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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전주,전북 비지정문화재좀 알려주세요~...
chlg**** 조회수 3,448 작성일2018.11.30
전주,전북 비지정문화재좀 알려주세요~~
지정문화재는 포함아닙니다 내공걸어요~~
전주 우선시해요!! 비지정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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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
절대신
2019 지역&플레이스 분야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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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의 몇 곳과 전주의 비지정문화재를 올려드립니다.


(전주시의 문화재 - 비지정)

 

1.진북사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전북 전주시 덕진구 진북동 977   
시 대  신라


전주시 진북동 도토리골 우측산 절벽에 위치하며 신라 고승 도선국사가 북고사를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그후 관찰사 이서구가 전주부성의 북쪽을 보호하기 위하여 진북사로 개명했다고 전해진다.

 

 

2.약수암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전북 전주시 덕진구 우아동3가 461-15
시 대  현대


전주역 앞 도장산 아래에 위치하고 있으며 1985년 이순남 비구니가 창건했다.


부처님이 중생들을 만나러 산에서 내려오고 계시다. 약수암에 가면 우리 곁으로 한껏 가까이 오고 계신 부처님의 모습을 만나게 된다. 요즘의 중생들은 너무 바빠서 부처님을 만나러 산에, 절집에 갈 기회가 적다. 따라서 점점 부처님을 뵐 기회가 점점 적어지는 중생들을 위해 부처님이 산으로 내려오시는게 아닐까? 그만큼 약수암은 전주 시내 한복판에서 부처님을 뵐 수 있는 흔치 않은 그런 암자이다. 하지만 아직 부처님은 산에서 완전히 다 내려오지는 못했다.


조금씩 산에서 시내로 내려오다 아직 다 내려오시지 않아서인지, 부처님은 법당 맞은편 공원에 덩그러니 서서 인자한 미소로 중생들의 고통을 어루만져주고 계실 뿐이다. 부처님이 다 내려오면 이곳은 중생들이 좀더 쉽게 부처님을 뵙고 자신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소원을 빌게 될 것이다. 따라서 약수암은 아직은 완전한 절집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지 못하다.


우리가 머리 속으로 그리는 대웅전도 없고, 탑을 따라 돌만한 공간이나 여유도 없고, 사바세계의 중생을 번뇌에서 구할 범종도차 마련되어 있지 못하고, 부처님의 상호 위로 내리는 비나 눈을 맞아줄 전각도 없는 형편이다. 그렇지만 멀지않은 바로 이곳에 부처님이 계시기에 가까이에서 부처님을 만날 수 있는 바로 그곳, 전주 도장산 약수암이다.

 

 

3.실상사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전북 전주시 덕진구 진북동 산 89 
시 대  조선시대


전주시 진북동 어은골 어은터널옆에 위치하고 있으며 조선왕조 중엽에 창건된 사찰로 알려지며 1918년경 학승스님이 복원했으며 시내 도로변에 위치하여 왕래가 편하다.


실상사는 작고 아담한 사찰이다. 실상사 경내의 정면에는 대웅전이 위치해 있고, 그 좌우에는 산신각과 요사채가 일직선으로 놓여 있는 매우 간결한 배치를 하고 있다. 특히 산신각은 요즘 사용하지 않아 많이 퇴락한 상태이다. 대웅전에는 특이한 벽화가 그려져 있어 기억에 오래 남는다. 일반적인 벽화로 흔히 볼 수 없는 인로왕보살도나 주악천인상도 있으나, 그와 더불어 토끼와 거북이 설화 등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4.승암사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전북 전주시 완산구 교동 1가 945번지
시 대  신라


공간소개신라 헌강왕 2년 도선국사가 창건했으며, 진묵대사와 제자 원응선사가 이곳에서 수도했다. 그 후 임진왜란때 불탔으며 영조 16년(1740년)에 조관대사가 재 건립하였다. 전주 근교에서 가장 큰 대법당과 만응대선사 부도 1기와 범종 그리고 고려때로 추정되는 미륵불을 봉안하고 있다.


승암산은 스님의 모습을 닮았다고 한다. 때문에 승암산은 멀리서 바라보아야 한다. 본래 불성을 간직한 사람은 어느 산이라 바라보면 산의 모습에서 부처님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렇듯이 멀리서 승암산을 바라보면 산과 바위의 모습이 영락없는 스님의 형상이 띠고 있다. 그래서 승암산이라 부르는 것을 누구나 인정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런 산 아래에 또 승암사가 있다.


승암산의 정기를 고스란히 받은 승암사에는 여러 고승들이 주석하여 스님들의 법력이 강한 그런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전북지방에서 가장 이름난 고승인 진묵스님이 이곳 진묵굴에 머물며, 약수를 마시며 수도했다고 한다. 조선후기에는 용담 조관 스님이 중창을 했고, 근대에는 만응스님이 중창을 했으며, 해안 봉수스님과 더불어 한벽선원과 승암강원을 열어 이 지역을 불교계를 육성하는 등 그 법력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따라서 스님을 닮은 승암산 아래 위치한 승암사는 자연히 스님들의 법력이 강해 오늘날에도 이곳에 가면 도광스님의 낭랑한 독경소리와 설법소리를 들을 수 있다. 시내에서 가깝고, 길에서도 훤히 보이는 곳에 위치하여 누구에게나 가깝게 다가오는 그 곳이 바로 승암산 승암사이다.

 

 

5.선린사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전북 전주시 덕진구 인후동1가 산 152-2 
시 대  현대


전주시 인후동 기린봉 중턱에 자리한 신흥사찰로 1962년에 창건되었으며 신도가 많고 기린봉 가파른 중턱까지 도로가 개설되어있다.선린사는 도심에 위치한 사찰로서 젊은 기운이 넘치는 곳이다. 절을 에워싼 기린봉이 범상치 않은 형국인데다, 기린봉을 따라 사찰 초입에 위치한 고시원에 공부하는 젊은이들이 머물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경내에 들어서도 젊은 활기가 여전하다.


산사의 적막을 깨는 청아한 독경소리가 울려 퍼지고, 전각을 오가며 탑과 단청을 바라보는 이들의 눈이 경이롭고, 부처님께 절하는 신도들의 무릎이 마루바닥에 닿는 소리가 리드미컬하다. 인적이 끊겨 고즈넉한 사찰이 아니라 끊임없이 사람들로 넘쳐나는 그런 사찰인 것이다. 이처럼 인재를 키워낼 수 있는 기린봉의 정기가 웅집된 선린사에는, 부처님의 가피력에 기대려는 많은 젊은이의 발길을 잡아채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영조 연간에 처음 세워진 선린사는 1966년에 중창주의 모친인 유복희 보살의 발원으로 면모를 일신하게 되어 조계종 사찰로 법등이 이어져 왔다. 그러다가 1988년에 태고종 사찰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때문에 이곳에는 중창주 보살의 진영을 모시거나 봉향하는 전각을 별도로 조성해 놓은 것이 특징이다.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노력하는 젊은이들이 공부를 할 수 있는 고시원을 조성하여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곳, 선린사는 도심 사찰이 속인들을 절집으로 불러 모을 방법을 모색하고 실천하는 활기찬 도량이라 할 만하다.

 

 

6.서고사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전북 전주시 덕진구 만성동 산 84  063-211-3417  
시 대  통일신라


공간소개전주시 팔복동 2공단에서 이서행 도로로 2km 지나 전주시 서쪽 황방산 방향으로 500m 산중턱에 위치하고 있으며 후백제 견훤이 전주에 도읍을 정하고(900년) 국운 회복과 백성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명덕화상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7.견훤왕궁터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전북 전주시 완산구 교동 산 9-1   
시 대  후삼국시대


공간소개900년에 견훤에 의해 이곳 전주에 도읍을 정한 후백제 왕궁 터로 현재까지 그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견훤왕궁지는 전주 동남 쪽 에 위 치 한 해발 306m의 승암산 동편에 있는 동고산성에 위치해 있다. 동고산성이 후백제 견훤의 왕궁터였다는 것은 1980년 산성을 개괄 조사하다가 산성 내부 옛 건물터에서‘전주성명연화문와당’이 발견됨으로써 견훤의 왕궁터 주장이 사실로 증명되었다. 와당에는 연꽃무늬 장식과 함께 ‘전주성’이란 성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견훤의 탄생설화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내려온다.


옛날 광주 북촌에 한 부자가 살았는데 그에게 아름다운 딸이 하나 있었다. 딸이 아버지에게 아뢰기를 밤마다 자색옷을 입은 남자가 침실에 와서 자고 간다고 하자 아버지가 그 남자의 옷에 실을 꿴 바늘을 꽂아 두라고 일러서 그 딸이 말대로 했는데, 이튿날 따라가 보니 북쪽 담 밑에서 실끄트머리가 발견되었는데, 바늘은 큰 지렁이의 허리에 꽂혀 있었다. 얼마 후부터 그딸에게 태기가 있고 후에 아들을 낳았다. 15세가 되자 스스로 견훤이라 이름하고 900년에 후백제를 건국하여 완산군(현 전주)에 도읍을 정했다.

 

 

8.박진 효자비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전북 전주시 완산구 교동26-3   
시 대  조선시대


이 비석은 1398년(홍무 31)에 세워진 것을 1724년(경종 4)에 중각한 것이다. 비각 안에는 1805년(순조 5)에 후손 필성이 지은 ‘전주부 효자박진정려기'가 걸려있다.

 

 

9.전북대 석불입상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전북 전주시 덕진구 덕진동1가664-..   
시 대  고려시대


이 불상은 머리가 결실되고 몸만 대석에 안치되어 있다. 몸체는 단단하면서 풍만한 느낌을 주지만 몸의 굴곡이 전혀 없어 추상적인 느낌을 준다. 법의는 좌견편단으로 어깨에서부터 무릎까지 내려져 있고 그 밑으로는 속옷이 발목까지 덮고 있다.

 

 

10.덕진공원 3층석탑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전북 전주시 덕진구 덕진동2가1314..   
시 대 고려시대


이 석탑은 원래 익산군 왕궁면에 있었으나 1922년에 전주 풍패지관(전주객사)로 옮겼다. 이후 현재의 위치로 다시 옮겼는데 그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1927년에 박기순이 덕진공원을 조성하였던 무렵으로 추정된다.

 

 

11.남고진 사적비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전북 전주시 완산구 동서학동산228   
시 대  조선시대


이 비석은 남고산성의 수축경위와 남고진 설치의 전말을 기록한 것으로 1846년(헌종 12)에 세워졌다. 비신의 높이는 132㎝, 폭은 54㎝, 두께는 26㎝이다. 비석의 글씨는 창암 이삼만이 썼다고 전해진다.
 

 

12.암각서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전북 전주시 완산구 동서학동산 153..   
시 대  조선시대


만경대 남쪽 바위에는 ‘만경대(萬景臺)’라고 쓴 글씨와 정몽주가 지었다는 시가 새겨져 있다. 이 시는 포은 정몽주가 1380년(고려 우왕 6) 이성계의 종사관으로 운봉에서 황산대첩을 거두고 돌아가는 길에 이곳에 올라 고려를 걱정하며 지은 시라고 한다.

 


(전북의 문화재 - 비지정)


1.최여겸 순교지


종 목  고창군 향토문화유산 제1호
지 정 일  2004.6.8
소 재 지  전북 고창군 공음면 석교리 186
시 대  조선시대

 
최여겸(천주교명 마티아)순교지는 고창지방 최초의 순교지이다. 최여겸(1762~1801)은 정조 15년(1791) 신해박해 당시 체포되어 무장현 개갑장터(최여겸이 태어난 곳)에서 자신이 포교했던 천주교인들과 주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참수되었다.


이곳은 천주교 순교의 하한선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2.도산서당


종 목  고창군 향토문화유산 제2호
지 정 일  2004.06.08
소 재 지  전북 고창군 고창읍 도산리 136
시 대  조선시대

 
도산서당은 섬뜸서당으로 불려지기도 했다. 17세기경에 세워진 대표적인 서당으로 1907년에 인근 학동들을 위한 강당(만수당)으로 쓰였으며 1934년 도산초등학교가 개교했을 때에는 입학식과 교실이 준비되기 전까지 1학기동안 사용되었다.

 

 

3.도동사


종 목  고창군 향토문화유산 제3호
지 정 일  2004.06.08
소 재 지  전북 고창군 신림면 가평리 566~1
시 대  일제강점기

 
가평마을 내에 위치한다. 외삼문 안에는 정면 4칸, 측면 1칸의 방호정사가 위치하며, 그 뒤에 다시 외삼문이 있고, 그 뒤편에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을 한 도동사가 배치되어 있다.


이 곳은 원래 고석진이 후학을 가르치던 방호정사(1923년)가 있던 곳인데, 1928년 후학들이 방호정사의 안쪽에 사우를 지어 도동사라 이름하고 최익현을 주벽으로 고석진을 함께 모셨다.

 

일제시대에는 치안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향사가 금지되었다가 1947년에 와서야 부형하였다.

 

 

4.남당 회맹단


종 목  고창군 향토문화유산 제4호
지 정 일  2004.06.08
소 재 지  전북 고창군 흥덕면 용반리 460
시 대  조선시대

 
남당 회맹단은 조선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 지방 출신인 채홍국 등 90여 명이 이 해 9월 18일 남당에 모여 단을 쌓고 창의하였다. 그 후 정유년(1597)에 왜란이 재발하자 옛 동지를 모아 다시 창의하였으나 호벌치전투에서 채홍국을 비롯하여 의병의 대부분이 전사하였다

 

 

5.화동서원


종 목  고창군 향토문화유산 제5호
지 정 일  2004.06.08
소 재 지  전북 고창군 대산면 매산리 743-1
시 대  일제강점기

 
화동서원은 1912년에 건립한 사우로, 고려 문안공 김양감을 비롯해 김인우, 김승길, 김오행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건립시기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구조적인 면에서 전형적인 서원의 모습을 잘 담고 있으며 관리상태가 양호하고 서원이 갖추어야 할 강학공간과 사묘공간을 잘 갖추고 있다.

 

 

6.석탄정


종 목  고창군 향토문화유산 제6호
지 정 일  2004.06.08
소 재 지  전북 고창군 고창읍 율계리 341
시 대  조선시대

 
석탄정은 선조 14년(1581)에 석탄 유운선생이 건립한 정자로 조선시대의 건축양식을 갖추고 있다. 유운선생은 인품이 고매하고 문장이 출중하여 선조때 청암찰방을 고사하고 낙향해 석탄정을 건립했다.

 

 

7.도암서원


종 목  고창군 향토문화유산 제7호
지 정 일  2005.06.17
소 재 지  전북 고창군 공음면 칠암리 819
시 대  조선시대

 
공음면 소재지에서 법성쪽으로 삼거리에 하마비가 있고 건너편에 홍살문이 있으며, 외삼문(솟을대문) 안에 강당, 뒤로 정려와 봉안각이 좌우로 있고 내삼문(효충문)안에 사우가 있어 일직선으로 배치하고, 강당 옆에 유생실이 있고 마당 한쪽에 가건물, 그 옆에 화장실이 있다.
 

사우는 도암사이니 3칸(6.2× 4m) 맞배지붕 목조한와 건물이다. 호박주초 두리기중에 창방과 평방을 올린 양식이며, 창방과 평방 위에 도리를 올리고 그 위에 처마의 연목을 걸고 부연을 단 형식이다. 창문은 3칸에 2짝씩 6짝이고 빗살무늬이다. 전면 단청했다. 안에 영모당 김질을 주벽으로, 증손  은송당 김경철과 현무제 김익철을 좌우로 배향했다.


정려와 봉안각의 건물 구조는 사우와 같고 전면 단청했다.봉안각은 전면 벽으로 막고 판자문으로 봉쇄했다.강당은 방풍을 단 한와 팔작집이다. 도도록하게 다듬은 덤벙주초와 두리기중이고 2간은 대청, 좌우로 방을 등여 방에는 2짝문을 재청에는 각각 4짝문으로 격차장이다.


영모당 김질은 조정과 중국에 까지 알려진 대효일 뿐 아니라 충을 겸하여 녹권 봉안각 갖추어 있는데, 영모당, 정려, 봉안각이 다 오랜 역사를 추정할 수 있고, 봉안각의 녹권함과 하마비 또한 이 고장 유일한 유물로 문화재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고 사료된다.


8.영등동 유적


종 목  익산시 향토유적 제1호
지 정 일  2002.05.30
소 재 지  전북 익산시 영등동 814
시 대  선사시대


영등동유적지는 영등동택지개발 과정에서 1995년부터 1996년까지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가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청동기시대 장방형집터 3기와 원형집터 2기 등 총 5기의 집터가 남아 있던 곳이다. 이중에서 장방형집터 1기는 본래의 영등유적지에 있었고, 나머지 4기는 조금 떨어진 주변지역에서 이전해온 것들이다. 지금은 조사 후 모두 복토하여 흔적을 찾을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각자를 여러 곳에 널려놓을 형편이 아니었던 것이다. 또한 호남 최초로 초기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주구묘가 확인된 지역이다.

 

청동기시대 주거지는 평면 형태에 따라 장방형, 방형, 원형으로 구분되는데 장방형 주거지는 전기무문토기시대에 해당하는 것으로 내부에 노지가 설치되었고, 방형과 원형 주거지는 중기무문토기시대의 송국리형 주거지와 같은 유형이다.

 
영등동 택지조성 전에 실시한 지표조사에서 마제석부와 무문토기편, 화살촉과 돌도끼 등이 수습되었으며, 1995년부터 1996년까지 3차에 걸쳐 조사한 결과 3개 지역에서 청동기시대주거지 장방형집터 7기, 방형집터 5기, 원형집터 12기와 원삼국 마한시대의 주구묘 5기가 조사되었다.

 

영등동유적에서 마한시대의 수장급 묘로 보이는 주구묘 1구가 조사됨으로써, 익산지역 마한시대의 문화를 확인할 수 있는 유적이 되었다.

 

 

9.자명사 대웅전 목조여래좌상


종 목  익산시 향토유적 제3호 
지 정 일  2002.05.30
소 재 지  전북 익산시 용안면 법성리 279번지 
시 대  조선시대


원래 익산시 자명사(自鳴寺) 대웅전에 모셔져 있었는데 2001년 4월 보안상의 이유로  김제시 모악산에 있는 금산사(金山寺)에 위탁하였으며 2009년 4월 자명사에서 다시 환수하였다. 목조에 도금을 한 좌불상(坐佛像)으로, 전체 높이 94cm이다. 복련과 앙련이 붙어 있는 청동 좌대 위에 고개를 약간 숙인 모습으로 앉아 있다.


법의는 앞부분을 넓게 틔우고 양 어깨를 모두 덮는 통견식(通肩式)이며, 목에는 삼도(三道)가 표현되었고, 머리는 나발(螺髮)이다. 수인(手印)은 중추중생인으로 오른손은 가슴 부근까지 들어 첫째 손가락과 셋째, 넷째 손가락을 마주잡고 있고, 왼손은 오른쪽 무릎 위에 올리고 첫째와 셋째, 넷째 손가락을 대고 있는 모습이다. 형태로 볼 때 조선시대 후기의 불상으로 추정된다.

 

 

10.아석정


종 목  익산시 향토유적 제4호
지 정 일  2002.05.30
소 재 지  전북 익산시 금마면 서고도리 산13
시 대  일제강점기


금마면 서고도리 서계마을의 산 중턱에 위치한다. 1934년 소진홍이 선조 대대로 살아오던 자리에 터를 닦아 건립하였다. 뒤쪽은 숲으로 이어지고 앞으로는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아석정은 산 중턱에 터를 고르고 거칠게 치석한 장대석으로 낮은 기단을 조성하였다. 기단 상면은 현재 시멘트로 마감되어 있으며 그 위에 한자 높이의 민흘림 원형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 정면 3간, 측면 2간의 정자를 남서향으로 구성했다. 정면은 세 간 모두 6자(1820cm)로서 주간이 일정하며, 측면의 주간은 5자(1520cm) 길이이다. 마루는 우물마루로 1m 높이로 비교적 높게 구성하였는데 기둥뿌리와 마루를 구성하는 멍에 사이에 人자형으로 기둥마다 가새를 설치하였다. 마루 주위는 평난간을 시설하였다. 난간의 높이는 한자 남짓 되며 전면은 아자형으로 나머지 삼면은 안상을 뚫은 궁창으로 머름을 꾸미고 있다.

 

공포는 초익공구조이다. 쇠서 전면은 직절하였고 안쪽은 사절하여 보아지 역할을 하는 일반적인 구조이다. 주간은 매 칸마다 창방 위에 4개의 소로를 배설하여 장여를 받게 했다. 도리는 굴도리인데 기둥마다 도리와 기둥머리 사이에 두 개의 원형철근 꺾쇠를 V자형으로 박아놓아 도리를 고정하고 있다.

 

가구는 전후 평주에 두 개의 대들보를 걸고 대들보 위에는 종보가 거의 맞닿도록 충량과 반턱맞춤으로 놓여 있고 그 위에 판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는 5량식 구조이다. 종도리 밑 상량대에는‘세재갑술4월13일오시입주동일미시상량 산수우락풍월위정’이란 상량문이 남아 있어 1934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대들보에 직각으로 걸려 있는 충량 위에는 외기를 짜고 지붕을 구성했는데, 겹처마 팔작집으로 근래에 한식 오지기와로 번와하여 상태가 양호하다.

 

전체적으로 단정한 모습이며 목가구의 기법에 있어서도 비교적 전통적 기법을 유지하고 있다.

 

 

11.수덕정


종 목  익산시 향토유적 제5호
지 정 일  2002.05.30
소 재 지  전북 익산시 여산면 태성리 산 185
시 대  일제강점기


여산면 태성리 화산 중턱, 남서쪽으로 현천저수지를 바라보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조선 고종 때의 문신 농은 송기인의 뜻을 받들어 1938년에 건립하였다.

 
초석은 대리석을 흘림기법으로 정교하게 다듬은 높이 67㎝의 원형 장초석이며 기둥은 두리기둥이다. 평면은 정면 2간, 측면 2간의 정방형이다. 주간은 6자(1820mm)로서 동일하다. 마루는 우물마루로서 지면에서 90여cm 떨어져 있고 주위에는 난간을 시설했다. 난간은 띠장과 지방 사이에 몇 개의 각재를 끼워 간단히 구성했다. 전면은 출입을 위해 난간이 끊어져 있고 그 앞에 두 단의 콘크리트 계단이 각각 놓여 있다.

 

공포의 구조는 기둥 머리에서 창방과 익공쇠서가 직교하며 쇠서는 주두를 물고 있는 초익공 구조이다. 쇠서의 전면은 직절하였고 안쪽은 사절하여 대들보를 받게 하는 보편적인 구조이다. 주간은 소로수장집과 같이 4개의 소로를 놓아 장여를 받게 했다.

 

가구는 가운데 기둥에서 전후로 긴보를 가로지르고 그 위에 측면 평주에서 두 개의 부재를 충량처럼 걸었다. 그 상부에 정(井)자형 외기를 짜고 중도리를 걸었으며 그 위에 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게 함으로써 팔작지붕을 구성했다. 종도리 하부의 장여와 뜬창방 사이에는 소로를 배설하였고 뜬 창방 전면에 상량문을 기록했다.

 

 

12.여산척화비


종 목  익산시 향토유적 제7호 
지 정 일  2002.05.30
소 재 지  익산시 여산면 여산리 445-2번지 
시 대  조선시대 


여산면 인근 초등학교에서 발견된 것을 여산동헌으로 옮겨왔다. 조선 후기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치면서 백성들에게 서양에 대한 항전의식을 심어주기 위하여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명령으로 조선 각지에 세운 척화비 중 하나이다.

 

일렬로 늘어선 옛 여산 부사들의 선정비 앞에 놓여 있는데,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를 하자는 것이니, 화해를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13.문수사 대웅전 목조여래좌상


종 목  익산시 향토유적 제9호
지 정 일  2002.12.14
소 재 지  전북 익산시 여산면 호산리 69
시 대  조선시대


목조여래좌상은 나무로 된 불상에 칠을 하였는데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일부 탈락되었으나 보존 상태는 비교적 양호하다. 머리는 오른쪽으로 틀어 소라모양을 한 나발이며, 부처님의 정수리에 볼록 튀어나온 부분인 육계는 조금 낮게 표현되어 있다. 사각형의 넓적한 얼굴과 오뚝한 콧날, 넓적한 콧망울, 굳게 다문 입 등은 조선후기 17세기 불상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수인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을 마주 잡고 있는데, 이러한 형상은 일반적인 석가여래상이나 아미타여래상의 모습과는 다른 것이어서 구분하기가 어렵다. 신체는 안정감이 있고 균형 잡힌 불신을 보여주며, 양어깨에 걸친 통견의 법의가 양쪽 팔에 걸쳐서 결가부좌한 무릎 아래까지 흘러내리고 있다. 가슴 가운데에서 무릎까지 넓은 군의와 군의대가 있고 주름지듯 겹쳐진 옷자락도 눈에 띈다.

 

 

14.이배원 고가


종 목  익산시 향토유적 제10호 
지 정 일  2002.12.14
소 재 지  전북 익산시 함라면 함열리 411-2번지 
시 대  일제강점기 


전라북도 익산시 함라면의 한옥마을에 자리 잡고 있다. 1917년, 당시 함라면의 대표적인 만석꾼 이배원이 건립하였다.


왼쪽에서부터 건넌방, 대청, 윗방이 있고, 윗방에서 앞쪽으로 두 칸의 안방과 부엌이 나와 있는 ㄱ자형 집이다. 가구는 1고주오량가로 고주 중간에 대들보를 끼우고 고주 머리가 직접 마룻보와 중도리를 받치게 했다.


건립 당시에는 안채·사랑채·행랑채·문간채·곳간채 등 여러 채가 있었으나 현재는 안채와 사랑채만 남아 있다. 안채는 입식 부엌이 들어선 뒤쪽 공간 외에는 비교적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나, 사랑채는 내부를 완전히 개조하여 원불교 교당으로 활용하고 있다.


인근에 또 다른 만석꾼 김안균의 가옥과 조해영) 가옥이 있는데 이 집은 세 집 중에 가장 먼저 지은 집으로 다른 두 집을 지을 때 모델이 되었다.

 

 

15.김육불망비


종 목  익산시 향토유적 제11호 
지 정 일  2002.12.14
소 재 지  익산시 함라면 함열리 477번지 
시대  조선시대 


나라에서 선정을 베푼 벼슬아치에게 내린 일종의 선정비로, 영의정 김육이 사망한 이듬해인 1659년(효종 10)에 건립되었다. 비는 기단, 비신, 이수로 구성되었는데, 기단은 화강암, 비신과 이수는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이수의 앞면에는 여의주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두 마리의 이무기를 양각하였으며, 뒷면에는 국화와 구름을 새겨 넣었다.  


김육(1580∼1658)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실학적 개혁 정치가이다. 1605년(선조 38) 사마시에 합격하여 관직에 입문하였다. 광해군 때 조정에서 쫓겨나 10년 동안 은거하다가 1623년 인조 즉위 후 복귀하여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었다. 이후 충청도관찰사와 한성부우윤·도승지·병조참의·대사헌·예조판서·개성부유수 등을 거쳐 1651년(효종 2)에 영의정에 이르렀다. 상평통보의 유통과 대동법 확산에 힘을 기울였고, 후대의 실학자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16.익산 남중동 오층석탑


종 목  익산시 향토유적 제12호 
지 정 일  2003.11.05
소 재 지  전북 익산시 남중동 201-5번지 
시 대  고려시대 


고려시대의 석탑이다. 원래 완주군 고산면 삼기리 절터에 있던 것을 이리여자고등학교 화단으로 옮겨왔다. 전체높이는 2.74m이다. 1층은 탑신 폭 47cm, 높이 10cm이며, 5층은 탑신 폭 24cm이다.


기단부는 2매의 지대석 위에 각각의 면석과 갑석으로 이루어졌다. 탑신석과 옥개석은 모두 일매석으로 구성되었고 각 층의 면석에는 도드라지게 우주(모서리기둥)를 모각하였다. 옥개석은 3층의 층급받침이 있으며 경사는 심하지 않으나 합각에서 반전을 이루어 경쾌한 느낌을 준다. 5층 옥개석 위의 상륜부 역시 일매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노반과 앙화 위에 타원형 석재가 놓여 있다.


17.관음사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전북 무주군 설천면 소천리 소천마을
시 대  일제강점기  


설천면 소천리 백운산 기슭에 위치한 조계종 소속 사찰이다.


이 사찰은 1938년 포교당으로 시작하여 이 고장 주민들에게 불법을 전해 오다가 1940년 석쌍동 스님에 의해 사찰로 발전해 왔다.


비구니 사찰인 관음사는 전면 3간, 측면2간 규모의 팔작집인 법보전을 중심으로 그 옆에는 선방인 목우실과 요사가 배치되어 있다.


1974년 관정 성효례 스님에 의해 중건된 법보전에는 관세음보살을 본존불로 모시고 좌우에는 신중단과 칠성단을 두어 예불에 임하고 있다.
 

 

18.덕천서원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전북 무주군 설천면 소천리 이남마을
시 대  일제강점기
  

덕천서원은 본래 1919년 설천면 두길리 구산마을 앞 산위에다 유천사라는 현판을 걸고 건립했던 것인데 1982년 그 후손들에 의해 설천면 소천리 이남마을로 옮겼다가 1993년 11월 현 위치로 옮겨 덕천서원이라 했다.


이 서원에는 연산군때 무오사화로 희생당한 탁영 김일손을 주벽으로 하고 그의 후손인 김치삼, 김형을 배향하고 있다.


김일손은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로 춘추관기사관이 되어 성종실록의 사초를 썼다.

연산군때 사초가 원인이 되어 화를 당한 인물로 스승인 김종직, 점필재를 닮아 재능과 부패와 불의를 규탄했던 인물로 중종반정 이후 도승지에 추층되면서 문민의 시호를 받았다.
 

 

19.도산서원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전북 무주군 안성면 사전리 719번지
시 대  조선시대 
  

도산서원은 안성면 사전리 사교마을 뒤 오도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순조 13년에 건립한 것인데 고종5년 훼철되었다가 후에 다시 세웠다.


이 서원은 건물중 도산재는 본래 덕유산에 있었던 백운암 건물이던 것을 이곳으로 옮긴 것이라 하는데 조선 말기의 순종 2년 1908년 도산여학당이라는 사립학교를 세우고 1942년 안성공립학교가 개설될 때 까지 그 전신으로써 소임을 다해 왔다.


서원의 도산사에는 충목공 김여석과 임회당 박희권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충목공 김여석은 세종~성종 사이의 인물로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으로 벼슬길에 올라 도승지를 거쳐 충청, 경상, 강원 관찰사를 역임하고 대사헌, 호.병.예조 등 삼조참판을 두루 거친 후에는 형조판서를 지낸 분이다.


국가에서 광산부원군에 봉하고 충목의 시호를 내렸다.
 

 

20.무주향교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전북 무주군 무주읍 단천로 135 (읍내리  264-1)
시 대  조선시대
  

조선 건국 이후 국가에서 유교를 권장하기 위해 각 고을 마다 향교를 설치하여 공자를 제사하고 선비를 양성토록 했다.


무주향교는 본래 본군의 관아 북쪽에 있었는데 숙종 18년 (1692) 호랑이의 피해가 많아 향로산 서쪽으로 옮겼는데 그 터가 너무나 습하여 순조 34년에 (1834)현재의 위치로 다시 옮기게 되었다.


현재의 무주 향교는 춘, 추로 공자에게 제사를 올리는 석전대제의 행사를 거행한다.
 

 

21.백련사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전북 무주군 설천면 백련사길 580 (백련사길 580)
시 대  신라
  

신라 신문왕때 백련선사가 숨어 살던 곳에 한얀 연꽃이 솟아나왔다 하여 절을 짓고, 백련암 이라 했다고 전하는 고찰이다.


불교 전성기 때는 14개의 사암이 있어 구천인의 승려들이 도를 닦던 곳이어서 구천동 이라 했다는 이곳은 조선 중기 부용, 부휴, 정관, 벽암대사 등 수많은 고승들이 선풍을 일으켰던 불교성지로 한 때는 구천동사라 이름 붙여 사용해 왔다


백련사 입구에 있는 아치형 다리 '백련교' 를 건너 일주문을 지나면 석조계단(백련사 계단 : 전라북도 기념물 제42호)이 나타나고, 그위에 대웅전 건물이 들어서 있다.


그 밖의 문화재로 매월당 부도와 정관당 부도가 있다. 고려 때 제작되었다는 삼존석불이 유명하다. 세계적인 신문 재벌 로드미어의 부도가 이곳에 있어 명산임을 자랑하고 있다. 수많은 고승들이 이곳에서 배출되었다.
 

 

22.북고사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전북 무주군 무주읍 읍내리 520 (북고사길 67)
시 대  고려시대
  

무주군 읍내리 한수마을 향로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는 조계종 소속의 비구니 사찰이다.


본래 고려 공민왕 때 사찰을 세우고 경월사라 했다는 이 사찰은 조선 초 무학대사가 이 고장을 살펴보고 북쪽의 지세가 허하다 하여 북쪽이 견고하라는 뜻으로 북고사라는 사명을 붙였다고 전한다.


이 사찰은 극락전을 중심으로 뒤편으로 산왕당과 칠성당이 배치되어 있고 극락전의 서편으로는 석탑과 요사가 있다.


그 중 극락전은 일정 때 왜식 건물로 개축하여 인법당으로 사용해 오던 것을 1978년 정순덕 스님에 의해 해체하고 본래의 모습인 팔작집 건물로 복원했다.


극락전은 아미타좌불을 주불로 모시고 법당의 좌우 벽에는 독성단과 신중단을 두어 예불에 임하고 있다. 지금도 그 때의 탑이 보존되어 있다.
 

 

23.원통사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전북 무주군 안성면 죽천리 산1
시 대  신라


남덕유산 원통사는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죽전리 1번지에 소재한 사찰로서,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 금산사의 말사이다. 관음보살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맑은 물이 흐른다. 원통사가 있는 덕유산 골짜기 역시 사계절 비경을 연출하는 구천동의 맑은 물이 흐르고, 절에는 물줄기를 따라 흘러내린 맑디맑은 영지가 있다.


깨끗하고 맑다 하여 명천(明川)이라 불리는 이곳 영지는 관음의 손길을 찾아가는 원통사 어귀에 있다. 신라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전하는 원통사에는 비교적 근래의 일로서 3대에 걸쳐 절과 깊은 인연을 간직한 한 집안의 내력이 전한다. 20세기 중반에 주지 범인조사가 도량을 중창했으나 곧 이은 여순반란으로 천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도량이 폐허가 되고 말았다.


이후 그의 아들 황경석이, 먼저 세상을 떠난 자신의 둘째아들의 영혼이 원통사에 머물고 있음을 현몽을 통해 알게 되어 대대적인 선행불사로 가람을 새로 일으키게 된 것이다. 이처럼 원통사는 근대 중창주인 범인조사의 발원으로 3대 인연이 원만히 회향되어 불보살의 가피가 온 누리에 비추는 영험의 도량으로 거듭나고 있으며, 현재 관음보살도량으로 알려져 있다. 원통보전에 모셔진 관음보살상은 모든 이들의 삶을 어루만지듯, 어머니처럼 자비로운 모습으로 중생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24.인월암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전북 무주군 설천면 삼공리 95
시 대  신라
  

인월암은 설천면 삼공리 소재 덕유산 칠봉 기슭에 위치한 태고종 사찰이다.

 
이 사찰은 구천동 33경중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구천동계곡 16경인 인월담에서 칠봉 약수터로 오르는 약 400m를 오르면 송림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신라 때 인월화상이 절을 짓고 수도하던 곳이라 하여 인월담이라 부르는 전설이 전해오는 옛 터에다. 월곡 이창섭스님이 1960년대 초반 ,3간 규모의 인법당을 중창했던 것을 , 후에 요사로 세웠으며 아들 혜공 스님이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구천동 계곡의 아름다운 산수가 소문나기 시작하면서 전국의 불자들이 찾아오기 시작했고 영검하다는 칠봉약수가 알려지게 되면서 신병을 치유하겠다는 신도들이 기도처로 삼아왔다.


이에 월고 스님은 법당에다. 약사여래보살을 본존불로 모시고 중생을 제도하다가 1986년 열반에 들었다.


그 후 그의 아들 혜공 이규호스님이 선친의 유지를 받들어 사찰을 운영해 나아가고 있다

 

 

25.죽계서원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전북 무주군 안성면 죽천리 평장마을
시 대  조선시대


숙종 39년(1713년)에 건립된 서원으로 사액을 받지 못하였다. 금산김씨 시조이자 고려 때의 이름난 무신이었던 김신(?~1274)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조선의 무신 장필무(1510~1574)와 임진왜란 때 전사한 두 아들 장의현, 장지현(1536~1593)도 이곳에 배향되었다. 고종 6년(1869)년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철거되었으며, 현재는 건물의 일부만 남았다. 서원이 자리 잡은 곳은 무주군 안성면 죽천리의 평장마을로, 평장사를 지낸 김신의 출생지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26.향산사 (향산선원)
 

종 목  비지정문화재
소 재 지  전북 무주군 무주읍 읍내리 720 (향한로 27-7)
시 대  일제강점기
  

무주읍 한수리에 위치한 사찰로서 조계종 선학원에 적을 둔 비구니 도량의 사찰이다.


일제강점기 때인 1918년 불도들의 보살계를 위해 이 고장을 찾아왔던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1분인 용성 백상규 스님이 속가를 얻어 불법을 전하게 된것이 계기가 되어 포교당으로 운영해 오다가 ,1936년 용성선사의 제자인 선파스님이 법당을 중건하고 부처님을 모시게 되었다.


1975년 당시의 주지 해안 정차년 스님이 대웅전 중창불사를 벌여 완성됨으로써 현재 규모의 도량이 되었다.
 

2018.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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