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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2007 연세대학교 논술 기출문제를 찾습니다..
into**** 조회수 7,911 작성일2007.01.08

얼마전에(올해) 연대에서 논술시험이 있었죠.

 

그때 나왔던 기출문제를 풀어볼까 하는데

(며칠후에 고대 시험보러 가기전에)

 

 

이게 전문이 없군요...제시문을 직접 읽어보고 풀고 싶은데 구할수가 없네요

 

혹시 어디있는지 아시면 '찾아주시면'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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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2007학년도 연세대 정시 논술 문제와 대학측이 밝힌 출제 방향은  아래와 같습니다.

도움 되시길 바랍니다.

 

2007학년도 연세대 논술

 

[논제]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의 느낌과 생각을 과연 이해할 수 있는가? 아래 제시문들을 비교 분석하여 어떤 어려움들이 있는지 설명하고, 그러한 어려움이 극복될 수 있는지 사회현실의 예를 들어 논하시오. 

 

(가) 장자가 혜자와 함께 호수(濠水)의 징검돌 근처에서 노닐고 있었다. 장자가 말했다. “피라미가 한가롭게 헤엄치고 있소. 이게 물고기의 즐거움이오.” 혜자가 말했다. “당신이 물고기가 아닌데 어떻게 물고기가 즐겁다는 것을 안다는 말이오?” 장자가 말했다. “당신은 내가 아닌데 어떻게 내가 물고기가 즐겁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는 말이오?” 혜자가 말했다. “나는 당신이 아니니까 물론 당신을 알지 못하오. 당신은 물고기가 아니니까 물고기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 확실하다는 말이오.” 장자가 말했다. “자,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당신은 ‘당신이 어떻게 물고기가 즐겁다는 것을 안다는 말이오?’라고 했지만, 그것은 이미 내가 안다는 것을 알고서 그렇게 물은 것이오. 나도 호수(濠水)가에서 물고기가 즐겁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오.”

-『장자(莊子)』 추수(秋水)편

 

(나) 우리는 박쥐들이 주로 음파 반향 탐지를 통해, 즉 미묘하게 변조시킨 초음파를 보내서 대상으로부터 반사되어 오는 것을 탐지함으로써 외부세계를 지각한다고 알고 있다. 박쥐의 두뇌는 송출된 파동을 그 반향과 상관시키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렇게 얻은 정보를 가지고 박쥐는 거리, 크기, 모양, 운동, 표면 조직들을 우리가 시각을 가지고 하는 것에 비견될 만큼 정밀하게 분간해낼 수 있다. 그러나 박쥐의 음파 반향 탐지는 분명히 지각의 한 형태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가진 그 어떤 감각과도 비슷하게 작동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이 우리들 인간이 경험하거나 상상할 수 있는 어떤 것과도 주관적 느낌의 측면에서 유사하리라고 생각할 이유가 없다. 바로 이러한 점이 박쥐의 입장에서 느낀다는 것이 어떠한지를 알기 어렵게 만드는 것으로 보인다. [...]
우리 상상의 기본적 재료는 우리 자신의 경험이기에 이러한 상상은 제한되어 있다. 내 팔에 날개가 달려 있어서 저녁과 새벽에 날아다니며 입으로는 벌레를 잡아먹고, 시력은 형편없이 나쁘지만 초음파 신호를 통해 주위 환경을 지각하고, 또 낮에는 다락방에 거꾸로 매달려 지낸다고 상상한들 그것은 박쥐의 느낌을 이해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내가 이런 상상을 한다면 (이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상상인데), 이는 단지 내가 한 마리의 박쥐처럼 행동한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가를 알려줄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아니다. 내가 알고 싶은 바는 박쥐가 박쥐의 입장에서 느끼는 것이 어떠할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갖고 있는 정신적 자원들은 제한되어 있고 그 자원들만으로는 이러한 상상을 하기 어렵다. 나는 현재의 내 경험에 무엇을 더 보태거나 빼면서 상상하거나 또는 더하고 빼고 고치기를 여러 번 반복해 보아도 박쥐의 느낌을 알 수 없다.

-토마스 네이글, 「박쥐의 입장에서 느낀다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다) 점순네 수탉(은 대강이가 크고 똑 오소리같이 실팍하게 생긴 놈)이 덩저리 적은 우리 수탉을 함부로 해내는 것이다. 그것도 그냥 해내는 것이 아니라 푸드득, 하고 면두를 쪼고 물러섰다가 좀 사이를 두고 또 푸드득, 하고 모가지를 쪼았다, 이렇게 멋을 부려가며 여지없이 닦아놓는다. [...]
이번에도 점순이가 쌈을 붙여 놨을 것이다. 바짝바짝 내 기를 올리느라고 그랬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고놈의 계집애가 요새로 들어서서 왜 나를 못 먹겠다고 고렇게 아르릉거리는지 모른다.
나흘 전 감자 쪼간만 하더라도 나는 저에게 조금도 잘못한 것은 없다.
계집애가 나물을 캐러 가면 갔지 남 울타리 엮는데 쌩이질을 하는 것은 다 뭐냐. 그것도 발소리를 죽여가지고 등 뒤로 살며시 와서,
“얘! 너 혼자만 일하니?”
하고 긴치 않은 수작을 하는 것이다. [...]
잔소리를 두루 늘어놓다가 남이 들을까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는 그 속에서 깔깔대인다. 별로 우스울 것도 없는데 날씨가 풀리더니 이놈의 계집애가 미쳤나 하고 의심하였다. 게다가 조금 뒤에는 즈 집께를 할금할금 돌아다보더니 행주치마의 속으로 꼈던 바른손을 뽑아서 나의 턱밑으로 불쑥 내미는 것이다. 언제 구웠는지 아직도 더운 김이 홱 끼치는 굵은 감자 세 개가 손에 뿌듯이 쥐였다.
“느 집인 이거 없지.”
하고 생색 있는 큰소리를 하고는 제가 준 것을 남이 알면은 큰일 날 테니 여기서 얼른 먹어버리란다. 그리고 또 하는 소리가,
“너 봄 감자가 맛있단다.”
“난 감자 안 먹는다, 니나 먹어라.”
나는 고개도 돌리려지 않고 일하던 손으로 그 감자를 도로 어깨 너머로 쑥 밀어버렸다.
그랬더니 그래도 가는 기색이 없고 뿐만 아니라 쌔근쌔근 하고 심상치 않게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진다. 이건 또 뭐야, 싶어서 그때에야 비로소 돌아다보니 나는 참으로 놀랬다. 우리가 이 동리에 들어온 것은 근 삼 년째 되어 오지만 여지껏 가무잡잡한 점순이의 얼굴이 이렇게까지 홍당무처럼 새빨개진 법이 없었다. 게다 눈에 독을 올리고 한참 나를 요렇게 쏘아보더니 나중에는 눈물까지 어리는 것이 아니냐. 그리고 바구니를 다시 집어 들더니 이를 꼭 악물고는 엎더질 듯 자빠질 듯 논둑으로 힝하게 달아나는 것이다.       

-김유정, 「동백꽃」

 

(라) 우리는 보통 다른 존재의 행동(언어적 행동까지 포함해서)을 관찰함으로써, 그 존재가 의식을 가지고 있고 생각을 하는 존재라는--즉 또 다른 마음을 가진 존재라는--판정을 내린다. 우리는 신체의 상해와 신음 소리에서 고통을 추론하고, 미소와 웃음에서 기쁨을 추론하며, 날아오는 눈덩이를 피하는 행동에서 지각이 있음을 추론한다. 그리고 환경을 복합적이고 적절하게 이용하는 것을 보고 욕구와 의도와 믿음이 있음을 추론한다. 또한 우리는 위에서 언급한 행동들과 언어 발화로부터 그 존재의 의식적 지능을 추론하는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추론들이 어떻게 정당화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되면, 문제점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특정한 유형의 행동으로부터 특정한 유형의 심리 상태를 추론한다는 것은, A라는 유형의 행동과 B라는 유형의 심리 상태 사이에 일반적인 연결 관계가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그런 심리/행동의 일반화는 “천둥 소리가 들린다면, 근처 어딘가에서 번개가 친 것이다”와 같은 경험적 일반화와 동일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아마도 그런 일반화는 현상들 사이의 규칙적 연결 관계에 대한 과거 경험을 통해 정당될 것이다. [...]
그러나 심리/행동을 일반화하는 경우,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연결 관계의 한쪽, 즉 행동밖에는 없다. 그렇다면 그 일반화가 다른 존재들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다는 우리의 믿음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는가? 만약 어떤 존재가 일정한 심리 상태에 있다고 한다면, 그 존재의 심리 상태는 오직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직접적으로 관찰될 수 있다. 우리는 그의 심리 상태를 관찰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일반화에 필요한 경험적 증거를 모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런 심리/행동의 일반화를 믿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러므로 다른 존재의 행동을 보고 그가 어떤 심리 상태에 있다고 추론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나는 나 자신을 제외한 어떠한 다른 존재에 대해서도 그 존재가 어떤 심리 상태에 있다는 믿음을 정당화시킬 수 없는 것이다.

-폴 처칠랜드, 『물질과 의식』

 

대학측에서 밝힌 논술시험 출제 보도자료


[출제 방향]

1. 우리 대학은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풍부한 독서와 문화적 체험을 쌓고 이를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능력을 측정하기 위해 논술고사를 실시하여 왔다. 우리 대학의 논술고사는 “한국 및 동서고금의 고전을 포함한 다양한 소재에서 출제”한다는 서울지역 12개 대학의 합의(1997년 12월)에 따라 출제되고 있다.

2. 논술고사를 준비하면서 학생들은 평소에 고전을 많이 읽고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써보는 능력과 우리 주변의 사물과 사건을 다양한 측면에서 분석하고 이를 비판적, 창의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게 될 것이다.

3. 제시문은 동서양의 고전과 현대사회에 관한 여러 책에서 고루 선정하였다. 비록 제시된 책들을 직접 읽지 않은 학생들이라 하더라도 꾸준한 독서를 통해 다양한 지적 경험을 쌓은 학생들이면 충분히 이해하고 자신의 생각이나 관점에서 논술할 수 있는 문제를 출제하였다.

4. 올해는 지난 몇 년간의 연세대학교 논술고사의 기조를 유지하면서,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언제나 느끼는 익숙한 문제를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창의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주제를 선정하였다. 평소에도 학생들이 세상과 사물을 다각도로 분석하고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논리성과 창의성을 키우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생각과 열린 마음, 그리고 성찰적 능력을 지닌 학생들이 우리나라의 장래는 물론 본 연세대학교의 학풍을 더욱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는 생각이다.

 

[문제 설명]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의 느낌과 생각을 과연 이해할 수 있는가? 아래 제시문들을 비교 분석하여 어떤 어려움들이 있는지 설명하고, 그러한 어려움이 극복될 수 있는지 사회현실의 예를 들어 논하시오. (1,800 자 안팎. 150분)
 제시문(가), 『장자(莊子)』 추수(秋水)편
 제시문(나), 토마스 네이글, 「박쥐의 입장에서 느낀다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제시문(다), 김유정, 「동백꽃」
 제시문(라), 폴 처칠랜드, 『물질과 의식』
 
이 문제는 “타자의 마음(Other Mind)”--또는 “다른 존재의 마음”--에 대해 아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인식론적 물음과 관련하여 그 물음의 범위가 지니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인지하면서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을 구체적 사회 현실 속에서 찾아보도록 할 것을 요구함으로써, 텍스트를 세심하게 읽고 분석하는 능력, 근본적 물음에 대해 깊이 있는 사고를 하는 능력, 자기 생각을 구체적 사회 현실에 적용시켜 창의적이고 응용적인 사고를 하는 능력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하기 위한 문제이다. 
더욱 더 복잡해져가는 현대 사회에서 다양한 계층, 지역, 문화권에 속하는 사람들 사이의 이해 부족이 사회의 조화로운 발전에 지장에 초래하고 있다. 사회의 외연이 점점 확대되어가면서 우리가 예전에 “우리들” 속에 포함시키지 않았던 타자들을 “우리들”의 울타리 안에 넣어 그들과 상호작용해야 할 상황들은 더욱 빈번해지고 있다. 우리는 원하건 원하지 않건 그들을 또 다른 주체들로서 받아들여야 하게 되고 그들을 주체들로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확대된 “우리들” 사이의 사회적, 역사적, 문화적, 생물학적 차이들은 그러한 이해의 과업을 점점 더 어렵게 하고 있다.
더 나아가 그런 이해의 과업의 어려움은 서로 많은 차이가 있는 존재들 사이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예전부터 “우리들” 속에 포함시켰던 친밀하고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해의 과업에는 근본적인 어려움들이 따른다. 나는 나 자신의 마음속만을 들여다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나 아닌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그의 겉모습, 신체 구조, 얼굴 표정, 말, 행동 등을 관찰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가 나처럼 느끼고 생각하는 주체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조차도 나는 그의 겉모습과 행동 등으로부터 추론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게다가 다른 사람이 가지는 미묘한 감정들과 생각들을 알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겉모습이나 말이나 행동으로부터 그의 심리 상태를 추론하는 데에 있어서 스테레오타입이나 대략적 일반화가 아닌 보다 섬세한 고려들을 요구하게 된다. 즉 타자 이해의 과업의 어려움은 극히 일반적 수준에서 제기가 된다. 
그리하여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의 마음을 알고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정확히 어떤 어려움들이 있는가를 성찰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 어려움들을 극복하는 데 성공하건 그 어려움들을 완화시키건 또는 그 어려움들을 우리 삶의 근본 조건으로서 받아들이면서 살아가건 간에 현대 사회에 속한 우리들이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출발선이 된다.  
이 문제에 포함된 제시문들은, 타자 이해의 어려움을 여러 각도와 층위에서 드러내어 주면서 그 어려움에 연관된 문제들이 우리 삶에 있어서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또한 얼마나 근본적인 수준에서, 나타날 수 있는가를 드러내어 주는 글들이다. 이 글들을 통해 수험생들은 타자 이해의 어려움들이 나타나는 방식들을 비교하고 분석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과연 그런 어려움들이 극복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에 대해, 그것을 사회적 현실 속의 구체적 사례를 통해 창의적이고 논리적으로 사고해 보게 할 것이다.

2007.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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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2007학년도 정시모집 논술시험 문제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의 느낌과 생각을 과연 이해할 수 있는가? 아래 제시문들을 비교 분석하여 어떤 어려움들이 있는지 설명하고, 그러한 어려움이 극복될 수 있는지 사회현실의 예를 들어 논하시오. 

 

 

(가)

장자가 혜자와 함께 호수(濠水)의 징검돌 근처에서 노닐고 있었다. 장자가 말했다. “피라미가 한가롭게 헤엄치고 있소. 이게 물고기의 즐거움이오.” 혜자가 말했다. “당신이 물고기가 아닌데 어떻게 물고기가 즐겁다는 것을 안다는 말이오?” 장자가 말했다. “당신은 내가 아닌데 어떻게 내가 물고기가 즐겁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는 말이오?” 혜자가 말했다. “나는 당신이 아니니까 물론 당신을 알지 못하오. 당신은 물고기가 아니니까 물고기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 확실하다는 말이오.” 장자가 말했다. “자,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당신은 ‘당신이 어떻게 물고기가 즐겁다는 것을 안다는 말이오?’라고 했지만, 그것은 이미 내가 안다는 것을 알고서 그렇게 물은 것이오. 나도 호수(濠水)가에서 물고기가 즐겁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오.”

-『장자(莊子)』 추수(秋水)편

(나)

우리는 박쥐들이 주로 음파 반향 탐지를 통해, 즉 미묘하게 변조시킨 초음파를 보내서 대상으로부터 반사되어 오는 것을 탐지함으로써 외부세계를 지각한다고 알고 있다. 박쥐의 두뇌는 송출된 파동을 그 반향과 상관시키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렇게 얻은 정보를 가지고 박쥐는 거리, 크기, 모양, 운동, 표면 조직들을 우리가 시각을 가지고 하는 것에 비견될 만큼 정밀하게 분간해낼 수 있다. 그러나 박쥐의 음파 반향 탐지는 분명히 지각의 한 형태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가진 그 어떤 감각과도 비슷하게 작동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이 우리들 인간이 경험하거나 상상할 수 있는 어떤 것과도 주관적 느낌의 측면에서 유사하리라고 생각할 이유가 없다. 바로 이러한 점이 박쥐의 입장에서 느낀다는 것이 어떠한지를 알기 어렵게 만드는 것으로 보인다. [...]

우리 상상의 기본적 재료는 우리 자신의 경험이기에 이러한 상상은 제한되어 있다. 내 팔에 날개가 달려 있어서 저녁과 새벽에 날아다니며 입으로는 벌레를 잡아먹고, 시력은 형편없이 나쁘지만 초음파 신호를 통해 주위 환경을 지각하고, 또 낮에는 다락방에 거꾸로 매달려 지낸다고 상상한들 그것은 박쥐의 느낌을 이해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내가 이런 상상을 한다면 (이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상상인데), 이는 단지 내가 한 마리의 박쥐처럼 행동한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가를 알려줄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아니다. 내가 알고 싶은 바는 박쥐가 박쥐의 입장에서 느끼는 것이 어떠할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갖고 있는 정신적 자원들은 제한되어 있고 그 자원들만으로는 이러한 상상을 하기 어렵다. 나는 현재의 내 경험에 무엇을 더 보태거나 빼면서 상상하거나 또는 더하고 빼고 고치기를 여러 번 반복해 보아도 박쥐의 느낌을 알 수 없다.

-토마스 네이글, 「박쥐의 입장에서 느낀다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다)

점순네 수탉(은 대강이가 크고 똑 오소리같이 실팍하게 생긴 놈)이 덩저리 적은 우리 수탉을 함부로 해내는 것이다. 그것도 그냥 해내는 것이 아니라 푸드득, 하고 면두를 쪼고 물러섰다가 좀 사이를 두고 또 푸드득, 하고 모가지를 쪼았다, 이렇게 멋을 부려가며 여지없이 닦아놓는다. [...]

이번에도 점순이가 쌈을 붙여 놨을 것이다. 바짝바짝 내 기를 올리느라고 그랬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고놈의 계집애가 요새로 들어서서 왜 나를 못 먹겠다고 고렇게 아르릉거리는지 모른다.

나흘 전 감자 쪼간만 하더라도 나는 저에게 조금도 잘못한 것은 없다.

계집애가 나물을 캐러 가면 갔지 남 울타리 엮는데 쌩이질을 하는 것은 다 뭐냐. 그것도 발소리를 죽여가지고 등 뒤로 살며시 와서,

“얘! 너 혼자만 일하니?”

하고 긴치 않은 수작을 하는 것이다. [...]

잔소리를 두루 늘어놓다가 남이 들을까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는 그 속에서 깔깔대인다. 별로 우스울 것도 없는데 날씨가 풀리더니 이놈의 계집애가 미쳤나 하고 의심하였다. 게다가 조금 뒤에는 즈 집께를 할금할금 돌아다보더니 행주치마의 속으로 꼈던 바른손을 뽑아서 나의 턱밑으로 불쑥 내미는 것이다. 언제 구웠는지 아직도 더운 김이 홱 끼치는 굵은 감자 세 개가 손에 뿌듯이 쥐였다.

“느 집인 이거 없지.”

하고 생색 있는 큰소리를 하고는 제가 준 것을 남이 알면은 큰일 날 테니 여기서 얼른 먹어버리란다. 그리고 또 하는 소리가,

“너 봄 감자가 맛있단다.”

“난 감자 안 먹는다, 니나 먹어라.”

나는 고개도 돌리려지 않고 일하던 손으로 그 감자를 도로 어깨 너머로 쑥 밀어버렸다.

그랬더니 그래도 가는 기색이 없고 뿐만 아니라 쌔근쌔근 하고 심상치 않게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진다. 이건 또 뭐야, 싶어서 그때에야 비로소 돌아다보니 나는 참으로 놀랬다. 우리가 이 동리에 들어온 것은 근 삼 년째 되어 오지만 여지껏 가무잡잡한 점순이의 얼굴이 이렇게까지 홍당무처럼 새빨개진 법이 없었다. 게다 눈에 독을 올리고 한참 나를 요렇게 쏘아보더니 나중에는 눈물까지 어리는 것이 아니냐. 그리고 바구니를 다시 집어 들더니 이를 꼭 악물고는 엎더질 듯 자빠질 듯 논둑으로 힝하게 달아나는 것이다.

-김유정, 「동백꽃」

(라)

우리는 보통 다른 존재의 행동(언어적 행동까지 포함해서)을 관찰함으로써, 그 존재가 의식을 가지고 있고 생각을 하는 존재라는--즉 또 다른 마음을 가진 존재라는--판정을 내린다. 우리는 신체의 상해와 신음 소리에서 고통을 추론하고, 미소와 웃음에서 기쁨을 추론하며, 날아오는 눈덩이를 피하는 행동에서 지각이 있음을 추론한다. 그리고 환경을 복합적이고 적절하게 이용하는 것을 보고 욕구와 의도와 믿음이 있음을 추론한다. 또한 우리는 위에서 언급한 행동들과 언어 발화로부터 그 존재의 의식적 지능을 추론하는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추론들이 어떻게 정당화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되면, 문제점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특정한 유형의 행동으로부터 특정한 유형의 심리 상태를 추론한다는 것은, A라는 유형의 행동과 B라는 유형의 심리 상태 사이에 일반적인 연결 관계가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그런 심리/행동의 일반화는 “천둥 소리가 들린다면, 근처 어딘가에서 번개가 친 것이다”와 같은 경험적 일반화와 동일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아마도 그런 일반화는 현상들 사이의 규칙적 연결 관계에 대한 과거 경험을 통해 정당될 것이다. [...]

그러나 심리/행동을 일반화하는 경우,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연결 관계의 한쪽, 즉 행동밖에는 없다. 그렇다면 그 일반화가 다른 존재들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다는 우리의 믿음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는가? 만약 어떤 존재가 일정한 심리 상태에 있다고 한다면, 그 존재의 심리 상태는 오직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직접적으로 관찰될 수 있다. 우리는 그의 심리 상태를 관찰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일반화에 필요한 경험적 증거를 모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런 심리/행동의 일반화를 믿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러므로 다른 존재의 행동을 보고 그가 어떤 심리 상태에 있다고 추론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나는 나 자신을 제외한 어떠한 다른 존재에 대해서도 그 존재가 어떤 심리 상태에 있다는 믿음을 정당화시킬 수 없는 것이다.

-폴 처칠랜드, 『물질과 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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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페명 : [논]술은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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