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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조양임씨 파가 궁금합니다
비공개 조회수 6,829 작성일2016.09.07
제가 조양 임씨인데 목사공파라고 합니다 근데 쳐보면 목사공파가 없는거같아서 설명 부탁드립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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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y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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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질문에 답변을 합니다.

 

제가 조양 임씨인데 목사공파라고 합니다 근데 쳐보면 목사공파가 없는거같아서 설명 부탁드립니다 ㅠㅠ

 

답변 : 님의 글을 읽어보고 조양 임씨 임식(林植)은 임언수의 8대손으로 명종 때 17명현(17名賢)의 한 명으로 이름이 높으며, 강계부사(江界府使)를 역임하였습니다. 임회(林檜)는 임언수의 8대손이며 송강 정철의 사위입니다. 그는 광주목사(廣州 牧使)를 역임하던 중 이괄의 난 때 반란군에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분이 바로 목사공파입니다.

 

님은 조양 임씨 뼈대있는 가문의 후손이시니 자긍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한글과 한문을 병용합니다. 이유는 한문에는 깊은 뜻이 담겨있습니다. 이점 양해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해당 항렬자에는 녹색 글씨로 표기합니다. 그리고 항렬표를 올려드릴테니 님도 한번 대조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래는 조양 임씨에 대한 정보 입니다.

 

 

조양 임씨(兆陽 林氏)에 대()하여

 

1. 시조(始祖) : 임세미(林世味)

2. 유래(由來) :

 

조양 임씨(兆陽 林氏) 시조(始祖) 임세미(林世味)는 평서부원군(平城府院君) 임언수(彦脩)의 네째 아들로 고려(高麗) ()에 광정대부, 이부상서, 대광찬성좌복야(大匡贊成左僕射) ()의 벼슬을 지내고 조양군(兆陽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後孫)들은 평택 임씨(平澤 林氏)에서 분적(分籍)하여 조양(兆陽)을 본관(本貫)을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또한, 1477년에는 효행(孝行)으로 도총부도사에 승진(昇進)되었다.

1496(연산군 2) 능성현령에 재임중 청렴(淸廉)한 생활(生活) 태도(態度)로 선정(善政)을 베풀어 주민(住民)들이 송덕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그 뒤 1498년 북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병조참판 등에 임명(任命)되었으나 병으로 나아가지 못하였으며, 그가 죽자 조정에서 예관(禮官)을 보내 치제(致祭)하도록 하고 정려가 내려졌다. 전라북도(全羅北道) 장수의 압계사(鴨溪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국헌유고가 있다.

 

 

3. 조양 임씨(兆陽 林氏) 가문(家門)의 번영(繁榮)

 

가문(家門)을 대표(代表)하는 인물(人物)인 옥산(玉山)은 세미(世味) 8세손(世孫)으로 문무(文武)를 겸비(兼備)하여 일찍이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였고 병조참판(兵曹參判)의 증직(贈職)을 받았으며,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많은 일화(逸話)를 남겼다.

 

 

4. 조양 임씨(兆陽 林氏) 과거(科擧) 급제자(及第者)(조선시대)

 

임기(, 1567 丁卯生) : 문과(文科) 선조39(1606) 식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임숭회(林崇檜, 1567 丁卯生) : 문과(文科) 중종1(1506) 별시 을과(乙科)

임광달(林光達, 1609 己酉生) : 무과(武科) 인조22(1644) 별시 병과(丙科)

임종신(林宗信, 1547 丁未生) : 무과(武科) 선조17(1584) 별시 병과(丙科)

임대춘(林大春, 1547 丁未生) : 무과(武科) 선조16(1583) 별시 병과(丙科)

임재무(林梓茂, 1666 丙午生) : 무과(武科) 숙종12(1686) 별시 을과(乙科)

임익방(林益芳, 1661 辛丑生) : 사마시(司馬試) 숙종28(1702) 식년시

임찬(林璨, 1836 丙申生) : 사마시(司馬試) 철종12(1861) 식년시 이등(二等)

임숭백(林崇栢, 1836 丙申生) : 사마시(司馬試) 중종2(1507) 식년시 이등(二等)

임숭괄(林崇, 1836 丙申生) : 사마시(司馬試) 중종17(1522) 식년시 이등(二等)

등 모두 19명의 과거 급제자가 있다.

(문과 2, 무과 4, 사마시 13)

 

 

평택 임씨 충정공계인 임형수(林亨秀)는 임언수의 7대손이며, 인종 1년 홍문관 부제학(弘文館 副提學)을 지냈으나, 명종 때 벽서지변 사건과 관련 대윤으로 몰려 정언각(鄭彦殼)의 참소로 사사되었다. 임식(林植)은 임언수의 8대손으로 명종 때 17명현(17名賢)의 한 명으로 이름이 높으며, 강계부사(江界府使)를 역임했다. 임회(林檜)는 임언수의 8대손이며 송강 정철의 사위이다. 그는 광주목사(廣州 牧使)를 역임하던 중 이괄의 난 때 반란군에게 목숨을 잃었다. 목숨을 잃는 상황에서도 반란군을 꾸짖어 서릿발 같은 기상으로 유명하다.

 

 

5. 조양 임씨(兆陽 林氏) 계파(系派)

 

조양 임씨는 7세에서

군사공파(郡事公派 諱 表)

주부공파(主簿公派 諱 士壽)

생원공파(生員公派 諱 士富)

참의공파(參議公派 諱 士綱)

부사공파(府使公派 諱 士德)

군수공파(郡守公派 諱 士福)

현감공파(縣監公派 諱 士命)

별시공파(別侍公派 諱 漢孫) 8개 파()로 분파

 

별시공파 등이다. 이 가운데 주부공파가 대종을 이루고 있으며, 참의공파와 군수공파, 군사공파가 맥을 유지하고 있다.

 

군사공파 파조인 임소(林蘇)의 후손들은 전라북도 김제시 신풍동 잿배기 마을에서 세거하고 있다. 임소는 통훈대부 충순위와 벽동군사를 지냈다.

 

군수공파 파조 임사복(林士福)은 호조참판 임각(林恪)의 다섯째 아들로 문과에 급제해 서천군수를 지냈다. 1469(예종 1)경 지금의 전북 김제시 봉남면 종덕리에 정착했다.

 

부사공파로 김제에 낙향한 임사덕(林士德)은 호조참판 종2품을 지냈다. 1444(세종 26)에 문과 방목인 원종좌익공신의 녹권에 올랐다. 통정대부 정3품 당상관을 거쳐 종성부사를 지냈고, 1494(성종 25) 오늘날 김제시 만경읍에 정착했다. 전북 김제시 백산면 수록마을도 조양임씨 집성촌이다. 전남 장흥군 부산면 유량리에는 조선조 양주목사를 역임한 임계을(林桂乙)을 비롯해 조양임씨 선조를 모시는 구양재(龜陽齋)가 있다.

 

1930년경에 이르러 조양임씨는 전북 전주군 소양면, 전북 고창군 고창읍, 전북 익산군 북일면, 전남 보성군 보성읍, 평남 중화군 간동면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다. 

 

 

6. 조양 임씨(兆陽 林氏) 중시조(中始祖) 항렬표(行列表)

 

시조 : 세미(世味)

2 : ()

3 : 인무(仁茂)

4 : 난봉(鸞鳳)

5 : ()

6 : ()

7 : 사수(士壽)

8 : 중형(仲亨)

9 : 을지(乙枝)

10 : 숭괄(崇栝)

11 : ()

12 : 수영(秀英)

13 : 기인(起麟)

14 : ()

15 : 유장(有樟)

16 : 석보(錫保)

17 : ()

18 : 봉조(鳳朝)

19 : 진록(震祿)

20 : 정기(挺基)

21 : 치복(致馥)

22 : 종하(鍾夏)

23 : 학순(學淳)

24 : 병일(秉日)

25 : 진환(珍煥)

26 : 재식(載軾)

27 : 광진(匡鎭)

 

 

7. 조양 임씨(兆陽 林氏) 대동(大同) 항렬표(行列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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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항렬자(行列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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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行列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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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항렬자(行列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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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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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조양 임씨(兆陽 林氏) 세거지(世居地)

 

- 전북 전남 일원

 

조양 임씨의 시조 임세미(林世味)는 임언수의 아들이다. 임언수는 평택 임씨의 충정공파 파조다. 따라서 조양 임씨는 평택 임씨 충정공파의 2세손인 임세미로부터 시작된다. 임세미가 고려 말기 광정대부 정2품으로 좌복야(左僕射)에 올라 조양군(兆陽君)에 봉해졌다. 그 뒤 후손들이 그를 중조(中祖), 본관을 조양(兆陽)이라 하여 평택에서 분적(分籍), 계대(系代)하고 있다. 그 뒤 임천, 임하, 전주, 옥야, 보성, 안동 등으로 분파됐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한 사료(史料)나 문헌은 없다. 조양은 전남 보성군에 있던 지명으로 지금의 보성군 조성면(鳥城面)이다. 시조 묘소는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낙성리에 있다.

 

조양군(兆陽君) 임세미의 증손 임천봉과 임란봉의 대 이래로 전북 완주 일대는 조양임씨의 텃밭이 된다. 4세 임천봉의 자손들은 김제군 일대에 옮겨가 살았다. 임천봉의 동생 임란봉의 자손들 가운데 7세 임사수의 후계인 주부공파는 전주와 보성에 나눠 뿌리를 내렸다.

 

임사수의 동생 임사부에서 비롯된 생원공파는 익산에 뿌리를 내린다. 임사강의 후계인 참의공파는 전주. 정읍. 장흥에서, 부사공파는 김제. 부안에, 군수공파는 고창에 많이 살았다. 7세 임사명의 후계인 현감공파는 전라도 각지에 퍼졌으며, 임한손의 후계인 별시공파는 부안 일대에 살았다.

 

집성촌은

 

- 전북 완주군, 고창군 고창읍, 익산시,

- 전남 보성군 보성읍 등이다.

 

 

9. 조양 임씨(兆陽 林氏)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

 

이름은국조방목(國朝榜目)’등에 평택 본관으로 소개돼 있다. 다만 중종 1년 별시에서 을과에 급제한 임숭회는 조양 본관으로 돼 있다.

 

조선시대에 임기(1567 丁卯生) : 문과(文科) 선조39(1606) 식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임숭회(林崇檜, 1567 丁卯生) : 문과(文科) 중종1(1506) 별시 을과(乙科),

임광달(林光達, 1609 己酉生) : 무과(武科) 인조22(1644) 별시 병과(丙科),

임종신(林宗信, 1547 丁未生) : 무과(武科) 선조17(1584) 별시 병과(丙科),

임대춘(林大春, 1547 丁未生) : 무과(武科) 선조16(1583) 별시 병과(丙科),

임재무(林梓茂, 1666 丙午生) : 무과(武科) 숙종12(1686) 별시 을과(乙科),

임익방(林益芳, 1661 辛丑生) : 사마시(司馬試) 숙종28(1702) 식년시,

임찬(林璨, 1836 丙申生) : 사마시(司馬試) 철종12(1861) 식년시 이등(二等),

임숭백(林崇栢, 1836 丙申生) : 사마시(司馬試) 중종2(1507) 식년시 이등(二等),

임숭괄(1836 丙申生) : 사마시(司馬試) 중종17(1522) 식년시 이등(二等)

모두 19명의 과거 급제자가 있다. 문과 2, 무과 4, 사마시 13명이다.

 

 

10. 조양 임씨(兆陽 林氏) 현대 인물

 

임대홍(미원그룹 명예회장), 임창욱(미원그룹회장), 임철수(미원그룹부회장), 임병학(미원식품사장), 임채홍(내쇼날프라스틱회장), 임인영(숙명여대 경상대학장), 임경순(전남대국문과교수), 임병찬(전북도민일보사장), 임방현(한국일보논설위원, 국회의원), 임경순(세림문화재단이사장), 임일수(대종회부회장), 임병식(완산고교장), 임오순(일신화학사장), 임인순(덕원회회장), 임미준(변호사), 임두일(전남강진군수), 임병주(광주시사편찬위원), 임영춘(성신상사사장), 임수홍(화영부회장), 임본산(전북도립국악원교수), 임형순(세림복지재단이사장), 임용숙(고교교장), 임여홍(대종회고문), 임중순(동신금속사장), 임인환(서도가, 대종회고문), 임주성(대종회고문), 임평수(순천종합상사사장), 임정련(금성섬유대표), 임종채(전남장흥읍장), 임홍기(조선대사대교수), 임일순(동아학원이사장), 임병래(담양대한통운지점장), 임상호(곡성산업사장), 임경순(호남식품전무이사), 임환철(중학교교장), 임명환(완주군수), 임재호(대종회총무), 임완희(대종회부총무) 씨 등이다.

 

(무순, 전 현직 구분이 안 됐으며 일부는 평택임씨 현대 인물과 겹쳤음)

 

본관 조양(兆陽)은 전라남도 보성(寶城) 동쪽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백제 때에는 동로현(冬老縣)이었다. 757(신라 경덕왕 16)에 조양(兆陽)으로 고쳐 분령군(分嶺郡: 樂安)의 영현이 됐다가 고려 현종 때 보성현(寶城縣)에 속했다. 1395(태조 4) 고흥현(高興縣)에 편입됐고, 1441(세종 23)에 다시 보성군에 환속됐다.

 

 

11. 임사수 사적(林士壽 事蹟)

 

본관(本貫)은 조양인(兆陽人)으로 휘()는 사수(士壽)이고 호()는 귀래정(歸來亭)이다.

 

()는 조양 임씨(兆陽 林氏) 6(六世) 임각(林恪)으로 6형제(六兄弟)를 둔바 그 중 장남(長男)으로 태어나 일찍이 학문(學問)에 문학재덕(文學才德)이 추중(推重)하여 문종(文宗) 원년(元年)에 성균진사(成均進士)로 합격(合格)되어 종부사주부(宗簿寺主簿)로 청렴결백(淸廉潔白)하게 일심봉공(一心奉公)하였다.

 

단종(端宗)이 쫓겨나고 세조(世祖)가 왕위(王位)에 오르자 시국(時局)을 개탄(慨歎)한 나머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故鄕)으로 돌아와 은거(隱居)하면서 조그마한 정자(亭子)를 세워 귀래정(歸來亭)이라 이름을 짓고 호()로 삼았다.

그 후() 긴 세월(歲月)이 지난 고종(高宗) 30(高宗三十年)에 사림(士林)들의 공론(公論)이 조정(朝廷)에 반영(反影)되어 가선대부(嘉善大夫(종이품))의 품계(品階)와 이조 판서(吏曹判書)의 벼슬이 추증(追贈)되고 평원군(平原君)의 추봉(追封)을 내림과 동시(同時)에 전라북도(全羅北道) 완주군(完州郡) 봉동읍(鳳東邑) 구호서원(龜湖書院)에 그 위패(位牌)를 배향(配享)하여 유림(儒林)들이 매년(每年) 춘기(春期)에 제향(祭享)을 올리고 있다. 부인(夫人) 하동정씨(河東鄭氏)는 순천부사 정지(順天府使 鄭漬)의 따님으로 정부인(貞夫人)의 작호(爵號)를 받았다

 

귀래정(歸來亭)의 묘소(墓所)는 전주시(全州市) 완산구(完山區) 삼천동(三川洞) 삼가(三街) 삼산(三山)에 있으며 제각(祭閣)은 추원재(追遠齋)라 한다. 매년(每年) 음력 3 3일에는 후손(後孫)들이 성대(盛大)하게 시제(時祭)를 모시고 있다. 귀래정(歸來亭)은 조양 임씨(兆陽 林氏) 팔대분파중(八大分派中) 主簿公派(主簿公派)의 시조(始祖)이시고 슬하에 맹형(孟亨), 중형(仲亨), 숙형(叔亨), 수형(秀亨), 신형(愼亨) 5형제(五兄弟), 그 밑에 자손(子孫)들이 크게 번창(繁昌)하였다.

 

고려(高麗)에 문하시중(門下侍中)( 1)을 지내고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에 봉군(封君)되었으며 충정공(忠貞公)의 시호(諡號)를 받으시고 호()를 계헌(桂軒)이라 하신 언수(彦脩) 조부(祖父)는 선산(善山)의 묘 서원(墓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조양군(兆陽君)은 호()를 만계(萬溪)라 하고 이름은 세미(世味)라 하였으며 대제학(大提學)을 역임(歷任)하신 어른의 이름은 식()이었고 좌의정(左政丞)을 지내신 어른은 이름이 인무(仁茂)이었으며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역임(歷任)하신 어른은 이름이 난봉(鸞鳳)이었고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지내신 어른은 이름이  이라 하였다.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지내신 어른은 이름이 각()이라 하였고 문과(文科)를 급제(及第)하여 군수(郡守)를 역임(歷任)하신 어른은 사복(士福)이었으며 현감(縣監)을 역임(歷任)하신 어른의 이름은 익형(益亨)이라 하였으니 이분들은 모두 부친(父親)과 조부(祖父) 이상(以上)의 어른들이신데 대대(代代)로 빛나는 음덕(蔭德)이었다.

 

 

12. 조양 임씨(兆陽 林氏) 본관(本貫) 연혁(沿革)

 

본관(本貫)소재지(所在地) : 전라남도(全羅南道) 보성(寶城)

조양(兆陽)은 전라남도(全羅南道) 보성(寶城) ()쪽에 위치(位置)하는 지명(地名)으로 백제(百濟) 때에는 동로현(冬老縣)이었다. 757(신라 경덕왕 16)에 조양(兆陽)으로 고쳐 분령군(分嶺郡: 樂安)의 영현(領縣)이 되었다가 고려(高麗) 현종(顯宗) 때 보성현(寶城縣)에 속()하였다. 1395(태조 4) 고흥현(高興縣)에 편입(編入)되었고, 1441(세종 23)에 다시 보성군(寶城郡)에 환속(還屬)되었다.

 

 

13. 조양 임씨(兆陽 林氏) 인구수(人口數)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조양 임씨는 1985년에는 총 5,456가구 23,689,

2000년에는 총 9,889가구 31,924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14. 조양 임씨(兆陽 林氏) 인터넷 사이트

 

http://cafe.daum.net/jolim/

http://cafe.daum.net/jolim/

 

 

끝으로 님의 건강과 행복이 충만 하시기를 빌겠습니다.

201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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