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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동래정씨 문경공파 조상님좀 알려주세요...
jung**** 조회수 2,749 작성일2018.10.08
동래정씨 문경공파 조상님좀 알려주세요
이름만이라도 되요!!!!!

내공 80걸고 해택내공 50더 잇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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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y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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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질문에 답변을 합니다.

 

동래정씨 문경공파 조상님좀 알려주세요
이름만이라도 되요!!!!!

내공 80걸고 해택내공 50더 잇어여!!!!

 

답변 : 님은 동래정씨 문경공파 이시군요.

 

문경공파에 대하여 아래에 서술합니다.

 

문경공(文景公) 휘(諱) 정흠지(鄭欽之)에 대(對)하여, 

 

【태백산사고본】

세종21年(己未/1439) 6月(기묘삭-己卯朔) 14日(壬辰)에 전 중추원사 정흠지(鄭欽之)가 졸(卒)하였다. 흠지의 자는 요좌(堯佐)이고 본(本)은 경상도 동래(東萊)인데, 고려 감찰 대부(監察大夫) 양생(良生)의 손자이다. 나서부터 총명하여 조금씩 자라매 글을 읽을 줄 알아 성균관시(成均館試)에 합격하고 음관(蔭官)으로 사헌부 지평에 이르렀다. 법을 잡고 아첨하지 아니하여, 좌정승 하윤(河崙)을 탄핵하다가 드디어 먼 지방으로 쫓겨났다. 태종 신묘년에 급제하여, 이조 정랑·병조 정랑·사간원 좌헌납(左獻納)을 거쳐서, 병인년에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 그때 좌의정 박은(朴訔)이 청성 부원군(淸城府院君) 정탁(鄭擢)과 더불어 노비(奴婢)를 소송하다가 마침내 그 노비를 속공(屬公)하게 되니, 은이 내각(內閣)에 들어와서 일을 아뢰다가 인하여 속공함이 적당치 못함을 스스로 진술하매, 흠지가 상소하여 탄핵하기를 청하였는데, 말이 심히 적당하고 간절하였으므로 당시의 논의가 통쾌하게 여겼다. 얼마 안 되어 파면당하였는데, 은의 꺼리는 바가 되어 4년 동안 쓰이지 아니하였다가, 세종이 즉위함에 이르러 봉상시 소윤(奉常寺少尹)으로 기용(起用)되어, 집의(執義)·지형조사(知刑曹事)·대언(代言) 등을 거쳐 지신사(知申事)에 올라, 기밀(機密)을 맡아서 계옥(啓沃)한 바가 많았다. 세종이 일찍이 철원군(鐵原郡)에서 강무(講武)할 때에 짐승을 많이 잡은 자에게 벼슬로 상(賞)을 주고자 하여, 호종(扈從)하는 대신들에게 의논하니, 모두

“좋습니다.”

하였으나, 흠지는 홀로 아뢰기를,

“이제 짐승을 많이 잡은 자를 벼슬시키면 뒤에 전공(戰功)이 있는 자에게는 장차 무엇으로 상을 주려고 하시옵니까.”

하니, 임금이 그렇게 여겨 드디어 그 논의를 정지하였다. 뒤에 이조 참판과 사헌부 대사헌이 되고, 형조 판서에 올랐으며 충청·경상·전라 세 도의 순무사(巡撫使)가 되어, 바닷가 고을의 성터를 살펴서 정하였다. 을묘년에 국가에서 함길도에 회령 등 진(鎭)을 새로 설치하여 군무(軍務)와 민사(民事)의 일을 처리하기에 매우 어려우므로, 세종께서 흠지를 관찰사로 삼고자 하여 의정부와 의논하니, 모두 말하기를,

“흠지는 늙은 어머니가 있는데 나이가 80이 넘었으니 멀리 보낼 수 없습니다.”

고 하였으나, 임금이 말하기를,

“어버이가 늙은 것은 한 개인의 집 사사로운 일이며 변경의 일은 중한 일이니, 이 사람을 바꿀 수는 없다.” 고 하여, 드디어 보내고 인하여 좌우에게 이르기를,

“정흠지를 관찰사로 삼고, 김종서를 도절제사로 삼았으니, 내가 북쪽을 돌아볼 근심이 없다.”

하였다. 이어서 흠지에게 명하여 와서 어머니를 보살피게 하고, 이듬해에도 와서 어머니를 뵈옵게 하였으며, 특별히 술·고기·풍악 등을 내려서 어머니를 축수하게 하고, 후하게 하사하여 임지로 돌려보냈었다. 이내, 어머니의 병이 급한 때문에 소환(召還)하여 중추원 사에 임명하고, 이듬해에 어머니 상(喪)을 만나고 병이 들자, 임금이 중사(中使-궁중의 사환)를 보내어 고기를 먹기를 권하고, 어의(御醫) 두 사람을 보내어 곁을 떠나지 아니하고 진찰하게 하고, 연달아 문병하며 여러 번 내자시(內資寺)의 좋은 음식물을 내렸다. 죽음에 미쳐 나이가 62세인데, 임금이 슬퍼하여 이틀 동안 철조(輟朝)하고, 사자를 보내어 조문(弔問)하고 부의(賻儀)를 내리며, 특별히 『시호(諡號)를 문경(文景)으로 하니,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함은 문(文)이며, 의(義)를 펴고 강하게 행함은 경(景)이다.』 사람됨이 풍채가 수려(秀麗)하여 밖으로는 화(和)하고 안으로는 강(剛)하여 바라보기가 엄연(儼然)하였다. 평상시에 책보기를 좋아하여 한사(漢史)를 외어서 말하므로, 세종이 일찍이 윤회(尹淮)에게 이르기를,

“흠지(欽之)가 언제 사기(史記)를 이처럼 익혔는가.”

하였다. 또 가산(家産)에 힘쓰지 아니하고, 벼슬에 있으면서 일을 처리할 적에는 대체에 따르기를 힘쓰고 남다른 이론을 세우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였다. 임종할 때에 유서(遺書)로 여러 아들에게 불사(佛事)를 행하지 말기를 가르쳤다. 아들은 갑손(甲孫)·인손(麟孫)·흥손(興孫)·창손(昌孫)·희림(喜霖/喜孫)이고, 육손(六孫)이 있다.

○世宗 85卷, 21年(1439 己未 / 명 정통(正統) 4年) 6月 22日(戊戌) 3번째기사

죽은 정흠지에게 관곽과 석회를 내리다


 

죽은 중추원 사정흠지에게 관곽(棺槨)과 석회(石灰) 70석을 내렸다.

【태백산사고본】 27책 85권 44장 A면

【영인본】 4책 220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世宗 86卷, 21年(1439 己未 / 명 정통(正統) 4年) 8月 26日(壬寅) 3번째기사

고 중추원 사 정흠지에게 사제(賜祭)하다-----[世宗大王의 賜祭文]-----


 

죽은 중추원 사(中樞院使)정흠지(鄭欽之)에게 사제(賜祭)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생각하건대, 경은 의표(儀表)가 수려(秀麗)하고 도량이 너그럽고 깊었도다. 재주는 경제(經濟)에 뛰어나고 학문은 고금을 통하였도다. 젊은 나이로부터 좋은 자리를 밟아 지냈도다. 시험하여 어부(魚符)를 차매 정치의 성적(聲績)이 구름처럼 성하였고, 여러 번 백부(柏府)에 오르매 풍절(風節)이 외롭게 드날렸도다. 어디에 베풀면 가(可)하지 아니하랴. 세상을 상서롭게 하는 어진 이였도다. 내가 그릇으로 중하게 여기어 후설(喉舌)에 발탁하여 두매, 왕명을 출납한 지 두어 해에 계옥(啓沃)3069) 함이 깊고 간절하였도다. 돌보아줌이 우악(優渥)하여 추성(樞省)에 승진하였도다. 이조(吏曹)에 있어서나 형조(刑曹)에 있어서나 감식(鑑識)과 재결(裁決)이 특이하였도다. 지난번 북방에 사진(四鎭)의 설치를 당하여 군기(軍機)와 민무(民務)가 실로 번극(繁劇)하매, 경(卿)을 번거롭게 하여 고삐를 잡게 하니 조치(措置)가 적당함을 얻었도다. 이르는 곳마다 공효가 있으매 의지하고 신뢰함이 깊었도다. 경이 상고(喪故)를 당함으로부터 오래 접근하지 못하였도다. 바야흐로 탈상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더니 갑자기 병에 걸렸다는 말을 들었도다. 내 마음으로 생각하기를 병이 아직도 치료할 수 있다 하여, 좋은 약을 주고 나라 의원으로 진찰하게 하였도다. 날마다 다시 병을 물어서 속히 낫기를 기대하였도다. 어찌하여 구제하지 못하여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는고. 큰 내를 건너는 데 있어 배[舟楫]를 잃은 것과 같도다. 아아, 할 수 없도다. 차탄하고 애석해한들 어찌 미치랴. 할 수 있는 것은 휼전(恤典)을 갖추는 것이도다. 이에 유사(攸司)에 명하여 아름다운 시호(諡號)를 주고, 또 예관(禮官)을 보내어 이 한 잔을 권하노니, 영(靈)이여 어둡지 않거든 흠향하기를 바라노라.” 하였다. 

 

자헌대부형조판서중추원사증(贈)순성적덕보조공신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부사겸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서운관사래산부원군시(諡)문경(文景)동래정공휘흠지묘표.

공은 성이 정이요 휘는 흠지 자는 요좌(堯佐)니 경상도 동래현 어른이다. 증조는 휘 호 (瑚) 중대광(重大匡 : 고려 때 從1品 문관의 품계) 내산군(箂山君)이며, 할아버님은 휘 양생(良生) 중대광 봉래군이며, 아버님은 휘 부(符) 가선대부 한성부윤(지금의 서울시장)이고, 어머님은 정부인 철성 이씨이니, 삼중대광(三重大匡 : 고려 때 正1品 문관의 품계) 삼사 좌사〔三司 : (左使 正3品) 고려 때 전곡 출납 ․ 회계를 맡음. 조선조 : 사헌부 ․ 사간원 ․ 홍문관을 아울러 이르는 속칭〕 충정공 휘 희필(希泌)의 따님이다.

1378(홍무 무오) 6월 계축에 태어난 공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워 배움에 힘써서 나이 열셋(1390)에 진사시에 붙고, 1396(병자)년에 이르러 또 성균관 초시에 붙었다. 처음에 음관(蔭官: 조상 덕에 하는 벼슬)으로 여러 벼슬을 하여, 사헌부 감찰(正6품)을 지내고 포천(抱川) 현감으로 나가 다스리기에 힘쓰다가 임기가 되어 다시 사헌부 지평(正5품)을 지내고, 1411(신묘)년에 병과(丙科)에 뽑히어 이조와 병조의 정랑(正郞 正5품)을 지내고 다음 해 (1412)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복을 마치고 사간원 좌헌납(左獻納)이 되었다. 사헌부 장령(掌令: 정4품)으로 다시 대간(臺諫 : 사헌부 ․ 사간원 벼슬의 총칭)이 되어 모두 법대로 하고 아부하지 않고, 대신을 규탄하다 면직되었으나 다시 기용되어 예문관(藝文館) 직제학(正3품 당하관) 사헌부 집의(執儀), 판사재(判司宰 : 사재시장관 正3품) 겸 지형조(知刑曹)를 지냈다.

이어서 승정원 동부승지와 대언(代言)을 지내고, 조금 있다가 좌부승지를 지낸 다음 특진하여 지신사(知申事 : 승정원 으뜸 벼슬 즉 도승지)를 제수 받아 국가의 중요기밀에 참여하여 많은 것을 아뢰어, 상감마마의 두터운 은혜를 특별히 7년이나 입고 가선대부(嘉善大夫 從2品)에 올라 이조참판(從2品)으로 올랐다. 잠간 있다가 대사헌(從2품)으로 옮기고 가정대부(嘉靖大夫 從2品)로 오른 뒤, 얼마 안 되어 자헌대부(資憲大夫 正2品)로 오르고 형조판서(正2品)가 되었다.

1433(癸丑)년에 나라에서 함길도(함경도) 회령(會寧)진 등을 새로 설치하여, 관리와 백성이 새로 이사하여 야인들과 섞이매, 군사 일과 백성 다스리는 일이 실로 어려워, 상감께서 감사 고르기가 쉽지 않아 1435(을묘)년에 곧 공을 관찰사(지금의 도지사)로 보내매 옆의 대신들에게 “나는 북쪽 걱정이 없어졌다”고 말씀하였다.

그 무렵 공의 모부인께서 팔순(八旬)을 넘으셔서, 공께서 오고 갈 때 문안을 드리도록 명하셨다. 1436(병진)년 공께서 모부인께 문안드리려 왔을 때, 이 해는 가뭄이 들어, 상감께서 반찬을 줄이고 술을 금하셨건만 특별히 술과 풍악을 내리어 어머님의 수를 빌었다. 또한 모부인께 넉넉하게 베푸시어 병들면 반드시 의약을 내리시기 모두 특별한 예우였다.

공이 오실 때마다 반드시 궁중에 불러 국사를 자문하고, 공의 계획이 걸핏하면 상감마마의 깊은 뜻과 맞아 곧 모두 윤허하시었다.

1437(정사)년 봄에 중추원 관리를 시켜 모부인께 대신 문병케 하였고, 가을에 모부인께서 세상을 뜨시자 특별히 상감께서 조문하고 위로하셨다. 1439(기미)년 여름에 남의 헐뜯음이 쌓여 병으로 눕게 되자 상감께서 내시를 보내시어 고기를 먹도록 권하시고, 어의를 보내어 병을 알아보게 하고 번갈아 태관을 보내시고 귀한 음식을 수시로 보내시어 보호와 보살핌이 심히 조심스러웠다. 날마다 완쾌되기를 바랐건만 공은 마침내 6월 16일에 세상을 뜨니 향년 예순둘이었다. 상감께서 슬퍼하여 조회를 중지하고 무릇 상사에 부족한 바는 관(官)에서 모두 맡아서 하게 하셨다.

공께서 세상을 뜨시기 전에 글을 남겨 여러 아드님들에게 다음과 같이 타이르셨다. “장사는 검소하게 치르도록 힘쓰고 불교행사를 하지 말라.”

이 해 9월 어느 날에 양주(楊州) 풍양(豊壤)현 직동(直洞) 선대 산소 아래에 안장하니 유언을 따른 것이다. 공은 모습이 수려하고 수염과 눈썹이 그림과 같으며, 식견이 밝고 도량이 넓으며 겉으로는 부드럽고 속은 강하여 사람과 사물을 대할 때 기쁨과 노여움을 겉으로 나타내지 않으며 화한 기운이 넘쳐흘렀으나, 큰 일 앞에 닥쳐서는 늠름하여 범할 수가 없었다. 평소 집안 재산에 힘쓰지 않았고 책 읽기를 좋아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더욱 통감강목에 숙달하여 어떤 한 가지 일을 하더라도 번번이 외워 처음부터 끝까지 원인과 결말을 자세히 설명하여 마치 손바닥을 가리키듯이 밝았다. 아아. 공의 재주와 덕망은 옛 철인(哲人)에 부끄럽지 않았다. 어느 누가 공을 삼공사보(三公: 영의정·좌의정·우의정. 四輔: 임금을 전후좌위에서 보좌하는 左輔·右弼·前疑·後疑)로 기대하지 않았으며, 상감의 사랑도 남달랐으며, 크게 쓰려고 마음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하늘은 수(壽)를 내리지 않아 마침내 이에 이르니 온 나라가 나라를 위하여 애석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니 슬프도다. 부인은 전주 최씨 형조 전서(典書 正3품) 휘 병례(丙禮)의 따님이다. 아들 여섯 딸 둘을 두니, 맏이 갑손(甲孫)은 1387(정유)년에 과거에 합격하여 대언(代言 正3품)을 거쳐 전라도 관찰사(지금의 도지사)가 되었고, 다음 인손(麟孫)은 함길도(함경도) 경력(經歷 正3품)을 지냈고, 다음 흥손(興孫)은 호군(護軍 正4품), 다음 창손(昌孫)은 1456(병오)년에 과거에 합격하여 집현전 교리(校理 正5품)이며 다음 희손(喜孫)은 사헌부 감찰(正6품)을 지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다음 육손(六孫)은 동부(東部) 녹사(錄事 8~9품)를 지냈다.

맏 따님은 소윤(少尹 正4품) 박거완(朴去頑)에게, 다음은 주부(主簿: 從6품) 이계기(李啓基)에게 시집갔다. 관찰사 (甲孫)의 아드님은 우(俁)와 숙(俶)이며, 맏 따님은 장성하여 동궁(東宮)의 여관(女官)에 뽑히어 승휘(承徽 從4품)가 되었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경력(麟孫)의 아드님은 교(僑)와 의(儀)며, 나머지는 어리다. 호군(興孫)의 아드님은 효(傚)와 천(倩)이며 나머지는 어리다. 교리(昌孫)의 아드님은 개(价)와 칭(偁)이며 맏 따님은 유학(幼學) 김질(金礩)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어리다. 감찰(喜孫)의 아드님과 따님은 모두 어리다.

소윤(朴去頑)의 아드님은 호선(好善)이요, 주부(李啓基)의 아들과 딸은 어리다.

1441(정통6, 세종23)년 신유 3월에 세우다 

 

추 기

1456年(世祖2, 景泰7) 丙子에 창손(昌孫)이 좌익공신(佐翼功臣)이 되고 의정부(議政府) 우의정(右議政)이 되어 公에게 순성적덕보조공신(純誠積德補助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부사(議政府領議政府事 ․ 경연(經筵) 예문관(藝文館) ․ 춘추관(春秋館) ․ 서운관(書雲觀) 영사(領事) 내산부원군(萊山府院君)이 증직(贈職)되고, 정부인(貞夫人) 최씨(崔氏)에게는 정경부인(貞敬夫人)이 가봉(加封) 되었는데 1458(戊寅)년에 84세로 세상을 뜨니 특히 조정에서 조회를 하루 쉬고 저자를 쉬게 하였다. 4월 경오에 묘 남쪽에 장사지내고 1468(성화 무자)년에 광릉 직동(直洞)에 묻었다가 드디어 봉현(蜂峴)으로 이장(移葬)하였다.

 

 


 

끝으로 님의 건강과 행복이 충만 하시기를 빌겠습니다.

2018.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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