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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1906~1945년까지의 무장독립 투쟁좀 알려주세요..ㅠ(내공70)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3,135 작성일2010.10.29

안녕하세요 ㅠ 꾸벅 중3입니다.

국사 탐구280쪽에 있는 게 숙젠데요... 처음엔 좀 만만해보이던데... 14개정도가 있다고 하시던구요... 국사선생님께서요

 

일단 지역은

시모노세키 에서 꼭 하나 있다고 하셨고요...

한성, 평양 , 대구 등에  있다고 하네요.

 

일단 봉오동전투랑 청산리대첩이랑 이봉창(도쿄- 사쿠라다몬사건)이랑 윤봉길(상하이 도시락폭탄사건)이랑 강우규(사이토총독 폭탄투척), 김익상, 김상옥, 나석주, 13도창의군 서울진공작전(이인영),박재혁, 최수봉, 박열

이정도 쯤을 알고있습니다., ㅠㅠ 2개 정도 더알면 돼는데요 ㅠ

 

1. 광주, 대구, 시모노세키에서 일어난 무장 독립 투쟁이 있으면 알려주세요 ㅠ

 

2. 그리고 조선의용대가 광주에서 한번 일본군과 싸운 거라고 어떤 사람한테 들었는 데 사실인가요?

 

3. 보천보전투, 흥경성, 영릉가성전투, 대전자령전투도 알려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4. 마지막으로 , 정미의병때 13도창의군 서울진공작전빼고 다른 대표적인 의병활동이 있으면, 지역과 의병장과 전투이름좀 알려주세요 ㅠㅠ

 

단 .. 알려주실때 죄송하지만 년도랑 지역이랑 의병장(대표한명), 전투명이나 사건 이렇게 알려주시면 감사드립니다.  ㅠㅠ 많은 것 요구해서 죄송합니다 ㅠ

 

참고로 ,,, 필요없는 내용이랑 중복된 내용올리시면 안받아요 ㅎ

 

다음주월요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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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별 차이는있지만 질문순서대로 답합니다

 

서울진공작전

미군OSS의 광복군과 함께 서울진공작전입니다 일명 독수리작전(Eagle Project)'을 매개로 하여 1945년 5월부터 4개월 과정으로 훈련이 실시되었던바, 이무렵 서안에 있던

2지대와 부양에 있던 제3지대가 훈련을 받아 제1기생 훈련이 8월 4일 완료되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일제가 일찍 항복하여 국내진입작전이 좌절되었다

 

일본 동경 시모노세키 독립운동

일본 동경유학생들이 1919년 2월 8일 조선청년독립단의 명의로 독립선언을 하자 시모노세키 거주 조선인과 학생들이 독립운동 결의

 

 

조선의용대

조선의용대는 만주지역거점으로한 무장독립단체 입니다 중국팔로군과 연합세력입니다

 

1938년 10월 10일 조선의용대는 중국 우한에서의 민족혁명당을 중심으로 결성된 연합체인 조선민족전선연맹의 무장 세력으로 창설되었다. 1941년 초 조선의용대의 주력부대원들은 일제와의 직접적인 무장투쟁 수행과 중국 국민당의 반공정책에 회의를 느껴 황하를 건너 중국 팔로군주요 근거지인 섭현과 좌권현 일대의 타이항산으로 북상하였다.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1941년 7월 7일 현지에서 활동하고 있던 한인청년들과
함께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조직하였다.(1942년 7월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됨) 이후 조선의용군은 중국 공산당 팔로군의 지원 아래 적극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고, 중국 팔로군과 함께 유격전을 펼치면서 이곳을 항일투쟁의 주요 거점으로 삼았다.

 

보천보 전투

1937년6월 4일만주에서 활약하던 동북항일연군소속의 김일성부대가 국내진공하여 량강도보천군보천읍{(보천보)(해방전 명칭:혜산군 보천면 보전리)}를 일시적으로 점령하고 퇴각한 사건이다.

 

보천보 내의 지하조직으로부터 소수의 경찰병력이 느슨한 경계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김일성은 100여명의 병력으로 급습했다. 보천보에 진입한 유격대는 일본의 각종 행정기관과 경찰 주재소에 방화하고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하고 식당과 부자집을 돌며 군자금을 강탈했다. 일본경찰은 모두 도주해서 쌍방의 피해는 없었고, 민간인 사상자로 일본인 요리사 한 명과 유탄에 맞아 숨진 갓난아기 한 명이 있었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항일유격대는 토벌대가 출동하기 전에 보천보를 빠져나와 만주 방면으로 도주했다.

 

 

영릉가성전투

양세봉장군이 지휘한 전투입니다

 

1932년 한·중 연합군이 일본군 점령 아래 있던 만주 영릉가성을 공격하여 탈환한 전투. 1931년 일본군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석권하고 독립군 기지를 공격하자 국민부의 양세봉(梁世奉)이 지휘  승리

 

대전자령대첩 (大甸子嶺大捷)

1933년 한중연합군(韓中聯合軍)이 일본 이즈카[飯塚] 연대를 전멸시킨 싸움.
만주 노송령(老松嶺)에 주둔하고 있던 연합군은 이즈카연대가 이동하는 것을 미리 알고, 독립군 2500명, 중국군 2000명을 대전자령에 잠복시켰다가 4시간 동안의 싸움 끝에 적을 전멸시키고 군복 3000벌, 박격포 5문(門), 군용물자(軍用物資) 20마차, 담요 3000매, 평사포(平射砲) 3문, 소총 1500정 등의 전리품(戰利品)을 노획하였다.

13도 창의군(十三道倡義軍)1

구한 말이은찬(李殷瓚)·이구재(李九載)·이인영이 계획한 각 도의 의병군이 모여 서울로 진격하여 주권 회복을 달성하기 위해 편성한 의병부대이다.

전국에서 창의대장 문태수(文泰鉉), 이강년(李康秊), 민긍호(閔肯鎬), 허위 등 각 도를 대표하는 수많은 의병장과 그에 따르는 약 1만여 명의 의병, 해산군인들이 모여 서울 탈환 작전을 벌였으나 일본군에게 사전에 발각되어 남대문 밖 30리까지 진격하였다가 전투에 패배하였다. 비록 실패했으나 한국 독립운동 사상 가장 큰 규모의 의병운동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홍범도(함경도)와 김수민(중부 지역), 신돌석(경상도) 등 평민 출신의 의병장이 이끄는 부대들을 연합군 조직에서 제외하였으며, 총대장 이인영이 작전 중 부친상을 이유로 부대에서 이탈해 도피하는 등 현대적인 기준으로 볼 때 명령체계가 없는 조직입니다.

 

 

 

 

2010.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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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자가 채택한 답변입니다.

  • 출처

    나/한국근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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