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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죽고싶은데 살고싶어요....
byeo**** 조회수 2,617 작성일2018.06.29
부모님이랑 서로 이혼했습니다.지금은 아빠랑 살고 있는 상태이고 언니도 있습니다.근데 3학년 때부터 아빠는 크리에이터.게임프로그래머.요리사라는 꿈이있는 있는 저에게 이렇게 말하더 군요. 그 꿈말고 경찰하제요.일단 오케이 했는데 이게 저를 괴롭혀요 맨날 1등 하자 00(이름)야 공부 못하기만 해봐라 나랑 인연 끊는거야 그러고 친구올때 마다 얘 공부 잘하냐? 반에서 몇등 하는 것 같아?(지금 나이 초6) 얘 공부 못 하지? 물어보면 괴롭더군요.
저에게 관심도 없어요. 아빠방에 들어가면 나가라고 하고 밤에는 괴롭히다가 그래요.그러고 돈만 주시지 학원도 제가 알아봤고 옷도 제가 사고 그럽니다.저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도 안았죠.그러면서 많은 걸 바라내요.저 공부 못하는 편도 잘하는 편도 아닙니다.그러고 중학생 부터는 공부만 시킬거라하고 고등학생은 경찰학교 가닐거라 하더군요 그러고 3학년 부터는 태권도 다니다가 너무 힘들어서 사정사정 해서 힘들게 그만 둔거예요.애들은 중학교 고등학교 어디 갈까? 마음대로 갈수 있는데 저만 정해져 있군요.그러고 반에서 친구들이랑 사이가 안 좋은데 언제 뭔 사건이 터져도 그걸 아빠에게 안 말씀드리다가 언제 한번 말씀 드렸는데 화내면서 학교 찾아간다면서 그래서 두번다시 말을 안했어요. 그래서 화를 참을때가 많죠 ㅎ 언니에겐 관심이 없고 저에게만 압박을 많이 가해요. 맨날 울면서 죽고싶다고 살고 싶은데 노력해도 안 된다고 나는 고등학교가기전에 끝이라고 생각해요.
맨날 내 목 조르고 칼 손목에 찌를까 망설이고 숨도 참아보고
옥상에 올라가보고 가출할까 생각하고
근데...........어떻해요.....







살고싶은데..........살고싶어서 살고싶어서!나에겐.....
그게 어려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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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절하고 죽고 싶을때 헬렌켈러를 생각하라

내마음속에 좌절과 실망이 느껴질때 헬렌켈러를 생각하라.
극복할수 있는 방법과 용기가 살아 날것이다.





그는 비록 눈과 귀가 멀고 말도 할수 없었지만, 책을 써내어 그녀보다 훨씬 운이 좋고 건강한 사람에게 힘과 용기를 주었다. 이와같이 헬렌켈러의 일생은 신체적인 장애를 극복한 인간정신의 승리를 단적으로 보여준 대표적인 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지 수십년이 지난 오늘에도 그녀의 삶은 장애인들에게는 희망의 등불이 되고 있다. 따라서 운명이 당신에게 너무 가혹하다 느껴지면 주위를 둘러보고 헬렌켈러를 생각하라. 그러면 당신은 얼마나 행운아인지 알게 될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인생계획에 아무런 대가 없이 사회에 공헌하는일을 포함시켜라. 돈뿐만 아니라 시간과 노력을 사회에 바친다면 사회와의 관계도 견고해지고 사려깊은 행동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게되고 인간의 노력에서 결의가 얼마나 큰힘을 가진지도 깨닫게 될것이다.

다시말하면 우리의 모든성공의 열쇠는 자기안에 있다는 사실에 공감하게 될것이다. 모든장애는 극복의 대상일 뿐이지 나에게는 전혀 장애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훨씬 가벼운 마음으로 미래를 볼수 있고 성공의 계단을 밟아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내마음속에 좌절과 실망이 느껴질때 헬렌켈러를 생각하라.
극복할수 있는 방법과 용기가 살아 날것이다.

 


오체불만족’ 오토다케, 교사로 새 인생 연다

오체불만족’의 저자 오토다케 히로타다(乙武洋匡)씨가 초등학교 교사로 새 인생을 시작한다.

▲ 오토다케씨가 교사 면허증을 들어보이며 환하게 웃고 있다.오토다케씨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이 사진과 함께 최근 동향을 게재했다. 오토다케씨는 올 4월 일본의 한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한다고 19일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밝혔다.현재 스포츠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오토다케씨는 2년 전부터 대학에서 통신교육으로 교원시험을 준비해왔으며 올 2월 시험에 합격해 교원면허를 취득했다. 오토다케씨는 “마침내 초등학교 교사 2종 면허를 취득해 기쁘다.”며 “가족과 친구,교육실습생으로 받아준 초등학교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또 “지금부터 다시 시작이다.”는 말로 새 인생을 출발하는 각오를 다졌다. 오토다케씨는 명문 와세다대학출신으로 그의 저서 ‘오체불만족’은 일본에서 500만부의 판매량을 기록하는 공전의 기록을 세웠으며,한국에서도 1998년 출간돼 뜨거운 주목을 받았다.양팔과 양다리가 없는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좌절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 한편,긍정적인 생활신념과 시각이 깃든 일화들을 소개했다. 특히 ‘장애는 불편하지만 불행하지 않다’는 교훈과 함께 장애인들에게는 희망을,일반인들에게는 감동을 안겨주었다. 디지털 콘텐츠팀 주미옥 기자 toyobi@seoul.co.kr

 

  오토다케 히로타다는 1976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태어나면서부터 팔다리가 없었고, 성장하면서 10Cm 남짓 자랐다. 그런 팔다리로 달리기, 야구, 농구, 수영 등을 즐기며 초,중,고등학교를 마쳤고  일본의 명문대학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 정치학과에 졸업. 그는 자신의 장애를 단순한 '신체적 특징'이라 주장한다. 자신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팔다리가 없는 나만이 할수 있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마음의 장벽 없애기 운동'에 매진하고 있다.

 

 


꿈꾸는 토르소맨

팔다리 없는 운명에 맞서 승리한 소년 레슬러 이야기!

 KBS 스페셜 제작팀 지음 | 최석순 감수 | 글담

 

혼자 밥을 먹는데 2년, 글씨 쓰는데 5년,
그런 그가 레슬링에 도전했다. 사람들은 그를 ‘기적’이라 부른다.

더스틴 카터는 다섯 살 이전만 해도 누구보다 건강하게 뛰어노는 천진한 꼬마였다. 그러던 그가 갑작스럽게 혈류에 바이러스에 감염되었고, 그로 인해 괴사되어 가는 팔다리를 잘라내야 했다. 하지만 더스틴의 부모는 아들의 목숨을 살린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그리고 더스틴이 스스로 모든 일상을 영위할 수 있기를 바랐다. 더스틴은 수년의 시간이 걸려 혼자 밥을 먹게 되었고, 화장실도 가게 되었다. 그리고 의족과 의수를 거부하고 더스틴만의 ‘신체 사용설명서’를 하나씩 완성해 나갔다. 하지만 더스틴도 사춘기를 맞았다. 학교에 적응을 못했으며, 성적은 엉망이었다. 친구도 없이 감자칩이나 먹으며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는 것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그런 그가 우연히 형을 따라 레슬링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레슬러가 되겠다는 꿈을 갖는다.
레슬링을 하고부터 더스틴은 변화되어 갔다. 짧은 팔로 덤벨과 바벨을 수십 번씩 들어 올리고, 수영으로 체력을 단련했다. 특별히 고안된 기구로 엉덩이 힘과 팔 힘을 길렀고, 방어형 선수가 아닌 공격형 선수가 되기 위해 짧은 팔다리를 이용한 기술들을 고안해 냈다. 이 모든 것은 비장애 선수들과 동등하게 겨루기 위한 그만의 굳은 의지에서 비롯된 거였다. 물론 더스틴은 절친한 친구들도 많이 사귀게 되었고, 학교 성적도 향상되었으며, 고등학교도 무사히 졸업하여 대학까지 갈 수 있었다.

2008년 봄, 오하이오 주 고교 레슬링 대표선수권 대회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팔다리가 없는 장애 소년이 일반 비장애 선수들과 동등한 경기를 치러 멋진 승부를 보여 준 것이다. 소년의 이름은 더스틴 카터. 오하이오 주 힐스보로 고등학교 3학년이다. 더스틴은 3학년 한 해 동안 42승 4패라는 놀라운 전적을 이루었다. 그는 아쉽게 오하이오 주의 대표선수는 되지 못했지만 전 관중과 심판, 선수들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운명이 그를 넘어뜨리면 언제든 그는 다시 일어섰다!
장기적인 경제 불황에 삶의 의욕을 잃은 사람들이 많다. 또한 ‘청년백수’란 말이 슬픈 꼬리표가 되어 한껏 어깨를 움츠리고 있는 것이 요즘 젊은이들의 현실이다. 그들은 아마도 이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고.”“왜 내 인생만 이렇게 힘든 거냐고.” 하지만 더스틴은 예측할 수 없는 인생의 불행을 비켜 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그는 신을 원망하지도 않고, 팔다리가 있던 때로 돌아가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라고 해도 때론 과감히 도전해야 하는 게 인생이란 것도 안다. 더스틴에겐 늘 운명이 맞서고 있었다. 그는 그것이 살다 보면 생길 수 있는 당연한 일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늘 다시 일어설 마음의 준비를 한다. 운명이 그를 넘어뜨리면 언제든 다시 맞설 수 있도록!
 

 

인상깊은 구절 및 본문중에서

 

포기하지마라 항상 방법은 있다 --- 북로그리뷰중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지 할수 있다 --- 본문중에서

 

더스틴은 "장애를 장애로 받아 들이지 않고, 그저 조금 다른 조건을 가졌을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더스틴에게 장애는,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고, 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실제로 해냈으니까요. --- 본문중에서

 

이건 단순히 팔다리가 없는 소년의 성공 스토리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존재 자체가 희망일 수 있다는 걸 말하는 겁니다.” --- 본문 중에서

“더스틴은 알게 된 겁니다. 창 하나가 닫히면 다른 창이 열린다는 것을. 기회는 늘 찾아오기 때문에 우리들은 물러앉아 슬퍼하고만 있어선 안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 본문 중에서

 

사람이라는 존재는 누구나 굉장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더스틴은 남들보다 불편한 몸으로 그걸 보여 줬죠.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 힐스보로의 작은 마을, 학교, 레슬링 팀 그리고 더스틴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에게까지 더스틴은 그걸 보여주고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이건 단순히 팔다리가 없는 소년의 성공 스토리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존재 자체가 '희망'일 수 있다는 걸 말하는 겁니다. 누구나 남들이 짐작하지 못할 일들을 해낼 수 있다는 걸 보여 주는 거죠. 이건 아주 굉장한 이야기고, 저는 이렇게 완벽한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p.143)

 

"맨살이 매트에 부딪치면 피가 나니까 다리 끝에 늘 테이프를 감아요. 하지만 아무리 꼼꼼히 두껍게 감아도 몇 번만 움직이고 나면 벗겨져 버립니다. 다시 감기도 하지만 그러면 흐름이 끊어져서 별로 안 좋아요. 그래서 대부분은 맨살로 경기를 하게 되죠. 그러면 어김없이 살갗이 벗겨져 피가 나죠. 제가 조금이라도 피를 흘리면 심판은 즉각 경기를 중단시켜요. 전 그것처럼 못마땅한 일이 없어요."196P  

 

“팔다리가 있는 삶을 상상해 본 적이 없어요. 누군가 저에게 다시 팔다리가 있는 삶으로 돌아가라고 한다면 저는 싫다고 할 거예요. 팔다리가 없어도 저는 모든 일상생활을 불편 없이 누릴 수 있으니까요. 오히려 팔다리가 있으면 더 불편할 것 같아요. 아마 굉장히 낯설어할 것 같은데요. 저는 지금이 행복해요. 존재하는 것, 그 자체에 감사해요.”(226쪽) 

 

세상 모든 사람들 중에 왜 나만 이런 인생을 사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어요. 하지만 그런 내 인생을 원망해 본 적은 없어요. 어렸을 때 그 일은 그냥 일어난 일이에요. 누구도 원망할 수 없는 일이죠. 심지어는 신조차 원망할 필요 없어요. 운명은,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서 많이 달라지는 것 같아요. 누군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든, 누군가에게 어떤 것을 빼앗아 가든, 그 사람에게 어떤 일이 생기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걸 받아들이는 그 사람의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223쪽)

 

 

토르소[ torso ]

 인체 의 구간(

軀幹), 몸체[胴體]를 뜻하는  이탈리아어 에서 연유된 조각용어이다. 그리스·로마의  유적 에서 발굴된 토르소에 조각으로서의 미를 인정한 근대의 조각가들은 토르소에 의하여  인체 의 미를 상징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현대조각에서 때때로 볼 수 있는 팔·다리나 목이 없는 몸통의 조각은 미완성 작품이 아니다. 더욱이 토르소의 미를 순수화하기 위하여 목이나 팔·다리를 생략하고  인체미의 상징적인 효과를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문제 해결의 방법


 1.무엇이 ...어떤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를 직시

하여 그 문제를 바라 봅니다

 

2.문제에 묶여 있지말고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무슨 문제든지 그 문제에서 벗어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문제에 묶여 있으면 문제를 제대로 문제를 인식 할수

없습니다

 

 

3.문제를 다시 한번 바라 봅니다

그 문제에서 벗어난 마음으로 그 문제를 바라봅니다

문제의 실상이 그대로 드러날 것입니다

 

4.문제를 최선의 선택에 따라 최고의 판단을 합니다

크게...멀리...전체...를 보고 내가 누군지 나의 위치가

어딘지 나의 현실이 어떤지 나의 상황이 어떤지 보면

나의 갈길을 알수 있습니다

 

5.문제를 가장 좋은 방법으로 판단하고 그 방법을 실천

하고 행동으로 옮깁니다 앞으로 어떻게 변화 될것인지

를 보고 그 것이 옳은 일인지 잘못된 것인지를 판단

합니다


6.자기성찰의  시간을 갖고 기도를 많이 합니다  


 출처 : 네이버, 서울신문, KBS, 예스24, 인터넷

2018.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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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기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이걸 듣고 님의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들어는 보세요. 

1. 고통에 한계가 있다. 그러니깐 운명을 조율하는 존재가 있어서 한도가 있는 고통을 가지고 이리 저리 주어서 사람을 만들어낸다는 거에요. 이건 하느님을 믿으면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하느님이 고통을 무한대로 주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냥 한번 쯤 생각해보는 거에요.

2. 그런데 지금 님이 고통을 집중적으로 받고 있잖아요. 그러면 앞의 1번에 따르면 고통이 이후에는 적어질 수 있다는 거죠. 청소년기에 고통을 받았으니 청년기나 그럴때 잘 풀릴 날이 있다는 거죠. 

3. 나쁜거 부터 받고 좀 있으면 좋은 거 받을 수 있는데 죽는건 아깝지 않아요?

4. 나중에 잘 될거라고 믿고 조금만 참아봐요. 

 이건 제가 믿는 거에요. 읽어보시고 싶으시면 읽고, 읽기 싫으시면 읽지 마세요.

1. 하느님은 존재하신다. 
하느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시고, 우리에게 오감을 제공하고 주시는 분이시며, 세계 어디에나 편재하신 분이십니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가끔 말합니다. 하느님은 어디에 있느냐고 말입니다.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믿느냐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모든 것에 얽메이지 않으십니다. 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장소에 얽메인다는 뜻이고, 시각으로 항상 볼 수 있다는 것은 시각에 얽메이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다른 감각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은 따라서 우리가 보고 싶을 때 볼 수도, 없고, 감각을 느낄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을 보여줄 수도 없고, 형태를 나타낼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믿게 되었느냐?  
그것은 하느님은 오감을 주시는 존재이시기 때문에 
언제든지 우리에게 오감으로 존재하심을 드러내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보고서 알 수 있을 까요? 단순히 특이한 현상으로 치부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현상을 보고 하느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현상과 동시에 하느님이 존재한다고 믿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게 그냥 착오로 믿는 것과 어떻게 다르느냐고요? 
만약 세상이 그냥 있는데, 그냥 있는 세상에서 하느님이 있다고 자주 일어나지 않는 착오한다는 것 을 생각해봅시다. 가능성이 얼마 있을까요? 우리는 착오를 많이 할까요? 올바른 판단을 더 많이 할까요?
그냥 있는 세상에서 아무 거나 마구 착오하고 다닌다면 사람들이 제대로 살 수 있겟습니까? 판단은 죄다 틀리지, 판단이 틀리니 행동도 잘 안되는 것 아니곘습니까? 그냥 있는 세상에서도 착오할 가능성이 적습니다. 
또한 중요한 것은 착오는 대부분이 그것이 착오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차립니다. 만약 착오가 착오라는 것을 우리가 몰랐다면 착오라는 말 자체가 있질 않았을 겁니다. 그냥 착오된 상태로 바보 같이 살아갈 뿐이죠. 우리는 착오를 알아차릴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착오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겁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착오를 알아차리긴 커녕 믿음을 더 굳건히 유지하며 하느님이 없다고 생각 될 때의 관점에서 볼 떄 보기에 손해를 보는 행동임에도 하고 살아갑니다. 믿는 사람의 믿음을 보고 우리는 하느님의 존재함을 알 수가 있으며, 무엇보다 우리는 하느님의 허락을 받으면 얼마든지 믿음을 가질 수 가 있습니다. 

2. 하느님은 사람들을 사랑하신다.(믿음) 
 그러면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것이 어떠한 유익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 일찍이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라는 진리를 가져다 준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들ㅍ이 남긴 신약의 성경에서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려주시고, 천국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의 증거로서 스스로 십자가를 메시고 죽었다가 부활을 함으로써 증거하셨습니다. 이것은 어느정도 약간의 논리적인 건너뜀이 있을 지 모르는 생각으로서 뒷받침 할 수 있습니다. 먼저 
하느님이 왜 창조를 하셨는지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때 창조의 이유를 댈 때에 중요한 것은 창조 이전에 우리가 아는 모든 개념이 없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모든 이유 중 가장 원초적인 이유 만이 정답이 될 수가 있습니다. 좋아서. 그냥 하고 싶었다. 등의 이유를 말입니다. 이제 하느님의 능력으로 넘어갑시다. 하느님은 어떠한 능력을 갖추고 있을까요? 이것도 창조 이전에 우리가 아는 모든 제약의 개념이 없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하느님은 창조 이전에 전지전능 하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다음으로 이 세상과 하느님의 창조 행위에 대해 이해를 해봅시다. 이 세상은 매우 정교한 세상입니다. 풀 잎 하나만 봐도 그 정교함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창조하셨을 때에 아무것도 없어서 모든 것의 창조자라는 것이 하느님의 정의라고 말하였습니다. 만약 하느님이 자신의 창조물을 마구 파괴하고 다시 돌이키고를 반복하시는 분이었다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을까요? 물론 그렇게 하실 수도 있겠지만 그랬다면 세상은 다람쥐 쳇바퀴를 돌듯이 계속 파괴와 창조를 반복했을 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기억조차 창조된 것이니깐요. 하느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모든 것을 의미있게 하셔서 이 세상을 만들어 나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정교한 세상이 된 것입니다. 이제 이것을 우리 인간에게 적용해 봅시다. 인간이 죽습니다. 그리고 그 존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그것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인간 모두가 죽은 후에 그 문명이 어떤 의미를 가지겠습니까? 하느님은 존재하시고, 죽음이 존재하는 세상은 그 모든 것이 의미있게 하신 것에 어긋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남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후 세계를 유추할 수 있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닐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것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인간  이 스스로 죽음을 원하게 되는 일은 언제입 니 까? 그건 항상 생이 불행할 때일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은 생이 항상 불행하게끔 되는 것을 싫어하신다고 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야 다른 창조들처럼 의미가 있게 된다고 할 수 있으니깐요. 이것은 모두가 동일할 것입니다. 모두의 일생이 항상 불행하게끔 되는 것을 싫어하신다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마다 죽음을 원하게 되는 항상 불행의 관점은 다릅니다. 행복과 불행의 기준은 딱 가를 수가 없으며, 하나의 일직선의 형태로 나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냥 죽음을 원하게 되는 불행의 반대말이 행복이고, 그 행복으로 조금 더 나아갈 때 하느님의 뜻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을 고치면 모두가 행복한 세상으로 다가가고자 할 때에 하느님의 뜻에 부합한다. 라는 것입니다. 

3. 자유 의지와 하느님.
 하느님은 오감을 주신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우리의 실체에서 벗어난 일종의 우리가 상호작용하는 세계라는 대상을 주는 창조자라는 뜻에서 그것을 유추한 것입니다. 시각을 잃었다고 해서 하느님이 오감을 더 이상 주지 않으니  그 사람을 버렸다 라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그와 하느님은 상호 작용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달리 말하면 오감이 아니라 상호작용을 할 수 있는 세계를 제공하고 계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그러한 세계 속에서 인간은 무엇이냐?라고 생각해봅시다. 예수 그리스도 께서는 우리 인간을 하느님의 자녀라고 말하였습니다. 하느님을 닮았다고요. 
이 주제는 너무 무거워서 상대적으로 좀 머리가 부족한 저로서는 명확히 답을 내리기가 힘듭니다. 이건 서구 철학의 기초가 되는 기독교에 관한 생각이지만 기초도 조금 어렵죠. 먼저 하느님이 세계를 창조했고, 하느님 뜻대로 세계가 운영되면 인간도 창조된 것이니 하느님의 꼭두각시나 로보트가 아니냐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일단 저는 조금 무식하니 인간은 하느님의 자녀라고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채택하고, 인간과 세계를 분리하죠. 세계는 하느님이 운영하시니깐 세계에 속한 것은 인간의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조정하는 것입니다. 세계와 분리된 인간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요? 하느님이 최초에 창조하였을 때에 무슨 이유가 남았다고 했죠? 좋다. 그냥 했다. 즉 선호가 남았습니다. 즉 인간에게 남은 것도 선호가 남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선호를 다른 말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소망입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요. 이제 하느님과 세계의 상호작용에 관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소망을 받아서 세계를 그려준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이 무엇이 될 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받아서 세상에 그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것저것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소망은 항상 잘 들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계는 하느님이 운영하시고, 우리는 그저 선호만 있는 존재에 불과하니깐요. 우리는 하느님이 오감과 느낌,직감,그 어떤것도 어떤 식으로 만들어내는지 모르고, 만들어낼 수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 시각으로 어떠한 도구도 사용하지 않고 아무런 의미도 부여되지 않는 단지 형체만이 조그마한 구라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죠. 우리는 세계가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몸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기기에 맞는 소망을 하면 하느님이 우리의 소망을 더 잘 받아주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앞서서 하느님의 뜻이 뭐라고 했죠? 모두가 행복한 세상으로 다가가고자 할 때에 하느님의 뜻에 부합한다. 라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모두가 알고 있는 기초적인 격언 하      나를 얻었습니다. "하늘의 뜻을 따르는 자는 흥하고 거스르는 자는 망한다", "선한자는 흥하고 악한자는 망한다." 악한자가 잠시 흥하게 보인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이 때까지 논의한 바에 따르면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논의한 것입니다. 

4. 그렇다면 왜 악한자는 흥할 때가 있는가?
 먼저 악이란 무엇인가?부터 고찰해봐야 합니다. 우리는 세계와 분리되어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선호 밖에 없으며 나머지 것은 세계와 합치 되어 일어난다고 하였습니다. 그럼으로 우리에게 있는 진정한 악은 소망을 바르게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소망을 누군가가 불행하도록 하는 것이나 그런 것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소망은 하느님이 보시기에 언제나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것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악한 소망을 가진 사람이 하는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그는 불행에 빠질 것이고, 죽        고 싶어질 것입니다. 그럼으로 그의 소망도 가끔 받아들여져서 우리에게 그렇게 비춰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이 직접 악한 소망을 하는 자를 고치시면 안되는가? 우리는 이미 고치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이 지식을 알려주면 되는 겁니다. 하느님이 방법을 마련해 준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면 언제든지 고칠 수 있습니다. 직접 말하기에 위험하다면 소망을 하면 됩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소망을 받으심으로 그를 고쳐줄 것입니다. 

5. 왜 하느님은 스스로의 의지로 모든 인간을 고쳐주지 않으시는가?
 하느님은 특정 인간을 고쳐줍니다. 저는 하느님을 믿게 되었고,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소망을 바르게 하면 소망을 더 잘 받아주신다는 사실도 알  았습니다. 처음부터 인간은 이런 지식이 탑재되어 나오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고쳐지지 않는 시간에서부터 얼마간 지나서 얻는 것입니다. 죽기 직전까지 믿지 못하는 사람도 죽은 이후에 믿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후 세계를 유추하였습니다. 우리의 삶이 연속 되고,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의 고침을 시간이 지난 후에 받았다면 다른 이들도 시간이 지난 후에 받을 수 있으며, 시간이 경과하는 도중에 죽음을 얻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정확한 것은 우리가 하느님이 아니기에 모르지만 우리는 우리의 경험과 앞 전의 추론을 통해서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은 것을 생각해보면 더 잘 알 수있습니다. 이러한 지식을 얻었다고 해서 더 오래 살거나 더 빨리죽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생과 사가 하느님이 믿게하여 고쳐줌이 무관하기 때문에 시간이 경과하는 도중에 죽음을 얻는 것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 시간이 언제가 되었든 모두가 알게 될일을 우리는 먼저 아는 것이고, 먼저 알려 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소망을 받아주시기 때문입니다. 
   
6. 신앙에 관한 지식은 보편적인 구원이 될 수 없지 않나요? 믿음만 있으면 구원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 아닌가요?
 앞서서 논의했을 때 우리에게 진정으로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논의한 적이 있습니다. 세계와 분리되어 우리에게 있는 것은 선호 뿐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이지적인 것들은 다 무엇이냐? 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 소유를 인정해주시고 우리를 특색있게 해주었지만 이것은 하느님이 주시고자 하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삶에 지적 장애를 앓는 사람이 있어서 이해를 하지 못한다고 합시다. 장애가 영원히 그에게 계속 있을 것 같습니까? 사후에도 말입니다. 지금의 세상은 뇌라는 개념이 있으니 뇌의 장애라는 개념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그 본인의 능력에 대한 선호가 있는데 뇌라는 개념이 없는 곳에서 소망을 계속 버려두실까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능력은 생길 것이고, 하느님을 믿고 소망을 바르게 하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을 배우는 과정을 거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신앙에 관한 지식과 믿음은 하나의 일치를 이룬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만 있고 아무런 지식이 없다면 우리는 그로부터 유익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지식으로서 앎으로써 그리고 그 지식을 추가적으로 믿음으로써 우리는 권선 징악에 관한 말을 사실로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지식이 없다고 해도 믿음으로써 성령께서 도와주시면 얼마든지 지식을 얻을 수 있을 것이고, 그럼으로해서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7. 세상의 고통은 우리의 영혼이 죽을 만큼 주어지지 않으며, 스스로 고난을 선택함으로써 운명을 선택할 수 있다.
 앞서 2번에서 하느님은 생이 항상 불행하게 되는 것을 싫어하신다고 논의하였습니다. 그럼으로 여기에서
우리는 세상의 고통은 우리의 영혼이 죽을만큼 주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가만히 있으면 세상이 정해주는 대로 고통과 쾌락이 지시하는대로 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쫓는 형태로 움직일 수 밖에 없지만 스스로 고난을 자처한다면 이러한 운명을 탈피하여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앞의 것이 운명이라고 합니다. 고통과 쾌릭이 지시하는 대로 움직여 도달하게 되는 사람의 삶을 말입니다. 스스로 고난을 자처함으로써 이러한 운명을 탈피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항상 불행하게 되는 것을 하느님은 싫어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행복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8. 어떤 사람은 항상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여 좋지 못한 삶을 살다가 죽고, 어떤 사람은 항상 원하는 것을 얻어서 성공한 삶을 살다가 죽습니다. 선한 삶과 상관없이 이렇게 일어나는 데, 그건 왜 그렇습니까? 모든 것은 하느님의 뜻에 달렸지만 기본적인 원칙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죽음으로 인해 우리가 관찰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할 수 있기에 그런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거지 나사로는 천국에 가고, 부자는 지옥에 가는 그런 일이 발생한다고 생각합니다. 

9. 천국과 지옥은 있나요? 사후세계에 관해서 알 수 있는게 있을까요? 저도 죽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모릅니다. 성경에 나오는 지식으로는 있다고 하지만 모릅니다. 저는 믿음이 약한 편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단지 하느님을 믿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천국을 있는 그대로 믿을지 모르지만 저는 그런거 잘 모릅니다. 단지 더 나은 세상과 더 좋지 않은 세상에 대해서 있다고 알수 있습니다. 일단 사후와 생전은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이 바뀔 테니깐요. 더 나은 세상의 끝이 천국이고, 더 좋지 않는 세상의 끝이 지옥이라면 더 나은 세상은 모두가 행복한 세상으로 가야 한다는 하느님의 뜻에 소망을 맞추면 모두가 행복한 세상으로 가는 데 가까워질 것이고, 그렇지 않는다면 모두가 행복하지 않는 세상인 지옥에 가까워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10. 앞의 것은 다 결함이 있을지 모르는 논리적 추론이지만 성경은 믿음으로써 비슷한 내용을 사실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정확히 저 내용인지는 몰라요. 제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 그냥 저건 제 생각일 뿐이니깐요.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태어난 하느님의 아들이시지만 신약에 나온 말들을 하고 그 말씀이 뜻하는 믿음을 증명해주시고자 사람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고 부활하셨어요. 그것을 믿으실 수 있으면  앞의 내용은 필요가 없을 거에요. 

더 자세한 것은 성경의 신약의 예수 님의 말씀을 읽어보세요.
거기에서 소망을 더 잘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구절 두개를 얻을 수 있어요. 끊임없이 요구하면 된다.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소망은 이어지기 쉽다. 등등 도움이 되는 기본적인 지혜가 있습니다. 현대 사회는 기      독교로 대표되는 서구 문화권에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이러한 지혜는 이미 삶속에 포함되어 있을 것이지만 앞에서 말한 것들도 많이 들어보셨겟지만 읽어보시면 묵상하시면 가장 기본적인 시각을 얻는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기독교 말고도 이것저것 많이 배워보세요.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당신에게 하느님을 믿는 믿음이 함께하길 기도드립니다. 



2018.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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