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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마르퀴스 드 사드(Marquis de Sade)에 대해 알고싶습니다^-^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16,113 작성일2004.01.02
그의 일생과 작품과 사상,
그가 미친 영향같은거에 대해서도 자세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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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 ( Donatien Alphonse Francois de Sade, 1740.6.2 ~ 1814.12.2 )

프랑스의 소설가.
별칭 : 마르키 드 사드(Marquis de Sade)
국적 : 프랑스
활동분야 : 문학
출생지 : 프랑스 파리
주요저서 : 《쥐스틴, 또는 미덕의 불행》(1791) 《알린과 발쿠르》(1795)

파리 출생. 통칭 마르키 드 사드(Marquis de Sade)라 불린 이색적인 작가로, 아버지는 백작이며 외교관이었다. 페트라르카의 애인이었던 라우라의 가계(家系)를 가진 사드가는 프로방스 지방의 명가로서 순수한 귀족이었다. 사드는 처음에 군인이 되어 7년전쟁에 참전하였으며, 후에 사법관의 딸과 결혼을 하였으나, 아르퀴에유의 거지여자 구타사건(1768)과 마르세유의 봉봉사건(1772) 등의 스캔들을 일으켜 투옥된 것을 시작으로 생애의 1/3 이상을 옥중에서 보냈다.

그러나 옥중에서도 정력적으로 집필 활동을 하였으며, 프랑스혁명으로 석방된 후로는 자작 연극을 상연하기도 하고, 정치운동에 열중하기도 하였으나, 공포정치 시대에 반혁명의 혐의를 받고 재차 투옥되었다. 그리고 나폴레옹 체제하에서는 필화(筆禍)로 인하여 죽을 때까지 샤랑통 정신병원에 감금되었다.

작품에는 두 자매의 운명을 대조적으로 묘사한 일종의 교양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쥐스틴, 또는 미덕의 불행》(1791) 《쥘리에트 이야기, 또는 악덕의 번영》(1797), 철학소설의 일종인 서간체 작품 《알린과 발쿠르》(1795), 신랄한 대화체의 작품 《규방철학(閨房哲學)》(1795) 등이 있고, 20세기에 들어와 처음으로 발견된 성도착(性倒錯)의 총목록이라고도 할 수 있는 《소돔:120일》(1904) 등이 있다.

그의 작품은 도착성욕을 묘사한 것이라고 하여, 외설과 부도덕의 이유로 모든 검열을 받아야 했던 관계로 오랫동안 묵살되어 왔다. 따라서 그의 문학적 가치가 드러난 것은 19세기 말엽부터이며, 독일의 의학자와 20세기의 초현실주의 문학자와 실존주의자의 노력에 의하여 복권, 사회와 창조자에 대한 대담한 반항자로서 높이 평가받게 되었다.

그는 성본능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을 시도하여 인간의 자유와 악(惡)의 문제를 철저하게 추구하였다. 그러므로 사드의 문학은 현재와 같은 소외(疎外)의 시대에 다시 돌아보게 되는 필연성을 지닌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아폴리네르가 “이전에 존재하였던 가장 자유로운 정신”이라고 극찬하면서부터 더욱 그 사상적 ·문학적 가치가 재인식되었다. 사디즘(sadism:加虐愛慾)이란 말은 그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위는 백과사전에 나와있는 내용인데.... 다른 내용을 찾다보니 매우 흥미롭군요..


시몬 드 보봐르는 <우린 꼭 사드를 화형시켜야만 할까?(MUST WE BURN SADE)>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사드는 이기적 욕구와 불의와 불행의 순간을 철저히 만끽했으며, 그것의 진실성을 주장했다. 그의 주장의 가장 큰 가치는 우리에게 혼란을 준다는 데 있다. 그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시대에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하나의 본질적인 문제 인간과 인간사이의 관계를 철저히 재점검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든다."

노벨 상 수상자인 시인이자 수필가 옥타비오 파즈는 <사드보다 더한 호색한(AN EROTIC BEYOND SADE)>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그의 삶은 그의 작품 못지않게 특이했다. 그는 사상문제로 오랜 기간 수감생활을 했다. 지적인 측면에서 그는 독립적이고, 타협을 모르는 사람 이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적에게도 관대했다. ‘새디즘’의 철학자로 알려진 그는 기실 그 자신이 희생양 이었으며, 잔혹함의 이론가였지만 실상은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였다."


그는 평생을 박해 속에 산 작가였다. 27년이나 감옥 생활을 했는데, 그 주된 원인은 인간의 욕정과 성적 집착에 대한 글을 썼기 때문이었다. 1772년 그는 성범죄 혐의로 사형을 선고 받았지만 감옥을 탈출한다. 그 뒤 공포정치 시대가 도래하면서 정권에 반대하는 수천명의 시민이 길로틴(단두대)에 희생됐을 때도 그는 또 한번 기적적으로 죽음을 면한다. 혁명의 성공으로, 자유의 몸이 된 사드는 음란 소설 발간 혐의로 또 다시 체포 되어 나폴레옹 정부 밑에서 샤렝턴의 정신병자 수용시설로 보내져 그곳에서 생의 마지막 10년을 보내게 된다.

자유주의자였던 ‘사드’는 왕 혹은 그로 상징되는 기존의 질서는 무너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혁명주의자로 변신하지만, 그의 생활은 구걸하는 여인을 꾀어 알몸에 채찍질하고, 창녀들에게 최음제가 섞인 사탕을 먹여, 그 효과를 실험하는 등 비 인간적인 행위를 저지르기도 했다. 그가 쓴 책들을 보면 강간, 근친상간, 변태적 성행위, 고문 , 간음, 폭력으로 가득차 있다.


그러면 정말 그는 사디스트였을까?
그가 일으킨 사건들을 보면 그랬을 것이라 생각도 드나, 그는 분명 단순한 사디스트는 아니었다. 그는 당시 팽배했던 인간의 도덕적 타락, 특히 귀족과 성직자의 성적 타락, 부도덕, 부패, 폭력 등 모든 악덕을 스스로 실험하고 관찰한 다음 그 체험을 바탕으로 작품을 쓴 것으로 보인다.

결국 ‘사드’의 삶은 하나의 신화가 됐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양 극단을 달리고 있다. 사드 전기 작가 닐 섀퍼는 뉴욕 타임즈에 이렇게 기고한 바 있다. "사드는 문학의 밑 바닥의 한계를 보여줬다. 그의 소설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것이다. 적을 아는 건 승리의 지름길인 법. 인간 본성의 밑 바닥을 파악하는 것은 이 폭력적 시대에 우리의 정신건강을 위해 어쩌면 매우 좋은 일일지도 모른다". 작가 프랜신 뒤 플레시 그레이는 그녀의 저서 'AT HOME WITH THE MAQUIS DE SADE' 에서 역사가들이 사드에 대해 '서구 사상의 가장 명석한 영웅'으로 혹은 '모든 죄악과 음란성을 한데 섞어 놓은 정신 파탄자'로 극단의 엇갈린 평가를 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어쩌면 사드는 그 두가지 면을 다 갖고 있는 사람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욱 더 연구 대상이 되는지도 모른다. 가장 잘 알려진 사드의 소설로는 '저스틴(Justine)', '줄리엣(Juliette)', '소돔에서의 120일(The 120 Days of Sodom)', '앨린과 발코(Alien and Valcour) 등은 그의 소설을 공포와 성적 도착을 뒤섞어 놓은 고백체적 형태의 '악당 문학(PICARESQUE)'이라고 규정짓는다. 그는 또한 '자기 억제는 인간 본성에 위배되는 것'임을 주장한 선구자로도 인정 받고 있다.


사드는 프랑스 혁명 종반부에 'LES LIAISONS DANGEREUSES'의 저자인 꼴데로스 드 라클로등과 함께 픽푸스 감옥에 투옥 된 바 있다. 그곳에서 그는 마리 앙트와넷 을 비롯한 수천명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을 감방 창문으로 지켜보았다. 그는 자신의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이 곳에 갇혀서 눈 밑에서 벌어지는 죽음의 행진을 지켜보는 것은 바스티유 감옥에서 자행된 어떤 폭력보다 수백 배 더 큰 상처를 내게 안겨주었다."

사드의 아내 르네 뻴라지(Renee Pelagie), 혹은 사드 후작 부인은 잘나가는 사교계 인사였으며 신앙심이 돈독한 여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남편의 문학적 재능에 격려를 아끼지 않았으며 생의 대부분을 남편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데 헌신했다. 그녀는 사드가 샤렝턴에 있던 1810년에, 사드보다 4년 앞서서 세상을 떠났다.

61세의 나이에, 사드는 출옥한 지 얼마 안되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악명 높은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의 신작 소설 '줄리엣'의 발간을 막기 위함이 체포의 목적이었다. 그는 재판을 받지 않았다. 대신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나폴레옹 정부는 그를 죽을 때 까지 샤렝턴 정신 병원에 감금시켰다.

샤렝턴은 당시 모범적인 정신병원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원래 수도원이었던 이곳은 신부 출신의 프랑소아 시모네 드 쿨미어가 수용시설로 개조한 곳. 샤렝턴의 원장인 쿨미어는 당시 새로 유행되던 '심리치료' 개념을 도입, 정신 질환자를 인간적이고 진보적인 방법으로 치료하는 데 주력했다. 19세기 초반의 일반적인 정신병자 치료법은 얼음물 목욕요법이나 출혈요법, 혹은 꼼짝 못하게 구속복을 입혀놓는 것등이 고작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정신병원에는 정신 질환자 외에도, 나환자, 저능아, 범죄자등, 사회에서 소외된 많은 사람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쿨미어 신부는 키가 4피트밖에 안되는 곱추였는데, 사드 후작과 친해져 그에게 샤렝턴의 극장 운영권을 맡겼다. 이 극장에서는 치료요법의 일환으로 정기적으로 연극이 상연되었는데, 출연은 환자들이 했고, 대본 집필은 사드가 맡았다고 한다. 물론 대본의 내용은 사드의 기존 소설들 보다는 훨씬 보수적이었다.

사드는 샤렝턴에서 방이 두개 딸린 스위트룸에 기거했다. 강이 내려다 보이는 이 '감방'은 각종 고급 가구와 미술품으로 장식되어 있었으며 250여권의 장서까지 비치되어 있었다. 이러한 호사를 위해, 사드의 가족은 샤렝턴 측에 매년 3천 리브르의 돈을 지불해야 했다.

앙토안 로이 꼴라 박사는 1806년 샤렝턴에 부임했다. 보수적인 의사이자 도덕주의 자였던 그는 나폴레옹 정부와 친분이 있었다. 사드가 샤렝턴에서 계속 글을 쓰고,동료 수감자들과 문학토론까지 하는 걸 보고 충격을 받은 그는 경찰을 불러들였고, 그 와중에 사드의 많은 작품들이 압수되었다. 이 작품들은 '입에 담기조차 힘든 음란성과 불경, 극악무도함의 극치'라는 판정을 받았다.

죽기 4년전인 1810년, 사드는 널찍한 자기 방에서 쫒겨났다. 나폴레옹 정부는 사드로 부터 연필과, 펜, 잉크등 글을 쓸 수 있는 모든 도구를 압수했다. 교도 행정관은 나폴레옹에게 이런 보고서를 올렸다. "사드는 그의 연설과 글로 범죄를 가르치고 있다. 그는 계속 연금되어야 하며, 모든 의사소통의 수단도 박탈되어야 한다.

일설에 의하면 사드는 샤렝턴에 있을 때 막달렌 레클렉이라는 17세의 세탁부와 사랑에 빠졌었다 한다. 막달렌에 대해서 알려진 바라고는, 그녀가 사드의 방을 규칙적으로 방문, 그에게 글 읽고 쓰는 법을 배웠다는 것 외엔 별로 없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사드의 방에 간 것은 사드가 죽기 1주일 전이었는데, 그날 밤 사드는 일기에 막달렌이 자기 방에 2시간 동안 있다 갔으며, 그래서 무척 기뻤노라고 썼다.

사드 후작은 1814년 12월 3일, 샤렝턴에서 호흡 곤란증으로 사망했는데, 스캔들과 선정주의로 얼룩졌던 자신의 삶과는너무나 대조적인 유언을 남겼다. 수풀 속 아무 곳에나 이름 없이 묻어달라는 것. "내 무덤의 흔적이 이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려, 모든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나라는 인간이 깨끗이 잊혀지길 바란다."는 게 그의 희망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의 바램과는 달리 2세기가 넘도록 학자들과 비평가들, 그리고 예술가들은 ‘사드’라는 인물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 위해 그의 무덤가를 끊임없이 배회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유언과는 달리 샤렝턴의 묘지에 묻혔다.

‘사드’에 대한 의견들은 너무나 광범위하다. 몇몇 철학자들 니체, 크라프트 에빙, 앙겔라 카터, 카미류 팔리야 등은 ‘사드’를 간과된 천재, 악의 명예교수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 중엔 그의 작품 'JUSTINE'을 ‘조나단 스위프트’의 풍자소설에 견줄만한 고전으로 꼽기도 한다. 초현실주의 자들은 ‘사드’를 역사상 가장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로 치켜세운다. 반면, ‘루이 봉지’나 ‘로저 샤툭’과 같은 사람들은 ‘사드’가 부활되는 것 자체에 강한반발을 보인다. 그의 문장은 단조롭고 철학은 치졸하며 그가 세계 문학사에 남긴 것은 해독밖에 없다는 것이 그들의 평. 인류문화에 그가 공헌한 것을 굳이 찾자면 새디즘이란 단어를 남긴 것 밖엔 없다는 것이다. ‘샤툭’은 ‘사드’를 악의 전도사로 칭하며, 1965년 무어스 살인사건과 테드 번디의 연쇄살인사건이 ‘사드’의 영향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과연 어떤 평이 옳은 것인가? ‘사드’는 사악한 음란 작가인가, 아니면 중상모략에 빠진 천재인가? 아니면, 그 둘 다인가? ‘사드’의 소설은 현대 문화의 그 어떤 예술보다 극단적인 성향을 갖고 있다. 그의 문장은 한 순간에는 우습다가도 다음 순간에는 역겹고, 일순 날카로운 사회 풍자가 엿보이다가도 어느덧 변태의 극단을 달리는 성적 환타지로 넘어간다. ‘사드’의 소설들을 연속해서 읽다 보면, 어느새 작가 자신의 프로필이 투영된다. ‘사드’의 작품은 그의 환경과 뗄 수 없는 연관성을 갖고 있다. 프랑스 대혁명의 격동기를 겪은 몰락한 귀족. 그는 성인이 된 후 근 30년간을 감옥과 정신병원에서 살았다. 그의 소설은 어쩌면 끊임없이 솟아나는 분노의 샘물에서 퍼올린 물과도 같다. 그는 자신을 억압하는 위선자들을 질타하고, 자신의 광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글을 썼다. 또한 연금되어 있는 자신의 욕정을 환상으로 충족시키기 위해서 도 글을 썼다. 그가 갇혀있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그 환상의 농도도 짙어져 갔다.

'광기의 작가'라는 낭만적 개념에 딱 들어맞는 인물인 ‘사드’는 그 때문에 수 많은 예술가들에게 심리분석용 '로샤르' 시험지의 역할을 해왔다. ‘피터 와이즈’, ‘유키오 미시마’, 노벨상 수상 작가 ‘옥타비오 파즈’ 그리고 영화제작자 ‘피어 빠올로 파솔리니’는 모두 ‘사드’의 정전에 근거한 위작들을 만든 바 있다. ‘사드’는 그 문장의 극단성으로 인해, 예술의 본질에 대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예술의 참 기능은 무엇인가? 사회의 기존 이념을 공고화 시키는 것인가, 아니면 그에 도전하는 것인가? 혹은 문명을 만드는 제도, 정부, 교회를 지지하는 것인가, 반대로 그 모순을 폭로하는 것인가? 극단주의자들을 침묵시키면 어찌 될 것인가? 반대로 그들에게 발언권을 주면 어찌 될 것인가?

사드 후작이 쓴 작품들은 1960년대까지도 프랑스 내에서 공식적 출판이 금지되어 있었다. 지금도 그의 책은 금서 목록에 단골로 오르고 있다.

2004.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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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엠파스 검색 + 여러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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