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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심훈 윤동주 김유정 정지용 김영랑 한하운 이육사에대해알려주세요
fk**** 조회수 10,620 작성일2006.08.11

심훈 윤동주 김유정 정지용 김영란 한하운 이육사

이 분들에대해 알고싶은 데 시간이별루없어서요 꼭알려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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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훈(1941~

 

소설가, 시인이자 영화가인 심훈은 일제강점기에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한 소설을 썼다. 본관은 청송이고, 본명은 대섭, 아명은 삼준·삼보이며, 호는 해풍이다. 백랑이라는 별호도 사용했다.

아버지 상정과 어머니 해평 윤씨 사이에서 3남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큰형 우섭은 〈매일신보〉 기자를 거쳐 방송국장 등을 역임했으며, 작은형 명섭은 교회 목사였다. 1915년 서울교동보통학교를 나와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며, 1917년 왕족인 이해영과 결혼했다. 1919년 3·1운동 때 투옥되었다가 집행유예로 석방된 뒤 이 사건으로 퇴학당했으며, 1920년부터 3년간 중국에서 망명생활을 했다. 망명기간중 베이징·상하이·난징에서 활동하다 항저우의 즈장 대학에 입학했다. 1923년 귀국,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을 내세운 염군사의 연극부에 가담해 신극 연구단체인 '극문회'를 조직했다. 1924년 동아일보사에 입사해 소설 〈미인의 한〉 후반부를 번안했고, 부인 이해영과 이혼했다. 1925년 영화 〈장한몽〉에서 이수일 역을 대역하면서 영화와 인연을 맺었으며, 그해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 발기인으로 참여했다가 이듬해 이탈한 것으로 보인다. 1926년 〈동아일보〉에 한국 최초의 영화소설인 〈탈춤〉을 연재했으며, 박헌영·임원근·허정숙 등과 함께 '철필구락부사건'으로 동아일보사에서 해직당했다.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가 정식으로 영화를 공부했으며, 6개월 후에 돌아와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원작·각색·감독해 단성사에서 개봉했다. 1928년 〈조선일보〉 기자로 입사해 〈우리 민중은 어떠한 영화를 요구하는가〉 등의 평론으로 프로 작가들과 논쟁을 벌였다. 1930년 신여성 안정옥과 재혼했다. 1931년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생활을 하다가 이듬해 충청남도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로 내려가 창작생활에 힘을 쏟았다. 1933년 8월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으로 잠시 근무했고, 1935년 장편 〈상록수〉가 〈동아일보〉 발간 15주년 기념 현상모집에 당선되자 이때 받은 상금으로 상록학원을 설립했으며, 1936년 〈상록수〉를 직접 각색·감독해 영화로 만들려고 했으나 실현하지 못했다.


 

윤동주(1917-1945)

 

시인 윤동주(1917 ~ 1945)는 북간도 명동촌에서 당시 명동 학교 교시이었던 윤영석 씨의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독실한 기독교 집안으로, 그를 매우 사랑하던 할아버지는 교회의 장로였습니다.

그 해 고종 사촌 형 송몽규가 윤동주보다 석 달 앞서 태어났는데, 몽규는 동주의 삶을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인물입니다.

함께 학교를 다니고 문학 수업을 했으며, 민족 의식을 갖고 독립 운동을 구상하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일본 경도로 유학가서 독립운동 혐의로 일본 복강 형무소에 함께 수감되었고, 한 달을 사이에 두고 옥사하기까지 그들은 사촌 형제지간이라기보다 죽마고우이고 평생의 동지였습니다.

윤동주는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민족 의식이 강했던 북간도의 분위기 속에서 중학교 시절까지 보냈습니다.

그는 가난한 집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웠던 「이이생활」이란 어린이 잡지를 정기 구독했으며, 명동 소학교 급우들과 「새명동」이란 등사판 잡지를 내는 문학적 관심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중학교는 송몽규와 함께 선교사가 운영하는 기독교계 학교인 은진 중학교를 다녔습니다.

이 시절 <동아일보> 신춘 문예 꽁트 부문에 몽규의 '술가락'이 당선되었습니다.

이 일은 동주를 분발시켜 이때부터 습작 시노트에 시를 쓴 날짜를 기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해 몽규는 학업을 중단하고 김구 선생이 주관하던 낙양 군관 학교에 입학, 독립 운동에 투신하게 됩니다.

그러나 현지 사정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1년만에 돌아와 '요시찰 인물'로 낙인이 찍힙니다.

이때 동주도 1935년에 평양의 기독교계 학교인 숭실 중학교에 편입했다가 일제가 신사 참배를 강요하자 그것에 대한 항의로 이듬해에 자퇴합니다.

그래서 동주는 용정의 광명 중학부에, 몽규는 평양 대성 학교에 편입하여 학업을 재개합니다.

그리고 1938년, 나란히 연희 전문 문과에 입학하게 됩니다.

이들이 연희 전문을 택한 것은 이 학교가 외국인 선교사가 세운 학교이어서 민족 의식을 가진 많은 교수들이 포진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연희 전문에서의 4년은 동주의 삶에 의미 있는 기간이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시 창작에 전념하여 오늘날 남아 있는 주옥 같은 시를 남겼습니다.그래서 1941년 졸업 기념으로 19편의 시를 묶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란 제목으로 시집을 내려 했으나 일제 말기의 험악한 분위기와 경제적 사정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다만 3부를 만들어 존경하는 이양하 교수와 후배 정병욱에게 한 부씩 주고 자신이 나머지 한 부를 가졌습니다.

1942년 졸업 후, 그는 몽규와 함께 일본 유학길에 오릅니다.

몽규는 경도 제국대에, 동주는 경도 동지사 대학 영문학과에 입학했습니다.

그런데 1943년 7월 여름 방학을 맞아 귀향길을 서두르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그들은 '요시찰 인물'로 몽규와 그의 주변 인물을 1년 동안이나 감시하여 독립 사상을 가진 몽규와 동주를 잡아들인 것입니다.

갖은 악형 속에서 1944년 4월 몽규는 2년 반, 동주는 2년의 징역이 선고되었습니다.

그들의 죄명은 독립 운동이었고, 특히 '조선 학병들은 일본이 약해지거나 패전하는 기회를 타서 조선 출신 군인으로 목숨을 바쳐 궐기해야 한다'는 일본의 징병제에 대한 생각이 옥살이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1년 뒤인 1945년 2월 16일에는 동주는 복강 형무소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때 시신을 수습하러 간 아버지와 당숙이 피골이 상접한 송몽규를 면회했는데, 몽규는 자신들이 "이름 모를 주사를 강제로 맞고 있으며, 그 주사 때문에 동주가 죽었고 자신의 몸도 이 꼴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몽규도 한 달 뒤에 숨을 거두었는데 그들은 일본의 간악한 생체 실험의 대상이 되어 체포된 지 1년 반만에 독립의 한을 품고, 28세의 일기로 원통하게 이승을 하직한 것입니다.

 

 

김유정(1908-1937)


1908년 강원도 춘성군 신동면 실레〔甑里〕에서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일설에는 서울에서 태어났다는 말도 있다) 그의 선대는 이곳에서 대대로 살아오던 갑부집이었다. 8남매는 맏이는 형님이고 나머지 여섯 사람은 내리 딸들이었다. 막내 아들이고 귀한 아들이었기에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사랑은 지나칠 정도로 두터웠다. 또한 실레 지방에선 당당한 지주의 집안이었기에 온갖 특권이 부여되었다.

안타깝게도 6살 때 어머니를, 또 8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이때부터 낭비벽이 심한 형 때문에 가세는 갑자기 극도로 기울어졌다. 또 부모님의 특별한 사랑을 잃은 것과 돌연한 환경의 변화는 그의 성격 형성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어머니에 대한 간절한 사랑의 갈구가 그를 내성적 인간으로 만들었고, 한없는 고독을 지닌 사람으로 성장시켰다. 휘문고보 4학년 때 명창(名唱) 朴綠珠와의 짝사랑, 그리고 그녀에게로 줄기찬 연애 편지 등도 이러한 어머니에 대한 사랑의 추구의 한 반향으로 보아진다.

12살 때 서울로 올라가 휘문고보에 입학했다. 이 당시 그는 다방면의 취미 생활을 즐기기도 했다. 아코디언, 바이올린, 하모니카 등의 악기와 운동에도 꽤나 열심이었고 安懷南, 林和 등과 문학 생활 특히 그 중에서도 러시아 문학 전집, 바이런 시집, D.H. 로렌스, 이효석 등의 작품을 탐독하였다.

1929년 휘문고보를 졸업(성적은 하위)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하였으나 경제적 문제로 곧 중퇴하고 집은 다시 춘성으로 이사했으며, 자신은 1년 동안 늑막염으로 고생을 하고 난 뒤, 1930년부터 1년간은 전국 각지로 방랑을 시작했다. 31년 실레 마을로 내려와 야학을 개설하고 農友會를 조직하여 錦屛義熟을 세워 농촌 계몽 운동을 추진했다. 그러나 타고난 역마살로 모두 조카(金永壽)에게 맡기고 자신은 충청도 금광에 감독 겸 휴양차 훌쩍 떠났다.

유정의 문학 창작 활동은 33년부터 시작된다. 서울의 셋방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여 33년 <소낙비>와 <산골 나그네>를, 34년 <만무방>을 쓰고 35년 조선일보 신춘 문예에 <소낙비>가, 같은 해 중앙일보에 <노다지>가 당선됨으로 문단에 등단 각광을 받았다. 이후 많은 작품을 탄생시키고 이상(李箱)과도 깊은 친교를 맺게 되어 <구인회>에 가입했다.

이후 <산골 나그네>, <옥토끼>, <동백꽃>, <총각과 맹꽁이>, <정조>, <슬픈 이야기>, <따라지>, <땡볕>, <정분> 등을 썼으며 장편 <생의 반려(미완)> 등을 발표하나 지병인 폐결핵으로 광주 누님댁에서 1937년 29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다.

 

 

정지용(1902-1950)

 

정지용은 1902년 5월15일(음력) 충북 옥천군 옥천면 하계리 40번지에서 약종상을 하는 아버지 정태국과 어머니 정미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옥천공립보통학교(지금 죽향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재학 중 선배인 홍사용, 박종화, 김영랑, 후배인 이태준을 만나 글 쓰기의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으며 박팔양 등 8명과 함께 동인을 결성, 동인지 《요람》을 10여호 까지 펴낸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교내문제로 야기된 휘문사태의 주동으로 이선근과 함께 무기정학을 받아 수업을 받지 못했다. 이 해 12월《요람》창간호에 그의 첫 발표작이자 하나뿐인 소설<3인>을 싣는다. 1922년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첫 시<풍랑몽>을 썼으며 이듬해 휘문학교의 교비생으로 일본 교토의 도시샤대학 영문과에 입학한다. 재학기간동안 시 <석류> <바다> 등을 썼으며 1926년 《학조》창간호에 <카페 프란스>등 9편의 시를, 그리고 《신민》《문예시대》에 <홍춘> <산엣색시 들녘사내> 등을 발표 시인으로 등단한다. 1929년 도시샤대학을 졸업하고 고국에 돌아와 모교의 영어교사로 부임한다. 정지용을 기다리던 박용철, 김영랑과 함께 동인지《시문학)》을 창간, 순수시운동의 물길을 튼다. 1933년 《가톨릭청년》창간부터 편집고문을 맡아 신앙시를 발표하고, 이태준, 이무영, 김기림 등과 함께 반 카프적 입장에서 순수문학의 옹호를 취지로 한 『9인회』를 만든다.

정지용은 일본 강점기의 문인탄압과 회유에도 꺾이지 않은 민족시인이었다. 해방공간인 1948년 《문장》에 발표한 <조선시의 반성>에서 그는 「친일(親日)도 배일(排日)도 못한 나는 산수에 눕지 못하고 들에서 호미도 잡지 못하였다. 그래도 버릴 수 없어 시를 이어 온 것인데 이 이상은 소위 '국민문학'에 협력하던지 그렇지 않고서는 조선시를 쓴다는 것만으로는 신변의 위협을 당하게 된 것이었다」고 고백한데서 그의 투철한 민족애를 읽을 수 있다.

그의 첫 시집 《정지용 시집》(1935)에 수록된 <향수>등은 일찍이 우리민족이 체험하지 못한 모국어의 눈부신 개척을 이뤘거니와 조국광복의 불빛이 보이지 않을 때 빼앗긴 조국을 '고향'의 이미지로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로 각인시키고 일깨웠던 것이다.

정지용은 일제강점기에 높은 문학성과를 거둔 《문장》의 시 추천심사위원으로 참여하여 뒷날 『청록파』라는 한국시사의 한 유파를 형성한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을 발굴하였으며 이밖에도 이한직, 박남수, 김종한 등 역량 있는 시인들을 시단에 내놓는데 기여했다. 이 가운데 《문장》(1940년 9월호) 의 추천평에서,「박목월 군, 북에는 김소월이 있었거니 남에는 박목월이가 날만하다. 소월의 톡톡 불거지는 삭주 구성조(龜城調)는 지금 읽어도 좋더니 목월이 못지 아니 아기자기 섬세한 맛이 좋다」고 북의 소월과 남의 목월을 비교하기도 했다.

1941년에 펴낸 두 번째 시집《백록담》에서 정지용은, 백록담으로 상징되는 조국의 자연에 대한 깊은 탐험을 내면의 언어로 형상화시키는 높은 경지를 보여준다. 「물도 마르기 전에 어미를 여읜 어린 송아지는 움매―움매 ―울었다. 말을 보고도 등산객을 보고도 매여 달렸다. 우리 새끼들도 모색(毛色)이 다른 어미에게 맡길 것을 나는 울었다」는 대목에서 시인은 다음 세대가 이민족에게 말과 글을 배우게 되는 불행에 대해 통곡을 터뜨리고 있다.

1946년 이화여전 교수를 사임하고 경향신문 주간직을 맡아, 이 해 《지용시선》을 펴낸다. 그리고 다음 해 경향신문을 나와 다시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 복직했다가 1년 만에 그만두고 녹번리 초당에서 시작에 전념한다. 1948년에 37편의 시, 수필, 기행문이 수록된 《문학독본》을 출판한다. 이태준이 북으로 넘어가자 그는 "소설가 이태준 군 조국의 서울로 돌아 오라"는 글을 쓰기도 한다.

그러나 6·25전쟁이 일어나고 서울을 빠져나가지 못한 그는 정치보위부에 체포,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납북된다. 1988년 정지용문학이 해금되자 지용회가 결성되어 올해까지 옥천지용제 16회, 서울지용제 3회, 연변지용제 6회, 지용문학상 15회가 거행되고 정지용문학 연구가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한하운(1920-1975)


해마다 그 수를 더해 가는 많은 시인 중에 한하운이 오랫동안 우리 시단의 일원으로서 독자들의 선망과 존경을 한몸에 받아왔음은 무엇 때문인가. 만약 그가 나병의 병고에서 오는 저주와 비통함을 시로써 읊지 않았다면 과연 우리는 다른 각도에서 그를 지켜 보았을는지 모르겠으나 아뭏튼 그가 《한하운시초》(제1시집.1949.정음사)를 간행하여 일약 나병시인으로서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음은 틀림없다.

그를 알게 된 것은 우연히 서점에서 그의 시집을 발견한 게 서로 사귀게 된 동기가 되었고 일과가 끝나면 곧 그를 찾아가는 것이 유일한 낙이기도 했다. 산곡동에서 버스를 타면 약 10분간 지점에 성계원이 있어 거리상으로도 시간을 요하지 않았다.

문둥이라면 화형에 처하던, 가혹한 천형의 시인 한하운. 처음 그를 찾아갈 때는 가슴이 떨리며 왠지 서먹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시집 속에서 대하던 한하운이 정말 보리피리를 불며 눈물의 언덕을 지나 구걸길에 방황하고 있는지가 첫째 궁금했었다. 그래서 몇푼 안되는 호주머니 속의 촉감을 거듭거듭 확인하며, 내딴에는 우선 그와 만나게 되면 동정을 표하리라고 어리석은 정감을 금치 못했다.

십정동 삼거리에서 차를 내려 서남쪽 계곡을 한참 들어가니 의외로 화려한 문화주택이 뜸뜸이 눈에 뜨인다. 아차 이건 길을 잘못 찾았구나. 문둥이의 집단촌이 저렇게 훌륭할 수야 .... 내가 이런 멸시 감정을 지우지 못한 것도 실상 따지고 보면 나의 죄라기에 앞서 문둥이를 학대하는 사회상의 표출인 성싶었다.

기왕 내킨 길이라 조금 더 걸어 들어가니 자그만 경비막이 나선다. 통행을 검문하는 듯한 자가 우뚝 나섰다. 비록 낯은 흉터가 있으나 그의 친절만은 우리가 평소 주던 것보다는 포근하기만 했다. 열마 후 그이 안내로 한하운의 소재가 밝혀졌다. 소위 성계원의 총무를 지내는 집치고는 초라하기만 한 마당 아래로 뛰어나오며 반가워하는 한하운, 처음부터 그는 시인다운 풍자와 호쾌한 기질이 보여 정이 간다.

누구나 간에 자기를 찾아주는 자라면 그토록 기쁘다는 게 인간 고독에서 오는 몸부림만 같았다. 그와 만나서 사귀고 정을 나누는 사이 한 1년이 지났다. 내가 부평동 삼능에 위치한 중학교로 자리를 옮기고 나서 더욱 그와의 주석이 빈번해졌다. 그는 취기가 웬만큼 오르면 자신의 푸념을 터뜨린다. 원래 부잣집의 맏아들로서 함남 함주군에서도 남들이 부러워하던 두고 온 그 고향이 꿈속같이 느껴진다는 대목에는 또 우리는 노래를 부르며 서로가 자유해야했다.

《한하운시초》에 이어 제2시집 《보리피리》를 내고부터 한하운의 주위에는 날로 그를 찾는 펜들과 격려 편지가 쉴 새 없이 답지한다. 이럴 때마다 그는 군중 속의 인간 고독을 더 뼈저리게 느껴 천형의 문둥이임에 몸부림치며 애환의 거리를 울며 떠돌고 싶다는 것이다.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어

 

푸른 하늘 푸른 들 날아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어 예우리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리

 

이 시는 《한하운시초》의 「파랑새」이다. 몇 귀절 안되는 이 시에서는 땅을 치며 호소하는 인간 생리 본연의 저주가 들린다. 차라리 자유로운 새의 푸른 노래가 자신이 원하는 숙명이었을는지 모른다.

한하운은 자신의 일보다 늘 나의 교편 생활을 염려해 준다. 박봉으로 생활은 커녕 시인으로서의 술값이 어디 되겠느냐고 하며 부업으로 서점을 차리라는 것이다. 자본 문제는 자기에게 맡기라고 해서 일을 착수했다. 말이 쉬운 서점이지 막상 차리고 보니 힘에 겨웁기만 하다.

그 무렵 그의 소개로 윤지영을 만났다. 윤지영은 역시 나환자로서 성계원의 담당 의사였다. 자그마한 키에 인자한 성품이 마음에 들었고, 또 시를 쓴다는 점에서 더욱 존경이 갔다. 성계원 나환자촌은 정부에서 생계를 뒷받침하고는 있으나 집집마다 수백 수의 닭을 치고 있었다. 그래서 기십만원의 돈을 구하기에는 손쉬었다.

성한 사람이 환자들의 도움을 받는다는 가책보다 시인들의 배려가 고마와서 응했다.

1958년 8월 안양으로 직장을 옮기면서 안양에는 정귀영, 노영수, 성기조가 있어서 관악예술제를 서둘렀고, 김광섭, 모윤숙, 김동리, 제씨를 초대하여 「문학의 밤」을 개최했다. 이때마다 한하운. 윤지영은 자리를 같이하여 자신의 시세계를 군중 앞에서 피력했다. 그 누구의 위대한 문학강연보다 이 둘의 이야기에 운집한 사람들은 심취한 듯 조용했다.

안양고등기술학교 안에 부설로 성인반을 두고 A.B 두반으로 나누어 A반에는 문장강의를 위주로 한 학생을 모집했다. 여기에는 중졸, 고졸 이상의 많은 여성들이 몰려들었다. 중앙문인들이 초청되어 강의를 하는 게 인기가 있었다. 더우기 한하운의 강의 시간을 환영한 것은 그의 시를 좋아한 탓이기도 했으리라.

한하운이 명동에 출판사 무하문화사 간판을 내걸자, 나는 서울을 일과처럼 드나들었다. 한하운은 문학 서적만 탐독하지는 않았다.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깊은 관심과 일견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말하기를 몸이 성했더라면 정치나 경제 방면에 투신했을 거라고 했다.

손의 기능이 마비된 그가 나하고 탁구 실력을 겨루기로 했을 뿐 아니라 어려서 씨름판에 엄지가 되었다는 말마따나 그의 체구는 소포츠맨으로도 손색이 없었다. 하여간 다재다능한 그가 오직 문둥이란 죄명으로 문단의 외면을 받아왔음은 억울한 노릇이다. 그는 참으로 많은 일을 하고 세상을 떠났다.

신명보육원, 청운보육원 원장으로서 두 보육원을 번갈아 다니면서 어린것들을 애무했고, 기만평이나 되는 안평농장과 출판사를 경영했는가 하면, 경인종축장과 신안농업기술학교장을 역임, 한국사회복귀협회장으로 활약한 그의 일생은 다사다망했다. 한하운의 생존시의 일이지만 어떤 이는 말하기를 한하운이 출간한 모든 시집들은 그가 쓴 시가 아니라고 했다.

어떤 문둥이 시인이 빛을 보지 못하고 남긴 시를 도용했다는 것이다. 그때 나는 낭설임을 믿지 말라고 우겨댔다. 필자가 자신있게 부인할 수 있었던 동기의 한 증거를 들어 말할까 한다. 《보리 피리 》시집 속에는 「리라꽃 던지고」라는 시가 있다. 이 속에 나오는 P양은 당시 이대 재학생이었다.

 

몇 차례나 뜨거운 편지 받았습니다.

 

어쩔 줄 모르는 충격에

 

외로와지기만 합니다.

 

이렇게 시작되는 시의 주인공 P양은 초대 국회의원을 지낸 P씨의 여동생 S.J로 기억된다. 한하운에게는 여대생으로부터 부쳐오는 사진과 여러 통의 편지가 소중히 간직돼 있음을 나는 분명히 목격했었다. 그리고 P양에 띄우는 글월 대신 마음의 충격을 시로써 읊을 도리밖에 없었던 그의 진한 사랑의 농도를 내게는 일화처럼 들려 주었다.

 

지나간 것은 아름답다.

 

이제 문둥이 삶도 아름답다.

 

또 오려는 문드러짐도 아름답다.

 

이런 험로를 걸어서 그는 저승에서가 아니라 바로 이승에서 드디어 「생명의 노래」를 부르게 된 것은 참으로 시인 한하운으로가 아니라 인간 한하운으로서 은총을 받은 것이다. 그의 의지가 오랜 투병생활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삶」에서 <지나 버린 것은 모두가 다 아름다왔다>와 전혀 다른 생명 차원에서 이젠 과거의 모든 것이 아름다왔다 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건강과 달관을 획득한 것은 진실로 귀한 승리가 아닐 수 없다.

<한 세상 한 세월 살면서 태어난 보람을 꿈이라 하오리>하고 살아 생전에 말할 수 있었던 한하운, 그가 이제 저승에 가서 파랑새로 날고 있는지 어떤지는 덮어두기로 하자.
1957년 자신의 나병도 완치하고 나환자 구제 운동에 헌신하던 중 2월 28일 시병(侍病)
인 간장염으로 작고하였다.

 

 

이육사(1904-1944 )

 

민족시인.저항시인. 독립운동가. 본명은 원록(源綠) , 별명은 원삼(源三) ,후에 활(活)로 개명. 경북 안동군 도산면 원촌리에서 둘째로 출생. 지금은 그가 태어난 곳에 '청포도'시비가 우리를 맞고 있습니다. 1904년 음력 4월 4일은 그의 생일입니다. 1944년 1월16일 새벽 5시에 북경감옥에서 돌아가셨습니다. 詩 '절정<絶頂>'에는 '매운 계절의 채찍'과 '서릿발 칼날진'그때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는 경상북도 안동에서 이퇴계의 14대손으로 태어났습니다. 이 시절 선비의 자녀들이 대개 그러했듯이 육사도 다섯 살 때 할아버지에게서 한문을 배우는 등 어린 시절에는 전통적인 한학을 공부했습니다. 육사의 할아버지는 보문의숙(寶文義塾)이라는 신식학교를 운영하였습니다. 열두 살 이후(1905) 백학서원을 거쳐(19세) 일본에 건너가 일 년 남짓 머물렀던 스무 살(1923) 무렵까지는 한학과 함께 주로 새로운 학문을 익혔다.

1925년 항일투쟁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의 대열에 참여합니다. 6.10만세사건후 1926년 북경에 갑니다. 다음해 귀국한 그는 장진홍 의사가 일으킨 대구은행 폭파사건의 피의자로 붙들려 형님 및 동생과 함께 옥에 갇혔다가 장진홍 의사가 잡힘으로 석방되었지만 같은 해 10월 광주학생사건이 터지자 또 예비 검속 되기도 합니다. 1931년 북경으로 다시 건너간 육사는 이듬해 조선군관학교 국민정부군사위원회 간부훈련반에 들어가서 두 해 뒤에 조선군관학교 제 1기생으로 졸업합니다. 1943년 일본 형사대에 붙잡혀 해방을 일년 남짓 앞둔 1944년 1월 북경의 감옥에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는 무려 열일곱 번이나 옥살이를 했습니다.육사(陸史)라는 그의 아호는 그가 스물네 살 되던 해인 1927년 처음으로 감옥에 갇혔을 때의 그의 죄수번호가 264번이어서 그것을 소리나는 대로 적은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 전해지고 있다.

육사는 투쟁론의 입장 - 글이나 쓰면서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니라 온몸을 바쳐서- 에 선 독립운동가이며 또한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 저항시인입니다. 1933년 {신조선}에 [황혼]을 발표하며 등단하였으나 작품 수가 많지 않고 문단활동도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삶 대부분은 만주와 중국 조선을 오가며 살았습니다. 시대의 질곡(일본의 식민통치)에 대결하는 강인한 정신을 정제된 시형식으로 표현한 점이 그의 시가 지닌 특징이다. 유고시집으로 {육사시집}(1946)이 있다.
그가 있었기에 우리의 정신이 살아 있을 수 있습니다." 1940년대 전반의 문학사적 암흑기에 민족적인 의지와 양심으로 시를 쓴 민족 저항 시인 중의 한 사람이다.(윤동주와 더불어) 그의 시가 절박한 현실에 대한 저항과 초인 의지를 강렬한 남성적 어조로 표현함으로써 우리 시의 여성 편향적 어조(여성적 어조)를 수정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가 있다.



2006.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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