니라 그는 병자로서는 놀라울 정도의 활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 활력이 유능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전쟁은 파괴적이라는 것이 입증되었으며, 수도원의 토지를 매각해 돈을 거두어야만 했다. 수도원 토지의 매각은 짭짤한 수입을 가져다주었다. 주화의 귀금속 함량을 줄이는 임기응변적인 조치는 일시적인 도움을 주었을 뿐 사태를 훨씬 악화시켜 급격한 인플레이션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황제가 프랑스와의 전쟁을 종결시킨 이후에도(1544) 헨리는 2년간이나 전쟁을 계속했다.

1546년이 저물어갈 때쯤 왕이 더이상 살 수 없으리라는 사실은 명백한 것이었다. 그러나 헨리 8세에게는 명백한 사실이 아니었다. 그는 예전과 같이 종교적인 불일치를 한탄하고 정부의 일에 참여하고, 자신의 계승자를 지배하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의심되는 강력한 하워드가를 파멸시키는 일을 계속했다. 임종시까지 의식이 남아 있던 그는 1547년 1월 28일 죽었다. 그는 활력이 소진된 왕국과 함께, 그가 마지막까지 뒤를 이을 소년 왕을 위한 조치들을 취하기를 거부하자 당황한 정부(政府)를 남기고 떠났다.

평가

그의 사후에도 그의 강한 개성은 그 자신이 자랑스러워 했던 업적을 유지시켰다. 헨리 8세는 항상 진정한 군주정치의 구현 그 자체로 여겨져왔다. 심지어 결코 잊혀지지 않던 그의 악행들조차도 위대한 업적에 대한 기억 속에 섞여 들어갔다. 그는 잉글랜드에 잉글랜드가 원하는 것, 즉 국민의 가시적 상징을 주었다. 그는 좀더 훌륭한 정부와 유용한 해군, 종교개혁과 사회적 개선의 시작 등을 잉글랜드에 선사함으로써 상당한 일을 했다. 그러나 어떤 의미로든 그는 위대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모든 면에서 지도자였지만 자신의 국민을 어디로 이끌고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위대한 정치가나 예언자가 아니었다고 한다면, 역시 그는 한 전통에서 주장하듯 피에 굶주린 괴물도 아니었고 또다른 한 전통에서 볼 수 있듯이 거친 쾌남아도 아니었다. 냉혹하고 자기중심적이며 남에게 굴복하기 싫어하고, 또 항상 세상의 방식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었던 그는 쾌남아로 살 수가 없었다. 자신이 옳다는 생각으로 인해 키워진 무자비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살육에서 즐거움을 얻지 못했다. 단지 그는 왜 그토록 선한 의도를 갖고 있는 한 사람의 삶이 많은 부당한 곤경들로 인해 역경에 처해졌는지를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G.R. Elton 글

 

관련된 도서 : 헨리 8세의 후예들, 수도원의 죽음 << 이 두권이 엠파스 지식 싸이트에 올라와 있네요..

2008.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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