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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장례가 축제가 될 수 있는 이유는? 답변 좀 부탁드립니다.
kkwb**** 조회수 5,152 작성일2006.04.07

영화 <축제>를 보신분이시면 아실꺼라 믿습니다;; 제가 이 영화를 구해봤는데 진짜 근처에 비디오 가게를 다 찾아본거 같습니다;; 근데 오래된 영화라 그런가 없더군요,, ㅡㅡ

질문은 <<장례가 축제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이구요. 분량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이쪽에 박식하신 분이나 영화를 보신분,, 좀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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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해서 올려드려욤~ ^^// 참고하세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축제를 열다

이청준 원작․임권택 감독 《축제》의 무대 장흥 남포
정상철 기자  

▲ 지척에 소등섬을 둔 화포의 해변. 저 바다에는 삶과 죽음의기쁜 혹은 슬픔 진혼이 담겨 있다.
ⓒ 김태성 기자

사람은 모두 죽는다.
그 선명한 사실 위에서 인간은 살아간다. 그리하여 막연히 불안하고 때때로 엄습해 오는 두려움에 몸을 떤다. 삶과 죽음의 경계 위에 무엇이 있을까 하는 궁금증을 가슴 저 밑바닥에 담아놓고 산다. 영화 《축제》는 이 궁극의 물음에 대한 이유 제시이며 아픔의 승화다. 영화가 만들어지게 되는 과정이 그러하며 영화의 제목 ‘축제’ 또한 이 물음의 파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삶과 죽음은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적어도 영화 《축제》를 만들어낸 두 주체 이청준과 임권택에게는 그렇다. 죽음은 장례를 통해 축제로 만들어지고, 이 과정은 영화에 삽입된 동화적 상상력으로 현실성의 힘을 얻는다.

할머니가 손녀에게 스스로의 나이를 모두 나누어주고 결국은 어린 아이가 돼 세상을 떠나는 설정은 지극히 비현실적이지만 죽음은 원래 그런 것이다. 가장 비현실적이면서도 가장 선명한 현실이 죽음이다. 사람은 누구나 시간이 되면 죽는다. 그리고 실감나지 않지만 그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 명제의 당위성 위해 영화 《축제》는 서 있다.

▲ 남포마을 입구에 서 있는 <축제> 촬영기념비.
ⓒ 김태성 기자
장흥 남포에서 전부 촬영된 화면
영화 《축제》는 만들어지게 되는 여러 과정에서 흥미롭다. 원작이 있고 영화가 있다. 그러나 기존에 소설을 영화화했던 작품들과는 태생적으로 다르다. 먼저 소설이 씌어지고 그것을 시나리오로 각색한 후 영화를 찍는 방식이 아니다. 《축제》는 소설과 영화가 동시작업으로 함께 만들어진 우리 영화사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독보적 작품이다. 두 늙은 거장들의 직접적인 만남만으로도 오랫동안 회자될 충분한 이유를 지녔다.

이청준이 치매에 걸린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온 소회를 임권택에게 밝혔고, 그 사연을 전해들은 임권택은 그 자리에서 장례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오로지 영화를 위해 소설이 씌어졌고, 소설가 또한 영화의 제작에 직접 참여했다. 장소 섭외에서부터 촬영 과정과 시나리오, 그리고 엑스트라 출연까지 이청준은 영화 《축제》의 전 과정에 참여한다. 《축제》는 영상물이지만 영화적 기법보다 소설적인 텍스트가 먼저 부각되는 이유도 영화에 이청준의 사유가 직접 스며든 까닭이다.

실제로 소설 《축제》는 소설가가 감독에게 편지를 쓰는 형식으로 이 과정을 밝히고 있다. 또한 이청준은 “필요에 의해 소설이 새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 필요가 소설의 형식을 창조할 수 있다는 걸 소설 축제를 쓰며 알게 되었다”고 말하며 그 글쓰기에 대한 소회를 밝힌 적이 있다.
다만 영화 《축제》의 무대가 장흥이 된 것은 예외이며 흥미롭다. 막연히 이청준의 고향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하는 추측이 가능하지만 실상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이청준과 임권택은 영화의 무대가 될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남쪽의 해안을 다 더트고 다녔다. 하루는 해남에서 강진으로 또 하루는 보성에서 고흥으로 순천, 여수로 해안만 찾아다녔다.

남포가 선택된 것은 우연이었다. 해안선을 떠도는 과정에서 어느 날 장흥군 안양면의 남포를 찾았고 그 집이 눈에 들어왔다. 집 옆에 선 정자나무가 유독 아름다웠다. 임감독은 그 길로 그 집에 찾아가 영화 촬영장소로 집을 빌려줄 것을 제의했고, 그 날 밤으로 모든 것이 결정됐다. 영화 《축제》의 거의 전부를 촬영했던 남포는 그렇게 거장 임권택 영화의 한 축이 되었다.
남포는 조용히 가라앉은 해변마을이다. 해변과 지척에 소나무 한 그루가 고즈넉한 소등섬이 있다. 바다가 빠져나가면 걸어서 들어갈 수 있는 작은 섬이다. 소등섬과 마을 사이에 서너 척의 배가 파도에 흔들린다. 이 풍경이 영화가 촬영된 집에서 굽어보면 한눈에 들어온다. 그 바다에 시선을 주면 삶이 아득해진다. 《축제》가 품은 삶과 죽음의 슬픈 혹은 기쁜 진혼이 그 바다 안에 모두 담겨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 영화에서 문상객들이 줄을 이었던 골목.
ⓒ 김태성 기자

“카메라 쳐다보문 바로 캇이여”
1995년 가을이었다. 임권택 감독은 그 해 가을을 모두 남포에서 보냈다. 그리고 두 달 여의 시간 동안 남포는 영화 제목 《축제》처럼 즐거운 장례식을 치렀다. 마을이 생긴 이래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찾아든 것은 처음이었다. 배우와 고정 스태프만 100여 명, 엑스트라에 구경온 사람들까지 합치면 하루 300여 명이 북적거렸다.

“십 년이 지났제만 잊혀지덜 안허요. 요 작은 마을로 얼매나 많은 사람들이 와 부렀는지. 동네 아낙들이 영화 촬영하러 온 사람들 밥 해 믹이니라고 고생 쪼까 했소. 촬영한 거 볼라고 사람덜이 마을 앞에 줄 서 부렀어. 참말로 겁나 부렀제.” 남포 마을에 손영애(59)씨의 말이다.
그로부터 10년 남포는 변했지만 또한 그대로였다. 조용히 가라앉은 해변마을 풍경은 그대로지만 영화 촬영 이후의 유명세가 부분적으로 반영돼 있었다. ‘축제’라는 이름을 사용한 상가 간판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직접적으로 영화가 촬영됐던 가옥은 ‘축제민박’이란 상호를 달고 있었다. 지금도 영화를 이야기하며 찾아드는 사람들이 상당한 눈치였다. 지난 10년, 축제라는 보통명사가 남포에서만은 고유명사로 변모해 있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축제가 찍혀졌던 시간은 선명하다. 촬영가옥 바로 아래 집에 사는 서경수(65)씨는 영화 얘기를 꺼내자 벌써 얼굴빛이 환해진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영화에 도합 7번이나 엑스트라로 출연했다. 촬영가옥과 가까운 지리적 여건이 작용했다. 더구나 촬영 자체가 좋은 구경거리였으며 한 번 출연의 대가로 받는 3만원의 출연료도 시골 형편에 적은 돈은 아니었다. 무슨 연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문상객이거나 고스톱 혹은 윷놀이판의 구경꾼일 뿐이었다.
“딴 거 없고 걍, 카메라 쳐다보지만 않으문 되등마. 카메라 쳐다보문 바로 캇이여. 아조 베래불어. 원래는 엑스뜨라도 한두 번만 허제 나처럼 많이 나오들 않혀. 근디 바로 아랫집이 산께 빵구만 나문 불르러 오고 그랬어. 그때 아조 겁나게 재미졌소.”

▲ 촬영 가옥의 문간채. 영화사가 1500만원을 들여 지었다.
ⓒ 김태성 기자

▲ 영화에 엑스트라로 도합 일곱 번 출연했던 서경수씨.
ⓒ 김태성 기자

사람도 집도 해안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지만 영화에서 장소적으로 큰 의미를 지녔던 정자나무는 사라졌다. 사실 남포가 《축제》의 촬영장소로 선택된 데에는 그 나무의 역할이 컸다. 준섭(안성기)과 용순(오정해)이 그 정자나무 아래서 보여준 허망함과 슬픔은 삶과 죽음의 이미지를 강하게 교차시킨다. 하지만 그 나무는 지금 그곳에 없다. 몇 해 전 태풍에 뿌리째 넘어져 버렸다.
촬영 당시에는 없었던 전봇대도 여러 개 세워져 있었다. 사실 그 전봇대들은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온 것뿐이다. 임권택 감독은 선명한 바다의 이미지를 담기 위해 일부러 전봇대를 모두 뽑아버렸다. 거기에 들어간 돈만 700만원이었다.

▲ 남포는 굴의 천국이다.
ⓒ 김태성 기자
사람이 신으로 변모하는 축제, 죽음
영화 축제는 상업영화의 틀 안에서 오래 전 접어둔 일기장을 들추듯이 장례식의 시간을 가늠해 들어간다. 전통의 의식을 충실하게 복원하면서도 삶과 죽음의 근원적 슬픔을 깊이 있게 담고 있다. 무엇보다 거장 임권택의 작품답게 삶의 미세한 떨림들을 무게감 있게 엮어 내고 있으며, 충분히 실험적이기도 하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임권택을 이야기하며 <한국영화의 가장 큰 비극은 가장 나이 많은 현역 감독이 가장 실험적인 영화를 찍고 있다는 것이다>며 한국영화에서 그가 갖는 무게감을 피력한 적이 있다. 더구나 《축제》에는 또 하나의 거장 이청준이 들어앉아 있다.

죽음을 바라보는 두 거장의 시선은 같으나 드러냄의 방식은 다르다. 이청준은 지극히 관념적인 사유를 통해 인간의 근원적 질문에 천착한다. 반면 임권택은 사실적 현실에 집중한다. 장례 절차를 자막까지 집어넣어 꼼꼼히 복원하는 모습이나 장례식의 어수선함과 그와 대비되는 엄숙을 치밀하게 잡아내는 것은 사실성의 획득이다.
노인이 세상을 뜨고 침울하게 가라앉은 집 안은 밤에 문상객들이 밀려들면서 돌변한다. 여기저기서 노름판이 벌어진다. 술에 취해 비틀거린다. 조의금을 슬쩍해서 노름을 계속하는 사람도 있고 윷놀다 본전 생각을 떨치지 못해 멱살을 다잡는 행위들이 줄곧 오버랩 된다. 소리꾼은 제 본분을 잊은 채 만취해서 초경까지 인사불성이다. 본질적으로 이런 행위들은 장례의 생생한 모습이며 축제의 단면과 닮아 있다. 가장 슬픈 의식을 치러내는 현실의 이면 안에 이미 축제의 본질은 스며 있었다.

여기에 이청준은 근원적 질문을 보탠다. 장례는 사람이 신격화되는 순간을 기념하는 의식일 수 있다. 그러니까 사람이 죽으면 한 가정의 신이 된다. 인간이 비로소 육신을 덜고 신이 되는 마지막 통과의례로서의 장례이며 그러므로 축제이다.
죽은 자의 입장에서도 죽음은 축제일 수 있다. <사는 일이 곧 한을 쌓은 일이며 한을 쌓는 것이 곧 사는 일이다.> 전작 《서편제》를 통해 작가 이청준이 말하는 맺힘과 풀림으로서의 한이다. 궁극적으로 죽음은 한을 쌓는 행위와의 작별을 의미하며 가난과 고통으로 점철된 삶의 연장선에서 벗어남을 뜻한다. 풀림으로서의 한인 것이다. 죽음은 온갖 번뇌의 시간에서 완전한 무의 세계로 나아감이다. 죽은 자에게도 죽음은 축제다.

소설과 영화가 근본적으로 꿈꾸는 자리는 아마도 인간의 모든 한이 풀리는 그 지점일 것이다. 《축제》는 명확한 죽음의 자리를 이미지로 승화해 근원적 고통과 마주한다. 그러나 영화 《축제》를 통해 막연한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지금도 인간은 어느 상갓집에서 자신에게 다가올 죽음을 대비한 축제를 벌인다.

ⓒ 전라도닷컴
《축제》 줄거리
40대의 유명작가 이준섭(안성기)은 시골에 있는 노모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는다. 그의 소설은 잘 팔릴 뿐 아니라 평단의 점수 또한 후하다. 준섭이 고향에 도착하고 장례가 시작된다.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평생 동안 모신 준섭의 형수는 그 시어머니의 죽음이 안타깝지만 마음 한 편으로 무거운 짐을 벗은 느낌이다.
가족의 마음이야 어쨌거나 5년이 넘게 치매를 앓아온 87세 할머니의 죽음은 사람들에게 호상으로 받아들여진다. 문상 온 사람들의 표정은 그리 슬프지 않다. 어머니의 죽음을 놓고 조금씩 생기던 가족간의 갈등이 점점 표면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그 갈등은 집안의 돈을 훔쳐 가출한 준섭의 이복조카 용순(오정해)이 등장하면서 노골적으로 깊어진다.

어머니의 모친상을 통해 준섭의 문학을 조명하려는 장혜림(정경순)은 용순이라는 인물에 궁금증을 느낀다. 준섭의 소설은 가족사의 점철인데 이상하게도 용순은 단 한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용순은 어릴 적 계모와 이복 형제들의 틈바구니에서 잘랐다. 유일하게 자신을 사랑해 준 사람은 할머니 한 사람이었다. 용순은 사회적으로 성공했으면서도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외면한 준섭에게 묘한 적의를 드러낸다.
장례의 둘째 날, 용순은 자신이 직접 준비해 온 요란한 상복을 입는다. 가족들과 용순의 갈등은 그 골을 더한다. 장례가 끝나갈 무렵 장혜림은 용순에게 준섭의 동화를 건넨다. 그 안에 빗새 이야기가 나온다. 장혜림은 아마도 그 빗새가 용순씨인 것 같다는 말도 함께 전한다. 용순의 증오가 조금씩 녹는다.

ⓒ 김태성 기자
“내가 임감독한티 명함받은 사람이네”
《축제》 촬영가옥 주인 김수진

그는 대단한 집에 산다. 꼭 10년 전부터 그가 사는 집은 명소다. 영화 《축제》의 7할 이상이 그의 집에서 찍혔다. 10년 전 어느 날 임권택과 이청준이 동시에 그의 집에 찾아왔다. 영화를 하나 하는데 그 집이 적소라는 것이다. 그는 두말 없이 집을 내줬다.
그는 임권택 감독에게 명함을 받은 사람이다. 명함 한 장이 뭐 대수일까, 하지만 사정을 알고 보면 분명 대수다. 임감독은 누군가에게 명함을 건네지 않기로 유명한 사람이다. 그에게도 처음 만나는 순간 명함을 줬던 건 아니다. 일이 상당 부분 진행되고 영화가 끝나갈 무렵에야 건넸다. 옆에서 지켜보던 영화배우 안성기가 깜짝 놀라며 “감독님이 명함 주는 거 처음 본다”고 하더란다.
“내가 10년 전에 받은 그 명함을 아직도 가꼬 있소. 아마 세트장 아니고 우리 집만큼 한 영화를 많이 찍어분 디가 없을 것이요. 그때는 징허게 고생스러웠지만 그려도 지금 생각허믄 슬며시 웃음이 나오고 그라요.”

영화가 촬영된 50여 일 동안 그의 가족이 겪었던 고생을 생각하면 실상 명함 한 장은 대단한 게 못 된다. 100명에 가까운 촬영 스태프들의 밥을 그의 집에서 다 해 먹였다. 그는 아침마다 장을 보러 읍내를 들락거렸다. 그 뿐인가. 밤낮 구별 없는 촬영에 편한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물리게 촬영과정을 지켜봤지만 영화 또한 물리게 봤다. 영화가 개봉도 하기 전에 편집이 막 끝난 비디오 테이프를 영화사에서 직접 보내왔더란다. 영화가 개봉된 직후에도 남포 주민들을 일부러 초청해 장흥 군민회관에서 상영하기도 했다.
영화 《축제》와 워낙 인연이 깊은 탓에 임감독도 그리고 소설가 이청준도 장흥에 올 일이 있으면 꼭 그의 집에 찾아온다. 그리고 지금 그의 집은 ‘축제민박’ 간판을 달고 있다.

기사출력  2005-12-14 20:43:33  
ⓒ 전라도닷컴

2006.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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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라는 영화 명작이죠

우리나라의 장례식은 온갖 인간군상들의 모습을 볼수있습니다

슬픔에 빠져있는 자, 웃고 떠드는자 , 화내며 싸우는 자

한 외국인이 우리나라의 장례식을 보고 마치 시끌벅적한 축제를 보는거 같다는 말을 한적이 있을정도죠

 

호상으로 천수를 누리다 가신분은 천수를 누렸으니 축하할만하고

힘들게 살아왔고 병마와 싸우다 가신분은 고통없는 세상으로 가셨으니 축하할일이라고 생각했겠죠

 

축제영화는 우리나라 정통 장례의 모습을 보여 주며 그러한 인간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을 청년들은 웃고떠들며 가족들은 슬픔을 느끼고 그리고 가족간에 앙금으로 싸우고 .....

하지만 한사람의 죽음으로 모두 한자리에 모여 그동안의 앙금을 씻어주는 장면을 보여주고있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인 단체 사진 찰영장면은 그러한 모습을 잘보여주고있습니다..

 

우리나라 장례가 축제가 될수있는 이유는 죽어서 편한 세계로 가는 자의 앞길을 축하해주고

그동안 왕래가 뜸했던 가족들 이웃들이 한데모여 그동안의 이야기를 할수있는 자리이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이런 내용으로 잘정리하시면 될꺼같은데요 영화를 한번 보시면 좋을꺼같네요 내용은 윗분이 정리를 잘해주시긴했지만 직접보는게 역시 ..

2008.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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