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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사회숙제를 해야하는데요.. 서대문구에 병자호란과 임진왜란의 유적이나 인물을알려 주세요
조회수 3,118 작성일2011.07.10
제가 사회숙제를 해야하는 데요..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이나 아무거나 좋으니까요.. 그것에 유적이나 인물을 알려 주세요~ 내공 100걸게요.. 2011년7월10일까지.. 오늘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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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1592~1598): 조선은 건국 이후 강경책과 회유책을 동시에 사용하며 일본과 비교적 안정괸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무역의 확대를 원한 일본이 조선을 자주  침략하자, 두 나라 사이에 분쟁이 증가하였다. 한편, 조선은 사화와 붕당의 발생 등으로 양반 사회가 분열되고, 군역제도가 문란해져 국방력이 약화되었다.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 시대를 통일한 후 대륙으로 진출하고자 하였다. 마침내 일본은 명을 정벌하기 위해 길을 빌려달라는 구실로 20만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였다.

 

병자호란: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은 후금을 배척하고 명을 가까이하는 정책(친명배금)을 펼쳐 후금의 반발을 샀다. 또한 후금은 명을 공격하기 전에 후방의 조선을 제압하려고 하였다. 이에 조선과 후금 사이에 전쟁의 기운이 감돌았다. 당시 조선에서는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사회가 혼란하였고, 그 잔여세력이 후금으로 도망가 인조의 즉위가 부당하다고 호소하였다. 이러한 혼란을 틈타 후금은 광해군의 복수를 내세우며 황해도 부근까지 침입하였다.(정묘호란,1627)

조선은 전쟁의 준비가 부족하였지만 각지에서 관군과 백성, 의병들이 항전하였다. 또한 철산의 용골산성에서 정봉수가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자 후금은 강화를 맺고 물러갔다.

이후 후금은 세력을 키워 국호를 '청'으로 바꾼 뒤, 조선에 군신 관계를 요구하였다. 서인 정권이 이를 거부하자 청은 10만의 군대로 조선을 다시 침략하였다(병자호란,1636) 조선 정부는 강화도로 피산하여 싸우려고 하였지만, 기마병을 앞세운 청은 압록강을 건넌지 얼마 안되어 서울을 함락하고 이를 차다하였다. 결국 조선정부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청군에 항전하였으나 끝내 청에 항복하고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강화를 맺었다. 두 차례의 호란으로 북부 지역이 황폐해지고 왕자와 신하 등 많은 사람이 청에 인질로 잡혀았다. 또한 조선은 해마다 많은 양의 공물을 청에 바쳐야 했다

1. 임진왜란
⑴ 임진왜란의 전개 과정
 ① 1592년 4월, 일본군이 명나라로 가는 길을 내어 달라는 구실로 약 20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해 왔습니다.
 ② 일본군은 한양을 점령하고, 평양을 거쳐 함경도까지 밀고 올라왔습니다.
 ③ 선조와 신하들은 북쪽으로 피란을 떠났고, 명나라에 군대를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④ 바다에서는 조선 수군이, 육지에서는 의병들이 일본군과 싸웠으며, 5만 명의 명나라 지원군이 도착하여 조선군에 합세하면서 불리해진 일본군이 휴전을 제의하였습니다.
 ⑤ 3년간 진행된 회담이 별다른 진전 없이 끝나고, 일본군이 다시 침입해 왔습니다.
 ⑥ 준비된 조선의 육군과 수군이 일본군을 모두 물리쳤고, 거듭된 패배에 일본군이 철수하였습니다.
⑵ 조선 수군과 의병의 활약

수군의
활약
-이순신 장군은 일본군의 침입에 대비하여 미리 군사를 훈련시키는 등 철저하게 준비하고 있었음.
-조선 수군은 바다 곳곳에서 큰 승리를 거두며,
바다를 이용하여 무기와 식량을 운반하려던 일본군의 작전에 큰 타격을 입혔음.
의병의
활약
-곽재우를 비롯한 의병들이 자발적으로 일어나 일본군과 싸웠음.
-의병은 관군과 협력하여 진주성과 행주산성에서 큰 승리를 이끌어냈음.

2. 임진왜란의 영향과 이후 조선과 일본의 관계
⑴ 임진왜란의 영향
 ① 조선은 7년에 걸친 전쟁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② 일본은 조선의 문화재뿐만 아니라 도자기 기술자, 활자 인쇄공까지 잡아감으로써 일본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⑵ 임진왜란 이후의 관계:전쟁이 끝난 뒤 조선은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끊었으나 몇 년 후 일본이 다시 외교 관계를 맺자고 요청해 와 일본에 정기적으로 통신사를 파견하여 조선의 학문, 기술, 문화를전해 주었습니다.

3. 병자호란
⑴ 병자호란의 배경
 ① 광해군의 중립 외교에 반대하던 신하들이 광해군을 임금 자리에서 쫓아내고 인조를 왕으로 세웠습니다.
 ② 인조는 명나라를 받들고 후금을 멀리하였는데, 이 때문에 조선은 후금의 침입을 받게 되었습니다.
 ③ 조선은 후금과 형제의 나라로 지내자는 약속을 하고 전쟁을 끝냈습니다.
⑵ 병자호란의 진행 과정
 ① 그 후에도 조선이 명나라와 가깝게 지내며 후금을 가볍게 여기자, ‘청’으로 이름을 바꾼 후금이 다시 조선을 침입해 왔습니다.
 ② 한양이 함락되고, 인조는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습니다.
 ③ 청나라 군대에 포위당한 성 안에서는 청나라와 끝까지 싸우자는 신하들과 강화를 맺자는 신하들로 나뉘어 서로 다투었습니다.
 ④ 45일 동안 싸우던 조선은 결국 청나라에 항복을 하였습니다.

4. 병자호란의 결과
⑴ 병자호란의 패배로 인해 일어난 일
 ① 조선은 청나라와 신하와 임금의 관계를 맺었습니다.
 ② 소현 세자와 봉림 대군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청나라에 인질로 보냈습니다.
 ③ 이후 조선에서는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키고 병자호란의 치욕을 갚기위하여 청나라와의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⑵ 북학론과 북벌론
북학론-청의 발달된 문물을 받아들여 나라의 실력을 기르자는 주장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발전하는 청나라의 모습을 보면서 소현 세자가 주장하였음.
북벌론-청나라를 공격하여 병자호란의 치욕을 갚자는 주장
-인조의 뒤를 이어 왕이 된 봉림 대군(효종)이 추진하였으나 실천하지는 못하였음

 

 

 

 

 

 

 

채택좀 ㅎㅎㅎ



2011.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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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답변

임진왜란 하면 이순신 장군 아닌가여????

완전 허술한 답변 이었습니다.

채택 안 해도 되여... 저도 찾고 있었던 거니깐여

2011.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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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번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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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돗
중수
사회, 도덕 분야에서 활동
본인 입력 포함 정보

임진왜란

 - 선조 : 동인과 서인의 붕당으로 힘들어하던 왕. 동인의 말을 들어 전쟁이 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명나라에 의존했던 왕이다.

 - 광해군 : 선조의 아들. 처음에는 나라와 나라의 관계를 파악하고 청나라를 공격하지 않았으나, 중신들의 반대에 부딫쳐 결국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억울한 왕이다.

 - 율곡 이이 : 십만 양병설을 주장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만다.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폈다.

 - 이순신 : 바다에서 거북선을 만들어서 일본인들을 많이 죽인 명장. 명량대첩, 한산도 대첩 등이 있다. 노량 해전에서 전사했다.

 - 권율 : 행주산성에서 일본인들을 무찌른 명장.

 - 곽재우 : 홍의 장군 곽재우이며, 의병이다. 나라를 위해 왜군을 무찔렀다.

 - 유성룡 : 선조가 피신할 때 어가(임금의 수레) 가 조선을 떠나면 안된다고 주장하여 훌륭한 신하였다.

 

임진왜란바께 ㅜ.ㅜ

2011.07.12.

  • 출처

    또다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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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번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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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신을 가고싶구만
초수
본인 입력 포함 정보

임진왜란때에는

권율장군이 유명합니다.

왜냐하면은 행주대첩에서 싸웠기때문입니다....

이것으로 허접한 답변이었습니다.

2011.07.13.

  •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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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번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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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이
영웅
영어 독해, 읽기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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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충렬사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제7호 (동래구)

지 정 일 1972.06.26

소 재 지 부산 동래구 안락동 838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부산광역시

 

임진왜란(1592) 때 왜적과 싸우다 전사한 부산 지방의 선열을 모신 곳이다.

 

전쟁이 끝나고 조선 선조 38년(1605)에 동래읍성의 남문 안에 충렬공 송상현을 모신 송공사를 처음 세웠는데, 인조 2년(1624)에 충렬사라는 이름을 임금이 직접 하사하였다. 효종 3년(1652)에 지금의 자리로 충렬사를 옮기면서 선열들의 충절과 학행을 후세에 전달하기 위해 강당과 동재·서재를 지어 안락서원이라 이름짓고 사당과 서원의 기능을 갖추게 되었다. 그 뒤 숙종 35년(1709)에 조영규·노개방을 비롯하여 전사한 선열 8인의 위패를 모신 별사를 옛 송공사 자리에 세웠다. 영조 12년(1736)에는 별사에 모셨던 분들을 충렬사에 함께 모셨다.

 

현재 부산 지방에서 순절한 모든 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해마다 5월 25일에는 온 시민이 정성드려 제향을 올린다.

 

2.동래읍성지

 

종 목 시도기념물 제5호 (동래구)

지 정 일 1972.06.26

소 재 지 부산 동래구 복천,안락,명륜,칠산,명장동일대

시 대 조선시대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하는 성을 말한다.

 

동래읍성은 마안산을 거쳐 구릉지와 동래 시가지의 평탄한 지역을 포함하여 쌓은 읍성으로, 고려말에서 조선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 현종 12년(1021)에 동래읍성을 수리하였으며, 그 뒤 우왕 13년(1387)에 왜구를 막기 위해 동래성을 크게 고쳐 쌓아 둘레가 3090자, 높이 13자라고 전한다.

 

왜적 방어의 제1관문인 이 성은 조선시대에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부산 진성과 함께 왜적의 1차 공격목표가 되어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임진왜란 이후 방치되었던 것을 조선 영조 7년(1731)에 다시 증축하여 당시 규모가 둘레 1729자였고, 4곳에 문을 만들었다.

 

동문을 지희루, 서문을 심성루, 남문을 무우루, 암문(적 또는 상대편이 알 수 없게 작게 꾸민 성문)을 은일루라 하였다. 남문에는 양 날개가 달린 듯 좌우로 뻗은 성벽인 익성이 있고, 나머지 3개의 문에는 성문을 보호하고 성을 튼튼히 지키기 위해, 성문밖으로 원형이나 방형으로 쌓은 옹성을 두어 적으로부터 성을 방어하고 있다.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평지의 성벽은 대부분 철거되었고, 마안산을 중심으로 성곽의 모습만 겨우 남아있다. 현재 북문과 옹성, 동장대, 서장대 등이 부분적으로 복원되어고 있다.

 

3.구포왜성

 

종 목 시도기념물 제6호 (북구)

지 정 일 1972.06.26

소 재 지 부산 북구 덕천동 93

시 대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김해와 양산간의 연락을 취하려는 목적으로 쌓은 왜성으로 김해성에 딸려 있다. 김해 죽도성과 서로 바라볼 수 있는 전략상의 요지에 해당하는 곳으로, 감동포성이라고도 불리워진다.

 

금정산의 줄기가 끝나는 곳에 쌓았으며, 서편으로는 낙동강을 끼고 그 밑에 배가 머물 수 있도록 하였다.

 

성벽은 나사모양으로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올라가면서 좁히면서 올려 쌓았다.

 

4.부산진지성

 

종 목 시도기념물 제7호 (동구)

지 정 일 1972.06.26

소 재 지 부산 동구 범일동 590-5

시 대 조선시대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에 있는 부산진지성은 흔히 자성대라고 부르는 곳으로, 원래는 부산성의 한 부분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부산에 주둔하면서 부산성을 헐고 일본식으로 다시 쌓은 석성이다. 소서성·환산성이라고도 불리었으며, 왜군의 지휘소로 이용되었다. 왜군이 물러간 뒤에는 명나라 장군 만세덕이 머물러 만공대라고도 했었으며,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는 성을 다시 고쳐 좌도수군첨절제사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성벽의 높이는 1.5∼10m이며, 성문은 동·서·남·북으로 4개가 남아 있다. 성 안에는 객사, 동헌 등 많은 관공서 건물과 창고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바닷물이 성 밑에까지 닿았다고 하는데, 일제시대의 성이 철거되고 시가지 확장을 위한 매립공사로 인해, 지금은 옛 모습이 남아 있지 않다. 1974년에 동문·서문·장대를 신축하여 동문은 건춘문, 서문은 금루관, 자성대위의 장대는 진남대라고 하였다.

 

부산진지성에는 임진왜란 때 왜군이 쌓은 2단의 일본식 성벽과 명나라 장군 천만리의 후손이 세운 천장군기념비와 최영장군비각이 보존되어 있다.

 

5.윤공단

 

종 목 시도기념물 제9호 (사하구)

지 정 일 1972.06.26

소 재 지 부산 사하구 다대동 산24

시 대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순절한 다대첨사 윤흥신 장군의 충절을 기리고자 높이 마련한 단으로, 단 중앙에는 비를 세워 두어 장군의 전적을 기록하고 있다.

 

윤흥신은 선조 25년(1592) 부산에 상륙한 왜적이 부산진성을 함락시킨 후, 다대진을 공격하자 동생 흥제와 군관민을 이끌고 이들과 대치하다 전사하였다. 왜란이 끝난 후에도 이 일이 알려지지 않다가, 영조 37년(1761) 경사감사로 있던 조엄이 이 사연에 얽힌 자료를 찾아내어 조정에 올리니, 비로소 그의 충절이 드러나게 되었다.

 

영조 41년(1965) 당시 다대첨사로 있던 이해문이 단을 쌓고, 음력 4월 13일을 제사일로 정하여 제사를 지내었다. 원래는 윤흥신이 순절한 곳인 다대객관의 동쪽에 있었으나, 1970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놓았으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동민이 중심이 되어 제사를 지내고 있다.

 

6.정공단

 

종 목 시도기념물 제10호 (동구)

지 정 일 1972.06.26

소 재 지 부산 동구 좌천동 473-474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부산진성을 지키며 군민과 함께 왜적과 장렬히 싸우다 성과 운명을 같이한 부산첨사 정발과 그를 따라 순절한 군민들의 충절을 기리고 있는 제단이다.

 

단의 중앙에는 ‘정공단’이라 새긴 비를 세우고, 서쪽에는 정발의 막료였던 이정헌, 동쪽에는 정발의 첩인 열녀 애향, 남쪽에는 군민들을 모셨으며, 남쪽 층계 밑에는 충직한 노복이었던 용월의 단을 마련해 두었다.

 

조선 영조 42년(1766) 당시 부산첨사로 있던 이광국이 단을 설치하여, 성이 함락되었던 음력 4월 14일에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일제시대에 와서는 민족혼을 일깨운다 하여 제단을 폐쇄하고 유물과 비품을 모두 몰수하였으나, 광복 후 새로이 단을 쌓고, 옛 비석을 되찾아 세운 후 다시 제사를 지내고 있다.

 

7.송공단

 

종 목 시도기념물 제11호 (동래구)

지 정 일 1972.06.26

소 재 지 부산 동래구 복천동 229-78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왜적과 장렬히 싸우다 순절한 동래부사 송상현과 여러 군민들의 충절을 기리고 있는 제단이다.

 

동·서·남·북의 4단으로 되어있는 이곳에는 북쪽은 송상현·조영규·노개방, 동쪽은 유생 문덕겸·비장 송봉수·김희수·신여로, 서쪽은 노개방의 부인·송상현의 첩 금성·정발의 첩 애향, 남쪽은 향리 송백·부민 김상·두촌녀 및 이름없는 여러 사람들의 단이 마련되어 있다.

 

조선 영조 18년(1742) 동래부사 김석일이 설치한 것으로, 원래는 그 전에 동래읍성의 남문 밖 농주산(지금의 동래경찰서 자리)에 임진왜란 때 순절한 이들의 제단을 세워 동래부사 송상현·부산첨사 정발·양산부사 조영규·동래교수 노개방 등을 모셨는데, 이 단이 마련되면서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 매년 음력 4월 15일에 제사를 지내다가 이후 동래성에서 순절하지 않은 분들의 제사는 모시지 않게 되어, 부산에서 순절한 분들은 정공단, 다대포에서 순절한 분들은 윤공단으로 옮겨 제사를 지내게 되었고, 일제시대 이후 부터는 음력 4월 14일로 날짜를 옮기어 제사를 올리고 있다.

 

8.25의용단

 

종 목 시도기념물 제12호 (수영구)  

지 정 일 1972.06.26

소 재 지 부산 수영구 수영동 366

시 대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수영성을 지키며 왜적과 장렬히 싸우다 순절한 25명의 의로운 충절을 기리고 있는 제단이다.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좌수사로 있던 박홍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이 때 수병과 성민 25인이 성문 밖의 선서바위에 모여 피로써 맹세한 후, 바다와 육지에서 적을 상대로 7년간 대항하였다. 이러한 사연은 광해군 원년(1609) 지방민들의 청원으로 알려지게 되어, 동래부사 이안눌이 이 때의 일들을 모아『정방록』을 만들고, 이들의 집 문에 ‘의용’이라는 두 글자를 써붙여 그 뜻을 기리도록 하였다. 순조 때에는 동래부사 오한원이 이들의 후손들에게 역의 의무를 면제시키고 글을 지어 포상하였다.

 

철종 4년(1853) 경상좌수사 장인식이 비를 세우고, ‘의용단’이라 이름하였으며, 제실·의용단을 설치하여 봄·가을 두 차례에 걸쳐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제사는 원래 좌수사가 주관하였으나, 고종 31년(1894) 관제개혁으로 좌수영이 폐지되면서 수영면의 면장이 이를 맡아하였고, 최근에는 수영기노회에서 제사를 주관하여 모시고 있다.

 

9.임진동래의총

 

종 목 시도기념물 제13호 (동래구)

지 정 일 1972.06.26

소 재 지 부산 동래구 복천동 산17-1

시 대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왜의 대군을 맞아 동래부사 송상현과 함께 동래성을 지키다 순절한 군·관·민의 유해를 거두어 모신 묘소이다.

 

영조 7년(1731)에 동래부사 정언섭이 퇴폐한 동래읍성을 수축할 때 임진왜란의 격전지였던 옛 남문터에서 많은 전사자의 유골이 발견되어 삼성대 부근에 6개의 무덤을 만들어 안장하였다.

 

일제시대 말 토지개간으로 동래구 복천동 뒷산 영보단 부근에 이장하였다가, 1974년 현 위치인 금강공원으로 옮겨왔다. 성의 함락일인 음력 4월 15일에는 동래구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현재 묘역에는 담장이 설치되어 있으며, 담장 밖에는 제사를 지낼 수 있는 건물과 비석이 세워져 있다. 1731년 동래부사 정인섭이 글을 쓴 이 비석은 앞면에는 ‘임진전망유해지총’이 뒷면에는 유해지총의 내력이 기록되어 있다.

 

10.정운공순의비

 

종 목 시도기념물 제20호 (사하구)  

지 정 일 1972.06.26

소 재 지 부산 사하구 다대동 산144

 

 몰운대에 자리하고 있는 이 비는 임진왜란 당시 부산포 해전(1592년 9월 1일)에 우부장으로 출전하여 공격의 맨 앞에 서서 장렬하게 싸우다 전사한 녹도만호 정운 장군의 의로운 죽음을 추모하고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 있었던 정운 장군은 적병이 호남에 이르기 전에 먼저 나아가 칠 것을 주장하고, 맨 앞에 서서 공격할 것을 스스로 청하였다. 또한 옥포·사천·한산도 해전에서 공을 세우고, 왜적의 군영이 있던 부산포를 공격할 때에도 다시 맨 앞에서 공격을 하였다. 비문에는 장군이 수군 선봉으로 몰운대 아래에서 왜적을 만났을 때 몰운의 운자가 자기 이름자 운과 음이 같다하여 이곳에서 죽을 것을 각오하고 싸우다가 순절하였다고 적고 있는데, 『충장공실기(‘충장’은 정운 장군의 시호)』와 『충무공전서』에는 부산포해전에서 순절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직사각형의 비는 윗변을 둥글게 다듬은 간략한 형태이다. 정조 22년(1798) 정운 장군의 8대손 정혁이 다대첨사로 왔을 때 세운 것이며, 비문은 이조판서 민종현이 짓고, 훈련대장 서유대가 썼다. 1974년 부산시가 비각을 세워 비를 보호하고 있다.

 

11.동래남문비

 

종 목 시도기념물 제21호 (남구)

지 정 일 1972.06.26

소 재 지 부산 남구 대연동 948-1 부산광역시립박물관

 

임진왜란 때 순절한 분들의 충렬을 기리어 당시의 격전지인 동래읍성의 남문 밖 농주산에 세웠던 비로, ‘동래충렬비’라고도 부른다.

 

현재 비는 받침돌 위에 크게 훼손된 비몸을 세운 모습이다. 그 위에 얹었던 머릿돌을 옆에 따로 놓여 있다. 비문에는 선조 25년(1592)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 다음날 싸움에서 부산진첨사 정발이 용감히 싸우다 전사한 일, 병사 이각의 비겁한 도망, 동래부사 송상현의 의연한 죽음과 비장 송봉수·김희수·향리 송백·교수 노개방·유생 문덕겸·양통한의 순절, 양산군수 조영규의 절의 등 왜병들과의 처절한 싸움내용과 동래부 군·관·민의 순국 충절을 기록하고 비를 세우기까지의 경위를 밝혔다.

 

비는 현종 11년(1670)에 처음 세웠으며 숙종 35년(1709)에 별사 앞뜰에 옮겼다가 영조 12년(1736) 별사가 없어지면서 남문 안으로 옮겨 놓았던 것을 1976년 시가지 도로확장공사로 인해 부산광역시립박물관에 옮겨 보존하고 있다. 비문은 현종 9년(1668)에 송시열이 짓고, 송길준이 썼으며, 비의 제목은 이정영이 썼다.

 

12.김해죽도왜성

 

종 목 시도기념물 제47호 (강서구)

지 정 일 1999.03.09

소 재 지 부산 강서구 죽림동 787일원

시 대 조선시대

 

김해 죽도왜성은 부산광역시 강서구 죽림동 가락산에 있는 것으로, 가락성 또는 죽도성이라고도 한다.

 

가락산은 동서로 길게 뻗은 독립된 야산으로, 그 동쪽 끝이 낙동강 서쪽 지류에 인접해 있어 선박을 정박시킬 수 있는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 성은 임진왜란 때 왜장인 니베시마가 쌓은 것으로, 해발 35m의 낮은 구릉지 양쪽에 축조되었다. 제일 높은 곳에는 소위 일본성의 양식인 본환이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석재는 부근에서 구하기가 어려워 먼 곳에서 육로 및 뱃길을 이용하여 운반한 것으로 보인다.

 

죽도왜성은 주변의 구포왜성, 양산왜성과 함께 삼각형을 이루어 김해 북쪽지역에서 내려오는 병력을 효율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방어의 요충지 역할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낙동강 지류를 이용하여 배로 만든 다른 성들과 긴밀한 연락을 도모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였다.

 

13.기장죽성리왜성

 

종 목 시도기념물 제48호 (기장군)

지 정 일 1999.03.09

소 재 지 부산 기장군 죽성리 산52-1 일원

시 대 조선시대

 

 부산광역시 기장의 죽성리 마을 해안 가까이에 있는 구릉을 이용하여, 임진왜란 때 왜군의 장수 구로다가 조선·명나라 연합군의 공격을 방어하고 남해안에 장기간 머물기 위해 쌓은 성이다. 돌로 쌓았으며 둘레는 약 960m, 성벽높이는 약 4m이다.

 

왜성은 대개 강이나 바다에 가까운 구릉을 택하여 수송·통신 등에 자유롭고 선박의 출입이 편리한 장소에 성을 쌓는다.

 

이 성은 부산왜성과 형태가 비슷하며 일본에서는 기장성이라고도 불리어지고 있다. 또한 양산의 서생포성과 울산의 학성·부산성을 연결하는 요충지에 자리하고 있는데 현재 성곽이 남아 있지만 주위는 밭과 민가로 사용되고 있다.

2011.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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