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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Salvador Dali의 작품, The Dream (1931) 설명부탁
john**** 조회수 8,401 작성일2007.07.27

이그림의뜻과의미좀설명해주세요

또달리라는화가에대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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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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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13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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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한 천재화가 살바도르 달리의 초현실적 삶과 예술
 
 
 
살바도르 달리 (Salvador Dali 1904-1989)
 
2004년은 살바도르 달리가 태어난지 정확히 100년이 되는 해이다.
달리 탄생 100주년을 두고 온 세계가 떠들석하다,라고 까지는 말할 수 없겠지만 여하튼간 미술계가 떠들석한 것 만은 사실인것 같다.
스페인을 비롯해 세계 각지에서 달리 탄생100주년 기념 전시회가 열리고 있고 얼마 전,내 주위의 지인 한 명도 오로지 (1974년 달리가 직접 새운 미술관인)‘달리 시어터'에서 개최되고 있는 '달리 탄생 100주년 회고전’을 보기위하여 달랑 배낭 하나만을 매고 바르셀로나로 떠나는 일이 있기도 했으니 2004년은 전 세계의 미술 애호가, 또는 수 많은 달리 매니아들에게 달리를 다시 만난다는 의미 하나만으로도 일종의 설레임같은 것을 부여하는 한 해인 것만은 분명하다.
 
살바도르 달리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화가이다.
라고 쓰고보니 어쩌면 그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오히려 달리는 인간적인 면만을 두고 본다면  에곤 쉴레 못지않게 내가 별로 좋아하지않는- 몇 안되는-작가중의 한 명일지도.
하지만 분명한 것은 미술가 중에서 누구의 그림을 가장 좋아하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내 입에선 '살바도르 달리'라는 이름이 바로 거론될 만큼 내가 그의 작품들 속에 푹 빠져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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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영속성(Remorse or Sunken Sphinx, 1931 )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살바도르 달리는 괴짜 예술가.오만한 천재.괴팍한 광인 등 이름 앞에 언제나 따라오는 수식어 만큼이나 그의 인생은 삶 자체가 광기에 가득 찬  예술이었고 또한 평범하지 않는 초 현실이었다.
 
1904년 스페인 카탈로니아 북부의 작은 마을에서 지방유지의 아들로 태어난 달리는 비교적 부유한 환경 속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14세 때 부터는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의 미술학교에서 공부하였다.
방탕하고 광적이고 과격한 그는 재학중 학생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일 년간 정학처분을 받기도 하고 국기 방화 사건등으로 재판을 받으며 반정부 활동혐의로 단기간 투옥되기도 한다. 결국 1926년 미술사의 답안 제출을 거부,마드리드 미술학교에서 제적되고 만다.
 
하지만 이 괴팍한 청년 달리는 마드리드 미술학교 퇴학쯤으로는 눈 하나 꿈뻑하지 않았을 듯 싶다.
그는 일 년 뒤인 1927년 파리로 가서 피카소를 만나고 독창성을 나타낸 그림들을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드디어 그때부터 초현실주의 화가로서  본격적인 활약을 하기 시작한다.그외에도 큐비즘이라든가 미래파,형이상 회화파등에서 얻은 영향은 나름대로의 독특한 그의 화풍을 이루는 바탕이 되기도 한다.
 
내란의 예감(Permonition of War,1936)
 
영화를 보다 보면 거물급 배우들이 대거 등장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쏠쏠한 눈요기와 재미를 주는 영화들이 가끔 있는데 살바도르 달리의 인생을 잘 만들어진 하나의 영화라고 한다면 이 영화에는 역시  프로이트라던가 라캉,샤넬,피카소등 당시를 주름잡던 지식인.예술가들이 단역 출연을 하며 그의 화려한 인생을 더욱 예술적으로 돋보여준다.
 
그중에서는 단지 단역으로 끝나지 않고 달리에게 평생을 두고 영향을 주었던 세 명의 인물이 있었다. 그것은 달리의 아버지 돈 살바도르 달리와 그토록 오만한 달리가 '내가 존경하는 당대의 두 인물은 아인슈타인과 프로이트뿐이다'라고 드러내놓고 영향을 받았음을 인정했던 프로이트.그리고 시인 폴 엘뤼아르의 부인이기도 했던 그의 영원한 여인 갈라-이 세 사람이다.
 
달리의 아버지 돈 살바도르 달리는 부유한 공증인이었는데 음악과 그림을 좋아했고,집을 멋지게 꾸미고 자신이 멋지게 꾸민 집에 예술가들을 초대해 파티를 열며 인생을 즐기기를 좋아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총명했던 첫 아들이 7살에 병으로 죽자 그 아들을 잊지 못하고 그 후 삼년 뒤에 태어난 둘째 아들에게 첫 아들과 같은 이름을 지어준다.
워낙 첫 아들을 총애했던 그의 아버지는 달리를 첫 아들의 부활로 믿을만큼 첫 아들의 그늘 속에 달리를 가둬두고 매사에 그에 맞추어 교육시켰으며 예술적 재능을 일찍이부터 드러낸 달리에게'큰애였다면 더 잘 그릴 수 있었을텐데'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할 정도로 달리의 재능마저도 죽은 첫 아들과 비교했다.달리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아무리 잘해도 둘째아들로서 아버지를 기쁘게 할 수가 없었으며 반면 아무리 천방지축으로 날뛰며 난폭하게 굴어도' 큰 애짓이니까..'하면서 귀여움을 독차지할 수도 있었다.
 
소녀라고 믿었던 6세의 달리,바다 그림자 안에서 잠자는 강아지를 보기 위하여 물의 표면을 듦-1950
 
달리는 성장하면서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자신에게서 형의 모습을 찾으려고 하는 아버지에게 심한 반발의식을 갖게되며 그런 아버지의 비위를 건들고 약을 올림으로서 자기의 존재를 크게 부각시키려고 한다.
그리고 비평가들은 이러한 달리의 강요된 주체성의 혼동은 후에 그의 그림에서 이중상,혹은 다중상의 특징을 낳게했다고 평하기도 한다. 
 
또한 달리의 초현실적 성향에 대해서 비평가들은 달리가 1923년에 알게된 이탈리아의 화가 키리코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하는데 오히려  그의 작품들을 들여다보면 누가 보더라도 달리의 작품들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의 큰 영향을 받은 것은 명백한 사실이라는 것을 쉬이 짐작할 수 있다.
 
마드리드 미술학교 시절 프로이트의<꿈의 해석>이라는 책을 읽은 21살의 달리는 일생일대의 발견이라며 그 책에 매료되었고 그때부터 프로이트에 향한 짝사랑이 시작된다.
여기서 짝사랑이라고 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21살의 달리가 34살이 될때까지 프로이트를 만나기 위해 상당히 애를 썼는데 그때마다 프로이트는 그를 만나주지 않았고 번번히 헛탕을 칠 때마다 오만한 성격의 그가 얼마나 비위가 상했는지,또 그 상처가 얼마나 컷었을까에 대해서는 짐작하고도 남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8년 34살의 달리는 프로이트와의 첫 약속이 정해졌을 때 프로이트에 대한 (그 나름대로의)최대한의 예의를 갖추고 프로이트의 집에 방문한다.
하지만 실제 프로이트와의 만남의 자리에서 그가 원했던 것과는 정 반대로 두 사람은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초조해지고 흥분한 달리는 자신의 논문을 가져가 제발 좀 읽어주십사하고 여러번 청하지만 프로이트는 논문에는 눈도 주지않고 달리만 계속 노려보듯 쳐다보았다.싸늘한 무관심과 냉대에 달리가 얼마나 큰 상처를 입었는가는 방문 직후에 그린(죽음의 그늘이 너무나 명백하게도 드리워진)프로이트의 초상화에 잘 나타나있다.
 
1938년 달리가 그린 프로이트 초상
 
하지만 프로이트는 사실 그 반대였다.
프로이트가 다음 날 그들의 만남을 주선했던 작가 스테판 쯔바이크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나를 보호자겸 성자로 모시는 초현실주의 멍청이들을 보았었지요.하지만 어제 본 그 스페인 청년은 솔직하고 열렬하며 뛰어난 솜씨로 내 판단을 바꾸어 놓았습니다.그가 어떻게 그런 그림을 그릴 수 있었는가를 분석적으로 조사해볼만 하군요' 
 
달리에게 있어서 그의 아버지와 프로이트. 어떻게보면 이 두 사람은 그의 인생과 작품에(동류의)상당한 영향을  끼친 사람들이긴 했지만 달리가 끝까지 극복하지 못한 유일한 대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달리의 영원한 여인-갈라가 달리에게 끼친 영향은 앞의 두 사람과는 그 의미를 달리한다.
 
“한 번의 입맞춤이 나의 새로운 미래를 결정했다. 갈라는 내 인생의 소금이며 내 인격을 강하게 해주는 목욕, 나와 꼭 닮은 사람, 바로 나이다.”
1929년 프랑스 시인 폴 엘뤼아르의 아내 갈라를 만났을 때 달리는 안에서 솟구치는 열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리고 엘뤼아르와 이혼하고 1934년 달리와 결혼한 갈라는 그의 열정대로 평생동안 '달리의 모든 것'이 된다. 
 

Portrait of Gala with a Lobster (Portrait of Gala with Aeroplane Nose), circa 1934
 
갈라는 달리 그림의 가장 탁월한 해설자였고, 초현실주의의 뮤즈로 그의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었으며, 최고의 모델이었다. 달리의 수 많은 작품 속에는 갈라가 출현하게 되고 심지어 성모 마리아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모든 여성이 갈라로 변신되었다.그녀는 달리의 정신 분열증적 광기를 다스리는 유일한 사람이었고 또 그의 모든 것을 전담했던 활달하고 영리한 매니져이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경제문제까지 전담했던 그녀는 달리가 주문받은 그림을 다 그릴 때까지 작업실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문을 잠그기까지 했다고 한다.또한 달리보다 12살이나 연상인 그녀는 늙어감의 공포를 잊기위해 미소년들과의 성관계에 병적으로 집착하기까지 했는데 갈라의 성적 방종을 채워주기 위해 달리는 쉴 새 없이 작업해서 돈을 벌었다.
 
구운 베이컨 조각과 함께 있는 부드러운 자화상-1941
 
40m짜리 빵으로 세계를 뒤엎을 생각을 했던 자유로운 상상가 이기도 한 달리는 또한 자아도취의 전범이라고도 할 수있다. 22살때 자신의 재능을'각별히 출중한 내 실력'이라고 떠들어대고 자신을 곧 세계의 배꼽이라는 나폴레옹식 선언을 한다.
 
이 오만한 예술가 달리는 1942년 38세의 나이로 자서전을 출간하기도 했는데 그 출간 역시 파격적이다.'작가들은 보통 일생을 다 산 다음에 말년에 가서 회고록을 쓴다.모든 사람들과 반대로 가는 나는 회고록을 먼저 쓰고 그 다음에 그 내용을 사는 것이 더 지적인 것으로 보였다.산다는 것! 그것을 위해서는 인생의 반을 다 청산할 줄 알아야 한다.'
 
그에게 있어서 어떤것이 지적인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떻게 보면 그는 그의 말대로 인생의 반을 청산할 줄 아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미 달리는1937년 이탈리아 여행을 계기로 르네상스 고전주의로 복귀하려했고 초현실주의 화가모임에서 제명당했으며 미국에 귀화한 후 작품 활동을 왕성히 전개해 왔기 때문이다.그런 달리를 두고 이미 획득한 명성에 기대어 미국식의 자본주의적 예술형태에 매몰돼 예술성을 달러와 맞 바꾸었다는 비난이 쏟아지기도 했지만  그 부분에선 아마 그러한 비난도 달리에게는 라디오 채널을 돌릴 때 주파수 사이에서 생기는 잡음보다도 더 하찮게 들리지 않았을까.
 
현대 화가 중에 달리만큼 광범위하고 왕성한 예술 활동을 했던 사람도 드물 것이다.달리의 창작에 대한 광적인 열망은 그의 생애를 통해 회화에 그치지 않고 소설을 출판하고 발레의 대본을 쓰며 영화 제작이라던가 연극이나 발레의 무대장치 디자인,조각등 다양하게 전개된다.심지어는 백화점의 디스플레이, 가구와 보석세공등 창작에 대한 달리의 열정은 끝이 없었다.
 
돈 밝히는 화가였지만 그만큼 돈 잘버는 화가이기도 했던 달리.그의 생활은 화려했고 그리고 그는 그 생활을 충분히 즐기며 살았다.
 
달리의 인생과 그가 추구했던 예술세계를 들여다보면 그는 정말로 시대를 잘 타고 난 몇몇 안되는 예술가 중의 한 명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한다.만약 달리가 20세기가 아닌 19세기나 18세기에 태어났더라면,또 그가 성장하며 느끼던 환경이 석양이 불타고 바닷물이 바위사이를 넘나드는 유럽의 아름다운 카타퀘스 해안이 아니라 황량하고 먼지이는 중동의 어느 시골 마을이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못 말리는 꼴통 아니면 세상에 둘 도없는 미친놈쯤으로 전락해서 그의 주위의 몇 몇 만이 그를 기억하고 그나마 그를 기억한다는 것도 마침 안주가 떨어진 선술집의  어둑한 술자리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 되어버리지는 않았을까.
 
하지만 다행히 그는 20세기에 태어났고 현 시대에 와서 초현실적인 그림을 그린 그를 두고 미친놈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오히려 사람들은 현대인의 지성과 이성으로 포장된 억압된 현실 속에서 본성에 대한 무의식의 세계를 끌어내어 유감없이 표현해낸 달리의 그림을 보면서 대리만족을 느끼기도 한다.그의 자유스러움을 더 이상 방종이라 말하는 사람은 없으며 그의 오만은 배짱으로 이해되며 또한 그 앞에서 유머와 여유를 느끼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그가 그리는 것은 결국 통상적인 상식과 경험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의식의 위력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순결을 뿔로 범하게 될 젊은 처녀 '(Young virgin Autosodomized by her own chastity,1954)
 
현실속의 무의식의 세계-그것은 때로는 꿈으로 표출되기도 하고 잠결이나 술 기운이 도는 몽롱한 상태에서 쉽게 의식의 범위를 침범한다.그리고 누구나 경험하는 것 이기도 하다.
 
우리는 흔히 어떤 악몽을 꿀 때 가위에 눌린다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사람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나같은 경우는 어렸을 때 부터 유난히 가위에 잘 눌리곤 했다.사실 어린 시절의 현실에 내포되어있는 내 무의식 속의 공포라는 것은 티브이에서 보았던 전설의 고향이나 남량특집 수사반장의 여운 따위 정도였었을 것이다.
 
어린시절.그런 드라마들을 보고 난 날이면 어김없이 그것이 꿈으로 나타나곤 했는데 나에겐 그건 꿈이 아니라 반 무의식 상태.즉,옆에서 잠들어있는 언니의 얼굴이 창을 뚫고 들어 온 달빛에 희미하게 움직이는 것이 보이고 시계가 째깍이는 소리라던가 냉장고가 돌아가는 소리까지 들려오는 그런 상태에서 어느 순간 그날 저녁 전설의 고향에 나왔던 그 무시무시한 구미호가 내 머리맡에서 소리를 죽이며 함께 움직이고 있는 것을 목격하는 것이다.
숨막혀오는 공포.그리고 소리도 지를 수 없는 순간.현실이라고 하기엔 너무 비현실적이고 그렇다고 환상이라고 하기엔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던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가위눌림은 지금도 계속된다.물론 더 이상 꿈 속의 등장 인물이 구미호라든가 수사반장에 나왔던 최면술 걸린 장미희는 아니지만 몸이 엿 가락처럼 늘어지며 내 몸의 한 부분이 이상하게 변해간다던가 누군가로 부터 목이 졸리워지는 듯한 느낌들을 자주 경험하게 된다.
 
 
그렇다고 내가 꾸는 비 현실적 이지만 분명히 의식하게 되는 꿈들이 전부 공포스러운 꿈만인 것은 아니다.때로는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어이가 없을만큼 격렬한 쾌감으로 몸 전체가 나른해지는 꿈을 꾸기도 하고 또는 가슴 언저리를 붙잡아야 할 만큼 물리적인 아픔까지 느끼는 슬픔을 경험하기도 한다.그리고 밤 새 시달렸던 어떤 꿈이 그 이미지는 생생한데 그것을 확실한 존재로 붙잡을 수가 없을 때도 있는데 그 때는 영락없이 하루 종일 제 이름을 까먹은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답답하게 지내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게 환상과 현실의 중간 지점에서 헤메이는 것 같은 느낌은 꿈 뿐만이 아니라 때로는 일상 속에서도 경험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가령 예를들면 한 번도 가본 적도 없고 가 보았을리도 없는 어떤 장소가 마치 전생에 어느 한 순간 내가 그곳에 살았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길거리의 돌맹이 하나까지 아주 익숙한 분위기로 다가오기도 하는 것.또는 친구들과 웃고 이야기를 하는 순간 그때 들려오는 음악이나 우리가 나누던 이야기,그런 것들이 전에 한번 똑같이 경험했던 것 처럼 느껴져 어떤 당혹스러운 기분까지 들었던 일들.-물론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면 반대로 늘 다니던 길목이 어느 순간 아주 낯설게 느껴져 나 혼자만이 세상과 동떨어진 이방인이 되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든다거나 어느 날 문득 집안의 한 가운데 서서 나를 감싸고 있는 공기가 생소하고 바뀔리가 없는 방의 크기마저 제 멋대로 줄어들어 보이거나 아니면 너무 황량하게 보일 때가 있다.그리고 앞 서 말했 듯 이 모든 경험은 누구나 했을법한 경험일 것이다.
 

하프의 명상 1932-33년
 
내가 달리의 그림을 좋아하고 그의 그림에 빠져들 수 밖에 없는 것은 달리의 그림을 보고있노라면 나에게 있어서 어느 한 순간 꿈이나 잠시의 환상으로 표출되던 공포와절망,슬픔,고민,쾌락 같은 것이 그의 비현실적인 그림 앞에서 오히려 논리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실제로 달리는 회화의 목적은'의식세계와 무의식의 세계,내적세계와 외적세계 사이의 육체적 장벽을 동시에 제거하고,현실과 비현실및 영상과 행위를 서로 합하여 혼합되어 전생명을 지배하는 초현실성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달리의 창작수법에 대해서 비평가들은 '편집광적.비판적방법' 이라던가 나름대로 그의 그림에 대해서 여러가지 해석을 하고 있지만 사실 달리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누가 그의 그림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어쩌면 그림을 그리던 달리 자신도 후세 사람들에게 자신의 그림이 완벽하게 이해될 수 있으리란 기대는 하지 않지 않았았을지도.
 
'거기는 정말 성스러웠다. 그야말로 천국이었다'라며 어머니 뱃속의 태아 적의 이야기하는 달리를 두고 어느 누구도 그 말에 대한 진실성의 여부를 거론하지 않 듯 그의 그림은 그냥 눈으로 보여지는 것을 느끼고 즐기는 것 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아니,그의 그림을 두고 그 이상을 생각하는 것은 그림보다 초 현실적인 그의 인생을 이해하는 것 만큼이나 벅찬 일이 되지 않을까.
 
 

 
The Sick Child (Self-portrait in Cadaquйs), circa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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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morse or Sunken Sphinx,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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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omatic Beginning of a Portrait of Gala (unfinished),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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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crophilic Fountain Flowing from a Grand Piano,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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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hantom Cart,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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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trait of Gala with Two Lamb Chops Balanced on Her Shoulder,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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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arition of My Cousin Carolinetta on the Beach at Rosas,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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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sochistic Instrument, circa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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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ower,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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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aeological Reminiscence of Millet's Angelus,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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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ce of Mae West Which May Be Used as an Apartment, circa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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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nthropomorphic Cabinet,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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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eep,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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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position - Portrait of Mrs. Eva Kolsman,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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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donna of Port Lligat (detail), 1950

 

The Queen of the Butterflies,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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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lн Nude, 1954

 

Soft Watch at the Moment of First Explosion, 1954

 


The Grand Opera, 1957

 

Modern Rhapsody - The Seven Arts, 1957

 


The Ascension of Christ, 1958

 


Birth of a Divinity, 1960

 


Meditative Rose,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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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allucinogenic Toreador, 1968-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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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lн Lifting the Skin of the Mediterranean Sea to Show Gala the Birth of Venus

(stereoscopic work, right component), 1977

 

 

 


 

2007.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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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lvador Dali (1904.5.11~1989.1.23)

스페인의 대표적 초현실파 화가

1904년 5월 11일 스페인 카탈로니아 북부의 작은 마을 피게라스에서 공증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달리가 태어나기 3년 전에 이미 죽은 그의 형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은 그는 자신에게서 죽은 형의 모습을 찾으려는 데에 강한 반발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후일 그는"나는 결코 죽은 형은 아니며 살아 있는 동생이라는 것을 항시 증명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그의 부모는 아마도 이러한 아들의 죽음 때문에 달리에게 더욱 더 아낌없는 사랑을 쏟아부어 자기 중심적이고 불같은 성격을 갖게금 조장하였던 것 같다.  더군다나 죽은 때의 형의 환상과 자신을 동일시하여 일찍부터 그는 자신의 작품에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던 주제인 죽음에 대한 강한 관념에 익숙하게 되었다


한편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너의 형은 십자가의 그리스도에 귀일 하였노라)고 들려주곤 함으로써 어린 달리를 신비의 혼란 속에 빠지게 하였으며 그의 극히 내성적이며 수줍던 성격이 때로 격렬한 폭발을 보인 것도 이 사실과의 깊은 관련을 보인다. 후일 달리는 종교화에 대해 대단한 집착을 보이는데 그의 대표작 (십자가의 요한의 그리스도)는 이때부터 받은 자극에서 기인하는 것이라 보겠다.

 

십자가의 聖 요한의 그리스도

1951년 . 캔버스 . 유채
40.5x30.5cm


시카고 플레이보이 소장

갈릴리의 땅을 연상케 하는 리가트 항. 하늘 높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그렸다. 더욱이 예수가 위에서 내려다 보이도록 그린 변형된 구도가 특이하다. 달리는 크리스찬은 아니지만 풍부한 상상력과 놀라운 지혜로서 종교화를 제작하였는데, 그 공통점은 편집광적 비판 방법과 자기 도취에서 벗어나 매우 정교하고도 수려한 필치의 사실적묘사를 보이며, 전혀 새로운 시각에서 포착한 구도를 도입하여 형이상학적 작품을 이루었다는 점이다. 화면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지극히 정상적인 모습의 사실묘사로 이루어졌기에, 이전의 작품들에서 느껴지던 괴이한 공포감과 처절한 느낌보다는 엄숙하고 신비로워 숙연한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면에서 '현대의 종교화'라 일컬을 수 있겠다.

 

초기 단계

달리는 10살 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1917년 작품으로 추정되는 그의 초기작품 <바느질하고 있는 안나 할머니>에서 피조트의 영향을 볼 수 있으며 어린 소년이 그렸다고 믿기 어려운 뛰어난 묘사력을 보여주고 있다.  5년 후, 그의 미술학교에서 공부하기 위하여 마드리드 학생 기숙사에 들어 가는데 그곳에서 결국 퇴학당함으로써 그의 수업을 마감하게 되지만 부뉴엘과 로르카와 같은 새로운 예술 사조의 탐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지때방 학생들과 우정을 갖기 시작 하였다.  이 당시에는 암푸르단 평원의 풍경과 20년대 피카소의 지중해적 고전주의에 의존한 입체파적인 그림들을 번갈아 가며 제작하였는데 이것은그의 회화 양식에 있어 구성과 소묘에 엄격성을 지니게 하여 이후 그의 전 생애에 걸쳐 이러한 특징을 유지하게 되었다.


창가에 서 있는 소녀, 1925

달리의 여동생 안나 마리아의 두 초상화는 1925년의 전시회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는데 이 전시회에는 파카소도 방문하였다.  정확하고 차가운 이미지의 색조는 이 시기의 몇몇 글에서 논의되었던 "성스러운 객관성"이라는 정신을 표현하고 있다.  감상자에게 등을 돌리고 있는 주제는 독일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로부터 차용된 것인데 불과 일 년 후 초현실주의의 그림 안에서 왕성하게 표현되는 꿈의 해방을 예고하는 것이다.

 


비너스와 어린 큐피드, 1925

불확실한 신화적 인물들이 등장하는 이 장면은 이 시기 피카소에 의해 실행되었던 지중해적 고전주의와 같은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달리는 아직까지도 이런 종류의 주제를 큐비즘의 기법과 더 나아가 인상주의의 풍경화 기법으로 신중히 실험하고 대치시키고 있다.


입체주의적 자화상, 1926

이런 종류의 작품에서 달리가 사용한 모델들은 1910년 피카소에 의해서 그려진 칸바일러나 볼라르드의 초상 작품을 기억나게 한다.

 

 

정신 착란의 그림

처음 예술활동을 시작할 때부터 달리는 끊임없이 자신의 그림에 대한 시와 이론적 주석을 발표하면서 회화와 문학 작품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였다.  이 글 중 몇몇 작품은 그의 초현실주의의 여러 특징과 유명한 편집광적 비평적 방법을 일찍부터 예고하고 있다.1929년 파리의 초현실주의에 가입하면서 그의 예술적 개성은 성숙한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다.  이 후 10년동안 달리는 이 운동에 전적으로 참여했으며 이 그룹의 최고 지도자인 앙드레 브르통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달리는 그의 화업에 있어 중요한 이 시기에 <초현실주의 혁명>, <혁명에 봉사하는 초현실주의>, <마노타우로>와 같은 초현실주의의 공식적인 기관지에 정규적으로 글을 기고하였다.  또한 이 때는 달리의 영원한 동반자이자 모델이며 뮤즈와도 같았던 갈라와의 관계가 시작되던 해이기도 했다(당시 갈라는 시인 폴 엘뤼아르와 결혼생활을 하고 있었다).  


소름의 시작, 1928

초기 작품들 중에서 완전히 초현실주의적인 성향을 띤 작품 중의 하나.  달걀 노른자처럼 끈끈하고 내장과 같이 부드러운 형태는 도망가는 선들, 글자, 그리고 숫자에 의해 표현된 엄격한 기하학적 공간의 도식 안에서 분배된다.  사물들의 정확한 표현과 재현된 내용 안에서의 비현실성의 혼합은 달리의 이후 모든 작품들에 있어서 기본적인 골격을 형성한다.

 

정신 착란적 주제들

1930년대는 달리에게 있어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 10년이었다.  이 때 그의 대부분의 주제들이 표면화되는데 유연하게 늘어진 시계(<기억의 영속성>, 1931)나 이중 이미지(<보이지 않는 남자>, 1929~1933), 부패한 음식들과 신체 기관(<섹스어필의 환영>, 1934), 밀레의 <만종>에 대한 집착과 같은 주제들이 표현된다.  다른 여러 이론적 글들을 통해 그의 편집광적 비평적 방법의 윤곽이 드러났으며 공동작업한 <황금의 시대>라는 영화가  프랑스의 검열에 의해 상영이 금지됨으로써 그의 추문이 더욱 더 확고하게 굳어졌다.  달리는 과장되고 세속적인 이미지들을 계속하여 만들어냄으로써 곧바로 대중적인 인기 작가로 변하여 갔고 언론의 덕택으로 유럽에서와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대단한 성공을 맛보게 되었다.

변형(anamorphosis)

변형(anamorphosis), 또는 왜곡된 형상은 초현실주의 그림에 당연히 나타나는데 이러한 기법은 감각의 거짓성을 나타내는 예로서 바로크 시대부터 그림에 나타나는 수사학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다.  달리의 그림에는 이같은 시각적 기법이 자주 나타난다.  이중 이미지와 보이지 않는 이미지를 소재로 <보이지 않는 남자>를 비롯하여<갈라의 영광스런 세 수수께끼들>을 제작하였다.


보이지 않는 남자, 1929~1933

 달리는 형상을 다양한 오브제의 묘사로 대체하여 그림을 그린 16세기 매너리즘 화가 아르침몰도의 영향을 받는다.  여기서 그는 처음으로 이중 이미지 또는 보이지 않는 이미지의 주제를 접목시키고 있다.  이 작품은 1933년 완성하지 못하고 포기하였으나, 편집광적 비평적 방법을 인용하면서 꿈의 내용을 적용시킨 완전한 예이다.

 


나르시스의 변모, 1937

나르시스의 신화는 특별히 달리에게 흥미로운 주제었으며 달리의 나르시시즘은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개념이다.  더욱이 연못의 물 안에 반사되어진 이미지와 현실적 이미지 사이의 혼동은 그 배경에 깔린 죽음의 이미지와 함께 이러한 이중 이미지 뒤에 감추어진 거의 불가사의한 상징이다.

 

달리는 날카롭고 정밀한 소묘가 주된 역할을 하도록 물감을 단조롭고 적게 사용하고 다른 모든 기법을 포기한다.  이러한 시각적인 정밀함은 환상적인 주제와 대조를 이룬다.  이와 같은 역설적 표현은 20, 30년대 초현실주의자들에 의해 가장 많은 존경을 받은 화가 조르조 데 키리코의 환영적이고 기념비적인 도시의 그림에서 배운 것이며, 또한 카다케스의 꾸불꾸불한 절벽을 관찰하면서 배우게 된 것이다.  수평선의 암시가 인물들을 위협하는 이러한 텅 빈 풍경은 젊은 시기의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빛으로 가득 찬 화면에 나타나는 정례식의 변형과도 같은 종류의 그림 안에서 달리의 정신 착란을 표현하기 위해 즐겨 쓰여지던 화면이다.

 

달리의 이미지는 비록 그 속에 어떤 의미가 숨겨져 있다 하더라도 자유 연상에 의해 표현된다. 때때로 달리는 꿈을 거의 문학적으로 그렸는데 그러한 작품들은 잠에서 깨어나 캔버스에 옮기려 분투하는 화가에 의해서 기억되어져 다소 근거가 확실한 플롯으로 구성된 환영들이다.  종종 이러한 그림에서는 환영의 증인과도 같은 어린 소년의 이미지가 등장하는데 이는 유년 시절로 회귀하려는 화가의 꿈과 잠재 의식의 비유로 나타난다.

 

 


현기증, 또는 쾌락의 탑, 1930

키리코의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 가장 대표적인 형이상학적 그림이다.  그림의 외부에서 투사된 검은색 그림자와 신비스러운 형상은 거대한 위협으로 다가오며, 이것은 불안전한 평형상태를 이루고 있는 공도 그러한 역할을 한다.  한 쌍의 부부, 사랑과 죽음의 상징, 그리고 사자의 머리는 <위대한 수음자>와 이 시기 다른 그림에서도 역시 나타난다.

 


섹스-어필의 유령, 1934

 어린 달리는 거의 주체할 수도 없는 목발을 한 늙은 노파의 신체를 바라보고 있다.  그 노파의 상체 부분은 거대한 소세지로 이루어졌으며 이렇게 하여 모든 먹을 수 있는 것들과 대립된 죽음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목발은 때로 달리의 회화 세계에서의 성불구를 상징한다.

 


잠에서 깨기 직전 석류 주변을 날아다니는 한 마리 꿀벌에 의해 야기된 꿈, 1944

아주 먹음직스러운 음식물-갈라-위로 덤벼들고 있는 두 마리의 호랑이는 꿈 속에서 벌의 이미지이다.  착검을 한 장총은 분명히 곤충의 위협적인 찌름을 암시하고 있다.  에로티시즘이 폭력적인 연회장으로 달리의 작품에 다시등장하고 있다.

 


소녀라고 믿었던 6세의 달리, 1950

  편집광적이고 불안한 분위기를 재창조하여 카다케스 해변의 어린 시절의 꿈을 다시 표현하였다.

 

흘러내리는시계

달리의 잘 알려진 편집광적 소재 중 하나는 부드럽게 녹아 내리는 듯한 오브제의 재현이다.  <기억의 영속성>과 <정거장의 때이른 석화>와 같은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처음으로 그 유명한 흐물흐물한 시계가 등장함으로써 부드러운 오브제가 일반화되었다.  달리의 그림에서 부드러움은 어떠한 딱딱한 대상에게나 적용되며 일반적으로 꿈의 세계의 의식적 증거물인 유령적 또는 환영적 조건을 지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계가 표현된 작품에서 시계는 아주 심오한 함축적 이미지로 시간과 공간의 상호작용의 관계성을, 즉 '4차원 세계'를 암시하고 있다.  달리의 모든 작품에서 항상 기억해야만 하는 것은 부드러운 것은 소화될 수 있는 것, 자양분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이다.  이것은 상호 침투될 수 없고 다른 상태로 변화될 수 없는 딱딱한 성질의 것과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정거장의 때이른 석화, 1930

     <기억의 영속성>이라는 작품을 완성하기 일 년 전 부드러운 시계가 표현된 첫 작품이다.  앙상한 인체는 기차역이 연상케 하는 동적인 특징과 대조를 이룬다.  이렇게 형이상학적 풍경화로 변화하는 작품은 1930년대 초반에 많이 나타난다.

 

기억의 영속성

 


4차원을 찾아서, 1979

     아인슈타인의 공간과 시간은 이 작품에 있어서 볼록하고 오목한 굴 옆의 바퀴와 부드러운 시계에 의해 암시된다.  등을 돌리고 있는 한 쌍의 인물들은 라파엘의 작품 <아테네 학당>에서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연상케 한다.

 

 

서랍

달리는 마요카라 출신의 중세 말기의 지성인 라이문도 루리오나,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인 줄리오 카밀로의 <기억의 연극>에서 영감을 받아 중세와 르네상스의 기억술과 연관된 기억의 바퀴와 기타 기계장치에 관심을 보였다.  달리는 일생을 통해 많은 그림에서 특징적인 조형 요소인 가구나 인물로 기억술과 관련된 장치를 번안하였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서랍이다.

 


불이 붙은  기린, 1936~1937


 

우주적인 운동 선수, 1968

 

서랍들은 무의식을 의미한다.  

달리는 "인간의 신체는 그리스 시대에는 순수한 신플라톤적이었다.  오늘날의 신체는 비밀스러운 서랍들로 가즉 차 정신분석 학자들만이 열 수 있다."라고 쓰고 있다.  

건축물을 사용한 비유도 이와 유사하게 해석될 수 있겠다.

 


인간 형상을 한 캐비넷, 1936

달리는 이탈리아 바로크 화가인 브라첼리의 <카프리치>의 작품에서 가구 형태를 한 인물상의 영감을 받았다.

 


 

스페인, 1936~1938

     스페인 내란과 관계되는 다른 여러 작품들 중 하나이다.  두 기사가 창을 들고 싸우는 장면은 여성의 가슴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여자의 머리는 폭력적인 전투 중에 있는 인물 표현으로 이중 이미지이다.  이 전쟁 장면은 레오나드로  다 빈치의 유명한 <앙기리아의 전투>를 위한 소묘 작품들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작품에 인용하였다.  반쯤 열린 서랍에 걸려있는 붉은색 손수건은 전쟁의 비극적 상징을 표현하고 있다.

 

소름끼치는 미와 먹울 수 있는 미

1933년 달리는 아르누보 건축의 "소름끼치는 미와 먹울 수 있는 미"에 대하여 글을 발간하였다.  젊은 시절부터 건축 디자이너인 가우디의 작품과 카탈란 지방의 현대 미술에 친숙했던 달리는 이같은 유기적인 표현과 장식의 풍부함에 매료되었는데 달리는 "고체화된 욕망으로서의 건축"이라고 말하였다.  이에 고무되어 먹을 수 있는 것과 카니발리즘과 관련된 식도락적인 비유와 관념이달리의 사상과 도상에 있어서 가장 함축적이고 중대한 주제 중의 하나가 되었다.  보편적으로 먹을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타낸다.  먹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은 썩기 쉽고,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부패하며 결국 죽음이 기다린다.  동시에 음식을 만드는 것이나 먹는 것은 모두 딱딱한 것에서 부드러운 것으로 변화하고 변형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먹는다는 것은 마치 인식을 먹는 편집광적인 비유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런 방법으로 인간은 스스로 그들과 멀리 있는 것들과 융합하게 된다.  달리의 그림들은 이런 형식으로 자양분을 암시하는 장면과 그가 좋아하는 음식물들 - 강낭콩, 갈비, 빵, 달걀 프라이 - 로 채워지게 되는데 이것은 독특하고 환각적인 도상을 창조한다.


삶은 강낭콩이 있는 부드러운 구성 - 내란의 예감, 1936

더욱 공격적인 방법으로 탐욕스런 식욕과 죽음의 의미를 함축적으로 잘 나타낸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는 연회적인 성격을 다루지 않고 그 모든 반대의 것을 다루고 있다.  선택은 존재하지 않는다.  최후의 수단은 교살당한 신체 안에 있는데 그 신체로부터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달리는 이렇게 하여 비극적 고뇌와 전쟁의 예감을 표현하고 있다.

 


가을의 카니발리즘, 1936~1937

탐욕스런 식욕과 죽음의 연관성이 나타나는 그림 중 하나이다.  달리는 모든 종류의 요리 기구를 세밀히 묘사하였고 빵과 과일과 고기 묘사와 함께 죽음의 연회를 창조하고 있다.  해질 무렵 가을의 금빛 색조는 폭력적인 화면을 부드럽게 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유명세와 초현실그룹과의결별

 브르통과 이 어수선한 시대에 좌익에 연루된 다른 초현실주의자들과 달리는 차츰 불편한 사이가 되었는데 이는 그가 히틀러를 지지하기 때문이었고 - 달리는 항상 이를 부정했다 - 그칠 줄 모르는 돈에 대한 그의 탐욕 - 달리가 이를 부정한 바는 없다 - 때문이었다.  이것은 달리의 작품과 그의 지적인 총명성에 찬탄을 보내던 브르통의 존경어린 표현과 칭찬을 유보하게 만들었으며 30년대 중반부터 그 조짐을 보였듯이 공식적인 결별을 하게 되어 드디어 1939년 달리는 초현실주의 그룹에서 추방된다.  그 때부터 달리는 "달러화에 굶주린 화가"로 초현실주의자들 사이에서 통하게 되었는데 그 별명을 브르통이 만들어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달러를 숭배하는 정신속에서 갈라를 그리는 달리, 1965

사람들은 달리의 돈에 대한 넘치는 열정에 대해 비방한다.  이 작품은 이러한 비방에 대해 달리가 약간은 과장되게 그린 그림이다.  이것으로 앙드레 브르통에 의해서 "달러에 굶주린" 화가라는 별명이 붙여지게 되는 동기가 되었고, 이 별명은 달리라는 본래 이름에 철자를 바꾸어 만들어졌다

 

전통에의 회귀

달리는 그의 특징적인 주제와 편집광적 비평적 방법들을 포기하지 않고 전통적인 회화로 가까이 접근함으로써 초현실주의와의 공식적인 결별의 감정을 달랬다.  갈라와 함께 스페인 북부 카다케스 부근에 정착하면서 종교적 주제를 중심으로 그의 예술 세계를 담아내어 <리갈항구의 마돈나>, <십자가에 달리신 성 요한의 예수>와 같은 주제로 여러 작품을 제작하였다.  또한 제 2차 세계대전  시기부터 그는 <원자의 레다>, <비키니 섬의 세 스핑크스>의 영감이 되어 주었던 핵물리학과 연관된 과학적 발견과 DNA 구조에 관심을 가졌다

거장의 작품들과 달리의 번안

초현실주의에서 무엇보다도 관심을 가졌던 것은 새로운 주제들로 꿈과 욕망의 세계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는 엄격한 회화적 기법묘사에 있어서는 과거 거장들의 교훈을 착실히 따르고 있었고 그 전통과 더불어 암푸르단 지방의 회화적 전통과 항상 인연을 맺고자 하였다.  30년대에 이르면 19세기 중엽 프랑스 사실주의 화가 장 프랑소와 밀레의 작품으로, 신앙심 깊은 농가의 부부가 힘든 노동을 멈추고 들판에 서서 기도하는 장면을 그린 <안젤루스>에 집착을 갖게 된다.  이 시기에 또한 19세기 아방가르드적 작가로 그동안 무시되어 왔던 메소니에, 마리아노 포르투니와 같은 거장들에게도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40년대부터 그의 그림은 베르미어,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벨라스케스, 그리고 메켈란젤로의 <피에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고전주의의 위대한 작품을 모사하고 회화적 표현을 응용하는 등 많은 후기 작품에서 그 영향을 지배적으로 나타내 보이고 있다.


갈라와 밀레의 "만종". 원추형의 아나모르포스가 긴급한 도착을 알린다, 1933

 


건축적인 밀레의 "민종", 1933

전면에 있는 두 개의 궁근 형태는 밀레의 그림에서 나오는 한 쌍의 부부를 암시하고 있다.  왼쪽의 침을 맞고 있는 형상은 암놈이 짝짓기를 끝내고 나서 숫놈을 죽여 먹어 버리는 악마적인 사마귀를 암시하고 있다.  이같은 내용은 자라리가 사용한 주수루적 신화중에 하나이다.

 


리가 항구의 성모, 1949

브레라의 피나코테카에 있는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마돈나>의 번안

 


십자가에 달리신 성 요한의 예수, 1951

신비주의에 대한 달리의 관심은 이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를 그리게 하였는데, 이것은 <정신적 찬미가>의 주석에 의한 십자가에 달린 성 요한의 표현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으며 동시에 유명한 벨라스케스의 그림에 대한 명백한 존경을 표하고 있다.

 


미완성의 입체 그림, 1974

거울을 이용한 이중 공간의 묘사는 벨라스케스의 <라스메니나스>와 반 아이크의 <아르놀피니의 결혼>에서 참조한 것이다.

 

과학

40년대와 50년대부터 달리는 당시의 과학, 특히 핵물리학과 분자생물학과 연관된 발견들에 대해 호기심을 표명하면서 많은 그림들에 이러한 사건의 암시를 표현하고 있고 더 나아가 어떤 작품들은 과학자의 도움으로 제작하기도 했다. DNA의 나선형이나 핵의 구조는 우리의 감각을 통해 인지할 수 있는 데이터의 한계를 넘어선 하부구조를 취하고 있으므로, 그것은 마치 꿈 속에서 나타나는 현실과 같이 잠복되어 있는 잠재된 현실을 드러내 준다.  따라서 편집광적 비평적 방법과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비키니 섬의 세 스핑크스, 1947

 산호섬 비키니에서의 실험적인 핵 폭파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핵폭탄 투하는 달리의 이 작품에 영감을 주었다.  두 개의 인간의 머리와 나무는 이중 이미지와 핵 버섯 모양으로 변형된다.

 


원자의 레다, 1949

 이 그림에서는 핵물질으 빛이 발산되는 가운데 백조로 변해 버린 주피터에게 사로잡힌 님프 레다의 고전적인 우화가 표현되어 있다.  원자의 구조와 마찬가지로 그림의 요소들은 서로 맞부딪치지도 않고, 단단한 형체를 구성하지도 않은 채 각각의 다른 요소들과 중력을 유지하고 있다.  공간에서의 사물의 배치는 틀림없이 과학자인 마틸라 기카의 충고를 받았을 것이다

 


원구로 그려진 갈라테아, 1952

  한 해 전 달리는 <신비주의 선언서>를 저술하였는데, 거기에서 그는 자신의 세계에 대한 새로운 구성 요소를 제의한다.  이 작품에서 갈라의 이중 이미지는 제 2차 세계대전 후 달리의 작품에서 복원된 강박관념들 중 두 관념인 정신적인 것과 과학적인 것에 대한 자극을 통합하고 있다

 

마지막시기

1982년 갈라의 죽음이 있기까지 매우 활동적이었던 생애의 마지막 시기에 달리는 1974년에 문을 연 달리 연극-미술관을 헌정하여 우리를 달리의 세계로 이끌어 줄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은 항상 존경해 마지 않던 미켈란젤로, 벨라스케스와 같은 옛 거장들의 작품을 번안하여 제작하였다.  살아있을 동안 논란이 되어 왔던 예술가로서의 달리에 대한 평가는 1989년 그의 죽음 이후에는 아무도 그의 위대함을 의심하지 않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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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자세~^^

2008.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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