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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프랑스 시인 폴 엘뤼아르의 아내 갈라를 만났을 때 달리는 안에서 솟구치는 열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리고 엘뤼아르와 이혼하고 1934년 달리와 결혼한 갈라는 그의 열정대로 평생동안 '달리의 모든 것'이 된다.
Composition - Portrait of Mrs. Eva Kolsman, 1946
The Madonna of Port Lligat (detail), 1950
The Queen of the Butterflies, 1951
dalн Nude, 1954
Soft Watch at the Moment of First Explosion, 1954
The Grand Opera, 1957
Modern Rhapsody - The Seven Arts, 1957
The Ascension of Christ, 1958
Birth of a Divinity, 1960
Meditative Rose, 1958
The Hallucinogenic Toreador, 1968-70
Dalн Lifting the Skin of the Mediterranean Sea to Show Gala the Birth of Venus
(stereoscopic work, right component), 1977
2007.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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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다음카페/ 아름다운 미술관 (http://cafe.daum.net/jsseo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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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lvador Dali (1904.5.11~1989.1.23)
스페인의 대표적 초현실파 화가
1904년 5월 11일 스페인 카탈로니아 북부의 작은 마을 피게라스에서 공증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달리가 태어나기 3년 전에 이미 죽은 그의 형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은 그는 자신에게서 죽은 형의 모습을 찾으려는 데에 강한 반발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후일 그는"나는 결코 죽은 형은 아니며 살아 있는 동생이라는 것을 항시 증명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그의 부모는 아마도 이러한 아들의 죽음 때문에 달리에게 더욱 더 아낌없는 사랑을 쏟아부어 자기 중심적이고 불같은 성격을 갖게금 조장하였던 것 같다. 더군다나 죽은 때의 형의 환상과 자신을 동일시하여 일찍부터 그는 자신의 작품에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던 주제인 죽음에 대한 강한 관념에 익숙하게 되었다
한편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너의 형은 십자가의 그리스도에 귀일 하였노라)고 들려주곤 함으로써 어린 달리를 신비의 혼란 속에 빠지게 하였으며 그의 극히 내성적이며 수줍던 성격이 때로 격렬한 폭발을 보인 것도 이 사실과의 깊은 관련을 보인다. 후일 달리는 종교화에 대해 대단한 집착을 보이는데 그의 대표작 (십자가의 요한의 그리스도)는 이때부터 받은 자극에서 기인하는 것이라 보겠다.
십자가의 聖 요한의 그리스도 1951년 . 캔버스 . 유채
갈릴리의 땅을 연상케 하는 리가트 항. 하늘 높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그렸다. 더욱이 예수가 위에서 내려다 보이도록 그린 변형된 구도가 특이하다. 달리는 크리스찬은 아니지만 풍부한 상상력과 놀라운 지혜로서 종교화를 제작하였는데, 그 공통점은 편집광적 비판 방법과 자기 도취에서 벗어나 매우 정교하고도 수려한 필치의 사실적묘사를 보이며, 전혀 새로운 시각에서 포착한 구도를 도입하여 형이상학적 작품을 이루었다는 점이다. 화면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지극히 정상적인 모습의 사실묘사로 이루어졌기에, 이전의 작품들에서 느껴지던 괴이한 공포감과 처절한 느낌보다는 엄숙하고 신비로워 숙연한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면에서 '현대의 종교화'라 일컬을 수 있겠다. |
초기 단계
달리는 10살 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1917년 작품으로 추정되는 그의 초기작품 <바느질하고 있는 안나 할머니>에서 피조트의 영향을 볼 수 있으며 어린 소년이 그렸다고 믿기 어려운 뛰어난 묘사력을 보여주고 있다. 5년 후, 그의 미술학교에서 공부하기 위하여 마드리드 학생 기숙사에 들어 가는데 그곳에서 결국 퇴학당함으로써 그의 수업을 마감하게 되지만 부뉴엘과 로르카와 같은 새로운 예술 사조의 탐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지때방 학생들과 우정을 갖기 시작 하였다. 이 당시에는 암푸르단 평원의 풍경과 20년대 피카소의 지중해적 고전주의에 의존한 입체파적인 그림들을 번갈아 가며 제작하였는데 이것은그의 회화 양식에 있어 구성과 소묘에 엄격성을 지니게 하여 이후 그의 전 생애에 걸쳐 이러한 특징을 유지하게 되었다.
창가에 서 있는 소녀, 1925
달리의 여동생 안나 마리아의 두 초상화는 1925년의 전시회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는데 이 전시회에는 파카소도 방문하였다. 정확하고 차가운 이미지의 색조는 이 시기의 몇몇 글에서 논의되었던 "성스러운 객관성"이라는 정신을 표현하고 있다. 감상자에게 등을 돌리고 있는 주제는 독일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로부터 차용된 것인데 불과 일 년 후 초현실주의의 그림 안에서 왕성하게 표현되는 꿈의 해방을 예고하는 것이다.
비너스와 어린 큐피드, 1925
불확실한 신화적 인물들이 등장하는 이 장면은 이 시기 피카소에 의해 실행되었던 지중해적 고전주의와 같은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달리는 아직까지도 이런 종류의 주제를 큐비즘의 기법과 더 나아가 인상주의의 풍경화 기법으로 신중히 실험하고 대치시키고 있다.
입체주의적 자화상, 1926
이런 종류의 작품에서 달리가 사용한 모델들은 1910년 피카소에 의해서 그려진 칸바일러나 볼라르드의 초상 작품을 기억나게 한다.
정신 착란의 그림
처음 예술활동을 시작할 때부터 달리는 끊임없이 자신의 그림에 대한 시와 이론적 주석을 발표하면서 회화와 문학 작품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였다. 이 글 중 몇몇 작품은 그의 초현실주의의 여러 특징과 유명한 편집광적 비평적 방법을 일찍부터 예고하고 있다.1929년 파리의 초현실주의에 가입하면서 그의 예술적 개성은 성숙한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다. 이 후 10년동안 달리는 이 운동에 전적으로 참여했으며 이 그룹의 최고 지도자인 앙드레 브르통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달리는 그의 화업에 있어 중요한 이 시기에 <초현실주의 혁명>, <혁명에 봉사하는 초현실주의>, <마노타우로>와 같은 초현실주의의 공식적인 기관지에 정규적으로 글을 기고하였다. 또한 이 때는 달리의 영원한 동반자이자 모델이며 뮤즈와도 같았던 갈라와의 관계가 시작되던 해이기도 했다(당시 갈라는 시인 폴 엘뤼아르와 결혼생활을 하고 있었다).
소름의 시작, 1928
초기 작품들 중에서 완전히 초현실주의적인 성향을 띤 작품 중의 하나. 달걀 노른자처럼 끈끈하고 내장과 같이 부드러운 형태는 도망가는 선들, 글자, 그리고 숫자에 의해 표현된 엄격한 기하학적 공간의 도식 안에서 분배된다. 사물들의 정확한 표현과 재현된 내용 안에서의 비현실성의 혼합은 달리의 이후 모든 작품들에 있어서 기본적인 골격을 형성한다.
정신 착란적 주제들
1930년대는 달리에게 있어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 10년이었다. 이 때 그의 대부분의 주제들이 표면화되는데 유연하게 늘어진 시계(<기억의 영속성>, 1931)나 이중 이미지(<보이지 않는 남자>, 1929~1933), 부패한 음식들과 신체 기관(<섹스어필의 환영>, 1934), 밀레의 <만종>에 대한 집착과 같은 주제들이 표현된다. 다른 여러 이론적 글들을 통해 그의 편집광적 비평적 방법의 윤곽이 드러났으며 공동작업한 <황금의 시대>라는 영화가 프랑스의 검열에 의해 상영이 금지됨으로써 그의 추문이 더욱 더 확고하게 굳어졌다. 달리는 과장되고 세속적인 이미지들을 계속하여 만들어냄으로써 곧바로 대중적인 인기 작가로 변하여 갔고 언론의 덕택으로 유럽에서와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대단한 성공을 맛보게 되었다.
변형(anamorphosis)
변형(anamorphosis), 또는 왜곡된 형상은 초현실주의 그림에 당연히 나타나는데 이러한 기법은 감각의 거짓성을 나타내는 예로서 바로크 시대부터 그림에 나타나는 수사학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다. 달리의 그림에는 이같은 시각적 기법이 자주 나타난다. 이중 이미지와 보이지 않는 이미지를 소재로 <보이지 않는 남자>를 비롯하여<갈라의 영광스런 세 수수께끼들>을 제작하였다.
보이지 않는 남자, 1929~1933
달리는 형상을 다양한 오브제의 묘사로 대체하여 그림을 그린 16세기 매너리즘 화가 아르침몰도의 영향을 받는다. 여기서 그는 처음으로 이중 이미지 또는 보이지 않는 이미지의 주제를 접목시키고 있다. 이 작품은 1933년 완성하지 못하고 포기하였으나, 편집광적 비평적 방법을 인용하면서 꿈의 내용을 적용시킨 완전한 예이다.
나르시스의 변모, 1937
나르시스의 신화는 특별히 달리에게 흥미로운 주제었으며 달리의 나르시시즘은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개념이다. 더욱이 연못의 물 안에 반사되어진 이미지와 현실적 이미지 사이의 혼동은 그 배경에 깔린 죽음의 이미지와 함께 이러한 이중 이미지 뒤에 감추어진 거의 불가사의한 상징이다.
꿈
달리는 날카롭고 정밀한 소묘가 주된 역할을 하도록 물감을 단조롭고 적게 사용하고 다른 모든 기법을 포기한다. 이러한 시각적인 정밀함은 환상적인 주제와 대조를 이룬다. 이와 같은 역설적 표현은 20, 30년대 초현실주의자들에 의해 가장 많은 존경을 받은 화가 조르조 데 키리코의 환영적이고 기념비적인 도시의 그림에서 배운 것이며, 또한 카다케스의 꾸불꾸불한 절벽을 관찰하면서 배우게 된 것이다. 수평선의 암시가 인물들을 위협하는 이러한 텅 빈 풍경은 젊은 시기의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빛으로 가득 찬 화면에 나타나는 정례식의 변형과도 같은 종류의 그림 안에서 달리의 정신 착란을 표현하기 위해 즐겨 쓰여지던 화면이다.
달리의 이미지는 비록 그 속에 어떤 의미가 숨겨져 있다 하더라도 자유 연상에 의해 표현된다. 때때로 달리는 꿈을 거의 문학적으로 그렸는데 그러한 작품들은 잠에서 깨어나 캔버스에 옮기려 분투하는 화가에 의해서 기억되어져 다소 근거가 확실한 플롯으로 구성된 환영들이다. 종종 이러한 그림에서는 환영의 증인과도 같은 어린 소년의 이미지가 등장하는데 이는 유년 시절로 회귀하려는 화가의 꿈과 잠재 의식의 비유로 나타난다.
현기증, 또는 쾌락의 탑, 1930
키리코의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 가장 대표적인 형이상학적 그림이다. 그림의 외부에서 투사된 검은색 그림자와 신비스러운 형상은 거대한 위협으로 다가오며, 이것은 불안전한 평형상태를 이루고 있는 공도 그러한 역할을 한다. 한 쌍의 부부, 사랑과 죽음의 상징, 그리고 사자의 머리는 <위대한 수음자>와 이 시기 다른 그림에서도 역시 나타난다.
섹스-어필의 유령, 1934
어린 달리는 거의 주체할 수도 없는 목발을 한 늙은 노파의 신체를 바라보고 있다. 그 노파의 상체 부분은 거대한 소세지로 이루어졌으며 이렇게 하여 모든 먹을 수 있는 것들과 대립된 죽음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목발은 때로 달리의 회화 세계에서의 성불구를 상징한다.
잠에서 깨기 직전 석류 주변을 날아다니는 한 마리 꿀벌에 의해 야기된 꿈, 1944
아주 먹음직스러운 음식물-갈라-위로 덤벼들고 있는 두 마리의 호랑이는 꿈 속에서 벌의 이미지이다. 착검을 한 장총은 분명히 곤충의 위협적인 찌름을 암시하고 있다. 에로티시즘이 폭력적인 연회장으로 달리의 작품에 다시등장하고 있다.
소녀라고 믿었던 6세의 달리, 1950
편집광적이고 불안한 분위기를 재창조하여 카다케스 해변의 어린 시절의 꿈을 다시 표현하였다.
흘러내리는시계
달리의 잘 알려진 편집광적 소재 중 하나는 부드럽게 녹아 내리는 듯한 오브제의 재현이다. <기억의 영속성>과 <정거장의 때이른 석화>와 같은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처음으로 그 유명한 흐물흐물한 시계가 등장함으로써 부드러운 오브제가 일반화되었다. 달리의 그림에서 부드러움은 어떠한 딱딱한 대상에게나 적용되며 일반적으로 꿈의 세계의 의식적 증거물인 유령적 또는 환영적 조건을 지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계가 표현된 작품에서 시계는 아주 심오한 함축적 이미지로 시간과 공간의 상호작용의 관계성을, 즉 '4차원 세계'를 암시하고 있다. 달리의 모든 작품에서 항상 기억해야만 하는 것은 부드러운 것은 소화될 수 있는 것, 자양분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이다. 이것은 상호 침투될 수 없고 다른 상태로 변화될 수 없는 딱딱한 성질의 것과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정거장의 때이른 석화, 1930
<기억의 영속성>이라는 작품을 완성하기 일 년 전 부드러운 시계가 표현된 첫 작품이다. 앙상한 인체는 기차역이 연상케 하는 동적인 특징과 대조를 이룬다. 이렇게 형이상학적 풍경화로 변화하는 작품은 1930년대 초반에 많이 나타난다.
기억의 영속성
4차원을 찾아서, 1979
아인슈타인의 공간과 시간은 이 작품에 있어서 볼록하고 오목한 굴 옆의 바퀴와 부드러운 시계에 의해 암시된다. 등을 돌리고 있는 한 쌍의 인물들은 라파엘의 작품 <아테네 학당>에서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연상케 한다.
서랍
달리는 마요카라 출신의 중세 말기의 지성인 라이문도 루리오나,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인 줄리오 카밀로의 <기억의 연극>에서 영감을 받아 중세와 르네상스의 기억술과 연관된 기억의 바퀴와 기타 기계장치에 관심을 보였다. 달리는 일생을 통해 많은 그림에서 특징적인 조형 요소인 가구나 인물로 기억술과 관련된 장치를 번안하였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서랍이다.
불이 붙은 기린, 1936~1937
우주적인 운동 선수, 1968
서랍들은 무의식을 의미한다.
달리는 "인간의 신체는 그리스 시대에는 순수한 신플라톤적이었다. 오늘날의 신체는 비밀스러운 서랍들로 가즉 차 정신분석 학자들만이 열 수 있다."라고 쓰고 있다.
건축물을 사용한 비유도 이와 유사하게 해석될 수 있겠다.
인간 형상을 한 캐비넷, 1936
달리는 이탈리아 바로크 화가인 브라첼리의 <카프리치>의 작품에서 가구 형태를 한 인물상의 영감을 받았다.
스페인, 1936~1938
스페인 내란과 관계되는 다른 여러 작품들 중 하나이다. 두 기사가 창을 들고 싸우는 장면은 여성의 가슴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여자의 머리는 폭력적인 전투 중에 있는 인물 표현으로 이중 이미지이다. 이 전쟁 장면은 레오나드로 다 빈치의 유명한 <앙기리아의 전투>를 위한 소묘 작품들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작품에 인용하였다. 반쯤 열린 서랍에 걸려있는 붉은색 손수건은 전쟁의 비극적 상징을 표현하고 있다.
소름끼치는 미와 먹울 수 있는 미
1933년 달리는 아르누보 건축의 "소름끼치는 미와 먹울 수 있는 미"에 대하여 글을 발간하였다. 젊은 시절부터 건축 디자이너인 가우디의 작품과 카탈란 지방의 현대 미술에 친숙했던 달리는 이같은 유기적인 표현과 장식의 풍부함에 매료되었는데 달리는 "고체화된 욕망으로서의 건축"이라고 말하였다. 이에 고무되어 먹을 수 있는 것과 카니발리즘과 관련된 식도락적인 비유와 관념이달리의 사상과 도상에 있어서 가장 함축적이고 중대한 주제 중의 하나가 되었다. 보편적으로 먹을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타낸다. 먹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은 썩기 쉽고,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부패하며 결국 죽음이 기다린다. 동시에 음식을 만드는 것이나 먹는 것은 모두 딱딱한 것에서 부드러운 것으로 변화하고 변형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먹는다는 것은 마치 인식을 먹는 편집광적인 비유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런 방법으로 인간은 스스로 그들과 멀리 있는 것들과 융합하게 된다. 달리의 그림들은 이런 형식으로 자양분을 암시하는 장면과 그가 좋아하는 음식물들 - 강낭콩, 갈비, 빵, 달걀 프라이 - 로 채워지게 되는데 이것은 독특하고 환각적인 도상을 창조한다.
삶은 강낭콩이 있는 부드러운 구성 - 내란의 예감, 1936
더욱 공격적인 방법으로 탐욕스런 식욕과 죽음의 의미를 함축적으로 잘 나타낸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는 연회적인 성격을 다루지 않고 그 모든 반대의 것을 다루고 있다. 선택은 존재하지 않는다. 최후의 수단은 교살당한 신체 안에 있는데 그 신체로부터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달리는 이렇게 하여 비극적 고뇌와 전쟁의 예감을 표현하고 있다.
가을의 카니발리즘, 1936~1937
탐욕스런 식욕과 죽음의 연관성이 나타나는 그림 중 하나이다. 달리는 모든 종류의 요리 기구를 세밀히 묘사하였고 빵과 과일과 고기 묘사와 함께 죽음의 연회를 창조하고 있다. 해질 무렵 가을의 금빛 색조는 폭력적인 화면을 부드럽게 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유명세와 초현실그룹과의결별
브르통과 이 어수선한 시대에 좌익에 연루된 다른 초현실주의자들과 달리는 차츰 불편한 사이가 되었는데 이는 그가 히틀러를 지지하기 때문이었고 - 달리는 항상 이를 부정했다 - 그칠 줄 모르는 돈에 대한 그의 탐욕 - 달리가 이를 부정한 바는 없다 - 때문이었다. 이것은 달리의 작품과 그의 지적인 총명성에 찬탄을 보내던 브르통의 존경어린 표현과 칭찬을 유보하게 만들었으며 30년대 중반부터 그 조짐을 보였듯이 공식적인 결별을 하게 되어 드디어 1939년 달리는 초현실주의 그룹에서 추방된다. 그 때부터 달리는 "달러화에 굶주린 화가"로 초현실주의자들 사이에서 통하게 되었는데 그 별명을 브르통이 만들어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달러를 숭배하는 정신속에서 갈라를 그리는 달리, 1965
사람들은 달리의 돈에 대한 넘치는 열정에 대해 비방한다. 이 작품은 이러한 비방에 대해 달리가 약간은 과장되게 그린 그림이다. 이것으로 앙드레 브르통에 의해서 "달러에 굶주린" 화가라는 별명이 붙여지게 되는 동기가 되었고, 이 별명은 달리라는 본래 이름에 철자를 바꾸어 만들어졌다
전통에의 회귀
달리는 그의 특징적인 주제와 편집광적 비평적 방법들을 포기하지 않고 전통적인 회화로 가까이 접근함으로써 초현실주의와의 공식적인 결별의 감정을 달랬다. 갈라와 함께 스페인 북부 카다케스 부근에 정착하면서 종교적 주제를 중심으로 그의 예술 세계를 담아내어 <리갈항구의 마돈나>, <십자가에 달리신 성 요한의 예수>와 같은 주제로 여러 작품을 제작하였다. 또한 제 2차 세계대전 시기부터 그는 <원자의 레다>, <비키니 섬의 세 스핑크스>의 영감이 되어 주었던 핵물리학과 연관된 과학적 발견과 DNA 구조에 관심을 가졌다
거장의 작품들과 달리의 번안
초현실주의에서 무엇보다도 관심을 가졌던 것은 새로운 주제들로 꿈과 욕망의 세계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는 엄격한 회화적 기법묘사에 있어서는 과거 거장들의 교훈을 착실히 따르고 있었고 그 전통과 더불어 암푸르단 지방의 회화적 전통과 항상 인연을 맺고자 하였다. 30년대에 이르면 19세기 중엽 프랑스 사실주의 화가 장 프랑소와 밀레의 작품으로, 신앙심 깊은 농가의 부부가 힘든 노동을 멈추고 들판에 서서 기도하는 장면을 그린 <안젤루스>에 집착을 갖게 된다. 이 시기에 또한 19세기 아방가르드적 작가로 그동안 무시되어 왔던 메소니에, 마리아노 포르투니와 같은 거장들에게도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40년대부터 그의 그림은 베르미어,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벨라스케스, 그리고 메켈란젤로의 <피에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고전주의의 위대한 작품을 모사하고 회화적 표현을 응용하는 등 많은 후기 작품에서 그 영향을 지배적으로 나타내 보이고 있다.
갈라와 밀레의 "만종". 원추형의 아나모르포스가 긴급한 도착을 알린다, 1933
건축적인 밀레의 "민종", 1933
전면에 있는 두 개의 궁근 형태는 밀레의 그림에서 나오는 한 쌍의 부부를 암시하고 있다. 왼쪽의 침을 맞고 있는 형상은 암놈이 짝짓기를 끝내고 나서 숫놈을 죽여 먹어 버리는 악마적인 사마귀를 암시하고 있다. 이같은 내용은 자라리가 사용한 주수루적 신화중에 하나이다.
리가 항구의 성모, 1949
브레라의 피나코테카에 있는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마돈나>의 번안
십자가에 달리신 성 요한의 예수, 1951
신비주의에 대한 달리의 관심은 이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를 그리게 하였는데, 이것은 <정신적 찬미가>의 주석에 의한 십자가에 달린 성 요한의 표현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으며 동시에 유명한 벨라스케스의 그림에 대한 명백한 존경을 표하고 있다.
미완성의 입체 그림, 1974
거울을 이용한 이중 공간의 묘사는 벨라스케스의 <라스메니나스>와 반 아이크의 <아르놀피니의 결혼>에서 참조한 것이다.
과학
40년대와 50년대부터 달리는 당시의 과학, 특히 핵물리학과 분자생물학과 연관된 발견들에 대해 호기심을 표명하면서 많은 그림들에 이러한 사건의 암시를 표현하고 있고 더 나아가 어떤 작품들은 과학자의 도움으로 제작하기도 했다. DNA의 나선형이나 핵의 구조는 우리의 감각을 통해 인지할 수 있는 데이터의 한계를 넘어선 하부구조를 취하고 있으므로, 그것은 마치 꿈 속에서 나타나는 현실과 같이 잠복되어 있는 잠재된 현실을 드러내 준다. 따라서 편집광적 비평적 방법과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비키니 섬의 세 스핑크스, 1947
산호섬 비키니에서의 실험적인 핵 폭파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핵폭탄 투하는 달리의 이 작품에 영감을 주었다. 두 개의 인간의 머리와 나무는 이중 이미지와 핵 버섯 모양으로 변형된다.
원자의 레다, 1949
이 그림에서는 핵물질으 빛이 발산되는 가운데 백조로 변해 버린 주피터에게 사로잡힌 님프 레다의 고전적인 우화가 표현되어 있다. 원자의 구조와 마찬가지로 그림의 요소들은 서로 맞부딪치지도 않고, 단단한 형체를 구성하지도 않은 채 각각의 다른 요소들과 중력을 유지하고 있다. 공간에서의 사물의 배치는 틀림없이 과학자인 마틸라 기카의 충고를 받았을 것이다
원구로 그려진 갈라테아, 1952
한 해 전 달리는 <신비주의 선언서>를 저술하였는데, 거기에서 그는 자신의 세계에 대한 새로운 구성 요소를 제의한다. 이 작품에서 갈라의 이중 이미지는 제 2차 세계대전 후 달리의 작품에서 복원된 강박관념들 중 두 관념인 정신적인 것과 과학적인 것에 대한 자극을 통합하고 있다
마지막시기
1982년 갈라의 죽음이 있기까지 매우 활동적이었던 생애의 마지막 시기에 달리는 1974년에 문을 연 달리 연극-미술관을 헌정하여 우리를 달리의 세계로 이끌어 줄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은 항상 존경해 마지 않던 미켈란젤로, 벨라스케스와 같은 옛 거장들의 작품을 번안하여 제작하였다. 살아있을 동안 논란이 되어 왔던 예술가로서의 달리에 대한 평가는 1989년 그의 죽음 이후에는 아무도 그의 위대함을 의심하지 않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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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자세~^^
2008.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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