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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배우가 되려면??
비공개 조회수 8,032 작성일2013.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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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라벌 대명리철학원
달신
정신건강의학과, 불교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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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람들

[Why]

[문갑식의 하드보일드]

 

 

 

김태촌이 형이라 부른 국내

모델계의 代父 이재연

'모델라인' 회장,

 차승원을 모델로 데려다가…

 

입력 : 2013.03.02 03:05

 

 

건달 모델 CEO 폐암 사기 재기?

화려한 미소 뒤엔 거친 인생 사진 한 장이 바꾼 운명···

25세 다방 지배인 시절 찍은 사진으로 스타덤 주간지 "화보 찍자" 줄서···

대기업 광고 모델로 인기 김태촌 등과 호형호제···

고향 원주서 알아준 주먹 사고 쳐 8개 중·고교 전전···

해병대 시절엔 영창 단골 휴가땐 서울 명동에 원정···

전국의 주먹들 제압 "모델 되려면 뭐가 필요한 줄 알아?

'3씨'야…

말씨·

맵시·

마음씨" 국내 첫 연예기획사 설립

"모델, 제대접 못받는 풍토한번 바꿔보겠다" 각오로···

도신우 등 3명과 공동창업 스타 제조기···

차승원·권상우·이소라·진희경·이선진·최여진…

톱모델 수백명 키워내···

베스트 드레서상도 제정 오렌지족 등 신조어의 주역···

80년대 회사 압구정동 옮겨···

미남미녀 북적북적 대자 주민들 "물버린다" 난리났어 좌절, 그리고…

전성기이던 환갑에 폐암 사기 휘말려 회사도 날려···

그땐 매일 눈물로 지새웠지만 암도 이겼고, 다시 뛰어야지 패션은 창조산업의 꽃···

다음 한류는 패션이 될 것…

동남아·중앙亞 유망주 발굴···

전 세계로 한국 수출해야죠

 
 

한국 패션모델업계의 ‘전설’이 된

이재연은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 에도

멋쟁이였다.

모델라인 본사 1층은 어두컴컴한 분위기였으나 그가 등장하자 환하게 빛났다. / 이명원 기자

 
 
 
 
 
 
 
 
 
 
 
 
 
 
 
 
 
 
 
 
 
 
 
 
 
 
 
 
 
 
 
 
 
 
 
 
 
이재연(李載淵·67)은 강원도 최고의 '주먹'이었다.
고향 원주 바닥의 건달들이 그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었다.
반쯤 감긴 듯한 눈매에 "했걸랑요?"
식의 코믹한 어법을 지닌 184㎝의 거한은 중·고교만 8곳을 다녔다.
해병대 159기가 된 것도 도피성 입대에 가깝다.
해병대에서 오래 복무한 것도 툭 하면 사고를 쳐 영창(營倉)에 갔기 때문이다.
휴가 때마다 명동에 가 그곳 터줏대감들을 제압하며 바야흐로 '전국구 주먹'이 됐다.

그 시절 서방파 두목 고 김태촌과 양은이파 두목 조양은이 그를 형으로 모셨다.
그대로 살았다면 어찌 됐을지 모를 사내의 팔자(八字)가 사진 한 장으로 바뀐다.
서구적 얼굴에 매료된 연예부 기자들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다.

사십줄 근처인 사람들이라면 카우보이 모자 걸친 옛 의류
'맥그리거' '골덴텍스' '위크엔드' 광고 모델로 활약한 그를 기억할 것이다.
전성기를 한참 누리던 그는
한국 최초의 연예기획사라 할 '모델라인'을 만든다.
거기서 차승원·권상우·이소라 같은 톱모델을 수백명 발굴해내고 88올림픽,
2002년 한·일월드컵 전야제 행사를 디자인하며 세계로 뻗어갈 즈음
그는 돌연 찾아온 폐암과 투병(鬪病)하는 사이 사기당해 회사를 잃고 만다.
삶 자체가 한 편의 영화 같은 그를 신사동 모델라인 본사에서 만났다.
칠십 근처의 나이에도 옷맵시가 남달랐다.
이달 말쯤 테헤란로와 일산으로
회사를 옮길 계획이라는 말을 듣기 전에도 분위기가 어수선해보였다.

부모의 이혼, 방황
그의 방황은 부모의 이혼으로 시작됐다.
중국 다롄(大連)을 오가던 선친이 바람을 피우자 어머니가 집을 나갔다.
4남매의 막내였던 그에게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투성이였다.
그는 거리를 떠돌기 시작했다.

―주먹 쓰는 법을 거리에서 익혔습니까.

"원래 운동을 좀 했어요.
청도관·
오도관 같은 데서 태권도를 배웠죠.
제가 초등학교를 1년 꿇었는데 탤런트 연규진과 친구고,
그 1년 후배인 이계진(전 국회의원)과도 터놓고 지내는 사이가 됐습니다.
다 따지면 친구의 후배까지 친구가 된 셈이어서 족보(族譜)가 약간 아리송하지요."

―중·고교를 그리 많이 다니면서도
지금의 강원대 원주 캠퍼스에 들어갈 정도면 머리가 나쁘진 않았던 모양입니다.

"어휴, 그건 실력이 아니라 반(半)어거지로 들어간 거고,
한 학기도 안 다니고 입대했으니 대학 생활했다고 보긴 힘들지요."

―해병대를 자원했습니까.

"사고 치고 도망간 거나 다름없어요.
해병대에 있을 때도 툭 하면 사고 쳤고요."

―휴가 나와선 아예 명동으로 진출했습니다.

"그 당시 명동 최고의 건달 중 최남길이란 분이 있었어요.
살아 있으면 칠십 초반일 겁니다.
그 사람과 겨루다 보니 친하게 됐고
조양은의 단짝 친구로 지금은 개과천선한 김영일이란 친구도 알게 됐고요.
제대 후엔 지금의 유네스코 건물 지하에 있는 '
꽃다방'이라는 곳의 지배인이 됐지요.
그러면서 큰 사고도 몇번 쳤고요."

―그렇다면 혹시 명동 사보이호텔 사건?

"그건 한참 후의 일이고 '
심지다방'사건이라고 잘 모르실 거예요.
심지다방이 70년대 유명했던 오비스캐빈의 전신(前身)입니다.
아이,
이런 이야기는 그만했으면 좋겠는데…."

―김태촌·조양은과는 어떻게 알게 된 겁니까.

"그 사람들이 원래 무교동이나 충무로에 있는
다방을 거점으로 삼았으니 자연스레 알게 된 겁니다.
조양은은 타임다방에 있었을 겁니다.
젊었을 때 일이지만 나이 드니 조금 창피해지더군요.
김태촌씨 생전에 어느 병원 장례식에서 만났는데
자기들 큰형님이 날 형님 대접하는 걸 본 주먹들이 어찌나 머리를 굽실대던지…,

너무 민망했어요."

 


1971년 그를 스타로 만든 의류 광고.
이국적인 용 모를 지닌 그는 어렸을 적 혼혈아라는 놀림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모델라인 제공
―1971년 인생을 확 바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꽃다방 지배인으로 있을 때 대학생들에게 꽤 친절하게 해줬습니다.
당시 서라벌예대에 다니던 이재길이란 학생이 어느 날 '형!
사진 한 장 찍자'고 해요.
그분 지금은 계명대 사진과 교수로 있습니다."

―그 사진으로 뜬 겁니까?

"제가 모델이 된 사진이 무슨 대회에 나가 상(賞)을 받았대요.
선데이서울,
주간여성 기자들이 우르르 몰려 왔습니다.
다시 덕수궁 돌담길을 배경으로 한 사진이 그 잡지들에 실리면서
일약 주목을 받으면서 모델이 된 겁니다."

―모델이란 직업 자체가 잘 알려지지 않았을 때죠.

"당시 계엄령이 선포돼 군인들에게 끌려가 조사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네가 명동의 (깡패) 이재연이야!'고 묻더니 직업이 뭐냐고 해요.
'모델'이라고 하니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도 못하던 시절입니다.
나중에 설명해주니 '
무슨 남자가 그런 직업을 갖느냐'는 핀잔 듣고 풀려났습니다.
사실 모델 직업을 택한 데는 이유가 있어요.
직업란에 '
건달'이라고 쓸 수는 없잖아요."

―얼굴이 서구적으로 생겨 어릴 적에 오해깨나 받았겠습니다.

"혼혈아 아니냐는 놀림 많이 받았죠. '
'양키 파샤'라고 불렸으니까요."

오렌지족·야타족 등장하다
모델 생활은 힘들었다.
지방 공연 가면 영화배우와 가수들은 일류 호텔에 재우고
모델들은 여관으로 밀어 넣는 통에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하숙집 월세가 밀려 집에서 쫓겨날 뻔하기도 했다.
춥고 배고픈 시절이었다.

―그렇다면 워킹(Walking) 같은 것도 모두 독학(獨學)으로 배웠겠습니다.

"유일한 교육기관으로 국제복장학원의 차밍스쿨이라고 있긴 했지만
전 다방 창가에 하루종일 앉아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걸음걸이를 지켜봤어요.
참 특이한 것이 걸음걸이가 같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겁니다.
미국에서 나온 바비 존 모델스쿨의 자료를 해석해 공부하기도 했고요."

―당시 모델들은 대우가 어느 정도였습니까.

"한 5만원쯤 받았나?
형편없었어요.
제가 원서동에서 하숙 생활을 했는데 버스비가 없어 명동까지 걸어 다녔어요.
하루는 하숙비 3개월치가 밀렸는데 주인이 밖으로 책과 비키니 장롱을 다 빼놓았더군요.
돈 가져와서 찾아가라고."

―어떻게 살았습니까.

"제가 아는 사람이 꽤 많아요.
돈이 워낙 없어 양복점 세일즈맨으로 부업(副業)을 한 적이 있는데
한꺼번에 180벌 주문을 받은 적도 있습니다.
다 제 얼굴 보고 와서 인정상 한 벌씩 맞추신 거죠."

―그런 신인 시절이 2년 만에 끝났죠?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 주한미군 정보기관의 아는 분을 통해
'일자리 좀 구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맥그리거,
제일모직 골덴텍스,
위크엔드 같은 광고 모델도 그분 덕에 된 겁니다.
고단했던 생활이 그때부터 끝나게 됐죠."

―이 회장께서 거의 한국 최초의 모델 아니었나요.

"최초의 모델이라면 가수 윤복희씨를 꼽아야 할 거고,
저랑 비슷한 시기에 남자 모델 한 분은 도신우·김광수씨 정도지요.
여자 모델로는 변자영·루비나·이희재씨가 있었고요."

―'마당발'이란 말을 들을 만큼 교유(交遊) 관계가 깊은데
김옥길(金玉吉) 이대 총장으로부터도 도움을 받았다던데.

"우연한 기회에 그분을 뵙고 나서 매월 한 번씩 이대 뒤편에 있는
그분 댁의 모임에 참석하게 됐습니다.
당대의 명사(名士)들이 다 모이는 자리였습니다.
김 총장님이 손수 냉면과 녹두부침을 내주시고.
그분 냉면 마는 솜씨가 대단했습니다.
그분이 제게 하신 말씀이 아직도 생생해요.
'날 만났으니 이제 방황하지 말고 인생을 재연(再燃)하면서 살라'는.
정말 그때부터 열심히 배우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한참 잘나가던 1979년쯤부터 현역이 아닌 CEO로 변신했지요.

"전 모델이 제대로 된 대접을 못 받는 게 너무 못마땅했어요.
1979년 4월쯤 '88패션'이라는 걸 세운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88이란 이름은 저를 포함해 4명의 남자 모델 때문에 생긴 겁니다.
0을 4개 모아놓으니 88이 되더군요.
88올림픽을 생각한 건 아니고요.
그 회사를 몇년 후 모델라인으로 개명(改名)한 겁니다."

―창업 멤버가 누구누구였습니까.

"도신우·김석기·김진이라고 배우 김진규씨 아드님입니다.
1인당 200만원씩 들여 처음엔 후암동에 사무실을 냈다가 나중에 한남동으로 옮겼습니다.
그때 회사에 현석·유인촌·박광남씨 같은 분들이 있었어요.
전에 청색전화,
백색전화라는 거 아세요?
백색전화가 급행(急行)으로 설치되는 거라 굉장히 가격이 비쌌는데
그 전화 들여놓고 흥분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얼마 안 돼 남자 모델들이 다 독립하고 나서는
이희재·유혜영·유기복씨 같은 여성 모델들이 모였고요.
그때부터 전성기가 시작됐습니다."

―그러면서 회사를 압구정동으로 옮겼죠.

"사실 압구정동과 신사동 쪽에 '
야타족'이니 '
오렌지족'이니 하는 신조어(新造語)가 우리 회사 때문에 생겼어요.
늘씬한 20대 남녀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으니까요.
주민이 난리가 났었죠.
동네 물 버린다고.
허허,
그때 부동산 좀 사놨으면 지금 대단했을 텐데….

당시 이 동네엔 아스팔트도 깔리지 않았거든요."

 


송지오 패션쇼에서 자신이 양성한 후배들과 함께 피날레를 장식하고 있는
이재연. 그는 앞으로 한국 패션이 새로운 한류(韓流)의 중심이자
창조산업의 선봉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 모델라인 제공

스타의 산실(産室)
이재연은 수많은 스타를 키워냈다.

그중 제일 가슴에 남는 이가 정겨운이라고 했다.

"그 친구 아버지가 찾아와 전속 기간이 끝나기 전에 풀어달라고 간청한 걸

못 들어준 게 마음에 걸려요.

그때 그 말을 들어줄걸."

―대표적인 후배가 차승원입니까.

"그 친구가 결혼을 일찍 했잖아요.

종종 가불(假拂)을 해달라고 한 게 기억납니다.

저랑은 한 5~6년 같이 일했을 겁니다.

전 사람을 붙잡고 있지는 않아요.

다른 곳으로 가겠다면 언제든지 보내주죠."

―권상우도 모델라인 출신이죠.

"셀 수 없이 많아요.

진희경·이소라·이선진·오미란·탁재훈·최여진·최정원…. 몇백명은 될 겁니다.

지금 모델라인 비슷한 회사들이 몇 곳 있는데

한국 모델의 80%가 모델라인에서 분화(分化)됐다고 보면 맞을 겁니다.

지금까지 거쳐 간 젊은이가 3000명쯤 됩니다.

한때 대전 대구 부산 창원 울산 지사(支社)에

일본 중국 미국 독일까지 지사가 있었으니까요."

―모델이면 흔히 명품(名品)을 연상케 하는데 오히려 명품 반대론자라면서요.

"제가 대학생모델연합회와 함께 샤넬,

에르메스 같은 명품을 무대 바닥에 깔아놓고 패션쇼를 한 적이 있어요.

그 때문에 명품업체의 반발을 사긴 했지만요.

사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명품은 대량생산하는 것이지

장인(匠人)의 땀방울이 깃든 건 아니잖아요?

그게 무슨 명품이에요.

저는 명품의 기준이 달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외국 패션 제품 가운데는 명품이 많은데 우리는 그렇게 안 될까요?

예를 들면 앙드레김 같은….

"고 앙드레김 선생의 패션쇼를 처음 연출한 게 접니다.

제가 사실 그분께 여러 번 말씀드렸어요.

'생각을 팔라'고.

지금 앙드레김 브랜드가 양아드님과 며느리,

핵심 간부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데 선생 생전에 '

다음'을 준비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지금도 들긴 합니다."

―모델의 조건이 있습니까?

"남자는 일단 신장이 커야 합니다.

지금은 185~188㎝ 정도는 돼야죠.

여자는 174~5㎝ 정도.

한 석 달쯤 관찰해보면 어느 분야로 진출하는 게 좋을지 판정이 나죠.

패션모델로 갈 것인지 CF나 사진모델을 하는 게 더 나을지.

아예 연기자로 변신하는 게 더 좋을지,

그런 걸 판단해주는 게 제 역할입니다.

홈쇼핑 쪽으로도 많이 가는데 전 그 분야를 가급적 권하지는 않습니다.

이상하게 홈쇼핑으로 가면 더 발전하지 못하더군요."

―세계적으로 봤을 때 한국 모델들의 수준은 어느 정도입니까.

"파리나 뉴욕에서도 인정하는 톱모델은 남녀 합해서 열명 정도?

예전과 달리 한국 모델들의 수준이 꽤 높습니다.

국력이 발전하는 속도에 비례하거든요.

국내에서 활동하는 모델 숫자는 지방까지 포함해서 400~500명쯤 될 겁니다.

사실 모델에게는 '3씨'가 중요해요.

말씨,

맵시,

마음씨인데 그걸 다 갖추는 게 말처럼 쉽지는 않지요."

―모델이 되려는 결심은 어느 정도 나이에 하는 게 좋은가요.

"고교생 때 정도가 제일 적합하죠."

―베스트 드레서상(賞)도 직접 제정했죠.

"패션이라는 것은 멋 내기가 아니라 때와 장소에 맞춰 자신을 표현하는 겁니다.

이런 상 하나쯤 제정하는 게 패션 발전에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에서 만들었는데

벌써 십년이 넘었습니다.

수상자가 많아요.

1회 수상자가 가수 윤수일·윤시내였고요.

이은하·조용필·나훈아·윤복희·장미희…."

―정치인도 유독 많던데 이유가 있습니까.

"무슨 덕 보려고 그런 건 아닙니다.

사실 제가 아는 분들이 꽤 많아요.

박지만씨라든가 김홍걸씨 같은 분도 자주 만나는 사이고요.

정치인을 포함한 건 그분들이 사회적으로 영향이 크기 때문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두 차례나 수상했고 이명박 대통령도 한 번 받았어요.

박근혜 대통령은 옷을 아주 잘입는 분은 아니지만 본인이 고집하는 스타일이 있습니다.

본인이 원하는 이미지를 만들려는 것 아닌가 하는 추측은 해봅니다.

국회의원 지낸 조순형씨도 수상자 가운데 한 분입니다."

폐암과 좌절
모델라인이 쭉쭉 뻗어가던 시기 그의 좌절이 시작됐다.

돌연한 폐암(肺癌) 발병과 대형 사기사건에 연루돼 회사를 날린 것이다.

법정 투쟁을 하던 5년간을 회고하며 그는 "

하루하루를 눈물로 지새웠다"고 말했다.

―하필 폐암에 걸린 것을 안 게 SA엔터테인먼트라는 회사를 세운 다음이죠.

"일종의 종합엔터테인먼트 회사인데 자금 확보가 순조롭게 됐어요.

열심히 일하기 전에 건강검진이나 받자고 삼성의료원에 들렀습니다.

그때까지 전 담배를 입에 달고 살았어요.

하루 두 갑반 정도?"

―폐암 진단받았을 때 기분이 어땠습니까.

"믿기지 않았죠,

내가?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폐암 수술을 받고 나오는 날이 하필 제 외아들 초등학교 졸업식 날이었습니다.

제가 늦게 결혼해 본 늦둥이였는데 '

저 어린애를 두고 어떻게 죽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더군요.

지금 그 아이가 대학교 2학년이 됐습니다."

―수술 후 거처를 경기도 광주로 옮겼습니다.

"의사가 운동을 해 체력을 키우라고 권유하는데 아파트 한 동(棟) 거리도 못 걷겠더군요.

더구나 수술을 받고 나니 압구정동의 공기로는 숨을 못 쉴 정도가 됐습니다.

그래서 광주시 송전동으로 떠난 겁니다.

그곳 공기는 서울과 달라요."

―그때 사기사건에 연루됐지요.

"건강이 나빠지면서 아내와 아이 생각밖에 안 났습니다.

'큰일 당하기 전에 뭔가 마련해 놔야 할 텐데'라고 생각할 때쯤 모델라인을 인수하겠다는

인수·합병 전문가라는 사람이 나타난 겁니다.

주식의 75%를 인수하면서85억원을 주겠다더군요.

대신 경영은 월급 1300만원을 주는 조건으로 제게 맡기겠다는 거였어요."

―조건이 너무 좋은 걸 보니 수상한데….

"꽤 좋은 거래가 되겠다 싶어 회사도 팔기 전에 친구들에게

원주에 땅을 알아봐 달라고 했더니 치악산 근처에 호텔 매물이 있다는 겁니다.

 50억원쯤 하는데 월세도 괜찮게 나온다면서요.

그뒤에 인수합병 계약을 했는데

원래 10%인 8억5000만원을 받아야 하는데 10억원을 주는 겁니다.

전 그게 무슨 의미인지도 몰랐어요."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중도금이 포함된 거였어요.

계약금에 중도금까지 받은 꼴이 되니 직원을 보내 우리 세무 자료를 낱낱이 훑어보게 됐지요.

이십년이 넘은 회사에 털어서 먼지 안 나는 곳 있습니까?

미국 LA지사에 출장 갔다 와 보니 횡령에 배임 같은 죄목으로

그 사람이 절 고소했고 내용증명도 와 있더군요.

제가 법정 투쟁하는 4년8개월 사이 회사는 공중 분해돼버렸어요."

―화(禍)는 홀로 오지 않는다더니.

"그런 일을 겪고 보니 삶의 본질이 누구를 만나느냐에 달린 거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모델라인은 상장 폐지됐지만 다시 '

주식회사 모델라인 이재연'을 세우게 됐고

폐암도 5년이 지나면 완치라는데 7년 동안 아무 일 없었으니 이제 열심히 일만 하면 되죠.

사실 모델라인의 '라인'이 한문으론 라인(羅人)이라 씁니다.

멋지게 마무리해야죠."

―무슨 일을 계획하고 있습니까.

"모델라인을 두 곳으로 나눠 이사합니다.

강남 테헤란로 부근과 일산 호수공원 옆 원마운틴이란 곳으로요.

저는 한류(韓流)의 다음 타깃이 패션이라고 생각해요.

동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의 유망주들을 불러

우리말도 가르치고 모델로 키워볼 생각입니다.

일종의 모델 사관학교 같은 겁니다."

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
 

2013.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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