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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경남에도 독립운동이 일어났었나요???
비공개 조회수 263 작성일2014.06.04
일제감정기시대에 경남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을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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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46위, 역사학 52위, 동양사 54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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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의열단원인 최수봉과 박재혁이 각각 밀양경찰서와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의거가 있었습니다.

 

부산경찰서폭탄투척의거

의열단에서는 1920년 초 일명 ‘진영사건(進永事件)’ 등으로 인하여 많은 동지들이 계속 부산경찰서에 붙잡히자 이에 대한 보복을 하기 위하여 이를 계획하였다.

의열단장 김원봉(金元鳳)은 무역상인으로서 싱가포르에 와 있던 단원 박재혁을 상해(上海)로 소환하여 부산경찰서장을 죽일 것을 지시하였다.

박재혁은 1920년 9월 초 상해를 떠나 나가사키(長崎)로 향하였다. 그는 상해를 떠나기 전 부산경찰서장이 고서수집가라는 사실을 탐지, 많은 중국고서를 사들여서 고서상으로 위장하였으며, 그 고서더미 속에 폭탄과 전단(傳單)을 감추었다.

그는 나가사키에서 대마도(對馬島)를 거쳐 9월 13일 고향인 부산에 도착하여 자기집에서 하룻밤을 지낸 뒤, 이튿날 아침 부산경찰서를 찾아가 서장에게 면회를 요청하였다.

고서에 관심이 많은 서장은 쾌히 면회를 승낙하였다. 박재혁은 서장과 단독으로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대좌하여 고서를 보여주는척하다가 폭탄과 전단을 꺼내어 전단을 서장 앞에 뿌리고, “나는 상해에서 온 의열단원이다.”라 하고, 계속하여 서장의 죄를 일일이 열거한 다음, 폭탄을 서장 앞에 던졌다.

폭탄이 터지자 두 사람은 모두 중상을 입고 쓰러졌다. 박재혁은 그 뒤 단식과 함구로 9일을 버티다 순국하였고, 서장도 중상을 입어 죽었다.

 

밀양경찰서폭탄투척의거

최수봉은 당시 나이 24세로서 밀양군 상남면 마산리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1920년 11월밀양군 상남면 기산리에 거주하는 김상윤(金相潤)을 만나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권유받고 응낙하였다.

이에 김상윤은 최수봉을 대구부(大邱府) 근처에 거주하는 김원석(金元錫)에게 소개하였다. 김원석은 최수봉에게 독립운동의 기세를 올리기 위하여 밀양경찰서를 파괴하고 일본경관을 살해할 것을 지시, 12월 26일 그에게 폭탄 2개를 줌으로써 이튿날 거사를 결행한 것이다.

12월 27일 오전 9시 30분경 최수봉은 먼저 서장의 훈시를 듣기 위하여 서원들이 모여 있던 밀양경찰서 사무실 안에 창문 밖에서 폭탄 1개를 던졌다. 이 첫번째 폭탄은 순사부장의 어깨에 맞고 탁자 위에 떨어졌으나 불발되었다.

이어서 현관쪽에서 폭탄을 복도쪽으로 던졌다. 이 두번째 폭탄은 폭발하였으나 일경들 가운데 특별한 사상자는 없었다. 폭탄을 던진 최수봉은 일제경찰의 추격을 받아 붙잡히고 말았다.

이 사건 직후 김상윤·김원석은 도피하여 붙잡히지 않았는데, 김원석은 1925년 자금모집을 위하여 입국하였다가 붙잡힌 의열단원 양건호(梁建浩)의 취조를 통하여 양건호와 같은 사람임이 밝혀졌다.

즉, 양건호·김상윤 등은 안학수(安鶴洙)의 소개로 일찍이 국외에서 폭탄제조법을 습득한 고인덕(高仁德)에게 폭탄제조법을 배워 폭탄을 제조하여 이 사건을 일으켰던 것이다. 최수봉은 대구복심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마침내 교수형을 당하였다.

2014.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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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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