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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오일에 대해
비공개 조회수 293 작성일2018.11.21
오일러 뭐한 사람임요?
공식 알려줘요.
제발제발ㄴㅇㅇ너로낭론아ㅣㅓㄹ;ㅣ나린오ㅜ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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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온하르트 오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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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온하르트 오일러
Leonhard Euler

레온하르트 오일러의 초상화
출생1707년 4월 15일
 스위스 바젤
사망1783년 9월 18일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거주지 스위스
 프로이센
 러시아 제국
국적 스위스
분야수학물리학 등
소속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
러시아 제국 과학 아카데미
출신 대학바젤 대학교
지도 교수요한 베르누이
주요 업적오일러 각도
오일러 경로
오일러의 공식
오일러의 네 제곱수 항등식
오일러의 다면체 정리
오일러의 등식
오일러-라그랑주 방정식
오일러-마스케로니 상수
오일러 방정식
오일러선
오일러 수
오일러 운동 방정식
오일러의 정리
오일러의 정리 (기하학)
오일러 지표
오일러 피 함수
코시-오일러 방정식
종교개혁 교회(Reformed Church)

레온하르트 오일러(독일어Leonhard Euler라틴어Leonhardus Eulerus 레온하르두스 에울레루스[*]1707년 4월 15일~1783년 9월 18일)는 스위스 바젤에서 태어난 수학자물리학자천문학자이다.

그는 스위스에서 태어나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그가 자신의 뒤를 이어 개신교 목사가 되길 바랐지만, 요한 베르누이에 의해 발탁된 후 그의 제자가 되어, 수학자의 길을 선택한다. 그는 함수의 기호 (1734년에 처음으로 사용)와 같은 수학적 기호 및 법칙들로 인해서 뛰어난 수학자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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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생애[편집]

성장기[편집]

오일러는 스위스 바젤에서 목사인 아버지와 개신교 목사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6명의 아이들 중 첫째로 태어났다.[출처 필요] 그는 바젤에서 태어났지만, 이사를 간 리헬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당대 최고의 수학자였던 요한 베르누이와 친분이 있었으며, 이것은 어린 오일러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후 오일러는 바젤에서 정규 교육을 받았다. 13세에 바젤 대학교에서 입학 허가를 받았고, 1723년에 르네 데카르트와 아이작 뉴턴의 철학을 비교한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당시에 그는 그의 놀라운 수학적 재능을 알아본 요한 베르누이로부터 토요일 오후마다 개인 교습을 받았다. 하지만 오일러가 목사가 되기를 바랐던 부친은 그에게 목사에게 필요한 여러 언어들을 배우게 했다. 그러나 요한 베르누이가 오일러는 위대한 수학자가 될 운명을 타고 태어난 사람이라며, 부친을 설득했다.

1726년에 음향의 전파를 다룬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727년에는 파리 아카데미 문제 풀이 경연에 도전하기도 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절[편집]

이즈음 요한 베르누이의 두 아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에서 일하고 있었다. 하지만 1726년 7월에 니콜라스 베르누이가 충수염으로 사망하였고, 다니엘 베르누이가 수학/물리학부의 교수직을 승계하면서 공석이 된 생리학 교수직에 오일러를 추천했다. 오일러는 당시 바젤 대학교 물리학과 교수직에 지원했다가 탈락해서, 이 제의를 수락했다.

1727년 5월 17일에 오일러는 그 곳에 도착했고, 그는 곧 의학부의 조교수에서 수학부의 교수로 승진하게 된다. 그는 다니엘 베르누이와 같은 집에서 살았으며, 공동 연구 작업도 활발하게 했다. 오일러는 러시아어를 익히며,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정착했다. 그는 또한 러시아 해군의 의무관도 겸임했다.

표트르 대제가 세운 이 아카데미는 교육을 통해서 서유럽과 러시아의 과학 격차를 줄이는 것이 목표였다. 아카데미는 풍부한 재정과 표트르 대제와 귀족들의 장서들을 모아놓은 큰 도서관을 갖고 있었다. 또한 교수들의 강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 학생들의 수는 매우 적었으며, 연구에 중점을 두어서 교수들에게 시간과 자유를 제공했다.

이에 재정 지원을 아끼지 않던 예카테리나 1세는 오일러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날에 사망하는 바람에, 표트르 2세가 왕위를 승계하게 되었다. 하지만 표트르 2세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왕족들이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왕족들은 아카데미의 외국인 과학자들을 신뢰하지 않아서, 예산을 삭감하는 바람에 오일러와 동료들이 어려움을 겪게 된다.

표트르 2세가 사망한 후에는 여건이 나아져서, 오일러는 아카데미 내에서 승진하여, 1731년에 물리학 정교수가 되었다. 2년 후에 이곳의 검열과 외국인 적대에 실망한 다니엘 베르누이가 사직하고, 바젤로 떠났다. 오일러는 그를 대신해서, 수학학부의 장이 되었다.

1734년 1월 7일 오일러는 아카데미 김나지움 출신의 화가의 딸인 카타리나 젤과 결혼했다.

그러나 너무 연구에 몰두한 나머지, 두 눈의 시력을 모두 잃게 된다. 백내장 수술로 잠시 앞이 보이는 행운을 맞았지만, 그 후에는 눈에 엄청난 고통을 느끼고, 다시 시력을 잃게 된다. 17년 동안이나 맹인으로 살게 됐지만, 그는 거기서 굴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력을 잃은 후에 더 열심히 연구해서, 시력이 좋았을 때보다 더 많은 업적을 남기게 됐다고 한다. 그는 그 어떤 수학자들보다도 많은 책을 집필한 것으로 유명한데, 수학뿐만 아니라 천문학광학 등의 수많은 책을 집필했음에도 불구하고, 단 1권도 쓸모가 없는 내용이 없었다. 어떤 사람이 "어떻게 그 많은 책을 집필하면서 그렇게 내용도 잘 쓸 수 있는 거죠?"라고 묻자, "아, 그거요? 사실 내 펜이 나보다 더 똑똑하거든요."라고 얼굴을 붉히면서 말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2018.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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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신

1. 개요[편집]


'두 눈을 감고 우주를 보았다.' - 레온하르트 오일러


Leonhard Euler[1]
1707년 4월 15일 ~ 1783년 9월 18일

스위스의 수학자, 그리고 해석학의 아버지

수학계의 레전드이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수학자. 수학 천재의 대명사로 가우스를 꼽지만, 천재성으로는 오일러도 전혀 밀리지 않는다. 수학을 전공한 사람들은 가우스보단 오일러의 천재성에 무릎을 치는 경우가 많은데 오일러의 직관성은 가히 역사상 최고라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 eπ 등을 사용하기 시작하거나, 막 사용하고 있던 것을 오일러가 사용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했다. 이게 바로 오일러의 위엄.

당신이 대학교, 아니 고등학교만 들어가도 오일러의 업적을 만나 볼 수 있다. 그게 바로 e. 그리고 지수와 로그! 이전까지만해도 로그와 지수는 완전히 별개의 존재였으며[2], 그렇기 때문에 로그의 역함수가 지수라는 게 밝혀진 후 많은 발전이 있었다.[3]

2. 그의 생애[편집]

1707년 스위스 베젤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요한 베르누이[4]에게 수학적 재능을 인정받고 수학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한다. 13세 때 대학에 입학하면서 신학을 전공할지 수학을 전공할지 많은 갈등을 하다가 결국 수학을 전공하기로 하지만, 평생동안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남았다.[5]

그리고 20세인 1727년에 베르누이 형제의 추천으로 러시아의 페테르부르크 아카데미로 건너갔다. 이 페테르부르크 아카데미에는 요한 베르누이의 아들 다니엘 베르누이가 있었는데 1733년에 다니엘이 러시아를 떠나면서 오일러가 다니엘의 자리를 이어받는다. 이때 고작 26살의 나이로 수학과장이 되었다.

1735년에는 집념이 강하고 연구에 온 힘을 다하는 자세를 가진 것은 좋았으나 적당히 해야 하는 걸 잊어서인지 겨우 28살 때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1741년에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초청을 받아 베를린 아카데미로 적을 옮겼다. 그럼에도 러시아 측에서 오일러에게 연금을 계속 보내줬다고 한다. 오일러도 감사의 뜻으로 자신의 논문의 일부는 페테르부르크 아카데미 쪽에 꾸준히 보냈다. 그런데 오일러의 성격이 투박했는지 프리드리히 대왕은 초청해서 불러온 오일러를 "사이클롭스"라고 놀려대서 25년간 베를린에 머물면서도 기분은 영 좋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 다시 러시아로 와 달라는 예카테리나 2세의 요청을 수락해 1766년에 다시 러시아로 되돌아간다. 하루에 20시간 이상을 연구에 매달리니 몸이 버틸 수가 없었던 게 당연했는데 오른쪽 눈을 잃은 후에도 몸을 혹사시키는 버릇을 그다지 고치지 않다가 결국 이때 백내장으로 남은 눈마저 못 보게 되어 나머지 삶을 시각 장애인으로서 지내야 했다. 1771년에 백내장 수술을 했다곤 하는데 며칠간 시력을 회복했다가 다시 잃어버렸다고 한다. 결국 1766년부터 죽는 해까지 약 17년을 맹인으로 지낸 셈이다.[6][7]

시각 장애인이 된 후 그가 연구한 문제 중에는 태양과 달, 지구의 위치를 계산하는 공식이 있는데 이 문제를 낸 것은 영국 해군이었다. 망망대해에서 배의 위치를 계산하려면 태양과 달과 지구의 위치를 알아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중력에 의해 서로 영향을 미치는 3개의 물체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아내는 것은 이른바 '삼체문제'라 하여, 이후 앙리 푸앵카레[8]에 의해 결코 해결될 수 없는 문제(다른 말로 해를 구할 수 없음)임이 증명된 것이었다. 여담으로 이로부터 시작된게 카오스 이론.

그러나 오일러는 "세 별의 위치를 굳이 정확하게 알아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항해하는 배가 자기 위치를 cm 단위까지 파악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이 점에 착안한 오일러는 반복연산방식(알고리즘)을 개발하였는데, 이것은 첫 번째 계산으로 대략적인 값을 알아낸 후 이 값을 계산식에 다시 넣어서 더 정확한 값을 얻어내고, 이것을 반복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오일러는 배의 위치를 km 단위까지 정확하게 알아낼 수 있었고, 영국 해군은 오일러에게 상금을 지급함으로써 그의 공로를 인정했다.[9]

그는 1783년 9월 18일 가족들과의 점심식사 후 학술회의 동료 Anders Johan Lexell와 새로 발견한 행성 우라노스(천왕성)와 그 궤도를 연구하는 도중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쓰러졌고, 몇 시간 후 오일러는 일생 동안 쉼 없이 지속했던 그의 위대한 계산을 영원히 안식케 한다. 죽을 때도 참 차분했는데 석판에 "나는 죽는다."라는 글을 유언처럼 남겼다고 한다.

그 후 오일러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Dekabristov Island에 있는 Smolensky Lutheran Cemetery에 묻혔고 1956년 오일러의 250주년 탄생을 기념하여 그의 묘비는 그가 남긴 유품들과 함께 Alexander Nevsky Monastery에 있는 18th-century necropolis로 이장된다.

일생을 노력하고 또 노력하며, 비록 시련이 그를 고통스럽게 할지라도 결코 좌절하지 않았고 그 시련을 계기로 오히려 스스로를 더욱 영광스럽게 만들었다. 그는 계속된 끊임없는 연구에 시력과 건강을 잃으며 결국에는 뇌출혈로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지만 그의 일생은 단순히 한 수학가의 일생이 아닌 인간이 어떻게 시련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가를 보여준 진정한 인생의 승리자로서의 귀감을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참고로 아내인 카타리나 젤(Katharina Gsell) (1707–1773)은 여성 화가이자 박물학자인 마리아 시비야 메리안(1647~1717)의 손녀다. 마리아에 대한 건 C.M.B. 박물관 사건목록에서도 나오는데 이 만화에서도 나오듯이 17세기에 여성으로서 당차게 자기 뜻을 주장[10]하며 자신이 그림을 그려 아이들을 키우고 수리남까지 직접 가서 야생동물을 관찰하고 그림을 그리던 여장부다!

3. 그의 업적[편집]

오일러의 공식한붓그리기 규칙[11]등으로 유명하다. 여기까진 고등학생 수준이고, 사실 오일러가 했거나 오일러 이름이 들어간 수학 정리나 공식은 너무 많아서...(...) 여기에 적기에는 여백이 부족할 정도다.

주요 활동분야는 해석학(미적분, 복소해석, 수열, 미분방정식)과 정수론 전 분야[12]이고, 기하학(특히 위상수학의 시초로 여겨지는 정다면체와 평면 그래프에 관한 연구. 한붓그리기는 이 연구들에서 빙산의 일각이다.)과 역학 분야에도 많은 연구와 기여를 했다. 때문에 당신이 고도의 수학 관련 학문을 접하지 않았더라도, 전자기학유체역학건축공학 관련 학문을 배우다보면 심심찮게 오일러의 이름을 볼 수 있게 된다. 

한 세대 뒤의 또 다른 천재 수학자인 가우스보다, 오히려 오일러의 연구를 보다 보면 정말 천재적인 직관력의 소유자라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많다. 비유하면 일반인 수학자 기준으로 A에서 B를 발견 후, B에서 C를 발견하고 C에서 D를 발견해나갈때, 오일러의 경우는 B, C가 생략된 채 A \to D로 바로 정곡을 찌르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B, C를 이미 머리 속에서 알고있던 게 아니라 자신도 B, C를 모른채 그냥 A에서 바로 D가 튀어나오는 수준. 실례를 들면 복소수 i의 개념이 처음 등장하고 이 i라는 것을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아무도 감을 못 잡아 뉴턴같은 경우는 i가 등장하는 방정식은 오류라 하고 다른 수학자들도 헷갈려하고 있었는데 오일러는 i^i 등의 값을 정확히 연산해냈다.[13][14]

오일러는 다작의 대명사였던 만큼 논문을 찍어내듯 발표했고, 그 과정에 직관적인 이해에 도움이 되는 것이면 수학적 정의에 모순되더라도 거리낌 없이 사용하였다. 예를 들어 그의 논문에서는 log 0과 같은 표현도 빈번히 등장하며 무한대 분의 1을 서슴없이 더하고 빼기도 하는데, 이것을 엄밀성의 부족이라 부른다면 오일러에 대한 이해가 상당히 부족한 발언이다. 또 하나 예를들면, \sqrt{-5}\sqrt{-3} = \sqrt{15} 같은 간단한 오류[15] 등이 종종 등장하고 대수학의 기본정리에 대해서도 결과는 정확히 예측을 했지만 증명에서는 오류가 존재하여, 당시 20대 초반의 젊은 가우스에게 공격을 받았다. (물론 이때는 이미 오일러가 사망한지 한참 후이기는 했다.) 가우스의 이름이 유럽 전역에 널리 알려진 계기가 바로 당시 최고의 수학자로 이름을 날리던 오일러의 대수학의 기본정리(임의의 복소계수 다항방정식의 근은 한 개 이상의 근을 가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근을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증명의 오류를 찾아내고 비판한데 기인한다. 다만, 가우스의 증명에서도 오류는 발견되긴 했다.

1911년부터 오일러가 생전에 낸 문헌들을 정리해서 "Opera Omnia"라는(라틴어로 "전집"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책으로 묶어내고있는데, 오페라 옴니아는 75권이 넘게 나와있고 여전히 나오고 있다.

3.1. 오일러의 공식[편집]

항목 참조.

3.2.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편집]

그는 페르마가 남긴 자료를 뒤진 끝에, n=4일 경우의 증명을 찾아냈다. 페르마 자신이 증명해서 써놨는데, 오일러가 매의 눈을 부릅뜨기 전까지는 아무도 그걸 찾지 못했던 것. 그는 이 증명을 바탕으로 n=3의 경우의 증명을 해냈지만, 일반적인 경우의 증명에 실패하였다.[16] 그러나 n이 소수(素數, prime number)여야 한다는 점을 제시하였다.

3.3. 감마 함수[17]제타 함수[18][편집]

오일러의 천재적인 직관은 현재 수학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두 함수에서도 작동했었다.

감마함수의 극한형태를 만들어내서 감마함수를 미분한다든가 로그를 씌운다든가의 조작을 가능하게 만들었고, 이를 통해서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같던' γ[19]와의 연관점을 찾아냈다. 다만 감마함수의 경우 오일러가 정의역을 자연수에서 더 큰 범위로 확장시킨 방법은 무한곱으로 나타낸 방법인데 반해 요즘에 감마함수를 정의하는 방법은 르장드르가 해놓은 방법이다. 물론 둘이 동치인 것은 증명 가능하다. 이외에 바이어슈트라스가 감마함수를 정의한 방법도 유명하다.

제타함수에서는 오일러 곱(Euler product)라고 불리는 것을 증명해내서 완전한 수론의 주제로 여겨졌던 소수를 해석학쪽으로 이끌어 내는 것을 성공해낸다.[20] 이것을 살짝 보면 아무렇지도 않게 들릴수도 있지만 정말로 무서운 것이 소수의 규칙성을 분석해내는데 '미분'[21]같은 강력한 무기를 쓸 수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도 만약 오일러가 없었다면 리만 가설 같은 건 안 나왔을 정도로 무서운 것이 오일러 곱이다.

3.3.1. 오일러 곱[편집]

오일러 곱은 제타함수와 소수와의 관계를 기술하는 것이 주 목적인데 증명만 생략하고 간단히 결론만 쓰자면 

\displaystyle \sum^{\infty}_{n=1}\frac{1}{n^s}=\prod^{}_{s\, prime}\frac{1}{1-p^-s}
좌변: \sum n=1 \text{~} \infty는 해당 수열의 무한합을 의미한다
우변: \prod는 해당 수열의 무한곱을 의미하며 p prime은 p가 소수이며 n번째 항의 p에는 n번째 소수가 들어감을 의미한다

오일러가 증명에 사용한 방법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설명하자면 '리만가설(승산)'의 저자 존 더비셔는 이 증명을 독자에게 설명하기 위해서 여러 증명을 찾아놓고, 적어놨는데 오일러가 증명한 원 방법을 살펴보자마자 적어놓은 쪽지들을 그냥 버렸다고 한다. 에라토스테네스의 체[22]와 비슷한 방법으로 S = \sum n^{-s} 라 놓고 양변에 2^{-s}를 곱하면 2^{-s}S=\sum k(2n)^{-s}이 된다. 이때 우변을 살펴보면 모든 짝수에 대한 항만 나온다. 양변을 끼리끼리 빼면 (1-2^{-s})S= \sum m^{-s} (m은 2와 서로소인 자연수)가 된다. 이제 양변에 3^{-s}를 곱하면 (1-2^{-s})3^{-s}S=\sum (3m)^{-s} 이므로 m중 3의 배수에 대한 항만 나온다. 뺄셈하면 (1-2^{-s})(1-3^{-s})S = \sum k^{-s} (k은 2,3 모두와 서로소인 자연수)가 된다. 이젠 5^{-s}를 곱해서 빼고, 7^{-s}을 곱해서 빼고.... 모든 소수 p에 대해 반복하면 오른편 \sum 안에는 모든 소수 p와 서로소인 자연수 1만 남게 되고 왼쪽에는 (1-p^{-s})의 무한곱과 S가 남는다. (1-p^{-s})를 우변으로 이항시키면 끝.

3.4.  이론[편집]

베르누이 방정식으로 유명한 베르누이와 함께 보에 관련된 이론을 고안해냈다. 요약하자면 보가 하중을 받아 휨이 발생했을 때, 가해진 하중과 보의 변위 사이의 관계를 알아낸 것.

또한 오일러는 기둥에 좌굴[23]이 생겨나는 최소 하중인 임계 하중을 계산하는 법 역시 고안해냈다. 우리는 이를 특별히 오일러 임계 하중(Euler's critical load)라고 부른다.

3.5. 유체장의 기술 방법[편집]

유체역학에서 유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기술하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흔히 라그랑주의 방법과 비교되며, 이 둘을 묶어서 Lagrangian and Eulerian specification of the flow field라 말한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라그랑주의 방식은 fluid particle 하나하나의 움직임을 시간과 공간에 따라 기술한다면, 오일러의 방식은 특정한 구역 하나를 지정해놓고 그곳에서의 시간에 따른 유체의 출입에 주목하는 방식이다. 

유체의 particle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맞기에 라그랑주의 방식은 유체역학보단 기존의 역학에서 좌표축을 잡고 물체의 움직임을 기술하는 데에 어울리는 지라 복잡한 유체역학의 계산엔 오일러의 방식을 자주 택하게 된다.

3.6. 기호의 고안[편집]

수학이론 외에도 오늘날 많은 영향을 미치는 훌륭한 업적이 있는데 바로 몇몇 수학 기호를 통일시킨 것이다. 그중 유명한 것 몇 개를 서술하면...

  • 1734~1735년, x의 함수를 f(x)로 표기함

  • 1736년, 약 반세기 전에 이미 발견된 수였으나 표기법이 제각기 따로놀던 자연로그의 밑에 e라는 기호를 씀

  • 1737년, 원주율의 기호로 π를 채택함

  • 1777년, 허수 단위의 기호로 i를 씀[24]

  • 합을 나타내는 기호로 Σ를 도입함


절대적으로 통용되는 표기법은 이 정도이고 몇몇 짜잘한 것도 있다.

  • 삼각형의 내접원의 반지름을 r로 표기함

  • 삼각형의 외접원의 반지름을 R로 표기함

  • 삼각형의 변을 a,b,c로 표기한뒤 그에 대응되는 각을 A,B,C로 표기함

  • 삼각형 둘레의 반을 s로 표기함

  • 자연로그를 lx로 표기함


이 표기법들이 널리 사용된 이유는 오일러가 시대를 초월한 천재이기 때문이기도, 그리고 편리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가 교과서를 저술했던 학자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수학자 윌리엄 던햄 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평하기도 했다.

확실히 현대의 독자가 오일러의 저작을 보면 마치 최근에 쓰인 느낌을 받는다. 물론 그런 느낌을 받는 이유는 오일러가 현대적인 표기법을 사용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영향력이 너무도 커서 후대의 수학자들이 그의 방식(style)과 표기법, 그리고 형식을 채택했기 때문이다.[25]

3.7. 약방의 감초[편집]

연구분야가 굉장히 광범위하고 남긴게 많은 만큼 오래되고 유명한 미해결 문제에선 꼭 한번씩 언급된다. 골드바흐의 추측은 골드바흐가 오일러에게 쓴 편지로부터, 리만 가설의 제타 함수의 유래는 오일러의 연구[26]에서 시작되었으며,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에도 역시 도전하였다. [27]

영국의 윌리엄 로원 해밀턴[28]이라는 수학자는 어렸을때 보인 천재성으로 인해[29] 매우 주목받던 수학자였고, 뉴튼-라이프니츠의 미적분관련 논쟁으로 인해 대륙 수학자와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그 이후 대륙의 오일러와 가우스 수학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아웃풋이 떨어지던 영국민들에게 있어 해밀턴은 다시 한 번 뉴튼의 영광을 재현할 국민적 희망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런 해밀턴이 연구하던 분야가 바로 복소평면에서 축을 하나 더 확장한 3차원 공간 시스템을 찾는 것이었다. 그러나, 10여년의 연구끝에 결국 실패하고 4차원 공간에서 방법을 찾아내는데 이것이 바로 사원수(Quarternion)다. 그리고 이 발견으로 해밀턴은 일약 영국의 국민스타로 떠오르고 영국민은 희열에 들뜨는데... 문제는 한참 옛날에 오일러가 골드바흐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원수와 동일한게 이미 발견되었다. 게다가 오일러는 이것을 발견해놓고도 대수롭지 않은 발견인양 쳐박아두었었다는 사실...[30]
로저 코츠가 있잖아[31]

3D그래픽을 하면 자주 볼 수 있는 위인이다. 물체를 회전 시킬때 오일러 방식(위의 오일러가 발견하고 처박아둔 방식과 다른 방식이다.)과 사원수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 오일러 방식은 복잡한 회전을 하면 축이 겹치는 문제가 있고 사원수 방식은 회전 그래프를 볼 수 없다는 점이 있다.

3.8. 오일러 이름이 들어 간 것들[32][편집]

4. 오일러와 관련된 명언[편집]

오일러의 업적은 너무나도 대단해서 나중에 수학자들은 그의 업적을 칭송하기 위해 몇 마디를 남겼는데 유명한 것을 적자면.

'오일러를 읽고 또 읽어라. 그는 우리 모두의 스승이다.' - 라플라스

'비유할 필요도, 과장할 필요도 없이 오일러는 해석학의 화신이다. 마치 사람이 숨을 쉬는 것처럼 또 독수리가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그는 아무 힘을 들이지 않고 계산을 해냈다' - 프랑수아 아라고[33]

'오일러는 그 시대의 가장 위대한 거장이다.' - 존 폰 노이만[34]

5. 그 외[편집]

  • 오일러가 수학 논문을 냈던 잡지중에 페테르부르크 학술원에서 새로 창간한 "Commentarii Academiae Scientiarum Imperialis Petropolitanae"라는 잡지가 있었는데 오일러가 논문을 워낙 많이 써낸 덕분에(수백 편에 달함) 편집자는 실을만한 내용이 없어서 잡지가 휑해질 걱정 없이 편하게 일했다고 한다. 얼마나 많이 냈는지 페테르부르크 학술원은 오일러가 죽고나서 그의 논문을 무려 50년 동안 우려먹었다. 오일러의 저술량을 평균 내면 1년에 약 800페이지 분량을 저술한 꼴이라고 한다.

  • 수학사가 칼 보이어는 "오일러의 1748년 저작 '무한소 해석 입문'이 해석학에서 갖는 위상은 기하학에서 '원론'이 갖는 위상과 같다."고 평했다.

  • 마치 오일러의 일화인 것처럼 잘못 알려진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는데, 오일러가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 앞에서 당시 유명한 철학자이자 무신론자였던 드니 디드로에게 아무 의미도 없는 수식을 제시하며 "(a+bn)/n=x 이므로 신은 존재합니다. 대답해 주시오!"라고 말하자 수학적 지식이 부족하여 반박할 수단을 찾지 못한 디드로는 그대로 꿀먹은 벙어리 신세가 되었다...라는 것.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 이야기는 유명한 무신론자인 리처드 도킨스마저 저서인 '만들어진 신'에 잘못 인용했을 정도로 널리 퍼졌다.

    박부성 교수(경남대학교 수학교육과 교수)의 조사[35]에 의하면 이 일화는 문법학자였던 디외도네 티보(Dieudonné Thiébault)라는 사람의 책 <베를린에 머문 20년의 추억>에 나오는 이야기가 원전인데, 원래 이야기에서는 오일러가 아니라 '러시아의 한 철학자'이며 수식도 (a+b^n)/n=x가 아니라 (a+b^n)/z=x라고 한다. 또한 디드로가 등장하긴 하지만, 수학 지식의 부재로 답을 하지 못한것이 아니라 낚시 수준이 워낙 한심해서 씹은 것이라고 한다. 디드로는 기하학과 확률 분야에 대한 논문을 쓸 정도로 수학에 조예가 있었다. 따라서 이 정도 수식에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실제로 와전된 이야기들에서는 대부분 디드로가 수학에 무지한 사람으로 나온다. 그리고 성품이 온화했던 오일러가 저렇게 과격하고 비논리적인 공격을 한다는 것도 이상하다. 

    이렇게 잘못된 이야기가 널리 퍼지게 된 것은, 오거스터스 드 모르간이 티보의 책에 실린 일화를 소개하면서 위와 같은 변형을 가하고 디드로에 대해 부정적인 표현을 했기 때문이다. 결국 수많은 사람들이 드 모르간의 저서에 실린 것이라 딱히 원전을 확인하지도 않고 이를 인용하는 바람에 진짜인 것처럼 널리 퍼져버린 것. 참고로 박부성 교수는 드 모르간이 착각했다고 여기는 듯 하다. 실제로 오일러가 당시 러시아에서 주로 활동했던 것이나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점 등등 착각할 만한 요소들이 있었다고 한다.


2018.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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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