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VER

질문 원주를빛낸인물과문화재
bang**** 조회수 8,171 작성일2006.03.25

원주를 빛낸인믈과 원주의문화재좀가르쳐주세여...

(참고로!!!문화재..사진좀...)

프로필 사진

답변자님,

정보를 공유해 주세요.

3 개 답변
1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lt****
절대신
2019 지역&플레이스 분야 지식인
본인 입력 포함 정보

1.원주를 빛낸 인물

 

1)원공국사  930∼1018

고려 초기의 천태학승으로, 속성은 전주 이씨, 자는 신칙이다. 8세에 사나사에 머물고 있던 인도승 홍범삼장에게 출가하였다. 홍범삼장이 인도로 돌아가자 광화사 경철에게 수업하여 946년(정종 1) 영통사 관단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953년(광종 4) 희양산의 형초선사 밑에서 수행하였고, 954년 승과에 합격하였다. 959년 광종의 환대를 받으며 구법을 위해 오월국으로 유학하여 영명사 연수에게 법안종을 배웠고, 961년 국청사 정광에게 '대정혜론'을 배워 천태교를 전수받았다. 968년 전교원에서 '대정혜론'과 '법화경'을 강의하여 명성을 떨쳤다. 970년(광종 21) 10여 년만에 귀국하여 광종의 환영을 받아 대사가 되었고, 금광선원에 머물렀다. 975년(광종 26)에 중대사가 되었고, 경종(975∼981)이 즉위함에 삼중대사가 되었다. 990∼994년 사이에 적석사로 옮겨 거주하면서 호를 혜월이라 하였고, 성종의 부름으로 5년 동안 궁중에서 설법하였다. 목종의 호의가 깊어 선사가 되었고, 불은사와 호국외제석원에서 머물렀다. 현종이 즉위하여 대선사가 되어 광명사에 주석하였고, 법호를 적연이라 하였다. 1012년(현종 3) 왕사가 되었으며, 3년 뒤에는 보화라는 법호를 받았다. 1016년 병을 얻어 1018년(현종 9) 원주 현계산 거돈사로 하산하여 입적하였으니 세수는 89세이다. 승지를 잡아 승묘탑을 세우고 거돈사 동남쪽에 장사지냈다. 원공국사는 법안종 승려로, 법안종은 선종의 일종이나 천태종·화엄종·법상종 사상을 융합하고 나아가 교종과 선종을 일치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법안종은 광종의 호족세력 억압과 함께 왕권강화의 방편으로 중요시되고 법안종 승려들도 광종의 호의를 받았는데, 원공국사도 이러한 면에서 광종의 환대를 받았던 것이다. 한편 원공국사는 오월국 국청사에서 천태종의 교의도 배웠고 자신이 국청사에서 대정혜론과 법화경을 강의한 것으로 보아 천태종에 대해서도 많은 지식이 있었으며, 의천이 고려 천태종을 성립시킬 때 흡수되었던 것으로 보아 천태종 성립에도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2)지광국사  984∼1067

지광국사 해린의 속성은 원씨, 자는 거룡, 아명은 수몽으로 원주 출신이다. 984년(성종 3)에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불교에 뜻이 깊어 법천사 관웅 밑에서 수학하였고, 관웅이 개경으로 감에 따라 준광 밑에서 삭발수도하였다. 해린이란 법명은 관웅이 붙여준 것이다. 999년(목종 2) 16세에 용흥사 관단에서 구족계를 받았고, 1005년(목종 8) 왕륜사  대선장에서 담경 시험을 보았는데, 그 뜻이 심오하고 법문도 출중하여 왕이 대덕이라는 법계를 내렸다. 1010년(현종 1) 법천사로 돌아가는 길에 도강인 진조를 만나 역산법을 배웠고, 1014년(현종 5)에 대사가 되었다. 1021년(현종 12) 개경 중흥사에서 설법하였는데, 논리·문장력·음운학의 실력이 대단하였다. 1021∼1030년 사이에 중대사가 되었고, 덕종 연간(1031∼1034)에 삼중대사 수좌가 되어 묘법연화경을 강의하였는데, 왕의 우대가 각별하였다. 1045년(정종 11)에 승통이 되었고, 문종이 즉위하자 궁궐로 초빙되어 유심의 묘의를 강의하였다. 1054년(문종 8) 법상종의 총본산이었던 현화사에 이석하여 보수공사를 지휘하였고, 경전도 판각하였다. 1056년(문종 10) 왕사가 되었고, 다음해에 국사가 되었다. 1059년(문종 13) 내전에서 백고좌회의 제일설법주가 되었다. 1067년(문종 21)에 법천사로 돌아와 얼마 안 있어 입적하였다. 명봉산 법천사 동쪽에서 다비하였는데, 문종이 깊이 애도하여 지광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원주창고에 있던 양곡으로 경비에 충당토록 하였다. 해린의 탑비는 1085년(선종 2) 소현의 주관아래 세워졌는데, 제자로는 현화사의 소현을 비롯하여 문종의 아들인 도생승통 석규, 수좌는 경현 등 1,370여명이 있다. 해린은 유학과 노장, 역산도 익혔으며 박학하고 문장도 뛰어났다. 그가 고려 불교계에 영향력을 발휘하였던 시기는 73세에 왕사가 되어 84세로 법천사로 하산할 때까지로, 이후 법상종은 현종 대에 현화사가 창건됨으로써 전성기를 맞게 된다. 즉 해린은 고려 법상종 중흥의 주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사상에 대해서 그가 강의한 것으로 화엄경에 나오는 유심묘의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법상종과 함께 당시 불교계에서 중요시되는 경전을 망라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현화사를 보수하고 경판을 판각하는 데 총지휘를 하였음을 볼 때 당시 귀족 불교계를 총괄하고 있었다.

3)원천석  1330∼?
 

고려말 조선초의 은사로, 본관은 원주, 자는 자정, 호는 운곡이다. 정용별장 원열의 손자이고, 종부시령 원윤적의 아들로, 원주 원씨의 중시조이다. 어려서부터 재명이 있었으며, 문장이 여유 있고 학문이 해박하여 국자감 진사가 되었으나, 고려말의 정치가 문란함을 보고 치악산에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부모를 봉양하였다. 일찍이 이방원을 가르친 일이 있어 그가 태종으로 즉위하여 기용하려고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으며, 태종이 직접 집으로 찾아갔으나 미리 소문을 듣고 피하여 포은 정몽주·목은 이색·야은 길재와 같이 높은 지조와 절개를 보였다. 고려말에 정몽주·이색 등 많은 유학자의 스승인 신현의 사적이 소각 당하는 화를 당하자 정몽주는 신현의 사적을 수거하여 치악산에 은거하는 원천석에게 보냈고, 이에 후세에게 전할 중요한 임무를 갖고 화해사전을 저술하였다. 문학적으로 깊은 소양을 가졌던 원천석은 그가 남긴 운곡시사 속에서 당시의 사회상과 함께 그의 사상과 철학을 엿볼 수 있다. 고려 몰락의 원인이기도 했던 대토지겸병에 의한 사회경제적 혼란에 대해, "무너진 집에 새들만 지저귀니 백성은 도망가고 아전도 보이지 않네. 해마다 민폐만 더했거늘 어느 날 어느 때 즐겁게 지냈으랴. 토지란 토지 권문가에 빼앗겼는데도 포악한 무리들은 문 앞에 연이었네. 묻노니 이 고생 누구의 허물인고 남아있는 주민들 더욱 가엾어라."라고 적고 있는데, 여기에서 대토지겸병으로 인해 생활의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는 백성들의 모습을 탄식하고 그러한 사태를 매우 심각하게 인식하는 모습에서 그의 대토지겸병의 반대입장을 볼 수 있다. 특히, "흥망이 유수 만월대도 추초ㅣ로다. 오백년 왕업이 목적에 부쳐시니 석양에 지나  객이 눈물 계워."라는 회고가는 널리 알려져 있다. 미수 허목은 선생의 묘갈에서, "군자는 숨어살아도 세상을 저버리지 않는다고 하더니 선생은 비록 세상을 피하여 스스로 숨었지만 세상을 잊은 분이 아니었다. 변함없이 도를 지켜 그 몸을 깨끗이 하였다."라고 표현하였다. 이러한 원천석의 정신은 원주의 사상적 흐름에 많은 영향을 끼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 지역의 저변에 흐르고 있다. 유적으로는 석경사·변암·태종대 등이 있고, 묘소는 원주시 행구동 석경촌에 있다. 원주 칠봉서원에 제향되었다.

4)원호 1397∼1463
 

조선 단종(端宗) 때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으로, 본관은 원주(原州), 자(子)는 자허(子虛), 호(號)는 관란(觀瀾)·무항(霧巷)이다. 아버지는 별장(別將) 원헌(元憲)이며, 어머니는 국자감(國子監) 진사(進士) 원천상(元天常)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글공부를 좋아하여 15세를 넘어서는 사서삼경(四書三經)에 통달하고 도학군자(道學君子)라는 칭호를 들었다. 1423년(세종 5)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학자로 인정받아 성삼문(成三問)·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각종 편찬사업에 참여했으며, 여러 청관(淸官) 현직(顯職)을 지내고, 문종(文宗) 때 집현전(集賢殿) 직제학(直提學)에 이르렀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首陽大君)이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의 대신을 죽이고 정권을 잡자 낙향하였고, 1456년(세조 2) 단종복위운동이 일어나 사육신(死六臣)을 비롯한 관련자들이 죽고 단종(端宗)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자, 원호는 단종을 가까이 모시기 위해 청령포 서쪽 상류인 사내평에 관란재(觀瀾齋)를 짓고 아침저녁으로 단종이 있는 쪽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리며 사모하였다. 1457년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단종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단종이 영월 관풍헌에서 죽게되어서는 백덕산(白德山)에 여막(廬幕)을 짓고 삼년상(三年喪)을 치르고 원주 무항동(霧巷洞)에 돌아와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문밖 출입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권침(權琛)과 함께 농민을 위해 월계도(月計圖)를 만들어 일년 농사의 풍흉(豊凶)을 점쳐 볼 수 있게 하였다. 원호는 관복(官服) 입은 사람을 평생동안 대하지도 않았고, 더욱이 세조가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제수하여 불렀으나 끝까지 왕명을 따르지 않았는데, 이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굳은 절개를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앉을 때와 누울 때는 반드시 동쪽을 향하여 앉고 머리를 두었으니 단종의 능(陵)이 자기 집 동쪽에 있기 때문이었다. 1699년(숙종 25) 판부사(判府事) 최석정(崔錫鼎)의 건의로 원주에 정려각(旌閭閣)이 세워졌고, 1703년(숙종 29) 칠봉서원(七峰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1782년 김시습(金時習)·남효온(南孝溫)·성담수(成聃壽)와 함께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묘소는 원주시 판부면 서곡리 내남송에 있다.

5)원충갑  1250∼1321

고려의 무신(武臣)으로, 본관은 원주(原州)이다. 원주사람으로 체구는 작으나 정력이 넘쳐 날쌔었고 눈동자가 번개처럼 빛났으며, 위험한 지경에 있으면서도 자기 한 몸을 돌보지 않았다. 향공진사(鄕貢進士)로 원주별초(原州別抄)에 있으면서 1291년(충렬왕 17) 합단적(哈丹賊)이 치악성(雉岳城)을 포위하자, 전후 10차에 걸쳐 적을 크게 무찔렀다. 이때 결사대 중산(仲山), 방호별감(防護別監) 복규(卜奎), 흥원창판관(興元倉判官) 조신(曺愼), 별장(別將) 강백송(康栢松), 원주(原州) 아전(衙前) 원현(元玄) 등 다수의 사람과 힘을 합쳐 물리쳤다. 이로부터 합단적은 예봉(銳鋒)이 꺾이어 감히 공격도 노략질도 하지 못하였고 여러 고을에서도 굳게 방어하게 되어 비로소 합단적을 경시하는 마음이 생겼으니, 이는 모두 원충갑에게서 얻은 힘이었다. 원충갑의 이러한 공로로 원주는 익흥도호부(益興都護府)로, 다시 1308년 원주목(原州牧)으로 승격되었고, 원주에 부과되던 각종 부역(賦役)과 잡공(雜貢)이 3년 동안 면제되었다. 원충갑 또한 여섯 번 전임(轉任)하여 삼사(三司) 우윤(右尹)에 올랐다. 충선왕(忠宣王) 때 응양군(鷹揚軍) 상호군(上護軍)이 되었고, 합단적을 물리친 공으로 1319년(충숙왕 6) 추성분용정란광국공신(推誠奮勇定亂匡國功臣)이 되었다. 시호(諡號)는 충숙(忠肅)이다. 치악산 영원산성 안에 원충갑사(元 甲祠)가 세워져 제사를 모시다가 1669년(현종 10) 사당을 세워 원충갑을 주향(主享)하고 김제갑(金悌甲)과 원호(元豪)를 배향(配享)하였고, 1670년(현종 11) 윤2월 7일 충렬사(忠烈祠)로 사액(賜額)되었다. 충렬사는 1871년 철거되어 사액 현판은 괴산 충민사로 옮겨졌다. 묘소는 원주시 지정면 간현리에 있다.

6)김제갑  1525∼1592

조선 중기의 문신(文臣)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字)는 순초(順初), 호(號)는 의재(毅齋)이다. 고려의 명장(名將) 김방경(金方慶)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진사(進士) 김석(金錫)이고, 이황(李滉)의 문인(門人)이다. 1553년(명종 8)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홍문관(弘文館) 정자(正字), 병조좌랑(兵曹佐郞)·정언(正言)을 거쳐 1581년(선조 14)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하였고, 1583년 우승지(右承旨)로 있으면서 이이(李珥)와 박순(朴淳)을 탄핵하다가 벼슬에서 물러났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원주목사(原州牧使)로 있다가 왜장(倭將) 삼길성(森吉成)이 거느린 왜군이 관동지방을 휩쓴 뒤에 원주를 침공하여 오자 가족과 고을 백성을 이끌고 영원산성( 原山城)으로 들어가 방어에 임했으나, 왜군의 공격으로 결국 성이 함락되어 부인 이씨(李氏)와 아들 김시백(金時伯)과 함께 순절하였다. 조정에서 그의 충절을 기려 1592년에 이조판서(吏曹判書) 겸(兼) 경연(經筵) 홍문관(弘文館) 대제학(大提學)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성균관(成均館) 춘추관사(春秋館事)에 추증(追贈)하였다. 원주의 충렬사(忠烈祠)와 괴산의 화암서원(華巖書院)에 제향되었다. 1711년(숙종 37)에 '문숙(文肅)'이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1966년 강원도 애국유족부활위원회에서는 원주역전에 그를 추모하는 충렬탑(忠烈塔)을 세웠고, 이곳에는 1670년에 세워진 충렬비(忠烈碑)가 남아있다. 김제갑 목사의 충렬비에 기록된 명문(銘文)에는, "죽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죽어야 할 곳에서 죽는 것이 어려운 것이니, 오직 군자라야만 생명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는 것이다. 위급함을 당하여도 평소와 같이 보고 충성심과 분개심을 가다듬어 끝과 시작이 다르지 않았도다. 신하는 충성으로 죽고, 부인은 죽어 정절을 지켰으며, 아들은 죽어 효도를 다하였으니 여기 만고(萬古)에 삼강(三綱)과 오륜(五倫)을 남겼도다. 치악산(雉岳山)이 동쪽에 우뚝 솟고 봉천(鳳川)은 서쪽으로 흐르니 선생의 이름과 함께 길이 갈 것이다."라고 하였다.

7)한백겸  1552∼1615

조선 중기의 문신(文臣)으로, 본관은 청주(淸州), 자(字)는 명길(鳴吉), 호(號)는 구암(久菴)이다. 할아버지는 군수(郡守) 한여필(韓汝弼)이며, 아버지는 경성판관(京城判官)을 지낸 한효윤(韓孝胤)이며, 어머니는 예빈시정(禮賓寺正) 신건(申建)의 딸이다. 효종조(孝宗朝)에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한흥일(韓興一)은 그의 아들이다. 나이 16세에 이미 학문에 원대한 포부를 지니고 서경덕(徐敬德)의 문인(門人)인 민순(閔純)에게 배움을 청하여 소학(小學)·근사록(近思錄) 등 여러 서적을 섭렵하여 학문의 정밀함과 식견에 있어 속유(俗儒)의 범주를 완전히 탈피했다. 1586년(선조 19) 중부참봉(中部參奉)에 천거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89년(선조 22) 기축옥사(己丑獄死)에 연루되어 죽을 지경에 처했으나 간신히 모면하여 유배형(流配刑)에 그쳤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생하여 사면(赦免)되었으나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동지들을 규합하여 왜적에게 아부하며 반란을 선동한 자들을 처단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보고되어 내자시(內資寺) 직장(直長)에 임명된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올랐다. 1608년 선조(宣祖)가 승하하자 국상자문위원으로 선발되었으며, 1611년(광해군 3) 잠시 파주목사(坡州牧使)로 부임하기도 했다. 선영(先塋)이 원주에 있어 성묘를 위해 자주 방문하였고, 이 과정에서 섬강(蟾江) 근처에 별장을 마련하여 아우 한준겸(韓浚謙)과 왕래하였다. 이후 만년의 대부분을 여기서 보내며 저술에 몰두했는데, 구암(久菴)이라는 호(號)는 원주 사람들에 의해 명명된 것이었다. 심지어 그는 살던 마을의 이름을 '수이촌(水伊村)'에서 '물이촌(勿移村)'으로 개명하고 서재를 건립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한 곳에 정착하여 학문에 전념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인문지리서인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이다. 이 외에도 저술로는 <기전고(箕田考)>·<구암유고(久菴遺稿)>가 있다.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원주 칠봉서원(七峰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에 있다.

8)김제남  (1562∼1615)

조선 중기의 문신(文臣)으로, 본관은 연안(延安), 자(字)는 공언(恭彦)이다. 1585년(선조 18)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594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공조좌랑(工曹佐郞)을 거쳐 1596년 연천현감(漣川縣監)을 지냈다. 1597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한 뒤에는 1601년 정언(正言)·헌납(獻納)·지평(持平)을 역임하였다가 이조좌랑(吏曹佐郞)이 되었다. 1602년 둘째 딸이 선조(宣祖)의 계비(繼妃)로 뽑힘으로써 돈녕도정(敦寧都正)이 되었고, 왕비(王妃)로 책정되자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으로 봉(封)해졌다. 임진왜란 때는 선조를 호종(扈從)하고 의주(義州)로 가다가 중도에서 병으로 남았다가 의병을 모집하여 평양성 탈환에 기여하였다. 1613년 이이첨(李爾瞻) 등에 의해 인목왕후(仁穆王后)의 소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추대하려 했다는 공격을 받아 서소문 밖 자택에서 사약을 받았으며, 1616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면서 다시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아들 셋도 화(禍)를 입었고 부인과 어린 손자 천석(天錫)과 군석(君錫)만이 화(禍)를 모면하여 부인은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 되었으며, 천석과 군석은 숨어살았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뒤에 관작(官爵)이 복구되고 왕명으로 사당이 세워졌다.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의민(懿愍)이다. 묘소는 1624년(인조 2) 양주(楊州)에서 지금의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능촌으로 이장되었고, 김제남을 제향하는 의민공사우(懿愍公祠宇)와 신도비(神道碑)가 남아있다. 신도비 비문(碑文)은 신흠(申欽)이 글을 짓고, 심열(沈悅)이 글씨를 썼으며, 전액(篆額)은 김상용(金尙容)이 썼다.

9)임경업  (1594∼1646)
 

조선 중기의 명장(名將)으로, 본관은 평택(平澤), 자(字)는 영백(英白), 호(號)는 고송(孤松)이다. 판서(判書) 임정(林整)의 7대손으로, 임황(林 )의 아들이다. 그의 출생지에 대해 충주 달천(達川)과 평안도 개천(价川)이 언급되고 있으나, 충북도지(忠北道誌)와 원주시 부론면 손곡리 평촌마을의 전설과 현지 주민, 그리고 임씨 문중에서는 손곡리 태생임을 밝히고 있다. 1618년(광해군 10) 무과(武科)에 합격하여 무인(武人)으로서의 길이 열렸다.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성공한 뒤에 이괄(李适)의 난(亂)이 일어나자 관군으로 출전하여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 1등이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중군(中軍)으로 강화도까지 군사를 몰아갔으나 조선(朝鮮)과 후금(後金)은 이미 형제의 의(義)를 맺은 뒤였다. 당시 건주위(建州衛)에서 일어난 후금은 명(明)나라를 합병할 야심을 갖고 있었고, 조선은 임진왜란의 원조와 대의명분 때문에 정객(政客)이나 친명파(親明派)들은 후금과 싸울 각오를 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때 명나라 장군 공유덕(孔有德)과 경중명(耿仲明)이 후금으로 투항하였고, 이들 반장(叛將)을 토벌하기 위해 명나라에서 조선에 원병(援兵)을 청했을 때 임경업이 나아가 토벌하여 명나라 숭정황제(崇禎皇帝)는 총병(摠兵) 관직을 주기까지 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발하자 의주부윤(義州府尹)으로 있으면서 압록강 맞은 편의 봉황산(鳳凰山)에 봉화대를 설치하고 백마산성(白馬山城)을 굳게 지켜 적의 진로를 둔화시키는데 진력하였다. 1638년 평안감사(平安監司)가 되어 안주(安州)에 병영(兵營)을 설치하고 청나라의 동태를 살폈다. 1640년 청나라가 명나라의 금주(錦州)를 치게 되어 조선에 원병을 청해오자, 조정에서는 임경업을 출전하게 했다. 그러나 친명파(親明派)인 그는 대릉하 앞 석성도(石城島) 근처로 몰래 사람을 보내어 조선의 형세를 알리고 명군(明軍)과 협력하여 청군을 치려고 계획까지 세웠다. 이러한 모의는 청군에게 탄로되어 책망이 대단하여지자 조정은 그를 잡아 올리라는 엄중한 명령을 내렸다. 그는 머리를 깎고 장삼(長衫)을 걸친 후 스님 행세를 하였고, 한양 마포를 출발하여 중국 해풍도(海豊島)에 표착하여서는 명나라에서 평로장군(平虜將軍) 벼슬을 내리고 4만의 병사를 이끌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청나라는 마침내 북경(北京)을 함락시켰고, 청 태종은 산해관(山海關)으로 들어가니 임경업은 석성(石城)에 진을 치고 있으면서 재기의 기회를 노렸다. 남경으로 옮긴 명나라는 곧 망하였고, 1645년 정월 명나라의 항장(降將) 마홍주(馬弘周)에게 잡혀 북경으로 압송되어 청나라 황제는 임경업에게 편발(編髮)하고 청에 귀순하라고 했으나 끝까지 버티다 북경옥(北京獄)에 갇히게 되었다. 1646년 6월 죄인의 몸으로 본국에 송환되어 그해 6월 20일 심기원(沈器遠) 옥사(獄事)의 연루와 자기 나라를 배반하고 남의 나라에 들어가서 국법을 어겼다는 죄를 뒤집어쓴 채 형리(刑吏)의 모진 매에 이기지 못하여 마침내 숨졌다. 1697년(숙종 23) 12월 숙종(肅宗)의 특명으로 복관(復官)되었고, 충주 충렬사(忠烈祠)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원주시 부론면 손곡리에 그의 추모비가 건립되었는데, 이 비는 임경업 장군의 뜻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 8월 원주문화원에서 고증을 찾아 장군의 출생지인 생가 터에 세운 것이다.

10)인열왕후  1594∼1635

조선 인조(仁祖)의 비(妃)로, 성(姓)은 한씨(韓氏), 본관은 청주(淸州),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 한준겸(韓浚謙)의 딸이다. 한준겸이 원주목사(原州牧使)로 있을 때인 1594년(선조 27) 7월 1일 원주 인동(仁洞)에서 태어났다. 1610년(광해군 2) 능양군(綾陽君:인조)과 결혼하여 청성현부인(淸城縣夫人)으로 봉하여지고,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왕비(王妃)가 되었다. 왕후는 성품이 인자하여 인조를 도와 여러 가지 치적을 쌓았다고 한다. 1651년(효종 2) 휘호(徽號)를 명덕정순(明德貞順)으로 추상(追上)하였다. 인열왕후의 슬하에는 효종(孝宗)·소현세자(昭顯世子)·인평대군(麟坪大君)·용성대군(龍城大君) 4형제를 두었다. 능(陵)은 장릉(長陵)으로 처음에는 파주 운천리에 장사지냈으나, 1731년(영조 7) 교하로 이장하였다. 1758년(영조 34) 영조(英祖)가 친히 글을 짓고 글씨를 쓴 '인열왕후탄생고기비문(仁烈王后誕生故基碑文)' 비석(碑石)을 지금의 원주시 인동 왕비각(王妃閣)에 세웠는데, 1950년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인하여 비각(碑閣)은 물론 비석까지 파괴되었다. 그후 최근에 청주한씨 문중에서 '인열왕후탄생지비(仁烈王后誕生地碑)' 비석을 원주고등학교 앞 공원에 다시 세웠다.

11)조엄 1719∼1777
 

조선 후기의 문신(文臣)으로, 본관은 풍양(豊壤), 자(字)는 명서(明瑞), 호(號)는 영호(永湖)이다.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조상경(趙尙絅)의 아들이다. 1738년(영조 14)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여 음보(蔭補)로 내시교관(內侍敎官)과 세자익위사시직(世子翊衛司侍直)을 지냈고, 1752년(영조 28)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고 이듬해에 정언(正言)이 되었다. 이어 지평(持平)·수찬(修撰)·교리(校理) 등을 역임하고 동래부사(東萊府使)·충청도암행어사(忠淸道暗行御史)를 거쳐 1758년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이후에도 대사헌(大司憲)·부제학(副提學)·승지(承旨)·이조참의(吏曹參議) 등에 이르렀다. 1763년 통신정사(通信正使)로 일본에 다녀온 뒤 대사간(大司諫)·한성부(漢城府) 우윤(右尹), 예조(禮曹)·공조참판(工曹參判),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역임하였다. 1770년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있을 때 영의정(領議政) 김치인(金致仁)의 천거로 특별히 평안도관찰사로 파견되어 적폐(積弊)를 해소하였다. 1776년 정조(正祖)가 즉위하자 홍국영(洪國榮)의 무고(誣告)를 받아 파직되어 평안도 위원(渭原)으로 유배되었다가 아들 조진관(趙鎭寬)의 호소에 의하여 죽음을 면하고 김해(金海)로 귀양살이가 옮겨졌으나 실의와 불만 끝에 이듬해에 병사(病死)하였다. 문장에 능하고 경사(經史)에 밝았을 뿐만 아니라 경륜(經綸)도 뛰어나고 민생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져서 남긴 업적이 적지 않은데, 통신사(通信使)로 일본(日本)에 갔을 때 대마도(對馬島)에서 고구마 종자를 우리 나라 최초로 가져오고 그 보장법(保藏法)과 재배법(栽培法)을 아울러 보급함으로써 구황작물(救荒作物)로 널리 이용되게 하였던 점은 후세에 공덕으로 크게 기려지고 있다. 그가 활동하던 영·정조시대에는 실학(實學)이 활발히 움직이던 시기였고, 이러한 사회적 바램이 그로 하여금 산업적인 면에 착상하여 고구마의 유입재배에 관심을 갖게 하였다. 저서로는 통신사로 일본을 내왕하며 견문(見聞)한 바를 적은 <해사일기(海 日記)>가 전하고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묘소는 원주시 지정면 간현리 작동에 있으며, 신도비(神道碑)와 묘비(墓碑)도 함께 남아 있다.

12)이달  1539∼1612
조선 중기의 시인(詩人)으로, 본관은 홍주(洪州), 자(字)는 익지(益之), 호(號)는 손곡(蓀谷)이다. 부정(副正)이었던 부친 이수함(李秀咸)과 홍주(洪州, 홍성) 고을의 관기(官妓) 사이에 태어난 서출(庶出)이었다. 그의 제자 허균(許筠)이 지은 <손곡산인전(蓀谷山人傳)>에서, "손곡산인 이달의 자는 익지이니, 쌍매당 이첨(李詹)의 후손이다."라고 밝힘으로써 신평(新平) 이씨(李氏)로 잘못 알려지기도 하였다. 지금의 원주시 부론면 손곡에 묻혀 살았으므로 호를 손곡이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당시의 유행에 따라 송시(宋詩)를 배우다가 정사룡(鄭士龍)으로부터 두보(杜甫)의 시를 배웠다. 한편, 시풍(詩風)이 비슷한 최경창(崔慶昌)·백광훈(白光勳)과 어울려 시사(詩社)를 맺어 문단에서는 이들을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고 불렀고, 이들은 임제(林悌)·허봉(許 )·양대박(梁大樸)·고경명(高敬命) 등과도 자주 어울려 시(詩)를 지었다. 한때 한리학관(漢吏學官)이 되었고, 중국 사신을 맞는 접빈사(接賓使)의 종사관으로 일하기도 하였다. 그의 시는 신분제한에서 생기는 한(恨)과 애상(哀想)을 기본정조로 하면서도 따뜻하게 무르녹았다. 근체시(近體詩) 가운데에서도 절구(絶句)가 뛰어나 김만중(金萬重)은 <서포만필(西浦漫筆)>에서 조선시대의 오언절구(五言絶句) 가운데 대표작으로 그가 지은 '별이예장(別李禮長)'을 꼽았다. 1725년 정진교(鄭震僑)의 상소(上疏)에서는 성종(成宗) 이후의 서얼(庶孼) 가운데 걸출한 인물로 박지화(朴枝華)·어숙권(魚叔權)·조신(曹伸)·이달(李達) 등이 거론되었다. 그는 신분 때문에 관직에 나아가 자신의 포부를 마음껏 펼치지는 못하였으나, 신분에 제약을 받지 않는 시 창작에서만은 자유로울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자신의 신분을 한탄하면서 세월을 허비한 사람이 아니라, 그러한 고통을 시로써 승화시킨 시인(詩人)이었다. 묘소는 전해오지 않으며,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군청 앞과 원주시 부론면 손곡리에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다. 시집(詩集)으로는 그의 제자 허균이 엮은 <손곡집(蓀谷集)>이 있고, 이밖에 유형(柳珩)이 엮은 <서담집(西潭集)>이 있었으나 현재 확인되지 않고 있다.

 

2.문화재

1)영원산성

 

 

문화재분류 : 사적지

지정번호 : 제 447호

소재지 : 강원도 원주시 판부면 금대리

 

이 성은 치악산의 남서쪽에 있는 석축 산성으로, 신라 문무왕 혹은 신문왕때에 쌓았다고 전해온다. 또 신라진성여왕때 왕실의 부패로 국정이 문란해지자 원주를 중심으로 충주에서 반란을 일으켜 인근 30여성을 뺏기 위하여 원주 치악산을 본거지로 산성을 구축한 것이 이 영원산성으로 양길과 궁예가 축성해서 웅거했던 곳이라고 한다.

 

둘레가 1,031보로 성내에는 우물이 하나, 샘이 다섯이나 있는 천연의 요새지이다. 아직도 일부 남은 4km정도의 석성이 쌓아올린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특히 고려 충렬왕 17년(1291년) 원나라의 합단적이 침입하였을 때, 향공지사로 별초군에 소속되었던 원충갑이 원주의 백성들과 함께 적군을 물리친 유서 깊은 격전지였고 임진왜란때는 원주목사 김제갑이 왜적을 맞아 치열하게 싸우던 곳이며 원주 주민이 왜적의 침입이 있을 때마다 대적하여 싸우던 피맺힌 격전장이다. 근래에 당시 군사들이 쓰던 솥이며 숟가락등의 유물이 발굴되고 있는데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금두산성, 해미산성지도 남아있다.

 

2)거돈사지

 

 

문화재분류 : 사적

지정번호 : 사적 제168호

소재지 :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정산리

 

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찰이었으나 임진왜란때 소실되었다 한다. 현재 금당지와 불좌대가 남아 있는데 주초석들의 배치상태로 보아 큰 규모의 불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삼층석탑(보물 제750호)과 고려 현종 16년(1025)에 건립된 원공국사 승묘탑비 (보물 제78호)가 있다.

 

원공국사 승묘탑(보물 제190호)은 일제 때 서울로 옮겨져 일본인 집에 있던 것을 1948년 경복궁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현재의 유물들로 보아 이곳은 나말여초 때의 절터로 보이며, 이 시대 사찰로서는 보기드문 일탑식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3)진공대사탑비 귀부 및 이수

 

 

문화재분류 : 보물

지정번호 : 보물 제463호

소재지 :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진공대사의 탑비는 신라말 고승인 진공대사가 당나라에 유학가고 돌아와 고려 태조의 왕사 가 되어 태조 23년(940)에 입적하니 태조가 비문을 짓고 당 태종의 글씨를 집자하여 세운 비 인데, 비신은 경복궁에 옮겨지고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다. 이 비에 따른 부도 1931년 경복 궁으로 옮겨졌다.

 

귀부는 용두화한 거북머리에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네발로 대석을 힘있게 딛고있다. 이수는 진공대사란 전자글씨가 새겨 있고, 구름문양 속에 생등하는 용이 정교하고 섬세하 게 조각되어 당대조각예술의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

 

4)강원감영지

 

 

문화재분류 : 사적지

지정번호 : 제439호

소재지 : 강원도 원주시 일산동

 

● 지정년월일 : 2002. 3. 9

강원감영지는 당시의 건물(선화당, 포정루, 청운당)들이 원위치에 남아 있고, 2000년 강릉대학교 박물관에서 실시한 발굴조사결과, 관련유구(중삼문지, 내삼문지, 공방고지, 책방고, 보도, 담장지, 행각지 등)가 비교적 잘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강원감영 이전의 원주목 관아의 건물지 등의 하층에 잘 보존되어 있어 우리나라 관아건물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는 유적임

 

5)흥법사지 삼층석탑

 

 

문화재분류 : 보물

지정번호 : 보물 제464호

소재지 :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이 탑은 고려시대에 조성된 석탑이다. 이중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렸는데, 밑 기단에는 각 면에 3구씩의 안상이 조각되었다. 기단에 비하여 탑신이 빈약하게 작아졌으며, 옥개석의 낙수면 경사가 급하다. 상륜부에는 로반만 남아 있으며 탑 높이는 3.69m이다.

 

6) 거돈사지 삼층석탑

 

 

문화재분류 : 보물

지정번호 : 보물 제750호

소재지 :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정산리

 

이 석탑은 9세기 신라석탑이다.이중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렸다.탑신에는 우주가 새겨 있고 상륜부은 층급 받침이 5단으로 귀 끝이 약간 치켜들려 있다.

 

탑꼭대기의 상륜부에는 로반이 남아 있다.이 탑은 통일신라 3층정형탑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높이가 5.44m이다.

 

 

7)거돈사 원공국사승묘탑비

 

 

문화재분류 : 보물

지정번호 : 보물 제78호

소재지 :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정산리

 

이 비는 고려의 고승 원광국사(930~1018)의 행적을 기록한 비로서 대학자인 최충이 비문을 짓고 김거웅이 글씨를 써서 현종 16년(1025)에 세웠다.거돈사지에는 원공국사의 부도(보물 제190호)인 승묘탑도 있었으나 현재는 경복궁안에 옮겨졌다.

 

귀부의 거북머리가 용머리 같이 변화 하였는데 양쪽 귀 뒤가 물고기 지느러미 같이 되어 있다.귀갑문 안에는 사자와 연꽃무뉘가 교대로 장식되어 있다.비머리인 이수에는 구름위에 요동치는 용이 불꽃에 싸인 보주를 다투어 물고자 하는 모습을 섬세하고 화려하게 조각하였다.이비는 높이가 499.7cm, 비신의 폭은 123.8cm이며 고려초 조각예술의 높은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8)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비

 

 

문화재분류 : 국보

지정번호 : 국보 제59호

소재지 :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고려 선종 2년(1085)에 세워진 5.54m 높이의 이 석비는 고려시대 석비로서의 특징적인 양식을 보이는 걸작품으로 조각 또한 정교하다. 귀부는 넓은 지대석 위에 놓였고 밑에는 구름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용두화된 거북머리의 목은 길게 곧추서서 정면을 향하고 목에는 물고기 비늘을 표현했다.등에는 네모 구획안에 따로 구갑문을 새겼으며 다시 그안에 '왕'자를 양각했다.

 

등의 중앙에는 간결한 복연의 비좌를 마련하여 비신을 세웠다.

비신의 바깥둘레에 보상당초문을 조각하여 돌린 것이 특징이며 양 측면에 쌍용을 조각한것도 특이하다. 이수는 모자를 쓴듯한 형태이며 네 귀에 전각이 뚜렸하고 귀꽃이 있다.

 

 

이수 중앙에 상륜부를 두어 보주를 얹었다.

지광국사는 고려 성종 3년(984)에 태어났는데 속명은 해인이다. 목종 2년(999)에 용흥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역대 왕의 우대를 받았으며, 삼중대사, 승통이 된 후 문종12년(1058)에 국사가 되었다. 동왕21년(1067)84세로 이곳 법천사에서 세상은 떠났다. 비문은 정유산이 짓고 안민후가 글씨를 썼다.

 

9)포정루 및 선화당

 

 

문화재분류 : 유형문화재

지정번호 : 제3호

소재지 : 강원도 원주시 일산동

 

원주에 감영이 설치되었던 시기는 조선 태조 4년(1395)이며 영문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 문은 감영의 정문으로 건립되었으며 임진왜란때 소실된 것을 현종 원년(1660)에 목사 이후가 재건하였는데 6·25동란 때 일부 파손된 것을 그 후 보수하였다 한다.

 

문루는 방형장초석 위에 민흘림기둥을 세운 정면 3칸, 측면2칸의 이층누각 팔작지붕 겹처마 건물로 익공계양식이다. 1층 중앙칸에는 2짝의 판문을 달고 2층 우물마루를 짰는데 주위로는 계자난간을 돌렸으나 궁창판에는 아무런 조식이 없고 천장은 연등으로 마감하였다. 이 감영 자리에는 군청이 들어섰지만 당시의 건물로 선화당이 남아있다. 이 건물 역시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문루와 함께 재건하였는데 당시에는 동헌 등 부속건물이 있었다. 정면 7칸, 측면 4칸 팔작지붕의 겹처마 건물로 익공계양식이다. 내부에는 네면에 내진주를 세워 한 칸의 퇴칸을 두었고 내진주열에는 세살문을 달았으나 후대에 변형이 있었다. 바닥은 모두 우물마루를 짰고 천장은 연등으로 마감하였다.

 

10) 구룡사 보광루

 

 

문화재분류 : 유형문화재

지정번호 : 제145호

소재지 : 강원도 원주시 소초면 학곡리 1029

 

구룡사는 치악산 능선 밑의 급경사지에 동향의 배치를 하고 있으며, 조선중기이후 산지에 건립된 사찰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구룡사의 출입은 사천왕문을 통과하여 보광루 아래부분의 트여 있는 가운데 칸을 통로로 삼아 대웅전 앞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누하진입방식인데, 이러한 방식은 경사진 지형에 조성된 사찰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보광루는 구룡사의 가람배치에서 불이문의 성격을 가진 건물로 공간의 위계를 구분함과 동시에 누각 아래를 통한 진입으로 전이공간역할을 한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익공집으로 홑처마 맞배지붕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자연석 기단 위에 자연석으로 초석을 놓고 그 위에 배흘림이 있는 튼실한 원형기둥을 세워 아래층을 구성하고 있다. 출입통로로 사용되는 가운데 1칸을 제외한 나머지 옆칸은 판벽으로 막아 창고 공간으로 쓰고 있는데, 창고 안쪽으로도 기둥을 세워 놓았으며, 각 칸마다 두 줄씩 가로․세로로 보를 놓았다.

누각층은 대웅전 앞의 마당공간을 향해 벽체가 없이 개방 시켰으나 나머지 3면은판벽으로 처리하였고, 정면의 각 칸 사이에는 2짝 판문을 달았다. 기둥은 1층보다 빈약하고 배흘림이 없는 원형기둥을 사용하였고, 이익공 형식으로 연꽃과 연꽃 봉우리를 장식하였으며, 기둥머리에는 봉황머리를 장식하였다.

누마루는 우물마루이며, 천장은 우물반자이다

 

11) 김두한 가옥

 

 

문화재분류 : 유형문화재

지정번호 : 유형문화재 제86호

소재지 : 원주시 문막읍 건등리

 

목조와가인 이 가옥은 ㄴ자형으로 된 안채의 평면형식이 주부형인데, 건넌방.대청.안방이 한줄로 배치되고, 안방은 앞으로 한두칸 더 나아가 그 끝에 부엌이 있는 모습이다. 사랑채는 이 안태 부엌과 연결된 형태로 마루방과 두칸의 안채와 마주보게 되어 있고, 사랑채 끝에 한단 낮게 대문과 헛간등이 연결되어 전체 평면이 ㅁ 자형으로 되어 있다.

 

 

이 집은 원주목사와 남원부사를 지낸 김탄행의 묘를 관리하기 위한 묘막으로 건립된 것을 1936년 크게 보수하였으며, 1945년부터 현 소유자로 명의가 변경되었다고 한다.

 

2006.03.25.

  • 채택

    질문자⋅지식인이 채택한 답변입니다.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
2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ckdw****
시민
본인 입력 포함 정보
)원공국사  930∼1018

고려 초기의 천태학승으로, 속성은 전주 이씨, 자는 신칙이다. 8세에 사나사에 머물고 있던 인도승 홍범삼장에게 출가하였다. 홍범삼장이 인도로 돌아가자 광화사 경철에게 수업하여 946년(정종 1) 영통사 관단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953년(광종 4) 희양산의 형초선사 밑에서 수행하였고, 954년 승과에 합격하였다. 959년 광종의 환대를 받으며 구법을 위해 오월국으로 유학하여 영명사 연수에게 법안종을 배웠고, 961년 국청사 정광에게 '대정혜론'을 배워 천태교를 전수받았다. 968년 전교원에서 '대정혜론'과 '법화경'을 강의하여 명성을 떨쳤다. 970년(광종 21) 10여 년만에 귀국하여 광종의 환영을 받아 대사가 되었고, 금광선원에 머물렀다. 975년(광종 26)에 중대사가 되었고, 경종(975∼981)이 즉위함에 삼중대사가 되었다. 990∼994년 사이에 적석사로 옮겨 거주하면서 호를 혜월이라 하였고, 성종의 부름으로 5년 동안 궁중에서 설법하였다. 목종의 호의가 깊어 선사가 되었고, 불은사와 호국외제석원에서 머물렀다. 현종이 즉위하여 대선사가 되어 광명사에 주석하였고, 법호를 적연이라 하였다. 1012년(현종 3) 왕사가 되었으며, 3년 뒤에는 보화라는 법호를 받았다. 1016년 병을 얻어 1018년(현종 9) 원주 현계산 거돈사로 하산하여 입적하였으니 세수는 89세이다. 승지를 잡아 승묘탑을 세우고 거돈사 동남쪽에 장사지냈다. 원공국사는 법안종 승려로, 법안종은 선종의 일종이나 천태종·화엄종·법상종 사상을 융합하고 나아가 교종과 선종을 일치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법안종은 광종의 호족세력 억압과 함께 왕권강화의 방편으로 중요시되고 법안종 승려들도 광종의 호의를 받았는데, 원공국사도 이러한 면에서 광종의 환대를 받았던 것이다. 한편 원공국사는 오월국 국청사에서 천태종의 교의도 배웠고 자신이 국청사에서 대정혜론과 법화경을 강의한 것으로 보아 천태종에 대해서도 많은 지식이 있었으며, 의천이 고려 천태종을 성립시킬 때 흡수되었던 것으로 보아 천태종 성립에도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2008.04.29.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
5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탈퇴한 사용자 답변

열심히하세요~

2008.10.16.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