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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원폭투하 때문에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찾기는 했지만 우리 독립부대는 이미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원폭투하가 없었다면 어찌 되었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일본은 막다른 골목에 쳐해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무장독립투쟁은 불가피한 방법이었고 그래야만 했습니다. 강도가 집을 침입해서 폭행을 가하는데 가만히 있으면 안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2018.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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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의 민족해방운동
이시대는 독립운동 성격이 2가지로 대분 합니다
독립하기에 아직 부족하니 실력양성을 한다음 자주독립 하자는것과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은 전국적인 운동이었지만일제의 탄압 때문에 많은 희생자를 내고 실패하자 김원봉은 평화적인 운동으로는 안되고 일제에 항거 하려면
무력투쟁이 있어야 한다며 신흥무관학교 출신 윤세주•이성우•곽경•강세우•이종암•한봉근•
한봉인•김상윤•신철휴•배동선•서상락•권준 등과 의열단을 조직 단장을 맡았다.
의열단(義烈團)의 지침 활동은 7가살(可殺), 5파괴(破壞)다
7가살(可殺)은 아래 일곱 부류를 암살 대상으로 삼았다.
①조선총독부 총독 이하 고관
②일본군부 수뇌
③대만 총독(당시 대만도 일제치하)
④매국노
⑤친일파 거두
⑥적의 밀정
⑦반민족적 귀족 및 대지주
5파괴(破壞)는
①조선총독부
②동양척식주식회사
③매일신보사
④각 경찰서
⑤왜적의 주요기관
을 파괴 대상으로 삼았다.
악질적인 친일파 제거
일본의 고위관료 암살
식민지 통치의 중요한 시설을 폭파 함으로서
일본의 식민통치 기반을 흔들리게 하자는 목적이었다.
의열단 주요거사
1920년 9월 14일: 박재혁이 부산 경찰서에 들어가 경찰서장을 폭사.
1920년 12월 27일: 최수봉이 밀양경찰서 소속 모든 경찰이 모인 가운데 폭탄을 투척.
1921년 9월 12일: 김익상이 조선총독부 청사에 들어가 폭탄을 던졌다. 폭발로 청사 일부파손.
1922년 3월 28일: 김익상, 이종암, 오성륜이 상해 황포탄 부두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암살하려다 체포. 오성륜 의사는 가까스로 탈옥하고, 김익상 의사는 1943년 처형되었다.
1923년 1월 12일: 김상옥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
1924년 1월 5일: 김지섭이 도쿄의 궁성 정문 앞 이중교에서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
1924년 6월 1일: 김병현, 김광추, 박희광이 친일파 정갑주와 가족을 사살.
임시정부의 백범 김구도 의열단에 자극을 받아1931년 <한인 애국단>이라는 항일 무력 독립운동단체를 창설했다.
<한인 애국단>은 창설과 함께 매우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이봉창, 윤봉길 의사도<한인 애국단> 소속이다.
김구와 김원봉은 사상적인 노선이 달랐지만 두 사람은 공동으로 동포에게 보내는 공개통신문을
발표하는 등 연합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두 사람이 소망한 것은 오로지 조국독립뿐이었다.
2018.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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