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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작가회의와 함께하는 전라북도 길 이야기] 별 - 김성숙

그림=신보름
그림=신보름

“별이 떴어?”

햇살 한 줌이 나풀나풀 얼굴을 간질이는가 싶더니 오싹한 바람이 부산하게 몸을 흔들어 깨웠다.

“뭐라고?”

희미하게 들리는 엄마 목소리. 눈꺼풀과 입술은 솜이불의 무게로 가라앉아 도통 엄마를 불러 세우지 못했다.

“별이 떴어?”

“야가 뭐라고 헌디야. 안 들려! 나 지금 나강게 후딱 일어나서 학교 가잉? 애기는 할머니 집에 먼저 데려다 놓을랑게 너도 어서 가서 밥 먹고 도시락 챙겨 갈라믄, 아, 얼른 인나! 마빡은 또 어디서 깨져가지고 와서는.”

아 씨, 또 김치볶음이다. 할머니가 싸주는 도시락 반찬은 언제나 묵은 김치 볶음. 군둥내 씻어낸다고 물에 한나절은 불려놨던 김치라서 에미 맛도 애비 맛도 안 나는 허연 김치볶음이 오늘 도시락 반찬이다. 눈이 번쩍 뜨였다.

“썩을 것들, 또 지 반찬 숨기고 돌아앉는 꼴 좀 보겄구만.”

그런데 내가 언제 집에 돌아와 잠이 들었지? 나는… 그래, 할머니 집에서 늦은 아침을 먹고 있었다.

“못 써! 아, 밥을 왜 자꾸 달구 새끼헌티 뿌려!”

“아가 입맛이 없냐? 근디 어찐다냐. 아칙에 계란 두 개 할아버지 부쳐주고 인자 없는디. 내가 가서 닭장 조깨 다시 들이다보고 올란다.”

“할머니, 나도!”

할머니가 마루 아래 신발을 주섬주섬 찾을 때쯤 방남이가 불쑥 마당으로 들어섰다.

“바 바 밥… 시 시 식사하셔요?”

“응, 그려. 방냄이 왔냐?”

“예 예 예에.”

“방냄이, 밥은 먹었냐?”

“예 예 예에.”

“그럼 거기 조깨 있어잉. 나 저그 좀 갔다 오고.”

“예 예 예에.”

방남이는 밥 먹는 우리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마루 끄트머리 즈음에 엉거주춤 앉았다.

“왜 거기 그러고 있어?”

“애 애 애기.”

“애기?”

“애기, 안 돼.”내가 알지 못하는 언젠가 사고로 바보가 된 방남이는 아마도 마흔이 넘고 쉰도 넘어 보였다. 한쪽 다리를 끌고 한 손도 비틀어진 터라 영락없는 반푼이 취급을 받아서 어린아이들 곁에는 가지 못하게 어른들이 단속을 한 모양이었다.

“괜찮아, 일루 와.”

“아 아 안 돼, 애기.”

“아, 안 들려! 일루 와!”

방남이는 짐짓 못이기는 척 밥상 옆으로 다가왔다.

“왜?”

“어? 뭐 뭐 뭐가?”

“아, 왜 왔냐고?”

“아 아 아니 그냥.”

밥 먹는 옆에서 가만히 있기가 그랬는지 방남이는 엉덩이를 들고 토방 아래 신발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으 으 읍내 간다.”

“읍내? 돈 있어? 버스 태워 준대?”

반푼이 방남이는 버스도 못 탄다. 돈이 있어도 태워 주지를 않는다. 왜 그러냐고 물어봐도 누구 하나 속 시원하게 대답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꼬치꼬치 캐묻다가 반푼이랑 어울려 다니지 말라는 말을 들은 이후로는 그나마 방남이에 대해 묻는 것도 관뒀다.

“버 버스 안 타. 거 거 걸어서 간다.”

“야, 밥을 왜 자꾸 조물딱거려? 인 내 봐, 손! 누나, 손! 옳지! 인제 수저 쥐고. 아, 뭣이 안 되야, 수저로 이렇게 밥을 푹! 푹! 푹! 재밌지? 그려, 푹! 옳지, 잘헌다! 근디 뭐라고? 걸어서 읍내를 간다고? 거가 어디라고 걸어서 가?”

“가 가 가 봤다.”

“지랄허네.”

어느 새 빈 그릇에 밥풀 몇 개 남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닭들이 제 할 일을 다 안 한 듯싶다. 남은 한 알까지 밥풀을 꼼꼼히 떼어 먹었다. 밥 남겼다고 집에서 쫓겨난 뒤 생긴 습관이다.

“얼마나 걸리는디?”

“해 해 해 지기 전에 온다.”

“심심허겄네.”

“아 아 안 심심해. 강아지풀이 내 내 낼름거리고 구름이 발라당한다.”

“야, 구름은 두둥실이야.”

“그 그 그래, 두둥 두둥실.”

“뭉게뭉게라고 해도 돼.”

“무 무 뭉, 뭉, 뭉.”

“됐고! 내가 중리까지만 가줄 틴게.”

“아 아 아.”

“대신 갔다 와서 읍내 얘기 해 주는 거다.”

“아 아 아.”

뒤안을 돌아 나오는 할머니 손에는 내 것이 아닌 계란이 들려 있었다.

“요놈 하나 게우 찾았네.”

“상태 해 줘, 할머니.”

“너는 그새 밥 다 먹었냐? 어찐다냐?”

“난중에 저 달구 새끼 하나 잡아먹지 뭐. 저 눈탱이에 허옇게 고내기 낀 놈은 내 꺼여, 할머니. 먼저 잡아먹지 말어. 나 놀다 올게.”

“어디 가냐?”

“중리!”

“방냄이도 같이 가냐?”

“에 에 예.”

“아니! 방냄이는 딴 데 간대! 갔다 올게!”

방남이의 신발은 언제나 흰 고무신이다. 모양이 없는 것 빼고는 참 요모조모로 쓸모가 많은 신발이었다. 학교에서 개구리밥 떠 오라는 숙제를 내줬을 때도, 벌을 잡아 벌침 빼기 놀이를 할 때도 방남이는 직접 고무신을 벗어 시범을 보였다. 운동화로는 도무지 하기 힘든 것이 고무신으로는 몇 번 만에 성공을 했다. 그래도 읍내까지는 꽤 먼 길인데 걱정이 들었다.

“방냄아, 너 신발 괜찮냐?”

“어 허 허엉.”

“읍내까지 갈려면 발 아플 거 아녀. 신작로에는 돌도 엄청 많은디.”

“어 허 엉. 고 고 고무신.”

“우리 아빠 운동화 빌려줄까? 저녁 때 몰래 우리 토방 밑에 두고 가.”

“아 아 아니. 고 고무신 조 좋아.”

“너 신발 찢어져도 나 몰른다잉. 난중에 발에 피 철철 흘림서 엉엉 울어도 나 몰라잉?”

“어 허 어엉.”

“야! 근디 저 자전거에 매달려 오는 것이 뭐냐?”

앞에 길을 막은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도 쩌렁쩌렁 종소리를 울리며 달려오는 자전거에 매달린 것은 영근이였다. 자전거가 큰지 영근이가 작은지 안장에 엉덩이를 붙이지도 못하고 파이프 사이로 다리만 집어넣어 씰룩거리며 페달을 굴리고 있었다. 저렇게 비틀어진 자세를 하고도 어떻게 제 몸집보다 배는 큰 자전거를 타는지 묘기를 보는 듯했다.

“동춘서커스 나가냐?”

“어디 가냐? 방냄이도?”

“넌 어디 가는디?”

“아 씨, 너그 철공소 간다.”

동네에 있는 유일한 철공소, 우리 삼촌이 사장이자 직원인 곳이다. 말이 좋아 철공소지 늘 경운기며 탈곡기며 농기계들이 드나들었고, 자전거쯤은 일거리로 치지도 않았다. 철공소에는 늘 베어링이 굴러다녀서 다른 애들이 유리구슬로 구슬치기를 할 때 나는 쇠구슬을 절그럭거리고 다녔다. 왕구슬 열 개와도 바꾸지 않을 만큼 쇠구슬의 인기는 대단했는데 나는 그깟 왕구슬 따위와는 거래를 하지 않았다. 친한 친구들 생일에 한 세 개쯤 선물할 뿐이었다. 영근이는 그중 구슬 선물을 가장 많이 받은 녀석이었다.

“왜?”

“짐빠가 고장 났다고 삼촌헌티 봐 달란다.”

“잘만 타고 오드만.”

“아녀, 확실히 어디가 휘었나벼. 멫 번을 자빠질 뻔했어야.”

“그려, 가도 욕본다. 가 봐.”

“너는 어디 가는디?”

“읍내.”

“읍내? 중리 가서 버스 탈라고? 방냄이는?”

“방냄이도 읍내.”

“너그 둘이 읍내 간다고? 뭐덜라고?”

“강아지풀이 낼름거리고 구름이 발라당허는 것 보러.”

“뭐? 방냄아, 야가 지금 뭐라고 허냐?”

“모 모 몰러. 허허허엉. 거 거 걸어서 간다.”

“야떨이 점점 모를 소리를 허네. 야, 쫌만 지둘려 봐. 아니 천천히 가. 내가 후딱 짐빠 맡기고 따라붙을랑게 천천히 가고 있어잉?”

영근이는 또 서커스를 하며 작아져 갔다. 영근이의 덩치가 작아서 그런지 자전거는 더욱 커다랗게 보였다. 넘어지면 낑낑거리며 잘 일으켜 세우지도 못하는 무거운 자전거를, 그 위에 올라탔다고 저렇게 재주 부리듯 하는 걸 보면 신기했다. 그러고 보면 저 자전거 나이가 예닐곱 살은 되었겠다. 영근이 엄마가 산통을 겪을 때 영근이 아버지가 저 짐자전거에 싣고 읍내 병원까지 내달렸다고 했다. 산달이 가까워오자 영근이 아버지는 자전거 짐받이에 가마니를 깔고 담요를 덮고 했단다. 혹시라도 한밤중에 병원에 갈 일이 생기면 차도 안 다니는 시골 마을에서 대책이 없으니 그리 준비한다 했단다. 아니나 다를까, 영근이 동생은 개도 안 짖는 한밤중에 양수를 터뜨렸고, 영근이 아버지는 영근이 엄마를 불끈 들어, 아니지 영근이 아버지의 체구로 봐서는 불끈 들었을 것 같지 않다. 암튼 영근이 엄마를 싣고 달렸다지, 저 신작로를. 말이 신작로지 애기 머리통만 한 돌덩이들이 심심치 않게 덤벼드는 그 돌밭 길을 어찌 달렸을까. 그 덜컹거리는 가운데 영근이 엄마는 아기가 나오려는 걸 참 잘도 참았겠다. 일설로는 창북리에서 밤늦도록 막걸리를 마시고 갈지자로 경운기를 운전해 오던 영근이 삼촌을 중간에 딱 만나서 자전거와 경운기를 바꿔치기했다는 얘기도 있지만, 영근이 아버지의 무용담에 부러 찬물 끼얹을 이유가 없던 탓에 다들 뻘소리려니 했다. 큰일 한 자전거는 영근이 동생이 집에 오던 날, 막걸리도 한 병이나 받아 잡쉈다. 암튼 참 기특한 자전거이니 녹이 슬고 휘었다고 내버려둘 수가 없을 것이다.

“아 씨, 천천히 가랑게 벌써 중리까지 왔냐?”

“가 가 가.”

“방냄아, 정말로 해 지기 전에 올 수 있어?”

“어? 어 허 어엉.”

“진짜지? 해 지기 전에 와야 혀, 엄마 오기 전에.”

“해, 지기 전에.”

“그럼 같이 가게. 영근아, 너도 갈래?”

“나 돈 없는디?”

“버스 안 탄당게.”

“진짜로 걸어서 갈라고? 진짜로?”

“야가 뭣을 들었디야, 귓구녘에 먼지 들어갔냐? 아! 아! 아!”

“아이 씨! 아퍼! 근디 읍내를 뭐덜라고 가는디?”

“방냄이, 구경 간디야.”

“구경? 뭔 구경?”

“강아지풀 낼름거리는 것도 보고, 구름이 발라당허는 것도 보고, 시장 구경도 허고.”

“아, 잠깐! 시장 구경? 그럼 자전거포도 있냐?”

방냄이는 혼자 벌써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아마 있겄지? 시장에 자전거포 없겄냐? 부안 읍내가 얼매나 큰디.”

“글지? 있겄지? 아 씨, 그럼 나도 같이 갈까?”

“자전거포는 뭣 허게? 삼촌이 느그 자전거 못 쓴디야?”

다리 아래에는 늙어빠진 쪽배가 여럿 매여 있었다. 한눈에도 물일 나간 지 오래돼 보이는 버려진 듯한 배였다.

“오늘 제 할 일 못 허는 것들, 여럿 보는구먼.”

“뭐?”

“아니, 자전거포는 왜?”

“아 씨, 자전거 좀 바꾸자고 바꾸자고 해도 쓸 만헌 자전거가 없더라고 우리 아버지가 그러잖냐. 저놈의 짐빠, 엔간치 부려먹었어야지.”

“우리 삼촌은 뭐라는디? 이제 그만 바꾸리야?”

“아니, 느그 삼촌이 뭐 그런 말이나 허는 양반이냐? 그냥 맨날 웃기만 허지. 긍게로 내가 가서 한번 보고 아버지헌티 이참에 바꾸자고 씨게 말을 히야겄어.”

“니가 바꾸자고 헌다고 느그 아버지가 바꾼대?”

“그런 거시기가 있지.”

“뭣인디? 뭔 쪼간이 있길래 그려?”

“있어, 그런 거시기가. 이히히히히. 말헐까? 저번 날에 엄마가 아버지 찾아오라고 혀서 저녁 늦게 종점상회에 갔잖냐. 거그서 딱 봐 버린 것이지. 돈을 세고 있더라고, 이만큼을. 난 그냥 그런갑다 혔는디 아버지가 엄마한테는 비밀로 하라잖냐.”

“음마, 뭔 돈이대?”

“나야 몰르지. 알 것도 없고! 글서 아버지헌티 탁 얘기했잖냐, 대신 자전거 새로 사자고.”

“음마, 간댕이가 부었는갑다잉.”

“긍게 나도 몰르겄어야, 그때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근디 아버지가 ‘좋은 놈’ 나오면 그러자고 하더라고. 뭐 글고서 채일피일 미룰라고 그렸는지 몰르지만 내가 내 눈으로 ‘좋은 놈’ 딱 보고 와버리면 어쩔 것이여.”

“자전거가 그것이 뭣이 그렇게 중허다고?”

“야, 저기 방냄이가 뭐라고 허는디?”

앞서 가던 방남이가 주먹을 쥐고 우리를 향해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야! 너 우리헌티 주먹질허냐?”

“내 낼름, 낼름.”

방남이 주먹 안에 든 건 강아지풀이었다. 솥뚜껑만 한 손이 쥐엄쥐엄 하니 강아지풀이 뽀록뽀록 주먹을 비집고 고개를 내밀었다.

“뭐여? 이것이 낼름낼름이여?”

“내 낼름, 낼름.”

“야, 영근아! 낼름! 낼름! 에이여, 메롱이다!”

기억은 안 나지만 내가 아기 적에 이 강아지풀과는 천적이었다고 한다. 아기를 맡길 데가 없던 엄마는 밭일을 나갈 때 나를 데리고 가서 바구니에 넣어둔 채 일을 하고는 했는데, 어느 날 아기가 자지러지게 울더란다. 달려가서 보면 아무 일도 없고, 다시 우는 소리에 달려가 보면 아무 일도 없고. 샛거리 시간이 되어 가만히 아기 바구니를 지켜보니 바람이 불 때마다 바구니 속으로 강아지풀이 넘실거렸고, 그때마다 아기는 숨넘어갈 듯 울음을 터뜨렸단다. 대체 이 강아지풀 따위가 뭐가 무섭다고. 내가 무서워한 게 과연 강아지풀이었을까? 문득문득 엄마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일깨워줬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바 바 바다.”

“아이 씨, 뭐라는 거여. 야, 이 방냄아, 말 좀 똑바로 혀!”

“아, 바다였다고 하잖어. 이 길이 옛날에는 바다였다고.”

“에이, 말도 안 돼. 바다가 어떻게 땅이 되냐?”

“아녀, 나도 들었는디?”

“난 첨 듣는디? 야, 넌 전학 왔잖여. 어찌케 아냐. 난 여기서 태어나서 쭉 살었는디 내가 더 잘 알지.”

“여기 간척헐 때 우리 아빠도 돌 날랐디야, 총각 때.”

“너 태어나기 전에?”

“글지, 너도 태어나기 전에.”

“그럼 이 길은 몇 살이냐?”

“한 열 멫 살은 되지 않겄냐?”

“그려서 안직도 이렇게 길에 돌댕이들이 많은 것이냐?”

“글지도 모르지. 옛날에는 저어기 논들도 다 바다였당게.”

“그려? 논도 다? 어쩐지 밥이 좀 짜드라.”

“뭔 밥이 짜!”

“아, 우리 집 밥은 짜. 진짜여!”

“진짜면 느그 엄마가 밥에다가 소금을 한 주먹 집어넣는가 비지!”

“아이 씨, 진짜랑게.”

“아, 그렇다고 혀 두고.”

“그럼 이 흙을 어디서 다 퍼온 거여?”

“나사 모르지. 어디서 갖고 왔겄지.”

“거그는 그럼 민둥산 되었겄다잉?”

“산을 깎어서 갖고 왔을까?”

“그럼 땅을 파서 갖고 왔겄냐? 거그는 바다가 되았게?”

“그렸을까? 그럴지도 몰르겄다잉.”

“뭣이 그럴지도 몰라. 뭐 사금파리 맞추기 허냐? 바다는 땅으로 만들고 땅은 바다로 만들게? 심 팽기게 뭣 허는 짓이여?”

“긍가? 그나지나 이 길이 글고 봉게 너보다 형님이다잉? 형님! 하고 불러라.”

“예, 예, 형님! 에이여, 뽕이다!”

영근이가 주먹을 날리는 시늉을 하고는 지레 저만치 도망쳐갔다. 영근이는 체구가 작은 대신에 달리기를 잘했다. 내가 운동장 한 바퀴 도는 사이에 두 바퀴를 돌고 들어와 여유롭게 웃고 있는 얄미운 녀석이었다. 아무리 쫓아가도 안 되는 줄 알면서 뒤돌아보며 약 올리는 영근이를 기어코 쫓아 달렸다. 따릉따릉!

“너, 영근이 아니냐?”

“어, 안녕하세요?”

“너 잘 만났다. 안 그려도 일손은 부족헌디 나 한 사람 빠져나올랑게 어찌케나 켕기던지. 너 우리 집에 좀 갔다 와라.”

“예? 제가 왜요?”

말꼬리가 잦아드는 걸 보니 조금만 밀어붙이면 고개 푹 숙이고 시키는 대로 갈 녀석이다.

“영근이 저랑 노는데요?”

슬쩍 고개를 돌려 보니 방남이는 어느새 저만치 앞에 가 있었다. 그 큰 덩치가 어디 풀 몇 개에 가려진다고 나름 숨은 모양이었다. 다행히 아저씨는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아, 긍게 후딱 갔다 와서 놀아도 되잖여. 우리 집에 가서 새참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좀 보고 아줌마랑 같이 갖고와잉.”

“제가, 어떻게요?”

가지 말라고 엉덩이를 꼬집자 움찔하면서도 영근이는 아저씨의 부탁을 거절하기 힘들어했다.

“이것 타고 후딱 갔다 오면 되지.”

그때 난 보고야 말았다, 반짝하고 섬광을 발하는 영근이의 눈빛을. 넌 배신이야.

“이 자전거요? 정말 이거 타고 갔다 와도 돼요?”

“그려. 너 자전거 잘 타지? 이것은 느그 집 거보다 좋은 것인게. 어찌케 뒤에 아줌마 태우고 올 수 있겄냐?”

“아, 예! 다녀오겠습니다!”

나쁜 녀석. 하긴 자전거 때문에 눈이 멀어 아버지하고도 거래를 한 놈이 우리라고 못 버릴까? 내가 쏘아 날린 눈 화살을 정통으로 맞았더라면 이순신 장군도 전사했을 테지만 영근이는 자전거를 타고 눈 화살 사이를 유유히 빠져나갔다.

“미안! 담에 놀자! 잘 갔다와잉!”

아저씨가 등을 돌려 논길로 저벅저벅 걸어 저만치 사라진 것을 확인한 후, 방남이에게로 뛰어갔다. 방남이는 그때까지 들풀 몇 개에 몸을 가린 채 웅크려 있었다.

“다 보여!”

“엉? 어 허어엉.”

“가자!”

“어. 여 여 영근이는?”

“영근이는 잊어. 그놈은 이제부터 배신자여. 내가 준 쇠구슬이 몇 갠디 지가 날 이렇게 배신해?”

어쩌면 이 길에 영근이를 기어이 끌어들인 데에는 일말의 불안감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른들 얘기처럼 방남이는 위험한 존재니까 너무 가까이 지내면 안 된다는, 여럿이 놀 때는 몰라도 단둘이 있지는 말라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주워대지 않아도 어떤 무언의 규칙들은 놀랍도록 강하게 학습되었다.

“방남아, 부안 읍내는 아직 멀었지?”

“어, 허어엉.”

방남이와 나는 여전히 멀찌감치 떨어져서 걸었다. 조막만 한 녀석 하나 사라졌을 뿐인데 길에 적막이 감돌았다. 누런 돌 하나, 누런 돌 둘, 누런 돌 셋…. 누런 돌들을 세다 지쳐 이번엔 큰 돌 사이를 껑충거리며 뛰었다.

“다 다 다친다.”

“방냄이 너는 고무신이라 이런 거 못하지?”

“어 어, 다 다친다.”

그 많고 많은 돌을 발로 차기도 하고 비석치기도 하고 논으로 던져버리기도 했지만 길은 좀처럼 끝을 보이지 않았다.

“방냄아, 내가 왜 읍내에 갈라고 하는지 알어?”

“모 모 몰라.”

“있지, 내가 네 살 때 여기 계화도에 와서 1년을 살았다. 그때 우리 집에 무슨 일이 있어 가지고 우리 엄마랑 아빠랑 나랑 뿔뿔이 다 흩어졌단다. 그려서 우리 삼촌이 서울로 와서 나를 데리고 내려왔는디, 내려오는 기차에서 시종 어찌나 서럽게 울어대든가 처음엔 시끄럽다고 뭐라고 허던 사람들도 난중에는 같이 울었단다. 가시내 울음에 한이 서렸었다냐 뭐라냐. 결국 지 풀에 못 이겨서 잠이 들었는디 부안 읍내에 딱 도착했을 때 내가 뭐라고 헌 줄 아냐? 삼촌, 나 배고파.”

“어 어, 배 배고파.”

“아니, 나는 기억이 안 나는디, 삼촌이 그러는 거여. 내가 그렸다고, 삼촌 배고파, 그렸다고. 말이 되냐? 어찌케 그렇게 엄마 떨어지기 싫어서 울던 애기가 여그 왔다고 눈물을 딱 그치고 배고프다고 한다냐. 근디 내가 짜장면 한 그릇을 다 먹어치웠다는 거여. 읍내 중국집에서. 야, 거시기 말이지. 네 살짜리 애기가 어찌케 짜장면 한 그릇을 다 먹냐, 안 그러냐? 아까 내 동생 봤지? 가가 네 살인디 안적도 밥 가지고 장난치고 시 숟가락이나 겨우 먹는디, 어찌케 내가 짜장면 한 그릇을 다 먹냐고. 내가 절대 아니라고 한게로 삼촌이 절대 맞다고, 니가 그맀다고. 그려서 내가 한번 확인해 볼라고 허는 거여. 터미널 근처에 중국집이 열 개가 되겄냐, 백 개가 되겄냐? 옛날에 이런 애기가 있었냐고 물어봐야지.”

“어 어 어.”

“그도 그렇게 생각허냐? 내가 짜장면 한 그릇 다 먹었다고?”

“아 아 아니.”

“그려, 나는 안 먹었다고. 내가 기억나는 건 기차 안에서 울던 거시기, 딱 거기 한 부분이란 말여. 다도 아니여. 그냥 내가 우는디 내 앞에서 삼촌이 같이 울던 그 모습만 기억이 난단 말여. 근디 내가 아무리 기억을 못 헌다고 나헌티 없던 일을 뒤집어씌우면 안 되지. 이것은 쇠구슬 백 개하고 바꾸자고 해도 안 되는 일이란 말여.”

“아 안 돼, 안 돼.”

애꿎은 돌멩이에 울분을 실어 발길질을 해댔다. 그러자 저 멀리에서 흙먼지 바람이 일었다. 뿌연 바람은 점점 커지고 커져 이내 짐승 같은 소리마저 질러대기 시작했다.

“버 버 버스다, 비 비 비켜!”

쿠르르릉 쿠르르릉 쿠당탕탕 탕 탕 탕. 바퀴 사이로 돌들이 튀어 날아올랐다. 쿠쿠 탕탕 투다다당 탕 탕. 버스를 피해 옆으로 비켜선다는 것이 그만 발을 헛디디며 나는 길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발목이 접질렸다 싶을 때 날아온 돌덩이는 이마를 내리찍었다. 쿠다당 투당탕 탕탕 쿠다다당 쿠르르르릉.

“으아아앙!”

“피 피 피다, 머리, 피 피.”

그 순간 떠올랐다. 덜컹거리는 버스에서 멀미에 시달려 급히 내린 나는 길바닥에 시커먼 가락들을 쏟아 놓았었다. 채 소화되지 못한 짜장면 면발이 목구멍에서 걸려 대롱거렸고, 삼촌은 손으로 그걸 잡아 빼내고 등을 연신 두들겨댔다.

“아이고, 불쌍한 것, 아이고 불쌍한 것.”

그리고 그날 나는 삼촌 등에 업혀 계화도로 들어온 것이었다.

“방냄아, 달이 보여?”

“어 어 보인다, 달.”

“별은 떴어?”

“응, 벼 벼 별. 별 많이.”

*김성숙: 1995년 전주MBC 방송작가 공채. <판소리에 숨어있는 우리의 랩> (1999, 한국방송대상 최우수작품상), <그냥 버리기 아까운 전라도 사투리> (2001, 방송대상 작품상), <다큐멘터리 문자예술 서예> (2007, 한국방송대상 작품상), <다큐멘터리 산조> (2003, 한국방송대상 작품상), 독립다큐멘터리영화 <메콩강에는 악어가 산다(2017) 등 집필.<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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