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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진주정씨 무슨파인지 몇대손인지 알고싶습니다.
ba**** 조회수 2,585 작성일2013.01.18

 안녕하세요

 

저희 아버지께서 저에게 진주정씨 계당파 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계당파라고 인터넷에 검색해보면 나오는게 없더라고요

정확한 본과 몇대손인지 알고싶어서요

 

저희 친할아버지는 정x온  온자 돌림이셨구

아버지는 정휘x  휘자 돌림입니다.

그리고 저는  정x환 에 환자돌림이구요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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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y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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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1:1 질문에 답변을 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희 아버지께서 저에게 진주정씨 계당파 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계당파라고 인터넷에 검색해보면 나오는게 없더라고요

정확한 본과 몇대손인지 알고싶어서요

 

저희 친할아버지는 정x온  온자 돌림이셨구

아버지는 정휘x  휘자 돌림입니다.

그리고 저는  정x환 에 환자돌림이구요

궁금합니다.

 

답변 : 진주정씨 계당파는 존재하지 않으니 있다면 분파된 지파일것입니다. 항렬표와 대조해 보았으나 조부님 온(온)자를 위주해서 일치하여 이어지는 돌림자가 없는 것으로 보아 돌림자를 쓰시지 않고 존함을 지으신 것 같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증조부님, 고주부님의 존함도 한번 대조해 보시기 바랍니다. 존함을 잘 모르실 경우에는 제적등본을 발부받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진주 진양 정씨의 자긍심을 가지시고 꼭 찾으시기 바랍니다.

 

한글과 한문을 병용합니다. 이유는 한문은 여러자로 형성되어 있고 그 뜻이 다양합니다. 이점 양해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해당 항렬자에는 녹색글씨로 표기 합니다.

 

아래는 진주정씨에 대한 입니다.

 

 

 

진주 진양(晋州 晋陽鄭氏) ()하여

 

1. 시조:(鄭藝).(鄭莊).자우(鄭子友).(鄭櫶)

2. 유래 :

 

진주(晋州)는 경상남도(慶尙南道) 남서(南西)쪽에 위치(位置)한 지명(地名)으로, 본래(本來) 백제(百濟)의 거열성인데 신라 문무왕(文武王)때 거열주라 하였고, 757년 강주로 고쳤다가 뒤에 청주로 개칭(改稱)되었다.

995(성종 14)진주(晋州)라는 명칭(名稱)으로 불리게 된 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진양도호부가 되기도 하였으나, 그 후 여러 변천(變遷)을 거쳐 1949년에 진주(晋州市)가 되었다. 별호(別號)로 진양 등으로 불리었다.

 

예로부터 <진주8(晋州八鄭)>으로 불리어 졌던 진주정씨(晋州鄭氏)는 동성동본(同姓同本)이면서도 세계(世系)를 달리하는 여러 계통(系統)으로 갈라져서 계대(系代)를 이어왔다.

 

[조선족통보]를 비롯한 제문헌(諸文獻)진주정씨(晋州鄭氏) 12파가 있는 것으로 기록(記錄)되어 있으나 (正確)한 소목은 밝힐 수 없고 현존(現存)하는 계파(系派) 중에서 비교적(比較的) 널리 알려진 다음 5파로 대별(大別)해서 상고(詳考)한다.

 

첫째 고려(高麗) 통합(統合) 삼한벽상(三韓壁上) 공신(功臣)으로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낸 영절공(英節公) (鄭藝)의 계통(系統), 그 후()의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문익공(文翼公) 시양(鄭時陽)을 일세조(一世祖)로 받들고 있으며, 시양(時陽) 7세손(世孫) ()가 판도좌랑과 좌사간을 역임(歷任)하고 진양부원군에 봉해져서 가세를 일으켰고, 그의 후손(後孫) 을보(乙輔)당문학과 도감제조를 지내고 청천군에 봉해졌으며, 공민왕(恭愍王)때 찬성사에 올랐다

 

한편 숭대부로 찬성사를 역임했던 신중(臣重)의 아들 이오(以吾)는 조선 태종 때의 명신으로 찬성과 대제학을 역임했고, 그의 아들 4형제 중 장남 []은 세종과 문종 조에 걸쳐 조의 중신으로 많은 치적을 남겼고, 병조판서를 거쳐 우의에 올랐으나 계유난으로 수양대군의 반대파로 몰려 사사(賜死)되었다.

[일월록(日月錄)]에 의하면 그는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왕위(王位) 찬탈(簒奪) 음모(陰謀)가 무르익을 때 체찰사로서 영남을 순회하고 충주에 이르자 김종서와 황보인이 죽음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신을 잡아 죽이려 관원을 보낼 것이라고 믿고 용안역을 지나가는데 관원이 달려오며 전지(傳旨)가 있다고 외쳤다. 분은 말에서 내려 재배하며 말하기를 "노상에서 형을 받는 것은 상스럽지 못하니 역관으로 갈 수 없느냐"고 하자, 관원이 말하기를 "나는 다만 명을 받아서, 공을 압송하는 것이요"하였다.

 

십여 일이 걸려 유배지인 낙안에 내려가, 항상 조상의 신주를 받들어 제사 지냈는데

하루 저녁은 자다가 일어나서 함께 있던 중 탄선(坦禪)에게 "네가 밥 한 그릇을 하게 지어라. 내가 우리 조상에게 제사 지내겠다"하고 제사를 지낸 뒤에 신주를 모두 불에 태웠는데 조금 후에 관원이 와서 사사(賜死) 하였다고 한다.

 

[장빈호찬(長貧胡撰)] 에는 다음과 같이 당시의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관원이 형을 집행하려고 왔을 때 분은 목욕을 하고 관대를 갖추어 조상의 신주에 재배하고 신주를 태운 후 관대를 벗고 우장옷을 입고 수건을 쓰고 그이 아내에게 영결(永訣)하니 아내가 붙들고 통곡을 하자 그는 달래며 "의 명령이니 항거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죽은 뒤에 일은 그대가 다스리라."하고는 죽음에 임하여 감형관이 형을 집행하려고 목을 얽을 때 "죽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명분이 다르다.

내가 만일 두 마음이 있다면 죽은 뒤에 맑은 하늘이 그대로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이상이 있을 것이다"하고 형을 받아 죽으니, 홀연히 구름이 모여 들고 비가 쏟아져서 감형관이 우산을 받고 성안에 들어왔다고 한다.

 

둘째, 고려조(高麗朝) 호장(戶長)을 지낸 자우(鄭子友)의 후손(後孫)에서는 그의 6세손 신열(臣烈)이 고려(高麗) 현종때 유일로 천거되어 여러 청환직을 거친 후 병부상서에 올라 거란의 침입(侵入)을 격퇴시킨 공으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올라 진양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선주지사 임덕(任德)의 아들 유()는 아우 손()과 함께 효행으로 이름을 떨쳤다.

 

공민왕(恭愍王)때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판부사(判府事)가 되었던 천익(千益)은 당시(當時)의 난(亂政)을 개탄(慨歎)하여 벼슬에서 물러나서 향리로 돌다가 퇴헌(退軒亭)을 짓고 자적하다가 사위인 문익점(文益漸)이 원()나라에서 목화를 가져왔으므로 이를 시배(始培)하여 <물레> <>를 창안(創案)하는데 결(決定的)인 역할(役割)을 하였다.

 

셋째, 대부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추증되었던 장()을 파조(派祖)로 하는 계통(系統)에서는 세종조(世宗朝)의 명신인 척()이 뛰어났다. ()은 교서관 자를 거쳐 봉상시 주부와 감찰을 지내고 판한성부사. 수문전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으며, 1463(세조 9) 양성지와 함께 <동국지도(東國地圖)>를 찬진했다.

 

척의 아들 성근은 천성이 굳세고 곧아서 흔들림이 없었다고 한다.

[소문쇄록]에 의하면 그가 성종때 대마도에 사신으로 갔을 때 일이다 도주(島主)의 집앞에 이르면 도주가 문밖에 나와서 조선의 왕명을 받게끔 되어 있었는데도 도주가 문밖에 나오기를 꺼려하였다, 이에 성근은 밖에서 호상에 걸터앉아 통역을 시켜 두번 세번 독촉하여 왕명을 의식대로 공경히 받게 하였다고 한다.

 

효성이 지극했던 성근은 연산군의 단상법(短喪法)을 어기고 친상에 3년상을 치렀고 또 성종이 승하하였을 때에도 3년 상을 행하니 연산군의 비위에 거슬려 갑사사화 때 억울하게 죽음을 당했다.

 

그의 아들로 승문원 박사로 있던 주신(舟臣)이 아버지의 죽음을 슬피하여 음식을 입에 대지 않다가 굶어 죽었으며, 주신의 아우 매신(梅臣)과 매신의 아들 원린(元麟). 원기(元麒)와 원린의 아들 효성(孝成)이 모두 효행이 뛰어나 4 (四代) 6(六名)( )이 세워졌다.

임진왜란 때 진주성이 함락되자 80노모를 등에 업고 전남 광양군 골약면 마동리로 피난했다가 중동리에 착했던 대유(大有)는 효성이 지극하여 도관찰사로부터 표창을 받았으며, 그의 아들 5형제의 후손들이 현재 광양지방에 집중세거하면서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시켜 가문의 중흥을 이루었다.

 

넷째, 문하시중(門下侍中) 평장사(平章事)로 진산부원군에 봉해졌던 (鄭 櫶)의 계통에서는 그의 손자 온()이 청맹(靑盲)으로 유명했다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지자 대사간을 역임했던 온()은 눈뜬장님을 가장하고 지리산 청학동에 숨어 살았는데, 조선이 개국된 후 태조가 수차례 벼슬을 내려 불렀으나 끝까지 거절하고 매서운 절개를 지켰다.

 

태종이 사람을 보내서 칼로 눈을 찌르는 흉내를 내어 보았으나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고 한다.

온의 아우로 고려 말에 감찰어사를 지낸 택() 10세손 경세(經世)는 서애 류성룡의 문인으로 퇴계 이황의 학통을 계승하여 주자학의 거두로서 이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내며 성리학자인 사계 김장생과 함께 우리나라 예학(禮學)의 금자탑을 세웠다.

 

다섯째, 고려 때 첨(僉正)을 지낸 중공(鄭仲恭)을 파조(派祖)로 하는 계통(系統)에서는 그의 15세손(世孫) 기룡(起龍)이 초명(初名)인 무수(茂壽)를 선조의 명()을 받아 기룡(起龍)으로 개명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별장에 올랐던 기룡은 거창과 금산 싸움에서 무공을 세웠고, 곤양수성장이 되어 왜군의 호남 진출을 방어했으며 상주 판관으로 상주성을 탈환한 후이어 성주, 합천, 초계, 의령, 고령 등지의 여러 성()을 탈환하는데 무명을 떨쳤으나 경상우도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로 통영 진중에서 일생을 마쳤다.

진양는 동성동본(同姓同本)이면서도 각각(各各) 시조(始祖)를 달리하는 8개파가 있어 흔히 진양(현재의 진주) 8이라고들 일컫는다.

원조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하는 신라(新羅) 6촌장 중 한 사람인 자산진부의 촌장 지백호(智伯虎)이며, 그의 후대에서 의 분관, 분파가 이루어졌다.

 

충장공파(忠莊公派), 은열공파(殷烈公派), 공대공파(恭戴公派), 어사공파(御史公派)등은 진양 4대 봉우리로, 현재(現在)의 진양는 이들 후손(後孫)들이 주류을 형성하고 있다.

 

 진주정씨 본관지

진주 진양은 고려시대에 선조들이 살아오던 곳이다.

 

 

3. 진주정씨 가문의 번영

 

고려(高麗) 때 양관대제학을 지낸 시양(鄭時陽),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역임(歷任)신열(鄭臣烈), 판도판서인 임덕(鄭任德), 예의판서의 (鄭愈),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鄭需), 평장사를 지낸 , 찬성사를 지낸 을보(鄭乙輔) 등이 있다.

공민왕(恭愍王) 때 전객령(典客令)을 지내고, 중국(中國)에서 목화를 들여온 문익점(文益漸)의 장인으로 목화종자를 재배하고 보급하는데 큰 공적을 남긴 천익(鄭天益)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조선시대(朝鮮時代)에 상신 1(그의 아들이 지산(鄭之産)이다), 대제학 2, 문과 급제자 59명과 (鄭陟), 성근(鄭誠謹) 등의 청백리를 배출해냈다.

조선(朝鮮) 인조(仁祖) 때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경세(鄭經世), 서애 유성룡(柳成龍)의 수제자였던 그는 나이 스물셋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고 호당(湖堂)에 뽑혔던 수재.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공을 세웠고 성리학(性理學) 뿐만아니라 예학에도 밝아 김장생(金長生)과 함께 예학파를 형성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의 명장 기용장군(鄭起龍將軍)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상주성 탈환, 유재란 때의 성주, 초계, 의령성 탈환 전투에도 눈부신 전공을 세웠다. 광해군 9년 삼도통제사 겸 경상우도수군절도사에 올라 남해안을 방어하던 중 통영진중에서 숨졌다.

 

 

진주정씨 계파

 

- 충장공파(忠莊公派) : 고려(高麗)의 건국공신(建國功臣)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평장사(平章事)를 지낸 (鄭藝)를 시조(始祖)로 한다.

- 은열공파(殷烈公派) : 호장을 지낸 자우(鄭子友)를 시조(始祖)로 한다.

- 공대공파(恭戴公派) : 고려말(高麗末) 첨지중추원사(通政僉知中樞院事) 를 지낸 (鄭莊)을 시조(始祖)로 한다.

- 공파(僉政公派) : 고려 때 검을 지낸 중공(鄭仲恭)을 시조(始祖)로 한다.

- 우곡공파(愚谷公派) : 고려 때 대사헌을 지낸 (鄭溫)을 시조로 한다. (鄭櫶) 계통

- 어사공파(御史公派) : 고려 때 감찰어사를 지낸 (鄭澤)을 시조로 한다. (鄭櫶) 계통

- 지후공파(祗侯公派) : 고려 때 지후를 지낸 (鄭侁)을 시조로 한다.

- 내부사공파(內府事公派) : 고려 때 판내부사를 지낸 안교(鄭安校)를 시조로 한다.

 

 

5. 진주정씨 집성촌

 

- 강원도 홍천군 서면 고곡리

- 경남 진양군 사봉면 사곡리

- 전남 화순군 북면 서유리

- 경남 남해군 서면 포리

- 전남 영광군 군서면 덕산리

- 경남 진양군 보양면 이천리

- 전남 광양군 골약면 중동리

- 경남 진양군 사봉면 마성리

- 전북 고창군 무장면 덕임리

 

 

6.진주정씨  항렬표

 

헌계 (櫶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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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계 (莊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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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계 (藝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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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계 (需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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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우계 (子友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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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계 (仲恭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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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계 (澤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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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진주정씨 인구수

 

2000년에는 총 74,777가구 238,505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8. 진주정씨 인터넷 사이트

 

진주 지후공파 - 판관공파 제25,26,27세손 커뮤니티

cafe.naver.com/thejeongs/

진주정씨공대공파 종회

진주 공대공파 종회종친님들 종통바로세우기

cafe.naver.com/ilam2033/

진주정씨 봉전 종친회

진주정씨 수사공파 봉전부락 출신 가족모임. (봉전부락: 경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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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우곡파 우호종가 국천가

오늘 하루도 행복 하세요. 조상의 얼을 드높이고 고향을 생각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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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정씨 종친회

! 나는자랑스런진주정씨 ! 자예자, 충장공파 후손들의 커뮤니티

cafe.daum.net/jinjujeongi/

 

끝으로 님의 건강과 행복이 충만 하시기를 빌겠습니다.

 

 

 

2013.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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