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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여러가지 필독 도서 전문이 필요합니다 ㅠㅇㅠ
wjdd**** 조회수 19,051 작성일2005.03.07
학교에서 감상문을 일주일에 한번씩 쓰게 하는데요 사야되는 책이 너무 많아서 그래요 ㅠㅇㅠ 학생이 무슨 돈이 있다궁.. 그래서 그러는데용
김소진-쥐잡기/김형경 -단종은 키가 작다/신경숙-풍금이 있던 자리/양귀자- 원미동 시인 /윤대녕- 말발굽 소리를 듣는다 // 전부 전문이 필요합니당 ㅠ
되도록 있으신 대로 모두 올려주세요 ㅠㅇ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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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n****
고수
수학, 화학, 화학공학, 번역, 통역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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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미동 시인 - 양귀자

 

 

 

남들은 나를 일곱 살짜리로서 부족함이 없는 그저 그만한 계집아이 정도로 여기고 있는 게 틀림없지만, 나는 결코 그저 그만한 어린 아이는 아니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다 알고 있다, 라고 말하는 게 건방지다면 하다못해 집안 돌아가는 사정이나 동네 사람들의 속마음까지도 두루 알아맞힐 수 있는 눈치만큼은 환하니까. 그도 그럴 것이 사실을 말하자면 내 나이는 여덟 살이거나 아홉 살, 둘 중의 하나이다.

 

낳아놓으니까 어찌나 부실한지 살아날 것 같지 않아 차일피일 출생 신고를 미루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라 하는데 그나마 일곱 살짜리로 호적에 올려놓은 것만도 다행인 셈이었다. 살아나기를 원하지 않았을 엄마 마음쯤은 나도 이미 알고 있는 터였다. 아버지는 좀 덜하지만 엄마는 나만 보면 늘상 으르렁거렸다. 꿈도 꾸지 않았던 자식이었지만 행여 해서 낳아봤더니 원수 같은 또 딸이더라는 원성은 요사이도 노상 두고 하는 입버릇이니까 서운할 것도 없었다.

 

그것은 뭐 내가 일찌감치 철이 들어서가 아니라, 우리 집 사정이 워낙 그러했다. 내가 태어나던 해에 벌써 스물이 넘어 처녀티가 꽉 밴 큰언니에서 중학교 졸업반이던 막내언니까지 딸이 무려 넷이었다. 마흔셋에 임신인지도 모르고 너댓 달 배를 키우다가 엄마는 여기저기 용하다는 점쟁이들한테 다녀보고는 마침내 낳을 결심을 했었다는 것이다. 모든 점쟁이들이 '만장일치'로 아들이라고 주장해서였다. 그런 판에 또 조개달고 나오기가 무렴해서였는지 냉큼 쑥 빠져나오지 못하고 버그적거리는 통에 산모를 반 죽음시켜놓았다니 나로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형편이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여덟 살이다, 아홉 살이다, 자꾸 이랬다저랬다 하는 엄마도 과히 잘한 것은 없다. 내가 뭐 뺄셈 덧셈에 아주 까막눈인 줄 알지만 천만에, 우리 엄마는 내가 세 살이 될 때까지도 혹시 죽어주지나 않을까 기다린 게 분명하다.

 

내가 얼마나 구박덩이에 미운 오리새끼인가를 길게 설명하고 싶지는 않다.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런 따위 너절한 게 아니라 원미동 시인(詩人)에 관한 것이니까. 내가 여러 가지 것을 많이 알고 있다고는 해도 솔직히 시가 뭣인지를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다. 얼추 짐작하기로 그것은 달 밝은 밤이나 파도가 출렁이는 바닷가에서 눈을 착 내려감고 멋진 말을 몇 마디 내뱉는 것이 아닐까 여기지만 원미동 시인이 하는 것을 보면 매양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우리 동네에는 원미동 시인말고도 원미동 카수니 원미동 멋쟁이, 원미동 똑똑이 등이 있다. 행복사진관 엄씨 아저씨가 원미동 카수인데 지난번 전국노래자랑 부천 대회에서 예선에도 못 들고 떨어졌다니 대단한 솜씨는 못 될 것이었다. 소라 엄마가 원미동 멋쟁이라는 것은 내가 가장 잘 안다. 그 보라색 매니큐어와 노랑머리는 소라 엄마뿐이니까. 원미동 똑똑이는, 부끄럽지만 우리 엄마이다. 부끄럽다는 것은 남의 일에 간섭이 심하고 걸핏하면 싸움질이나 해대는 똑똑이는 욕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원미동 시인에게는 또 다른 별명이 있다. 퀭한 두 눈에 부스스한 머리칼, 사시사철 껴입고 다니는 물들인 군용점퍼와 희끄무레하게 닳아빠진 낡은 청바지가 밤중에 보면 꼭 몽달귀신 같다고 서울미용실의 미용사 경자 언니가 맨 처음 그를 ꡐ몽달씨ꡑ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경자 언니뿐만 아니라 우리 동네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를 좀 경멸하듯이, 어린애 다루듯 함부로 하는 게 보통인데 까닭은 그가 약간 돌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언제부터 어떻게 살짝 돌았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보통사람과는 다른 것만은 틀림없었다. 몽달씨는 무궁화연립주택 3층에 살고 있었다. 베란다에 화분이 유난히 많고 새장이 세 개나 걸려 있는 몽달씨네 집은 여름이면 우리 동네에서는 드물게 윙윙거리며 하루종일 에어컨이 돌아가는 부자였다. 시내에서 한약방을 하는 노인이 늘그막에 젊은 마누라를 얻어 아기자기하게 살아보는 판인데 결혼한 제 형집에 있지 않고 새살림 재미에 푹 빠진 아버지 곁으로 옮겨온 막둥이였다.

 

그것부터가 팔불출이 짓이라고 강남부동산의 고흥댁 아줌마가 욕을 해쌓는데,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사는게 왜 바보짓이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몽달씨에게 친구가 있다면 아마 내가 유일할 것이었다. 몽달씨 나이가 스물일곱이라니까 나보다 스무 살이나 많지만 우리는 엄연히 친구이다. 믿지 않겠지만 내게는 스물일곱짜리 남자 친구가 또 하나 있다. 우리 집 옆, 형제슈퍼의 김반장이 바로 또 하나의 내 친구인데 그는 원미동 23통 5반의 반장으로 누구보다도 씩씩하고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매일같이 슈퍼 앞의 비치파라솔 의자에 앉아 그와 함께 낄낄거리는 재미로 하루를 보내다시피 하였는데 요즘은 내가 의자에 앉아 있어도 전처럼 웃기는 소리를 해주거나 쭈쭈바 따위를 건네주는 법 없이 다소 퉁명스러워졌다. 그 까닭도 나는 환히 알고 있지만 모르는 척하는 수밖에. 우리 집 셋째딸 선옥이 언니가 지난 달에 서울 이모집으로 훌쩍 떠나버렸기 때문인 것이다. 김반장이 선옥이 언니랑 좋아지내는 것은 온 동네가 다 아는 일이지만 선옥이 언니

 

마음이 요새 좀 싱숭생숭하더니 기어이는 이모네가 하는 옷가게를 도와준다고 서울로 가버렸다. 선옥이 언니는 얼굴이 아주 예뻤다. 남들 말대로 개천에서 용이 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지지리궁상인 우리 집에 두고 보기로는 아까운 편인데, 그 지지리궁상이 지겨워 맨날 뚱하던 언니였다.

 

참말이지 밝히고 싶지 않지만 우리 아버지는 청소부이다. 아침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남의 집 쓰레기통만 뒤지고 다니는 직업이라 몸에서 나는 냄새도 말할 수 없을 만큼 지독했다. 아버지만이 아니라 밝히고 싶지 않은 것이 또 있다. 큰언니는 경기도 양평으로 시집가서 농사꾼 아내가 되었으니 상관없지만 둘째언니 이야기는 말하기가 부끄럽다. 둘째언니는 처음에는 버스 안내양, 그 다음에는 소시지 공장의 여공원, 그 다음에는 다방에서 일하더니 돈버는 일에 극성인 성격대로 지금은 구로동 어디에서 스물여섯 살의 처녀가 대포집을 열고 있다. 언젠가 한번 가봤더니 키가 멀대같이 큰 남자가 하나뿐인 방에서 웃통을 벗어부친 채 잠들어 있고 언니는 그 옆에서 엎드려 주간지를 뒤적이고 있지 않은가. 그만한 정도로도 나는 일이 되어가는 모양을 알 수가 있었다.

 

우리 엄마와 청소부 아버지는 딸년들이야 시집 보낼 만큼만 가르치면 족하다고 언니들을 모두 중학교까지만 보냈는데 웬일인지 선옥이 언니만 고등학교를 보냈었다. 그래서 더 골치이긴 하지만. 기껏 고등학교까지 나왔으니 공장은 싫다, 차라리 영화배우가 되는 편이 낫다고 우거지상을 피우던 언니가 김반장네의 콧구멍 같은 가게가 성이 찰 리 없을 것이었다.

 

이제 겨우 일곱 살짜리가, 사실은 그보다야 많지만 왜 나이 많은 떠꺼머리 총각들하고만 어울리는지 이상하겠지만 그것은 결코 내 책임이 아니었다. 단짝인 소라를 비롯하여 몇 명의 친구들이 작년과 올해에 걸쳐 모두 국민학교에 입학해버렸고, 좀 어려도 아쉰대로 놀아볼 만한 아이들까지 깡그리 유치원에 다니기 때문에 아침밥 먹고 나오면 원미동 거리에는 이제 두어 살짜리 코흘리개들밖에 남지 않는 것이다. 설령 오후가 되어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끼리끼리만 통하는 아이들이 좀처럼 놀이에 끼워주지 않기 때문에 나는 그만 홀로 뚝 떨어져나와 외계인처럼 어성버성한 아이가 되어버렸다. 우리 동네에는 값이 싼 유치원도 많고 피아노 교습소도 두 군데나 있지만 엄마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단칸방에 살아도 모두들 유치원에 보내느라고 아침마다 법석인데 나는 이날 입때껏 유희 한번 제대로 배워보지 못한

 

것이다. 아버지가 남의 집 쓰레기통에서 주워온 그림책이나 고장난 장난감이야 지천으로 널렸지만 이제는 그런 것들에는 흥미도 없으니 아무래도 나는 어른이 다 된 모양이었다.

 

몽달씨와 친구가 된 것은 올 봄, 바로 외계인 같던 시절이었다. 형제슈퍼 앞에서 어슬렁거리며 김반장이 언제나 말동무가 되어주려나 눈치만 보고 있는데 바로 내 뒤에 똑같은 자세로 김반장 눈치를 보는 몽달씨가 있었다. 염색한 작업복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종이를 펼쳐들고 주춤주춤 내 옆의 빈 의자에 앉은 그가 '경옥아'하고 내 이름을 불렀을 때 정말이지 나는 기절할 정도로 놀랐다. 좀 바보이고 약간 돌았다고 생각했으므로 언젠가는 그가 보는 앞에서도 '헤이, 몽달 귀신!' 하고 놀려댄 적도 있었던 나였다. 놀라서 입을 쩌억 벌리고 있는 내게 그가 다음에 건넨 말은 더욱 기가 찼다. "너는 나더러 개새끼, 개새끼라고만 그러는구나……."

 

나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몽달 귀신이라고 부른 적은 있지만 결코, '참말이지 하늘에 맹세코'그를 개새끼라고 부른 적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마구 저어댔다. 그런 나를 보는지 마는지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너는 나더러 개새끼, 개새끼라고만 그러는구나…….

 

지금 생각해도 참 어이가 없는 노릇이지만, 세상에 그게 바로 시라는 것이었다. 김반장이 몽달씨에게 시를 쓴다 하니 멋있는 시를 한 수 지어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청을 받고 몽달씨가 밤새 끙끙거리며 시를 쓰려 했으나 도무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아 어느 유명한 시인의 시를 베껴왔는데 그 구절이 바로 그 시의 마지막이라고 했다.

 

"에끼, 이 사람아. 내가 언제 자네더러 개새끼, 개새끼 그랬는가?"

 

김반장을 으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몽달씨 어깨를 툭 치며 빈정대고 말았지만 나의 놀라움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기억을 못해서 그렇지 그를 향해 개새끼, 라고 욕을 한 적이 꼭 있었던 것 같이만 생각될 지경이었다. 김반장이야 뭐라건 말건 몽달씨는 그날 이후 며칠간은 개새끼 시를 외우고 다녔고 나는 김반장 외에 몽달씨까지도 내 친구로 해야겠다고 속으로 결심해두었다. 시인하고 친구가 된다는 것은 구멍가게 주인과 친구되는 것보담은 훨씬 근사했으니까.

 

그렇긴 했으나 약간 돈 사내와 오랜 시간을 어울려다닐 만큼 나는 간이 크지 못했다. 게다가 김반장은 마음이 내키면 언제라도 알사탕이나 쭈쭈바를 내놓을 수 있지만 몽달씨는 그런 면으로는 영 젬병이었다. 그는 오로지 시에 대하여 말하고 시를 생각하고 시를 함께 외우자는 요구밖에는 몰랐다. 그에게는 시가 전부였다. 바람이 불면 '풀잎에 바람 스치는 소리'때문에 가슴이 아프고, 수녀가 지나가면 문득 '열일곱 개의, 또 스물한 개의 단추들이 그녀를 가두었다'라고 부르짖었다. 그는 하루종일이라도 유명한 시인들의 시를 외울 수 있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외운 싯구절만 가지고 몇 시간이라도 대화를 할 수 있다고 그가 말하였다. 그게 바로 시적 대화라고 가르쳐주기도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밤새도록 시를 읽는다고 하였다. 몽달씨는 밤이 되면 엎드려 시를 외우고, 다음날이면 그 시로써 말하는 사람이었다.

 

시를 빼고나면 나와 마찬가지로 몽달씨도 심심한 사람이었다. 낮 동안에는 꼼짝없이 젊은 새어머니와 한집에서 지내야 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동네를 빙빙 돌면서 시간을 때워나갔다. 내가 김반장과 마주앉아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느샌가 슬쩍 다가와 약간 구부정한 허리로 의자에 주저앉곤 하는 몽달씨는 나보다 훨씬 강렬하게 김반장의 친구가 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들은 제법 뜨거은 한낮 동안 각기 편한 자세로 앉아 신문을 읽거나 졸거나 하는 무료한 시간을 보내다가 막걸리 손님이라도 들이닥치면 몽달씨와 나는 재빨리 의자를 비워주곤 김반장이 바삐 설치는 모양을 우두커니 바라보곤 하였다. 김반장은 몽달씨가 시가 어쩌구 하며 이야기를 꺼내기라도 할라치면 대번에 딴소리를 해서 입막음을 하기 때문에 몽달씨도 김반장 앞에서는 도통 시에 대한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대신에 내가 원미동 시인의 '시적 대화'를 끊임없이 듣는 형편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몽달씨보다는 김반장과 함께 있는 것이 더 좋았었다. 김반장이 그 커다란 손바닥으로 내 엉덩이를 철썩 치면서 "어이, 경옥이 처제!"하고 불러주면 기분이 그럴싸해서 저절로 웃음이 비어져나왔고 가끔 가다 오토바이 뒷좌석에 앉아 함께 배달을 나가기라도 할라치면 피아노 배우러 가던 계집애들이 손가락을 입에 물고 부러워죽겠다는 듯이 나를 바라봐줬었다. 김반장이 말많은 원미동 여자들 누구하고도 사이좋게 지내면서 야채에다 생선까지 떼어다 수월찮게 재미를 보는 것을 잘 아는 고흥댁 아주머니도 "선옥이가 인물만 좀 훤할 뿐이지 그 집안 꼬라지로 봐서 김반장이면 횡재한 거야"라면서 은근히 선옥이 언니를 비아냥거렸다. 흥, 나는 고흥댁 아주머니의 마음도 알아맞힐 수 있다. 선옥이 언니보다 한 살 많은 딸이 하나 있는데 인물이 좀 제멋대로인 것이 아줌마의 속을 뒤집어놓은 것이다. 그러면서도 지난번엔 김반장 같은 사위나 얼른 봐야 될 것 아니느냐는 은혜 할머니 말에는 가당찮게도 코웃음을 쳤었다. "요새 시상에 뭐 부모가 상관 있답뎌? 그래도 갸가 보는 눈이 높아서 엥간한 남자는 말도 못 꺼내게 하요잉. 저기 은행 대리가 중매를 넣어왔는디도 돌아보도 않읍디다. 전문학교일망정 대학물도 일년 남짓 보았고 해서, 아는 게 아주 많다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목구멍이 근질거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왜 목구멍이 근질거리는가 하면 나는 또 다른 비밀을 하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정말 특급 비밀인데 만약에 이 사실을 고흥댁 아주머니가 알았다가는 어떻게 수습이 될는지 내가 도 걱정인 판이다.

 

복덕방집 딸 동아 언니가 누구와 좋아지내는가는 아마 나밖에 모르는 일일 것이다. 지난 봄에 소라네 집에 놀러갔다가 우연히 알게 된 사실로 소라조차도 영 모르고 있으니 나 혼자만 꿍꿍 앓다 말아야 할 것이긴 하지만, 그날 이후 복덕방 식구들만 만나면 내가 더 안절부절이었다. 여태까지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은 말이라 좀 망설여지긴 하지만 아이, 할 수 없다, 이야기를 꺼냈으니 털어놓을 밖에. 동아 언니는 소라네 대신설비에서 소라 아빠의 일을 거들어주는 노가다 청년하고 연애를 하는 판이다. 그것도 보통 사이가 아니다. 지난 봄날, 소라네 집에 갔다가 소라가 보이지 않아 무심코 모퉁이를 돌아나와 옆구리 창으로 가게를 기웃 들여다보니 그 두 남녀가 딱 붙어앉아서 이상한 짓을 하고 있지 않은가. 동아 언니는 그렇다치고 청년은 땀까지 뻘뻘 흘리면서 언니의 머리통을 꽉 껴안고 있었는데 좀 무섭기도 하였다.

 

이야기가 괜히 옆으로 흘렀지만 아무튼 선옥이 언니가 김반장같은 신랑감을 차버린 것은 좀 아쉬운 일이기는 하였다. 김반장이야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터이라 나만 보면 지금도 언니가 왔는가를 묻기에 여념이 없었다. 허나 선옥이 언니는 처음 떠날 때도 그랬지만 요사이 한번씩 집에 들를 적에도 형제슈퍼 쪽은 쳐다보지 않는다. 어떨 때는 "어휴, 저 거지발싸개 같은 자식"이라고 욕도 막 내뱉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이모네 옷가게로 심심하면 전화질이라고 이를 갈았다. 가만히 눈치를 보아하니 선옥이 언니도 요새 새 남자가 생긴 것 같고 전과 달리 아무데서나 속옷을 훌렁훌렁 벗어던지며 옷을 갈아입는데, 그 속옷이 요사무사하게 생겨서 내 눈을 달뜨게 하곤 했다. 좀 만져라도 볼라치면 언니는 내 손을 탁 때려버렸다.

 

"어때, 이쁘지? 경옥이 넌 이런 것 처음 보지? 이거 모두 선물받은 거다."

 

끈으로 아슬아슬하게 꿰매놓은 저런 팬티 따위를 선물하는 치도 우습지만 그것을 자랑하는 언니는 더욱 밉상이어서 그럴 때면 속도 모르는 김반장이 불쌍해지기도 하였다.

 

몽달씨가 있음으로 인하여 김반장의 주가가 도 올라가는 점도 있었다. 나야 어린애니까 형제슈퍼의 비치파라솔 아래서 어슬렁거려도 흉볼 사람은 없지만 동갑나기인 몽달씨가 하는 일도 없이 가게 근처를 빙빙 돌면서 어떨 때는 나와 같이 쭈쭈바나 쭉쭉 빨고 있으면 오가는 동네 어른들마다 혀를 끌끌 찼다.

 

"대학 다닐 때까진 저러지 않았대요. 저도 잘은 모르지만 학교에서 잘렸대나봐요. 뭐 뻔하죠. 요새 대학생들 짓거린. 그리곤 곧장 군대에 갔는데 제대하고부턴 사람이 저리 됐어요. 언제나 중얼중얼 시를 외운다는데 확 미쳐버린 것도 아니고, 아주 죽겠어요.?"

 

말이 났으니 말이지 그 옷차림은 형제슈퍼의 심부름꾼 복장으로 딱 걸맞았다. 종일 의자에서 빈둥거리기도 지겨운지라 우리는 곧잘 가게 일도 마다않고 거들었었다. 우리 둘이서 기껏 머리를 짜내어 하는 일이란 게 고무호스로 가게 앞에 물을 뿌려주는 정도였다. 포장이 덜 된 가게 앞길의 먼지 제거를 위해서나 여름 땡볕을 좀 무디게 하는 방법으로는 그 이상도 없어서 김반장도 우리의 일을 기꺼이 바라봐 주곤 일이 끝나면 기분이란 듯 요구르트 한 개씩을 던져주기도 하였다.

 

그러다 차츰차츰 몽달씨 몫의 일이 하나 둘 늘어갔는데 가게 앞 청소나 빈 박스를 지하실 창고에 쟁이는 일 혹은 막걸리 손님 심부름 따위가 그것으로, 몽달씨가 거드는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김반장을 더욱 의젓해지고 몽달씨는 자꾸 초라하게 비추어지는 게 나에겐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김반장도 그걸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언젠가는 아주 정색을 하고서 몽달씨 어깨를 꽉 껴안더니 이렇게 말하기도 하였다.

 

"자네 같은 시인에게 이런 일만 시키려니 미안하이. 자네는 확실히 시인은 시인이야. 언제 바쁘지 않을 때는 정말이지 자네 시를 찬찬히 읽어봄세. 이래봬도 학교 다닐 때 위문편지는 내가 도맡아 써주곤 했던 실력이니까."

 

그러면 몽달씨는 더욱 신이 나서 생선 잘라주는 통나무 도마까지 깔끔히 씻어내고 널브러져 있는 채소들을 다듬고 하면서 분주히 설치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껏 몽달씨의 시노트를 읽어본 적이 없는 김반장이었다. 몽달씨가 짐짓 아직 자기 시는 읽을 만하지 못하니 유명한 시인들의 시나 읽어보지 않겠느냐고 구깃구깃 접은 종이를 꺼낼라치면 김반장은 온갖 핑계를 다 대서라도 줄행랑을 치면서 그가 보지 않은 틈을 타 머리 위에 대고 손가락으로 빙글, 동그라미를 그려보였다. 그것도 모르고 몽달씨는 언제라도 김반장에게 들려줄 수 있도록 꼬깃꼬깃한 종이 쪽지들을 호주머니마다 가득 넣어가지고 다녔다. 그때쯤엔 나도 몽달씨의 시적 대화에는 질려 있어서 덩달아 자리를 피했고 김반장을 따라 머리 위에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려댔다. 약간, 아니 혹시는 아주 많이 돈 원미동 시인은 그래도 여전히 형제 슈퍼의 심부름꾼 꼬마처럼 다소곳이 잔심부름을 도맡아가지고 있었다.

 

분명히 말하지만 보름 전쯤 그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만 해도 나는 김반장이 내 셋째형부가 되어주길 은근히 바라고 있었다. 농사짓는 큰 형부는 워낙이 나이가 많아 늙은 아버지 같아서 싫었고 둘째언니야 아직 공식적으로는 처녀니까 별 볼 일 없는데다 형부다운 형부는 선옥이 언니가 결혼해야 생길 터이니 기왕이면 김반장 같은 남자가 형부가 되길 바란 것이었다. 하기야 넷째언니도 시방 같은 공장에 다니는 사내와 눈이 맞아서 부쩍 세수하는 시간이 길어지긴 했지만 그래봤자 앞차가 두 대나 밀려 있으니 어림도 없었다. 선옥이 언니와 김반장이 결혼하면 누가 뭐래도 나는 형제슈퍼에 진득이 붙어 있을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되는 셈이었다. 기분이 내키면 삼백 원짜리 빵빠레를 먹은들 어떠하랴. 오밀조밀 늘어놓은 온갖 과자와 초콜릿과 사탕이 모두 내 손아귀에 있다, 라고 생각하면 어쩔 수 없이 나는 흐물흐물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데 정확히 열나흘 전의 그 일로 인하여 나는 김반장과 형제슈퍼의 잡다한 군것질감을 한꺼번에 포기하였다. 모르긴 몰라도 이런 나의 처사는 백 번 옳을 것이었다. 그 사건의 처음과 끝을 빠짐없이 지켜본 유일한 목격자는 나 하나뿐이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본 것을 누군가에게도 늘어놓지는 않았다. 웬일인지 그 일에 관해서는 입도 뻥긋하기 싫었다. 그런 채로 나 혼자서만 김반장을 형부감에서 제외시켜 버렸던 것이다. 또 하나, 아주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지만 그날 이후에는 김반장이 내 엉덩이를 철썩 두들기며 어이, 우리 경옥이 처제 어쩌구 할 때는 단호하게 그를 뿌리치고 도망나와버리곤 하였다. 물론 그가 내미는 쭈쭈바도 받아먹지 않았다.

 

그 사건은 초여름밤 열시가 넘어서 일어났다. 그날은 낮부터 티격태격해대던 엄마와 아버지와의 말싸움이 저녁에 이르러서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었다. 넷째언니는 야간 조업이 있다고 늘상 열두시가 다 되어야 돌아오는 처지라 만만한 나만 엄마의 분풀이 대상이 되어서 낮부터 적잖이 욕설도 들어먹었던 차였다. 싸우는 이유도 뭐 그리 대단한 게 아니었다. 아버지가 쓰레기 속에서 주워온 십팔금 목걸이를 맥주 네 병으로 맞바꾸어 간단히 목을 축이고 돌아왔노라는 말을 내뱉은 뒤부터 엄마의 잔소리가 시작된 게 원인이었다. 새삼 길게 이야기할 것도 없고 요지는 맥주 네 병으로 홀랑 마셔버리느니 지 여편네 목에 걸어주면 무슨 동티가 날까봐 그랬느냐는 아우성이었다. 엄마가 지금 손가락에 끼고 있는, 약간 색이 변한 십팔금 반지도 아버지가 주워온 것인데 짜장 목걸이까지 세트로 갖출 뻔한 것을 놓쳐서 엄마는 단단히 약이 올랐다. 그러던 말싸움이 저녁에 가서는 기어이 험악한 욕설과 아버지의 손찌검으로 이어지길래 나는 언제나처럼 슬그머니 집을 빠져나와 비어 있는 형제슈퍼의 노천의자에 앉아 있었다. 가끔씩 있는 일로서 멀지 않아 아버지는 엄마를 케이오로 때려눕힌 뒤 코를 골며 잠들어버릴 것이었다. 그 다음엔 눈물 콧물 다 짜낸 엄마가 발을 질질 끌며 거리로 나와 경옥아!를 목청껏 부를 판이었다. 그 때나 되어 못 이기는 척 들어가 잠자리에 누워버리면 내일 아침의 새날이 올 것이 분명하였다.

 

집에서 나온 것이 아홉시쯤, 그래서 김반장도 가겟방에 놓은 흑백 텔레비전으로 저녁 뉴스를 시청하느라고 내가 나온 것도 모르고 있었다. 장가들면 색시가 컬러 텔레비전을 해올 것이므로 굳이 바꿀 필요 없다고 고물 텔레비전으로 견디어내는 김반장의 등허리를 흘낏 쳐다보고 나는 신발까지 벗고 의자 위에 냉큼 올라앉았다. 잠이 오면 탁장에 엎드려 한숨 졸고 있어볼 생각으로 나는 가물가물 감기는 눈을 비비며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거리는 그날따라 유난히 한산했고 지물포나 사진관도 일찌감치 아크릴 간판에 불을 꺼둔 채였다. 우리정육점은 휴일인지 셔터까지 내려져 있었다. 그 옆의 서울미용실은 경자 언니가 출퇴근을 하기 때문에 아홉시만 되면 어김없이 불을 꺼버린 채였다. 형제슈퍼에서 공단 쪽으로 난 길은 공터가 드문드문 박혀 있어서 원래 칠흑같이 어두웠다. 한 블록쯤 가야 세탁소가 내비치는 불빛이 쬐끔 새어나올 뿐이고 포장도 안 된 울퉁불퉁한 소방도로 옆으로는 자갈이며 벽돌 따위가 쌓여 있었다.

 

바로 그때 공단 쪽으로 가는 어두운 길에서 뭔가 비명 소리도 같고 욕지기를 참는 안간힘 같기도 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그때 나는 비몽사몽 졸음 속에서 헤매고 있었기 때문에 정확하게 어떤 소리를 들은 것은 아니었다. 이제 생각하면 그 순간에는 분명 잠에 흠뻑 취해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소리를 들었던 것처럼 생각된 것은 꿈속에까지 쫓아와 악다구니를 벌이고 있는 엄마와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있었던 탓인지도 몰랐다. 하여간 허공을 가르는 비명 소리가 꿈속이었거나 생시였거나 간에 들려왔던 것은 사실이었다. 움찔 놀라며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누군가가 어둠을 뚫고 뛰쳐나와 필사적으로 가게를 향해 덮쳐오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뒤엔 덫에서 뛰쳐나온 노루새끼를 붙잡으러 온 것이 확실한 젊은 사내 둘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쫓아오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나는 불빛에서 약간 비껴난 쪽의 의자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눈에 띄지 않았다. 더욱 공교로웠던 것은 마침 가게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때에 따라서는 비치파라솔 밑의 이 의자로는 턱도 없이 모자랄 만큼의 사람들이 왁자하게 모여 막걸리 타령을 벌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대개는 일을 끝내고 돌아가는 공사장의 인부들이었다. 그 사람들이 아니더라도 동네 사람 몇몇이 자주 이 의자에 앉아 밤바람을 쐬기도 했는데 그날은 아무도 없었다. 갑작스런 사태에 놀라 어리둥절하는 사이 도망자는 곧장 가게 안으로 들어가버렸고 뒤쫓아온 사람 중의 하나는 가게 앞에, 또 하나는 마악 가게 속으로 들어가는 중이어서 나는 그들의 모습을 비교적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야, 이 새꺄! 이리 못 나와!"

 

가게 안으로 쫓아들어가면서 소리치고 있는 사내는 빨간색의 소매 없는 런닝셔츠를 입고 있어서 땀에 번들거리는 어깻죽지가 엄청 우람하게 보였다.

 

"깽판 치리 전에 빨리 나오란 말야!"

 

가게 앞에 서서, 씩씩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이마의 땀을 훔치고 있는 사내는 두 개의 웃저고리를 한 손에 거머쥐고 있었다. 그도 당연히 런닝셔츠 바람이었지만 소매도 달린, 점잖은 흰색이었으므로 빨간 셔츠에 비해 훨씬 온순하게 보여졌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나는 가게 옆구리의 샛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새 사내의 발길에 채여버린 도망자가 바닥에 엎어져 있었고 김반장이 만약을 위해 사내 주변의 맥주박스를 방안으로 져나르면서 뭐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김형, 김형…… 도와주세요."

 

쓰러진 남자의 입에서 이런 말이 가느다랗게 흘러나온 것은 그 순간이었다. 그와 동시에 빨간 셔츠의 사내가 다시 쓰러진 자의 등허리를 발로 꽉 찍어눌렀다.

 

"이 새끼, 아는 사이요? 그러면 당신도 한번 맛 좀 볼 텐가?"

 

맥주병을 거꾸로 쳐들고 빨간 셔츠가 소리질렀다. 김반장의 얼굴이 대번에 하얗게 질려버렸다.

 

"무, 무슨 소리요? 난 몰라요! 상관없는 일에 말려들고 싶지 않으니까 나가서들 하시오."

 

그때 바닥에 쓰러져 버둥거리던 남자가 간신히 몸을 비틀고 일어섰다. 코피로 범벅이 된 얼굴이 슬쩍 드러나보였는데 세상에, 그는 몽달씨임이 분명하였다. 그러고 보니 빛바랜 바지와 물들인 군용점퍼 밑에 노상 껴입고 다니던 우중충한 남방셔츠가 틀림없는 몽달씨였다. 아까는 워낙 눈깜짝할 사이에 가게 안으로 뛰어들었기 때문에 얼굴을 볼 겨를이 없었다.

 

"이 짜식, 어디로 토끼는 거야! 너 같은 놈은 좀 맞아야 돼."

 

흰 이를 드러내며 빨간 셔츠가 으르렁거렸다. 순간 몽달씨가 텔레비전이 왕왕거리고 있는 가겟방을 향해 튀었다. 방은 따로이 바깥쪽으로 난 출입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몽달씨 보다 더 빠른 동작으로 방문을 가로막아버린 사람이 있었다. 바로 김반장이었다.

 

"나가요! 어서들 나가요! 싸우든가 말든가 장사 망치지 말고 어서 나가요!"

 

빨간 셔츠가 몽달씨의 목덜미를 확 나꾸어챘다. 개처럼 질질 끌려나오는 몽달씨를 보더니 밖에 있던 흰 런닝셔츠가 찌익, 이빨 새로 침을 뱉아냈다. 두 사람 다 술기운이 벌겋게 오른, 번들거리는 눈자위가 징그러웠다. 나는 재빨리 불빛이 닿지 않는 구석으로 몸을 피했다. 무섭고 또 무서웠다. 저렇게 질질 끌려가는 몽달씨를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도무지 가슴이 떨려 숨도 크게 쉬지 못할 지경이었는데도 김반장은 어지러진 가게를 치우면서 밖은 내다보지도 않았다.

 

두 명의 사내 중에서도 빨간 셔츠가 훨씬 악독한 게 사실이었다. 녀석은 몽달씨의 머리칼을 한 움큼 휘어감고서 마치 짐짝을 부리듯이 몽달씨를 다루고 있었다. 끌려가지 않으려고 버둥거리다가는 사내의 구둣발에 사정없이 정갱이며 옆구리가 뭉개어졌다. 지나가던 행인 몇 사람이 공포에 질린 얼굴로 그들을 지켜보았다. 구경꾼들이 보이자 빨간 셔츠가 당당하게 외쳐댔다.

 

"이 새끼, 너 같은 놈은 여지없이 경찰서로 넘겨야 해. 빨리와!"

 

불 커진 강남부동산 앞에서 몽달씨가 최후의 발악을 벌여 놈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그러나 이내 녀석에게 머리칼을 붙잡히면서 부동산 옆의 시멘트 기둥에 된통 머리를 받쳤다. 쿵. 몽달씨의 머리통이 깨져나가는 듯한 소리에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행복사진관과 원미지물포만 지나고나면 또다시 불빛도 없는 공터가 나올 것이므로 몽달씨를 구해낼 시기는 지금밖에 없다. 몽달씨가 악착같이 불켜진 가게 쪽으로만 몸을 이끌어갔기 때문에 길 이쪽은 텅 비어 있었다. 몇몇 사람들이 있기는 하였지만 그들은 섣불리 끼어들지 않고서 당하는 몽달씨의 처참한 꼴에 혀만 끌끌 차고 있었다.

 

"빨리 가, 이 자식아! 경찰서로 가잔 말야!"

 

빨간 셔츠가 움켜쥔 머리칼을 확 나꾸어채면 몽달씨는 시멘트 바닥에서 몸을 가누지 못해 정말 개처럼 두 손을 바닥에 짚고 끌려갔다.

 

"왜 이러세요…… 내게 무슨 잘못이…… 있다고……."

 

행복사진관의 밝은 불빛 앞에서 몽달씨가 울부짖으며 사내에게 잡힌 머리통을 흔들어대다가 녀석의 구둣발에 면상을 짓밟히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나는 내달리기 시작하였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녀석들 곁을 바람같이 스쳐 나는 원미지물포로 뛰어들었다. 가게는 텅 비어둔 채 지물포 주씨 아저씨는 아랫목에 길게 누워 텔레비전을 보느라 바깥의 소동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깡패가, 깡패가 몽달씨를 죽여요!"

 

주씨 아저씨는 그 우람한 체구에 비하면 말귀를 빨리 알아듣는 사람이었다. 벼락같이 튀어나와 마침 자기 가게 앞을 끌려가고 있는 몽달씨의 꼴을 보고는 냅다 소리를 질렀다.

 

"죄가 있으모 경찰을 부를 일이제 무신 일로 사람을 이리 패노? 보소! 형씨, 그 손 못 놓나?"

 

"아저씨는 상관 마쇼! 이런 놈은 경찰서로 끌고가야 된다구요."

 

"누가 뭐라카노. 야! 빨리 경찰에 신고해라. 당신네들이 사람 뚜드려가며 경찰서까지 갈 것 없다. 일분 안에 오토바이 올테니까."

 

"이 아저씨가…… 이 새끼 아는 사람이오?"

 

"잘 아는 사람이니 이카제. 이 착한 청년이 무신 죄를 졌다꼬 이래 반 죽여놨노? 무슨 일이라?"

 

그제서야 빨간 셔츠가 슬그머니 움켜쥔 머리칼을 놓았다. 몽달씨가 비틀거리며 주씨 곁으로 도망쳤다.

 

"아무 잘못도…… 없어요…… 지나가는 사람 잡아놓고…… 느닷없이 때리는데."

 

더듬더듬, 입 안에 괴어 있는 피를 뱉아내며 간신히 이어가는 몽달씨의 말을 듣노라고 주씨가 잠시 한눈을 판 것이 잘못이었다. 멀찌감치 서서 구경을 하고 있던 사람들 중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어이, 저봐요. 저 사람들 도망쳐요!"

 

정말 눈깜짝할 사이였다. 벌써 공단 쪽 길로 튕겨가는 모양으로 발자국 소리만 어지럽고 녀석들은 어둠 속에 파묻혀버린 뒤였다.

 

"빨리 가서 잡아야지 저런 놈들 그냥두면 안 돼요!"

 

언제 왔는지 김반장이 발을 구르며 흥분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잡으러 갈 듯 몸을 솟구치는 꼴이 가관이었다.

 

"소용없어. 저놈들이 어떤 놈이라고."

 

"세상에, 경찰서로 가자고 그리 당당하게 굴더니 도망치는 것좀 봐."

 

"그러니까 그냥 닥치는 대로 골라잡아 팬 거군. 우린 그것도 모르고 정말 도둑이나 되는 줄 알았지 뭐야!"

 

"여기는 가게들이 많아 환하니까 어두운 곳으로 끌고 가서 작신 팰려고 수작을 벌였군."

 

"그래요. 아까 보니까 저 윗길에서 이 총각이 그냥 지나가는데 불러놓고 시비드라구요. 아휴, 저 총각 너무 많이 맞았어. 죽지 않은 게 다행이야."

 

"그럼 진작에 말하지 그랬어요?"

 

"누가 이 지경인 줄 알았수? 약국에 가는 길에 그 난리길래 무서워서 저쪽으로 돌아갔다가 약 사갖고 와보니 경찰서 가자고 여태도 패고 있던걸."

 

모여섰던 사람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조금 아까까지도 텅 비어 있다시피한 거리였는데 언제 알았는지 이집저집에서 쏟아져나온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피투성이가 된 몽달씨를 기웃거렸다. 참말이지 쥐어뜯긴 머리칼하며 길바닥을 쓸고온 옷 꼬락서니, 그리고 피범벅이 된 얼굴까지가 영락없이 몽달 귀신 그대로였다.

 

"무신 놈의 세상이 이리 험악하노. 이래가꼬는 사람이라 할 수 있겠나?"

 

주씨가 어이없어하는데 또 김반장이 냉큼 뛰어들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하여간 저놈들을 잡아넘겼어야 하는 건데…… 좀 어때? 대체 이게 무슨 꼴인가. 어서 집으로 가세. 내가 데려다줄게."

 

김반장이 몽달씨를 부축해 일으켰다. 세상에 밸도 없지, 그 손을 뿌리치지 못하고 몽달씨는 김반장의 부축을 받으며 집으로 갔다.

 

몽달씨를 다시 보게 된 것은 그로부터 꼭 열흘이 지난 며칠 전 이었다. 그 열흘간을 어떻게 보냈는지는 설명하기도 귀찮을 정도였다. 몽달씨와 더불어 다닐 때는 몰랐지만 막상 그가 없으니 심심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하루가 꼭 마흔 시간쯤으로 늘어난 느낌이었다. 때때로는 형제슈퍼의 의자에 앉아 있은 적도 있었지만 이미 김반장과는 서먹한 사이가 되어버려서 그다지 자주 찾지는 않았다. 그날밤, 내가 몰래 가게 안을 훔쳐보고 있은 줄을 모르는 김반장만큼은 예전과 다름없이 굴고 있기는 하였다.

 

"경옥이 처제. 요새는 왜 뜸해? 선옥이 언니 서울서 오거든 직방으로 내게 알리는 것 잊지 마라. 그러면 내가 이것 주지!"

 

김반장이 쳐들어보이는 것은 으레 요깡이었다. 껍질에는 영양갱이라고 씌어 있는 이백 원짜리 팥떡인데, 그것을 죽자사자 먹고 싶어하는 것을 아는 까닭이었다. 그러나 흥, 어림도 없지. 선옥이 언니가 오게 되면 김반장의 비겁한 행동을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쳐서 행여 남아 있을지도 모를 미련까지도 아예 싹둑 끊어버리게 하자는 것이 내 속셈이었다. 어찌된 셈인지 선옥이 언니는 한 달 가까이 집에는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고 있었다. 얼마 전에 서울에 다녀온 엄마 말로는 양품점이 한 달에 두 번 노는데도 집에는 올 생각 않고 왼종일 쏘다니다 밤 늦게서야 기어들어온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모가 받아본 전화 속의 남자들만도 서넛이 넘어서 양품점 전화통이 종일토록 불나게 울려대는 통에 지깐 년은 저한테 걸려오는 전화받기에도 바쁜 형편이라 했다. 엄마를 속 빼닮아 말뽄새가 거칠기 짝이 없는 이모가 보나마나 바가지로 퍼부었을 선옥이 언니의 흉보따리를 잔뜩 짊어지고 온 엄마의 마지막 결론은 갈데없이 원미동 똑똑이다웠다.

 

"선옥이 고년, 이왕지사 바람든 년이니까 차라리 탈렌트나 영화배우를 시키는 게 낫겠습디다. 말이사 바른 말이지 인물이야 요즘 헌다하는 장미희보다 낫지……."

 

"미쳤군, 미쳤어. 탈렌트는 누가 거져 시켜주남. 뜨신 밥먹고 식은 소리 작작해!"

 

그렇게 몰아붙이면서도 아버지는 으레 흐흐흐 웃고마는 게 예사였다. 딸 많은 집구석에 인물 팔아 돈 버는 딸년 하나쯤 생긴다 해서 나쁠 것도 없다는 웃음이 분명했다.

 

"서울 사람들은 눈도 밝지. 선옥이가 명동으로 나갔다 하면 영화배우 해보라고 줄줄이 따라다닌답니다. 인물 좋은 것도 딱 귀찮다고 고년이 어찌 성가셔 하는지……."

 

엄마도 참,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고흥댁 아줌마한테 이렇게 주워 섬기는 때도 있다. 그러면 여태도 동아 언니 콧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솟아 있다고만 믿는 고흥댁 아주머니도 지지 않고 딸자랑을 쏟아놓았다.

 

"우리 동아는 요새 피아노도 배우고 꽃꽂이학원도 다닌다고 맨날 바쁘다요. 시방 세상은 그 정도의 신부 수업인가 뭔가가 아주 필수라 한다드만."

 

엄마도 엄마지만 고흥댁 아주머니 말은 듣기에 거북하였다. 대신설비 노가다 청년한테 시집가면 피아노는 커녕, 호박꽃 한송이 꽂을 일도 없을 것이니까. 어른들은 알고 보면 하나밖에 모르는 멍텅구리 같을 때가 종종 있는 법이다. 그 사건 이후, 김반장에 대한 이야기만 해도 그렇다.

 

"김반장 그 사람 참말이제 진국은 진국인기라. 엊그제만 해도 복숭아 깡통 하나 들고 몽달 청년한테 가능갑드라. 걱정도 억시기 해쌓고, 우찌됐건 미친놈한테 그만큼 정성들이는 것만 봐도 보통은 아닌 기 맞다."

 

지물포 주씨가 행복사진관 엄씨한테 하는 말이었다. 세 살 많다 하여 어김없이 형님으로 받드는 엄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 치는 것을 보고 있으면 내 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그 밤의 일을 속시원히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면 이 김경옥이야말로 진국 중에 진국인지도 모른다.

 

몽달씨가 자리 털고 일어난 이야기를 하려다가 또 다른 쪽으로 새버렸지만 몽달씨야말로 진짜 이상 한 사람이었다. 오후반인 소라가 등교 준비를 해야 한다고 서둘러 저희집으로 가버린 때니까 정오가 조금 지나서였을 것이다. 집으로 가다 말고 문득 형제슈퍼 쪽을 돌아보니 음료수 박스들을 차곡차곡 쟁여놓는 일에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몽달씨가 보였다. 실컷 두들겨맞고 열흘간이나 누워 있었던 사람이라 안색은 차마 마주보기 어려울 만큼 핼쑥했다. 그런데도 뭐가 좋은지 히죽히죽 웃어가면서 열심히 박스들을 나르고 있는 게 아닌가. 그것도 김반장네 가게에서.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보아도 몽달씨가 분명했다. 저럴 수가. 어쨌든 제정신이 아닌 작자임이 틀림없었다. 아무리 정신이 좀 헷갈린 사람이래도 그렇지, 그날밤의 김반장 행동을 깡그리 잊어버리지 않고서야 저럴 수가 없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잊었을까. 그날밤 머리의 어딘가를 세게 다쳐서 김반장이 자기를 내쫓은 부분만큼만 감쪽같이 지워진 것은 아닐까. 전혀 엉뚱한 이야기만도 아니었다. 텔레비전에서도 보면 기억상실증인가 뭔가로 자기 아들도 못 알아보는 연속극이 있었다. 그런 쪽의 상상이라면 나를 따라올 만한 아이가 없는 형편이었다. 내 머릿속은 기기괴괴한 온갖 상상들로 늘 모래주머니처럼 빽빽했으니까. 나는 청소부 아버지의 딸이 아니라 사실은 어느 부자집의 버려진 딸이다, 라는 식의 유치한 상상은 작년도 못 되어 이미 졸업했었다. 요즘의 내 상상이란 외계인 아버지와 지구인 엄마와의 사랑, 뭐 그런 쪽의 의젓한 것이었다. 아무튼 나의 기막힌 상상력으로 인해 몽달씨는 부분적인 기억상실증 환자로 결정되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확인할 일만 남은 셈이었다.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나는 김반장네 가게 일을 거들어주고 난 뒤 비치파라솔 밑의 의자에 앉아 뭔가를 읽고 있는 몽달씨에게로 갔다. 보나마나 주머니 속에 잔뜩 들어 있는 종이조각 중의 하나일 것이었다. 멀쩡한 정신도 아닌 주제에 이번엔 기억상실증이란 병까지 얻어 놓고도 여태 시 따위나 읽고 있는 몽달씨 꼴이 한심했다.

 

"이거, 또 시예요?"

 

"그래. 슬픈 시야. 아주 슬픈……."

 

몽달씨가 핼쑥한 얼굴을 쳐들며 행복하게 웃었다. 슬픈 시라고 해놓고선 웃다니. 나는 이맛살을 찡그리며 몽달씨 옆에 앉았다. 그리고 아주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다 나았어요?"

 

"응. 시를 읽으면서 누워 있었더니 금방 나았지."

 

금방은 무슨 금방. 열흘이나 되었는데. 또 한번 나는 몽달씨의 형편없는 정신 상태에 실망했다.

 

"그날밤에 난 여기에 앉아서 다 봤어요."

 

"무얼?"

 

"김반장이 아저씨를 쫓아내는 것……."

 

순간 몽달씨가 정색을 하고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예전의 그 풀려 있던 눈동자가 아니었다. 까맣고 반짝이는 눈이었다. 그러나 잠깐이었다. 다시는 내 얼굴을 보지 않을 작정인지 괜스레 팔뚝에 엉겨붙은 상처딱지를 떼어내려고 애쓰는 척했다. 나는 더욱 바싹 다가앉았다.

 

"김반장은 나쁜 사람이야. 그렇지요?"

 

몽달씨가 팔뚝을 탁 치면서 "아니야"라고 응수했는데도 나는 계속 다그쳤다.

 

"그렇지요? 맞죠?"

 

그래도 몽달씨는 못 들은 척 팔뚝만 문지르고 있었다. 바보같이. 기억상실도 아니면서……. 나는 자꾸만 약이 올라 견딜 수 없는데도 몽달씨는 마냥 딴전만 피우고 있었다.

 

"슬픈 시가 있어. 들어볼래?"

 

치, 누가 그 따위 시를 듣고 싶어할 줄 알고. 내가 입술을 비죽 내밀거나 말거나 몽달씨는 기어이 시를 읊고 있었다. ……마른 가지로 자기 몸과 마음에 바람을 들이는 저 은사시나무는, 박해 받는 순교자 같다. 그러나 다시 보면 저 은사시나무는 박해받고 싶어하는 순교자 같다…….

 

"너 글씨 알지? 자, 이것 가져. 나는 다 외었으니까."

 

몽달씨가 구깃구깃한 종이 쪽지를 내게로 내밀었다. 아주 슬픈 시라고 말하면서. 시는 전혀 슬픈 것 같지 않았는데도 난 자꾸만 눈물이 나려 하였다. 바보같이, 다 알고 있었으면서…… 바보 같은 몽달씨 …….

2005.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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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귀자 소설은 위에 분이 올려주셨고 저는 신경숙 소설을 올리겠습니다.

풍금이 있던 자리

신 경 숙

어느 동물원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마리의 수컷 공작새가 아주 어려서부터 코끼리 거북과 철망 담을 사이에 두고 살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주고받는 언어가 다르고 몸집과 생김새들도 너무 다르기 때문에 쉽게 친해질 수 있는 사이가 아니었다. 어느덧 수공작새는 다 자라 짝짓기를 할만큼 되었다. 암컷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그 멋진 날개를 펼쳐 보여야만 하는데 이 공작새는 암컷 앞에서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는 엉뚱하게도 코끼리 거북 앞에서 그 우아한 날갯짓을 했다. 이 수공작새는 한평생 코끼리 거북을 상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했다...... 알에서 갓 깨어난 오리는 대략 12-17시간이 가장 민감하다. 오리는 이 시기에 본 것을 평생 잊지 않는다.

- <박시룡, {동물의 행동}중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길은, 막 봄이 와서, 여기저기 참 아름다웠습니다. 산은 푸르고 ...... 푸름 사이로 분홍 진달래가 ...... 그 사이 ...... 또 ...... 때때로 노랑 물감을 뭉개 놓은 듯, 개나리가 막 섞여서는 ...... 환하디 환했습니다. 그런 경치를 자주 보게 돼서 기분이 좋아졌다 가도 곧 처연해지곤 했어요. 아름다운 걸 보면 늘 슬프다고 하시더니 당신의 그 기운이 제게 뻗쳤던가 봅니다. 연푸른 봄산에 마른버짐처럼 퍼진 산 벚꽃을 보고 곧 화장이 얼룩덜룩해졌으니.
저, 저만큼, 집이 보이는데,
저는, 집으로 바로 들어가질 못하고, 송두리째 텅 빈 것 같은 마을을 한바퀴 돌고도 ...... 또 들어가질 못하고 ...... 서성대다가 시끄러운 새소리를 들었어요. 미루나무를 올려다보니 부부일까? 두 마리의 까치가, 참으로 부지런히 둥지를 ...... 둥지를 틀고 있었어요. 오래 바라보았습니다, 둘이 서로 번갈아 가며 부지런히 나뭇잎이며 가지들을 물어 나르는 것을.
이 고장을 찾아올 때는 당신께 이런 편지를 쓰려고 온 것이 분명 아니었습니다. 이런 글을 쓰려고 오다니요? 저는 당신과 함께 떠나려 했잖습니까.
비행기를 타 버리자.
당신이 저와 함께 하겠다는 그 결정을 내려 주었을 때, 저는 너무나 환해서 꿈인가? ...... 꿈이겠지, 어떻게 그런 일이 내게 ...... 다름도 아닌 내게 찾아와 주려고, 꿈일 테지, 했어요.
죄라면 죄겠지. 내 삶을 내 식대로 살겠다는 죄.
제가 꿈인가? 헤매는데 당신은 죄라면 죄겠지, 하시며 진짜 일을 진척시키기 시작했죠. 당신을 알고 지낸 지난 이 년 동안에 무너져만 내리던 제게 어떻게 그런 환한 일이, 스포츠 센터 일을 다 정리하고 나서도 암만 꿈만 같아서, 당신에게 다짐을 받고 또 다짐을 하다가 결국은 또 눈물 ...... 이.
이 고장을 찾아올 때는 당신께 이런 글을 쓰려고 온 것이 분명 아니었습니다. 이런 편지를 쓰려고 오다니요? 저는 일단 나서고 보자는 당신에게 제 숨을 ...... 이 숨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떠나기 전에, 아무것도 모르시는 부모님과 작별을 하려고 온 것입니다. 당신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나면 이분들을 살아생전에 다시 뵐 수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기차에서 내려 제가 맨 먼저 한 일은 역구내 수돗가에서 손을 씻었던 일입니다. 십오륙 년 전에, 여학교를 졸업하고 이 고장을 떠나면서도 나는 그 수돗가에서 손을 씻었었습니다. 그 이후 이 고장에 내려오거나 다시 이 고장을 떠날 때마다 저는 그 수돗가에서 손을 씻었습니다. 그 무엇과 아무 연대감도 없이 이루어진 손 씻는 습관은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어느덧 저는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불쑥 제 속에서 누군가 묻는 것이었어요. 너는 왜 이 고장을 떠나거나 도착할 때마다 이 자리에서 손을 씻는 거지? 저는 그 질문에 답변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손을 씻고 마을로 들어가면 도시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잊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랬을까요? 그 자리에서 손을 씻고 이 고장을 떠나가면 이 고장에서 있었던 일들을 잊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랬을까요? 글쎄, 그건 단순히 이루어진 습관이었을까요? 그 날, 그 수돗가에 손목시계를 벗어 두고 온 것을 집에 돌아와서야 알았습니다. 그 노란 시계는 당신이 주신 것이었지요. 제 팔목에 매달려, 햇살을 받을 때마다 반짝 윤이 나던, 시침과 분침 초침을 맑게 비추던 유리알에 당신의 이니셜이 새겨진.
제 마음속에 일어난 이 파문을 당신께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과연 설명이 가능한 파문인지조차 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영문을 몰라 하는 당신이 거기 있으니, 저는 당신께 어떻게든 제 마음을 전해 드려야지요. 지금 제 마음은 어쩌면 당신께 이해를 받지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설령 그렇더라도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해야 하는 것임을, 그것이 당신에 대한 제 할 일임을 괴롭게 깨닫습니다. 제 표현이 모자라서 이 편지를 다 읽으시고도 제 마음이 야속하시면 ... 그러면 또 어떡해야 하나 ......
강물은 ...... 강물은, 늘 ...... 늘, 흐르지만, 그 흐름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어찌된 셈인지 제게는 그 강과 함께 흐르기로 마음먹는 일이 제 심연의 물을 퍼 주고야 생긴 일임을, 아니에요, 이런 소릴 하는 게 아니지요, 다만, 어떻게 하더라도 제게 어찌할 수 없는 아픔이 남는다는 걸 알아 주시 ...... 아니에요, 아닙니다.
그 여자...... 그 여자 얘길 당신에게 해야겠어요.
그토록 서성였는데 들어와 보니 집은, 텅......텅, 비어 있었습니다. 텅 빈 집 마루에 앉아 대문을 바라다본 적이 있으신 가요? 누군가 열린 그 대문을 통해 마당으로 성큼 들어서 주기를 바라면서 말이에요. 마당엔 봄볕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대문 옆 포도나무 덩굴 감김새 위에 메추라기 한 마리가 포르르 내려와 앉더군요. 메추라기는 잠시 어리둥절한 폼을 취하더니 다시 포르르 허공에 금을 긋고 날아갔습니다. 이상한 일이지요. 메추라기를 쫓아가던 시선을 다시 대문에 고정시켰을 때, 제 속에서 매우 친숙한 느낌이 어떤 두꺼움을 뚫고 새어나왔어요. 저는 파란 페인트칠이 벗겨진 대문을 눈을 반짝 뜨고 바라다봤습니다. 언젠가 이와 똑같은 풍경이 제 삶을 뚫고 지나간 적이 있음을, 저는 기억해 낸 것입니다. 시누대가 있던 자리에 아스팔트를 깔았는데, 몇 년이 지난 어느 봄에 그 아스팔트를 뚫고 죽순이 솟았다더니, 제 마음에도 바로 그런 요동이 일었어요. 여섯 살이었을까, 아니면 일곱 살? 막냇동생이 막 태어나던 해 였으니, 일곱 살이 맞겠습니다. 저는 마루 끝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누군가 열린 대문을 통해 들어와 주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토록 간절히 바란 것으로 보면 어쩌면 어머니를 기다렸던 건지도 모릅니다. 바로 그 때 그 여자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 여자가 열린 대문으로 들어섰을 때 제 발끝에 매달려 있던 검정 고무신이 툭, 떨어졌습니다. 여자는 마당의 늦봄 볕을 거느린 듯 화사했습니다. 그 때까지 저는 그토록 뽀얀 여자를 본 적이 없었어요. 마을을 단 한 번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어린 저는, 머리에 땀이 밴 수건을 쓴 여자, 제사장에 오를 홍어 껍질을 억척스럽게 벗기고 있는 여자, 얼굴의 주름 사이로까지 땟국 물이 흐르는 여자, 호박 구덩이에 똥물을 붓고 있는 여자, 뙤약볕 아래 고추 모종하는 여자, 된장 속에 들끓는 장벌레를 아무렇지도 않게 집어내는 여자, 산에 가서 갈퀴나무를 한 짐씩 해서 지고 내려오는 여자, 들깻잎에 달라붙은 푸른 깨벌레를 깨물어도 그냥 삼키는 여자, 샛거리로 먹을 막걸리와, 호미, 팔 토시가 담긴 소쿠리를 옆구리에 낀 여자, 아궁이의 불을 뒤적이던 부지깽이로 말 안 듣는 아들을 패는 여자, 고무신에 황토 흙이 덕지덕지 묻은 여자, 방바닥에 등을 대자마자 잠꼬대하는 여자, 굵은 종아리에 논물에 사는 거머리가 물어뜯어 놓은 상처가 서너 개씩은 있는 여자, 계절 없이 살갗이 튼 여자...... 이렇듯 일에 찌들어 손금이 쩍쩍 갈라진 강팍한 여자들만 보아 왔던 것이나, 그 여자의 뽀얌에 눈이 둥그렇게 되었던 건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텃밭이 어디니?
그 여자가 제게 다가와 제 어깨를 매만지며 물었어요. 여자는 어느덧 부엌에서 소쿠리를 들고 나와 제 앞에 서 있었지요. 저는 그 여자의 화사함에 이끌려 고무신을 꿰신고, 그 여자를 뒤세우고는 텃밭으로 난 샛문을 향했습니다. 그 여자에게서는 그때껏 제가 맡아 본 적이 없는 은은한 향내가 났습니다. 그 여자가 움직일 때마다 그 향내는 그 여자에게서 조금 빠져나와 제게 스미곤 했습니다. 그게 왜 그리 저를 어지럽게 하던 지요. 텃밭으로 가는 길에 물을 길어 나르던 장성 댁을 만났는데, 장성 댁은 물동이를 내려놓고까지 그 여자와 나를 쳐다봤어요, 샐쭉한 표정으로.
그 여자는 잔 배추와 잔 배추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소쿠리에 잔 배추를 뽑았습니다. 텃밭 한 켠에 심겨진 푸르른 조선파도 뽑아 담았습니다. 여자는 새각시처럼 뉴똥 저고리를 입고 있어서, 배추를 뽑을 때는 배춧잎같이, 파를 뽑을 때는 팟잎같이 파랗게 고왔습니다. 텃밭 지기 노랑나비도 그 여자 머리 위에 내려앉으니 날개를 바꿔 단은 듯했어요. 텃밭에 들어갔다 나오자 여자의 흰코 고무신에 흙이 얼룩졌지만, 여자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듯 제 손을 이끌고 다시 샛문을 통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우리 집으로 불쑥 들어온 그 여자가 맨 먼저 한 일은 김치를 담그는 일이었어요. 저는 영문도 모르고 김치 담그는 그 여자 곁에서 잔심부름을 해주었어요. 생강 껍질도 벗겨 주고, 마늘도 짓찧어 주었으며, 우물에서 소금에 절인 배추를 씻을 때는 두레박질도 해주었지요. 그 여자는 아무래도 그런 일이 서툰 듯했어요. 어머니께서는 한눈을 파시면서도 단숨에 척척 해내는 무생채 써는 일은 특히 말이에요. 어머니의 도마질 소리는 깍둑깍둑깍둑...... 경쾌했지만, 그 여자의 도마질 소리는 깍...... 뚝...... 깍...... 뚝...... 이었어요. 그렇게 그 여자는 파란 페인트칠이 벗겨진 대문을 통해 우리 집으로 들어왔고, 대신 그 대문으로 어머니께서 자취를 감췄습니다. 안방 아기 그네에 백일이 겨우 지난 막냇동생까지 남겨 두고. 여자는 힘들게 김치를 담가서 저녁 밥상을 차려 내놓았지만, 우리 형제들은 아무도 수저를 들지 못했습니다. 큰오빠가 윗목에 버티고 앉아 눈을 부라리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저는 점심도 못 먹었던 터라 밥상이 나오자, 수저를 들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큰오빠의 매서운 눈초리에 힘없이 내려놓았어요.
밥들 먹어!
여자는 우리 형제들을 향해 애원하듯 말했지만 우리는 큰오빠의 위세를 물리칠 수가 없었어요. 아버진 입을 꽉 다문 큰오빠를 지나 어두워진 마당을 담배를 피우며 내다보실 뿐이었습니다. 그네 속의 막냇동생이 울음을 터뜨렸을 때, 큰오빠는 아버지에게 보내는 도전장처럼 무겁게 입을 열었어요.
너희들 모두 나를 따라나와.
그 때 막 중학생이 되었던 까까머리 큰오빠는 무슨 마피아의 두목 같았습니다. 숨이 넘어갈 듯 울어제끼는 강보의 동생과 어쩔 줄 모르고 손을 맞비비고 있는 그 여자와, 뽀끔뽀끔 담배 연기를 내뿜는 아버지를 남겨 둔 채 우리는 어린 두목에게 이끌려 마을 다리로 나갔습니다. 큰오빠는 우리 셋을 나란히 줄 세웠어요. 그리고 자기는 중앙에 서서 엄숙하게 말했습니다. 너희들 내 말 잘 들어. 오늘부터 내 말을 안 들으면 너희들 국물도 없을 줄 알어. 오늘 집에 온 그 여자는 악마다. 그러니까 그 여자가 해준 밥은 먹지도 말고, 불러도 대답도 하지 말고, 그 여자가 빨아 준 옷은 입지도 말아라.
성아, 왜?
큰오빠의 옷자락을 잡아끌며 물었던 사람은 그 때 저보다 한 살 많았던 바로 위 오빠였습니다.
배고픈데, 성!
바로 위 오빠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고, 그의 목소리는 거의 울 듯 했어요. 제 심정도 그 오빠의 심정과 같았습니다. 더구나 그 여자는 얼마나 뽀얀 가요. 큰오빠는 버럭 화를 냈어요.
그렇게 해야만 어머니가 돌아온단 말이다!
큰오빠는 나란히 줄서 있는 우리 셋 앞을 서성이다가 어느 순간 제 앞에 우뚝 멈췄어요. 저는 숨이 멎는 듯했습니다.
특히, 너...... 너 오늘처럼 그 여잘 졸졸 따라다녔단 봐! 너 엄마 없이 살 수 있어?
저는 주저앉아 울음보를 터뜨려 버렸어요. 그렇잖아도 숨막히게 하는 그 무엇이 가슴을 짓누르는 중이었는데, 큰오빠가 그 이유를 정확히 집어내 주었던 것입니다. 그 여자를 뒤세우고 텃밭으로 갈 때 마주쳤던 장성 댁의 그 샐쭉해지던 표정이며, 그 여자의 은은한 향기로움이 좋기만 한 게 아니라 머리를 어지럽게 하던 것의 실체가 잡혔지요. 그 봄날, 그렇게 찾아와 우리 집에 열흘쯤 살다 간 그 여자가, 제가 이 집에 도착해 마루에 앉아 대문을 바라보고 있는데 죽순처럼 제 속을 뚫고 올라왔던 것이에요, 제 근원을 아프게 건드리면서.
사랑하는 당신.
실로 오랜만에 다시 펜을 들었습니다. 어제는 당신이 다녀가셨지요. 그건 뜻밖이었어요. 제가 이 곳에 머물러 있는 것을 어떻게 아셨어요? 저는 그 동안 당신께 이 곳 얘기를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요. 여기에 올 때 제 마음은 하루나 이틀만 묵고 갈 생각이어서 당신께 말씀드리지도 않았는데요.
제 심정을 당신께 알려 드리는 일이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어요. 무슨 일을 글로 써 보는 것에 습관이 들여지지 않아서인지, 어제 당신의 혹독한 질책처럼 마음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제가 억지로 몰아붙이고 있어서......인지...... 펜을 놓고 다시 쓰질 못하고 있었어요.
어제 당신이 오시기 바로 전에 저는 우사(牛舍)에서 소 분만시키고 계시는 아버지 곁에서 그 뒷심부름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여자가 우리 집에 처음 왔을 때 제게 물었던 텃밭, 그 여자가 은은한 향내를 풍기며 나비보다 더 가볍게 연두색 배추를 뽑던 그 밭이 지금은 우사가 되었습니다. 다른 소들보다 수월하게 송아지를 낳았다고 아버지께선 어미 소를 쓰다듬어 주셨어요. 그것도 수송아지를요. 아버지께서 소 태(胎)를 거두시는 걸 보며 집으로 돌아왔는데 당신이 제 집 마당에 서 계시더군요. 처음엔 거기 서 계시는 당신이 환영인가...... 어떻게 당신이 여기를? 헛것이겠지...... 했어요. 오죽했으면 아버지가 돌아오실 때까지 당신을 쳐다보기만 했을까요? 당신을 알고 지내는 동안 늘 소망했었습니다. 당신을 아버지께 봬 드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요. 간절하던 마음이 이루어졌는데, 저는 마치 도망자를 감추듯이 당신을 끌고 황급히 대문을 빠져나와야 했다니, 아버지와 당신의 그 짧은 만남이라니.
시내 다방에 마주앉았을 때, 당신은 나를 질책하였어요. 당신은 저를 그렇게도 간절히 바라건만, 제가 당신과의 관계를 그저 남녀간의 어지러운 정쯤으로 생각한다는 것이었지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렇지 않으면 왜 약속을 어기려 드느냐고 되물으셨지요. 저는 당신께 제 심정을, 복잡하게 들끓고 있는 이 심정을, 단 몇 가닥만이라도 말씀을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 여자가 건드려 놓은 제 심정에 대해서 말이에요. 역시 당신은 무슨 소린지 도저히 모르겠다는 표정이셨지요. 저는 제 심정을 글로 옮겨 놓는 재주만 없었던 게 아니라, 눈썹 하나만 까딱해도 무슨 말을 하는지 안다고 생각했던 당신, 다름 아닌 그 당신께 말로 옮기는 재주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제가 그 여자가 만들어 줬던 음식에 대해서, 그리고 제가 근무하고 있었던 스포츠 센터에서 눈물을 글썽이며 에어로빅 수강을 받던 중년 부인에 대해서 얘기하면 할수록 당신은 얼굴빛이 붉으락푸르락해지셨어요. 그러다 곧 눈물에 젖는 당신의 눈을 바라봐야 하는 제 괴로움이 그토록 술을 마시게 했습니다. 오이채를 썰어 넣기는 했지만, 그러나 막소주를 저는 얼굴빛이 창백해지며 퍼마셨습니다. 제가 당신과의 관계를 남녀간의 어지러운 정쯤으로 생각하다니요?
어제 당신과 저는 꼭 한집에 살고 있는 개와 고양이 같았습니다. 둘이 앙앙대는 건 서로를 이해하는 방식이 달라서라지요. 개가 앞발을 들면 함께 놀자는 마음 표시인데, 고양이에겐 그게 언제든지 대들겠다는 경계신호라잖아요. 고양이가 귀를 뒤로 젖히는 건 심정이 사나우니 건드리면 언제든 할퀴어 놓겠다는 뜻이지만, 개는 당신에게 순종하겠다는 의미라니, 둘 사이에 오해가 싹틀 수밖에요. 어제 당신과 제가 꼭 그랬습니다. 제 마음을 당신은 느닷없이 왜 그렇게 고고해졌느냐며 할퀴었고, 저는 당신 이외의 다른 감정을 모두 뭉개려만 드는 이기주의라고 당신을 물어뜯었습니다. 당신은 출국 날짜를 일러주고 가셨습니다. 그 날짜에 맞춰 제가 돌아올 걸 믿는다고도 하셨습니다. 당신은 석연치 않은 얼굴로 새벽 기차를 타고 다시 도시로 가셨어요.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진 마루에 앉아 계셨습니다. 당신의 팔을 붙들고 황급히 도망치듯 집을 나섰던 저를 보고 짐작하신 게 있으신 지 저를 바라보는 표정이 말할 수 없이 일그러져 계셨어요. 무슨 말씀이든 다 들으려고 아버지 곁에 엉덩일 붙이고 앉았으나, 얼마 후에야 아버진 그냥 방으로 들어가시며 힘없이 중얼거리시더군요. 그 놈, 수송아지가 눈뜬 봉사여야.
방금 어머니께선 상가(喪家)에 가셨습니다. 돌아가신 분은 점촌 할머니예요.
생전을 춥게만 살드만 가는 날은 따뜻헌 날 잡았구나.
어머니는 봄볕을 내다보시며 혀를 쯧쯧, 차셨습니다. 가신 분이 점촌댁, 점촌 할머니라고 들었을 때, 저는 또 한 번 가슴이 철렁했어요. 기...... 억은, 이상한 것이에요. 칠흑 같은 무명에 휩싸여 있던 것들이 어떻게 해서 한 순간 그렇게도 투명하게 비춰지는지.
제 기억 속의 점촌댁은 울면서 줄넘기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어머니께 그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씀을 듣기 전까지는 그 분이 아직 살아 계신 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점촌댁, 점촌 할머니댁은 이 마을 끝에 있습니다. 어머니를 따라 자주 그 댁에 밤마실을 갔었어요. 그 때, 점촌댁은 다리를 절둑이며 줄넘기를 하고 계셨어요.
다리도 안 성한 사람이 이게 무슨 짓이여!
어머니께서 한사코 말렸지만 점촌댁은 줄넘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와 마을 아주머니 몇 사람이 모여 앉아 하는 얘기로는 점촌댁이 제사장을 봐 머리에 이고 오는 중에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짐자전거를 피하려다 다리 밑으로 굴러 다리를 다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점촌댁은 그로 인해 거의 이 년 동안을 운신을 못 하셨고, 그 사이 점촌 아저씨가 다른 여자를 봤다는 것입니다. 다리를 움직이지 못해 방안에만 있느라고 뚱뚱해진 점촌 아주머니는 그 이후로 그 아픈 다리로 서서 울면서 줄넘기를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새끼줄 두 줄을 뚤뚤 엮어 만든 그 줄. 지금 당신이 있는 그 도시. 제가 강사로 나가던 그 스포츠 센터의 에어로빅 저녁반 시간에 어느 날 한 중년 부인이 새로 들어왔었죠. 아! 당신께 말씀드렸지요. 첫시간 수업 도중에 폭삭 무너지며 통곡을 했다는 그 중년 부인요. 남편이 집에 들어오지 않기 시작했다고 악을 썼다는 얘긴 제가 차마 말씀드리지 못했었어요. 그 이후로도 그 여인은 에어로빅 도중에 자주 주저앉아 울었지요.
어제는 그 젊은 애가 전화를 걸어왔지 뭐예요! 남편이 나와 이혼하고 저랑 살기로 했다고 당당하게 말하더라니까요, 선생님.
점촌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얘길 들었을 때, 그 여인의 에어로빅이...... 할머니의 새끼줄 줄넘기와 함께, 제 가슴을 훑고 지나간 건 또...... 웬......
점촌댁, 이젠 돌아가신 점촌 할머니가 언제부터 줄넘기를 그만 두셨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이후로 점촌 댁은 지금껏 홀로 살다가 이제 할머니 되셔서 가신 거예요.
사랑하는 당신.
어제대로 라면 제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시겠지요? 그 여자들이 도대체 너와 무슨 관련이 있니? 하시면서. 아무리 신비스런 과거를 가진 사람이라고 해도 그 과거는 그 사람들 것이다. 하물며 그 닥 엿볼 과거도 아닌 것을 왜 들여다보느냐구요. 자기 자신이 캐 낸 인생만이 값어치가 있는 거야. 무리 지어 살면서 생긴 것들을 남들은 헤치고 나오려고 하는데 넌 이상하구나, 젊은 애가 왜 꾸역꾸역 그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고 있냐......고.
어제 차마 당신께 할 수 없었던 말이 있었습니다. 그건 당신과 저를 한꺼번에 어디선가 끌어내려 구덩이에 처넣는 일만 같아, 어떻게 해서든 이 말만은 당신께 하지 않으려고 그 술집에서 당신께 발광을 부렸던 겁니다. 당신을 발로 차고, 당신의 가슴에 주먹질을 하고, 당신을 짓이기면서 대들었던 건 막 새나 오려고 하는 이 말에게 지지 않으려고 그랬던 겁니다. 창백하게 앉아만 있던 당신. 제가 이 말을 하고 나면 당신이 저를 질책하셨던 대로 당신과의 연을 남녀간의 어지러운 정쯤으로 수긍하는 셈이 되겠지요. 그래서 하지 못한 말이 있어요.
지금도......이 말을......당신께......꼭, 해야 하는가......?
몇 번이고 제 자신에게 되묻게 됩니다. 내뱉고 말면 어쩌면 당신은 저를 증오할지도 모르겠어요. 사랑이 증오로 바뀌는 건 순식간의 일이지요. 당신이나 나나 그 두 감정이 서로 동시에 마음을 언덕 삼아 맞대고 있지 않았나요? 다만 그 동안 우리는 아주 위태롭게 사랑 쪽을 지켜 왔던 것 아닌 가요? 어쩌면 제 이 말이 증오 쪽으로 당신 마음을 돌려놓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 저를 용서하세요.
이 말을 하지 않으면, 제 말이 모두 당신에게 오리무중일 것만 같으니, 점촌 아주머니를 혼자 살게 한 점촌 아저씨의 그 여자, 그 중년 여인으로 하여금 울면서 에어로빅을 하게 만든 그 여자...... 언젠가, 우리 집...... 그래요, 우리 집이죠......거기로 들어와 한때를 살다 간 아버지의 그 여자...... 용서하십시오...... 제가...... 바로, 그 여자들 아닌 가요?
사랑하는 당신.
노여워만 마세요. 저는 그 여자를 좋아했습니다. 어쩌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낀 타인에 대한 사랑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여자가 남겨 놓은 이미지는 제게 꿈을 주었습니다. 제가 더 자라 학교에 다니게 되었을 때, 새 학기가 시작되고 나면 담임 선생님은 개인 신상 카드를 나눠주며 기록을 해 오라 했습니다. 그 개인 신상 카드 어느 면에 장래 희망을 적어 넣는 칸이 있었지요. 장래 희망. 저는 그 칸 앞에서 오빠 볼펜을 손에 쥐고 우두커니 앉아 있곤 했어요.
......그 여자처럼 되고 싶다......
이것이 제 희망이었습니다. 그 여자가 우리 집에 와서 심어 놓고 간 일들을 구체적으로 간추려서 뭐라고 써야 하나? 이것이 고민스러워 우두커니 앉아 있곤 했던 것입니다. 끝끝내 그걸 간추릴 단어를 저는 그 때 알고 있지 못했어요. 그래서 다른 아이들처럼 어느 때는 은행원, 어느 때는 학교 선생님, 어느 때는 발레리나라고 써넣을 수밖에 없었습니다만, 그렇게 표현되는 그때 그때의 희망들은 모두 그 여자를 지칭하고 있었습니다.
그 여자는 우리 집에 살기 시작한 지 열흘만에 큰오빠만 빼고 모두를 끌어안아 버렸어요. 백일이 갓 지난 울 줄밖에 모르던 그네 속의 막냇동생까지요. 그 여자의 손이 닿아 제일 먼저 화사해진 게 아기 그네였습니다. 어머니께서 그네 밑에 깔아 놓으셨던 떨어진 아버지 내복을 그 여자는 맨 먼저 걷어 냈어요. 그러고는 어디서 났는지, 잔 꽃이 아른아른한 병아리색 작은 요를 깔았어요. 그네 하면 어린애의 울음소리와 그 낡은 내복이 생각났었는데, 그 여자는 뽀송한 기저귀가 옆에 있는 환한 병아리색 이미지로 바꿔 놓은 거예요. 그 여자는 아이를 울리지 않았어요. 처음에 어머니 젖이 아니라, 느닷없이 우유병이 들어오자, 칭얼칭얼 대는 것도 잘 해결했죠. 그 여자는 서슴없이 자신의 젖을 꺼내 아이에게 물렸다가 아이가 빈 젖임을 막 알려는 참에 살며시 젖병 꼭지를 밀어 넣었어요. 그러면 어린애는 손가락을 그 여자의 젖 위에 얹어 놓고 꼼지락거리면서 순하게 그 젖병 꼭지를 빨았습니다. 아이는 그 여자 등뒤에서 해사하게 웃었고, 그 여자는 아이를 업고 음식들을 만들었습니다. 도마질만은 무척 서툴렀습니다만, 그 여자는 도마질을 잘하는 어머니 맛하고는 다른 맛의 음식을 만들어 냈습니다. 밥을 한 가지 해내도 그 여자가 한 밥은 표가 났습니다. 어머니의 밥은 한 가지였지요. 보리와 쌀이 섞인 쌀보리밥이 그것입니다. 어머니께선 미리 보리를 삶아 놓았습니다. 그러면 밥뜸을 안 들여도 되었거든요. 그것도 한꺼번에 며칠 것을 삶아 두셨어요. 논일 밭일에 언제나 어린애가 있던 집이어서 보리 삶는 시간도 아끼셔야 했던 분입니다. 삶아 놓은 보리를 밑에 깔고 한 켠에 쌀을 얹어서 지은 다음에 나중에 밥그릇에 풀 때 서로 섞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언제나 아버지 밥그릇과 큰오빠 밥그릇은 따로 챙겨 두셨다가, 그 두 밥그릇엔 쌀밥이 더 들어가게 섞으셨지요. 그 여자는 보리를 미리 삶아 놓지 않았습니다. 밥을 지을 때마다 그때그때 보리를 먼저 물에 불려 놓았다가 돌확에 갈아 지었습니다. 그리고 알맞을 때에, 밥뜸 불을 밀어 넣어 줘서 밥은 늘 고슬고슬했어요. 그 열흘 중의 어느 날은 보리를 다 빼고 쌀에 수수를 넣은 밥을 지었으며, 또 어느 날은 입에 쏙쏙 들어가기 좋을 만큼의 크기로 만두를 빚어서 밥 대신 만두국을 내오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환하게 생각납니다. 그 여자는 마치 우리 집에 음식을 만들러 온 여자 같았어요. 멥쌀보다 색이 뽀얀 찹쌀로 둥근 경단을 만들어 내놓기도 했으며, 곤로를 마당에 내놓고 진달래 화전을 부쳐 주기도 했어요.
찹쌀로는 그저 시루에 찰떡만 쪄 주셨던 어머니.
그 여자는 어느 날 대추 밤을 썰어 넣어 찹쌀 약식을 해주었죠. 찹쌀의 그 끈기가 그렇게 맛있는 것인 줄 그 여자를 통해 알았습니다. 다듬잇돌에 밀가루를 밀어 칼국수를 만들어 내왔을 때, 그 국물 위에 화려하게 얹힌 고사리와 계란 고명들이 지금도 눈에 환합니다. 어머니가 쑤어 준 풀떼죽하고는 확실히 달랐지요. 맛이야 어떻든 그 폼이 말이에요. 그 여자가 묵었던 그 열흘 동안 도시락을 싸 가는 오빠들이 부러웠습니다. 어머니께서 싸 주시는 도시락 반찬 그릇은 들여다볼 것도 없었지요. 과묵하던 큰오빠까지도 또 염소 똥이야, 할만큼 검정콩 자반이 주를 이루었고, 집에서 담근 단무지, 된장 속에 묻어 놓았던 오이장아찌, 어쩌다 밥물 위에 얹어 쪄 낸 계란찜이었으니까요. 그 여자의 음식 만드는 멋은 특히나 오빠들 도시락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맨밥에 반찬 싸 가는 것이 도시락인 줄만 알았는데, 그 여자는 당근과 오이와 양파를 종종종 썰어서 밥과 함께 볶아서 그 위에 계란 후라이를 얹어 주었습니다. 푸른 콩, 붉은 강낭콩, 검정콩 등을 섞어 설기떡을 만들어서 밥 반쪽 콩설기떡 반쪽을 싸 주기도 했습니다. 아버지께 쇠고기를 사 오라 하여 양념해서 볶고, 시금치도 데쳐서 기름에 볶고, 달걀도 풀어 몽올몽올하게 볶아서, 이 세 가지를 밥 위에 덮어 주기도 했습니다. 꽃밭, 꽃밭을 연상시키더군요. 어느 날은 큰오빠가 무슨 밥을 좋아하느냐고 물어서 주먹밥을 좋아한다 했더니, 다음날 그 여자는 콩을 넣은 주먹밥을 자그만자그만하게 만들었어요. 먹을 때 밥이 손에 달라붙지 않도록 깻잎으로 하나씩 싸서 도시락을 채웠습니다. 온 식구들이 함께 하는 끼니때는 아버지께 혼이 날까 봐 숟가락을 드는 시늉은 했지만, 도시락은 들고 갔다 가도 고스란히 되가지고 오던 큰오빠는 그 날 등교하다 말고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러고는 마루 끝에 그 도시락을 팽개치고 달아났어요. 아무래도 그걸 가지고 학교까지 갔다가는 먹고 싶은 유혹을 물리치기가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들었던 거겠죠. 그 여자는 아버지가 술드시고 온 다음날은 밤새 읍에 나갔다가 온 것인지, 싱싱한 소피를 삶아 뚝뚝 잘라 넣은 선 지국을 끓여 내놓았습니다. 그 국물 위에는 어슷어슷 썰어 넣은 생파가 듬뿍 얹혀 있었지요. 그 여자가 부쳐 주던 두릅 적이며, 그 여자가 무쳐 주던 미나리나 물쑥나물 한 접시......아, 그 칡수제비까지 생각나는 걸 보면, 아버지로 하여금 그 여자를 사랑하게 한 게 그 음식들이라고 생각하는가 봅니다, 저는. 국수에 고명을 넣는 그 여자와, 넣지 않는 나의 어머니. 글을 더 쓸 수가 없군요. 바깥에서 아버지께서 우사에 가 보자고 부르십니다.
다시 펜을 들면서 저는 참담함을 느낍니다. 이 글의 시작은 당신께 제 마음을 전해 드리고자 하는 것이었는데, 저는 아무래도 이 글을 끝을 못낼 것만 같습니다. 당신과의 약속 날은 이제 나흘 남았습니다. 당신이 이곳을 다녀가신 뒤에 또 사흘이 흐른 것입니다. 당신에게 제가 당신 앞에 나타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해 놓고, 어느 순간의 저를 보면 당신에게 이미 가 있는 것만 같습니다. 나흘 후면 정말 당신은 이 땅에 없으십니까? 제가 당신을 따라나서지 않는데도 당신은 떠나시는 겁니까? 저와 함께 하기 위해서 당신은 이 곳을 떠날 생각을 했었습니다. 당신의 두 아이와 당신의 아내와 그리고 당신의 사십 평생이 있는 여기를 말이에요. 무슨 영화 속에서나 벌어질 법한 일이 당신과 저 사이에 생긴 것이지요. 당신의 그 결정이 저는 고맙기만 해서 따라나서겠다고 했습니다. 당신이 두고 가는 것에 비하면 제 것은,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겼기에. 여기에 올 때만 해도 당신이 마음을 바꾸시면 어쩌나, 당신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당신이 저보다 더 어려워 보여서요. 그런데 저는 지금 못 가겠다 하고, 당신은 날을 받아 놓고 있다니.
바깥에서 아버지께서 부르신다고 펜을 놓고서 한 줄도 더 이어 쓰지 못한 지난 사흘 동안, 저는 눈먼 송아지를 돌봤습니다. 어머니께선 지난 사흘 동안 방에서 일어서시면 상가에 가셔서 송아지 돌보는 일은 자연스럽게 제 몫으로 남겨지더군요. 점촌 할머니는 어머니에게 평생을 춥게 살아 가신 분, 가여우신 분입니다. 말씀은 안 하시지만, 어머니께서 나이 차도 꽤 나는 그 점촌 할머니와 늘 가까이 지내셨던 것은 언젠가 당신이 열흘 동안 겪은 경험으로 그 분의 쓰라리고 고됨을 이해하시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상여가 나가는 날이라 아버지께서도 나가셨습니다. 우사에서 눈먼 송아지의 입술을 제 어미의 젖꼭지에 대 주고 도랑가로 나와 철길 너머를 바라봤는데, 점촌 할머니 떠나시는, 모습이...... 하얗게...... 멀리 보이더군요. 여기 올 땐 그저 봄이 왔었을 뿐인데, 상여 나가는 그 앞산에 눈길을 줘 보는 모양입니다. 젖을 놓친 송아지가 다시 젖을 못 물고 배를 더듬거리면, 뒷발을 들어 송아지의 엉덩이를 때립니다. 어리광 그만 부리라는 뜻이겠지요. 하긴 송아지 자신도 자기가 눈먼 걸 모를 테지요. 태를 끊었을 때부터 칠흑이었을테니 세상이 그런 줄, 그런 줄로만 알겠지요. 대신에 제 어미의 기척에 예민합니다. 옆에 있던 어미가 부시럭거리면 저도 부시럭거리고, 제 어미가 일어서면 저도 이엉차, 일어섭니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눈은 너무나 맑습니다. 그 눈에 제 눈을 헹궈 내고 싶을 정도로요. 헹궈 낸 후에 곧 제 눈앞도 칠흑이 되어서 당신이 다시 와도 알아보지 못했으면......
오늘도 더는 못 쓰겠군요. 이 심정으로 어떻게 제가 왜 당신을 만나지 않겠다는 것인가에 대해서 쓴단 말인가요!
......그 여자같이 되고 싶다......
그 희망은 그 여자가, 아기 그네에 병아리색 이불을 깔아서거나, 숙주나물에 청포묵을 얹어 줄 줄 알았던 여자여서만은 아닙니다. 그 여자는 오빠들 속에 섞여 있는 저를 알아봐 줬던 것입니다. 위로 오빠 셋만 있는 집의 여자아이란, 어디에 있어도 보이지 않게 마련이지요. 다 자라서는 모르겠지만 서로 그만그만하게 자라고 있는 중에는 말이에요.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제가 태어났을 때 아버진 마을 사람들에게 막걸리를 내셨답니다. 아들만 있는 집에 양념딸이 났다고 반가워하시면서요. 하지만 곧 저의 존재는 집 안팎에서 뒤처졌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어머니나 아버지가 저를 어떻게 대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냥 내버려둔 거지요. 제가 뒤란에서 울고 있거나, 제가 앞집 아이가 신은 색동 코고뭇신을 신고 싶어 애달아하는 것, 제가 오빠가 입던 스웨터는 입고 싶어하지 않는 마음들을 다 내버려둔 거지요. 맞습니다. 그 여자가 제 인상에 각인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여자가 저를 알아봐 줬기 때문이에요. 당신을 처음 만난 그 날, 느닷없이 내리는 비를 맞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여러 여자들 중에서 감기를 앓고 있는 여자가 바로 저라는 걸 알아줬던 것처럼 말이에요. 당신은 그 날 제게 우산을 받쳐 주며 말했지요. 상습범이라고 생각 마십시오, 독감을 앓고 계시는 것 같아서.
그 여자는 무슨 까닭인지 틈만 나면 칫솔질을 했어요. 밥 먹은 후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큰오빠가 방문을 꽉 잠그고 나오지 않을 때도, 큰오빠의 사주를 받은 둘째 오빠가 아줌마, 술집에서 왔지? 라고 말했을 때도, 그 때 국민학교에 막 들어간 셋째 오빠가 한밤중에 엄마 내놓으라고 발뻗고 숨넘어갈 듯이 울어제낄 때...... 그 여자는 칫솔에 흰 치약을 많이 묻혀 오랫동안 칫솔질을 했습니다. 역시 큰오빠의 사주를 받은 제가 뒤따라 다니며, 그 여자의 등에 업힌 어린애를 꼬집어 울릴 때도 말이에요. 어느 날 그 여자는 빨랫줄에 방금 물에서 막 헹궈 낸 흰 기저귀를 널다 말고 칫솔에 치약을 묻혔어요. 저는 그 때 마루에 걸터앉아 물끄러미 그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저도 그 여자처럼 이를 닦아 보고 싶어졌어요. 칫솔 통에서 제 칫솔을 꺼내 저도 치약을 묻혔죠. 저는 그때껏 그 여자가 칫솔질만 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그 여자는 울고 있더군요. 벌써 그 때 눈이 시뻘개져 있었어요. 그 여자는, 우는 모습을 제게 보인 것이 민망했는지, 오른손으로 닦도록 해, 하면서 왼손에 쥐고 있는 제 칫솔을 오른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칫솔을 입에 집어넣고 건성으로 쓱쓱 거리고 있는데, 그 여자는 칫솔을 쥔 제 손을 자신의 손으로 싸쥐더니 입 속에서 칫솔을 둥글게 둥글게 돌려 닦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래야 잇몸이 안 다쳐. 저는 그 때 잇몸이 뭔지도 모르는 때였습니다. 다만 그 여자가 잇몸이라고 발음했을 때, 그 여자의 눈물이 제 손등으로 툭 떨어져서 오랫동안 기억하는 것입니다.
써내려 온 글을 읽어보니 혼란스러움으로 머리가 빠개지는 것만 같습니다. 지금 제가 당신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나요? 혹시 저는 당신에 대한 변심을 열심히 둘러대고 있는 중은 아닐까요? 그렇지 않다면 왜 이렇게 마음이 조급한 것입니까? 느낌들이 마구 엉켜서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계속해야 될지를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제 기억이 어느 정도 정확한 것인지도.
당신과 알고 지냈던 지난 이 년 동안 저는 이 마을을 단 한 번도 찾지 않았습니다. 단순한 우연일까요? 아닌 것만 같습니다. 이 곳에 와서 맞부딪칠 얼굴이 저는 두려웠던 게지요. 당신을 사랑하는 일이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제 자신이 알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면 저는 지금, 당신 말처럼 당신과의 관계가 불륜이었음을 나 스스로가 인정하면서, 자랑할 만한 사랑을 하겠다, 그래서 당신을 잊어야겠다, 이런 말을 하고 있는 중이란 말입니까? 사실은 그렇게 간단한 것을 이렇게 복잡하게 얘기하고 있는 건 가요? 제가?
그......여자, 그 여자는 왜......다시 집을 나갔을까요?
당신을 믿어요.
그 여자가 아버지께 한 말 중에 지금껏 기억에 남는 말은 유일하게 이 한마디입니다. 그 여자의 당신이었던 아버지를 믿었으면서도, 그 여자는 왜 그렇게 도망치듯 집을 나갔을까요. 어머니 때문이었을까요? 그 여자는 어머니가 잠시 다녀간 다음날 집을 나갔습니다. 그렇다고 어머니께서 그 여자에게 무슨 대거리를 한 것도 아니에요. 어머니는 오셔서 그 여자가 업고 있던 막냇동생을 받아 안았을 뿐입니다. 지치셨던 것인가? 아니면 그것이 어머니께서 견디시는 방법이셨는가? 어머니는 그저 말없이 아이를 받아 안고서 젖을 먹이셨어요. 어머니 젖은 퉁퉁 불어서 푸른 힘줄이 불끈불끈 솟아 있었습니다. 어린애가 한참을 빨고 나니까 그 힘줄이 가셨습니다. 봄볕이 내리쬐는 그 봄날에 마루에 앉아 젖먹이는 어머니와 그 곁에 서서 그저 마당만 하염없이 내려다보고 있는 그 여자라니. 어머니는 젖을 빨다 잠이 든 어린애를 포대기에 싸서 마루에 눕혀 놓고, 토방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제게로 오셨어요. 그 때, 제 손에 그 여자가 만들어 준 설기떡이 쥐어져 있었던가 말았던가. 그 풍경을 생각하니 눈물이 번지는군요. 어머니는 한 칸씩 위로 채워진 제 웃옷 단추를 다시 끌러서 제대로 채워 주시고, 벗어 놓은 제 신발에 담긴 흙부스러기를 털어내 주시고서는 물끄러미 제 눈을 들여다보시더니 다시 가셨어요. 삼십 분도 채 안 되는 시간이었지요. 단지 그뿐이었는데 그 다음날 그 여자는 나갔습니다. 뒤란 마당까지 깨끗이 쓸고 난 다음이었어요. 실에 꿴 감꽃을 주렁주렁 목에 매달고 있는 제 손을 그 여자는 잡아당겼어요. 점심상은 방에 차려 놨어. 동생은 방금 잠들었구. 깨어나면 기저귀 속에 손 넣어 봐서 오줌쌌거든 얼른 갈아 줘...... 그러구 아버지가 날 찾거든 모른다고 해라. 언제 나갔는지 모른다고 해, 알았지? 어느새 그 여자는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 입었던 저고리와 치마로 바꿔 입고 있더군요. 분을 옅게 바르고 있어서 얼굴빛이 더욱 뽀앴습니다. 처음 우리 집에 온 날 저를 어지럽게 하던 그 은은한 향내가 그 여자에게서 다시 났어요. 큰오빠가 무서워 다락에 숨었다가 거기서 잠이 들어 버려 굴러 떨어진 뒤로는 맡지 못했던 냄새였습니다. 어느 날 그 여자가 제게 책을 읽어 주고 있는데, 어느 대목이 재미있어서 막 웃고 있는데, 큰오빠가 들어왔어요. 큰오빠는 저를 노려보더니 다시 방문을 쾅 닫고 나가 버렸죠. 저녁에 큰오빠에게 혼날 일을 생각하니 무섭기만 했어요. 그래서 숨은 곳이 불이 안 들어서 쓰지 않고 있던 빈방의 다락이었어요. 그 다락은 경사진 좁은 계단을 몇 개 통과해야 올라갈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그 곳에서 저녁밥도 안 먹고 잠이 들어 버렸어요. 다락에서 잠이 든 줄도 모르고 잠청을 하다가 밑으로 굴러 떨어져 내렸지요. 제가 쿵, 떨어졌을 때 달려온 이는 그 여자, 그 여자였습니다. 그 여자는 제 엉덩이를 세게 때렸어요.
집을 나가 버린 줄 알았잖니 이것아!
그 여자는 거의 울 듯했어요. 저 때문에 말이에요. 제가 집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다른 식구들은 다 깊은 잠에 빠져 있었는데, 아버지까지도 주무시고 계셨는데, 그 여자는 그때껏 마루에 앉아 있었던 겁니다. 그 때, 그 여자는 악마다'라고 했던 큰오빠의 말이 다 틀린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여자에게서 느껴지던 어질 머리가 그 다음으로 다 사라, 사라졌어요. 그런데 그 여자는, 그 향내를 다시 풍기면서 그 파란 페인트칠 대문을 빠져나갔습니다. 저는 그 여자가 처음 우리 집 대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앉아 있었던 그 마루에 앉아서 집을 나가는 그 여자를 바라봤어요. 역시 환한 햇살 속에서요.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하고, 어서 아버지가 오셨으면 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했어요. 그 때 제 눈에 띈 게 칫솔 통이었습니다. 그 속엔 그 여자의 노란 칫솔이 그대로 있었어요. 저는 키를 세워 그 칫솔을 꺼냈어요. 그리고 마구 달려갔습니다. 마을을 빠져나가는 길은 큰길과 소롯한 수리 조합 둑길이 있었는데, 그 여자는 수리조합 길로 걸어가고 있더군요. 저는 정신없이 뛰어 그 여자 뒤에 섰어요. 제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음직도 한데 그 여자는 그저 여민 치마 한 끝을 싸쥐고 뒷모습만 보이더군요. 그 여자 뒤에 바짝 서서 그 여자의 치마를 잡아당겼습니다. 그 때서야 그 여자는 돌아다봤습니다. 아, 그 때 그 여자의 얼룩진 얼굴이라니. 눈물에 분이 밀려나서 그 여자 얼굴은 형편없었어요. 칫솔을 내밀자 그 여자는 웃을락말락 했습니다. 그 여자는 내 손에 있는 칫솔을 가져가는 게 아니라, 손을 그대로 꼭 잡았습니다. 그러고선 제 손을 깊게 들여다봤어요.
나...... 나처럼은...... 되지 마.
그 여자는 한숨을 포옥 내쉬었습니다. 그러고선 곧 저를, 저를 떠밀었어요. 어서 가 봐. 동생 잠 깨겄다아.
오늘은 비가...... 명주실 같은 저, 봄비......가 자꾸만 바깥을 내다보게......귀...... 귀기울이게 해요. 방금 저는, 아버지와 저 속을 쏘다니다 왔어요. 들과 산과 빨래터를요. 산등을 따라 죽 이어지는 봉우리들까지 오르락내리락했습니다. 산쑥은 물론이요, 연둣빛 능선에는 벌써 산수유가 피어서 가는 비에 파들거렸어요. 실비라서 우산 쓸 생각은 하지도 않았었는데, 돌아올 때는 제 머리결이, 아버지 어깨가 축축했어요. 새를 잡으러 나갔었습니다. 단 한 마리도 못 잡았으니 잡으러 나갔다기보다 쫓아다니다가 왔다는 게 맞는 말이겠군요. 아버지께서 오후 한 차례씩 엽총을 어깨에 메고 들과 산으로 사냥을 나가신다는 건 이번에 처음 안 일입니다.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벌써 이 년째 습관처럼 하시는 일이라는데요. 하긴 저는 지난 이 년 동안 여길 오지를 않았었으니까요. 사냥이라고 써 놓고 보니 말이 크군요. 그 큰말의 울림 속에는 원시적인 게 섞여 있네요. 이젠 사냥이 딱히 동물을 잡는다는 뜻으로만 쓰이지는 않습니다. 제게 와 닿는 사냥이라는 말의 울림은 아직 원시적입니다. 저 먼 부족이나 더 멀리 씨족들이 무리 지어 살았던 때로 생각이 거슬러 갑니다. 그들은 이런 상상을 하게 해요. 길도 없는 아니 어느 곳이나 길이 되는 산자락 밑이나 들판 한가운데에 짚으로 엮어 만든 수십 채의 움막집, 그 움막집 앞엔 늘 타고 있는 불기둥, 그 불길은 더 깊은 상상을 불러일으킵니다. 움막 집집마다에 한 가족들이 보입니다. 남편과 아내와 여러 아들과 딸들이 그 속에서 서로 엉켜 삽니다. 그들은 거의 알몸입니다. 햇볕에 그을린 살갗은 희지 않습니다. 그들의 머리결은 검고 윤기가 흐르며 숱이 많습니다. 종아리와 팔뚝엔 알통이 불쑥 나와 있으며, 가족들 모두 엉덩이가 바람이 빵빵한 공처럼 둥글어서, 걸을 때마다 누가 발로 차내는 듯이 실룩거리는 겁니다. 그런 그들이 모두 함께 사냥을 나갑니다. 짐승을 동그랗게 둘러싸 몰려면 숫자가 많을수록 좋습니다. 그 때, 여자들은 누구나 자식을 덩실덩실 여럿 낳고 싶어했을 거라고 저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산맥같이 얽혀서 사냥해 온 멧돼지나 오소리, 때때로 곰을 그 움막집 앞의 불길에 굽는 겁니다. 사냥이란 모름지기 이런 것이라야 하지 않을까요.
말을 이렇게 해 놓고 보니, 방금 다녀온 아버지와의 새 사냥은, 사냥이라 하기가 민망하군요. 그냥 새잡이라고 해두지요. 처음부터 아버질 따라나설 생각이 있었던 것 아니었습니다. 마당으로 나 있는 창문으로 아버지께서 스쳐 지나시기에 저는 의아한 마음으로 창을 통해 아버질 따라가 보았습니다. 아버지의 차림이 특이했거든요. 아버진 털이 보숭보숭하고 각이 진 밤색 모자를 쓰고 계셨는데, 갈색 가디건에 검정 목티를 받쳐입고 계셨는데, 헐렁한 상아색 골덴 바지에 벨트를 꽉 조인 차림이셨는데, 무릎까지 올라오는 장화를 신고 계셨는데, 맑게 쏟아지는 봄볕을 뚫고 가시는 그 모습이 꼭 사냥꾼 같았습니다. 아버지께서 헛간 벽에 걸어 둔 엽총을 꺼내 어깨에 메셨을 때, 그 엽총은 완벽한 소품이 되더군요. 분장을 마친 아버진 대문을 나가셨습니다. 그 때, 저도 방문을 열었지요. 처음엔 그저 어리광쟁이 어린애처럼 앞서가시는 아버지 장화 발짝에 제발 짝을 갖대 대며 뒤따랐습니다. 한쪽으로 우리 부녀의 그림자가 나란히 함께 걷고 있었습니다. 바람이 불기 전까지 아버진 꽤 늠름해 보였습니다. 바람이 불자 상아빛 골덴 바지가 아버지 몸에 달라붙는 거였지요. 저는 뒤따르던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바지 안에 아버지 몸이 과연 있는 걸까? 믿어지지 않게 바람만 쿨렁거리는 것이었습니다. 제 기척이 끊기자, 아버진 뒤돌아보셨습니다. 털모자를 쓴 아버진 제가 당신 가까이 다시 다가설 때까지 기다려 주셨습니다. 아버지가 저렇게 작아지시다니, 털모자 밑으로 보이는 뒷목덜미까지 흰머리가 수북했습니다. 귀밑으론 탄력을 잃은 살이 처져 겹을 이루고 있는데 거기까지 무수히 핀 검버섯이라니. 저 깊은 곳에서 고함이 터져나왔어요. 당신을 향해 지르는 것도 같았고, 어쩌면 삶을 향해 내질렀는지도 모르지요. 연민에 휩싸여 아버지 골덴 바지 뒷주머니에 제 두 손을 포옥 집어넣었습니다. 갑자기 뒤에서 잡아당긴 셈이라 아버진 순간 몸의 중심을 잃으시고서 뒤에 서 있던 제게 쏟아지셨습니다. 주머니 속에서 만져지는 앙상한 아버지의 엉치뼈.
아버진 오는 콩새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들에서도 산에서도 빨래터에서도. 허심해 보이는 산비들기를 향해 나무 뒤에 거의 나무처럼 붙으셔서 겨냥하시기도 했지만 매번 헛방이었습니다. 그러실 때마다 아버진 저를 바라다보며 겸연쩍게 웃으셨어요. 아버진 제 앞에서 날아가는 새를 멋지게 쏘아 맞추고 싶으셨을 거예요. 하지만 오늘 사냥은 아버지 마음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사냥 얘기를 하다 보니 당신에게서도 언젠가 사냥에 대한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나는군요. 당신은 아프리카 어느 마을 원주민들에 대한 얘기를 하셨습니다. 그들의 선조들은 기마 민족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말을 타고 밀림을 달려 사냥을 해서 물물 교환을 하며 후손들을 번창시켰다고 했습니다. 밀름은 길이 되고......밀림은 농사 지을 땅이 되고, 원주민 장정들은 더 이상 사냥을 할 수 없게 되었다,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밤낮으로 무기를 손으로 만든다면서요. 마을 여자들은 해가 뜨기도 전에 들에 나가서 구슬땀을 흘리며 식구들의 식량을 일구며 하루해를 보내는데, 장정들은 동이 트자마자 떼를 지어 황야로 나간다지요. 창을 들고 활을 메고 말이에요. 그들은 황야로 나가 온종일 서성거리다 돌아오는 게 일이라고 했습니다. 이젠 함성을 지르며 사냥할 짐승도, 피 흘리며 싸워야 할 다른 부족도 없는데, 그들은 그들 선조들이 해 왔던 사냥과 전쟁의 습속을 버리지 못해 온종일 지평선을 바라다보다 돌아온다지요. 당신께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저는, 정말이에요? 하며 웃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이 나의 오라버니들같이 느껴지는 건 웬 까닭일까요? 떼를 지어 웅성웅성 온종일을 서성거리다가, 붉디붉은 황혼을 등에 지고, 공허하게 마을로 돌아오고 있는 그들 속에서 제가 제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면 당신, 당신은......웃겠지요.
당신과의 약속 시간은 이제 이 밤만 지나면 다가옵니다. 당신은 정말 떠나실 건가요? 그렇다면 저는 지금 무엇을 참고 있는 것일까요? 당신이 떠나 버리면 제가 참고 있는 것은 모두 부질없는 일이 되어 버립니다. 오늘 하루는 종일 중얼중얼거렸어요. 당신에게 달려가려는 쪽으로 마음이 바뀌려 할 적마다, 저를 스쳐 간 당신과의 기억들이 모두 나쁜 것이었다고, 속삭이고 속삭였어요. 그래도 불쑥 열이 났고, 당신에게 가야지, 잠깐씩 가방을 챙기기도 했어요. 행여 당신이 저를 데리러 오지 않나, 여러 번 대문을 내다보기도 했어요. 어렵게 견뎌 내고 찾아온 이 밤. 이미 당신에게로 가는 기차는 끊겼는데, 내일 새벽 첫차는 몇 시던가, 저는 지금 그걸 헤아려 보고 있으니, 이 밤이.....무섭습니다. 산버찌를 먹으면 눈물날 일이 생긴다고 제가 산에서 버찌를 따오면 어머니는 마당에 쏟아 버리시곤 하셨죠. 어머니께서 말씀하시는 눈물날 일이 이것 인가요? 어머니 몰래 먹은 산버찌가 지금 저를 울리는 것인가요?
아버지는 그 여자를 정말 사랑했습니다. 아버지는 그 여자가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들어오면 손 크림을 발라 주셨지요. 왜 그것만이 유난히 생각나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아버지의 손과 그 여자의 손이 전혀 스스럼없이 서로 엉키는 것이 꼭 꿈결인 것만 같았어요. 손 크림을 통에서 찍어 내 그 여자의 손에 골고루 펴 발라 주실 때 아버지의 그 환한 모습을, 그 이후에도 그 이전에도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손. 그래요. 그 시절의 아버지와 그 여자는 손을, 둘이서 있을 땐 늘 손을 잡고 있었던 것도 같습니다. 그것이 손 크림을 발라 주는 한 컷으로 합쳐져서 생각나는 모양입니다. 손잡는 일이 뭐 대수겠습니까만, 저는 지금도 아버지 손을 꼭 잡아 보지 못한걸요. 당신의 손. 저도 당신 손을 참 좋아했습니다. 언젠가 운전하는 당신의 손등에 제 손을 갖다 대며, 당신 손이 참 좋아요, 제가 했던 말 기억하십니까. 당신 손엔 늘 결혼 반지가 끼여 있었어요. 그걸 볼 때마다 쓰라람이 제 가슴을 훑고 지나갔지만, 당신은 당신 자신이 결혼 반지를 끼고 있는지조차 모르시는 듯 했어요. 그 반지는 그저 당신의 일부분처럼 거기 끼여 있었습니다. 그래도 당신에 대한 어찌할 수 없는 슬픔이 마음에 휘몰아칠 때마다 당신의 손을 찾아 쥐었습니다. 그러면 서러운 마음이 가라앉곤 했어요. 저는 당신에게 반지 말고 다른 것을 받았다고, 설령 그 받은 것 때문에 제가 그 속에 갇혀 죽는다고 해도...... 제겐 그것만이 유일하다고 그렇게 저를 달래고는 했......
사랑하는 당신!
...... 여기에 오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이 마을은 저를, 저 자신을 생각하게 해요. 자기를 들여다봐야 하다니요? 싫습니다! 저는 지쳤어요. 그 여자가 떠나던 날, 그 여자에게 칫솔을 건네주던 때, 그 때 저는 그 여자와 무슨 약속인가를 했다고, 지금이 그 약속을 지킬 때라고......이 생각을 당신이 있는 그 도시에서 제가 어떻게 해낼 수 있었겠어요. 그 여자가 그 때 떠나 주지 않았다면 우리들은 어떻게 됐을까? 어머니와 우리 형제들은? 그 여자가 떠나 주지 않았어도 과연 우리 가족들이 지금 이만한 평온을 얻어 낼 수 있었을까? 여기에 오지 않았으면 이런 생각들을 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 여자가 우리 집을 떠나고 나서 아버지는 오랫동안 술에 취해 계셨습니다. 아무 데나 마구 토해서 부축할 수도 없었어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아버지 인생에서 가장 환했던 때는 그 여자가 있던 그 시절이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당신, 그것만이 우리 삶의 다라고 여길 수 없는 불편한 부분이 이 마을에는 흐르고 있어요. 여기에 오지 않았으면 모를까, 이미 저는 그 불편함에 의해 끔찍해져 있는 여기에, 여기에 오지 말았어야 했어요. 그것밖에 달리 제 마음을 어떻게 쓴단 말인가요. 양잿물을 들이마신 것같이 쓰라리게 당신이 그리워요.
지금...... 막, 당신과의 약속 시간이 지났습니다. 순간, 숯불이 얹혀지는 듯한 뜨거움이 가슴에 치받쳤습니다. 이 치받침은 매우 익숙한 것입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동안 나의 하루는 이 치받침으로 시작해서 이 치받침으로 끝나곤 했으니, 나에겐 오히려 동무 같은 감정이예요. 당신을 만날 때의 반가움, 당신의 얼굴을 만져 보고 싶은 수줍음, 당신이 없는 동안의 그리움, 누구에게도 당신을 자랑할 수 없어서 곧잘 얼굴이 발그레해졌던 무안함까지 그 치받침 속에는 섞여 있습니다. 그렇게 익숙한 것이지만, 방금 것의 치받침은 한 세계를 무너뜨리느라고 쉬이 가라앉지 않을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세상에는 가까이 가선 안 될 게 얼마나 많은 지요. 그 안된다는 것 때문에 또 얼마나 애가 타는지요.
가슴을 방바닥에 대고 엎드려 있었어요. 오늘 이 치받침은 이렇게 삭혀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지만, 달리 삭힐 방법이 제겐 없습니다. 당신은 정말 떠날 것인가? 한 시간 전부터 저는 시계를 들여다보고 여기 있었습니다. 시침이 오후 3시를 막 지나갈 때, 그토록 간절히 붙잡고 있던 당신과의 끈을 놓아 버린 셈입니다. 제가 놓아 버린 한 끝은 지금 여기에서, 당신이 잡고 있는 거기 한 끝을 향해 날아가고 있는 중인가요? 당신은 지금 시계를 들여다보며 거기 서 계신가요?
거의 한 달을 글을 못 썼습니다.
당신과의 약속 시간이 지나고 나니, 맥이 풀려서 다시 펜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이 글이 목적을 잃어버린 탓도 있었겠지요. 표적이 당신이었는데, 어느새 제 글은 무목의 화살이 돼 버린 것입니다. 당신이 제게 주었던 즐거움들이 고통이나 슬픔, 허무로 바뀌어 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봐야 했던 처음 며칠은, 마비된 듯이 누워만 있었습니다. 이젠 당신을 다시 볼 수 없다 생각하니, 제가 무슨 엄청난 일을 저질러 놓은 것 같았어요. 제 마음속의 회오리가 다시 시작된 것만 같더군요. 제게 있어 어떤 중요한 것을 내놓아도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니, 저는 벼랑 앞에 선 것같이 아찔했어요. 그 절박한 마음이, 어느 날인가 당신에게 수화기를 들게 했습니다. 당신은 정말 떠났는가? 정말 가 버렸는가?
전화는 당신 아내가 받더군요. 평화로운 목소리였습니다. 당신 이름을 또박또박 대며 바꿔 달라고 했을 때만도, 당신은 정말 가 버렸는가? 가슴이 불덩이 같았지요. 당신 아내 옆엔 당신의 아이가 있었던가 봅니다. 당신 아내가 당신 아이에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은선아, 아빠에게 전화 받으시라고 해.
저는 가만히 수화기를 놓았습니다. 당신, 딸 이름이 은선이었군요. 은선이. 그 애의 이름을 서너 번 불러 봤어요. 나물 같은 이름. 어디에 고여 있었는지 눈물이 오래 쏟아졌어요. 은선이.
방문을 열어 보니 마당의 감나무에 감꽃이 하얗게 돋아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바깥으로 나오자 환한 햇살이 너무나 어지러웠어요. 대문까지 나오는데 서너 번은 무릎이 꺾였어요. 회복기 환자의 걸음걸이가 아마 그런 것이겠지요. 방 안에 제가 누워 있는 동안 봄 농사일은 이미 시작이 돼서, 들판에 수건을 쓴 여인들이 모판에 볍씨를 뿌리고 있었어요. 갓 돋아났던 파란 쑥들은 너무 웃자라 쇠어 있었고, 팔레트 속의 물감들 같던 꽃들도 그 사이 덧없이 지고, 어느새 푸른 잎새들이 그 꽃자리를 차지하고 있더군요. 걸어다니는 동안 제 마음이 조금은 평온해져서,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봄꽃들은 무엇이 급해 잎도 돋기 전에 저희들이 그리 피어났다가 저리 속절없이 질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볕 바른 골목에서는 두 여자아이가, 한때는 뭉게구름 같았으나 너펄너펄 져 버린 누런 목련잎을 찧어서 소꿉놀이를 하고 있었어요. 피는 모습을 봤으니 지는 모습도 봐야 하는 거겠지요.
제 얼굴은 지금 볕에 그을려 가무스름해졌습니다. 일손이 귀한 곳이라 더 이상 방 안에 있을 수만은 없어서 어머니를 거들기 시작한 일이 이제 제법 익숙해졌습니다. 그래 봐야 새참 준비하는 일이나, 고구마순 모종하는 일 정도뿐이지마는요. 그래도 눈먼 송아지는 제가 우사의 문을 열면 제 발 소리를 알아듣고 몸을 일으킵니다. 이 곳에 와서 가장 친해진 대상입니다. 아버지께서,
첨엔, 눈먼 놈이라......기가 막히더마는 무던하다. 먹고 잠 잘자니 살이 몽실몽실 올랐어야, 제값 받기엔 별 무리 없겄다! 하실 땐 그 송아지를 짐승으로만 생각하시는 아버지 마음이 야속하게 느껴질 정도로 친해졌어요. 어머니께선 본격적으로 모심기가 시작되기 전에 어서 다시 그 곳으로 가라 하십니다. 고생한다고요.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는 아직 정하지 못했습니다. 이 평온을 얻기까지 제가 한 일이란, 이 글을 쓰다 말다 한 것뿐이지요. 이 편지를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땐 처음으로 제 인생을 제가 조정하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답니다. 이토록 힘든 것을 모르고서 저는, 이 마을에 내려와 제 마음결에 일어난 일들을 당신께 글로 쓸 수 있다고 믿었나 봅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이번 일도 제 인생을 제가 조정한 게 아닌 듯 싶습니다. 저는 이 글을 마무리 짓지도 못했는데, 당신은 거기에, 나는 여기에 있잖아요. 어제는 빨래터에서 이 사실이 어찌나 낯선지 물밑을 오래 들여다봤습니다...... 화르르 흩어지는 송사리 떼들...... 그래도 몇 년만에......숨을...... 깊은...... 숨을......들이쉬는 것 같습니다.
이 글을 당신께, 이미 거기 계시는 당신께 부칠 필욘 이제 없겠지요. 그래도......까치, 까치 얘기는 쓰렵니다. 이 마을에 온 첫날 그렇게 부지런히 둥지를 틀던 까치가 새끼 세 마리를 낳았더군요. 옥수수 씨를 심을 구덩이를 파느라고 산밭에 다녀오다가 봤어요. 먼발치라 자세히는 못 봤지만, 그 중 어느 새끼도 눈먼 새는 없는 듯했어요. 세 마리 모두 다 어미가 먹이를 물어 오니까 서로 밀치며 소란스럽게 한껏 입을 벌리는데, 입속이 온통 빨갛...... 새빨갰어요. 그 새끼 까치들이 날갯짓을 할 무렵이면 이 곳도, 여기 이 고장에도 초여름, 여름......이겠지요. 저기 저 순한 연두색들이 짙어, 짙어져서는 초록이, 진초록이......될 테지요. 그 때쯤엔, 은선이란 당신 아이 이름도 제 가슴에서 아련해질는지, 안녕.

2005.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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