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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페르시아 전쟁 3차례 페르시아가 진 이유
비공개 조회수 1,011 작성일2018.05.29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전쟁은 3차례가 이루어 졌잖아요.

근데 1차례에서는 왜 페르시아가 졌고

2차에서는 왜졌고 3차에서는 왜 졌나요??


어떤 이유 때문에 페르시아가 진건가요?


내공 80 겁니다.


내공 냠냠 신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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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보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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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원정


BC 492년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은

사위 마르도니우스를 사령관으로 임명해서 그리스를 향해 군대를 보냈으나 중간에 아토스 곶 근처에서 만난 폭풍우에 해군이 몰살당하는 바람에 원정에 실패합니다.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300 여척이 침몰하고 2만명의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2차 원정


BC 490, 600 여척의 페르시아 함대는 20여년전 아테네에서 추방되었던 히피아스를 안내자로 앞세우고 그리스를 향해 출발합니다.

히피아스의 안내로 기병의 활동에 적합한 곳이라 여겨지는 마라톤 지역에 상륙한 페르시아군대를 목격한 그리스 연합군 정확하게는 9천명의 아테네 병사들과 1천명의 플라타이아이 병사들은 겁에 질려 있었습니다.(역사가들은 당시 아테네군의 규모를 약 1, 페르시아군은 10 ~ 20만으로 보고 있다.) 스파르타는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보름달이 뜨는 6일 뒤에나 출병한다고 했기에 모두들 페르시아가 승리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양쪽 군대가 서로를 마주보며 며칠째 대치하고 있던 중,

페르시아군의 기병대가 사라졌다는 보고를 받은 아테네 장군 밀티아데스(BC 554년경 ~ BC 489년경)는 플라타이아이에서 지원해준 천명의 병력을 포함해 약 1만명의 중장보병을 좌우로 나누어 약 2 ~ 3만명의 규모였던 페르시아 보병을 밀어붙이다가 전술을 바꿔 좌우익을 가운데로 몰아서 중앙본진으로 밀고 들어가자(양익포위전술) 페르시아군은 6400명의 전사자를 버려두고 후퇴를 했습니다. 쓰러진 아테네 병사는 192명이었습니다.

이때, 사라졌다는 페르시아의 기병대는, 승리를 예상하고 아테네로 출발하기 위해 미리 배에 올라있었다는 설도 있고, 말들에게 먹이와 물을 먹이기 위해 전장에서 멀리 떠나 있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후퇴한 페르시아 군은 병사들을 배에 태우고 곧바로 아테네를 향했습니다. 아테네의 주력군은 마라톤에 있었기 때문에 아테네에는 병력이 거의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마라톤에서 승리한 주력부대가 아테네에 도착하기도 전에 아테네 앞에 나타난 페르시아 함선을 보고 아테네 시민들이 주력군이 패배한 것으로 생각하여 항복을 결정하지 않도록 그 전에 승전소식을 알려야만 했습니다.

여기서 오늘날 마라톤 경기의 기원이 되는 전설이 탄생한 것 입니다.

마라톤 전투의 승리는

아테네 시민들에게는 스파르타의 도움 없이도 거대한 페르시아에 맞서 싸워서 자유를 지켰다는 자부심을 주었고,

반면에 처음엔 아테네가 어디에 붙어 있는 나라였는지도 몰랐던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에게는 개인적인 모욕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내부의 적이나 주변의 다른 나라들이 페르시아에 대항해보겠다는 의지를 갖게 할 수도 있는 국가적으로 위협이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3차 원정


아테네를 잊지 말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들은 크세르크세스는

BC 481년 봄에 4년을 준비한 그리스 원정길에 오릅니다.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군의 병력이 전투원 267, 비전투원 261, 합이 528만명 이라고 계산하고 있습니다. 계산이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페르시아가 동원할 수 있는 군대를 모두 끌어모았다는 상징적 의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연합군의 회의를 통해 육군은 스파르타가 지휘하여 테르모필레에서, 해군은 아테네가 지휘하여 아르테미시온에서 페르시아군을 저지하기로 합니다.

 

20 ~ 30만명 정도로 예상(헤로도토스는 약 180만명으로 계산)되는 페르시아 육군에 맞서 테르모필레의 방어에 동원된 그리스 연합군은 스파르타군 300명을 포함하여 약 7000 명으로, 스파르타 국왕 레오니다스가 이끌고 있었습니다.

연합군의 맹주역할을 하고 있던 스파르타는 종교행사라는 이유를 들어 300명만 보냈다고 하는데, 학자들은 본토방어를 위해 주력군을 본국에 남겨놓은 구실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기병의 측면공격을 전혀 염려하지 않아도 될 만큼 비좁은 길목이었던 테르모필레 협곡을 막고 있는 그리스 연합군을 이모탈(불사부대)이라 부르는 왕실 친위대까지 동원한 이틀간의 공격으로도 함락하지 못하고 있던 페르시아군이, 그리스어로 악몽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된 에피알테스라는 이름의 한 그리스인의 포상금을 노린 배신으로, 샛길을 알아내지 못했더라면 페르시아의 그리스 원정은 그곳에서 끝났을 지도 모릅니다.

 

페르시아의 일부 병력이 샛길로 돌아오고 있음을 눈치 채고 당황해하는 다른 그리스 연합군을 철수시킨 가운데 치러진 테르모필레 최후의 전투에서 앞뒤로 몰려드는 페르시아군에 맞선 천여명의 그리스 연합군과 스파르타군 300명은 레오니다스 왕과 함께 싸우다 전멸했지만 오늘날까지도 기억되는 전설이 되었고, 이 싸움에서 크세르크세스는 두 명의 형제와 2만이 넘는 병력을 잃었다고 합니다.

어떤 이들은 스파르타를 지키기 위해서는 왕이 죽어야 한다고 한 델포이 신전의 신탁을 이루기 위해 레오니다스가 철수하지 않고 남아서 전사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아르테미시온에서 1000 척 이상의 페르시아 해군에 맞서고 있었던 그리스 연합 해군은 271척이었습니다. 폭풍우 때문에 페르시아 해군은 계속 손실을 보고 있었고, 직접적인 교전보다는 진로를 방해하기 위한 지연작전을 펼치고 있었던 그리스 연합해군은 테르모필레의 패전 소식을 듣고 살라미스로 후퇴합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네의 여자와 노약자들을 피난시키고 싸울 수 있는 남자들은 함선에 태웠습니다.

 

테르모필레에서 승리한 페르시아군은 아테네로 진격하여 텅 빈 아테네를 잿더미로 만듭니다.

아테네를 불태운 크세르크세스는 스파르타로 갈 것인지 아니면 그리스 연합군이 모여있는 살라미스로 갈 것인지를 놓고 고민하다가 살라미스를 선택합니다. 그리스의 해군마저 전멸 시키면 스파르타는 알아서 항복할 것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하지만 살라미스 해협도 테르모필레 만큼 비좁은 곳이었습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그리스 연합함대가 살라미스에서 철수하려한다는 거짓 정보를 흘려 페르시아 함대를 유인합니다. 크세르크세스는 살라미스 해협의 양쪽 출구를 막아 협공을 하기 위해 이집트 함대를 반대편으로 보내고 나머지 함대를 살라미스 해협 안으로 돌진시킵니다.

하지만 이때 좁은 해협으로 몰아치는 강풍이 불어, 물을 흠뻑 먹어 낮고 무거워진 그리스 함선에 비해 크고 높았던 페르시아 함선들은 심하게 흔들렸고 선열이 붕괴되면서 서로의 배를 들이받는 등 혼란에 빠졌습니다. 11시간 동안 벌어진 전투의 결과, 살라미스의 바다는, 그리스 함대의 충각공격으로 침몰하고 좌초한 페르시아 함선들의 파편과 떠다니는 병사들의 시체로 가득했다고 합니다.

 

살라미스의 패전을 직접 목격한 크세르크세스는 신속한 승리를 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여 페르시아로 귀국했고,

BC 479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페르시아의 총사령관이자 다리우스의 사위였던 마르도니우스가 스파르타 병사가 던진 돌에 맞아 전사하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페르시아 전쟁은 일단락 되었습니다. 이 전투는, 레오니다스의 원수를 갚으라는 신탁을 받은, 스파르타가 노예 반란의 위험을 감수하고 15000 명 이상의 대규모 병력을 본토 밖으로 원정 보낸 유일한 경우였습니다.

 

하지만

BC 465년 크세르크세스가 측근 아르타바노스에게 암살된 뒤에도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델로스 동맹과 페르시아의 전투는 계속되었고,

 

BC 448년 페르시아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와 델로스 동맹 사이에 칼리아스 평화조약이 체결되면서 페르시아 전쟁이 끝났다는 주장과 조약 체결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주장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2018.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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