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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루이14세
비공개 조회수 8,288 작성일2016.10.10
루이14세에 대하여 요약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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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수
친구이자 생명의 은인인 고복실이라는 사람과 동거 중이며 한때 잘나가던 회사의 회장 아들이지만 교통사고로 안타깝게 기억을 잃었습니다

2016.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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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a****
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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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4 (1638 ~ 1715 )

 

1638 9 5일 테어나 5세가 채 안 된 나이에 왕위를 계승, 추기경 쥘 마자랭을 재상으로 임명하여 그의 보필을 받았다.

 

9세가 되던 해, 프랑스의 대귀족들과 파리 고등법원이 왕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킨다. '프롱드의 난'으로 알려진 이 내란이 1653년 마자랭에 의해 진압되기까지 루이 14세는 모후와 함께 각지를 유랑하는 치욕을 겪는다.

 

 

1661년 재상 쥘 마자랭이 죽자, 루이 14세는 재상제를 폐지하고 친정(親政)을 선언한다. 자신이 직접 고문관 회의를 주재하였고, 대신들에게는 자신의 결정사항을 시행하게 하는 역할만을 맡겼다. 정부의 임시특사를 적극 파견, 각지에 상주시킴으로써 체계적인 관료 조직망을 전국에 확대시켰다.

 

루이 14세는 재위 초기에는 콜베르, 루부아, 리온 같은 뛰어난 신하들의 보필을 받았다. 특히 재무총감으로 기용되었던 콜베르는 중상주의 정책을 채택, 보호관세를 통한 국가의 이익증대, 산업 육성, 식민지 개발을 추진하여 프랑스를 강국으로 만드는 데 일조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신하들과의 불화가 생겼고, 결국 그 모든 일들을 왕이 직접 담당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귀족들을 자신의 궁전에 모아놓고 방탕한 생활을 하도록 조장했다 그때부터 귀족은 프랑스 정치에서 더 이상 중요한 요소가 되지 못했으며 이는 나라를 나약하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절대적인 군주로서 그 입지를 다진 루이 14세는 이후 유럽의 열강을 상대로 큰 전쟁을 여러 번 일으켰다. 플랑드르전쟁, 네덜란드전쟁, 아우크스부르크동맹, 에스파냐 계승전쟁이 바로 그것인데, 이 전쟁을 통해서 루이 14세는 유럽의 지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베르사유 궁전을 짓고 코르네유, 라신, 몰리에르 등의 거장을 적극 지원하여 고전주의 문학의 전성기를 이루어내기도 했다. 이로써 프랑스는 유럽의 정치적, 문화적 중심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왕권은 신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라는 '왕권신수설'을 굳게 믿고 있었던 그는 종교 역시 하나로 통일되어야 한다고 주장, 신교도를 대대적으로 박해하였다. 이 때문에 상공업에 종사하던 많은 신교도들이 신앙을 자유를 찾아 프랑스를 떠나갔고, 이는 프랑스의 국력을 쇠퇴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베르사유 궁전을 중심으로 한 귀족들의 방탕한 생활, 계속되는 전쟁으로 인한 국력의 쇠퇴, 게다가 낭트칙령의 폐지로 인한 상공업자들의 대거 이탈이라는 악재가 겹치고 있는 상황에서 루이 14세는 1715 77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그는 프랑스가 유럽 최강국이 되도록 만든 국왕이라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그가 저지른 여러 가지 실책은 결국 약 80년 후에 발생한 프랑스 대혁명의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2016.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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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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