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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백선엽에 대해
wjsr**** 조회수 31,289 작성일2014.03.29
 백선엽에 대해 알려주세요 생애,주요사상,경력,본받을점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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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신
세계사 45위, 삼국지 30위, 역사학 86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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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선엽 白善燁. 1920.11.23~ (2011년 기준 92세)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 국군 장성들중 단연 최고의 능력을 보이며 거듭 승진을 거듭해 결국 초대 4성 장군과 전시의 참모총장 지위에 오르는 등, 한국전쟁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여러가지 업적을 이뤄낸 인물이다.

평안남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평양에서 지냈으며 이후 만주군관학교를 나와 간도 특설대에 배치되었는데, 이 부대가 항일유격대를 주로 상대하는 부대였다는 점에서 친일파로 평가된다.

이후 만주군 중위을 지내다가 해방 직후 한국으로 돌아왔고, 조만식 선생의 민족주의 운동에 참가 했다가 김일성과 공산당의 득세를 목격하곤 1945년 12월에 월남한다.

그 직후 군사영어학교를 마치고 국방경비대에 입대, 5연대장을 맡았다. 국방경비대가 정식 한국군이 된 이후에는 육군본부 정보국장으로 재직중이었으며, 이때 벌어진 여순사건 당시 공산 게릴라 소탕과 주동자 색출 및 처벌의 재판장이었다(박정희와 사법거래, 모든 정보를 다 부는 대가로 살려준다). 1950년 4월에 대령 계급으로 제1보병사단장이 되어 개성지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2 한국전쟁과 그의 전공

2.1 개전 초기 지연전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당시. 그는 서울에서 아내와 갓난 아이를 만나고 있다가 연락을 받고 급히 복귀해 사단을 지휘했는데, 그의 사단 담당지역은 북한군의 주 공격로 위에 있어 T-34 전차 등 북한군의 집중 공격을 받았음에도 부대를 유지하며 성공적으로 방어하고 있었다. 심지어 전차가 몰려오자 일부 병사들은 2차 대전 동안 벌어진 일본군의 육탄특공을 떠올려 폭발물을 들고 달려들어 저지하는 투혼을 벌였는데, 이는 지시한 적도 없는 상황에서 자발적으로 벌어진 것이라 사단장인 그도 숙연하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육군본부로부터 들려온 소식은 휴전선 전체에서 전면적인 공격이 가해져 1사단을 제외한 모든 부대가 일제히 후퇴중이며, 1사단도 퇴각하지 않으면 곧 포위될 것이니 퇴각하라는 명령이었다. 그로 인해 퇴각을 하지만, 그의 부대는 퇴각중에도 부대를 유지하며 퇴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회고록에 따르면 부대를 유지하며 퇴각한 것은 아니었다. 1사단을 제외한 모든 부대가 무너져 버리자 포위를 우려하여 참모총장에게 후퇴를 건의했지만 패닉 상태에 있었던 지휘부는 아무런 지시를 내리지 못했다. 설상가상 인도교가 폭파되자 퇴로가 끊긴 1사단은 그제서야 시흥을 집결지로 선정하고 후퇴를 시작하지만 배도 구하기 어려운지라 몇명의 부관과 함께 마포에서 뗏목을 만들어 겨우 도하가 가능했다고 한다. 기적적으로 많은 장병이 도하에 성공하여 시흥에서 부대의 재편이 가능했으나 본인은 이 일로 상부의 후퇴명령을 어기고 부대를 위험에 빠트렸다는 오해를 받아 많이 억울했다고 회고록에서 밝히고 있다. 

하지만 그 당시 그나마 사단급 편제를 유지하고 멀쩡히 퇴각할 수 있던 부대는 1사단과 춘천의 6사단이 유일했다. 또한 6사단의 경우 후퇴하면서도 제대로 된 전투를 벌였는데 바로 춘천-홍천 전투다. 수도권을 치던 북한군 보다는 상대적으로 공격의 강도가 약한데다 부대장 재량으로 병력의 외출, 외박을 제한해 병력이 비교적 많은 상태라고 하지만, 북한군 제2군단을 3일간 저지했고 제2군단장 김광협은 해임당했다.

그렇다고 1사단쪽이 사정이 나았는가 하면 그것도 아닌것이, 개전전에 1사단이 담당한 구역은 적이 고지대에서 진지까지 단단히 구축한 후 빤히 쳐다보고, 배후에 바다가 있으며, 방어선으로 삼을 곳이 거의 없는 100km다. 또한 수도인 서울에서 가까워서 개전 당시 의정부 회랑방면과 함께 적의 주공이 밀려온 곳. 이런 곳에서 3일이나 버틴 것이 용사다.

이들의 교전으로 전선이 전면적으로 붕괴되지 않고 서울 점령 때까지 그나마 3일의 시간적 여유를 벌었으니, 그러나 이 성공적인 방어전에서도 결점은 많아서, 육군본부의 전후 공간사에서는 지휘역량이 아직 부족했고 부대 장악 수준이 충분치 않았던 탓에 조속한 대응에 실패, 더 잘 할 수 있었음에도 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남기고 있다.

처음 이틀 동안 긴장과 긴박한 상황으로 인해 발에 못이 박히고도 다음 날에나 전투화를 벗었을 지경이었다고 전해지며, 1사단이 상태가 그나마 가장 양호한 부대였음으로 학도병과 신병들을 계속 보충받아 계속 방어작전에 주력으로 투입된다. 그러나 전황이 계속 악화되어 결국 낙동강까지 후퇴하며, 이 와중에 병사들 속에 섞여 퇴각하던 중 북한군의 추격으로 몇번이나 죽음의 고비를 넘긴다.


2.2 다부동 전투

낙동강 방어선에서 유명한 다부동 전투를 겪게 되는데, 북한군은 병력 21,500명에 T-34 전차 20대+14대 가량을 앞세워 전진했으나 1사단의 7,600명 병력이 이들을 8월달까지 지연시켜 미군이 상륙할 때까지 시간을 버는데 성공했다. 참고로 이 전투에서 백선엽은 권총을 들고 병사들과 선봉에 서서 적진으로 돌격했는데, 이렇게 사단장이 직접 돌격하는 것은 사단장 돌격이라고 불리며, 국내외적으로 사례를 찾기 힘든 희귀한 사례중의 하나. 일단 이 행동과 비슷한 사례로는 한국전쟁 당시 인천 상륙작전 중 손원일 제독이 직접 소총을 들고 대한민국 해병대와 함께 진격한 경우 정도.

돌격직전 병사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모두들 앉아 내 말을 들어라. 그동안 잘 싸워주어 고맙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더 후퇴할 장소가 없다. 더 밀리면 곧 망국이다. 우리가 더 갈 곳은 바다밖에 없다. 저 미군을 보라. 미군은 우리를 믿고 싸우고 있는데 우리가 후퇴하다니 무슨 꼴이냐. 대한 남아로서 다시 싸우자. 내가 선두에 서서 돌격하겠다. 내가 후퇴하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


2.3 평양 점령 

이후, 부산에 미 1기병사단이 상륙함에 따라 1사단은 전력재건을 위해 임무를 교대했으나 미 1기병사단은 9월달즈음 북한군의 공격에 주저항선이 붕괴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곧이어 인천 상륙작전이 실시되어 북한군에 막대한 혼란이 벌어지자, 반격부대로서 다시 1사단을 지휘해 다부동을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이때쯤에는 성공적인 방어작전의 결과로 준장으로 진급했다.

북한으로 역진공하던 때의 에피소드인데, 미군 지휘관들이 한국군의 전투력을 의심하자 자신이 직접 영어로 설명하며 '1사단의 전투력과 사기가 매우 높아 UN군의 선두에서 평양을 향해 제일 빨리 전진할 수 있으며, 사단장인 자신은 평양에서 어렸을 때부터 살아와 길을 잘 안다. 단지 자신들에게는 미군과 같은 종합적인 화력이 없는 것 뿐이라 만약 1사단에 미군 전차 1개대대를 지원해주면 이들과 함께 선두에서 진격할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미군 장군이 '미군은 차량이 많고 기계화되어 이동속도가 빠른데, 보병 뿐인 한국군이 어떻게 미군의 전진속도보다 빨리 갈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하자 '잠을 자지 않고 야간에도 행군해가며 이동속도를 늘리겠다'라며 굳은 의지를 보인다. 그리하여 미군 전차대대를 배속받게 되며, 미육군 부대가 다른 나라 지휘관의 지휘를 받은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의 영국지휘관에게 맡겨진 몇몇 사례를 제외하면 거의 없다. 게다가 약속대로, 실제 1사단 장병들은 야간에도 잠을 자지 않으며 맹행군을 계속해 차량으로 이동하는 미군들을 제치고 전군의 선두에 서게 된다.

나중에는 미군 전차대대 장교들이 '우리까지 밤에 잠도 안 자고 싸울 수는 없다. 전차는 야간에 사고를 일으킬 수 있고 적의 공격에도 취약하다'라고 하자 전차대대에는 숙면을 취하게 하며 '이들은 우리를 돕기 위해 고생을 하고 있으니, 충분히 휴식을 취하게 협조하라'고 하며 배려해줬으며, 실제로 이들은 그 보답으로 주간에 속도를 올려 1사단의 최선두를 따라잡았다. 이때 당시 장교들이 한 말은 정확하게 "전차는 낮에는 호랑이지만 밤에는 고양이에 불과하다"라고 말한 것으로 기막힌 대답이라서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고 밝힌 바가 있다.

결국 평양점령에 성공했다. 이는 전쟁 당시 최초의 평양 점령이었는데, 1사단과 평양 점령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던 7사단 역시 다른 방향에서 같은 날 평양에 입성해 최초 입성부대라며 자랑하곤 한다. 평양점령후 김일성의 집무실에 1사단 지휘소를 차리는 상징적인 제스처를 취했다. 그 후에도 계속해서 북진을 계속해 압록강변에 거의 다다랐지만, 중국군의 반격에 휘말리며 38선 이남으로까지 밀려가게 된다. 이때, 최초로 미국과 북한-중국간의 휴전회담이 시작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한국군 장교를 빼놓고 휴전협정을 할 수는 없다며 강력히 주장해 참관인으로 참석했다.


2.4 빨치산 토벌전

휴전회담 도중 동부전선 상황이 악화되는데다 1군단장의 사고사로 인해 긴급히 후임으로 강릉으로 부임했다가, 다시 휴전회담 한국측 대표를 하던 중, 군단장으로 복귀한다. 전투가 뜸해진 1951년. 남한 후방지역, 특히 지리산 지역에 인천 상륙작전 이후로 후퇴하지 못한 빨치산들이 대거 몰려있음이 알려지자 이들을 퇴치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그리하여 그의 성을 따서 '백 야전사령부'가 창설되어 대대적인 소탕작전이 벌어지며, 성공적인 작전을 마쳐 빨치산 토벌을 완수한다. 작전의 결과로 5,800명의 빨치산을 사살했으며 특히, 투항자에게는 죄를 묻지 않고 절대 신변의 안전을 보장하라는 사면장에 자신의 사인을 넣어 비행기에서 살포한 덕에 수많은 유격대원들이 사면장을 들고 항복하게 만든다. 최종적으로는 5,700명이 항복하거나 포로가 되어, 통합 11,500명을 토벌한 것이다. 이전 11사단의 견벽 청야 작전이 거창사건으로 대변되는 작전에서 진일보한것으로 평가된다.

재미있는건 거창 사건으로 대변되는 양민학살의 실질적인 주범인 최덕신의 경우는 이런 비난에서 벗어나서 영웅시 되고 있는데 그것은 그가 월북했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북을 택하지 않고 박정희 정권의 고위직으로 일생을 마쳤으면 지금 빨치산 토벌로 백선엽이 받는 비난은 최덕신이 받을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한홍구의 한겨레 21기사같이 눈뜨고 못 볼 정도의 몇몇 경우를 제외하면 최덕신이 칭송을 받는지도 의문이고, 긍정적 평가를 받는다면 그건 월북때문이 아니라 독립운동을 했기 때문이다. 사실 최덕신의 월북은 70년대 반정부 투사로 인정되기에는 상당히 지저분한 이야기들이 좀 얽혀있기도 하다. 그리고 거창학살의 진상을 은폐하고 피해자를 도리어 탄압한 박정희 정부는 경상남도에서 굉장히 많은 표를 얻었다. 


2.5 전쟁 후기 ¶


그 이후에는 새로이 재창설된 1군단에서 1군단장을 맡고, 미군의 지원으로 1952년에 새로 창설되는 2군단에서 군단장을 맡는다. 그리고 다시 1952년 7월에는 그동안의 전공으로 육군 참모총장에 부임하며 한국군 최초의 4성 장군이 되었는데, 이때 나이가 32세였다. 이후 한국군의 규모 확대와 급여, 복지문제 개선과 지원을 확대하는데 애썼다.

이런 저런 활약과 더불어 전쟁중 부대 궤멸이나 대패, 총퇴각 같은 큰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으므로 미군에게도 큰 신뢰를 쌓고, 빨치산 토벌을 성공적으로 끝내는 등 큰 업적을 쌓은 덕택에 미군은 한국군에 대한 평가를 상당히 높게 했으며, 계속 장비지원을 해 세력을 확충시키는 한편, 카투사 제도 등으로 미군부대에 한국군 병사들을 배속시켜 같이 싸우려고도 했다. 
이 사실이 상당히 중요한 것은 장비지원에 대해 반감을 가진 미군장성이 매우 많았으며, 기본적으로 6.25당시의 국군에 대한 미군의 시각은 조잡한 민병대 정도였으므로 장비를 주면 잃어버려서 적이 오히려 노획한 장비로 중무장을 한다는 시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 장진호 전투를 치른 해병 1사단장도 한국군의 무기고가 되는 것에 우려를 가지고 장비지원을 하라는 상부명령을 거절한 사례가 있다. 자기 부하 빼간다는데 좋아할 사람이 어딨겠냐마는...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리 전투의 소식이 전해지고, 그 여파로 3군단은 해체되고, 그 이후로 한국군의 작전권은 미군에게 넘어간다. 나중에 백선엽 본인은 '유재흥 장군이 실전경험이 없어서...' 라고 끝끝내 아쉬워했다고 한다. 유재흥에 대해서는 당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혹평 및 비난이 많고 본인도 그다지 높게 치지 않는 것이 분명해 보임에도 따로 언급하지 않는 면에서 중후한 대인배로서의 면모도 엿보인다. 
실제로 백선엽은 공식적으로 다른 사람을 비난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수많은 당대 지휘관들이 부하 탓, 상관 탓, 미군 탓을 한 것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 이는 회고록 '군과 나'를 읽어보면 알 수 있는데, 이기붕에게조차 나쁜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3 전후활동 및 이야기거리

전후에는 대만 대사 등을 역임하고, 건설교통부 장관을 지낸 뒤 비료회사 사장을 지냈다고 한다. 워낙 영향력 있는 인물이던지라, 훗날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영문명으로 'Park'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소식이 전해지자 미국에서는 백선엽이 쿠데타를 일으킨 줄 알았다고 할 정도로 유명인물. 현재 미 2사단 훈련평가원실 건물 이름이 '백선엽관'이다.

대단히 정치적이었고 군사 쿠데타를 누구보다도 두려워했던 그럼에도 정치군인 양성에 힘썼던 이승만은 쿠데타 가능성이 높은 군 실력자들을 서로 경쟁시켜서 가급적 힘을 분산시키는 전략을 수행했는데 백선엽, 이형근, 정일권이 교대로 참모총장이 되면서 상호 견제하는 체제로 나갔다. 이후 정치에 발을 실제로 들였던 건 정일권.

여담이지만 대식가라고 한다. 2009년 2월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육군협회 관련 행사에 참석한 이의 증언으로는 계속 꾸벅대다가 만찬이 시작되자마자 접시를 순식간에 비워낸 어르신이 백선엽인 걸 나중에 알고 황당했다고.

한국군 고위장교니까 당연한 일이지만 친미성향이 짙으면서 실력으로도 대단히 유능했다는 것이 공통된 평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실력은 있으나 미군과 친하지 않아서 찬밥을 먹는 장교들이 많았는데 노령의 문제도 있지만 김홍일 장군이나 김석원 장군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나중에 실력에 비해서 한직으로 밀려난다. 또한 유능하지 않으나 미군과 친한 이유로 과대평가되는 장교들도 있었는데 김교식에 따르면 장도영이 이런 케이스였다고 한다. 물론 장도영 정도는 그나마 실력이 조금이라도 있으니 다행이고 태백산맥에서 자주 나오는 썩은 국군 장교들의 경우 이런 경우가 꽤 많았다. 전선에서도 바쁜 와중에 틈틈히 영어공부를 했고 미군들에게 예의바른 표현을 익히기 위해 미군 표창장에 적힌 찬사문구를 메모해서 틈틈히 외워서 감사인사에 써먹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2000년대에는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 시위에 참가중 물대포에 맞아서 병원에 실려가기도 했다. 참고로 그때 90대 노령인 영감님이었다.


3.1 최초 원수 가능?

2009년에 명예 원수로 추대하려는 계획이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관련 법령이나 규정을 손봐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좀 걸릴 듯하다. 만일 성공하면 한국군 사상 최초의 5성 장군이 된다.

그러나 친일 경력 의혹 때문에 논란이 되고 있다. 곧, 우리나라 최초의 원수칭호가 친일 의혹이 해결되지 않은 인물에게 섣불리 수여되기 보다는 좀 더 시간을 갖고 사회적 토론이 선행되야 하지 않나 하는 의견이 적지 않다. 이 인물의 혁혁한 전공과, 독립군을 토벌하는 것이 임무였던 간도특설대에 복무했던 과오가 너무도 대립되기 때문에 사람들의 가치관에 따라 극명한 대립양상을 보아 합의를 보기 힘들 것을 예상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전까지는 명예 원수 추대가 성사되는 것은 힘들 것으로 보인다.


3.2 친일행적

백선엽은 1941년 봉천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해방때까지 간도 특설대에서 만주군 장교로 근무했다. 최종 계급은 중위. 자신의 자서전인 '실록 지리산', '군과 나' 등에서 해당 경력을 언급했다. 하지만 간도 특설대 경력에 대해 특별히 후회한다고 언급하거나 사죄한 적은 없다.

물론, 친일 경력자중에서 제대로 사죄한 인물은 몇명 없다. 제2공화국 시절의 국방장관 현석호의 경우는 친일전력을 언급하고 사죄한 몇 안되는 사례. 그리고 전 홍익대 총장 이항녕도 틈틈이 자신의 친일행적에 대해 반성을 해 왔다. 이 양반은 군인이 아니라 일제 말기 창녕군수를 지냈었다. 

또한 백선엽은 1993년에 일본에서 출간한 책에서 자신의 간도특설대에 근무한 사실과 그 부대에서 팔로군 소속의 조선인 부대를 상대로 토벌작전 나섰음을 시인하고 있으나, 이 부분에 대해 반성한다거나 후회한다는 언급을 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정부기관에서 발간한 친일진상규명위 보고서에 백선엽의 회고록 가운데 일본서적에 간도특설대에 근무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시인하고 있다(白善燁, 若き将軍の朝鮮戦争 白善燁回顧錄!, 草思社, 2000年, 71~79쪽). 이 책은 군과나의 일역판 조선전쟁 천일의 개정판이다. 군과 나 자체도 2010년에 개정판 회고록이 출간되었다.

(전략) 봉천의 군관학교를 졸업한 것은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발발했을 때였다. 나는 견습사관으로서 동부 만주의 寶淸(파오칭)에 주둔하고 있던 만주국군 보병 제28단(=연대)에서 근무하였다. (중략) 이어서 佳木斯(자무스)의 신병훈련소의 소대장으로 전임되었는데 (중략) 1943년 2월, 나는 만주 동부의 한반도에 접하는 간도성에 있던 간도특설대에 전임되었다. (중략)

간도성 연길현 명월진(明月鎭)에 설치되어 있던 간도특설대는 조래의 국경감시대를 모체로 하여 1938년 12월에 창설되었다. 당초에는 보병 1개 중대와 기관총, 박격포를 장비한 기박 1개 중대로 구성되어 있었고, 나중에 보병 2개 중대로 증강되어 대대 규모가 되었다. 부대장과 간부의 일부가 日系 軍官이고 나머지 전부는 한국계 군관이었는데, (중략) 간도성 일대는 게릴라(동북항일연군 등 항일무장세력을 게릴라라고 지칭하고 있음)의 활동이 왕성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계속하여 치안작전을 수행하느라 바빴는데 간도특설대의 본래의 임무는 잠입, 파괴공작이었다.(게릴라전에 대한 다른 책에서는 솔직히 식민지 백성으로 이런 부대에 참가했다는게 부끄러운 일이라고 고백은 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대소전 발발시 후방잠입 특수업무가 주요한 일이었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특수부대, 스페셜 포스로서 폭파, 소부대 행동, 잠입 등의 훈련이 자주 행해졌다.(8월의 폭풍 작전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소련의 침공이 너무 전격적이어서 이런 목적으로 만들어진 부대는 말 그대로 와해되거나 자진해산하는 경우가 많았다. 731 부대도 마찬가지) 만주국군 중에서 총검대회, 검도, 사격 대회가 열리면 간도특설대는 항상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중략)

내가 간도특설대에 착임하였던 1943년 초두에는 게릴라의 활동은 거의 봉쇄되어 있었지만 그때까지는 대단했다고 한다. 관동군 독립수비대와 만주국군은 1939년 10월부터 41년 봄까지 여기 동부만주에서 대규모의 게릴라 토벌작전을 수행하였다. 최전성기의 관동군의 위신을 걸고 철저하게 시행된 작전이었다. 그 중에서도 항상 대서특필할만한 전과를 올렸던 것은 간도특설대였다. (후략)


백선엽은 분명히 유능하고 자기역할에 충실한 군인으로 높은평가를 받을만한 인물이지만, 대한민국 최초의 명예 원수 추대가 거론되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과오'에 대해 반드시 풀어야할 문제이다

백선엽이 일본에만 출간한 책인 게릴라전 관련 전술서적인 "미국은 왜 베트남에서 패배했는가?"에서 당시 상황을 알수 있는 일본 독자들을 위해서 2차 대전 당시 간도특설대에 들어간 사실을 자세히 기록하고 당대와 그때의 고민 및 함부로 말하기 어려운 사정에 대해서 나름 변명과 유감을 표명하고 있으나 이 책 자체는 회고록이기 보다는 대게릴라전 전문가로서 베트남전을 평가하는데 주 목적으로 한국에서 출간한 지리산보다 더 빨치산 토벌에 대한 전술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이 책 자체는 우에다 신의 컴뱃 바이블 2에서 한국군의 대게릴라전 전술 부분에 백장군의 캐리캐처와 함께 부분 발췌 수준으로 소개되었고 서해문집에서 나온 일제 하 소련억류자들을 다룬 서적에서 부분 발췌되었을 뿐 정식 번역은 되지 않았다. 상당히 괜찮은 책임에도 아무래도 어른의 사정이 있으리라는 추정뿐.

유사한 문제들에 대해선, 백선엽뿐만 아니라 많은 친일 의혹이 있는 인사(박정희, 김활란, 김성수, 방응모 등)들의 문제에 대한 청산 및 역사적 평가가 먼저 선행되야 하는데, 이 부분은 2차 대전 종전 후, 드골정부에 의해 수행된 나치협력 인사 청산 방법이나 중국의 한간 처벌방식처럼 도입하기에는 때를 지나 버렸다. 


당장 프랑스의 경우는 한국의 상황자체가 크게 다르다. 프랑스식 청산방법을 우리나라에 그대로 적용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중국의 경우는 한국의 상황과 비슷한 면이 꽤 있긴 하지만... 그래서 학계에서는 이러한 점에 대한 논란에 대해 지속성, 반복성, 적극성 등을 고려해 '진상규명'하는 식으로 결정하고 있다. 또한 무리를 무릅쓰고 지금 하자니 직접적인 이해당사자들이 생존해 있기 때문에 '진상규명' 방식으로 나가는 것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다만, 백선엽은 한국전쟁때 자신의 부대가 전쟁전 빨치산 토벌을 명목으로 민간인들에게 민폐를 끼친 적이 있어서 이 일을 후회하고 반성한다고 자신의 회고록에서 공식적으로 자세하게 밝히고, 김창룡이 고문치사한 것을 수습해 준 적도 있다고 솔직하게 고백한 바 있다. 아울러 자신이 모르게 하위 부대에서 자행된 잔학행위들을 솔직히 회고록에서 적어주고 있으며 행여나 있을지 몰랐던 행위들에 대해서 책임자로서 머리 숙여 사과한다고 했다.

사실 백선엽이 자신의 회고록에서 사실대로 밝히지 않은 것은 5.16 군사정변을 전후한 시점에서의 군내 알력과 자신이 받은 비판에 대한 부분 정도인데, 이 부분은 솔직담백한 그의 회고록에서 이례적으로 유난히 자기미화가 심한 편이다(사실 이 점은 정일권이나 이형근의 회고록은 더 심하다).


3.3 형보다 나은 아우는 없다

위의 친일 논쟁과는 별도로, 그 본인의 문제가 아니라 그의 동생인 백인엽(白仁燁) 때문에 싸잡혀서 욕 먹는 경우도 있다. 

백인엽은 한국전쟁 때도 막장으로 유명했다. 일단 백인엽의 전투능력 자체는 6.25당시의 한국군의 수준을 감안하면 그렇게 나쁘지는 않은 편이라 개전 당시 옹진방면에서 독립 제17연대를 지휘했으며, 역시 3대 1에 가까운 병력열세속에 후방은 바다라는 악조건에서 사투를 벌리다가 패배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한 적도 있었고, 그 와중에서도 부대를 무사히 빼내서 낙동강 방어선 전투와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는등 백선엽의 회고에 의하면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보다 백인엽을 먼저 기억했다고 할 정도로 용맹성은 유명했으며, 1980년대에 출판된 계몽사의 한국사 이야기에서는 명장으로 기록될 정도로 전공도 있는 인물. 

하지만 부하 장교 즉결처분 혐의를 비롯해 온갖 막장스런 사건을 몰고다녔다. 형만한 아우 없다지만 이건 정도가 좀 심한 인물로 자신의 이름과 백선엽 대장의 이름을 따 선인재단을 만들었는데,동양 최대의 사학 재단이었다. - 1990년 당시 도화국민학교, 인화여중, 선화여중, 선인중, 인화여고, 선화여상, 선인고, 운봉공고, 운산기공, 항도실고, 인천전문대, 인천대학교가 있었다. 그 외에도 몇몇 학교가 더 있었다고 한다. - 속칭 마징가제트 체육관 주변(구글어스로 북위 37도 28분 17초 동경 126도 39분 21초 주변을 보라)의 학교들 거의 전부가 소속되어 있었다.

그런데 재단 운영이 개막장오브 막장이어서, 인천지역 고교 평준화 이전 선인고등학교는 (인문계임에도 불구하고) 수준 이하의 학생들만 득실대었다. 그 악평은 평준화 이후에도 지속되는 선인재단의 운영 속에서 여전히 이어졌으나, 공립고등학교가 된 이후에는 수준이 완전히 달라져서 신흥명문고가 되었다. 막장 선인재단의 전설은 끝난 것이다. 그러나 '도봉산'으로 불리던 악명높은 항도, 운봉, 운산 라인은 수십년이 지난 현재도 악명이 자자하다.

결국 인천대학교와 선인고등학교 모두 막장의 극을 달리는 운영 끝에 94년 인천시에 흡수되었다. 인천대학교는 시립대가 되었고 나머지 학교는 공립학교가 되어서 지금은 선인재단 따위는 없다. 사실 월간조선에서 백인엽을 취재한 이유도 바로 이런 학내분규의 해결때문에 기획했었다. 그렇지만 인천 사람들에게 선인재단이라는 단어는 남아있다. 그것도 아주 안 좋은 이미지로 남아 있다. 저 동네 근처의 고등학교를 저 시절에 나왔거나 또는 근처에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백선엽'과 '백인엽'은 똑같은 존재다. 

그래서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백인엽은 나는 대통령이 바뀔때마다 한번씩 감옥에 가는 사람이라고했다. 무슨 민주투사같은 건 아니고 대통령이 바뀔때마다 사회기강 정리차원에서 꼭 혼내줄정도로 유명했다는 이야기.

백인엽의 막장행각에 대해서 심층적으로 보도한 언론매체가 바로 월간조선(....) 그것도 북한 핵개발 문제로 시끄러울때라서 나름 북한에 대한 비판이 매서울때였다.

예비역 대장이며 육군 인사사령관, 특전사령관, 3군사령관을 역임한 백군기 장군(육사 29기)의 아버지라는 소문이 있었으나 사실이 아니다. 백군기 장군의 아버지는 이미 작고하신 분. 참고로 백군기 장군은 호남 출신(광주고)으로, 경력에서 볼 수 있듯이 군 내 요직을 역임한 유력한 육군 참모총장 후보였으나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 3군사령관을 마지막으로 퇴역하였다.


4 저서들

4.1 군과 나

한국전쟁 회고록 한국전쟁 당시 실제 작전 입안자로서 한국전쟁을 회고하는 최초의 회고록이다. 사실 한국전쟁을 회고하는 수기류는 정책적으로 많이 나왔지만 공산권 자료의 미비, 최근에도 일제하 전력이라든가 작전실패, 민간인 학살 관련 등 여러 문제에 대한 당사자들의 증언 회피, 어른의 사정 등으로 객관적인 저서가 나오지 않았던 반면에 6월항쟁 이후에 객관적이고 거시적으로 한국전쟁을 볼 수 있는 시기에 나온 최초의 회고록이라는데서 의의가 있다. 실제로 이 책 이후에 나온 이형근, 정일권의 회고록에서는 자신이 비판받을 부분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원래 경향신문 연재물이었는데 대륙출판부에서 최초로 단행본이 나왔고 앞에 말한 이유뿐 아니라 문장이 수려해서 가독력이 좋아. 한국전쟁에 대해 입문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할만한 작품. 심지어는 국군 최악의 패전인 현리 전투도 객관적으로 기록한다.

많은 사람들이 잊혀진 걸작이라고 한탄하지만 사실 이런 종류의 책으로서는 의외로 단행본이 많이 나왔다. 앞서 말한 대륙출판부판, 다른 중소출판부판, 시대정신판 등등... 영문판으로 "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 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으며, 이 제목은 전 UN군 사령관 클라크의 회고록 '다뉴브강에서 압록강까지'와 제목이 비슷하다. 조선전쟁 천일이라는 제목으로 일역판도 출간되었다.

2010년 중앙일보에서 이 회고록의 추가 개정판이 연재되었다. 다만 이 판본은 중국군 개입부터로 순서를 조정했다.


4.2 실록 지리산

이태의 남부군 출간 이후 동아일보 연재로 토벌대의 입장에서 대국적으로 그린 빨치산 기록이다. 저자 자신이 백야전사 작전에 참가했던 기록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다. 이태의 남부군이 자신이 겪은 이야기-> 남한 빨치산 약사-> 자신이 겪은 이야기 후기의 형식인 반면에 이 작품은 백야전사 작전-> 남한 빨치산 약사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단행본은 고려원 출간.

백야전사 부분을 제외하고는 이태의 작품에 대한 토벌대의 입장이기 때문에 남부군을 읽지 않으면 갑툭튀한 서술이 좀 이상할 정도이다.

토벌대 사령관 입장으로 썼기 때문에 색안경을 끼고 볼 수 있겠지만 의외로 객관적이다. 자료 조사를 위해 지리산 곳곳을 다녔고 구빨치산 출신의 참전자들을 일일히 인터뷰했다. 토벌에 참가했던 국군의 '''잔학행위 증언도 빠짐없이 실어주었다. 이를테면 생포한 여자 빨치산을 바세린을 발라가면서 집단으로 검열삭제하는 류의 이야기가 버젓이 나온다.

이런 증언을 소개하면서 토벌작전 책임자로서 사과문을 올리기도 했다.


5 기타

2011년 06월 24일 KBS에서 한국전쟁 당시 그를 주목하는 방송을 해 논란이 되었다.

백선엽의 친일행적을 언급하지 않은 것 때문에 이 방송을 문제삼는 시각도 존재한다.

하지만 친일행적만 아니었다면 방송내용처럼 구국의 영웅이 되고도 남는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솔직히 말해서 6.25 당시 일제 치하에서 개고생하다 막 풀려난 한국의 상황에서는 현대전을 이해하고 제대로 싸울 인재가 거의 없었다. 그나마 이해했다는 몇몇도 채병덕이나 유재흥 같이 무능한 것이 일반적인 상황. 
아무리 역사의 흐름속에서 어떤 인물이 없다면 다른 인물이 그 역할을 대체한다지만 이런 경우에는 대체할 인물 자체가 나오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래서 진짜로 이 사람이 없었다면 6.25가 패전으로 끝날 수도 있었다는 평가를 받는 몇 안되는 인물.

따라서 비판도 친일행적에 집중되었지 그 이후에 대한 비판은 극히 드물다.

2014.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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