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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덕궁(1997년에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해주었습니다.)
창덕궁은 조선시대의 전통건축으로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한 건축과 조경이 고도의 조화를 표출하고 있으며, 후원은 동양조경의 정수를 감상할 수 있는 세계적인 조형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특징이 있다
오늘날 자연스런 산세에 따라 자연지형을 크게 변형시키지 않고 산세에 의지하여 인위적인 건물이 자연의 수림속에 포근히 자리를 잡도록한 배치는 자연과 인간이 만들어낸 완전한 건축의 표상이다. 또한, 왕들의 휴식처로 사용되던 후원은 300년이 넘은 거목과 연못, 정자 등 조원시설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함으로써 건축사적으로 또 조경사적 측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후원은 태종 5년(1405) 창덕궁을 창건할 때 후원으로 조성하였으며, 창경궁과도 통하도록 하였다.
2. 수원화성
수원화성은 축성시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이 현재에도 도시 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200년전 성의 골격이 그대로 현존하고 있다. 축성의 동기가 군사적 목적보다는 정치·경제적 측면과 부모에 대한 효심으로 성곽자체가 "효"사상이라는 동양의 철학을 담고 있어 문화적 가치외에 정신적, 철학적 가치를 가지는 성으로 이와 관련된 문화재가 잘 보존되어 있다.
3. 석굴암과 불국사 (1995년 석굴암,불국사가 동시에)
*석굴암
조각에 있어서 원숙한 조법과 사실적인 표현에서 완벽에 가까운 석가여래상, 10구의 얼굴과 전신이 화려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 인왕상의 용맹, 사천왕상의 위엄, 주실내의 보살들의 유연 우아한 모습, 나한상들의 개성있는 표현 등은 동아시아 불교조각의 최고의 걸작품이라 할 것이다.
특히, 주실내에 봉안되어 있는 굽타양식의 본존불 석가여래불은 고요하고 결가부좌한 모습, 가늘게 뜬 눈, 온화한 눈썹, 미간에 서려있는 슬기로움, 금방이라도 말할 듯한 입과, 코, 길게 늘어진 귀 등 그 모든 것이 내면에 깊은 숭고한 마음을 간직하도록 조성된 것으로서 세계에서도 가장 이상적인 미를 대표하고 있다.
이 석굴은 신라시대의 전성기에 이룩된 최고 걸작으로 평가되며, 그 조영계획에 있어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이 총체적으로 실현된 것이다.
석굴암 석굴은 국보 제24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석굴암은 1995년 12월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록되었다.
*불국사
불국사 전면에서 바라볼때 장대하고 독특한 석조구조는 창건당시 8세기 유물이고 그 위의 목조건물은 병화로 소실되어 18세기에 중창한 것이며, 회랑은 1960년대에 복원한 것이다. 불국사의 석조 구조는 길고 짧은 장대석, 아치석, 둥글게 조출된 기둥석, 난간석 등 잘 다듬은 다양한 형태의 석재로 화려하게 구성되었는데 특히 연화교와 칠보교의 정교하게 잘 다듬은 돌기둥과 둥근 돌난간은 그 정교함, 장엄함과 부드러움이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낸다.
4. 해인사 장경판전
장경판전의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조선 세조 3년(1457) 어명으로 판전 40여 칸을 중창하였고 성종 19년(1488) 학조대사가 왕실의 후원으로 30칸의 대장경 경각을 중건한 뒤 보안당이라 했다는 기록이 있다. 광해군 14년(1622)에 수다라장, 인조 2년(1624)에는 법보전을 중수하였다. 장경판전은 가야산 중턱의 해인사에 위치한 관계로 서기 1488년 조선 초기에 건립된 후 한번도 화재나 전란 등의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보존 가치가 탁월한 팔만대장경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는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장경판전은 세계유일의 대장경판 보관용 건물이며, 해인사의 건축기법은 조선 초기의 전통적인 목조건축 양식을 보이는데 건물 자체의 아름다움은 물론, 건물내 적당한 환기와 온도·습도조절 등의 기능을 자연적으로 해결할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5.종묘
종묘는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유교사당으로서 가장 정제되고 장엄한 건축물 중의 하나이다.
6. 경주역사 유적지구
2000년 12월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경주역사유적지구는 신라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한 유산이 산재해 있는 종합역사지구로서 유적의 성격에 따라 모두 5개 지구로 나누어져 있는데 불교미술의 보고인 남산지구, 천년왕조의 궁궐터인 월성지구, 신라 왕을 비롯한 고분군 분포지역인 대능원지구, 신라불교의 정수인 황룡사지구, 왕경 방어시설의 핵심인 산성지구로 구분되어 있으며 52개의 지정문화재가 세계유산지역에 포함되어 있다.
7. 고인돌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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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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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 열라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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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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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종묘, 팔만대장경과 해인사, 석굴암과 불국사 - 1995년 지정
수원화성, 창덕궁과 비원 - 1997년 지정
고창,화순,강화 고인돌 유적, 경주고적지구 - 2000년 지정
세계 기록문화유산
훈민정음, 조선왕조실록 - 1997년 지정
직지심체요절, 승정원일기 - 2001년 지정
인류구전무형문화유산
종묘제례, 제례악
판소리
강릉단오제
2007.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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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문화재중 가장 많이 찾아가고 애착을 느끼는 곳이다. 성벽주위에 공원 등 많은 녹지공간이 있어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어주는 화성은 97.12 우리나라에서 5번째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수원시민들의 화성에 대한 사랑과 자긍심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다. 해마다 10월이면 화홍문화제가 열리며 정조의 어가행렬이 시가를 지나곤 한다. 98년도 금융기관 구조조정의 여파로 머리가 아플때면 나는 성벽을 따라 걷곤하였고 2백년전 정조의 큰 이상을 담고 건축된 화성은 무언의 격려를 나에게 보내주는 듯 하였다.
조선의 마지막 현왕(賢王) 正祖
(보물 제743호 정조대왕필파초도)
(보물제744호 정조대왕필국화도)
(융릉,건릉: 사적 제216호, 융릉은 사도세자와 그의 부인 혜경궁 홍씨의 무덤이며, 건릉은 정조와 그의 부인 효의왕후 김씨의 무덤이다.)
능행이 잦은 정조는 개혁.효도.왕권강화등 다목적을 구상하여 자신의 재위 20주년과 어머니 혜경궁홍씨의 회갑연을 맞아 1795년 윤2월9일부터 16일까지 화성에서 성대한 잔치를 열었다. 이 <을묘원행>은 애뜻한 효심과 왕조중흥의 자신감을 과시한 문화적 친위구테타였다. 당시 원행때의 세세한 기록은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규장각)에 실려 있는데 이 책은 행차의 결과보고서로 6개월에 걸쳐 모두 8책으로 제작되어 있는데 가마를 제작한 장인의 이름과 근무일수, 춤을 춘 기생이름, 정조의 식사재료비 까지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고 행사모습도 63페이지에 걸쳐 묘사되어 있는데그림과 기록속의 수행원과 말의 숫자까지 일치한다고 한다. (정리의궤: 정조의 모친 혜경궁홍씨의 회갑연을 기록한 책) 2005 복원된 청계천(광교와 삼일교 사이)에는 정조반차도라는 작품이 눈을 끈다. 가로 30cm X 세로 30cm의 세라믹 자기타일 5,120장으로 구성되었다. <설명문을 옮긴다> 1795년(정조19년)에 어머니 혜경궁과 아버지 사도세자의 회갑을 맞이하여 화성과 현륭원에 다녀와서 만든 8일간의 행차보고서이다. 1,779명의 인물과 779필의 말이 행진하는 모습을 담은 63쪽의 반차도는 김홍도 지휘 아래 김득신, 이인문, 장한종, 이명규 등 쟁쟁한 화원들이 합작으로 그린 작품으로 문화적 예술성이 매우 높다.
華城을 완성하였으나 미처 꿈을 다 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고 말았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성곽문화의 백미 : 華城(세계문화유산, 사적 제3호)
화성은 정조가 부왕인 장조에 대한 효심과 왕권강화의 일환으로 정조 18년(1794) 1월에 착공하여 정조 20년(1796년) 9월에 완공되었다. 성의 둘레는 5,744m , 면적은 130ha로 기능에 따라 48개의 시설물이 축조되었으며 주요시설 23개소에는 예술적 가치가 높은 한국고유의 누각을 설치하였다. 성의 모양은 가로로 길게 비스듬하여 봄의 버들잎 같으니 이것은 유천(柳川)의 지명에서 취하였고, 성의 이름을 華城이라 한 것은 장조의 원침이 있는 花山의 花」와 華」가 서로 통하는데서 비롯되었다.
(복원한 화성행궁)
2) 정치.경제.문화적인 기능도 강하다. 도시기반 시설인 4대문, 도로, 수문과 교량, 상가를 설치하고 생산기반 시설인 저수지와 둔전을 경영하여 세계최초의 계획된 신도시를 이루었다.
한국전쟁을 겪으며 파손된 성곽의 복원이 가능하였던 것도「화성성역의궤」10권 10책에 근거함인데 이처럼 중요한 서적이 국가문화재로 지정되지 않고 있음은 유감이다.
(화성성역의궤)
기념비의 높이는 약 4.5m이며 흑색벽돌로 8각으로 쌓았는데 밋밋한 첨성대와 비슷한 모습이다. 화성기적비명은 1991.12에 수원시장이 건립하였고 높이는 약 2m이다.
화성의 주요 시설물
(장안문, 수원시의 상징)
(「화서문과 서북공심돈」: 보물 제403호 )
2) 장대(將臺)
동장대는 일명 연무대라 하며 솟을삼문에 정면 5칸의 잘생긴 기와집으로 화성 시설물중 가장 위용이 있고 평상시에는 군사들을 훈련하고 지휘하는 곳이다. 연무대 성벽밖으로는 넓은 활터가 있다. 정조도 활쏘기를 즐겼다하며 지금은 궁술을 아끼는 수원시민들이 심신을 수련하고 있다.
(동장대에서 바라 본 동북공심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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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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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창덕궁
서울 종로구 와룡동(臥龍洞)에 있는 조선시대의 궁궐이다.
1963년 1월 18일 사적 제122호로 지정되었다. 1405년(태종 5) 완공되었으며, 면적 43만 4877㎡이다. 태종이 즉위한 후 1404년(태종 4) 한성의 향교동에 이궁을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완공하고 창덕궁이라 명명하였다. 그 후 계속 인정전·선정전·소덕전·빈경당·여일전·정월전·옥화당 등 많은 전당을 건립하였는데, 1412년 돈화문을 건립하여 궁궐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 궁전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는데, 1607년(선조 40)에 그 복구가 시작되어 1610년(광해군 2)에 중건이 거의 끝났으나, 1623년 3월에 인정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실화로 불탔으므로 1647년(인조 25)에야 그 복구가 완료되었다....
그 후에도 크고 작은 화재가 여러 차례 있었는데, 특히 1917년 대조전을 중심으로 내전 일곽이 소실되어 그 복구를 위하여 경복궁 내의 교태전을 비롯하여 강녕전 동·서 행각 등의 많은 건물이 해체 전용되었다.
창덕궁은 많은 재앙을 입으면서도 여러 건물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왔는데, 1912년부터는 후원인 금원과 아울러 인정전을 관람할 수 있게 하였고, 8·15광복 후에도 창덕궁과 금원을 공개하고 있다. 창덕궁은 금원을 비롯하여 다른 부속건물이 비교적 원형으로 남아 있어 가장 중요한 고궁의 하나이다.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2.종묘
종 목 사적 제125호
면 적 194,331㎡
지 정 일 1963.01.18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훈정동 1-2
시 대 조선시대
종묘는 조선왕조의 왕과 왕비, 그리고 죽은 후 왕으로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는 사당이다. 종묘는 본래의 건물인 정전과 별도의 사당인 영녕전을 비롯하여 여러 부속건물이 있다.
태조 3년(1394)에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짓기 시작하여 그 이듬해에 완성되었다. 태조는 4대(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추존왕을 정전에 모셨으나, 세종 때 정종이 죽자 모셔둘 정전이 없어 중국 송나라 제도를 따라 세종 3년(1421) 영녕전을 세워 4대 추존왕의 신위를 옮겨 모셨다.
정전은 1592년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608년 다시 지었고, 몇 차례의 보수를 통해 현재 19칸의 건물이 되었다. 정전에는 19분의 왕과 30분의 왕후를 모시고 있다. 영녕전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 1608년 다시 지었다. 현재 16칸에 15분의 왕과 17분의 왕후 및 조선 마지막 황태자인 고종의 아들 이은과 부인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정전 앞 뜰에는 조선시대 83명의 공신이 모셔진 공신당이 있고, 중요무형문화재인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이 전해진다.
종묘는 동시대 단일목조건축물 중 연건평규모가 세계에서 가장 크나, 장식적이지 않고 유교의 검소함이 깃든 건축물이다. 중국의 종묘가 9칸인데 비해 19칸의 긴 정면과 수평성이 강조된 건물 모습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독특한 건축물이며, 동양 고대문화의 성격과 특징을 연구하는데 필요한 귀중한 자료가 담긴 유산이다. 종묘의 정전과 영정전 및 주변 환경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종묘제례와 음악·춤의 원형이 잘 계승되어, 1995년 12월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3.수원 화성
종 목 사적 제3호
면 적 188,048㎡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장안구 연무동 190
시 대 조선시대
화성은 서쪽으로는 팔달산을 끼고 동쪽으로는 낮은 구릉의 평지를 따라 쌓은 평산성이다.
정조는 그의 아버지 장헌세자에 대한 효심에서 화성으로 수도를 옮길 계획을 세우고, 정조 18년(1794)에 성을 쌓기 시작하여 2년 뒤인 1796년에 완성하였다. 실학자인 유형원과 정약용이 성을 설계하고, 거중기 등의 신기재를 이용하여 과학적이고 실용적으로 쌓았다.
성벽은 서쪽의 팔달산 정상에서 길게 이어져 내려와 산세를 살려가며 쌓았는데 크게 타원을 그리면서 도시 중심부를 감싸는 형태를 띠고 있다. 성안의 부속시설물로는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들이 있었으나, 현재에는 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 특히 다른 성곽에서 찾아볼 수 없는 창룡문·장안문·화서문·팔달문의 4대문을 비롯한 각종 방어시설들과 돌과 벽돌을 섞어서 쌓은 점이 화성의 특징이라 하겠다.
화성은 쌓은 후 약 200여년이 흐르는 동안 성곽과 시설물이 무너지기도 하고 특히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파손되었는데, 1975년부터 보수,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효심에서 근본이 되어 당파정치 근절과 왕도정치의 실현 그리고 국방의 요새로 활용하기 위해 쌓은 화성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를 갖고 있어,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4.해인사 장경판전
종 목 국보 제52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 해인사
시 대 조선시대
가야산 중턱에 자리잡은 해인사는 통일신라 애장왕 3년(802)에 지은 사찰로, 왕후의 병을 부처의 힘으로 치료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지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3대 사찰 중 하나이며, 8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기 때문에 법보사찰이라고도 부른다.
장경판전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8만여장의 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건물로, 해인사에 남아있는 건물 중 가장 오래 되었다. 처음 지은 연대는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조선 세조 3년(1457)에 크게 다시 지었고 성종 19년(1488)에 학조대사가 왕실의 후원으로 다시 지어 ‘보안당’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산 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어 임진왜란에도 피해를 입지 않아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광해군 14년(1622)과 인조 2년(1624)에 수리가 있었다.
앞면 15칸·옆면 2칸 크기의 두 건물을 나란히 배치하였는데, 남쪽 건물은 ‘수다라장’이라 하고 북쪽의 건물은 ‘법보전’이라 한다. 서쪽과 동쪽에는 앞면 2칸·옆면 1칸 규모의 작은 서고가 있어서, 전체적으로는 긴 네모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대장경판을 보관하는 건물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장식 요소는 두지 않았으며, 통풍을 위하여 창의 크기를 남쪽과 북쪽을 서로 다르게 하고 각 칸마다 창을 내었다. 또한 안쪽 흙바닥 속에 숯과 횟가루,소금을 모래와 함께 차례로 넣음으로써 습도를 조절하도록 하였다.
자연의 조건을 이용하여 설계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점 등으로 인해 대장경판을 지금까지 잘 보존할 수 있었다고 평가 받고 있다.
해인사장경판전은 15세기 건축물로서 세계 유일의 대장경판 보관용 건물이며, 대장경판과 고려각판을 포함하여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5.석굴암
종 목 국보 제24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진현동 891 석굴암
시 대 통일신라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창건을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에 완성하였으며, 건립 당시에는 석불사라고 불렀다. 경덕왕은 신라 중기의 임금으로 그의 재위기간(742∼765) 동안 신라의 불교예술이 전성기를 이루게 되는데, 석굴암 외에도 불국사, 다보탑, 석가탑, 황룡사종 등 많은 문화재들이 이때 만들어졌다.
토함산 중턱에 백색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인위적으로 석굴을 만들고, 내부공간에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위 벽면에 보살상 및 제자상과 역사상, 천왕상 등 총 40구의 불상을 조각했으나 지금은 38구만이 남아있다.
석굴암 석굴의 구조는 입구인 직사각형의 전실과 원형의 주실이 복도 역할을 하는 통로로 연결되어 있으며, 360여 개의 넓적한 돌로 원형 주실의 천장을 교묘하게 구축한 건축 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뛰어난 기술이다.
석굴암 석굴의 입구에 해당하는 전실에는 좌우로 4구씩 팔부신장상을 두고 있고, 통로 좌우 입구에는 금강역사상을 조각하였으며, 좁은 통로에는 좌우로 2구씩 동서남북 사방을 수호하는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다. 원형의 주실 입구에는 좌우로 8각의 돌기둥을 세우고, 주실 안에는 본존불이 중심에서 약간 뒤쪽에 안치되어 있다. 주실의 벽면에는 입구에서부터 천부상 2구, 보살상 2구, 나한상 10구가 채워지고, 본존불 뒷면 둥근 벽에는 석굴 안에서 가장 정교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이 서 있다.
원숙한 조각 기법과 사실적인 표현으로 완벽하게 형상화된 본존불, 얼굴과 온몸이 화려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 용맹스런 인왕상, 위엄있는 모습의 사천왕상, 유연하고 우아한 모습의 각종 보살상, 저마다 개성있는 표현을 하고 있는 나한상 등 이곳에 만들어진 모든 조각품들은 동아시아 불교조각에서 최고의 걸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특히 주실 안에 모시고 있는 본존불의 고요한 모습은 석굴 전체에서 풍기는 은밀한 분위기 속에서 신비로움의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의 본존불은 내면에 깊고 숭고한 마음을 간직한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모든 중생들에게 자비로움이 저절로 전해질 듯 하다.
석굴암 석굴은 신라 불교예술의 전성기에 이룩된 최고 걸작으로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어 더욱 돋보인다. 현재 석굴암 석굴은 국보 제24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으며, 석굴암은 1995년 12월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록되었다.
6.불국사
불국사는 석굴암과 같은 서기 751년 신라 경덕왕때 김대성이 창건하여 서기 774년 신라 혜공왕때 완공하였다.
토함산 서쪽 중턱의 경사진 곳에 자리한 불국사는 심오한 불교사상과 천재 예술가의 혼이 독특한 형태로 표현되어 세계적으로 우수성을 인정받는 기념비적인 예술품이다.
불국사는 신라인이 그린 불국, 이상적인 피안의 세계를 지상에 옮겨 놓은 것으로 법화경에 근거한 석가모니불의 사바세계와 무량수경에 근거한 아미타불의 극락세계 및 화엄경에 근거한 비로자나불의 연화장세계를 형상화한 것이다.
불국사의 건축구조를 살펴보면 크게 두 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 하나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청운교, 백운교, 자하문, 범영루, 자경루, 다보탑과 석가탑, 무설전 등이 있는 구역이고 다른 하나는 극락전을 중심으로 칠보교, 연화교, 안양문 등이 있는 구역이다.
불국사 전면에서 바라볼때 장대하고 독특한 석조구조는 창건당시 8세기 유물이고 그 위의 목조건물은 병화로 소실되어 18세기에 중창한 것이며, 회랑은 1960년대에 복원한 것이다. 불국사의 석조 구조는 길고 짧은 장대석, 아치석, 둥글게 조출된 기둥석, 난간석 등 잘 다듬은 다양한 형태의 석재로 화려하게 구성되었는데 특히 연화교와 칠보교의 정교하게 잘 다듬은 돌기둥과 둥근 돌난간은 그 정교함, 장엄함과 부드러움이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낸다.
불국사의 높이 8.2m의 삼층석탑인 석가탑은 각 부분의 비례와 전체의 균형이 알맞아 간결하고 장중한 멋이 있으며, 높이 10.4m의 다보탑은 정사각형 기단위에 여러가지 정교하게 다듬은 석재를 목재건축처럼 짜맞추었는데 복잡하고 화려한 장엄미, 독특한 구조와 독창적인 표현법은 예술성이 매우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불국사는 사적·명승 제1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불국사내 주요 문화재로는 다보탑(국보 제20호), 석가탑(국보 제21호), 청운교와 백운교(국보 제23호), 연화교와 칠보교(국보 제22호),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7호), 비로자나불(국보 제26호)등이 있으며, 불국사는 1995년 12월 석굴암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재되었다.
7.경주 역사 유적지구
경주역사유적지구(Gyeongju Historic Areas)는 신라천년(B.C 57 - A.D 935)의 고도인 경주의 역사와 문화를 고스란히 담고있는 불교유적, 왕경(王京)유적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이미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일본의 교토, 나라의 역사유적과 비교하여 유적의 밀집도, 다양성이 더 뛰어난 유적으로 평가된다.
2000년 12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경주역사유적지구는 신라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한 유산이 산재해 있는 종합역사지구로서 유적의 성격에 따라 모두 5개 지구로 나누어져 있는데 불교미술의 보고인 남산지구, 천년왕조의 궁궐터인 월성지구, 신라 왕을 비롯한 고분군 분포지역인 대능원지구, 신라불교의 정수인 황룡사지구, 왕경 방어시설의 핵심인 산성지구로 구분되어 있으며 52개의 지정문화재가 세계유산지역에 포함되어 있다.
경주 남산은 야외박물관이라고 할 만큼 신라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곳으로 신라 건국설화에 나타나는 나정, 신라왕조의 종말을 맞게했던 포석정과 미륵곡 석불좌상, 배리 석불입상, 칠불암 마애석불 등 수많은 불교유적이 산재해 있다.
월성지구에는 신라왕궁이 자리하고 있던 월성, 신라 김씨왕조의 시조인 김알지가 태어난 계림, 신라통일기에 조영한 임해전지, 그리고 동양 최고의 천문시설인 첨성대 등이 있다.
대능원지구에는 신라 왕, 왕비, 귀족 등 높은 신분계층의 무덤들이 있고 구획에 따라 황남리 고분군, 노동리 고분군, 노서리 고분군 등으로 부르고 있다. 무덤의 발굴조사에서 신라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금관, 천마도, 유리잔, 각종 토기 등 당시의 생활상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황룡사지구에는 황룡사지와 분황사가 있으며, 황룡사는 몽고의 침입으로 소실되었으나 발굴을 통해 당시의 웅장했던 대사찰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으며 40,000여 점의 출토유물은 신라시대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산성지구에는 A.D 400년 이전에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명활산성이 있는데 신라의 축성술은 일본에까지 전해져 영향을 끼쳤다.
8.고창,화순,강화 고인돌유적
고인돌은 선사시대 돌무덤의 일종으로 영어로는 돌멘(Dolmen)이라고 한다. 고인돌은 거석기념물의 하나이며 피라미드(Pyramid), 오벨리스크(Obelisk)등 이집트나 아프리카 대륙의 각종 석조물과 영국의 스톤헨지, 프랑스 카르낙의 열석(列石)등이 모두 거석문화의 산물이다.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 중의 하나인 고인돌은 세계적인 분포를 보이고 있으며 지역에 따라 시기와 형태가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동북아시아 지역이 세계적인 분포권에서 가장 밀집된 곳으로 그 중 우리나라가 그 중심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전국적으로 약 30,000여 기에가까운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중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고창·화순·강화고인돌유적(Gochang, Hwasun and Ganghwa Dolmen Sites)은 밀집분포도, 형식의 다양성으로 고인돌의 형성과 발전과정을 규명하는 중요한 유적이며 유럽, 중국, 일본과도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한 특색을 가지고 있다.
또한 고인돌은 선사시대 문화상을 파악할 수 있고 나아가 사회구조, 정치체계는 물론 당시인들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선사시대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는 보존가치가 높은 유적이다. 고인돌 유적은 2000년 12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1)고창 고인돌유적(사적 제391호)
전라북도 고창군 죽림리와 도산리일대에 매산마을을 중심으로 동서로 약 1,764m 범위에 442기가 분포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고인돌 군집을 이루고 있는 지역이다. 10톤 미만에서 300톤에 이르는 다양한 크기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으며 탁자식, 바둑판식, 지상석곽형 등 다양한 형식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다.
2)화순 고인돌유적(사적 제410호)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 효산리와 춘양면 대신리 일대의 계곡을 따라 약 10㎞에 걸쳐 500여기의 고인돌이 군집을 이루어 집중분포하고 있으며 최근에 발견되어 보존상태가 좋다. 또한 고인돌의 축조과정을 보여주는 채석장이 발견되어 당시의 석재를 다루는 기술, 축조와 운반방법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유적으로 평가된다.
3)강화 고인돌유적 (사적 제137호)
인천광역시 강화군 부근리, 삼거리, 오상리 등의 지역에 고려산 기슭을 따라 120여 기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다. 이곳에는 길이 7.1m, 높이 2.6m의 우리나라 최대의 북방식 고인돌이 있으며 우리나라 고인돌의 평균고도보다 높은 해발 100m-200m까지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다.
2007.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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