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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대백과

백석

[ 白石 ]

정의

해방 이후 「집게네 네 형제」·「석양」·「고향」 등을 저술한 시인.

개설

본명은 백기행(白夔行), 필명은 백석(白石).

생애 및 활동사항

191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출생하였다. 1924년 오산소학교를 졸업하고 오산학교(오산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일 때 조만식, 홍명희가 교장으로 부임한 적이 있고, 6년 선배인 김소월을 동경하면서 시인의 꿈을 키웠다. 1929년 오산고보를 졸업한 후, 1930년 『조선일보』 신년현상문예에 단편소설 「그 모(母)와 아들」이 당선되었고, 조선일보사가 후원하는 춘해장학회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도쿄[東京]의 아오야마[靑山] 학원 영어사범과에 입학하였다. 유학 중 일본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의 시를 즐겨 읽었고, 모더니즘 운동에 관심을 가졌다.

1934년 졸업 후 귀국하여 조선일보사에 입사하면서 서울생활을 시작하였고, 허준, 신현중 등과 자주 어울렸다. 1935년 『조광』 창간에 참여하였고, 같은 해 8월 30일 『조선일보』에 시 「정주성(定州城)」을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 「주막」, 「여우난골족」 등의 시를 발표하였다. 1936년 시집 『사슴』을 선광인쇄주식회사에서 한정판으로 간행하였다. 이 해에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함경남도 함흥 영생고보의 영어교사로 부임하였다. 함흥에서 소설가 한설야, 시인 김동명을 만났고, 기생 김진향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자야’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고야」, 「통영」, 「남행시초(연작)」 등을 발표하였다.

1937년 소설가 최정희, 시인 노천명, 모윤숙 등과 자주 어울렸으며, 「함주시초」, 「바다」 등을 발표하였다. 1938년 함경도 성천강 상류 산간지역을 여행하였고, 함흥의 교원직을 그만두고 경성으로 돌아왔다. 「산중음(연작)」, 「석양」, 「고향」, 「절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물닭의 소리(연작)」 등 22편의 시를 발표하였다. 1939년 자야와 동거하면서 『여성』지 편집 주간 일을 하다가 사직하고 고향인 평북 지역을 여행하였다.

1940년 만주의 신경(神京, 지금의 장춘(長春))으로 가서 3월부터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의 말단 직원으로 근무하다가 창씨개명의 압박이 계속되자 6개월만에 그만두었다. 6월부터 만주 체험이 담긴 시들을 발표하기 시작하였고, 10월 중순 자신이 번역한 토마스 하디의 장편소설 『테스』의 출간을 앞두고 교정을 보러 경성에 다녀갔다. 「목구」, 「수박씨, 호박씨」, 「북방에서」, 「허준」 등의 시를 발표하였다. 1941년 「귀농」, 「국수」, 「흰 바람벽이 있어」 등을 발표하였다. 1942년 만주의 안둥[安東] 세관에서 일하였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신의주를 거쳐 고향인 정주로 돌아왔다. 10월에 조만식을 따라 소설가 최명익, 극작가 오영진 등과 ‘김일성 장군 환영회’에 참석해 러시아어 통역을 맡았다. 1946년 북조선예술총동맹이 결성되었으나 처음에는 참여하지 않았다가 1947년 문학예술총동맹 외국문학 분과위원이 되었다. 이때부터 러시아 문학을 번역하는 일에 매진하였다. 허준이 백석이 해방 전에 쓴 시 「적막강산」,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등을 보관하고 있다가 1947년 말부터 1948년 가을에 걸쳐 서울의 잡지에 실었다. 1948년 『학풍』 창간호에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을 발표하였다. 남쪽 잡지에 마지막으로 발표한 시였다.

1949년 솔로호프의 『고요한 돈강』 등을 번역하는 작업에 몰두하였다. 1953년 전국작가예술가대회 이후 외국문학 분과원으로 이름을 올리고 번역에 집중하였다. 1956년 동화시 「까치와 물까치」, 「집게네 네 형제」를 발표하였고, 「동화문학의 발전을 위하여」, 「나의 항의, 나의 제의」 등의 산문을 발표하였다. 10월에 열린 제2차 조선작가대회 이후 조선작가동맹 기관지 『문학신문』의 편집위원으로 위촉되었고 『아동문학』과 『조쏘문화』 편집위원을 맡으며 안정적인 창작활동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957년 동화시집 『집게네 네 형제』를 정현웅의 삽화를 넣어 간행하였고, 동시 「멧돼지」, 「강가루」, 「기린」, 「산양」을 발표한 뒤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6월에 「큰 문제, 작은 고찰」과 「아동문학의 협소화를 반대하는 위치에서」를 발표하면서 아동문학 논쟁이 본격화되었고, 9월 아동문학토론회에서 자아비판을 하였다. 1958년 시 「제3인공위성」을 발표하였고, 9월의 ‘붉은 편지 사건’ 이후 창작과 번역 등 문학적 활동이 대부분 중단되었다.

1959년 양강도 삼수군 관평리에 있는 국영협동조합으로 내려가 축산반에서 양을 치는 일을 맡았다. 삼수군 문화회관에서 청소년들에게 시 창작을 지도하면서 농촌 체험을 담은 시 「이른 봄」, 「공무여인숙」, 「갓나물」 등의 시를 발표하였다. 1960년 1월 평양의 『문학신문』 주최 ‘현지 파견 작가 좌담회’에 참석하였고, 시 「눈」, 「전별」 등과 동시 「오리들이 운다」, 「앞산 꿩, 뒷산 꿩」 등을 발표하였다. 1961년 「탑이 서는 거리」, 「손벽을 침은」 등의 시를 발표하였다. 1962년 시 「조국의 바다여」, 「나루터」 등을 마지막으로 발표하였다. 10월 북한 문화계에 복고주의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어나면서 창작활동을 일절 하지 못하게 되었다. 1996년 삼수군 관평리에서 사망하였다.

백석은 소월과 만해, 지용이 다져놓은 현대시의 기틀 위에서 새로운 시의 문법을 세움으로써 한국 시의 영역을 넓히는 데 기여한 시인이다. 평안 방언을 비롯한 여러 지역의 언어들을 시어로 끌어들이고 고어와 토착어를 빈번하게 사용함으로써 시어의 영역을 넓히고 모국어를 확장시켰다. 또한 우리말의 구문이 품고 있는 의미 자질을 적절히 활용하여 경험세계를 감각적으로 재현하였다. 백석의 시는 형태적인 측면에서도 정제된 운율이 있는 전통적인 서정시 형식 대신 이야기 구조를 갖춘 서사지향적인 시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때 ‘이야기 구조’는 서사양식처럼 사건의 서사적 진행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장면 묘사와 서술에 의미의 중심이 놓여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아주 짤막한 형태로 이루어진 시들은 대상의 미감을 가장 압축된 형태로 포착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또한 시각 외에 청각과 후각, 촉각, 미각 등 거의 모든 감각을 사용하여 대상을 감각적으로 포착하고 표현해냈다. 구체적인 생활 현장에서 벌어지는 삶의 면면들을 그려낸 시들은 풍속을 시로 재현해냄으로써 풍속사적인 의의를 담고 있기도 하다. 백석의 시 중에서 1인칭 화자의 주관적 독백을 표출하는 전형적인 서정시들은 특별한 수사나 기교 없이 평명한 언어로써 차분하게 내면을 성찰하고 있다.

참고문헌

  • 『정본 백석 시집』(고형진 엮음, 문학동네, 2007)
  • 『백석시전집』(송준 편, 학영사, 2004)
  • 『(증보판) 백석 전집』(김재용 엮음, 실천문학사, 2003)
  • 『백석시전집』(이동순 편, 창작과비평사, 1987)
  • 『다시 읽는 백석 시』(현대시비평연구회 편저, 소명출판, 2014)
  • 『백석평전』(안도현, 다산책방,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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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Basic 고교생을 위한 문학 용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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