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기억법', 소설과 영화의 또다른 대결

정원식 기자

“이것은 내 소설이다. 내가 써야 한다. 나밖에 쓸 수 없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소설가 김영하가 2013년에 발표한 장편이다. 작가는 소설을 써나가던 어느 날 문득 “이것은 내 소설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그 확신이 없었다면 소설을 끝내지 못했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소설은 출간 직후에 영화화 판권이 팔렸다. <세븐 데이즈>, <용의자> 등의 작품을 통해 스릴러와 액션 장르를 다루는 솜씨를 보여준 원신연 감독은 “영화화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작품”이라며 영화화를 결심했다고 한다. ‘소설과는 다른, 이것은 나만의 영화다’라고 자신할 수 있는 부분은 무엇일까. 소설과 영화의 차이점을 미리 들여다봤다.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  쇼박스 제공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 쇼박스 제공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 쇼박스 제공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 쇼박스 제공

■ ‘나는 살인자다’ vs ‘나는 아빠다’

소설은 치매에 걸린 연쇄살인마의 내면을 주인공의 일지 형식으로 담아낸 작품이다. 주인공 병수는 연쇄살인마다. 30년 동안 수십 명을 죽였고, 25년 전쯤 살인을 끝내고 오는 길에 교통사고로 뇌수술을 한 후 살인을 멈췄다. 그 뒤부터 그는 일지를 쓰기 시작하는데, 소설의 뼈대를 이루는 것은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은 후부터의 일지 내용이다. 어느 날 젊은 연쇄 살인범 태주가 나타나 딸 은희의 주변을 맴돌기 시작하면서 평온한 일상이 깨진다.

영화도 기본 뼈대는 동일하다. 가장 큰 차이점은 살인자의 캐릭터다. 원작의 병수는 감정을 모르는 냉혹한 사이코패스다. 반면 설경구가 연기한 영화 속 병수는 상대적으로 인간적 온기가 느껴지는 인물이다.

원작의 병수가 “더 완벽한 쾌감”을 위해 사람들을, 그 중에서도 여자들만 골라 죽였다면, 영화 속 병수는 폭력 남편, 아동 유괴범, 악덕 장사꾼 등을 죽였다. 영화의 대사를 빌리자면, ‘살인’이 아니라 ‘쓰레기 청소’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짧고 건조한 단문으로 구축한 소설 속 병수에게선 감정이 거의 느껴지지 않지만, 설경구의 농익은 연기가 재현하는 병수는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는 사람이다. 소설의 병수는 사회적 외톨이에 가깝지만, 영화 속 병수는 파출소장(오달수)과도 호형호제한다.

태주(김남길)의 출현에 대한 반응도 사뭇 다르다. 감독은 젊은 살인마의 출현으로 살인자의 본성이 일깨워져 묘한 흥분을 느끼는 원작의 인물을, 온몸을 던져 딸 은희(김설현)를 지키려는 부성애 강한 아버지로 바꿔놓았다. 감독은 28일 기자간담회에서 “소설의 김병수는 매력적이지만 응원하기가 쉽지 않은 인물이다. 영화의 김병수는 연쇄살인범이기는 하지만 응원할 수 있는 캐릭터로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 인간의 허무와 공포 vs 두 남자의 추격전

두 번째 차이는 태주의 캐릭터다. 소설에서 태주는 살인자로서의 정체성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주변적 인물에 불과하다. 소설에서 병수는 태주를 죽이러 가기도 전에 경찰에 체포된다. 태주는 살인범이기는커녕 경찰인 것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소설의 핵심은 병수와 태주의 대결이 아니다. 병수가 싸우는 진정한 적은 태주가 아니라 급속하게 쪼그라드는 자신의 기억이다. 소설은 병수의 기억이 뒤죽박죽이 되면서 사실과 사실 아닌 것의 경계,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경계가 송두리째 허물어지는 과정을 세밀하게 기술한다. 소설의 결말이 독자에게 주는 섬뜩한 무기력함은 이 같은 전면적 자아 붕괴의 과정을 지켜보는 데서 나온다.

반면 영화는 태주를 병수와 맞서는 독자적인 악인으로 그려낸다. 병수는 은희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결정적인 순간마다 기억을 잃으면서 자신과 은희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든다. 태주는 병수의 치매 증상을 적절하게 활용해 병수를 농락하면서 관객들의 심장을 조인다. 영화에서 병수의 치매는 이처럼 자아 붕괴에 대한 예술적 탐구의 소재가 아니라, 두 사람의 대결에 긴장감을 불어넣기 위한 영화적 장치에 가깝다.

영화는 소설이 의도적으로 생략한 서스펜스적 요소를 극대화하는 전략을 택했다. 그 결과 긴장과 이완이 공존하는 꽤 그럴 듯한 스릴러 장르 영화가 탄생했다. 9월7일 개봉.


Today`s HOT
보랏빛 꽃향기~ 일본 등나무 축제 연방대법원 앞 트럼프 비난 시위 러시아 전승기념일 리허설 행진 친팔레스타인 시위 하는 에모리대 학생들
중국 선저우 18호 우주비행사 뉴올리언스 재즈 페스티벌 개막
아르메니아 대학살 109주년 파리 뇌 연구소 앞 동물실험 반대 시위
최정, 통산 468호 홈런 신기록! 케냐 나이로비 폭우로 홍수 기마경찰과 대치한 택사스대 학생들 앤잭데이 행진하는 호주 노병들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