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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마카베오상 줄거리아는데로 다써주시면 채택 내공들어갑니다!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2,278 작성일2014.04.07
마카베오상 줄거리아는데로 다써주시면 채택 내공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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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mer****
별신
사회학 16위, 세계사 56위, 철학, 심리철학 53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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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베오기 상권

 

신앙의 이름으로 벌이는 저항

 

서언

 

이 책의 이름은 마타티아스의 가장 유명한 아들 유다에게 붙여진 ‘마카베오’라는 별명에서 나온다. 이 본문은 주전 1세기 초에 히브리어로 썼지만, 원본은 없어졌다. 가톨릭 성경은 그리스어 번역본만을 보존하고 있다.


저자는 주전 175년부터 134년 사이에 일어날 사건을 제시한다. 그리스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유다인에게 그리스인의 관습과 문화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한다. 그러자 유다 사제 마타티아스는 그리스 왕들 및 그 왕들과 한통속이 된 유다인 집단에 맞서 저항과 반란을 이끈다. 그 저항은 어떻게 해서든지 유다 백성의 종교와 문화의 본모습을 지키려는 노력이다. 처음에는 그 투쟁의 목적이 종교의 해방이었지만 점차 정치에서 독립하려는 싸움으로 변했다. 마타티아스가 시작한 이 저항은 그의 아들 마카베오, 요나탄, 시몬이 이끌면서 계속되었다.


이 책은 마타티아스와 그의 아들들의 반란을, 당신께 충실하려고 투쟁하는 사람들을 버리지 않으시는 하느님 자신의 축복을 받은 참된 ‘성전(聖戰)’으로 묘사하면서 종교와 애국심을 하나로 본다(2,61; 4,10). 그리고 신앙을 정치활동 및 혁명운동으로 구체화하도록 초대한다. 이 경우 신앙은 이 세계 밖에 존재하는 안전한 피난처가 아니라 사회와 역사 속에서 변혁을 불러일으키고 해방을 가져다주는 누룩이 된다. 특히 저자는 약하게 보이는 백성일지라도 권력자의 월권 앞에서 무릎 꿇거나 손을 잡아서는 안 됨을 보여 준다.


종교와 애국심의 결합은 불의에 맞서지 않기 위한 변명이나 제멋대로 사람들 비위를 맞추기 위한 기회로 여겨서는 안 되는 모호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모든 투쟁은 끊임없이 고쳐나갈 필요가 있다. 그것은 애초의 순수한 계획이 일그러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더구나 종교의 이름으로 펼치는 싸움에 따르는 위험을 우리는 잊지 않고 있다. 만일 싸움이 무조건 권력 추구로 떨어질 경우에는, 하느님이 당신 계획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야심의 이용물이 되시고 만다. 한편 애국심의 이상에 대해서도 똑같은 말을 할 수가 있다. 즉 많은 경우 애국심은 자기네 맹목적인 목적을 이루는 데 백성을 이용하는 집단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한 구실거리가 될 수가 있다.




해설




마카베오기 상권은 여러 차원, 즉 문학, 역사, 정치, 종교 차원에서 읽을 수 있다. 성경은 성급하게 읽을 책이 아니라 깊이 생각하면서 조용하게 읽을 책이다. 똑같은 대목이라도 되풀이하여 읽다보면 새로운 전망이 열린다. 그 대목을 쓴 목적과 비밀을 발견할 수가 있다.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우리의 저자는 꽤 신빙성이 있다. 그의 역사 개념은, 우리와 상당히 다를지라도(자기 영웅들에게 호감을 느끼면서 역사를 쓰고 있기 때문에), 지형학, 지리, 연대 내용은 기본적으로 객관적이다. 이 책의 짜임새는 비교적 직선적이다. 즉 12장에서는 박해의 시작과 마타티아스와 그의 다섯 아들의 저항을 소개하고, 3,19,22에서는 유다 마카베오를 다루고, 9,2312,52에서는 요나탄을 다루고, 12,5316,22에서는 시몬을 다룬다. 그들 형제마다 난관에 부딪친다. 그리고 각 형제는 자기 기질에 따라서 그리고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투쟁을 벌인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종교적 관점이다. 이 작품은 마카베오 형제들의 말을 듣지 않은 자들을 “하느님을 대신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한 사람들의 후손이 아니었다.”(5,62)고 말한다. 이 작품은 또한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누는 율법을 중심으로 삼고 있다. 셀레우코스와 하스모니아 사이의 대결보다 율법을 준수하는 사람들과 율법을 반대하는 사람들 사이의 대결을 더 심각하게 보고 있다.




1,12,70 이 서론은 둘로 접은 서판을 펼치는 것과 같은 예술다운 형태를 띠고 있다. 그 서판에서는 점점 심하게 자행되는 불경한 짓(1장)과 그에 대하여 점점 더 커지는 저항(2장)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한쪽에는 알렉산드로스로 인격화한 헬레니즘이 있고, 또 다른 한쪽에는 율법을 감싸는 영웅들이 있다.


저자는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우주의 역사라는 틀 속에 위치시킨다. 그리고 알렉산드로스의 교만과 그가 죽은 다음 일어나는 사건들을 강조한다. 알렉산드로스를 계승한 자들의 역사는 “그들은 그가 죽은 뒤에 모두 왕관을 쓰고, 그들의 자손들도 그 뒤를 이어 오랫동안 그렇게 하였다. 그들은 세상을 악으로 가득 채웠다.”(1,9)라는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우리 저자에 따르자면, 모든 사람이 그리스 문화가 확산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악이 주로 두 원인, 즉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와 그가 받쳐 주는 배교한 유다인들이라는 두 원인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보았다.


예루살렘에 경기장을 세운 일은 정치적인 의미와 종교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경기장은 그리스 문화와 관념을 퍼뜨리는 중심이었다. 그 경기장은 또한 이방인 신들을 떠받드는 예배 및 사악한 실천과 연관되어 있었다. 덧붙여서 말하자면, 그 경기장에서 벌어지는 행사에 참석한 유다인 남자들은 발가벗고서 고통스러운 수술로 할례 받은 흔적을 없앴다. 그런 짓은 율법에 충실한 다른 유다인들 눈에 계약을 깨는 짓으로 비쳤다. 귀양살이 동안에 할례를 받은 흔적을 지니는 일은 나라의 존재 자체가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 자기네 본모습을 내세우고 지키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었다. 그리하여 율법 전통을 착실히 지키는 충실한 유다인들과 율법을 저버리고 배교한 유다인들 사이에 대결이 빚어졌다. 배교한 유다인들은 유다인 문화를 버리고 이방인 문화를 철저하게 따라가고 있었다.




1,1-40 이집트를 차지하려던 안티오쿠스의 계획은 로마에 의하여 수포로 돌아간다. 로마가 소아시아에 그늘을 드리우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안티오쿠스 4세는 이집트에서 돌아오는 길에 성전과 예루살렘을 약탈하고 많은 유다인들을 죽이고 그들 가운데 상당히 많은 사람들을 포로로 끌고 간다. 그 외에도 안티오쿠스는 온갖 못된 짓을 저질러 유다인들을 깊은 비탄에 잠기게 한다. 우리의 저자는 구약성경의 몇몇 시적인 대목(참조. 시편 78. 아마 이 시기에 쓴 시편일 것이다.)을 상기시키는 슬픈 탄식을 쏟아놓는다.


그 왕이 세운 요새는 - ‘아크라’는 그리스어 명칭이었다. - 유다인들에게 끊임없는 위협이 되었다. 예루살렘이 당하는 억압의 상징이 되었다. 그래서 많은 유다인들은 그 요새에 주둔한 군인들이 자행하는 박해에 희생당하지 않으려고 피신해야 했다.


41-64 안티오쿠스는 유다인들을 새로운 사회질서에 더 깊숙이 편입시키기 위하여 유다인들의 경신례를 금지시키기로 결정한다. 그런 그리스인들을 지지하는 유다인들은 그 새로운 질서에 편입되는 일을 돈을 버는 기회로 삼는다. 안티오쿠스는 유다교의 외적 상징물들을 - 경신례, 할례, 단식에 관한 율법 등을 - 공격하는 데 힘을 기울인다. 그 상징물들만 없애면 유다교가 없어지리라 기대한다. 심지어 예루살렘 성전 제단 위에 자기네 우상(제우스? 메테오리트?)을 세울 지경에까지 다다른다. 그것은 다니엘이 말하는 ‘파괴자의 우상’(다니 9,27)이다. 많은 유다인들은 왕의 명령에 따른다. 그러나 다른 유다인들은 자기네 자신을 더럽히지 않기 위하여 그리고 율법을 준수하기 위하여 광야로 피신한다.




2,1-14 마타티아스가 피느하스의 행동(민수 25,6-15)이라고 부르는 행동으로 저항을 시작한다. 성전(聖戰)이 불붙는다. 유다인들의 저항은 소극적인 것이 아니다. 일단 시작된 폭력저항은 그칠 줄을 모른다.    


15-48 마타티아스 일행은 광야로 피신한다. 그의 추종자들도 광야로 피신한다. 광야에서 그들은 유격전을 준비한다. 그러나 폭력저항을 채택한 마타티아스를 모두가 따른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율법에 따라서 살 수 있기 위하여 광야로 들어갔던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안식일에 공격을 받자, 그들은 그냥 저항을 하지 않고 죽임을 당하든지 아니면 무기로 자기 자신을 방어하든지 양자택일을 해야 했다. 결국 안식일 규정을 어기느니 차라리 자기 자신을 방어하지 않는 편을 선택한다. 하늘과 땅을 불러 자기네가 죄 없음에 대한 증인으로 삼고, 하느님의 손에 복수를 맡긴다. 그에 비해 마타티아스 일행은 안식일에 대한 실용적인 해석을 채택한다. 그들이 보기에는, 사람 자신이 율법보다 더 중요하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마타티아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불신자들을 공격하는 데 그치지 않고 배교한 유다인들에게도 자기들을 따르도록 강요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배교한 유다인들에게 그들이 추구하는 종교자유를 허용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살고 있을 당시, 아마 마카베오의 관점에서 그런 결정 과정이 정당화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 사는 우리 관점에서 볼 때에 그들의 태도는 문제가 있다.


49-70 이 유언에서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귀감이 된 일련의 사람들 이름을 댄다. 또한 장남은 아니지만 가장 용감했던 유다를 강조한다. 그 명단에는 당시 유다인들이 처해 있던 시기에 가장 중요하게 여기던 인물들이 들어 있다. 마타티아스는 그들의 공적과 그들이 받은 상에 대하여 말한다. 그들의 공적은 주님을 신뢰하고 믿은 데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받은 상은 주님께서 언제나 그들을 결코 내버려두지 않으셨음을 가리킨다.


마타티아스의 죽음을 묘사하면서 저자는 야곱의 죽음에 대한 묘사를 본보기로 취한다(창세 49). 야곱처럼 마타티아스도 자기 아들들의 미래를 예고한다. 아들들에게 그들의 책임에 대하여 말한 다음 죽는다.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예절을 끝낸 다음, 그를 선조들의 무덤에 묻는다.




3,14,61 유다가 자기 아버지를 계승한다. 유다인들에게 유다는 마치 둘째 여호수아처럼 비쳤다. 이 장(章)들에서 우리는 여호수아기와 판관기에 나오는 주님의 전쟁으로부터 그 동기가 되울림을 들을 수 있다. 유다는 세 군대와 맞선다. 첫 번째는 아폴로니우스가 이끄는 군대다. 그는 지역 지도자로서 시리아군 사령관 세론에게 속해 있다.


마침내 안티오쿠스 왕이 몸소 개입한다. 그리고 리시아스에게 왕의 직무를 대신하게 한다. 그는 유명한 사람으로서 왕의 친척이기도 하다. 왕은 라시아스에게 유다인들을 굴복시킬 사명을 맡긴다. 리시아스는 팔레스타인에 맞서 싸울 군대를 이끌 사람으로 프톨레마이오스를 임명한다.


마카베오기는 처음 두 차례 전쟁을 길게 묘사한다. 그러나 두 번째 전쟁에 앞서 유다가 행한 연설에서 저자는 그 전쟁의 의미를 설명하고 성전(聖戰)의 전통적인 몇 가지 요소를 되살린다. 유다의 군인들이 적군의 숫자가 자기들보다 훨씬 많은 것을 보고 겁에 질리자, 유다는 자기 군인들의 용기를 북돋아준다. “그러자 유다가 대답하였다. “적은 수로도 많은 수를 쉽게 막을 수 있다. 하늘이 구하려고 할 때에는 수가 많고 적은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전쟁의 승리는 군대의 크기가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힘에 달려 있다.”(3,18-19)


유다의 묘사 안에는 다윗을 상기시키는 요소가 들어 있다. 즉 유다는 죽은 아폴로니우스의 칼을 취한다(3,12). 이는 마치 다윗이 골리앗의 칼을 취한 것과 같다. 리시아스가 보낸 보병 사만 명과 기병 칠천 명은 실제 숫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거친 유다 지역에서 그렇게 많은 기병은 쓸모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표현은 다윗이 똑같은 숫자의 시리아 군인들을 죽였다고 적혀 있는 1역대 19,18로부터 따 온 것이다. 유다는 미츠파에서 리시아스가 보낸 군인들과 치를 전쟁을 준비한다. 이곳에서도 옛날 사무엘이 필리스티아인들과 전쟁을 치르려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모은 적이 있다. 전투에 들어가기 전에 유다는 기도를 바치면서 다윗이 필리스티아인 거인을 어떻게 이겼는지를 상기시킨다(4,30).


예절을 거행하는 동안 율법의 자문을 구한다. 아마 성경을 아무데나 펼쳐서 그 안에 표현된 주님의 뜻을 찾으려 했을 것이다(3,48). 여기에서는 원문이 혼란스럽고, 그에 따라 해석이 구구하다. 그 해석 가운데 한 가지는, 이방인들이 자기네 우상들로부터 찾던 것을 유다인들은 거룩한 본문에서 찾아냈다는 식이다. 또 다른 한 가지 해석은, 이방인들이 안티오쿠스가 유다인들에게 강요하려고 애쓰던 예배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거룩한 본문을 사용하려 했으리라는 것이다. 어떤 경우든, 이 대목은 산헤립이 보낸 편지를 성전에서 주님 앞에서 펼쳐들 때 히즈키야가 취한 행동을 상기시킨다.


유다는 신명 20,5-8에 정해진 대로 행한다. 갓 결혼한 남자들, 포도원을 가꾸려는 계획을 세워둔 남자들, 집을 지을 계획을 세워둔 남자들, 소심한 남자들은 집으로 돌려보낸다.


리시아스가 보낸 대장들인 고르기아스와 니카노르는 엠마오에서 패배하고 리시아스 자신도 벳 추르에서 패배한다. 유다가 벌인 전투의 첫 번째 국면은 그가 시온 산에 세운 성전을 봉헌할 때 절정에 달한다. 옛날 사람들에게 산은 종교적으로 매우 중요했다. 그들은 산을 신과 만나는 특별한 장소로 여겼다. 더구나 각 나라가 자기네 산을 땅의 중심으로 보았다. 그 산을 중심으로 땅이 형성되었다고 믿었다. 성전이 더렵혀져 있는 상태를 목격하는 일은 유다인들에게는 모독으로 비쳤다. 그것은 위험스럽게까지 보였다. 왜냐하면 세계의 올바른 질서는 성전의 상태에 달려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성전이 계속 더렵혀진 채 있으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삼년 뒤 이방인들이 제단을 더럽혔던 바로 그 날 유다는 성전을 새롭게 봉헌했다. 이스라엘 역사상 성전은 여러 차례 축성되었다. 첫 번째는 솔로몬 치하에서 봉헌되었다(1열왕 8), 그리고 히즈키야가 정화했다(2역대 29). 그리고 귀양살이 이후에 재건되었다.


주전 164년 키슬레우 달 이십오일 성전을 봉헌했다. 그 예식은 여드레 동안 계속되었다. 유다와 그의 형제들 그리고 회중은 그 봉헌 축제를 해마다 여드레 동안 지내기로 결정했다. 이 축제는 ‘하누카’라고 알려진 축제다. 이 단어는 ‘거행’을 뜻한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서 그 축제는 여러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즉 봉헌축제(1마카 4,59), 정화축제(2마카 2,9)라고 부르고, 또한 빛의 축제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빛의 축제라고 부른 이유는 성전에 많은 촛불을 켜 놓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또 모든 가정에 등불을 켜 놓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재건된 성전을 봉헌하는 행위는 수많은 종교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먼저 유다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성전을 봉헌했다. 이스라엘 백성이 예전에 지내던 모든 축제는 성경에 정해져 있다. 그 어떤 축제도 인간이 제정한 적이 없다. 귀양살이 이후 성전을 재건한 날까지도 기념일을 정해 장엄하게 지냈다. 그것은 유다가 취한 정화작업이 전에 없던 일이 아님을 가리키기 위해서였다. 그런 방식으로 행동함으로써 유다는 자기 적들의 관습을 모방하지만, 동시에 그 관습을 유다교 안에 들여놓았다. 이것은 마카베오가 역사적 사명을 수행하는 기나긴 여정에서 취한 첫 번째 발걸음이었다. 즉 유다는 선조들의 종교를 희생시킴이 없이 그리스 실천을 유다교 안으로 들여놓았다.




5,1-64 유다가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자 인근 백성들이 반감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특히 성전 재건 사업이 그 반감에 불을 붙인다. 그 백성들은 곳곳에서 유다인들을 박해한다. 물론 그런 일이 처음 벌어진 것은 아니다. 에즈라와 느헤미야 시대에도 성소 재건 사업에 대한 강력한 반대가 있었다(에즈 45). 그 공격을 견뎌야 하는 사람들은 이방인 도시에 사는 유다인들이다. 그래서 유다가 개입을 할 수밖에 없다. 그는 자기 병력을 나누어서 일련의 기동전을 편다. 우리의 저자는 그 기동전을 연대를 따르기보다도 사건별로 묘사하고 있다.


전투는 특히 갈릴래아와 길앗에서 벌어진다. 유다는 신명 20에 나오는 전쟁에 대한 율법에 따라서 행동한다. 신명 20에서는 가까운 도시와 멀리 떨어진 도시를 구분하고 있다. 가까운 도시에는 전멸시키는 율법을 적용한다. 그리고 멀리 떨어진 도시에서는 남자만 제거한다. 유다는 자기가 벌이는 전투가 정복전쟁이 아니라 종교를 보호하는 전쟁이라는 구실을 내세워 자기의 그와 같은 잔인한 전법(戰法)을 정당화한다.


이 전투 부분은 흩어진 유다인들을 유다로 데려와 시온 산으로 올라가게 한 대 진군으로 끝난다. 그렇게 하여 성전은 다시금 흩어진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모아들이는 본래 사명을 다할 수 있었다.


저자는 어떤 의미로 유다가 선택받은 사람으로서 오직 그와 그의 가족만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고 믿는다. 그 증거는 요셉과 아자르야 일화다. 요셉과 아자르야는 스스로 영광을 취하기 위하여 인근 백성들과 전투를 벌이지만 패배하고 말았다. 저자는 그 패배를 그들의 야심에 대한 처벌로 해석하지 않고, “그들은 하느님을 대신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한 사람들의 후손이 아니었다.”(5,62)는 사실에다 돌렸다.




6,1-62 안티오쿠스의 죽음은 일련의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적어도 그 죽음에 대하여 여섯 개의 언급을 가지고 있다. 두 개는 성경 외의 것이고, 세 개는 성경에 들어 있다. 그리고 다니엘서에 그 죽음에 대한 예언적 언급이 들어 있다. 각 언급은 박해자의 죽음을 둘러싼 세부 사항 묘사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리스 역사가 폴리비우스에 따르면, 안티오쿠스는 페르시아 엘리마이스에서 아르테미스 신전을 약탈한 뒤에 테베에서 미쳐서 죽었다. 알렉산드리아 공직자 아피안은 다르게 이야기한다. 즉 안티오쿠스의 죽음을 엘리마이스에도 있었던 비너스 신전을 약탈한 일과 연결 짓는다.


마카베오기 상권은 안티오쿠스의 죽음을 예루살렘에 성전이 봉헌된 다음에 일어난 일로서 묘사한다(6,1-6). 그리고 페르시아 신전을 약탈하려고 계획을 세운 일과 연관 지어서 묘사한다. 엘리마이스라는 도시에 있는 신전을 약탈하려던 자기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실망한 안티오쿠스는 바빌론으로 돌아온다. 바빌론에서는 유다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듣는다(6,5-7). 그 소식을 들은 안티오쿠스는 몸져눕는다. 그는 아직 어린 자기 아들 안티오쿠스 5세의 섭정으로 필리포스를 임명하고 죽는다. 여기에서 안티오쿠스의 죽음은 페르시아 신전을 약탈하려는 계획의 결과가 아니라 예루살렘을 향한 그의 오만하고 도전적인 태도의 결과로서 묘사되어 있다.


2마카 1,13-17에 따르자면, 안티오쿠스가 나내아 신전을 약탈하려 하자 나내아 여신의 사제들이 그를 죽인다. 나내아 여신에게는 여러 가지 이름이 붙여졌다. 2마카 9에는 안티오쿠스의 죽음에 대한 매우 처참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나 그 대목은 역사적인 이야기라기보다는 신학적 문학유형에 속한다. 저자는 사건들을 극적인 형태로 제시하고 있다. 박해자의 죽음을, 예를 들어서, 지혜서에 나오는 것과 같은 것(5,1-5) 죽음으로 제시하는 문학유형을 사용하고 있다. 우리는 헤로데 아그리빠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에서 그와 비슷한 경우를 볼 수 있다(사도 12,21-23). 2마카 9와 다른 이야기들 사이의 차이는 저자가 채택하는 다른 관점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할 수 있다. 저자는 안티오쿠스가 박해자로서 죽었음을 분명히 하려하고 있다.


다니 11,40-45에는 안티오쿠스의 죽음에 대한 수수께끼 같은 언급이 나온다. 여기에서는 그의 죽음이 거룩한 땅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몇 가지 이야기들은 기본적인 사실 즉 안티오쿠스는 신전을 공격한 결과 페르시아에서 죽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동의한다. 그 신전은 어떤 신전일까? 성경 이외의 저술가들은 아르테미스 또는 비너스의 신전에 대하여 말한다. 2마카 9 1마카 6에서는 그 죽음을 예루살렘 성전과 연관 짓는다. 그 두 본문은 인과응보를 피할 수 없다는 교훈을 가르치려 노력하고 있다. 즉 독재자들은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안티오쿠스의 죽음은 주전 164년 봄에 발생했다고 볼 수도 있을 할 것이다. 그러나 정확한 연대를 짚어낼 수는 없다.


63-68 이 지점까지 전쟁은 유다에게 유리하게 전개된다. 그래도 유다는 예루살렘 요새가 자기를 괴롭히는 가시와 같다고 느낀다. 그는 에우파토르라고 부르는 안티오쿠스 5세 왕이 아직 어리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예루살렘 요새를 공격한다. 그 요새 안에 있던 몇 사람이 밤중에 유다인들의 포위망을 뚫고서 상황을 왕에게 알린다. 왕은 강력한 군대를 조직한다. 당시 동원할 수 있는 가장 최신 무기를 갖춘다. 코끼리들은 오늘날로 말하자면 탱크와 같다. 유다는 패배한다. 그러나 우리의 저자는 그 낱말을 사용하지 않고 또 그 패배에 대한 종교적 해석도 내리지 않는다. 엘아자르는 영웅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왕이 타고 있다고 여긴 코끼리를 죽인다. 엄청나게 큰 코끼리가 넘어질 때 엘아자르는 그 밑에 깔려 죽는다.


저자의 이야기 솜씨는 전쟁 묘사에서 드러난다. 그는 왕의 군대와 그 강력한 무기를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저자는 자기 백성의 패배를 말하는 유다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전쟁을 묘사하면서 즐기고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는 자기 백성이 패배한 사실을 최대한 기술적으로 암시하는 정도로 넘어간다.


이제 전장(戰場)의 주인이 된 안티오쿠스는 한편으로는 예루살렘을, 또 다른 한편으로는 벳 추르를 공격할 위치에 있다. 그는 먼저 벳 추르를 정복한다. 벳 추르에서는 식량이 떨어진 생태였다. 왜냐하면 안식년이었기 때문이다(레위 25,1-7). 그 다음에 왕은 예루살렘을 공격한다. 오랫동안 예루살렘을 포위한다. 저자는 예루살렘을 공격할 때 사용한 다양한 무기, 즉 쇠사슬, 갑옷, 구리 투구, 나무탑, 금과 구리로 만든 방패 등을 자세하게 소개한다. 예루살렘 안의 상황도 좋지 않다.


예루살렘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왕은 포위망을 푼다. 왜냐하면 안티오쿠스 4세로부터 어린 왕을 돌보라는 명을 받은 필리포스가 정권을 잡으려 한다는 소식을 섭정 역할을 하고 있던 리시아스가 들었기 때문이다. 데메트리오스가 왕좌에 앉으려고 시도할 가능성(7,1) 또한 리시아스와 왕이 유다인들과 합의에 도달한 먼 이유였다. 이상하게도 이 대목에서 마카베오는 나오지 않는다. 우리는 매우 객관적으로 사건을 묘사하는 저자의 정직함을 인정해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느님이, 마카베오들이 계약의 백성을 위하여 싸우고 있을 때라도, 언제나 개입하지는 않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다인들은 자기네 종교 자유를 얻지만, 정치적 자치권은 얻지 못한다. 마카베오의 반란은 정치적 기초를 다지지 못했던 것이다. 왕의 눈에는 마카베오들이 단순히 자기네 선조들의 율법을 엄격하게 해석하려 하는 파당에 지나지 않았다.




7,1-25 셀레우코스 4세 필로파토르는 죽으면서 자기가 로마로 인질로 보내야 하는 아홉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데메트리오스를 자기 후계자로 남긴다. 그 기회를 잡아서 셀레우코스의 동생 안티오쿠스 4세가 나라를 다스린다. 안티오쿠스 4세도 죽으면서 자기 아들을 후계자로 남긴다. 그러자 데메트리오스는 자기가 합법적인 후계자라고 생각한다. 그는 로마 경비병들을 따돌리고 배를 타고 페니키아 해안으로 가서 트리폴리스에 상륙한다. 그 곳에서 군대를 모으고 함대를 꾸린다. 그의 대장들은 안티오쿠스 5세와 리시아스를 죽인다.


알키모스 이야기는 유다인 저항운동 안에 여러 분파가 있었음을 비추어준다. 리시아스와 유다 마카베오가 합의한 결과 배교한 유다인들에게 일정한 자유가 주어진다. 그들은 박해와 괴롭힘을 받고 팔레스타인을 떠나도록 강요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알키모스(야킴이라는 유다인 이름의 헬라식 표현)는 사제 가문에 속해 있었지만, 대사제 오니아의 가문에는 속해 있지 않았다. 대사제직의 계승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통치 초기 헬라 개혁을 단행할 때 중단되었다. 마카베오기 상권이 언급하지 않은 이전 대사제 메넬라오스는 대사제 가문의 구성원이 아니었다. 바키데스와 동행하도록 뽑힌 알키모스는 아론 계열의 사제였다. 그래도 어떤 유다인들은 그를 대사제로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자기들에게 평화로운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투쟁을 시작할 때 유다와 합세한 히시딤이라고 하는 경건파 사람들이 이제는 무기를 내려놓으려 한다. 그들의 의도는 자기네 사제직과 경신례의 합법성을 되찾으려는 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네 사제직을 합법화하기만 하면 해를 입지 않으리라는 가정이 부질없는 소망이었음을 곧 바로 깨닫게 된다. 어떤 사람이 사제로 태어나서 사제로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율법에 대한 그의 충실성을 보장해주지는 못한다. 히디심이라고 하는 경건파 사람들은 야손이 자기 임무를 다 수행했을 때 일어난 일을 마음에 새기지 않았다. 이제 알키모스가 그들을 배신한다.


유다와 그의 추종자들은 그렇게 어리석지 않아서 알키모스가 쳐놓은 덫에 걸리지 않는다. 왜 알키모스는, 잘 무장되고 적의에 차서 사기가 올라간 군대의 보호는 받고 있으면서도, 평화를 보장하겠다고 제안하고 있는가? 바키데스는 알키모스를 떠나면서 유다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맞서 싸울 수 있도록 지원부대를 남겨놓는다. 그러나 유다는 힘을 잃지 않는다. 알키모스는 자기 군대가 몰리는 것을 보면서도 마카베오에게 굴복하지는 않는다.


26-50 데메트리오스는 니카노르에게 유다를 굴복시키라는 임무를 준다. 니카노르는 그럴듯하게 평화를 제안하며서 예루살렘으로 간다. 그는 군대를 끌고 가는 대신 유다 마카베오더러 자기와 만나자고 제안한다. 처음에는 대화가 긍정적인 결과를 낳고 평화조약에 서명을 하기까지 한다. 니카노르는 자기 군인들을 풀어 짐짓 유다와 맺은 우정을 깬다. 그러나 알키모스는 니카노르가 나라의 이익에 반하여 행동했다고 왕에게 고발한다. 그러자 왕은 유다를 넘기라고 니카노르에게 명한다. 그리하여 유다에 대한 니카노르의 태도가 변한다. 그 두 사람은 가파르살라마 전투에서 만난다. 그곳에서 오천 명의 니카노르의 군대가 패한다. 그때 니카노르는 성전과 그 사제들을 경멸한다. 성전을 파괴하겠다는 그의 위협은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성소는 종교적인 상징물로서, 성전이 파괴되면 마카베오가 심각하게 타격을 입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타격은 알키모스와 같은 사제들이 입는 것보다 더 클 것이었기 때문이다.     


두 군대가 예루살렘에서 한 시간 반 거리의 벳 호론 북단에 있는 하다사에서 맞선다. 그 지점은 언덕들 사이로 나 있는 좁은 길을 지나야 하는 곳이었다. 유다의 군대는 그 이점을 살린다. 니카노르는 그곳에서 죽고 그의 군인들은 흩어진다. 여기에서는 니카노르의 패배를 사제들이 기도한 직접적인 결과로서 제시하고 있다(7,36-38). 유다인들은 성전을 모독한 자는 누구든 벌을 피할 수 없다고 믿는다. 유다 자신의 기도는 아시리아인들이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 주님의 천사가 구출해준 일을 상기시킨다. 그렇지만 이제 도움을 주러 오는 주님의 천사가 없다. 지금은 유다인들의 칼을 통하여 하느님이 행동하여 모든 일을 이루실 것이다.


1마카 7 2마카 1415와 비교해보면 몇 가지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다. 두 이야기가 어느 정도 병행하고 있고, 주요한 이야기 줄거리가 같다. 그렇지만 설명이 필요한 차이점들도 있다. 예를 들어서, 하시드인이라고 하는 경건파 사람들을 알키모스가 배신할 일(1마카 7,8-25), 라지스의 자살(2마카 14,37-46), 전투를 앞두고 유다가 꿈에 본 환상 등이다. 이 사실에 대한 여러 가지 설명이 가능하지만, 어느 것도 완전히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가장 받아들일만한 설명 한 가지는 두 저자가 이야기의 줄거리를 알고 있지만, 서로 다른 모양으로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다인들은 니카노르의 목을 자르고, 성전을 파괴하여 바키데스에게 바치겠다고 맹세하려고 치켜든 그의 오른팔을 잘라(1마카 7,47; 2마카 14,33) 성벽에 걸어둔다. 당시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는 법이 규정한 대로, 다윗도 골리앗에 대하여 그와 똑같은 행동을 취하고(1사무 17,54), 유딧도 홀로페르네스에 대하여 그와 똑같은 행동을 취했다(유딧 14,11).


유다인들은 이 큰 승리를 특별히 장엄하게 기린다. 그 날은 아달월 3 13일이었다(주전 161 3 28일). 유다인들은 니카노르를 이긴 민간축제를 해마다 그 날에 지내기로 민주적인 방식에 따라 합의한다(1마카 7,48; 2마카 15,36). 뒤에 가서, 그 축제는 없어진다. 왜냐하면 그 축제가 푸림절 축제와 너무 가까웠기 때문이다. 주후 70년부터서는 그 축제가 달력에서 사라진다.


이 점에서 1마카와 2마카는 더 이상 병행되지 않는다. 저자는 이 장을 판관기로부터 이어져온 전통적인 양식으로 끝맺는다. “유다 땅은 한동안 평온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평화로운 시기는 아주 짧았다. 유다의 죽음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8,1-32 로마인들에 대한 묘사는 열정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천진난만하고 과장되고 부정확하다. 유다인들이 이제는 종교자유를 누리고 있다. 히시딤이라고 하는 경건파 사람들이 무기를 내려놓는다. 사람들은 시원한 공기를 원한다. 고립이 끝나기를 바란다. 다른 백성들과 원만한 관계를 맺고 싶어 한다. 로마와 손을 잡음으로써 마카베오는 자기의 직접적인 적들과 싸우는 데 강력한 동맹자를 얻는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그 강력한 동맹자들에게 점점 더 깊이 매이게 된다. 그 동맹자들이 마지막에 가서는 그들을 파괴하고 말 것이다.


로마는 중동에서 극한 상황이 아니고서는 직접 개입하지 않는 정책을 펼친다. 다른 강대국들에게 - 이 경우에는 데메트리오스에게 - 대적하는 나라들의 노력을 지원하는 길을 택한다. 예언자들이 언제나 외국과 - 특히 아시리아나 이집트와 - 동맹을 맺는 것을 반대하지만, 솔로몬은 여러 외국과 동맹을 맺으면서 이스라엘을 빛나는 나라로 만들었다.


유다는 로마와 관계를 맺기 위하여 에우폴레모스와 야손을 사신으로 보낸다. 에우폴레모스는 헬라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주님을 믿는 운동의 원칙에 충실한 사람이었으며, 야손은 여호수아 또는 예수라는 히브리 이름의 그리스 형태의 이름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 사신들이 떠난 여행길은 길고도 험했다. 왜냐하면 시리아 경비병에게 잡히기가 쉬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아마 바닷길을 택했을 것이다.


당시에는 국제조약을 구리에 새기는 습관이 있었다. 로마와 맺는 조약 원문은 라틴어였다. 그 원문을 그리스어로 번역했다. 라틴어 원본은 카피톨 신전에 보관하고, 그리스어 번역본은 로마와 조약을 맺은 나라에 보냈다. 우리 저자는 그 조약문을 히브리어로 번역하고, 히브리어 번역본으로부터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리스어 번역본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서문은 조약문 안에서 거명한 로마 신(카피톨 신전의 주피터)을 언급하지 않으려고 그 이름을 일부러 뺐다.




9,1-73 이 장에 나오는 사건들은 7장에 나오는 사건들을 직접 잇고 있다. 8장에서는 로마인들과 손을 잡은 이야기를 삽입하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로마와 조약을 맺은 일이 유다가 거둔 큰 성공이었지만, 그 일은 또한 그의 몰락을 가져온다. 유다가 단순히 유격대 지도자일 때에는 안티오키아에게 위협이 되지 않았지만, 이제 로마인들의 지지를 받자 그가 위험한 인물이 된다. 발 빠른 행동이 필요했고, 데메트리오스는 그렇게 행동한다.


니카노르를 이긴 승리로 사기가 오른 유다의 군대도 셀레우코스의 비교할 수 없이 막강한 군대 앞에서 위협을 느낀다. 그의 군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탈영을 하고, 충성스런 팔백 명만 남는다. 그래도 유다는 전투를 피하고 보자고 권고하는 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 자신도 이기리라는 확신이 없지만, 비겁하게 도망치느니 차리라 전투에서 죽기를 각오한다. 명예를 떳떳하게 지키겠다는 생각이 전투를 계속하도록 그를 재촉한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나 원하는 바를 따르기보다 자기 개인의 결단을 앞세운다. 다른 경우에서처럼(1마카 4,10.30-33; 7,41-42) 하늘의 도움도 청하지 않는다. 그는 용감하게 싸우다 죽는다. 여기에서 저자는 그의 실패와 죽음에 대한 신학적 설명을 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마카베오기 상권에서 우리는 마카베오기 하권에 표현되어 있는 부활에 대한 신앙을 발견하지 못한다. 유다의 죽음을 애석해 하는 사람들의 탄식은 사울과 요나탄의 죽음을 슬퍼하는 다윗의 애가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러나 유다의 죽음이 마카베오 운동에 큰 비극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의 형제들이 투쟁을 계속했기 때문이다.


유다의 이야기는 이스라엘 및 유다의 왕들의 이야기처럼 끝난다(2열왕 10,34-35; 12,20-22; 13,8-9.12-13). ‘이스라엘을 구한 분’(9,21)은 이스라엘의 판관들에 대하여 한 말을 상기시킨다.


13-73 유다가 죽자 반란이 잠시 숨을 죽이는 듯 했다. 이제 요나탄이 활동을 시작한다. 그는 판관들의 모형에 따라서 묘사되어 있다. 사람들은 굶주림으로 더해진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들의 근심걱정은 예언자들이 사라질 때 느낀 것과 같았다. 상황이 그들을 구출해줄 사람을 부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유다의 죽음으로 공백이 된 권위를 요나탄이 행사하기를 원했다. 요나탄의 정치적 수완이 자기 형제 유다가 죽은 다음 마카베오 반란운동을 되살려냈다. 요나탄은 ‘아푸스’, 즉 ‘약삭빠른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 별명은 자기 형 요한을 학살한 얌브리의 아들들을 매복 작전으로 죽이자 사람들이 그에게 붙여준 것이다(1마카 9,37-42).


권력 공백기를 틈타, 율법을 어긴 자들이 다시 힘을 얻는다. 바키데스와 알키모스가 그 기회를 이용하여 상대편에게 타격을 준다. 이들의 보복은 유다인들 사이에 저항운동을 불러일으킨다. 요나탄은 치고 빠지는 유격전(게릴라전)을 펼치기 시작한다. 그는 안전한 자리를 찾아서, 자기 사람들을 이끌고 트코아 광야로 피신한다. 다윗도 그곳으로 피신했었다. 요나탄은 더 큰 자유를 느끼고 더 자유스럽게 활동하기 위하여 자기 형 요한을 나바테아 사람들에게 보내어 도움을 청하게 한다. 그러나 아랍 족속에 속한 얌브리 사람들은 요한을 공격하여 죽이고 만다. 그 사건에 대한 요나탄의 응답은 무섭고도 잔인했다. 그러나 그 행위는 당시의 상황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요나탄이 요르단 근처에서 바키데스의 올가미는 피하지만, 바키데스는 유다 대부분을 계속해서 통제하고 있었다. 그 사이, 셀레우코스 왕조 153년(주전 159년)에, 알키모스가 성전을 개축하기 시작한다. 그는 성소 내전의 벽을 허물라고 명령한다. 이 성소 내벽은 하까이와 즈카르야가 유다인들을 이방인들과 갈라놓으려고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런 수법으로 알키모스는 그 두 집단 사이의 차이를 없애려 한다. 그린 짓을 하다가 알키모스는 죽고 만다. 그의 최후에 관한 이야기는 성경의 다른 책들 안에 나오는 사악한 자들의 최후를 상기시킨다.


요나탄은 자기의 유격전 전법을 바꾼다. 광야를 떠나 요새로 피신한다. 그곳에서 자기네 자신을 노출시키지 않은 채 과감한 공격을 펼친다. 바키데스가 요나탄을 포위하고 공격한다. 그러나 요나탄은 그 공격을 피한다. 바키데스는 자기가 곤경에 처한 것을 보고서 자기 나라로 돌아간다. 그러면서 자기에게 실패를 안겨준 유다인 동맹자들에게 화풀이를 한다. 그러고 나서 요나탄과 평화조약을 맺는다. 그 조약으로 요나탄은 5년 동안 평화롭게 살면서 자기 유리할 대로 일을 할 시간을 번다.




10,1-14 스스로 셀레우코스 왕이라고 선언한 알렉산드로스는 발라스와 에피파네스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안티오쿠스의 아들로서 인정을 받고자 하지만, 많은 저자들에 따르면, 그는 스미르나에서 온 사기꾼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카파도치아, 페르가몬, 이집트 왕들의 지지를 받는다. 또한 로마의 호감도 사고 있다. 요나탄은 이제 자기가 유리한 국면에 들어섰다고 생각한다. 데메트리오스와 알렉산드로스 두 사람이 모두 요나탄을 정중하게 대한다. 그것은 그와 동맹을 맺으려는 심산에서다. 그 두 사람 다 왕좌를 지키려면 요나탄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선물을 주면서 요나탄을 끌어들이려 한다. 데메트리오스는 병력을 모을 수 있는 권한을 주고, 알렉산드로스는 대사제직을 준다. 정통성이 의심스러운 왕으로부터 사제직을 받는 일이 정당한가? 셀레우코스는 과거에도 야손, 메넬라오스, 알키모스에게 대사제직을 준 적이 있다. 알렉산드로스는 그런 전례를 따른다. 요나탄은 입장을 바꾸어 알렉산드로스와 합세한다. 왜냐하면 알렉산드로스가 유다인들을 박해하지 않고 자기에게 대사제직을 주었기 때문이다.


주전 152년, 요나탄은 초막절에 대사제로 임명된다(1마카 10,15-21). 그렇게 하여, 마카베오 가문에 속한 사람이 나라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어떤 유다인들은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요나탄이 대사제직을 찬탈했다고 여긴다. 이들은 사해 부근 언덕으로 물러가서 꿈란 공동체를 형성한다. 어떤 학자들은 사해에서 발굴된 두루마리들이 사악한 대사제에 대하여 말하는 내용이 요나탄 또는 시몬을 가리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15-50 알렉산드로스 발라스가 요나탄을 대사제로 임명하고 진귀한 선물을 주었다는 소식이 데메트리오스의 귀에 들어간다. 데메트리오스는 짐짓 너그러운 채 하면서 요나탄에게 알렉산드로스보다 더 큰 호의를 보이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유다인들이 자기편을 들기만 하면 더 많은 혜택을 베풀겠다고 약속한다. 그 가운데는 예루살렘 경계 안에 있던 셀레우코스의 마지막 보루인 아르카 요새를 폐쇄하겠다는 약속도 들어 있다. 그러나 요나탄은 데메트리오스가 정직하지 못함을 알고 발라스에게 계속 충성을 바친다. 그로부터 조금 뒤 데메트리오스는 전쟁에서 지고 목숨을 잃고 만다.


51-66 알렉산드로스는 자기 왕국의 안보를 강화하고 평민 출신으로는 얻을 수 없는 사회 신분을 얻기 위하여 결혼을 통하여 프톨레마이오스와 관계를 맺기로 정하고 그 딸 클레오파트라를 자기 아내로 달라고 청한다. 알렉산드로스는 프톨레마이스에서 거행한 결혼식에 요나탄을 초대하고 그에게 ‘왕의 친구’, ‘스트라테고스’, 즉 유다 군대 사령관, ‘메리다크’, 즉 유다의 통치자라는 칭호를 내린다. 그리하여 요나탄이라는 한 인물에게 종교・군사・시민적 권위가 모아진다.


67-89 알렉산드로스는 3년이 채 지나지 않아 방탕함과 잔인함으로 인하여 신망을 잃어가고 있었다. 데메트리오스의 장남이 안티오키아에서 셀레우코스의 왕통을 회복할 때가 왔다고 판단한다. 코엘레-시리아를 다스리던 아폴로니우스가 그의 편에 선다. 그러나 요나탄이 아폴로니우스와 전쟁을 하여 이긴다. 그 보답으로 알렉산드로스 발라스는 요나탄에게 새로운 영예를 더해 주고 그에게 황금띠 죔쇠를 보낸다.




11,1-74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와 알렉산드로스가 죽는다. 요나탄은 그 상황을 이용하여 선택된 백성을 위하여 더 많은 이익을 얻는다. 이제 왕이 된 데메트리오스 2세는 군대로 요나탄을 제압하기까지는 그를 자기 친구로 삼기로 결정한다. 요나탄도 그와 똑같은 외교적 태도를 취한다. 그리고 자기 지배권을 확장하는 데 성공하고, 다시 한 번 ‘왕의 주요한 친구’라는 칭호를 얻는다.


왕궁의 보물과 재정이 말라갈 위기에 처해 있었다. 데메트리오스 2세는 어려운 경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하여 이방인의 여러 섬 출신 외인부대를 제외한 나머지 자기 군대를 해산시킨다. 그 조처로 데메트리오스는 자기를 열렬히 지지하던 군인들로부터 신망을 잃는다. 그런 상황을 간파한 트리폰은 아라비아 사람 이말쿠를 만나 알렉산드로스 발라스의 아들 안티오쿠스를 넘겨달라고 압력을 넣는다.


요나탄은 시리아가 처한 어려운 상황을 이용하려고 노력한다. 안티오키아에서 반란이 시작되고, 요나탄은 조공을 면제해주고 헬라화한 부분에 속한 마지막 유다 도시 벳 추르를 자기에게 넘겨주겠다는 약속을 받은 다음 데메트리오스를 도와 그 반란을 진압한다. 일단 반란이 진압되자, 데메트리오스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안티오쿠스는 요나탄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기 우정을 다시 확인하면서 대사제직을 거듭 인준하고 그의 형 시몬을 띠로의 계단이라고 부르는 지방에서 이집트의 국경에 이르기까지의 온 지역의 영주로 삼는다. 요나탄은 안티오쿠스의 우정을 받아들여 데메트리오스의 대장들과 드러내놓고 싸운다.


마카베오기 상권의 이 장(章)은 이스라엘 북방 하초르 근처에서 요나탄이 데메트리오스 군대를 쳐부순 승리로 끝난다. 처음에는 유다인들이 도망을 친다. 그러나 요나탄이 기도를 바친 다음 전세가 바뀐다. 이 일화는 여호수아가 아이에서 패배한 다음 옷을 찢고 기도를 바친 장면을 상기시킨다(여호 7,6-9). 그러나 마카베오기 상권에서는 전쟁에서 패한 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죄 때문이라는 암시는 없다. 저자의 생각으로는, 패배가 아닌 승리에 대해서만 신학적으로 설명을 할 수 있다. 저자는 그 모든 투쟁과 셀레우코스 왕에 대한 여러 가지 요구 사항은 유다인들이 이방인들에 대항하여 벌인 전쟁이라는 인상을 주려고 노력한다. 그 전쟁에서는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편드신다. 요나탄은 벳 추르를 통제하면서 예루살렘 성벽을 다시 쌓기 시작한다.




12,1-38 유다가 그랬던 것처럼 요나탄도 로마로 사신을 보낸다. 그러나 구체적인 도움보다는 정치적으로 인정과 보장을 받으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다. 요나탄은 또한 유다인들과 스파르타인들 사이의 우호를 다지기 위하여 스파르타에도 사신을 보낸다. 아브라함을 뭇 나라와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한 약속은 야펫의 후손들을 셈 계열 안으로 들여보내는 것을 정당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여긴다.


39-53 요나탄이 지니고 있던 큰 힘과 그의 외교적 영향력은 트리폰의 야심에 걸림돌이 된다. 트리폰은 요나탄을 제거하기로 결심한다. 요나탄의 군대가 대들자, 트리폰은 속임수를 쓴다. 자기가 요나탄의 친구인 채 하면서 요나탄더러 군인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프톨레마이스로 오도록 초대한다. 그곳에서 트리폰은 요나탄을 체포하고 그의 호위병들을 죽인다. 그렇게 요나탄은 음모의 희생물이 되고 만다. 그리하여 20년 동안 성공적으로 펼친 그의 활동이 종지부를 찍게 된다. 안티오쿠스 4세의 계승자들인 알렉산드로스와 안티오쿠스 6세에게 요나탄이 충성을 바친 것은 역설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요나탄이 자기 욕망을 이루는 데 가장 알맞다고 여긴 자들과 손을 잡은 그의 기회주의 탓이다.




13,1-53 시몬이 자기 동생의 계승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트리폰은 시몬이 자기에게 은 백 달란트와 요나탄의 두 아들을 인질로 보내면 요나탄을 돌려보내겠다고 제안한다. 시몬은 그 제안이 사기술인줄을 알면서도 백성이 자기를 의심하지 않을까 걱정하여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트리폰은 자기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트리폰은 자기의 기병대를 출동시키려 하지만 폭설 때문에 포기하고 만다. 그 일이 실패로 돌아가자 트리폰은 시리아로 철군하고 만다. 때는 주전 142년 초였다. 시몬은 자기 동생의 시신을 찾아 조상들의 도시인 모데인에 묻는다. 그리고 그곳에 당시 그리스인들의 본을 따른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기념비를 세운다.


요나탄이 죽임을 당한 데 이어 안티오쿠스 6세도 죽임을 당하고 만다. 트리폰은 분명히 변덕스런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데메트리오스 2세는 더 이상 믿을만한 가치가 없었지만, 시몬은 그에게 돌아가고, 트리폰에게서 위협을 받고 있던 데메트리오스는 시몬을 반갑게 맞아들인다. 데메트리오스는 시몬에게 조공을 면제해 주고, 마카베오 군대의 모든 적대적 활동에 대하여 사면을 해주고, 유다를 계속해서 강화하도록 허락한다. 그 평화조약의 결과 이스라엘은 온갖 노예생활 형태에서 벗어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한다(1마카 13,41). 그 일이 일어난 것은 셀레우코스 달력으로 170년 되던 해(주전 142년)다. 또한 데메트리오스가 시몬에게 대사제, 대장(스트라테고스)과 영도자(헤구메노스)라는 칭호를 내린 첫 해다. 마카베오 형제들이 투쟁을 벌인 지 25년이 지나 이제 끊임없는 왕위계승 다툼 때문에 유다를 끊임없이 위협하던 셀레우코스 왕들의 시대보다 더 나라가 안정된 듯이 보였다.


이제 데메트리오스와 트리폰에게서 시달림을 받지 않게 된 시몬은 이방인들과 배교한 유다인들이 차지하고 있던 가자라와 예루살렘을 통제하기로 결정한다. 시몬은 가자라를 포위하여 함락하고 그 주민을 잘 대해준다. 가자라는 전략요충지였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통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전 141년 봄, 시몬은 자기 동생 요나탄이 포위하기 시작한 예루살렘에 있는 시리아 수비대를 정복한다. 예루살렘 요새와 그 수비대는 시리아가 유다의 가장 거룩한 장소를 통제하고 있음을 상징하고 있었다. 가젤과 예루살렘에 대한 정화작업은 그 안에 있던 우상들 때문에 행해졌다. 그 정화작업은 점령의 종교적 성격을 잘 보여 준다.


시몬은 성전을 잘 지키고, 자기 가족과 더불어 살고 있는 요새를 강화한다. 그는 자기 아들 요한은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왕조를 들여놓는다. 요한 히르카누스라는 이름으로 왕이 된 요한은 가자라에 주둔한다.




14,1-15 저자는, 시몬 밑에서 유다인들이 누리던 평화가 예전의 평화를 능가했음을 인정해야 할지라도, 상황을 이상적으로 그리고 있다. 시몬은 야포를 결정적으로 차지함으로써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항구를 마련해 준다. 그리고 국경을 넓힌다. 그래서 시몬에 대한 찬사는 모세오경에 나오는 찬사 및 예언자들에 대한 찬사를 닮았다(참조. 즈카 8,4; 에제 34,27; 미카 4,4; 레위 26,4).


시몬의 통치는 메시아 시대를 보는 듯 했다. 약속이 채워졌다. 사람들은 더 이상 꿈을 꾸고 있거나 불가능한 이상향에 살고 있지 않았다.




14,1615,41 시몬은 사람들이 그를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로 인식하고 받아들이던 평화로운 시절에 통치자로서 자질을 보여 준다. 그는 요나탄이 스파르타 및 로마와 맺은 관계를 유지한다. 그리고 자줏빛 옷을 입고 놋쇠판에 계약문을 여러 개 새겨 그것을 시온 산에 있는 여러 기념비에 붙여놓는다. 그 놋쇠판에다 또한 자기 아버지와 형제들의 이름도 새긴다.


주전 140년, 데메트리오스 2세는 파르티아인들과 치룬 전투에서 붙잡히고(14,1-3), 그의 형제 안티오쿠스 7세 시데테스가 왕좌를 차지하고, 트리폰과 전투를 하는 동안 시몬과 조약을 맺는다. 그 조약에서 그는 예전에 시몬에게 부여한 특권을 인준하고 화폐를 주조할 권한을 준다. 트리폰은 패배한 다음 자살한다.


안티오쿠스 시데테스는 시몬더러 전에 정복한 지역, 특히 가자라와 야포를 내놓도록 요구한다. 그러자 시몬은 부당하게 빼앗긴 ‘선조들로 물려받은 유산’을 되찾을 권리가 유다인들에게 있다고 주장한다. 가자라와 야포에 대해서, 그는 그 도시들이 유다 백성에게 해를 입혔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안티오쿠스가 그 도시들에 대하여 약간의 권한을 가지고 있었음을 인정하고, 보상을 한다. 그렇지만 셀레우코스가 요구하는 대로 다 들어주지는 않는다. 안티오쿠스의 형제 아테노비오스의 보고를 들은 왕은 화를 내면서 자기 대장 켄데베오스더러 유다를 공격하라고 명령한다.




16,1-10 시몬이 자기 아들 요한과 유다에게 한 말은 마타티아가 죽을 때 자기 아들들에게 한 말을 상기시키며(1마카 2,48-68), 몇 가지 병행 구절을 볼 수 있다(1마카 12,15; 13,3; 14,26).


마카베오 군대는 이제 기병을 가지고 있다. 요한이 강을 건넌 사실은 여호수아가 요르단 강을 건넌 사실을 상기시킨다. 요한의 삼촌 유다 역시 그와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1마카 5,43). 시몬은 싸우기에는 이제 너무 늙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요한이 승리를 거둔다. 이 일화는 평화가 완전히 정착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안티오쿠스 시데테스가 파르티아인들과 벌인 전투에서 죽은 다음에야 유다인들은 독립을 맛보게 된다.


11-24 프톨레마이오스(셈족 이름을 헬라 식으로 부른 이름)는 이두메아인이었을 것이다. 이 사람은 유다인들과 다소간에 관련을 가지고 있었으며, 시몬의 사위가 될 만큼 중요한 인물이었다. 야심만만한 그는 대사제를 암살하기에 이른다. 시몬은 자기 형제 유다, 요나탄처럼 모질게 죽는다. 차이가 있다면, 술에 취해 있을 때 반역 음모에 걸려 죽었다는 점이다. 저자는 이 사건에 대하여 종교적인 해석을 내놓지 않고 있다. 시몬의 아들 요한은 피신하여 계속 군주 노릇을 한다.


마카베오기 상권은 유다의 왕들에 관한 책에 나오는 통상적인 양식으로 끝난다(참조. 1열왕 11,41; 14,19; 15,23). 그렇게 함으로써 저자는 자기 작품에 전통적인 특징을 부여하려 하면서 요한 역시 유다의 왕들의 반열에 둔다. 다윗의 군주제는 끝나지 않았다. 히르카니아인들을 정복했다 해서 히르카누스라고 불리던 요한은 주전 135년부터 주전 104년까지 31년 동안 통치권을 행사한다. 그 통치에 대한 실록은 남아 있지 않다.


마카베오 왕조가 사라졌다 해서 그 이상까지 사라졌을까? 그 왕조가 뿌린 씨앗은 메마른 땅에 뿌려져 아무런 결실을 거두지 못했을까? 로마 지배 아래 일어난 여러 운동과 반란은 마카베오들의 영성과 아무런 관련이 없을까? 그들 시대에 일어난 사건들은 순전히 외적으로 우연히 일어났을까? 특히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성전이 파괴된 데서 절정에 달한 로마에 대한 폭력 저항은 마카베오 혁명과 아무런 관련이 없을까?


위대한 역사가 요세푸스는 마카베오 형제들이 벌인 운동과 당시에 일어난 반란들 사이의 유사성은 순전히 피상적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마카베오 형제들이 셀레우코스들을 이긴 승리는 그들이 경전한 사람들이었다는 표시다. 그러나 요세푸스는, 자기의 로마인 친구들로부터 반감을 사지 않으려는 심산으로, 당시에 일어난 반란들이 유다인들이 일으킨 것이 아닌 것으로 그린다. 다시 말해서, 그 반란들은 하느님의 율법에 따라서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이 일으켰다는 것이다. 더구나 요세푸스는 마카베오들과 약간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마카베오들과 로마에 항거하여 반란을 일으킨 지도자들 사이에 관련이 있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 두 집단 사이에는 연관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그 두 혁명운동 사이에는 공통점들이 있다. 더욱이 마카베오들의 표양과 가르침이 초세기 유다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로마에 항거한 반란이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를 거친 다음 일어날 때, 마카베오들을 움직인 동기들이 다시 나타난다. 종교와 정치의 관점에서 볼 때, 그 두 집단은 비슷하다. 즉 그 두 가지 경우에 사람들은 자기네 하느님, 율법, 성전을 위하여 싸운다. 그리고 그들은 이방인들 및 그들의 우상숭배에 반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와 동시에, 특징적인 요인들도 있었다. 셀레우코스들의 세력은 로마의 세력과 견줄 수 없었다. 더욱이 마카베오들은 왕좌를 노리는 그리스인들의 투쟁에서 이익을 취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마카베오들의 투쟁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로마를 대항하여 무기를 든 자들은 서로 심하게 갈라졌다. 그리고 하느님이 마카베오들이 벌인 운동에 개입하신 것처럼 자기들 문제에도 개입하고 계신다는 생각은 거짓된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예수님 시대에는 고유한 의미의 혁명운동이 없었음을 유념해야 한다. 주전 6년부터 주후 42년까지 팔레스타인은 비교적 평온했다. 그 때 ‘열혈당원’이라는 낱말은 뒤에 가서 생긴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 시기에는 로마에 대항하는 운동이 조직되어 있지 않았다. 예수께서도 열혈당원으로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이 아니다. 주후 66년 앞에는 이 낱말이 로마에 반대한다는 의미를 띠고 있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열혈당원들을 단죄하지 않으셨다. 당시에는 그런 의미로 열혈당원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이다.


역사 과정은 이어진다. 마카베오 왕조는 사라지고, 유다인들은 로마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 그러던 차에 기다리던 예언자가 나자렛 예수라는 인물로 등장한다. 메시아에 대한 희망에 부푼 유다인들은 정치적 메시아를 찾고 있다. 그러나 하느님이 보내신 나자렛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다.

2014.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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