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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세계 최초의 여성 총리는?
비공개 조회수 992 작성일2018.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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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r Spreewald
절대신
2019 스포츠, 레저 분야 지식인 남성 건설/건축업 #재난지도사 #건축기술자 #조류애조가 새, 조류 3위, 재난재해 1위, 월드컵, 국가대항전 4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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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


1960년 5월부터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는 하루에 선거 유세를 25번이나 하며 스리랑카 전역을 분주히 돌아다녔다. 그녀는 울고, 울고 또 울었다. 죽은 남편 솔로몬 반다라나이케의 업적을 언급하며 눈물을 흘렸고, 자신이 총재로 있는 스리랑카자유당을 지지해줄 것을 호소하며 눈물을 흘렸다.

 

숱한 눈물의 유세 때문에 그녀에게는 ‘울보부인’라는 별명이 붙었다.눈물로 구한 동정으로 그녀와 스리랑카자유당은 국민적 지지를 획득했다. 그리고 마침내 1960년 7월 그녀가 이끄는 스리랑카자유당은 의회의 과반수를 차지하는 대승을 이루었고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는 세계최초의 여성총리로 실론의 최고통치자가 되었다. 이후 그녀는 2000년 8월 건강 상의 이유로 총리직에서 마지막으로 물러날 때까지 40년간 스리랑카 헌정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되었다.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의 총리 취임은 서구 민주주의의 선구자라는 영국에서 여성수상 대처가 나오기 20년 전에 일어난 일이다. 인권과 여권이 채 신장되지 않고 남존여비 사상이 여전히 만연하던 1960년 대 아시아지역에서 여성총리가 세계최초로 배출되었다는 것은 매우 획기적인 일이다. 1960년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의 총리 취임에는 그녀의 남편인 전 총리 솔로몬 반다라나이케의 후광이 전적이었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실론의 총리였던 솔로몬 반다라나이케를 내조하던 총리부인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는 남편이 죽은 후 그대로 암살당한 총리의 불우한 미망인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녀는 정치 일선에 관여하지 않고 조용히 재야에 머물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남편 솔로몬 반다라나이케가 만든 정당이 남편이 죽은 후 구심점을 잃고 분열되는 모습을 그냥 바라만 볼 수가 없었다. 거기다 진보적 정치가였던 솔로몬 반다라나이케를 따르던 스리랑카자유당의 정치인들에게는 그를 대신할 분신과도 같은 존재가 필요했다. 오랜 역사 동안 계급사회였고 영국 식민지가 되기 전 왕조사회였던 실론에서 계급과 명성, 피의 권위는 매우 중요했다. 솔로몬 반다라나이케의 아내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는 비록 여자였지만 자유당으로서는 그녀만큼 솔로몬 반다라나이케를 대신할 만한 다른 대안을 찾지 못했다.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남편의 유지를 받들어 1960년 5월 남편이 만든 정당 스리랑카자유당의 총재가 되었다. 그리고 그 해 7월 유산계급을 보호하고 서구지향적이던 통일국민당과 대결해서 완승을 거두었다. 남편 솔로몬 반다라나이케의 진보적 개혁의지를 그대로 이어가겠다는 것이 그녀의 선거 공략이었다. 남편의 명성에 기대고 미망인의 불행을 호소한 끝에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는 정치 초년병에서 일약 실론의 총리로 뛰어 올랐다.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는 1916년 4월 17일 스리랑카 라트나푸라의 나트와트가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스리랑카 국민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신할리족으로 오랜 역사 동안 지역에 뿌리를 둔 봉건 지주가문의 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실론 의회 참의원을 지냈다. 그녀가 자랄 시기 스리랑카는 실론이라는 이름으로 영국의 지배를 받는 식민지였다.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는 영국으로 유학 가 옥스퍼드의 크라이스 처지에서 공부한 엘리트 여성이었다. 스물 네 살이 되던 해 그녀는 자신보다 25세나 많은 솔로몬 반다라나이케와 결혼했다. 사랑으로 맺어진 결혼이라기보다는 실론 상류층의 오랜 전통인 가문과 가문의 결합이었지만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는 남편 솔로몬 반다라나이케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지지하며 원만한 결혼생활을 이어나갔다.

 

그녀의 남편 솔로몬 반다라나이케는 영국 옥스퍼드를 졸업한 변호사출신으로 실론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1947년부터 통일국민당 소속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는 영국 식민지 시절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서구지향적이며 유산계급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던 통일국민당을 벗어나 1951년 스스로 스리랑카자유당을 창설했다. 스리랑카란 ‘정결한 실론’이란 뜻이라고 한다. 스리랑카자유당은 통일국민당과는 달리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했고 사회주의를 지지하였으며 서방세계와 일정 정도의 거리를 두는 중립외교를 표방하였다. 더불어 불교와 국민의 70%를 차지하는 신할리족의 전통문화를 중요시 여겼다. 그를 지지하는 세력은 무산계급과 오랜 식민지 기간 동안 핍박당했던 급진 불교 세력, 전통을 중시하는 신할리족의 민족주의자 등이었다. 솔로몬 반다라나이케는 1956년 4개 주요 민족-사회주의 정당을 결집시켜 인민연합전선을 구축했고 총선에서 압승을 거둠으로써 1956년 총리직에 취임했다. 이때까지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는 정치인의 조신한 아내로 내조에만 충실할 뿐 정치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여느 총리 부인들이 그러하듯 사회복지사업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였다.

 

실론은 국민의 70%에 해당하는 불교를 믿는 신할리족과 인도에서 유입된 힌두교를 믿는 타밀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타밀족은 기존에 실론섬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타밀족과 영국 식민지 시기 플란테이션 산업으로 인도에서 들어온 타밀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실론의 독립 이후 줄곧 신할리족과 민족 간 종교 간 갈등을 빚고 있었다. 당시는 솔로몬 반다라나이케의 주요정책이 신할리족과 불교를 중심으로 한 민족 단결이었기 때문에 타밀족의 불만이 더욱 커지고 있었고 갈등도 심화되었다. 솔로몬 반다라나이케는 이를 대화와 타협으로 풀어나가고자 하였다. 그런데 그의 이런 유화적인 정치적 제스쳐가 기존에 솔로몬 반다라나이케를 지지하던 세력으로부터 오해를 샀다. 그들은 솔로몬 반다라나이케가 배신했다고 생각했다. 1959년 9월 25일 솔로몬 반다라나이케는 그의 타밀족에 대한 대응에 불만을 품은 불교 승려에 의해 암살당하고 된다.

 

20년간 남편을 믿고 내조에만 열중했던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에게 새로운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세간의 동정을 피해 조용히 물러나고자 했지만, 곧 그녀는 어쩔 수 없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 들였다.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는 남편을 잃은 이듬해 5월에 만장일치로 스리랑카자유당의 당수로 선출되었다. 이어 치러진 선거에서 그녀는 남편의 유지를 따라 사회당 공산당과 공동전선을 구축하였고 ‘실론 제1주의’의 중립외교정책을 표방해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이 그랬듯 1960년대 실론도 온전한 민주주의를 구현하기에는 다소 어려운 점이 있었다. 식민지 경험을 가졌기에 대외적으로는 자주를 외쳤지만 완전히 식민지의 그늘로부터 벗어나기는 역부족이었고 평등을 외쳤지만 계급과 가문은 온존했다. 거기다 신할리족과 타밀족간의 분쟁이 계속되었고 민족에 바탕을 둔 불교와 힌두교의 종교적 갈등도 만만치 않았다. 총리가 된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 자신이 이 모든 실론의 아이러니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였다.

 

서방세계로부터의 자주를 외쳤지만 그녀 자신이 영국 유학파였으며, 평등을 외치는 좌파였지만 봉건지주의 딸이자 며느리였고, 신할리족으로써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것이다. 총리가 된 후 5년간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는 결국 정치실무를 자신의 가문과 관련된 사람들에게 맡겼다 반다라나이케 가문의 족벌 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남편의 조카였던 펠릭스의 재정정책 실패와 언론사와의 갈등 등은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신을 자아냈고, 1964년 당내 지도부의 내분으로 인해 스리랑카자유당은 국민적 신망을 완전히 잃었다. 그 결과 1965년 스리랑카자유당은 선거에서 참패하고 만다.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도 이때 총리직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그녀가 이 한 번의 총리직에 만족하고 정계를 은퇴하였다면 그녀에게는 그저 ‘남편을 대신해 어쩔 수 없이 정치에 투신한 세계최초의 여성총리’ 라는 다소 미흡한 명성만이 주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는 여기에서 정치 인생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5년간의 총리 경험을 바탕으로 더욱 단단한 정치인으로 단련되었다. 그녀는 초보 정치가에서 벗어나 정치상황을 분석하고 당을 이끌어가는 노련한 정치인으로 변모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970년 선거에서 사회주의 정당연합체와 통일전선을 결성하여 총선거에서 압승, 다시 총리로 취임하였다. 그녀는 과거의 실패를 거울삼아 신중하게 국정을 운영했고 첫 총리 때와 달리 자신의 의견을 정책에 많이 반영하였다. 1972년에는 국명을 실론에서 스리랑카공화국으로 개칭하였다. 외교 면에서는 베트남, 북한 등 공산국가들과 국교를 수립하고 이스라엘과 국교를 단절하면서 비동맹 외교노선을 추구하는 제 3 세계의 새로운 중심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는 자신의 가문 사람들로 주변을 채웠다. 그녀의 세 자녀와 사위. 형제 등은 정부의 핵심 부서에 포진하였으며 친인척 200 여명이 정부와 국영기업의 요직에 앉았다.

 


주요 산업을 국유화하는 과정에서 물리력을 사용하는 무리가 따랐고 경기 침체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 타밀족과 신할리족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어 갔으며 여기에 일부 극좌파가 정부정책에 반기를 들고 나옴으로써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는 지지정당 내에서도 갈등을 일으켰다. 그 결과 1977년 총선에서 의회 의석 168석 가운데 단지 8석만을 점유하며 참패하였고 또 다시 쓴 눈물을 삼키며 총리직에서 사퇴하였다. 이후 스리랑카공화국은 대통령중심제로 헌법을 개정하고 국명을 다시 한번 스리랑카 민주사회주의 공화국으로 개칭하였다.

 

총리직 사퇴이후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는 새로 들어선 통일국민당으로부터 그녀의 정치적 과오를 집중적으로 조사 당해 결국 1980년 모든 정치적 권리를 박탈당하고 의회에서 쫓겨났다. 그녀의 정치적 암흑기는 1986년 대통령 J.자야와르데네에 의하여 사면복권되기까지 계속되었다.사면된 후 1988년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는 대권에 도전하여 대통령 선거에 나섰지만 결과는 낙선이었다. 이것으로 그녀의 정치인생은 회복 불가능할 것으로 전망되었다. 그러나 기회는 또 찾아왔다. 그녀의 둘째 딸 찬드리카 쿠마라퉁가가 1994년 스리랑카 최초의 여성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에게 총리직을 맡긴 것이다.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는 딸과 함께 국정을 이끌어 2000년도까지 총리직에 있었고 은퇴한 지 2개월 만에 심장마비로 유명을 달리 하였다.

 

 

실론티라는 홍차가 있을 정도로 유명한 홍차의 산지인 스리랑카는 ‘인도양의 진주’라고 불릴 만큼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스리랑카에는 ‘인도양의 눈물’이라는 별명도 있다. 독립 이후 60여 년 간 지속되어온 신할리족과 타밀족간의 갈등과 분쟁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타밀족과 신할리족의 갈등은 영국이 실론을 식민지배하던 시기 홍차농장 노동자로 부리기 위해 인도로부터 타밀족들을 이주시키면서부터 시작되었다. 타밀족과 신할리족과의 갈등은 영국 제국주의의 폐해에서부터 시작된 비극이다.

 

식민지 시절부터 계속되어왔던 두 민족 간 갈등은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의 남편 솔로몬 반다라나이케가 집권하면서 폭발되었다. 솔로몬 반다라나이케는 급진 불교세력을 등에 업고 다른 좌파 정당과 연합해 스리랑카의 강력한 신할리화 정책을 추진했다. 국민들에게 신할리어만 사용하도록 했고, 군대·경찰 등 행정조직의 요직은 모두 신할리족이 차지했다. 이에 독립 당시부터 자치권을 요구했던 타밀족은 크게 반발하였고 1958년 처음으로 폭동을 일으켰다. 이때부터 시작된 타밀족과 신할리족과의 무력갈등은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 정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다.

 

스리랑카의 타밀족은 스리랑카 내에서는 소수민족이지만 스리랑카의 바로 위에 위치한 인도와 관련하면 거대 민족이다. 그러기에 스리랑카의 신할리족은 자신들의 생존과 자주를 확보하기 위해 타밀족과의 화합을 거부하고 있다. 이 민족 간 갈등은 자칫하면 불교와 힌두교라는 종교분쟁뿐 아니라 인도와 스리랑카 간의 국가 분쟁으로 비화될 소지가 있다. 두 민족 간의 갈등은 피가 피를 부르는 격렬한 보복행위로 지속되어 왔고 그 와중에 수많은 정치인이 암살당했으며 세계 곳곳에서 테러가 끊이지 않았다. 최근 스리랑카의 마힌다 대통령은 스리랑카 내전이 종식되었다고 선언하였다. 이 선언의 뒷배경은 신할리족과 타밀족간의 화합이 아니라 신할리족의 무자비한 타밀족 몰살이다. 2009년 현재 스리랑카 정부는 국제 구호기구의 입국을 거부하고 있으며 살아남은 타밀족은 앞으로의 생사가 불투명한 상태에서 수용소에 격리되어 있다고 한다.

 


 

출처: http://cafe.daum.net/tngoqkfkrl/hLk/256?q=%EC%84%B8%EA%B3%84%20%EC%B5%9C%EC%B4%88%EC%9D%98%20%EC%97%AC%EC%84%B1%20%EC%B4%9D%EB%A6%AC%EB%8A%94%3F

2018.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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