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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 디자이너들의 프로필 ★ 내공!!
kyha**** 조회수 36,698 작성일2003.11.04
해외의 유명한 디자이너들의 프로필을 구합니다.

몇년생인지, 어디서 태어났는지, 어디서 자랐는지 등, 그리고 어느 학교 출신인지,

어느나라 어느 곳에서 공부 했는지, 어떠한 과정을 거치고, 어떠한 브랜드에 있었으며, 지금의 자리까지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등, 상세한것들을 알고 싶어요.


되도록이면 명품 브랜드의 수석 디자이너들이나 유명한 디자이너들의 프로필이였음
합니다.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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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CHANEL의 수석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입니다]

칼 라거펠트(Karl Lagerfeld)
1952년 함부르크에서 태어난 칼 라거펠트는 가족과 함께 파리로 왔다. 16세에 IWS(국제양모사무국) 주체의 디자인 콘테스트 코트 부문 제1위를 차지하며 데뷔하여 이 계기로 발맹 Pierre Balmain, 파뜨Jacque Path 등의 오뜨꾸뛰르에서 일하게 되었다.

1964년, 당시 유행처럼 번져 오르던 프레타포르테계에 진출하게 되어 1970년, 프레타포르테계의 파이어니어라고 할 수 있는 클로에 Chloe 사와 계약하고 책임 디자이너로 결정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클로에 사의 디자인은 부인복 이외에도 모피, 구두, 속옷, 스포츠웨어, 수영복, 니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데, 이 클로에 사와 칼은 절친한 관계로 오늘날까지 그 계약 관계를 이어 오고 있다.

칼 라거펠트는 다카다 겐조 Dakada Kenzo와 함께 “두 사람의 K라고 불리며, 파리 프레타포르테 모드계에서 톱 디 자이너로 뽑힌다.

그는 패션에 었어서 리드미컬한 율동이 만들어내는 하모니를 가장 중요시하며, 소프트하게 처리된 소매를 솔기가 없이 부착하 거나, 가볍고 견고한 헴라인, 산뜻한 레이어드 등 그 자신이 개발한 새로운 봉제기술에 있다. 현대적인 감각의 페미닌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 흐르는 듯한 율동을 표현한 아름다움이 매력이며, 평범하면서 일상적인 코디에서 벗어나 위트있게 새로운 코디법을 제시하고 있다.

스타일의 혼합과 엄격한 피리지엔느의 쉬크 chic함, 그리고 그의 컬렉션은 균형잡히고 조화롭고 우아하며 프렌치 감각으로 세련되어 있다. “토털 룩(TOTAL LOOK)”에 자신을 보여 엘레강스하고 스포티한 팬츠 룩, 여유 있게 감싸는 랩 코트, 롱 카디간, 홀터 넥의 이브닝 드레스 등으로 사랑받고 있다.

1975년, 라거펠트 향수 회사 설립.
1975년 4월, G.M.C(Group Mode Creation) - 크리스티앙 디오르 부티크, 에마누엘 웅가로, 파랄렐, 생 로랑 리브 고슈, 클로에, 다카다 겐조, 소지아 리키엘의 프레타 포르테 메이커의 6회사에 의해 결정된 그룹 결성 때 부회장에 선출되어 그 영향력이 막강하다.

프레타포르테 창설 멤버로서 클로에사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그는 1982년 샤넬 Chanel로 자리를 옮겨,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샤넬이 보여준 뛰어난 감각을 살리면서 진부한 측면은 가차 없이 버렸다고 호평을 받았다. 1 세기를 지켜온 샤넬 라인에 그의 여성스러움을 강조하는 디자인 감각을 믹스시켜 샤넬의 정신을 살려나가 많은 칭찬을 듣게 되었다.

1985년, 미국시장을 겨냥한 스포츠웨어 콜렉션을 발표하면서 마리오 발렌티노와 찰스 쥬르당에 장갑과 구두 디자인을 제공하 고 그리고, 클로에 Chloe와 펜디 Fendi의 디자인도 맡아하고 있다. 자신의 패션 스타일을 '이지적이고 섹시한 멋'이라고 말하는 그는, “나는 많은 labels의 아이디어를 좋아한다.

창작활동의 과정 은 나를 위한 자아 여행이 아니다. 나는 자신을 위한 명성을 만드는 일에 흥미가 없다."고 말하며, 또 “자기 고집을 꺾을 줄 알 아야 진정한 디자이너다.” , “유행이란 늘 움직이는 것이며, 의상이라는 것은 유행이라는 연속적인 운동의 한 부분일 뿐, 이미 이뤄진 일보다 다른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는 편이 낫다”고 말한다.

기존의 정돈된 클래식 스타일에서 약간 벗어나 미래 지향적인 느낌 강조한 전위적인 클래시즘의 진수를 보여 준다. 현재, Lagerfeld for men, Chloe, KL-Femme, KL- Homme등 4개의 브랜드 디자인을 담당하면서 왕성한 창작 활동을 보여 주고 있다.


[두번째로, Louis Vuitton의 수석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입니다]

마크 제이콥스(MARC JACOBS)
1990년대 말 패션 그룹에 톰 포드, 존 갈리아노, 마이클 코어스 등의 신예 디자이너들이 입성할 무렵, 루이비통의 회장 아르노의 선택은 마크 제이콥스였다. 여행 트렁크 브랜드라는 고정된 이미지에 자극적인 변화를 심으려는 도전이었다.

1986년 제이콥스는 '마크 제이콥스'라는 상표를 내건 첫 컬랙션을 발표했고 87년 그 해의 최고 디자이너에게 수여하는 CFDA를 수상한 가장 젊은 디자이너가 되었다. 1989년 페리엘리스에 합류해 수많은 여성복을 디자인했고 1992년 두 번째 CFDA를 수상하는 영예를 얻었다.

1993년 드디어 자신의 라이선스와 디자인 회사인 마크 제이콥스 인터내셔널을 창립했다. 이후 마크 제이콥스 룩이라는 세컨드 라인과 남성복 컬렉션을 런칭해 더욱 주목을 받고 있던 도중 1997년 드디어 루이 비통의 수석 디자이너로 합류했다.

오랜 전통의 벽을 깨면서도 최고급 브랜드 이미지를 더욱 부각시키는 과제를 떠안은 마크 제이콥스가 기존의 엘레건트한 요소에 스포티하고 캐주얼한 감각을 결합시키면서 루이비통은 전세계 패션인들의 패션 교과서가 된다. 트렁크로 고정되어 있던 루이비통에서 대담하고 파워풀한 의상들을 선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컬렉션은 고급스럽고 심플한 1970년대 복고풍을 연상케 하고 이것은 1980년대 룩을 부활시킨 루이비통 컬렉션과 일맥상통한다.

마크 제이콥스(Marc Jacobs)는 이번 시즌에서 80년대 스타일을 가장 많이 이용했다. 과장된 듯한 커다란 어깨, 벨트를 매는 재킷, 베레모 등 80년대 프랑스식 디자인들을 응용했다. 클래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마크 제이콥스의 군더더기 없는 세련미는 전세계 여성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한편 제이콥스는 일찍이 자신이 게이임을 밝힘으로서, 매력적인 그를 흠모했던 많은 여성들을 슬프게 하기도 했다.

1963년 뉴욕 출생
1981년 파슨스에서 패션 디자인 전공
1984년 페리엘리스 골드 팀블상 수상
1987년 CFDA 수상
1993년 마크 제이콥스 인터내셔널 창립
1995년 마크 제이콥스 룩
1996년 마크 제이콥스 남성복 컬렉션 오픈
1997년 루이비통 수석 디자이너로 합류

[세번째로, Celine의 수석 디자이너 마이클 코어스입니다]

마이클 코어스(Micheal Kors)
프랑스, 이태리의 패션계 디자이너들 중 유난히 쉽게 사람들의 입에 떠오르는 멋진 사내들이 있다. 이들 중 세명을 꼽아 보라면, 샤넬의 칼 라거펠트와 구찌의 톰포드 그리고 셀린느의 마이클 코어스를 들 수 있겠다. 연령으로 보면 비록 둘째 쯤 될 수 있겠지만 디자인 감각이나 제품의 품격을 상승시키는 능력만으로 비교해 볼 때 그 누구보다도 결코 뒤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

마이클 코어스는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도 가지고 있을 만큼 적극적이고 뛰어난 디자이너다. 하지만 그의 명성을 보다 널리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바로 셀린느와 함께 일하게 된 순간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는 단지 마이클 코어스만의 영광이 아니라 오히려 셀린느 자체에도 큰 보석을 안게 된 것과도 마찬가지라 하겠다.

그는 미국 뉴욕시 근교에 위치한 롱아일랜드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FIT에서 패션 디자인을 전공했다.
19살에 뉴욕시에있는 유명한 로터스라는 부티크에서 디자인과 머천다이징을 경험하면서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디자인한 의상이 주목을 받으면서 독립을 하게 되었고 1981년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를 선보였다.

1997년 미국 출신의 세계적인 디자이너 마이클 코어스(Micheal Kors)가 셀린느에 영입되면서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우아하면서도 입기 편안 옷'이라는 셀린느의 컨셉트를 유지하면서 좀더 모던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재무장한 것. "수많은 브랜드 중 셀린느에서 일하기로 결정한 것은, 셀린느라는 패션 하우스와 제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인 우아함에 기초한 럭셔리함과 최고의 품질이 만들어내는 편안함이 바로 그 공통점입니다."라고 셀린느와 함께 일한 계기를 말하기도 했다.
그동안 컬렉션을 통해 마이클 코어스는 셀린느의 성공적인 리뉴얼을 여실히 증명해 주었다. 매 시즌마다 실용적이면서도 꼭 갖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매혹적인 아이템을 발표한 마이클 코어스는 파리지엔의 세련됨과 미국적인 실용성을 절묘하게 조화시켜 우아하면서도 젊음이 넘치는 컬렉션을 선보였다. 크리스털 장식이 빛나는 글래머러스한 이브닝 드레스와 강한 패턴의 모피코트, 블라종 로고의 골드 체인이 장식된 슈즈와 백, 벨트 등의 액세서리를 보면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것에 섹시함과 장난기를 섞은 새로운 이미지의 셀린느를 느낄 수 있다.

셀린느 마니아들에게 마이클 코어스의 디자인 감각이 통했는지 블라종 로고가 찍힌 트윈세트와 헤링본과 하운즈 투스 체크 무니의 캐시미어 스웨터, 캐시미어 숄과 같은 가을, 겨울
상품들이 가을이 채 오기도전에 솔드아웃 되기도 했다.

[네번째로, 디자이너 캘빈 클라인입니다]

캘빈 클라인(Calvin Klein)
캘빈 클라인은 평범한 일상복에서 격조 높은 멋을 창조하고 있는 디자이너이다.
일상복 스타일이라 일컬어지는 뉴욕 스타일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었으며 모던하고 세련된 캐주얼 스타일을 특징으로 한다.


절제된 세련미! 캘빈 클라인
90년대 들어 캘빈 클라인의 디자인이 주목받게 된 이유는 물욕적인 사치성보다 정신적인 만족을 중시하게 된 시대적인 변화 때문이다. 다시 말해, 캘빈 클라인은 정신적인 만족을 원하는 소비자들의 욕구를 파악하고 이에 적합한 캐주얼 스타일을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캘빈 클라인의 디자인 특성은 천연섬유의 사용과 단순하면서도 절제된 세련미에 있으며, 옷만이 아니라 향수, 시계 등 다양한 상품 라인을 추진하고 있다.



디자이너 분석품격을 강조하는 캐주얼 스타일
대담한 노출 패션은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면서 강하게 시선을 끄는 매력이 있다. 부드러운 색상으로 세련된 여성미를 연출하거나 심플한 라인으로 깨끗한 이미지를 표현한다. 여유로운 스타일과 천연섬유의 사용으로 착용감을 중시한 캘빈 클라인은 입는 순간부터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 캘빈 클라인의 디자인은 캐주얼한 아이템일지라도 품위를 강조할 뿐 아니라 여성의 섹시한 매력까지 연출하는 것이 특징이다.




편안한 활동성을 중시한 디자인
캘빈 클라인을 멋있게 입고 싶다면 셔츠와 스트레이트형 일자 바지로 편안한 활동성을 연출해 보자. 셔츠는 색상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이미지를 나타내는 아이템으로, 천연 소재를 사용할 경우 품격을 강조할 수 있다. 부드러운 색상으로 상하의를 조화시키거나 몸에 피트한 상의를 입으면 매력적인 코디가 완성된다.




미국 패션을 이끌어 온 가장 미국적인 디자이너를 꼽으라면 단연 캘빈 클라인이다. 청교도 정신을 나타내기라도 하듯 극도로 장식을 배제해 깨끗한 재단과 실루엣, 다른 디자이너들이 미처 관심을 기울이 지 않았던 청바지와 속옷, 향수라는 틈새시장 개척, 섹스를 연상시키는 도발적 광고.. 시대를 꿰뚫어보는 정확한 마케팅전략과 과감한 개척 정 신으로 그는 70년대부터 남녀노소, 부자 서민 할 것 없이 어떤 디자이너도 넘보지 못할 만큼 폭넓은 고객 층을 확보하고 있다.
클라인 개인의 삶에도 미국적인 요소는 짙게 드리워 있다. 무엇보다 그는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한 인물이다. 42년 뉴욕 브롱크스 출신. 아버지는 헝가리 출신 유태인으로 식료품 가게를 했고 어머니는 평범한 주부였다.
클라인은 어릴 때부터 옷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5살때 이미 의상 스케치를 시작했고 누이의 인형옷을 즐겨 지어줬다. 62년 뉴욕 패션기 술학교(FIT)를 졸업한 다음에는 5년 동안 프리랜서로 일하며 힘겨운 삶을 살았다. 집에 돌아와서 매일같이 아스피린을 먹어야 하는 생활이었 다고 클라인은 회고한다. 68년에는 어릴 적 친구 베리 슈와르츠에게서 1만달러를 지원받아 뉴욕 7번가에 자기 이름을 걸고 코트가게를 차린다.
기회는 우연히 찾아오는 법.. 패션전문매장 '본위트 텔러'의 바이어가 엉뚱한 층에서 엘리베이터를 내렸다가 그의 옷을 보고 한번에 5만달러 어치를 주문하게 된다. 심플한 파스텔 톤의 옷은 폭발적으로 팔려 나갔다. 73년에 는 전국 1천개 넘는 매장에 그의 옷이 깔렸다. 같은 해 기성복 사상 최 연소로 코티상을 받는 영광을 안게 된다.




74년 그는 일대 변신을 꾀한다. 그때까지 만들던 값싼 폴리에스터 제품을 끊고 고급스럽고 비싼 자연직물 옷으로 방향을 바꿨다.
78년 시작한 청바지 사업은 그의 성가와 수입을 크게 높였다. 다른 디자이너들이 품위를 지키고 있을 때 그는 좀 더 꼭 끼는 청바지를 만들어 값을 곱절로 올려받았다. 매번 논란을 일으켰던 선정적인 광고 기법 도 이때 처음 선을 보인다. 당시 14세였던 여배우 부룩 실즈가 "나와 내 캘빈 사이에는 아무 것도 없어요"라고 말하는 광고로 청바지는 첫 1주에 20만벌이 팔렸다.
82년 내놓은 속옷과 88년부터 시작한 향수 '옵세션','이터너티','CK 원' 광고에도 클라인의 전속모델 격인 케이트 모스, 랩 가수 마키 마크 의 누드가 종종 등장한다. 주로 흑백으로 아무 설명 없이 '캘빈 클라인' 이라고만 쓰는 광고는 수많은 모방자들을 낳았다.
캘빈 클라인의 명성이나 인기를 이해하는 데에는 광고나 마케팅 전략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가 의상을 소홀히 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코티상을 73년부터 3차례 연달아 받았고, 패션의 오스카상이라 불리는 미국 패션 디자이너 협회(CFDA)상을 여러 차례 수상했다. 93년에는 사상 처음으로 남성복, 여성복 두 분야에서 동시에 상을 따낸다.
무엇보다 그의 옷은 시대 흐름과 맥을 함께 한다는 게 강점이다. 그는 90년대 들어 더욱 도전적이고 젊은 정신을 반영하는 옷을 만든다. 이렇게 작고 짧은 옷을 누가 입느냐는 초기의 평론가들의 불평도 적지 않았지만, '지금이 바로 그 옷을 입을 때'라고 그는 주장했다.
캘빈 클라인은 항상 '현대적'이다. 그렇게 때문에 시대가 변해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브랜드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섯번째, 디자이너 안나수이입니다]

안나수이(Anna Sui)
안나수이’는 모던한 패션의 도시 미국 뉴욕에서 사랑스러운 여성성이 배어있는 로맨티시즘이라는 또 하나의 패션 트렌드를 창출해낸 브랜드다. 장미빛 가득한 히피 분위기의 로맨틱한 스타일이 브랜드 컨셉트의 중심을 이루는 안나수이는 서정적인 꽃무늬, 달콤한 파스텔톤의 색상, 레이스나 러플 등의 여성스러운 장식이 가득한 디자인으로 ‘마법’에 걸린듯한 착각이 들만큼 환상적인 패션 세계를 펼쳐 보여주고 있다.

패션의 중심지 뉴욕에서 매시즌 환상적인 컬렉션을 만들어 내는 안나수이는 남동생의 병정 인형에 옷을 만들어 입히며 어린시절을 보낸 타고난 디자이너다. 수이는 미국에서 태어난 동양계로 세계적인 패션 스쿨 뉴욕 파슨스를 졸업했다. 졸업 뒤 스포츠 웨어 회사에 입사해 빈티지 트위스트의 독특한 감각을 펼쳐 나가기 시작, 지난 1980년 처음으로 그녀만의 오리지널을 발표하면서 패션 사업에 도전한다.

1991년 드디어 수이만의 단독 쇼가 개최되고 패션의 중심지 뉴욕 소호에 부티크를 오픈. 지금은 너무나도 유명해져 버린 안나수이 퍼플의 매력이 시작된다.퍼플과 레드 컬러의 부티크, 벼룩시장 가구와 기발한 마네킹 등은 뉴요커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고 잇따른 컬렉션으로 그만의 색깔이 점차 자리잡게 된 것이다.

미국 내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일본, 유럽까지 활발한 영업전개로 명실상부한 세계적인 브랜드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안나수이는 전세계 250여개의 샵을 전개하고 있다. 25∼35세의 고감각 패션피플을 메인타깃으로, 28∼40세까지 자신만의 개성 연출을 통해 패션을 주도하는 여피세대를 서브타깃으로 하고 있다.

뉴욕타임즈로부터 완성도 있는 디자인과 안나수이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오트꾸튀르 스타일과 최신 스타일의 절묘한 조화’라는 극찬을 받은 안나 수이는 나오미캠벨, 셰어, 소피아 코폴라, 코트니 러브 등 헐리우드 스타들을 비롯한 전세계적으로 두터운 매니아 층을 확보하고 있다.

안나수이는 이번 가을·겨울시즌 앤틱 무드의 스트리트 패션을 컨셉트로 한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다.특히 이번 시즌 스타일은 빈 공방(Wiener Werkstaette)의 디자이너였던 데고베르트 페케 (Dagobert Peche)가 누 갤러리(Neue Gallerie)에서 선보였던 작품들이다, 그리고 겨울 스포츠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빈티지 드레스, 퍼프자켓, 플래퍼 슈즈 등이 어울어져 앤틱함이 묻어나는 컬렉션을 선보였다.

스키, 스노우 보드 등의 겨울 스포츠에서 영감을 받은 경쾌한 트렌드를 보여주고 있으며, 아르테코풍의 에메랄드 그린, 코럴 핑크, 앤틱 골드 등의 다양한 컬러가 안나수이만의 럭셔리 로맨티시즘을 완성시켜주고 있다.

*********이외에도, 알렉산더 맥퀸, 스텔라 맥카트니, 요지 야마모토, 돌체앤가바나, 소니아 리키엘, 벳시 존슨, 도나텔라 베르사체 등등 많답니다...

2003.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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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의 창시자가 된 디자이너들

Giorgio Armani(죠르죠 알마니)
설명안해도 아시죠? 죠르죠 알마니.. 정장부문 세계 최고 명품으로 꼽힙니다.

1934 이태리 북부 Piacenza태생.
1964 남성복 디자이너 니노 세루티에게 발탁되어 남성정장 의류 디자인시작.
1974 Armani라는 남성복 상점개장, 운영.
1975 카레오티와 함께 Armani S.p.A설립. 카레오티가 경영, 알마니는 디자인.
1976 브랜드 'Giorgio Armani'의 첫 런칭.
1981 서브 브랜드 'Emporio Armani'와 'Armani Jeans' 동시 런칭.
1982 향수 'Armani' 런칭.
1985 동업자 카레오티 사망. 알마니가 수석 디자이너와 CEO의 겸행.

국내의 앙선생처럼 국제적으로는 내놓으라는 스타들이 알마니의 옷을 입기위해
알마니를 찾아 갑니다. 매년 유명 영화제, 음반시상식 등에는 알마니의 옷이
수십벌 등장하죠.
서브브랜드인 엠피리오 알마니는 아들 이름입니다.


Carl Frantz Bally(칼 프렌츠 발리)
명품에 관심이 없다면 모를수도 있겠네요. 여성 구두 및 잡화계 세계 최고
명품으로 꼽히는 C.F.Bally의 창시자 입니다.
정확히는 디자이너는 아니지만, 자사 브랜드의 디자인 모티브를 제공했다고
할 수 있죠. 그 모양은 '도로시 구두'라고 부르는 모양 아시죠?
공산품의 특징상 발의 크기를 정확히 맞출수 없어 넓게 발등이 파여지고
대신에 고무줄이나 밴드, 벨트의 형식으로 구두를 맞춰 조일수 있게 해놓은..
그 구두의 원형이 발리가 고안한 것 입니다. 출장갔을때 구두를 사오라는
아내의 말에 아내의 발사이즈가 기억나지 않아 고안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1854년에 처음 사업을 시작하고 1882년 70세에 은퇴하며 아들에게 회사를
물려줍니다. 발리는 디자이너가 아니라 이런 배경밖에는 잘 모르겠네요..


Christian Dior(크리스챤 디올)

잘 아시죠? 패션 잡화와 향수로 유명한 명품입니다.
입생로랑도 디올의 수하에 있던 직원이었습니다.

1905 프랑스 노르만디 태생. 청년기 군대 입대. 정치학 공부.
1935 파리로 귀환. 드레스디자이너로 알려지기 보다 모자디자이너로 유명.
1936 Piguet의 수하에서 재직. 전쟁기간동안 자원.
1941 파리로 귀환. 더 큰 디자인하우스 Lucien Lelong에 재직.
1946 섬유회사 Marcel Noussac의 지원을 받아 자신의 하우스 오픈.
1947 첫 개인 콜렉션 개최. 대중적 뉴룩을 선보임.
1953 디자이너 입생로랑을 채용.
1957 10월에 갑작스런 요절.

요절이라는 표현이 좀 그런가요..? 그래도 53세면 죽기에 이른..


명품브랜드라는 제약에 패션쪽의 디자이너들만 소개하게 되었네요.
시각쪽의 디자이너들에게도 관심 많이 가져주세요~

2003.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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