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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테레사수녀가인권증진한점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3,245 작성일2018.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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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kachi
은하신 열심답변자
사람과 그룹 57위, 환경 21위, 인사, 조직 관리 7위 분야에서 활동
본인 입력 포함 정보

내용이 좀 길더러도 차분히 읽어주세요.

수녀님의 삶 자체가 인권을 위한 생활이셨음을 알게됩니다.


내용을 차분하게 살펴보시면 인권보호를 위해 하신일

수녀님의 업적,일대기등 모든것을 아실 수 있습니다.

도움이 되실거예요~~


9월 5일이 빈자들의 어머니 마더 데레사 축일입니다.

함께 기억하며 데레사 수녀님의 삶을 전해드립니다.

생전의 수녀님의 생활이 얼마나 헌신적있는지와

얼마나 깊은 신앙심이었는지 개척정신과 선교정신을 배웁니다

 

마더 데레사는 1910년 8월 26일 유고슬라비아의 스코프예에서
아니스 곤히아 브약스히야 Agnes Gonx-ha Bojaxhiu라는 이름으로

알바니아 집안의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서 비교적 안락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건물 청부인이요 수입업자였고,

어머니는 깊은 신앙을 가진 여인으로 엄격하면서
도 다정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자 생활은 어려워졌다.
어머니는 집안살림을 꾸려가기 위해 옷과 수예품을 파는 사업을 시작했다.
아니스는 소녀 시절 신우회라는 본당의 청소년 단체에 들어갔는데,
예수회 사제가 지도하는 이 단체에서 여러 활동을 통해 선교사 생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열 여덟 살 때 인도에서의 선교활동으로

잘 알려진 로레토 수도원에 들어갔는데,
이는 이른바 첫 번째 부르심을 들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어려서부터 인도에서 일하기를 원했던 데레사는
먼저 아일랜드로 사서 영어를 배운 다음 인도로 가서 캘커타에 있는

로레토 수녀원의 성 마리아 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게 되었다.

1929년 1월 6일 캘커타에 도착한 아니스는

1931년 5월 24일 로레토 수녀로서 허원을 했는데,
그때 <예수의 작은 꽃>으로 알려진 리지 외의 데레사를 수도 명으로 선택했다.

자기 고향을 떠나 다른 나라로 가겠다고 결정한 것과
데레사를 허원명으로 선택했다는 사실은

 마더 데레사의 힘과 특징 그리고 목적을 이해하는 데
근본적인 실마리가 된다. 단순한 수도자가 되는 게 아니라

선교활동을 하겠다는 열정,
<밖으로 나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사람들에게 전한다>는
이 열정을 보면 마더 데레사의 첫 번째 부르심에 대해 알 수 있는데
그 선교생활은 복음을 전하겠다는 강한 믿음의 표현이다.

마더 데레사는 처음부터 개척정신이 있었다.

그런데 선교활동은 연민에 찬 활동만은 아니다.
마더 데레사가 리지 외의 성녀 데레사를 수도 명으로 택한 것을 보면
그분의 선교 활동이 관상적인 측면을 지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프랑스 리지 외에서 보석상의 막내딸로 태어난 데레사는

1888년 열 다섯 살이라는 아주 어린 나이에 갈멜 수도회에 들어갔는데,
자신의 소명은 <사랑>이며 가장 큰 의무는 사제와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라고 했다.
자신은 몸이 약해 선교사가 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단순성, 희생정신, 관용으로 가득한 영성,
즉 복음의 근본 진리로 향하는 건강한 영성의 길을 따랐다.
데레사는 <나의 작은 길은 영적인 어린이 됨의 길,

절대적인 신뢰와 자기 포기의 길이다>라고 했다
리지 외의 데레사는 자신을 <아기 예수의 손에 있는 공>으로 비유한 반면
마더 데레사는 신뢰와 자기 포기라는 단순한 길을 좀더 실제적으로 표현하여 자신을

<하느님의 손에 있는 연필> 이라고 불렀다.

마더 데레사는 성 마리아 학교에서 지리와 교리를 가르치는 한편,
힌두어와 벵골어를 배웠다. 그리고 1944년에는 교장 직을 맡게 되었다.
그 때는 식량은 아주 적고 할 일은 너무 많았던 어려운 시기였다
그러잖아도 별로 튼튼하지 못했던 데레사는 결핵에 걸려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지 못하고 히말라야산 기슭의 작은 언덕에 있는 다릴징으로 보내졌다.
마더 데레사가 <부르심 안에서의 부르심>이라고 하는 두 번째 부르심을 받은 것은
1946년 9월 10일 기차 안에서였다.

「그 메시지가 아주 분명했기 때문에 <예>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을 위해 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이것이 그분의 뜻이라는 것과 그분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데레사가 교사에서 종으로 안전하고 편안한 공동체에서

예외적인 신앙과 뛰어난 비전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곳으로 옮겨가는 허락을 얻는 데는 2년이 걸렸다.
성 마리아 학교에서 19년 동안 마더 데레사와 함께 일한 수녀님들 중에는
그 시절 마더 데레사는 몸이 허약하고 아주 평범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오늘날 마더 데레사는 어디에 뭐가 필요한 지를 알아 적절히 대응하고
모든 의혹에도 불구하고 조직을 하고, 회헌을 작성하고,
전세계에 지부를 파견하는 등 전형적이고도 정력적인 실업가로 보인다.

그리고 마더 데레사에게는 현실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
<하늘과 땅> 사이에 적절한 균형과 일치를
이룰 수 있는 아주 놀라운 능력이 있는데 이는 기도를 통하여 얻는 것이다.

마더 데레사가 이렇게 강한 의지를 가졌으면서도

하느님께 자신을 완전히 내맡길수 있는 것은

뭔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데레사는 자신의 성덕의 진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하느님과 나, 하느님의 은총과 나의 의지에 달린 것이다.
진보를 이루는 첫 번째 단계는 그것을 원하는 것이다."

마더 데레사에게 거룩함이나 성스러움에 대해 질문을 하면
"거룩함은 필수품입니다. 그것은 수도자 등 소수에게 맡겨진 사치품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의무입니다. 거룩함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의무입니다.
거룩함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라고 일상적으로 설명했다
.
마더 데레사를 "살아있는 성녀"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은데,
이는 현대에서 점점 더 높이 평가받고 있는 개념, 즉 균형과 관계있는 것 같다.
인도의 스승 크리슈나무르티는 거룩함이 <온전성>에서 유래되었다고 해석했는데,
그것은 우리의 모든 갈라진 지체들이 하나의 인간으로 고르게 결합된다는 의미이다.

마더 데레사의 영적인 길은 관상생활이 사랑의 활동과
균형을 이루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준다. 그것은 단순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 단순성 뒤에는 탁월한 신앙과,
의지와 지혜에서 나오는 여러 해 동안의 체험과 봉헌이 숨어 있다.
마더 데레사는 현실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을

조화시킬 수 있기 때문에 존경스러우면서도

친밀감 있고, 실용적이면서도 통찰력 있고,
상처 입기 쉬우면서도 강하고, 현실적이면서도 관상적일 수도 있다.

(사랑의 선교회홈에서)

 

데레사 수녀 연보

1910년: 8월 27일 현 마케도니아 스코페에서

 알바니아께 건축업자의 1남 2녀 중 막내로 출생.

세속명은 아녜스 곤히아 브약스히야.
1928년: 캘커타에서 활동하는 아일랜드의 로레토 수녀회에 입회.

아일랜드, 더블린을 거쳐 인도 지질링 도착.
1929-1948년: 캘커타 성 마리아 학교에서 지리학 교편을 잡다 교장에 임명,

로레토 수녀회와 관련 있는 인도 수녀회인 성안나 수녀원의 수련장 맡음.
1946년: 결핵 때문에 요양차 기차를 타고 산간 도시 지질링으로 가던 중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 하느님을 섬기라"는 계시를 받음.

곧바로 빈민촌에서 봉사하고 싶다는 생각을 원장 수녀에게 밝히고 허락을 요청.
1948년: 로레토회 수녀복을 벗고 하얀 사리와 이마에는 푸른 줄무니가 있는 새 수도복을 입음.

3개월간 미국 의료수녀원이 잇는 파트나에서 간호학을 수학.

그해 성탄절에 캘커타로 돌아와서 빈민촌에 학교를 세움.
1950년: 사랑의 선교 수녀회 창립.
1952년: 죽어가는 사람들이 머물 수 있는 안식처

 '니르말 흐리다이(순수한 마음)'를 설립, 다음해 고아원을 세움.
1962년: 파드마 슈리상 수상, 상금으로 여러 곳에 새 안식처를 건립.
1963-1978년: 사랑의 선교 수녀회 교황청 인가 취득,

첫 해외시설을 베네수엘라 코코로트에 건립.

사랑의 선교회 남자 수도회가 앤드루 수사에 의해 창설,

국제 데레사 수녀 협조자회와 자매결연.

교황 바오로 6세로부터 교황 요한 23세 평화상을 받음.

상금으로 나환자들의 재활센터를 지어 '평화의 도시'라고 명명. 69년 중국 방문.
1979년: 노벨 평화상 수상. 상금 19만 2천 달러는 나환우 구호소 건립 기금에 씀.
1981-1985년: 81년, 82년, 85년 3차례 한국 방문.
1982년: 포위된 베이루트의 한 병원에서 37명의 지진아를 구조하는 동안

 이스라엘인들과 팔레스타인들에게 총격을 멈추도록 설득.
1983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방문하는 동안 심장 발작을 일으킴.
1985년: 미국 '자유의 메달' 수상. 뉴욕에 에이즈 말기 환자를 위한 병원 건립.
1989년: 두 번째 심장 발작. 삼장 박동 조절장치를 주입시킴.
1990년: 사랑의 선교회 대표직 사임 표명.

후계자 선출을 위한 비밀 투표에서 데레사 수녀 자신을 제외한 전원 찬성으로 재선됨.
1991년: 멕시코 티후아나에서 폐렴 발생. 심부전 발생.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병원에 입원.
1993년: 5월 로마에서 넘어져 늑골 3개가 부러짐. 8월 뉴델리에서 말라리아로 입원.

9월 막힌 혈관을 뚫는 수술을 받음.
1996년: 미국 명예시민권 받음. 또다시 넘어져 쇄골이 부러짐.

8월 말라리아 발병, 좌심실 부전, 폐감염, 심장병 재발,

11월 가슴 통증과 호흡곤란으로 다시 입원.
1997년: 3월 13일 '사랑의 선교회' 대표직 사임.

 9월 5일 밤 9시30분 캘커타에서 심장마비로 별세.

 

빈자들의 어머니 데레사 수녀...출생에서 선종까지

'아녜스 곤히아 브약스히야(Agnes Gonxha Bojaxhiu)'.
1910년 8월 27일. 옛 유고연방 마케도니아의 스코페에서 데레사가 태어나자

알바니아인 부모는 막내딸에게 '꽃망울(곤히아)'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데레사는 건축업자이자 시의원인 아버지, 그리고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어머니 밑에서 언니 아게, 오빠 라자르와 어울리며 비교적 안락한 低?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곤히아가 7살이던 1917년, 아버지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그 와중에서 동업자가 재산을 빼돌리는 바람에 길거리에

 나앉은 가정은 순식간에 몰락했다.

 어머니는 옷과 수예품을 파는 일로 3남매를 키우며 어렵게 생계를 이어갔다.

데레사는 소녀 시절 신심회라는 본당 청소년 단체에 들어갔는데

당시 예수회 신부가 지도하는 이 단체에서 선교사 생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2살 때였어요. 수녀가 되겠다는 욕구가 자연스럽게 생겨났어요,"

 데레사 수녀는 훗날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처음에 "수녀가 되기에는 너무 어리다"며

그녀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6년 뒤 데레사가 수녀가 되고 싶다는 뜻을

재차 밝히자 그녀의 어머니는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그때 어머니는 "너의 손을 예수의 손에 얹고 예수만 따라 가라"고 당부했는데

 데레사 수녀는 어머니의 이 당부를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한창 세상을 동경할 나이인 18세(1928). 데레사 수녀는 크로아티아 수도

자그레브까지 배웅 나온 가족들과 이별을 하고 아일랜드의 로레토 수녀회에 입회했다.

그곳에 들어간 이유는 인도 벵골에 수녀원을 두고 활발한 선교활동을 벌이고 있는

그 수녀회에서 평소 생각했던 봉사의 삶을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데레사는 아일랜드에서 영어를 배운 다음 1929년 1월 6일 인도 캘커타로 건너갔다.

캘커타 로레토 수녀원에서의 첫 소임은 수녀회가 운영하는 성마리아 고등학교의 교사,

데레사 수녀는 1931년 5월 24일 그곳에서 첫서원을 했는데

그때 '예수의 작은꽃'으로 알려진 프랑스 리지외의 데레사를 수도명으로 정했다.

 데레사 수녀는 성마리아 학교에서 지리와 교리를 가르치는 한편

힌두어와 벵골어를 공부했다. 1944년에는 교장직을 맡았지만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산더미처럼 쌓인 일을 처리하느라 가뜩이나 몸이 허약했던

 데레사 수녀는 결핵에 걸려 히말라야산 기슭의 지질링에 가서 요양을 했다.

데레사 수녀가 '부르심 안의 부르심'이라고 하는

두 번째 부르심을 들은 것은 바로 이때다.

데레사 수녀는 지질링을 다녀와서 "수녀원을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지질링으로 가던 중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라"는 계시를 받은 것이다.

데레사 수녀는 훗날 당시의 결심을 이렇게 회고했다.
"그 메시지가 아주 분명했기 때문에 '예'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어요.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라 빈민가로 갔습니다.

가장 미소한 사람들 안에 계신 예수님을 위해 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데레사 수녀가 교장에서 빈민들의 '종'으로,

그리고 안전한 공동체에서 가난과 질병이 들끓는 빈민굴로 자리를 옮기는 데는

 수녀회 허락이 늦어져 2년이란 기간이 소요됐다.

데레사 수녀가 빈민가로 들어갈 때 몸에 지닌 총재산은 단돈 5루피(약 1백20원).

로레토회 수녀복을 벗고 인도 고유의 부인복 '사리'에

푸른테를 두른 옷으로 갈아입은 데레사 수녀.

수녀원 바로 평의 빈민굴 모트지힐에서 쓰러져 가는 가건물을 빌려 학교를 열고

칠판도 없이 붉은 땅바닥에 나무막대기로 알파벳을 써가며 아이들을 가르쳤다.

또 학교 수업을 마치고 오후에는 빈민구호소를 차려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환자들을 데려다 돌봤다.

 이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 빈민구호소는 연일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는

거지와 병자, 사경을 헤매는 노인들로 가득 찼다.

하지만 이 소문은 또 성마리아 학교 재직시절에 인연을 맺었던

제자들을 한 두명씩 자원 봉사자로 불러모은 신비로운 힘을 발휘했다.

연약한 수녀의 몸으로 아무 계획도 없이 시작한

빈민구호사업. 데레사 수녀는 자신의 빈민구호사업을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다.

 "우리가 하는 일이 태평양의 물 한 방울 정도라는 것을 잘 알아요.

 그러나 이 물 한 방울이 태평양에 있지 않다면

태평양의 물은 어떻든 한방울이라고 줄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어린이 집'과 '영생의 집'을 갖지 않았다면

우리가 데려온 이 어린 창조물들은 길가에서 죽었을 것입니다."

데레사 수녀는 1950년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

'사랑의 선교수녀회'를 창설했다.

데레사 수녀는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산파들이 데려오는 유아,

쓰레기통에서 건져오는 죽음 직전의 핏덩이,

그리고 거리에서 쥐와 개미에 몸을 파먹힌 채 죽어 가는 나환자 등

보호가 필요한 곳이면 언제 어디서든 사랑의 손길을 뻗쳤다.

고된 희생의 연속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사랑의 선교 수녀회가

현재 1백 19개국에서 운영하는 사랑의 집은 5백57개.

데레사 수녀는 기적같은 사랑의 열매를 맺었지만

정작 자신의 몸은 몇 년 전부터 급격히 허약해지기 시작했다.

지난 96년 여름 말라리아와 고열, 고질적인 심장병과

 폐질환 등으로 사경을 헤매던 당시 치료를 담당했던 센 박사는

 "구부린 자세로 병약자를 돌봐온

오랜 봉사활동이 어려 질환의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당시 병상에 누워있던 데레사 수녀를 위해 인도의

힌두교와 회교도는 말할 것도 없고 전세계인들이 쾌유를 빌어

세간에 화제가 된 적도 있다. 우리를 더욱 더 감동시켰던 것은

그때 병원에서 인공 호흡기를 떼자마자 "병원비가 꽤 많이 나왔을 텐데...

"라며 병원비 걱정부터 한 것이다. 더욱이 그해 11월에 또 다시 심장마비로

입원 했을 때는 "가난한 사람들처럼 그냥 죽어가게 해달라"고

간청해 의료진들이 어쩔 줄을 몰라했다.

노벨 평화상, 케네디 인권상, 인도 최고의 바라트라트나 훈장...

세상은 '가난한 이의 어머니' 데레사수녀에게 화려한 영예를 안겨 주었다.

그렇지만 데레사 수녀는 79년 노벨평화상 수상 때 "수상 축하연을 열지 않는 대신

그 비용을 가난한 사람을 위해 쓴다"는 조건을 내걸고 수상식장에 모습을 드러냈을 정도로

세속의 영광조차도 가난한 이들의 '양식'으로 돌렸다.

 데레사 수녀는 그 작은 체구로 50년 넘게

 빈민가를 지키며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위대한 사랑을 가르쳐 주고 4일 밤 하느님 곁으로 돌아갔다.

데레사 수녀는 우리 곁을 떠나면서 이 메시지를 남겼다.
"가난한 이들이 절실히 바라는 것은 의식주가 아니라 따뜻한 온정입니다.

그들이 늘 괴로운 것은 사실 가난 때문에 생겨난 '버림의 상태'입니다.


데레사 수녀의 어록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동정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과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자신들의 존엄성이

존중 받는다고 느낄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하느님을 봅니다.

내가 나환자의 상처를 씻어줄 때 나는 하느님 바로

그 분을 돌보아드리는 듯한 느낌을 갖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경험입니까."

(1974년 인터뷰에서)

"쌓아 두면 쌓아 둘수록 줄 수 있는 것이 적어집니다.

가진 것이 적으면 적을수록 나누는 방법을 제대로 알게 되지요."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가 그들에게 주는 것 이상을 돌려 줍니다.

그들은 강한 사람이여 음식없이 하루하루를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저주하고 불평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동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로부터 배울 것이 굉장히 많습니다."

(1977년 인터뷰)

"며칠 전 제가 천국의 문 앞에 서 있는 꿈을 꿨습니다.

그러나 성베드로께서는 '지상으로 돌아가거라.

 이곳에는 빈민굴이 없느리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1996년 연설)

"낙태는 '자궁 내 살인'입니다. 아이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여러분이 그를 원하지 않으면저에게 보내주십시오."

(유엔 연설에서)

"저는 하느님의 손에 쥐어진 몽당연필입니다.

그분이 언제 어디서든 당신을 쓸 수 있도록

그분 손에 쥐어진 작은 도구가 되십시오."

(일일묵상집 '사랑은 철따라...'에서)

"만일 달에도 가난한 사람들이 있다면 물론 그곳에도 갈 것입니다."

"나는 빈민들의 가난을 선택한 사람입니다.

배고프고 헐벗고 집 없는 사람과 불구자,

맹인, 나환자, 아무도 원하지 않고 사랑하지도 않는,

돌봄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사회에 짐이 됐던,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기피했던 사람들의

이름으로 이 상을 받게 된 것에 감사합니다."

(1979년 노벨평화상을 받으며)

"하느님은 보다 겸손하고 헌신적이며 복종하는

또 다른 사람을 찾을 것이고 선교회는 그대로 지속될 것입니다."

(1989년 캘커타에서 사랑의 선교회 원장 사임 의사를 밝히며)

"평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십시오.

이 전쟁에서 단기간에 우리가 모두 두려워하는 승자나 패자가 나올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고통과 참상, 당신들이 무기가

저지른 생명의 손실을 정당화하지 못할 것입니다."

(1991년 조지 부시와 사담 후세인에게 보낸 서한)

"기도는 신앙을, 신앙은 사랑을,

그리고 사랑은 가난한 사람을 위한 봉사를 낳습니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줄 수 있는 것은 적습니다.

가난은 놀라운 선물이며 우리에게 자유를 줍니다.

('사랑의 등불 마더 데레사'에서)

"나는 전쟁터에 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기근과 주검은 봤습니다. 나는 전쟁을 하면서

 사람들이 무엇을 느낄 것인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지만 이해가 안됩니다.

그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1982년 이스라엘군과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이 싸우는 베이루트 전장에서)

"현대인들은 지나치게 서두르는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내 줄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부모가 자녀에게,

그리고 배우자끼리도 서로에게 시간을 내기가 힘든 모양입니다.

 세계 평화는 가정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가 하는 말 자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교만은 모든 것을 파괴시킵니다.

예수님을 따르려거든 진정 온유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나라를 3번이나 방문하였을때....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잊지 않고

꼭 버려진 이들을 만나 위로하고 기도했던 데레사 수녀였습니다

 

가,난,한,사,람,안,에,계,신,예,수,님,

오늘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 일종의 유행처럼 번지는데,
불행하게도 가난한 사람과 대화하는 것은 유행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물질적인 가난뿐 아니라

정신적인 상처까지 모두 구원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하나될 때 비로소 그들의 삶에 하느님을 모셔다 드릴 수 있고,
그들 또한 하느님에게 나아가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형제 자매들의 굶주림을

채워 주기 위해서는 가진 것을 모두 나누어야 합니다.
그들의 처지와 공감할 수 있을 때까지.

 

우리는 너무나 바빠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고 미소 지을 시간조차 없는가 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고 있습니까?

 

가난한 사람 중에 가장 가난한 이는 모두 예수님입니다.
그는 고통받는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선 예수님인 痼都求?


<사랑의 선교회>의 수도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줄 때마다
그것이 진정 예수님을 돕는 일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음식과 옷은 가난한 이들은 먹고 입는 것과 똑같아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나는 문명화되고 부유한 서구의 교회 활동이,
캘커타나 사우스 예멘처럼 가난한 지역의 사람들에게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추위를 막을 옷 한 벌,
허기를 달랠 밥 한 그릇이면 족하지만

서구 사회에서는 이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어렵습니다.
문제가 사람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마더데레사 말씀집에서)


 

2018.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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