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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일제강점기 원인
비공개 조회수 5,731 작성일2017.03.18
일제강점기가 된 과정과 원인을 알아보기 쉽게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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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신

정조 사후 조선은 안동 김씨 문중 등 주요 외척(왕비나 대비 쪽의 처가 세력) 세력인 안동 김씨나 풍양 조씨 세력이 커지면서 백성들에 대한 수탈은 늘고, 백성들과 나라를 위해 실사구시實事求是, 즉 사실에 기초한 실용적인 학문을 하자는 실학 추구 학자들 또한 힘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런 와중에서 어렵게 살다가 간신히 철종 승하 후 외척들간의 갈등을 이용해 자신의 아들인 이명복을 새로이 고종 임금으로 앉힌 흥선대원군 이하응 덕에 나라가 부흥의 징후를 찾는 듯했으나, 흥선대원군 또한 왕의 권위를 회복한다며 경복궁 재건 같은 불요불급한 토목공사에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고, 프랑스인 가톨릭 신부들을 처형함으로써 병인양요 같은 불필요한 갈등을 일으켰지요. 여기 더해 흥선대원군을 실각시킨 며느리이자 고종의 아내 민비 또한 최순실 일당 챙겨주는 박근혜마냥 국정을 농단함으로써 임모군란이나 동학 혁명 같은 상황을 벌였고요.

하지만 바다 건너 일본에서는 에도 막부가 네덜란드와의 제한적인 무역을 통해 서구의 발전상이라든가, 아편전쟁의 추이 등을 알았고, 그래서 미국의 페리 제독이 함대를 끌고 왔을 때에도 생각 이상으로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상공업을 발전시킴으로써 막대한 자본을 축적했고요. 이러한 자본 덕에 1860년대에는 남북전쟁 당시 남부연합이 프랑스로부터 구매하려다 실패하여 팔 곳이 없어진 증기군함마저 수입할 수 있었지요. 

헌데 페리 함대의 방문(?!) 사건 당시 에도 막부가 설설 기는 모습을 보인 바람에 막부의 권위가 떨어졌고, 그러자 막부, 더 정확하게는 도쿠가와 가문의 지배에 불만을 품고 있던 사쓰마와 조슈 같은 지방의 무사들이 덴노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들고 일어나니, 이것이 바로 메이지 유신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무사들이 바로 "유신지사"고요. 

막부와의 전쟁(보신전쟁)에서 승리하고, 메이지 덴노를 교토에서 도쿄의 새 궁궐에 모셔 새로운 정부를 탄생시킨 이들은, 아편 전쟁에서 패한 뒤의 청나라처럼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북쪽에서 밀려오던 러시아와 태평양 쪽에서 팽창하던 미국 등에 의해 반식민지가 되는 일을 예방하려면 서구화와 함께 주변국을 침략해 식민지화하는 강력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나온 게 "정한론", 즉 조선을 정복하고 그걸 바탕으로 서구 세력처럼 중국 땅도 차지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운요호 사건 등을 일으켜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과 민비가 직접 다스리던 조선을 강제 개국시키고, 자신들이 서양 여러 나라들과 체결한 불평등 조약을 모델로 삼아 강화도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고종과 민비는 제대로 정신을 차리긴커녕, 마치 박근혜와 최순실처럼 자신들의 권력과 자기네 친척들 및 아첨을 떠는 자들의 이권을 보장해주기 위해 백성들을 착취하는 데 여념이 없었죠. 결국 이로 인해 전라도 고부군에서 탐관오리 조병갑의 학정 등을 이유로 일어난 전봉군의 동학혁명군을 고종과 민비는 일본군의 협조까지 얻어가며 전멸시켰고, 이보다 앞서 민비 일당 때문에 13개월간 월급을 받지 못해 일어난 병사들의 임오군란을 진압하기 위해 민비의 요청으로 조선에 온 적이 있고 이번에도 또 출병했던 청나라 군대와 일본군이 조선 땅에서 충돌하면서 청일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청나라가 아편전쟁 이후 열심히 근대화를 했다지만, 기실 청나라 황실의 권위를 그대로 보존하면서 진행되었기에 말 그대로 서태후 같은 황실의 어른들마저 관여하는 생계형 방산비리가 극에 달했던 반면, 메이지 유신 뒤의 일본은 말 그대로 모든 것을 서양식으로 뜯어고쳐가며 개혁을 진행했기에 군대의 질 면에서도 차이가 엄청났습니다. 당연히 일본이 이겼죠. 하지만 승리한 일본이 한반도와 접한, 그리고 옛 고구려 땅이었고 한때 고려의 공민왕이 수복했던 요동 반도를 청나라에 요구하자, 이러한 일본의 팽창을 경계한 러시아가 프랑스, 독일과 함께 일본을 압박해 이 요구를 철회시킵니다.

민비는 이러한 러시아의 강력함에 반해 일본에서 러시아로 추파의 대상을 바꿨고, 자칫 조선에서의 이권을 더 이상 누릴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한 일본은 을미사변을 일으켜 민비를 척살했지요. 드라마 <명성황후>에서와 달리 구한말 지사셨으며 한국이 일제의 식민지가 되던 날 스스로 목숨을 끊으신 매천 황현 선생은 민비가 살기 위해 궁녀의 복장을 하고 궁녀들 틈에 숨었다가 들켜서 목숨을 잃었다고 저서 <매천야록>에 기록하셨습니다. 하지만 을미사변은 고종이 오히려 러시아에 더욱 의지하게 했으니, 이로 인해 고종이 러시아 대사관, 즉 아관俄館으로 도망가는 아관파천이 일어나게 했습니다.

일본에 압력을 행사해 요동 반도를 지켜준 대가로 청나라로부터 뤼순 항과 바로 옆의 다롄 항을 받아내고, 만주에 철도를 건설할 권리까지 얻은 판에, 아관파천으로 조선에서 이권마저 누리게 된 러시아를 보고 빡친 일본은 "러시아의 팽창을 저지하겠다"면서 러시아의 가상적국이던 영국과 미국의 지원을 받아 러일전쟁을 일으켰습니다. 1904년의 일이었지요. 그리고 뤼순 요새 전투와 쓰시마 해전 등 치열한 전투 끝에 러시아를 박살낸 일본은 1905년에 러시아와 종전 협상을 체결하여 사할린 섬 남부 지역과 함께 조선에 대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를 받아냈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곧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했습니다. 이로써 조선은 사실상 이때부터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이지요.

헤이그 밀사 사건, 고종 퇴위, 군대 해산, 그리고 1910년의 국권 침탈은 말 그대로 마무리 과정입니다.




못난 조선

문소영

나남출판 2013.07.05.



일본 근현대사

W. G. 비즐리 | 장인성 옮김

을유문화사 2004.08.30.



매천야록

황현 | 허경진 옮김

서해문집 2006.10.20.



전쟁사를 움직인 100인

정명섭|장웅진

청아출판사 2016.04.05.




2017.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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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스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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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경제 분야 지식인 30대 금융인 #AFPK재무설계사 #투자자산운용사 #아비라크샤 주식, 증권 3위, 경제 동향, 이론 3위, 예금, 적금 2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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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

파워지식인 달신 테스티아입니다 ^^


실제로 일본의 경우 우리나라보다 먼저 개항을 하였습니다. 미국의 페리제독에 의해서였죠.


이를 토대로 세계적인 질서를 파악한 일본이 아직 세계질서를 모르는 우리나라를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조선을 반 협박하여 개항을 하게 한 것이 바로 "강화도조약(1876, 조일수호조규)"입니다.


불평등조약을 맺은 조선은 불리할 수 밖에 없었고, 근대화에 대한 인식도 거의 없었습니다.


점점 이권침탈이 이어졌고 -> 을사늑약(1905, 제2차한일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기면서 치명타를 입게됩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이 보호국이 되었고 외교권이 없는 나라가 제대로된 국가일 수 없는거죠.


이후 기유각서를 통해 사법권을 박탈, 1910년 한일합방조약을 통해 경찰권까지 박탈함으로서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만들어버리게 됩니다. 이로서 518년의 조선왕실이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상 짧은 식견 올려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2017.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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