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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성종은 왜 대군이 아니고 군인가요?
Ronnie 조회수 9,565 작성일2003.09.23
조선 시대에 왕비가 낳은 아들은 대군, 후궁이 낳은 아들은 군이라고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조선의 제9대 왕인 성종인 인목대비의 둘째 아들이었지요. 큰 아들은 월산대군이구요. 그런데 성종이 즉위하기 전 자을산군이라고 불렀다는데요, 분명히 인목대비 한씨의 친아들일텐데 왜 대군이 아니고 자을산 군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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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14대 왕인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대비)가 중전에 오른 것은 1602년이고..

조선왕조 9대 왕인 성종(자을산군)이 왕에 등극한 것은 1469년의 일입니다.

두 인물은 얼추잡아 133년의 시간 차이를 두고 나타나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인목대비는 한씨가 아니라, 연안 김씨입니다.

님의 잠재의식 속에 인목대비가 깊게 자리잡았나 보군요. (광해군 때문인가?)

혹시 잠재의식 속에 인목대비를 불쌍하게 생각하시는 것 아닌가요?

 

자을산군(성종)은 의경세자(덕종)과 소혜왕후 한씨의 둘째 소생입니다.
의경세자(덕종)은 수양대군(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의 첫째 소생입니다.

아시다시피 의경세자(덕종)은 왕 계승자인 세자에는 올랐으나, 왕에 오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러자, 세조와 정희왕후의 둘째 소생이자 의경세자의 친동생인 해양대군이..
세조에 이어 조선왕조 8대 왕인 예종으로 등극하게 됩니다.

예종에게는 두명의 적장자가 있었는데, 인성대군은 워낙 어린 나이에 죽었기에 없는 상태였고..
둘째인 제안대군의 나이는 당시 고작 4살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의경세자의 자식들에서 다음 후사를 선택하게 되었는데..
정희왕후는 내심 첫째인 월산대군을 염두해 두고 있었지만..
당시 권력의 핵심이었던 한명회의 사위가 자을산군이라는 것이 작용하여..
정희왕후와 한명회의 결탁에 의해 자을산군이 조선왕조 9대 왕인 성종이 됩니다.

근데, 자을산군(성종)과 월산대군이 친형제임에도 불구하고..
첫째는 대군이요. 둘째는 군으로 칭해져 있습니다.

세자의 아들인 세손(무품)을 제외하고는 모두 군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원칙적으로는 월산대군이 아닌, 월산군이 맞습니다.
그러나, 성종이 왕에 오르면서 친아버지인 의경세자가 덕종으로 추증왕이 되었고..
추증왕 덕종의 정장자인 월산군이 성종 등극 이듬해인 1471년에 대군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월산군이 월산대군으로 바뀔 수 있었던 것은 동생인 자을산군이 왕에 올랐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추가하자면..
둘째인 자을산군이 왕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이 한명회의 사위였기에 가능했습니다.

약간 복잡할 수도 있겠으나..
아버지 의경세자가 왕에 오르지 못했기 때문에, 그 아들들은 대군이 아닌 군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경세자의 동생이며 조선 8대 왕인 예종의 아들들은 적자인 경우 모두 대군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예종이 왕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종친부 왕자군에 대한 품계를 추가해 드립니다. ↓↓↓↓↓↓↓↓↓↓↓↓↓↓↓↓↓

 


  무품
대군 : 임금의 적자
군(君) 임금의 서자
 정1품 군(君)
 종1품 군(君) 대군의 뒤를 잇는 적장자. 첫 벼슬로 임명.
 정2품 군(君) 세자의 여러 아들, 대군의 뒤를 잇는 적장손, 왕자군의 뒤를 잇는 적장자. 첫 벼슬로 임명.
 종2품 군(君) 세자의 여러 손자, 대군의 여러 아들과 뒤를 잇는 큰집의 맏증손, 왕자군의 뒤를 잇는 적장손. 첫 벼슬로 임명.
 정3품 도정(都正)
정(正) 세자의 여러 증손, 대군의 여러 손자, 왕자군의 여러 아들과 뒤를 잇는 큰집의 맏증손. 첫 벼슬로 임명.
 종3품 부정(副正) 대군의 여러 증손, 왕자군의 여러 손자. 첫 벼슬로 임명.
 정4품 수(守) 왕자군의 여러 증손. 첫 벼슬로 임명.

 

△▶…… ∽‥역사를 이해하지 못하면‥
◀▽∽㉯¿☆지난 과오를 되풀이 한다™

 

2003.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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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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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68년 예종이 1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후 1년 2개월 만에 죽게 됩니다.

이때, 정희황후 윤씨가 요절한 맏아들(의경세자)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者乙山君, 성종)을 그 날로 즉위시켜 섭정을 하였지요.




아래는 정희황후에 관한 설명입니다.
-----------------------------------

정희왕후 윤씨 (貞熹王后 尹氏, 1418∼1483)

본관은 파평(坡平)으로, 판중추부사 윤번의 딸이다. 1418년 홍주에서 태어나 1428년(세종 10년) 가례를 올리고, 처음에는 낙랑부대부인(樂浪府大夫人)에 봉해졌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왕비에 책봉되었으며, 1457년 자성(慈聖)으로 존호(尊號)되었다. 1469년(예종 1년)에는 흠인경덕선열명순휘의(欽仁景德宣烈明順徽懿), 1471년(성종 2년)에는 원숙신혜신헌(元淑愼惠神憲)으로 각각 존호가 더해졌다. 정희왕후는 계유정난 당시 정보가 누설되었다며 손석손(孫碩孫) 등이 거사를 만류하여 수양대군이 망설이자, 손수 수양대군에게 갑옷을 입혀주며 용병을 결행하게 할 만큼 결단력이 강한 여장부였다. 또 1468년 둘째아들인 예종이 1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다. 예종이 왕위에 오른 지 1년 2개월만에 죽자, 요절한 맏아들(의경세자)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者乙山君, 성종)을 그 날로 즉위시켜 섭정을 하기도 했다.

이는 전례가 없던 일로, 예종이 죽었을 때 그의 아들 제안대군(齊安大君)이 있긴 했으나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왕위를 넘겨주지 않았으며, 덕종에게도 큰아들 월산대군(月山大君)이 있었으나 자을산군을 즉위시킨 것은 정희왕후 개인의 결단에 의한 것이었다. 13세의 어린 자을산군을 대신해 7년 동안 정사를 이끈 정희왕후는 섭정 기간 중에 과감하고 결단력 있는 성품을 마음껏 발휘하여 왕권을 안정시켰으며, 성종이 성년이 되자 섭정을 끝내고 1476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처럼 과단성 있는 행동으로 조정을 안정시킨 그녀는 1483년(성종 14년) 3월 66세를 일기로 온양에 있던 행궁(行宮)에서 세상을 떴다. 그녀 소생으로는 덕종(의경세자), 예종 등 두 왕자과 의숙공주(懿淑公主) 등 2남 1녀가 있고, 능은 남양주(南楊州)의 광릉(光陵)으로 세조의 능 동편 언덕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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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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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비 중에는

왕비와 후궁이 있죠

여기서

왕비의 적자는 원자라 칭하고 이래 대군이라 칭하며 왕비의 적녀는 공주라 합니다..

후궁의 적자는 군이라하며 후궁의 적녀는 옹주라합니다.

여기서 대군의 아들을 군이라하며

왕세자의 아들도 대군이라 들은것같습니다..

생각을해봐요 왕세자가 왕이되면 다시 대군으로 해야하니까

2003.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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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은 왜 대군이 아니고 군인가?

조선 역사에 있어 한명회만큼 권력의 진수를 누린 이도 드물다. 한갖 미관 말직에 불과했던 그가 3대왕에 걸쳐 권력의 중심에 있게 된 데는 그의 시대 통찰력도 작용했지만 교묘한 혼인법도 한몫했다.
한명회는 1415년(태종 15년) 예문관 한상질의 손자로 기(起)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불우한 소년시절을 보냈다. 그는 과거시험에 늘 실패했지만 공신의 자손을 과거에 의하지 않고 관리로 채용하던 문음(門蔭)제도에 의해 1452년(문종 2년) 경덕궁직으로 관직에 들어섰다.

그 무렵 문종이 승하하고 단종이 즉위하여 김종서 등이 집권하자 한명회는 친우인 권람의 주선으로 수양대군에게 접근, 무사 홍달손등 30여명을 추천하여 정치적 야망을 키워갔다. 마침내 1453년 10월, 수양과 함께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 황보인 등을 제거한 다음 정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어린 단종을 강압해 상왕으로 물러나게 한 뒤 수양을 조선의 제7대왕 세조로 즉위케 했다.
한명회는 세조의 심복세력 중 수양대군에게 가장 먼저 접근한 권람과 사돈관계를 맺어 권력의 중심으로 한발 다가선 다음 세조의 핵심 참모인 신숙주와는 친척관계를 맺었다.

예종을 사위로 맞아

한명회는 자신의 큰딸(장순왕후)을 세조의 둘째 아들인 해양대군(예종)에게 시집보냈다. 사실 예종은 임금이될 위치에 있지 않았으나 역사적 상황이 그에게 행운을 갖다 주었다. 당시는 세조의 맏아들인 의경세자(덕종)가 왕위 계승 수업을 받도 있던 터였다.
의경세자는 어려서부터 예절이 바르고 글읽기를 즐겼으며 서예에도 능했으나 병약했다. 1455년(세조 1년) 세자로 책봉된 그는 서원부원군 한확의 딸 소혜황후 한씨를 맞아 월산대군과 성종을 낳았다. 그러나 1457년(세조 3년) 병세가 악화돼 21명의 승려가 경회루에서 공작제를 배풀고 병의 치유를 빌었지만 20세로 요절했다.

의경세자의 동생인 해양대군은 형이 횡사하자 여덟살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됐다. 한명회의 큰 딸이 예종과 혼인한 것은 1460년 11월. 세자빈으로 책봉될 때 책문에는 “훌륭한 집안에서 태어나 온유하고 아름답고 정숙하여 종묘의 제사를 도울 만하므로 이제 효령대군과 우의정 이인손 등을 보내 그대를 왕세자빈으로 삼는다. 그대는 지아비를 경계하고 서로 도와서 궁주의 법도를 어기지 말고 더욱 큰 왕업을 융성하게 하라"고 돼있다.

그러나 한명회의 큰딸은 세자빈으로 책봉된 지 1년7개월만인 1461년(세조 7년) 11월 원손(인성대군)을 낳고, 산후병으로 그해 12월 안기의 집에서 눈을 감았다. 겨우 17세 어린나이였다.
그후 해양대군은 1468년 9월 7일 세조로부터 왕위를 이어받아 수강궁에서 즉위하였다. 이때 나이 19세였다. 세조 즉위로 승진을 거듭하던 한명회는 사위인 예종이 임금에 오르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게 됐다. 좌의정으로 있다 물러나 있던 그는 영의정으로 복귀해 실질적으로 조정을 좌지우지 했다.
그러나 평소 건강이 좋지 않던 예종은 14개월의 짧은 재위기간을 마감하고 요절했다. 한명회의 시대가 막을 내리는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예종의 요절로 한명회의 권세도 다하는 듯 싶었지만 그의 천운은 계속됐다. 예종이 죽던 날 세조비 윤씨는 자신의 장자인 의경세자(덕종)의 둘째 아들 자율산군(성종)을 왕위에 앉혔다. 조선 역사상 왕이 죽는 날 곧바로 다음 왕을 앉힌 예는 없었다.
그러나 윤씨는 조정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거사를 강행했다. 그 배후에는 한명회, 신숙주 등의 권신들의 힘이 작용했다. 다시말해 세조비 윤씨와 한명회가 결탁한 정치적 내막이 있었던 것이다.

둘째딸 성종과 혼인시켜

예종 사망 당시 예종의 아들 제안군이 있었고, 자을산군의 형인 월산군도 있었다. 제안군은 4세밖에 되지 않아 왕위 즉위가 제외될 수 있었지만 16세인 월산군은 배제될 이유가 없었다. 더욱이 월산군은 세조의 장손이었고 세조의 총애를 받던 인물이었다.
그런데도 정희왕후 윤씨는 자울산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했다. 이는 왕위 세습의 관습에 의할 때 비정상적인 절차였다. 자을산군이 왕이 된 데는 한명회라는 당대 최고의 권력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명회는 자을산군의 장인이기 때문이다.

예종이 병약한 몸으로 왕위를 오래지키지 못할 것을 염려한 정희왕후는 세조의 쿠데타 경험도 있어 왕위계승에 노심초사하였다. 그는 당연히 월산군을 생각해두었지만 권신들의 동의가 필요했다. 그러나 권신 한명회는 월산군 대신 자신의 사위인 자을산군을 내세웠다. 신숙주 등 조정의 실세 대신들도 묵시적으로 동조했다.
결국 정희왕후는 하는 수 없이 자을산군으로 하여금 예종의 뒤를 잇게 했다. 정희왕후로서도 13세의 어린 자을산군이 왕이 되었을 경우에 수렴청정으로 왕권을 안정시킬 수 있었기에 크게 손해될 것이 없었다.

이로인해 정희왕후와 권신들은 종실의 반발이 있을 것을 예견하고 예종이 죽던 날 곧바로 자울산군을 왕위에 앉힌 것이다. 어쨌든 왕권 안정을 위한 정희왕후와 권신들의 결단은 성공을 거두었고 한명회, 신숙주 등의 대신들은 세조대부터 누리던 자신들의 권세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한명회에게 행운만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성종의 첫 번째 왕비이자 한명회의 둘째딸인 공혜왕후가 요절한 것이다. 이 둘째딸은 1467년 12세의 나이로 한 살 어린 자을산군과 가례를 올렸으며 자을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하지만 17세의 나이로 소생도 남기지 못한채 운명하고 말았다

성종은 아버지 의경세자가(세조의 장남) 승하하자 대군이 아니고 자을산군으로 남습니다.
그러나 작은아버지 예종마저(세조의2남) 승하하자 자을산군에서 바로 왕으로 왕위를 승계합니다.
월산군역시 그당시는 그냥 월산군 이였지만 동생이 왕위를오르자 월산대군으로 불립니다.
그리고 성종의 어머니는 인목대비가 아니고 인수대비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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