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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학교에서 태국으로 여행을 가는데 태국에 대하여 알 고 싶어요
shin**** 조회수 4,673 작성일2004.07.21

저는 22일에 태국으로 여행을 가는데 태국에 대하여 알 고 싶어여

그리고 말레이지아 와 인도네시아 와 싱가폴에 대하여 도 알 고 싶어여

제발 이 글을 읽으셔서 아르켜 주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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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hghl123
영웅
사회, 도덕 80위, 과학, 네이버사용법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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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님, 나라에 대해 알려달라는 질문은 나라 하나하나에 대해 질문을 해주세요.. 한나라에 대한 설명이 길기때문에 질문 하나에 한 국가로 해주시면 답변을 다른 나라도 해드릴게요... 이 질문은 우선 태국에 대해 알려드릴게요..

 

 

태국(타이)

 

 

요약

 

 

인도차이나 반도 중앙부에 있는 나라.

위치 동남아시아, 인도차이나 반도 중앙

면적 51만 3119㎢

인구 6402만 2000명(2003)

인구밀도 124.8명/㎢(2003)

수도 방콕

정체 입헌군주제

공용어 타이어

통화 바트(Baht)

환율 40.67Baht = 1$(2003.9)

1인당 국민총생산 1,940$(2003)

나라꽃 수련

 

 

자세히

 

 

면적은 51만 3119㎢, 인구는 6402만 2000명(2003)이다. 인구밀도는 124.8명/㎢(2003)이다. 정식국명은 타이왕국(Kingdom of Thailand)이다. 프라테트 타이(Prathet Thai), 또는 무앙 타이(Muang Thai)라고도 한다. 수도는 방콕이며, 공용어로 타이어를 사용하고 있다. 북서쪽으로 미얀마, 북동쪽으로 라오스, 동쪽으로 캄보디아, 남쪽으로 말레이시아에 접하고, 서쪽으로 안다만해(海), 남동쪽으로 시암만(灣)에 면한다.

 

1.타이의 자연

타이의 지형은 북부·북동부·중부·남부로 대별된다. 산맥은 북부에서 양쪽으로 나뉘어 한쪽은 중부와 북동부를 가르는 페차분산맥과 돈파야젠산맥을 이루고, 한쪽은 미얀마 국경을 따라 타논톤차이·테나세리움산맥으로부터 말레이반도로 이어진다. 북부에는 산맥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나란히 뻗어 있으며 하천은 무수한 산간분지를 이룬다. 북동부는 코라트고원(高原)으로, 메콩강을 향하여 완만하게 경사진 평탄한 대지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중부는 메남강(차오프라야강)의 퇴적평야가 전개되는 벼농사의 중심지역으로 경사가 거의 없는 평지이기 때문에 우기에는 평야 전체에 강물이 흘러 넘치게 된다. 남부 시암만(灣) 연안은 하천의 침식과 퇴적으로 이루어진 평야이다.

 

기후는 열대몬순기후로 비교적 강수량이 많은 편이며, 동아프리카와 인도의 데칸고원보다 대체로 습윤하다. 건계(乾季)와 우계(雨季)가 뚜렷하게 구분되어 5~10월경은 우계이고 11~4월은 건계이다. 기온은 우계가 시작되기 직전이 가장 높다. 연중 기온의 변화는 단조로우며 연평균기온은 28℃, 연간 강수량은 1,600mm이다. 우량은 남부 서안(西岸)이 많고, 남부 동안(東岸)은 몬순의 영향으로 10∼12월에 비가 많다.

 

2.타이의 주민

타이의 주민구성은 전체 인구의 타이인 81.5%, 화교 13.1%, 말레이족 2.9%, 기타 2.5%이다. 종교인구의 구성은 불교 91.9%, 이슬람교 4.8%, 기독교 1.6%이고 나머지는 힌두교도와 기타이다. 종교는 불교가 국교(國敎)로 정해져 있으나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타이의 불교는 소승불교로 성년 남자는 일생에 한번 불문(佛門)에 들어가는 것이 관행처럼 되어 있다. 불교사찰은 주로 교외에 있는데 2만 7000개가 있다. 대도시에 있는 사찰은 지방에서 온 학생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기도 하며 가난한 집안의 아이들이나 고아들을 돌본다. 이슬람교는 서부지역의 나라타이앗, 파타니, 얄라, 사툰 지방에 집중되어 있다. 이슬람교는 13세기 아랍상인과 탐험가들에 의해 말레이반도로 전해졌다. 이슬람교도의 99%가 수니파이다.

 

3.타이의 역사

타이족은 중국 남부로부터 라오스, 타이, 미얀마, 말레이반도 등에 걸쳐 광범위하게 분포한다. 타이족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으나, 한족(漢族)의 남진에 밀려 중국의 양쯔강[揚子江] 남부에서 인도차이나반도로 이동하여 왔다는 설이 유력하다. 중국 윈난[雲南]의 남소국(南詔國)이 타이족이 최초로 세운 국가라는 설이 있으나 반론도 많다. 최근 타이 북동쪽 메콩강(江) 연안에서 BC 5,000년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기 문화의 유적이 발견되어 타이족의 계속 거주설을 주장하는 학자도 있어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13세기에 선주민인 몬족(族)과 크메르족이 쇠퇴하자 치앙마이를 수도로 정한 북부 타이의 랑나타이 왕국(타이유안족), 수코타이를 수도로 정한 중부 타이의 수코타이 왕국(시암족), 라오스와 동북 타이에 걸친 란산 왕국(라오족) 등 타이 민족의 소왕국이 각지에 생겼다. 그 중 랑나타이 왕국이 19세기 말까지 계속되었으나 타이 역사상 정통 왕조는 수코타이 왕조(1257~1350)이다. 수코타이 왕조의 제3대 람캄행왕(재위 1277~1317)은 영토를 넓히고 타이 문자 표기법을 만들었으며(크메르 문자를 개량) 중국인 도공(陶工)을 불러들여 송호록(宋胡錄)도자기의 바탕을 만들었다.

 

수코타이 왕조에 이어 아유타야 왕조(1350∼1767)는 위계전 제도(位階田制度)를 비롯한 각종 제도를 정비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였다. 17세기에 아유타야는 무역항으로 번창하여 왕실의 독점무역체제를 갖추고 서양 여러 나라 및 중국·일본 등과 교역하였다. 16세기 후반 미얀마군(軍)에 점령당하였으나 나레수엔왕(재위:1590∼1605)이 왕조를 부흥시켰다. 그 후 1767년에도 다시 미얀마 군대에 점령당했으나 아유타야 왕조의 무장(武將) 프라야 탁신[鄭昭]이 미얀마를 격파하고 톤부리 왕조를 세웠다.

 

그러나 톤부리 왕조는 1대(代)로 끝나고, 그 부하인 장군 차크리가 1782년에 방콕에서 왕조를 창시하였다. 이것이 지금의 차크리 왕조(방콕왕조)이다. 19세기에 들어서자 유럽 열강들의 압력이 드세어져 1855년에 영국과 보링 조약을 맺고 자유무역항과 치외법권을 승인하였다. 출랄롱코른왕(라마 5세)은 사법·행정제도 개혁과 함께 근대화를 실행하고 영국과 프랑스의 대립을 이용하여 식민지화의 위기를 벗어났다. 그 뒤 왕족 전제(專制)에 의한 정치적 부패에 불만이 높아지자 1932년 6월 24일 인민당이 무혈 쿠데타에 성공, 12월에 헌법을 공포하고 입헌군주국으로서 발족하였다.

 

열강의 진출로 아시아 각국이 식민지화된 가운데 유일하게 독립을 유지하였으며, 1939년에는 국호를 시암에서 타이로 변경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인민당 내부의 분쟁으로 정권교체가 잇달았는데,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총리 피분이 일본에 협력하였고 전후에는 항일 자유태국운동을 지도하였던 프리디, 아파이원 등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1947년에 피분파(派)가 쿠데타로 프리디 등을 추방하고 군부가 정권을 장악했으나 군부 내에서 파오파(派:경찰)와 사리트파(육군)의 대립이 심해졌다. 1957년 9월 사리트는 쿠데타로 피분과 파오를 쫓아내고 1958년 10월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와 모든 정권을 해산, 군정을 실시하였다. 사리트가 죽은 뒤 정권을 인계받은 타놈은 1968년 민정으로 이양하였으나 1971년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군정으로 환원시켰다.

 

1973년 12월 국왕은 학생·시민의 반정부 시위로 사임한 타놈의 뒤를 이어 타마사트대학 학장 산야를 총리로 임명하였다. 산야 정권은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고 총선거를 실시하는 한편 언론검열의 철폐, 농지개혁법의 제정 등 의욕적인 정책을 실시하였으나 좌우파(左右派)의 대립, 빈발하는 파업 등으로 국민적 통합을 이루지 못한 채 1975년 2월 반정부 폭동으로 물러났다. 그 후 쿠크리트와 세니의 민간 내각이 성립되었으나 석유파동 후의 경제정세 악화, 인도차이나의 공산화에 따른 위기의식 고조 등으로 정치정세의 불안이 계속되었다. 1976년 10월에는 군부가 타놈의 귀국을 반대하는 학생시위를 제압한 데 이어, 민간정부를 뒤엎고 타닌을 총리로 하는 새 내각을 발족시켰으나, 1977년 10월 국방장관 겸 최고사령관 크리앙사크가 타닌을 축출하고 총리에 취임하여 1978년 새 헌법을 제정하였다. 그러나 1980년 2월 야당이 제출한 불신임안으로 사퇴하였고, 국방장관 프렘이 총리에 취임하였다.

 

4.타이의 정치

타이는 입헌왕국으로서 국왕이 정치에 개입하지는 않으나 상징적 국가원수 이상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신적 지주이다. 현재의 국왕은 차크리 왕조의 제9대에 해당하는 푸미폰(1946년 즉위)인데 1981년 4월 군부 쿠데타를 일으킨 세력은 국왕의 지지를 얻지 못하여 3일만에 물러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정의 실질적인 권한은 총리에게 집중되어 있다.

 

상·하 양원제 의회를 운영하는데 신헌법에 따라 상원은 200명으로 임기 6년이고, 하원은 500명으로 임기는 4년이다. 상원은 직선으로 선출하는데, 2000년 3월 최초의 상원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하원은 400명은 보통선거로 선출하며, 100명은 전국 득표율 5% 이상을 획득한 정당을 대상으로 득표비율로 배분한다. 2001년 1월 신헌법에 따른 최초의 하원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1979년 4월 총선 결과 사회행동당이 제1당이 되었으나 상·하 양원의 과반수 이상의 지지를 얻어야 총리가 될 수 있다는 새 헌법의 규정에 따라 1979년 5월 양원합동회의에서 크리앙사크가 총리로 뽑혔다. 크리앙사크 내각은 출범 후에 군부의 실력자들을 대거 기용하여 강력한 집권 기반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와 경제적 실정(失政)을 비판하는 5개 야당의 불신임 결의로 총사퇴하였고 같은해 3월 국방장관 프렘 탄술라논다가 이끄는 새 내각이 성립되었다. 총리 프렘은 1981년 말 개각(改閣)을 단행, 국정에서 소외되었던 사회행동당을 연립내각에 참여시키는 등 국민적 일체감 조성과 정국 안정에 노력하였다. 입헌군주국가임에도 전통적으로 군부독재가 실시되어 온 상황에서 1988년 차티차이 춘하반이 총리에 취임한 이후 위상저하를 두려워하는 군부와 정부 간에 갈등이 계속되었다.

 

1990년 11월 각군 사령관들이 개각에 불만을 품고 전원 국방회의에 불참함으로써 정부와 군부 간의 긴장이 고조되었는데 1991년 2월 군(軍)최고사령관 순톤이 1932년 이래 17번째의 쿠데타를 일으키고 아난드를 총리로 하는 과도정부를 수립하였다. 1991년 10월에는 신군부의 실세인 수친다가 군최고사령관에 취임하였고, 1992년 4월에는 총리에 올랐다. 그러나 5월 수친다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확산되고 군이 무차별 발포함으로써 60여 명이 사망, 수천 명이 부상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결국 국왕이 중재에 나서고 수친다가 사임한 후 망명함으로써 진정국면에 이르렀다. 9월의 총선에서 반(反)군부세력인 민주당이 승리하여 추안 리크파이가 총리로 선출되었다.

 

총리 추안 리크파이는 국민의 폭넓은 지지를 바탕으로 경제재건에 노력하였으나 2000년 경기회복을 요구하는 국민의 불만이 높아지자 임기 만료 직전에 하원을 해산하고 2001년 1월에 하원의원 선거를 실시하였다. 선거 결과 타이애국당이 압도적 승리를 거두고 탁신이 총리에 취임하였다. 2001년 2월 타이애국당, 타이국민당,신희망당으로 이루어진 연립정권이 성립하였다.

 

5.타이의 외교

타이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친서방(親西方)·반공(反共)으로 일관해왔으며 1974년부터 중국, 동유럽과도 관계를 개선하여 다변적 안보외교를 강화하였다. 1976년 7월 주둔 미군이 철수하자 8월 베트남과 국교를 수립하였다. 1979년 1월 베트남과 항공협정을 체결하고 대사교환에 합의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는데, 3월에는 크리앙사크가 방문하고 캄보디아 내의 베트남군 철수를 요구하는 등 강·온 양면정책을 취하였다.

 

그러나 1979년 9월 이후 캄보디아의 포트군과 베트남군 사이에 벌어진 타이 국경 부근의 전투로 타이, 베트남 관계가 긴장된 이후 1980년 6월 타이의 캄보디아 난민 송환문제로 베트남과 냉각상태에 빠졌으나 1989년 외무장관 시트가 베트남을 방문하여 관계개선을 꾀하였다. 1982년 7월에는 반(反)베트남 민주연합정부의 수립을 지원하여 캄보디아의 헹삼린 정권의 타도를 꾀한 적도 있다.

 

한편 라오스와의 국경분쟁도 끊이지 않고 있는데, 1984년 5월부터 시작된 라오스와의 국경분쟁 중 소련과의 관계가 확대되어 1987년 3월과 5월에 소련 외무장관 셰바르드나제와 타이 외무장관 시트가 각각 상대국을 방문하였으며, 시트는 대(對) 캄보디아 문제에 소련의 협조를 구하였다.

 

전통적으로 친미반공노선을 취해 왔으나 차티차이 정권에 이르러 태도가 유연해졌다. 차티차이는 인도차이나 지역을 전장(戰場)으로부터 시장(市場)으로 바꾸자며 경제주도형의 적극적인 인도차이나 외교를 전개하여 인근 국가들과의 우호관계를 강화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총리 아난드(1992), 추안(1994)의 베트남 방문으로 양국은 경제, 문화, 과학 등의 분야에서 교류를 확대하기로 합의하였고, 캄보디아의 평화 협정에 대한 양국의 지지를 확인하였으며 1992년 베트남 총리 본 반 키에트, 1993년 베트남 서기장 도모이가 타이를 방문하였다. 이후 1997년의 베트남 총리 차발리트의 타이 방문, 2000년 베트남 총리 판 반 카이의 타이 방문, 2001년 타이 총리 탁신의 베트남 방문이 이어졌다.

 

캄보디아와는 1993년 5월 총선으로 수립된 연립정부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라오스와는 1988년 국경분쟁의 고비를 넘기고 양국의 우호 협력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1994년 태국 국왕이 라오스를 방문하고 양국 국경지대에 '우정의 다리'가 개통되었다. 2001년에는 타이 총리 탁신, 라오스 총리 보라치트가 각각 상대국을 방문하였으며 양국은 현안협의를 위한 3개 공동위원회를 운영하고 있다.

 

6.타이의 군사

타이의 군사제도는 의무병역제이며 복무기간은 2년이다. 총병력은 32만 6000명으로, 육군 19만 명, 해군(해병 포함) 9만 3000명, 공군 4만 3000명이다. 2001년 현재 국방예산은 23억 9000만 달러이고, 예산 총액의 8.5%를 차지한다. 군사력강화 목표는 최소한의 정규군 유지와 최신장비의 보유이며, 1988년 미국으로부터 F-16기 12대를 도입하였고, 1996년에도 신예 F-16기 18대를 추가 구입하였다.

 

7.타이의 경제

타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까지만 해도 제1차 산품을 수출하고 공업제품을 수입하는 식민지경제 형태를 면하지 못하였으나 경제개발의 진전과 산업구조의 고도화에 따라 농업이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년 저하되고 있다. 그러나 농업인구는 전체 인구의 70%로 상업부문에서도 농수산물의 거래가 많으며 수출의 반 이상이 농산물이다. 따라서 농업이 경제의 기간적(基幹的)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농업생산의 중심은 벼농사이며, 재배면적은 전체 농지의 53%이다. 관개면적은 20%로 메남강 유역에 차이나트댐 등 관개시설이 갖추어져 있으나, 그 밖의 지역에서는 강우, 하천의 범람 등 자연에 의존하는 상태이다. 메남평야에서는 경작 가능한 토지가 한계에 달하여 경지의 세분화 및 경영규모의 축소에 의해 수익저하와 부채의 누적 등이 일어나 소작농이 반수 가까이 증가하였고, 이 때문에 정부는 토지개혁에 착수하였다. 또한 농민의 전통적 권리였던 국유림의 무단경작이 성행하여 국토보존상 문제가 되고 있다.

 

중부와 북동부의 옥수수, 남동부의 카사바, 남부의 고무, 북동부의 케나프, 중부의 사탕수수 등 상품작물의 증가가 눈에 띄며, 북부에서는 이모작도 이루어진다. 국내총생산의 18.3%를 차지하는 공업은 식품, 제재, 담배 등 전통업종이 40%를 차지하나, 최근 과일통조림, 사탕, 석유제품, 화학비료, 시멘트, 섬유, 가전제품, 자동차 조립 등의 부문이 늘고 있다.

 

공업발전은 정부의 개발계획에 의한 산업기반 정비와 산업투자 진흥법에 의한 외국자본의 적극적 도입에 힘입은 바 크다. 수입대체 공업화에 의한 소비재 생산이 일단락되어 현재는 수출산업 육성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경제개발계획은 1961년부터 시작되었는데, 제3차 경제개발계획(1972~1976) 기간 중 국제통화 불안, 오일쇼크, 인도차이나의 공산화, 국내정치의 혼란 등의 영향으로 경제활동이 정체되었다. 경제성장률은 6.2%였으며, 목표인 7%를 달성하지 못하였다. 성장률 7%를 목표로 한 제4차 경제사회개발계획(1977~1981) 때는 교육에 중점을 두고 나머지를 농업, 운수통신, 공공시설 등의 투자에 배분하였다.

 

제4차 계획은 종래의 경제성장 중점주의를 바꾸어 사회적 공정성의 확립, 즉 경제사회 구조의 개선에 따른 불평등의 시정을 중요시하였다는 것이 특징이다. 고도성장이 계속되어 1988년에는 국민총생산은 성장률이 12%에 달했다. 1973년과 1977년에는 쌀 부족으로 쌀 수출을 금지·제한한 바 있으나 무역은 원칙적으로 자유무역제도를 취하고 있다.

 

수출품은 컴퓨터 및 부품,집적회로,자동차,의료,냉동새우,보석,쌀 등이 있다. 수입품목은 기계, 화학제품, 금속제품, 수송기기 등이다. 주요 무역상대국은 미국, 일본, 싱가포르, 홍콩, 말레이시아, 중국, 타이완 등이다. 무역수지는 오랜 동안 항상 적자였으나 2001년에는 수출 653억 달러, 수입 618억 달러를 나타내었다.

 

이전부터 팽창한 경상수지 적자와 바트화(貨) 하락으로 1997년 7월 경제위기가 발생하여 1998년에는 경제성장률 -8.0%, 물가상승률 8.1%를 기록하였으나, 이후 경제개혁을 실시하여 1999년부터 경제가 점차 회복되고 있다. 2001년 경제성장률은 1.5%이며, 2002년부터 제9차 5개년 경제사회개발계획(2002~2006)에 돌입하였다.

 

8.타이의 교통

타이는 메남강을 중심으로 하는 수운이 발달되어 농산물의 집하(集荷)의 대부분 수운(水運)에 의존하고 있다. 1960년대 이후부터 군사상의 필요로 도로건설이 급속히 진전되었다. 철도는 국영이며, 총연장은 4,623km이고, 도로의 총연장은 6만 4600km이다. 수도 방콕의 돈무앙국제공항은 세계항공로의 간선으로서 30여 개의 국제선이 발착하고, 2000년 현재 공항은 110개가 있다.

 

9.타이의 사회

타이인의 생활은 물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농작물의 풍작과 흉작은 강우량과 시기에 크게 좌우되며, 하천이나 연못은 물고기, 새우, 게 등 단백질의 중요한 공급원이다. 중부지방에서는 농산물이 작은 배에 실려 집하되기 때문에 가옥은 크론(운하) 연변에 있으며, 자연히 수상시장이 열리게 되어 진풍경을 이룬다. 불교의 나라답게 전국에 3만여 개소의 사찰이 산재하며 승려는 18만 명 이상에 이르며, 가정, 사무실, 상점에서 불상을 볼 수 있다. 옛날에는 사찰이 타이의 유일한 교육기관이었으며 지금도 사원에 학교가 설립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일간지는 영어, 타이어, 중국어로 발간된다. 라디오방송국은 전국방송을 실시하는 국영 라이오타일랜드 외에 491개 방송국 및 지국이 있고, TV방송은 채널 3, 5, 7, 9, 11 및 iTV과 함께 케이블방송의 26개채널이 방영된다.

 

10.타이의 문화

타이의 음악은 인도계, 중국계, 남양계의 음악과 고유 음악이 합성된 것으로 인도차이나반도의 음악 중 가장 발달한 음악으로 손꼽힌다. 민간에 흘러들어간 캄보디아의 옛 궁중음악, 북부의 라오족과 사이앰족 등의 민속음악, 남부의 말레이 민속음악, 중국인(華僑)의 음악으로 대별된다. 타이는 입헌군주국으로 국왕은 정치에 초연하나 모든 국민이 국왕을 존경한다. 오랜 세월 동안 주변국의 침략과 지배를 받으면서도 독립을 지켜온 민족으로서 국가와 자국민에 대한 사랑과 애착이 매우 강한 편이다. 국민은 비교적 정직한 편이며 자유주의 사상하에 항상 유괘하게 웃는 인상을 소지하고 있다.

 

타이문화의 기조는 인도, 미얀마, 크메르문화가 융합된 것이며, 불교문화는 스리랑카로부터 도입되었다. 타이 종족은 11세기경 중국 서남단에서 현재의 타이 땅으로 이민왔다는 것이 일반정설이나, 말레이반도에서 북상했다는 설과 선사시대 이후 주변종족들이 계속 이주해들어와 구성되었다는 설들이 대립하고 있어, 장래의 연구과제가 되어 있다. 타이의 각종 건축, 사원, 미술, 무용 등은 불교문화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또한 불력도 사용하고 있다(서기+543).

 

공용어는 시노-티벳(Sino-Tibet)어계에 속하는 타이어로 1286년 수코타이 시대의 람캄행 대왕이 고대 크메르 문자를 모방 제정하였다고 하며 44개의 기본자음과 32개의 기본모음 및 4개의 성조 부호가 있으며, 10자의 타이 고유 숫자가 있다. 태국은 3만여 곳의 사원과 18만 명 이상의 승려가 있으며 사원·가정·사무실·상점까지도 불상을 모셔놓을 정도이다. 불상은 신성한 존재이며 불상 모독은 금물이다. 따라서 불상과 승려가 신성한 존재로서 지고의 경의와 숭앙을 받는 곳이 바로 타이이다.

 

매일 이른 아침 6시 30분 전 승려들의 탁발로 국민의 생활이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며 시민 가정의 공양 모습을 항상 보게 된다. 국민의 국가 권위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은 불교 신앙에서 유래되었다. 타이에서는 불교의 영향으로 20세기 초반까지 성씨제도가 없었다(1913년 처음 도입). 현재에도 사람을 부를 때 성보다는 이름을 부른다.

 

11.타이의 과학기술

타이는 1883년 전신부를 설립하였고, 1897년 우정전신부가 설립되어 모든 공중통신 업무를 제공하였다. 1954년 전화공사법이 제정되었다. 1998년 현재 공중통신 서비스를 위한 본회선수는 677만 6000회선이고 회선 보급률(인구 100명당 본회선수)은 10.6%이다. 교통통신부(MOTC)는 1941년 설립되어 통신관련 규제 및 정책을 수립한다. 태국 통신국(CAT)은 1977년 설립된 국영 통신사업자로 우편, 국제 통신, 아날로그 셀룰러, 무선호출, 무선 데이터통신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고, 타이전화협회(TOT)는 1954년 설립된 국영 통신 사업자로 국내전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며, 민간 통신사업자에게 면허를 발부하여 셀룰러, 무선호출, 데이터 통신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장거리 통신망은 광섬유 케이블과 마이크로파 무선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3,000km의 레일웨이 광섬유 프로젝트는 콤링크가 운영 중에 있고, 1,300km의 해저 광케이블망은 자스민 섭마린 텔레컴뮤니케이션에 의해 운영 중이다. 1998년 현재 셀룰러 가입자는 230만 명을 넘고 있고, 어드벤스 인포 서비스(AIS)와 토탈 액세스 콤뮤니케이션(TAC)이 시장을 양분하고 있다.

 

인터넷 가입자는 2000년 현재 100만여 명으로 인터넷 보급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주요 인터넷 서비스 제공업체는 아시아인포, 사마트 인포넷, 록시인포 등이 있다. 1998년 현재 인터넷 호스트 수는 1만 6,880대이다. 방송 사업자는 전국방송을 실시하는 국영방송사 2개와 민영방송사 2개, 공영방송사 1개가 있다. MCOT는 1993년부터 30여개의 CATV사업 면허를 발급하였으나 대부분의 사업자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지 않다. 1998년 현재 CATV 가입가구수는 36만 8290가구이다.

 

12.타이의 대한관계

타이는 남·북한 동시수교국이다. 한국과는 1959년 1월 수교하여 상주 대사관을 설치하고 있으며, 1974년 외교정책 다변화 이후 1975년 5월에는 북한과도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겸임공관을 두었다. 6·25전쟁 때 UN군으로 참전하였으며 1981년 7월에는 대통령 전두환이 타이를 방문하여 상호협력을 다지는 등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1996년에는 대통령 김영삼이 타이를 방문하였고 1994, 1999, 2000년에 타이 총리 추안이 방한하였다.

 

두 나라 사이에는 무역협정(1961), 항공협정(1967), 이중과세방지협정(1974), 운수소득면세협정(1977), 사증면제협정(1981), 과학기술협력협정(1985), 투자보장협정(1989), 범죄인인도협정(1998) 등이 체결되어 있다. 한국 교민 121명, 체류자 1만여 명이 있다. 2000년 현재 대한수입 20억 1515만 달러, 대한수출 16억 3091만 달러이다. 주요 수출품은 사료, 천연고무, 당류, 컴퓨터부품 등이고, 수입품은 철강, 비료, 섬유류, 엔진부품 등이다.

 

 

비만멕궁전

 

 

아유타야 유적지의 와트 프라시산페트

 

 

리수족 여자

 

 

카렌족 여자

 

 

타이 국기

 

 

타이의 코끼리 사육

 

 

담넌사두악 수상시장

 

 

왓야이차이몽콘 사원

 

 

왓프라케오

 

 

 

 

도움이 되시길..^^

2004.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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