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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안압지에서 출토된 놀이도구
cute**** 조회수 12,274 작성일2005.10.28

 

          꼭 오늘안으로 ㅜㅜ

     제발 부탁합니다...............

 

       ` 안압지에서 출토된 놀이도구

    `  말을 타거나 달릴 때 사용되는 기구

 

 꼭!!!!!!!!!!!!!!!!!!!!!!!!내공겁ㄴㅣ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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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찌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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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이 좀 긴데 괜찮으실지?

놀이기구는 나무 주사위와 나무 남근;;이 있고

승마기구는 철제 발걸이(등자)와 말재갈이 있습니다.

이 중 출토된 나무 주사위는 실수로 불타버리고 지금 보존된 것은 모조품입니다.

 

 

 

안압지에서 나온 유물

금속공예품

 

부장품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신라 무덤의 출토품과는 달리 실생활에서 사용되었던 유물이 대부분이다. 대표적인 유물로는 금동완, 금동합, 청동접시, 청동대접, 청동숟가락, 금동가위, 금동용머리, 금동귀면 문고리, 금동 발걸이장식 , 금동 옷걸이장식, 거울, 동곳, 비녀, 반지 등을 들 수 있다. 식생활에 관계되는 그릇으로서는 금동으로 만든 완 . 합, 청동으로 만든 접시 . 대접이 있으며 이밖에 숟가락 등도 잇다. 완은 모두 세가지 형식이 있다. 이 가운데 구연부가 외반 되지 않은 것과 보주형 꼭지가 달린 것은 각각 굽바닥과 뚜껑 안쪽에 '仇'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이들이 한 세트임이 밝혀졌다. 이와 같은 형태의 완은 일본 정창원에도 소장되어 있다. 청동제 접시는 두 가지 형식이 있는데, 이 가운데 굽없이 입이 넓은 접시모양의 그릇은 경주 조양동에서 나온 뼈항아리 뚜껑과 꼭 같은 형식이어서 주목된다.

금동완(안압지)
통일신라8-9세기

금동완,금동합(안압지)
통일신라8-9세기

금동완(안압지)
통일신라8-9세기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도구나 꾸미개로는 청동 숟가락 . 금동가위. 거울. 동곳. 비녀 반지 등이 있다. 숟가락은 통일신라시대 것부터 고려, 조선시대 것까지 포함되어 있다. 이 가운데 숟갈이 원형과 타원형인 것은 통일신라시대의 숟가락으로는 드문 유례에 속한다. 이런 형태가 일본 정창원에서는 당시의 신라 장적 용지에 포장되어 노끈으로 10개씩 세트로 묶여 보존되고 있다.

청동숟가락(안압지)
 통일신라8-9세기

금제장신구(안압지)
통일신라8-9세기

금동용머리(안압지)
통일신라8-9세기

금동가위는 초의 심지를 자르는 데 사용하던 것이다. 잘린 심지가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날 바깥에 반원형의 테두리를 세웠으며 손잡이 쪽에 방울무늬와 당초 무늬가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이와 같은 형태의 가위 역시 일본 정청원에 소장되어 있다.

금동초심지가위(안압지)
통일신라8-9세기

금동초심지가위의세부

금동문고리(안압지)
통일신라8-9세기

생활 장식품으로는 의자의 손잡이장식으로 추정되는 금동제 용머리 장식 1상, 금동도깨비무늬 문고리장식, 금동봉황장식, 발걸이장식, 목제 난간의 위쪽에 꽂았던 금동연꽃보오리 장식, 옷걸이 장식 등이 있다.

금동불

 

못 서쪽 다섯 군데의 건물터를 중심으로 한 연못 안의 뻘층에서 많은 불상들이 출토되었다. 특히 제일 큰 누각이 있었던 제 3건물 터 주변에서 금동제의 판불(넓은 판에 새겨진 부처)과 다량의 화불(화려한 장식이 주변에 조성된 부처)이 출토되었다. 이들 불상은 그 형태와 만든 방법이 다양하고, 제작시기가 7세기에서 10세기 초에 걸쳐 있어서 통일신라 불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이들 불상은 당시 호국불교가 성행하여 안압지의 궁궐 안에 세웠던 내불당에 안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주요 불상과 불구류(불교용품)로는 금동 아미타삼존판불. 금동 보살판불. 금동 여래입상. 금동제 부처님 귀, 다수의 금동광배 조각. 광배 등에 장식되었던 수많은 화불, 보주, 비천공양상 등이 있다.

금동제 판불은 모두 10구가 나왔는데, 중국과 일본의 판불과는 달리 모두 실납법으로 주물된 것이다. 이들은 모두 밑 부분에 장방형의 꼭 다리가 2∼3개씩 달려 있어 불감(부처를 모시는 좁은 공간) 같은 곳에 꽂아 안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가운데 환형의 금동 아미타삼존판불은 완벽한 삼존의 배치와 생동감 넘치는 신체 조형, 삼곡 자세의 율동적인 협시보살상(부처님 양 옆에 시중 드는 보살), 그리고 고도로 발달된 주조기술 등에서 통일신라 초기(7세기 말 ∼8세기 초)의 조각양식을 대표하는 작업으로 손꼽힌다. 한편 금동제의 환불과 비천상, 신장상, 사리봉영상 등은 불상의 광배나 금동번(金銅幡) 등에 입체적으로 장식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들은 부조, 축조, 모조, 등 다양한 기법으로 되어 있어 당시의 조금 기법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밖에 독립된 금동불로는 8세기 후반부터 9세기 초에 걸쳐 제작된 통인의 여래입상이 있다.

금동여래입상(안압지)
통일신라8세기후반

금동여래입상(안압지)
통일신라8세기후반

금동판보살좌상(안압지)
통일신라8세기초

금동 손(안압지)
통일신라8-9세기

금동판삼존불좌상
통일신라8세기초

금동화불(안압지)
통일신라8세기

금동화불의주악상

목제품

 

우리나라의 고대 유물 중 목제품은 많지 않은데 그것은 우리나라의 토양이 산성인 탓에 땅에 묻혔던 것이 오래 보존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압지에서는 바닥의 뻘층 속에서 많은 목제품들이 출토되었다. 출토품 가운데는 통일신라 건물 양식을 엿볼 수 있는 목제 건축 부재 파편과, 당신의 글이 적힌 목간, 그밖에 신앙이나 생활에 관계되었던 유물들이 많아 당시 생활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주요 유물로는 건축 부재로 난간. 부연. 첨차. 주두. 서까래 등이 있으며, 노와 함께 배도 출토되었다. 이박에 물마개. 주사위. 남근. 인물상 등이 있다. 배는 연못의 동쪽 석축 바로 앞에서 전복된 상태로 나왔는데 완형 1척과 2척분의 파편들이다. 완형의 배는 3개의 나무를 통하여 파서 배 모양을 만든 뒤 참나무로 만든 미녀장 모양의 막대기를 배 안쪽 바닥의 앞뒤에 하나씩 가로질러 조립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제일 오래된 배이다. 이밖에 물마개는 못의 동북쪽에 있는 출수구 시설의 맨 앞에 꽂혀 있었는데 이것으로 안압지의 물높이를 조절할 수 있었다.

한편 14면으로 이루어진 주사위는 잔치 때 흥을 돋구는 놀이기구의 일종으로, 이것을 굴려서 위로 나타나는 면에 쓰여진 글의 내용에 따라 행동을 하도록 되어있다. 장방형이 6면, 육각형이 8면으로 기하학적인 조화를 이루었으며 재질은 참나무이다. 글의 내용은 통일신라시대 풍류의 일변을 보여주지만 완전한 해독은 어렵다. 그 내용은 소리 없이 춤추기, 덤벼드는 사람이 있어도 가만히 있기, 여러 사람이 코 때리기, 술을 다 마시고 크게 웃기, 스스로 노래 부르고 스스로 마시기, 술 석잔 한번에 마시기, 팔뚝을 꾸부린 채 다 마시기, 얼굴을 간질어도 꼼짝 않기, 누구에게나 마음대로 노래를 청하기 등이다.

나무주사위(안압지)
통일신라8-9세기

목간(안압지)
통일신라8-9세기

나무남근(안압지)
통일신라8-9세기

남근은 청동기시대의 바위그림이나 신라시대의 토우 등에도 많이 표현된 것으로, 수렵. 어로. 목축. 농경의 풍요를 기원하는 의미가 담긴 주술품이다. 인물상은 오늘날까지도 마을 입구에서 수호 역할을 하는 장승과 그 형태가 같다.
목간은 나무편을 얇게 깍아 여기에 문서, 편지, 기타 글을 기록한 것을 말한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많이 출토되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안압지에서 처음 나왔다. 이 가운데 목간 위쪽의 양측 면을 에워 홈을 낸 것이 있는데 이것은 실로 묶어 건물 외벽이나 문에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상태가 깨끗하고 묵서(묵으로 쓴 글)된 흔적이 전혀 없는 것은 다시 사용하기 위해 면을 깍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예는 일본 헤이세이쿄우 유적에서 출토된 20,000 여점의 목간 가운데 70%가 재 사용된 사실과 부합된다. 글씨는 예서와 행서를 먹으로 쓰거나 음각으로 새겼다. 이 가운데에는 관부명인 . 관등명인 , 인명인, 중국 연호인 등이 있어 대부분 8세기 중엽 무렵인 경덕왕대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들 목간이 정밀 판독되면 통일신라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나무조각품(안압지)
통일신라8-9세기

나무배(안압지)
통일신라8-9세기

나무물마개(안압지)
통일신라8-9세기

칠공예품

 

안압지의 서쪽과 남쪽 연못가 석축 아래 뻘층에서 용기류와 특수 용도의 칠공예품이 다수 발굴되어, 통일신라 칠기사의 새 장을 열게 되었다.
주요 유물로는 찬합. 완. 잔 등의 그릇들과, 사용 흔적이 역력한 박달나무로 만든 칠기벼루, 불단 같은 곳에 장식되었던 평탈부재, 쓰임새가 분명하지 않은 밀타회로 된 칠기 조각 등이 있다.
출토된 용기의 대부분은 합과 반으로 얄팍한 목심 안팎에 삼베를 바르고 옻칠을 하였다. 일부 그릇의 굽 밑에는 침각(針刻)이나 주칠로 된 "정(井)","용(龍)","본(本)","궁(宮)", "모(毛)","피궁(彼宮)","월(月)",등의 글씨가 있다. 그릇의 재료는 잣나무이며, 특수한 용도의 칠기 장식은 피나무를 사용하였다. 이 가운데 불단 같은 곳에 장식되었다고 추정되는 칠기 연꽃봉오리 장식은 연꽃잎을 겹쳐서 조각한 8조각의 목심으로 이루어졌다. 이 목심에는 꽃과 나비 모양으로 얇은 은판을 오려 붙이고 그 위에 옻칠을 한 뒤 무늬 부분의 칠막을 긁어 내는 평탈기법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러한 평탈기법은 당시 중국 당나라에서 성행되었던 것으로 그 기법이 우리나라에도 들어오고, 또 이 기법으로 된 유물들이 일본 정창원에도 소장되어 있어 당시 삼국 사이의 활발했던 문화교류상을 엿보게 한다.

칠기그릇(안압지)_
 통일신라8-9세기

칠기꽃장식(안압지)
통일신라8-9세기

토제품

 

완형을 포함하여 복원이 가능한 통일신라시대의 토기 1,600여 점을 포함하여 신라 청자완 조각 . 당백자 조각 등 다량의 도자기 조각들이 출토되었다. 단일 유적에서 이처럼 방대한 양의 토제품이 출토된 것은 처음이며, 다량의 도자기 조각들도 귀중한 자료들이다.
이제까지 알려진 통일신라의 토기들은 고부에서 출토된 것이 대부분인데 비하여, 안압지 출토품들은 실생활 유적에서 출토되어 당시의 생활상을 알 수 잇는 귀중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토기편년에도 중요한 기준이 된다.
주요 유물로는 실생활에 사용하기 편리했던 굽다리 접시. 완. 뚜껑. 접시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밖에 등잔 . 그릇 뚜껑 . 뼈단지 . 장군형토기 . 시루 . 풍로. 매병모양 토기 등이 있으며, 녹유 토기 조각 도 출토되었다.
묵화문완는 표면에 먹으로 "언(言)","정(貞)","다(茶)", 3자와, 구름무늬와 꽃무늬를 일정한 간격으로 쓰거나 그린 것으로, 정선된 태토를 사용했지만 번조 온도는 매우 낮다. 글자 중에는 자가 있어 당시의 차 그릇으로 추정된다.
 풍로는 화구 와 연통을 갖춘 것으로 위쪽에는 다른 그릇을 걸어 끓일 수 있도록 크고 작은 2개의 둥근 구멍이 뚫려 있다. 화구에는 바깥 주연에 점토대의 띠를 덧붙여 화력이 소모를 막았으며, 풍로 안쪽과 천장부에는 불에 그을린 흔적이 남아 있다. 회색 경질계로서 태토에는 고운 모래가 배합되어 있다.

묵화문완(안압지)
통일신라8-9세기

도장무늬토기(안압지)
통일신라8-9세기

풍로(안압지)
통일신라8세기

 등잔은 모두 157개가 출토되었는데 직경 10cm 이내의 것이 대부분이다. 안쪽은 검게 그을려 있으면 기름 찌꺼기가 그릇 벽에 부착되어 있다. 형태는 3종류로 구별되며 태토가 거치고 번조 온도도 낮은 편이다. 한편 접시나 완가운데에는 바닥이나 안팎에 먹으로 글자를 쓰거나 음각 또는 도장으로 글씨를 찍은 것이 있다.글씨는 "신번용왕",용왕신번","용","본궁신번","한사","천","규","정","재","습","십"등이다. 이 가운데 "용왕신번"은 민속 신앙과 관련이 있는 듯하며, 당시 동궁 안에 용왕전이라는 부서가 있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행사때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도장으로 찍은 글씨나 마크 등은 토기 제작소와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안압지에서는 그릇 안팎 면에 붉은 석간주가 묻어 있어 건물에 단청을 하 때 쓰던 단청용 그릇으로 확인되는 토기도 상당수 출토되었다. 이 가운데 손잡이 달린 단지에는 단청 무늬를 그릴 때 주황색을 내는 단청안료인 장단 칠이 묻어 있었다. 또 항아리 2점에는 표면과 안쪽 전체에 석간주가 칠해져 있었고, 그릇표면에는 불에 그을린 흔적이 있어 단청안료를 넣고 끓여 필요한 양만 그릇에 담아 썼던 것으로 보인다.

토기완(안압지)
통일신라8-9세기

토기완의 무늬

글씨와무늬있는토기
통일신라8-9세기

단청용그릇(안압지)
통일신라7-9세기

벼루는 평면이 둥글고 다리가 여러 개인 백족연과, 평면이 둥글고 원통형대로 몸체를 받친 것의 두 종류가 있다. 비교적 구운 온도가 놓고 흑회색을 띠었는데, 이 중에는 먹이 묻어 있는 것과 벼루명이 사용되어 닳아진 것도 있다.
흑회색의 매병형 토기들은 높이 40∼50cm의 대형 그릇들과 정선된 태토를 사용하여 구웠는데 그 형태는 고려청자 매병을 연상시킨다. 통일신라 말기의 것으로 고려토기로 넘어가기 직전의 과도기적인 형태롤 추정된다.

이 밖의 토제품으로는 낚시나 실을 짜는 데 관련되는 그물추와 가락바퀴, 그리고 금속 등을 녹여 물건을 주조하는 데 쓰였던 도가니등이 있다. 도가니가운데 입술 부분에 홈 모양의 주구가 달린 완 모양 도가니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도가니 가운데 그 용적이 가장 큰 것이다.

벼루(안압지)
통일신라8-9세기

토기(안압지)
통일신라9세기

도가니(안압지)
통일신라8-9세기

철제품

 

 안압지에서는 고분 출토품과는 전혀 성격이 다른 실생활용의 철제 도구들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주요 유물로는 종사일이나 고기잡이에 사용되는 가래. 보습. 쇠스랑. 호미. 낫. 작살 등 의 농어구(농사나 고기 잡을 때 사용되는 도구), 투구. 철검 칼. 창 화살촉 등의 무기, 그리고 발걸이들이 있다. 농어구와 목공구는 신라시대의 분묘에서는 출토 예가 맨위에 반구형의 덮개가 씌워져 있으며 그 아래는 두장의 오목한 철판을 맞붙여 만들었다. 함께 출토된 쇠비늘은 이 투구의 아래 가장자리의 못 구멍에 부착되어 목과 어깨를 가린 것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시대의 투구로는 유일한 자료이다.

 

납가위,칼(안압지)
통일신라8-9세기

철제자물쇠,열쇠(안압지) 통일신라8-9세기

쇠칼(안압지)
통일신라7-8세기

철제투구(안압지)
통일신라7-8세기

철제발걸이(안압지)
통일신라7-8세기

철제말재갈(안압지)
통일신라7-8세기

와전류

 

출토 유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조각들을 포함하여 24,000여 점이나 된다. 이 가운데 50여점을 제외하고는 모두 삼국통일 직후부터 통일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260여년 사이에 제작된 것이다. 따라서 통일신라 와전의 집합체하고 할 수 있다.
용도별로 보면 지붕 위에 얹는 수막새·암막새·수키와·암키와·특수기와·장식기와등의 기와류와 바닥에 깔거나 벽이나 불단 등에 장식되었던 전도 많다. 기와로는 다시 암키와 84종·수키와 2종·암막새 106종·수막새 296종·도깨비기와 41종·특수기와 14종·전 53종으로 분류된다. 그런데 이중 수막새의 무늬가 296종이나 되는 것은 동궁이 697년에 창건된 이래 신라가 멸망한 935년까지 건물의 보수가 자주 행해졌음을 말해 준다. 따라서 안압지에서 출토된 많은 종류의 와전은 통일신라 와전의 편년과 연구에 한 전기를 마련해 주고 있다.


녹유귀면와(안압지)
통일신라8세기

녹유귀면와(안압지)
통일신라8세기

수막새(안압지)
통일신라7-8세기

전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옆면에는 내용의 명문이 새겨진 보상화무늬전이다. 따라서 이 전의 제작 연대가 문무왕 20년(680년)이라는 것과, 문무왕 19년에 동궁을 창건했다는 『삼국사기』기록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곱새기와(안압지)
통일신라8세기

녹유수막새,암막새
통일신라7-8세기

암막새(안압지)
통일신라7-8세기

모서리기와(안압지)
통일신라8세기

망새는 10개체분이 출토되었지만 이 중 2점이 복원 전시되어 있다. 특히 복원된 치미는 대방광불화엄경변 상도의 그것과 형태가 흡사하여 주목된다.
이외에도 안아 지에서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편도 다수 출토되었다. 명문은   등으로, 주로 평기와 뒷면에 음각이나 양각으로 새겼다.

전(안압지)
통일신라7세기

건축부속재(안압지)
통일신라7-9세기

글씨있는암키와
통일신라7세기

망새(안압지)
통일신라7-8세기

동물뼈

 

많은 양의 동물뼈가 안압지 바닥 뻘층에서 출토되었다. 종류를 보면 소,말,돼지,개,노루,산양,사슴,멧돼지, 등의 포유류와 꿩, 오리, 닭, 기러기, 거위 등 조류의 뼈를 나누어진다. 이러한 동물뼈의 출토는 『신라 문무와 14년2월에 궁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기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라는 『삼국사기』의 내용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아울러 당시의 동물상과 자연환경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동물뼈-노루,꿩,사슴,산양
(안압지)통일신라7-9세기

골각·납석·기타

 

대표적인 골각제품으로는 골제 꽃·새무늬장식이 있다. 돌물뼈의 한면을 잘 갈아 같은 간격으로 작은 구명을 2개 뚫고 구멍과 구멍 사이의 면에는 새와 꽃을 번갈아 얇게 음각하였다. 이와 같은 새의 형태는 서역으로부터 전래된 무늬이며, 이러한 새의 무늬가 새겨진 바둑알이 일본 정창원에도 보존되어 있어 문화교류를 엿보게 하여 준다

뼈그림장식(안압지)
통일신라8-9세기

뼈그림장식의세부

납석제품은 주로 그릇들과 장식품이다. 그릇으로는 대접,뚜껑,작은 단지 등이 있다. 이 들의 형태는 그릇의 벽이 두꺼운 점을 제외하고는 금속제 용기와 같다.

장식품으로는 향로 뚜껑용 사자상과 사자상, 문진등이 있다. 이 가운데 향로 두껑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사자상은 뚜껑 위에 당당하게 앉아 있는 모습으로서 뚜껑 바닥에는 사자의 코와 입으로 통하는 구멍이 뚫려 있어 이곳을 통하여 향의 연기가 코와 입으로 나오게 되어 있다.

기타 주요 유뮬로는 수정을 들 수 있다. 수정은 수천 개가 출토되었는데 종류는 자수정, 연수정, 백수정으로 형태와 크기도 다양하다. 이들 수정은 안압지 서쪽 제2,3건물터 부근에서 다수 출토되었는데, 금동제의 화불과 보주, 천개 장식 등에 수정이 박혀 있는 것으로 보아 불상의 광배 장식 등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2005.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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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국립 경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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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기구는 나무 주사위와 나무 남근;;이 있고

승마기구는 철제 발걸이(등자)와 말재갈이 있습니다.

이 중 출토된 나무 주사위는 실수로 불타버리고 지금 보존된 것은 모조품입니다.

 

 

 

안압지에서 나온 유물

금속공예품

 

부장품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신라 무덤의 출토품과는 달리 실생활에서 사용되었던 유물이 대부분이다. 대표적인 유물로는 금동완, 금동합, 청동접시, 청동대접, 청동숟가락, 금동가위, 금동용머리, 금동귀면 문고리, 금동 발걸이장식 , 금동 옷걸이장식, 거울, 동곳, 비녀, 반지 등을 들 수 있다. 식생활에 관계되는 그릇으로서는 금동으로 만든 완 . 합, 청동으로 만든 접시 . 대접이 있으며 이밖에 숟가락 등도 잇다. 완은 모두 세가지 형식이 있다. 이 가운데 구연부가 외반 되지 않은 것과 보주형 꼭지가 달린 것은 각각 굽바닥과 뚜껑 안쪽에 '仇'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이들이 한 세트임이 밝혀졌다. 이와 같은 형태의 완은 일본 정창원에도 소장되어 있다. 청동제 접시는 두 가지 형식이 있는데, 이 가운데 굽없이 입이 넓은 접시모양의 그릇은 경주 조양동에서 나온 뼈항아리 뚜껑과 꼭 같은 형식이어서 주목된다.

금동완(안압지)
통일신라8-9세기

금동완,금동합(안압지)
통일신라8-9세기

금동완(안압지)
통일신라8-9세기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도구나 꾸미개로는 청동 숟가락 . 금동가위. 거울. 동곳. 비녀 반지 등이 있다. 숟가락은 통일신라시대 것부터 고려, 조선시대 것까지 포함되어 있다. 이 가운데 숟갈이 원형과 타원형인 것은 통일신라시대의 숟가락으로는 드문 유례에 속한다. 이런 형태가 일본 정창원에서는 당시의 신라 장적 용지에 포장되어 노끈으로 10개씩 세트로 묶여 보존되고 있다.

청동숟가락(안압지)
 통일신라8-9세기

금제장신구(안압지)
통일신라8-9세기

금동용머리(안압지)
통일신라8-9세기

금동가위는 초의 심지를 자르는 데 사용하던 것이다. 잘린 심지가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날 바깥에 반원형의 테두리를 세웠으며 손잡이 쪽에 방울무늬와 당초 무늬가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이와 같은 형태의 가위 역시 일본 정청원에 소장되어 있다.

금동초심지가위(안압지)
통일신라8-9세기

금동초심지가위의세부

금동문고리(안압지)
통일신라8-9세기

생활 장식품으로는 의자의 손잡이장식으로 추정되는 금동제 용머리 장식 1상, 금동도깨비무늬 문고리장식, 금동봉황장식, 발걸이장식, 목제 난간의 위쪽에 꽂았던 금동연꽃보오리 장식, 옷걸이 장식 등이 있다.

금동불

 

못 서쪽 다섯 군데의 건물터를 중심으로 한 연못 안의 뻘층에서 많은 불상들이 출토되었다. 특히 제일 큰 누각이 있었던 제 3건물 터 주변에서 금동제의 판불(넓은 판에 새겨진 부처)과 다량의 화불(화려한 장식이 주변에 조성된 부처)이 출토되었다. 이들 불상은 그 형태와 만든 방법이 다양하고, 제작시기가 7세기에서 10세기 초에 걸쳐 있어서 통일신라 불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이들 불상은 당시 호국불교가 성행하여 안압지의 궁궐 안에 세웠던 내불당에 안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주요 불상과 불구류(불교용품)로는 금동 아미타삼존판불. 금동 보살판불. 금동 여래입상. 금동제 부처님 귀, 다수의 금동광배 조각. 광배 등에 장식되었던 수많은 화불, 보주, 비천공양상 등이 있다.

금동제 판불은 모두 10구가 나왔는데, 중국과 일본의 판불과는 달리 모두 실납법으로 주물된 것이다. 이들은 모두 밑 부분에 장방형의 꼭 다리가 2∼3개씩 달려 있어 불감(부처를 모시는 좁은 공간) 같은 곳에 꽂아 안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가운데 환형의 금동 아미타삼존판불은 완벽한 삼존의 배치와 생동감 넘치는 신체 조형, 삼곡 자세의 율동적인 협시보살상(부처님 양 옆에 시중 드는 보살), 그리고 고도로 발달된 주조기술 등에서 통일신라 초기(7세기 말 ∼8세기 초)의 조각양식을 대표하는 작업으로 손꼽힌다. 한편 금동제의 환불과 비천상, 신장상, 사리봉영상 등은 불상의 광배나 금동번(金銅幡) 등에 입체적으로 장식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들은 부조, 축조, 모조, 등 다양한 기법으로 되어 있어 당시의 조금 기법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밖에 독립된 금동불로는 8세기 후반부터 9세기 초에 걸쳐 제작된 통인의 여래입상이 있다.

금동여래입상(안압지)
통일신라8세기후반

금동여래입상(안압지)
통일신라8세기후반

금동판보살좌상(안압지)
통일신라8세기초

금동 손(안압지)
통일신라8-9세기

금동판삼존불좌상
통일신라8세기초

금동화불(안압지)
통일신라8세기

금동화불의주악상

목제품

 

우리나라의 고대 유물 중 목제품은 많지 않은데 그것은 우리나라의 토양이 산성인 탓에 땅에 묻혔던 것이 오래 보존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압지에서는 바닥의 뻘층 속에서 많은 목제품들이 출토되었다. 출토품 가운데는 통일신라 건물 양식을 엿볼 수 있는 목제 건축 부재 파편과, 당신의 글이 적힌 목간, 그밖에 신앙이나 생활에 관계되었던 유물들이 많아 당시 생활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주요 유물로는 건축 부재로 난간. 부연. 첨차. 주두. 서까래 등이 있으며, 노와 함께 배도 출토되었다. 이박에 물마개. 주사위. 남근. 인물상 등이 있다. 배는 연못의 동쪽 석축 바로 앞에서 전복된 상태로 나왔는데 완형 1척과 2척분의 파편들이다. 완형의 배는 3개의 나무를 통하여 파서 배 모양을 만든 뒤 참나무로 만든 미녀장 모양의 막대기를 배 안쪽 바닥의 앞뒤에 하나씩 가로질러 조립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제일 오래된 배이다. 이밖에 물마개는 못의 동북쪽에 있는 출수구 시설의 맨 앞에 꽂혀 있었는데 이것으로 안압지의 물높이를 조절할 수 있었다.

한편 14면으로 이루어진 주사위는 잔치 때 흥을 돋구는 놀이기구의 일종으로, 이것을 굴려서 위로 나타나는 면에 쓰여진 글의 내용에 따라 행동을 하도록 되어있다. 장방형이 6면, 육각형이 8면으로 기하학적인 조화를 이루었으며 재질은 참나무이다. 글의 내용은 통일신라시대 풍류의 일변을 보여주지만 완전한 해독은 어렵다. 그 내용은 소리 없이 춤추기, 덤벼드는 사람이 있어도 가만히 있기, 여러 사람이 코 때리기, 술을 다 마시고 크게 웃기, 스스로 노래 부르고 스스로 마시기, 술 석잔 한번에 마시기, 팔뚝을 꾸부린 채 다 마시기, 얼굴을 간질어도 꼼짝 않기, 누구에게나 마음대로 노래를 청하기 등이다.

나무주사위(안압지)
통일신라8-9세기

목간(안압지)
통일신라8-9세기

나무남근(안압지)
통일신라8-9세기

남근은 청동기시대의 바위그림이나 신라시대의 토우 등에도 많이 표현된 것으로, 수렵. 어로. 목축. 농경의 풍요를 기원하는 의미가 담긴 주술품이다. 인물상은 오늘날까지도 마을 입구에서 수호 역할을 하는 장승과 그 형태가 같다.
목간은 나무편을 얇게 깍아 여기에 문서, 편지, 기타 글을 기록한 것을 말한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많이 출토되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안압지에서 처음 나왔다. 이 가운데 목간 위쪽의 양측 면을 에워 홈을 낸 것이 있는데 이것은 실로 묶어 건물 외벽이나 문에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상태가 깨끗하고 묵서(묵으로 쓴 글)된 흔적이 전혀 없는 것은 다시 사용하기 위해 면을 깍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예는 일본 헤이세이쿄우 유적에서 출토된 20,000 여점의 목간 가운데 70%가 재 사용된 사실과 부합된다. 글씨는 예서와 행서를 먹으로 쓰거나 음각으로 새겼다. 이 가운데에는 관부명인 . 관등명인 , 인명인, 중국 연호인 등이 있어 대부분 8세기 중엽 무렵인 경덕왕대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들 목간이 정밀 판독되면 통일신라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나무조각품(안압지)
통일신라8-9세기

나무배(안압지)
통일신라8-9세기

나무물마개(안압지)
통일신라8-9세기

칠공예품

 

안압지의 서쪽과 남쪽 연못가 석축 아래 뻘층에서 용기류와 특수 용도의 칠공예품이 다수 발굴되어, 통일신라 칠기사의 새 장을 열게 되었다.
주요 유물로는 찬합. 완. 잔 등의 그릇들과, 사용 흔적이 역력한 박달나무로 만든 칠기벼루, 불단 같은 곳에 장식되었던 평탈부재, 쓰임새가 분명하지 않은 밀타회로 된 칠기 조각 등이 있다.
출토된 용기의 대부분은 합과 반으로 얄팍한 목심 안팎에 삼베를 바르고 옻칠을 하였다. 일부 그릇의 굽 밑에는 침각(針刻)이나 주칠로 된 "정(井)","용(龍)","본(本)","궁(宮)", "모(毛)","피궁(彼宮)","월(月)",등의 글씨가 있다. 그릇의 재료는 잣나무이며, 특수한 용도의 칠기 장식은 피나무를 사용하였다. 이 가운데 불단 같은 곳에 장식되었다고 추정되는 칠기 연꽃봉오리 장식은 연꽃잎을 겹쳐서 조각한 8조각의 목심으로 이루어졌다. 이 목심에는 꽃과 나비 모양으로 얇은 은판을 오려 붙이고 그 위에 옻칠을 한 뒤 무늬 부분의 칠막을 긁어 내는 평탈기법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러한 평탈기법은 당시 중국 당나라에서 성행되었던 것으로 그 기법이 우리나라에도 들어오고, 또 이 기법으로 된 유물들이 일본 정창원에도 소장되어 있어 당시 삼국 사이의 활발했던 문화교류상을 엿보게 한다.

칠기그릇(안압지)_
 통일신라8-9세기

칠기꽃장식(안압지)
통일신라8-9세기

토제품

 

완형을 포함하여 복원이 가능한 통일신라시대의 토기 1,600여 점을 포함하여 신라 청자완 조각 . 당백자 조각 등 다량의 도자기 조각들이 출토되었다. 단일 유적에서 이처럼 방대한 양의 토제품이 출토된 것은 처음이며, 다량의 도자기 조각들도 귀중한 자료들이다.
이제까지 알려진 통일신라의 토기들은 고부에서 출토된 것이 대부분인데 비하여, 안압지 출토품들은 실생활 유적에서 출토되어 당시의 생활상을 알 수 잇는 귀중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토기편년에도 중요한 기준이 된다.
주요 유물로는 실생활에 사용하기 편리했던 굽다리 접시. 완. 뚜껑. 접시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밖에 등잔 . 그릇 뚜껑 . 뼈단지 . 장군형토기 . 시루 . 풍로. 매병모양 토기 등이 있으며, 녹유 토기 조각 도 출토되었다.
묵화문완는 표면에 먹으로 "언(言)","정(貞)","다(茶)", 3자와, 구름무늬와 꽃무늬를 일정한 간격으로 쓰거나 그린 것으로, 정선된 태토를 사용했지만 번조 온도는 매우 낮다. 글자 중에는 자가 있어 당시의 차 그릇으로 추정된다.
 풍로는 화구 와 연통을 갖춘 것으로 위쪽에는 다른 그릇을 걸어 끓일 수 있도록 크고 작은 2개의 둥근 구멍이 뚫려 있다. 화구에는 바깥 주연에 점토대의 띠를 덧붙여 화력이 소모를 막았으며, 풍로 안쪽과 천장부에는 불에 그을린 흔적이 남아 있다. 회색 경질계로서 태토에는 고운 모래가 배합되어 있다.

묵화문완(안압지)
통일신라8-9세기

도장무늬토기(안압지)
통일신라8-9세기

풍로(안압지)
통일신라8세기

 등잔은 모두 157개가 출토되었는데 직경 10cm 이내의 것이 대부분이다. 안쪽은 검게 그을려 있으면 기름 찌꺼기가 그릇 벽에 부착되어 있다. 형태는 3종류로 구별되며 태토가 거치고 번조 온도도 낮은 편이다. 한편 접시나 완가운데에는 바닥이나 안팎에 먹으로 글자를 쓰거나 음각 또는 도장으로 글씨를 찍은 것이 있다.글씨는 "신번용왕",용왕신번","용","본궁신번","한사","천","규","정","재","습","십"등이다. 이 가운데 "용왕신번"은 민속 신앙과 관련이 있는 듯하며, 당시 동궁 안에 용왕전이라는 부서가 있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행사때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도장으로 찍은 글씨나 마크 등은 토기 제작소와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안압지에서는 그릇 안팎 면에 붉은 석간주가 묻어 있어 건물에 단청을 하 때 쓰던 단청용 그릇으로 확인되는 토기도 상당수 출토되었다. 이 가운데 손잡이 달린 단지에는 단청 무늬를 그릴 때 주황색을 내는 단청안료인 장단 칠이 묻어 있었다. 또 항아리 2점에는 표면과 안쪽 전체에 석간주가 칠해져 있었고, 그릇표면에는 불에 그을린 흔적이 있어 단청안료를 넣고 끓여 필요한 양만 그릇에 담아 썼던 것으로 보인다.

토기완(안압지)
통일신라8-9세기

토기완의 무늬

글씨와무늬있는토기
통일신라8-9세기

단청용그릇(안압지)
통일신라7-9세기

벼루는 평면이 둥글고 다리가 여러 개인 백족연과, 평면이 둥글고 원통형대로 몸체를 받친 것의 두 종류가 있다. 비교적 구운 온도가 놓고 흑회색을 띠었는데, 이 중에는 먹이 묻어 있는 것과 벼루명이 사용되어 닳아진 것도 있다.
흑회색의 매병형 토기들은 높이 40∼50cm의 대형 그릇들과 정선된 태토를 사용하여 구웠는데 그 형태는 고려청자 매병을 연상시킨다. 통일신라 말기의 것으로 고려토기로 넘어가기 직전의 과도기적인 형태롤 추정된다.

이 밖의 토제품으로는 낚시나 실을 짜는 데 관련되는 그물추와 가락바퀴, 그리고 금속 등을 녹여 물건을 주조하는 데 쓰였던 도가니등이 있다. 도가니가운데 입술 부분에 홈 모양의 주구가 달린 완 모양 도가니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도가니 가운데 그 용적이 가장 큰 것이다.

벼루(안압지)
통일신라8-9세기

토기(안압지)
통일신라9세기

도가니(안압지)
통일신라8-9세기

철제품

 

 안압지에서는 고분 출토품과는 전혀 성격이 다른 실생활용의 철제 도구들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주요 유물로는 종사일이나 고기잡이에 사용되는 가래. 보습. 쇠스랑. 호미. 낫. 작살 등 의 농어구(농사나 고기 잡을 때 사용되는 도구), 투구. 철검 칼. 창 화살촉 등의 무기, 그리고 발걸이들이 있다. 농어구와 목공구는 신라시대의 분묘에서는 출토 예가 맨위에 반구형의 덮개가 씌워져 있으며 그 아래는 두장의 오목한 철판을 맞붙여 만들었다. 함께 출토된 쇠비늘은 이 투구의 아래 가장자리의 못 구멍에 부착되어 목과 어깨를 가린 것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시대의 투구로는 유일한 자료이다.

 

납가위,칼(안압지)
통일신라8-9세기

철제자물쇠,열쇠(안압지) 통일신라8-9세기

쇠칼(안압지)
통일신라7-8세기

철제투구(안압지)
통일신라7-8세기

철제발걸이(안압지)
통일신라7-8세기

철제말재갈(안압지)
통일신라7-8세기

와전류

 

출토 유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조각들을 포함하여 24,000여 점이나 된다. 이 가운데 50여점을 제외하고는 모두 삼국통일 직후부터 통일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260여년 사이에 제작된 것이다. 따라서 통일신라 와전의 집합체하고 할 수 있다.
용도별로 보면 지붕 위에 얹는 수막새·암막새·수키와·암키와·특수기와·장식기와등의 기와류와 바닥에 깔거나 벽이나 불단 등에 장식되었던 전도 많다. 기와로는 다시 암키와 84종·수키와 2종·암막새 106종·수막새 296종·도깨비기와 41종·특수기와 14종·전 53종으로 분류된다. 그런데 이중 수막새의 무늬가 296종이나 되는 것은 동궁이 697년에 창건된 이래 신라가 멸망한 935년까지 건물의 보수가 자주 행해졌음을 말해 준다. 따라서 안압지에서 출토된 많은 종류의 와전은 통일신라 와전의 편년과 연구에 한 전기를 마련해 주고 있다.


녹유귀면와(안압지)
통일신라8세기

녹유귀면와(안압지)
통일신라8세기

수막새(안압지)
통일신라7-8세기

전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옆면에는 내용의 명문이 새겨진 보상화무늬전이다. 따라서 이 전의 제작 연대가 문무왕 20년(680년)이라는 것과, 문무왕 19년에 동궁을 창건했다는 『삼국사기』기록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곱새기와(안압지)
통일신라8세기

녹유수막새,암막새
통일신라7-8세기

암막새(안압지)
통일신라7-8세기

모서리기와(안압지)
통일신라8세기

망새는 10개체분이 출토되었지만 이 중 2점이 복원 전시되어 있다. 특히 복원된 치미는 대방광불화엄경변 상도의 그것과 형태가 흡사하여 주목된다.
이외에도 안아 지에서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편도 다수 출토되었다. 명문은   등으로, 주로 평기와 뒷면에 음각이나 양각으로 새겼다.

전(안압지)
통일신라7세기

건축부속재(안압지)
통일신라7-9세기

글씨있는암키와
통일신라7세기

망새(안압지)
통일신라7-8세기

동물뼈

 

많은 양의 동물뼈가 안압지 바닥 뻘층에서 출토되었다. 종류를 보면 소,말,돼지,개,노루,산양,사슴,멧돼지, 등의 포유류와 꿩, 오리, 닭, 기러기, 거위 등 조류의 뼈를 나누어진다. 이러한 동물뼈의 출토는 『신라 문무와 14년2월에 궁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기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라는 『삼국사기』의 내용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아울러 당시의 동물상과 자연환경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동물뼈-노루,꿩,사슴,산양
(안압지)통일신라7-9세기

골각·납석·기타

 

대표적인 골각제품으로는 골제 꽃·새무늬장식이 있다. 돌물뼈의 한면을 잘 갈아 같은 간격으로 작은 구명을 2개 뚫고 구멍과 구멍 사이의 면에는 새와 꽃을 번갈아 얇게 음각하였다. 이와 같은 새의 형태는 서역으로부터 전래된 무늬이며, 이러한 새의 무늬가 새겨진 바둑알이 일본 정창원에도 보존되어 있어 문화교류를 엿보게 하여 준다

뼈그림장식(안압지)
통일신라8-9세기

뼈그림장식의세부

납석제품은 주로 그릇들과 장식품이다. 그릇으로는 대접,뚜껑,작은 단지 등이 있다. 이 들의 형태는 그릇의 벽이 두꺼운 점을 제외하고는 금속제 용기와 같다.

장식품으로는 향로 뚜껑용 사자상과 사자상, 문진등이 있다. 이 가운데 향로 두껑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사자상은 뚜껑 위에 당당하게 앉아 있는 모습으로서 뚜껑 바닥에는 사자의 코와 입으로 통하는 구멍이 뚫려 있어 이곳을 통하여 향의 연기가 코와 입으로 나오게 되어 있다.

기타 주요 유뮬로는 수정을 들 수 있다. 수정은 수천 개가 출토되었는데 종류는 자수정, 연수정, 백수정으로 형태와 크기도 다양하다. 이들 수정은 안압지 서쪽 제2,3건물터 부근에서 다수 출토되었는데, 금동제의 화불과 보주, 천개 장식 등에 수정이 박혀 있는 것으로 보아 불상의 광배 장식 등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2008.03.18.

  • 출처

    경주국립중앙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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