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VER

질문 조선 초기
pret**** 조회수 2,256 작성일2018.04.08
혹시 조선 초기 좀 알려주실수 있으신가요??
사회 숙제라서요
프로필 사진

답변자님,

정보를 공유해 주세요.

3 개 답변
1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탈퇴한 사용자 답변
14세기 말 당시 고려는, 안으로는 기존의 귀족 세력인 권문세족과 그에 반발하는 신진 사대부들이 대립하여 정치가 혼란하였고, 밖으로는 홍건적과 왜구의 약탈과 원나라에서 명나라로 이어지는 원·명 교체기의 혼란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 무렵 고려의 무신인 이성계는 왜구, 홍건적, 몽골족, 여진족의 침입을 여러 차례 물리치고 명성을 얻어 중앙 정계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 무렵 고려 조정은 철령위 문제로 밖으로는 명과, 안으로는 친원파와 친명파가 대립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고려는 요동을 정벌하기 위해 최영을 중심으로 요동 정벌군을 편성하였다. 이때 우군 도통사를 맡았던 이성계(태조)는 좌군 도통사 조민수와 상의하여 평양에 있던 최영장군에게 회군을 거듭 청했다. 그러나 회군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성계와 조민수는 1388년 6월 24일(음력 5월 20일) 군사를 수도 개경으로 돌려 회군을 일으켰다 (위화도 회군).

이성계는 회군으로 수도 개경에 있는 모든 정권을 잡아 최영 세력을 숙청하고 우왕을 “신돈의 아들이다.”라고 폐위한 뒤 창왕을 왕위에 올렸다. 이듬해 공양왕을 왕위에 올렸다. 그리고 사전 개혁(私田改革)을 단행하여 과전법(科田法)을 공포하였다. 전제 개혁으로 이성계·정도전·조준 등은 막대한 과전을 받게 되었으나, 권문세족들은 농장을 몰수 당함으로써 경제적 토대가 붕괴했다. 한편 공전(公田)의 증대는 국가의 수입을 증대시켜 새로운 왕조 조선의 경제적 기초를 확립게 했다.

1392년에는 이성계의 5남인 이방원이 정몽주를 개경 선죽교에서 척살(斥殺)하고, 그 해 8월 5일(음력 7월 17일) 개경의 수창궁(壽昌宮)에서 공양왕에게 왕위를 받은 이성계가 마침내 조선을 건국했다.[14]

이성계는 건국 후 1년이 되어서야 국호를 바꾸었다. 1393년 3월 27일(음력 2월 15일)에는 나라의 이름을 고려에서 조선(朝鮮)으로 고치고 1394년 음력 1월에 한성부로 천도했다. 태조는 고려 때에 큰 폐단이 되었던 불교 대신에 유교를 존중하여 이를 정치·교육의 근본이념으로 삼으니, 불교는 점점 쇠퇴하여 천대를 받고, 유교는 극진한 대우를 받게 되었다.

1,2차 왕자의 난

태조는 8번째이자 막내 왕자인 의안대군 방석을 왕세자로 삼았으나 개국 당시 공이 컸던 5번째 왕자 정안대군 이방원은 이에 불만을 품고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1398년 이방원은 사병을 동원해 난을 일으켜 왕세자 방석과 7번째 왕자 무안대군 방번, 그리고 왕세자를 지지했던 정도전과 그의 일파를 무참히 살해했다. 그리고 당시 생존해 있던 태조의 아들 중 가장 위인 2번째 왕자 영안대군 이방과에게 왕세자 자리를 양보하였고 그해 음력 9월 태조는 왕위를 이방과에게 물려주었고, 이방과는 조선의 임금인 정종이 되었다.

그러나 넷째 왕자 회안대군 방간은 제1차 왕자의 난에서 불만을 품은 박포와 공모하여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방원의 군사와 개경에서 맞붙어 패했으므로 방간은 유배되고 박포는 처형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종은 이방원을 왕세제로 삼고 음력 11월에 양위하여 태종이 왕위에 등극하였다

외교면에서는 명(明)에 대해서는 사대정책(事大政策)을 썼다. 특히 국호를 정하는 일에서도 내부적으로 국호를 정했으나, 명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화령(和寧)과 조선(朝鮮) 중에서 승인을 받았던 일이 있다. 따라서 서로 사신의 내왕이 잦았으며, 이를 통하여 조공(朝貢)·회사(回賜) 형식의 국가 간의 무역이 행해졌다.

조선의 국왕들은 명에 대한 사대 관계를 형성, 고려말부터 종주국으로 받들어오던 명에 형식적으로 제후, 속국의 예를 취했으나 이는 형식적인 것이었다. 1400년 이후 정식 국왕으로 책봉된 이후로도 조선의 역대 국왕들은 즉위 직후 명에 책봉 고명사를 파견하여 책봉 승인을 받아왔고, 국왕의 재위 중 왕후의 사망과 계비를 맞이할 때, 세자를 책봉할 때, 세자빈을 간택, 책봉할 때 역시 명에 책봉 고명사를 보내 승인을 받아온다.

조선에서는 매년 명나라에 진하사, 문안사, 동지사 등을 보냈고 태종 때부터 선조 때까지는 종계변무사를 파견했다. 개국 초기 정도전의 요동정벌 문제로 명나라는 조선의 국왕을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 국왕 책봉고명사신이 도착하면 권지고려국사 혹은 권지조선국사라는 임명장을 내려주었다. 조선 국왕을 정식 국왕으로 승인한 것은 1401년(태종 1년) 태종 때였다.

또 다른 주변 국가인 일본과 여진에게는 교린 정책(交鄰政策)을 취했다. 이 두 정책은 조선의 근본정책으로서 계속 계승되었다.

제도의 정비와 문화 융성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에서 승리해서 왕위에 오른 태종은 왕권을 강화하고 임금 중심의 통치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관료 제도를 정비했다. 태종은 사병을 혁파했으며 양전 사업과 호구 조사를 통해, 조세 제도와 호적 제도를 개혁했다. 그리고 도평의사사를 폐지하고 의정부를 설치했고, 또한, 왕실 외척과 공신 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해서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시켜 정치를 안정시켰다. 또 언론 기관인 사간원을 독립시켜 신하들을 견제하게 했다. 또한, 지금의 8도 정책도 태종 때부터 자리 잡은 정책이다.

안정을 기반으로 등극한 세종(세종대왕)은 학문·군사·과학·문화 등 모든 면에서 큰 업적을 이룩했고 정치는 안정되어갔다. 이 시기에는 주자학이 국가 이데올로기로 정착했으며, 고려 말에 들여온 면화가 보급되어갔다. 또 국방을 안정시킬 목적으로 화포 제작 및 조선 기술을 발전시켰으며, 북방 지역인 4군 6진을 개척해서 국경선을 확정시켰고, 남으로는 대마도 정벌을 통하여 일본 왜구들의 약탈을 방지했다. 또한, 궁중 안에 정책 연구 기관인 집현전을 설치하여 학문을 진흥했다. 또한,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측우기와 금속활자를 개량하였으며 아악을 정리했다. 개량된 금속활자로 여러 가지 책을 간행하기도 하였으며, 의서인《향약집성방》을 통해서 의료 관계 개선이 집약적으로 이뤄지게 된다.

세종의 맏아들 문종이 짧은 치세 뒤에 서거하고 문종의 아들 단종이 뒤를 이었으나 어린 나이에 보위는 쉽지 않아 병권을 잡은 김종서가 국사를 봤으나 세종의 차남 수양대군이 정난(계유정난)을 일으켜 조정대신들을 살해하고 권력을 장악하여 세조가 되었다. 세조는 세종이 채택한 의정부 서사제를 폐지하고, 태종이 주창한 육조 직계제를 부활시켜 왕권을 강화했다. 이 과정에서 사육신을 비롯한 많은 신하가 숙청당하고 많은 학자를 양성하였던 집현전을 폐지하였다. 세조는 태종처럼 신하의 권력(신권)을 제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호패법을 다시 복원하고, 《동국통감》,《국조보감》등을 만들기도 했다.

세조의 손자인 성종은 개국 이후의 문물제도를 정비하였다. 성리학을 기반으로 유학을 장려하여 사라진 집현전의 기능을 담당한 홍문관을 설치하고, 수많은 역사책을 편찬했으며, 세조 때부터 이어온 법전 편찬 사업이었던《경국대전》의 편찬을 완성했다. 성종은《경국대전》의 편찬을 반포함으로써 조선 사회의 기본 통치 방향과 이념을 제시했다. 또한, 영남의 사림파를 등용하여 공신 세력인 훈구파를 견제했다. 이로써 조선 왕조의 통치 체제가 확립되었다.

15세기 말부터 지방의 사림 세력이 정계에서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연산군의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대량숙청 되지만 사림파를 중심으로 일어난 중종반정을 통해 중앙 정계에 대거 진출했다. 그러나 기묘사화로 대부분 숙청되었고 인종 때 잠시 등용되었지만, 명종 을사사화 로 훈구,외척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큰 타격을 받았다. 선조 때 비로소 훈구파를 몰아내고 조정의 실권을 잡았다. 이때부터 사림은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붕당정치가 시작되었다.

시대가 내려오면서 제도의 결함이 드러났다. 특히 토지제도의 문란으로, 훈구 재상의 대토지 소유는 토지분배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신진 사류의 불만을 사게 되어, 여러 번에 걸쳐 사화라는 참극을 빚어냈다.

처음에는 신진 사림세력들이 빈번히 화(사화)를 당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지방에 내려가 학문에만 열중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선조 때에는 이들을 등용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사림들이 승리를 거두었다. 그 이후 사림들 간 자기 일파(일당 전제화)만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대대로 대립하니, 이를 당쟁이라 한다. 이렇게 되자 처음에는 지방 자제들을 교육하기 위해 세워진 서원이, 나중에는 모두 넓은 토지를 소유하여 지방 세력의 중심을 이루고 끈덕진 당쟁의 기반으로 변질 되는 등 심한 폐단을 나타내었다.

이어 16세기~17세기에 주변국인 일본, 청과 치른 전쟁(임진왜란, 병자호란)으로 인하여 국토는 황폐해지고, 국가 재정은 고갈되었으며, 백성은 비참한 생활을 강요당했다. 이후 청나라에 당한 수치를 씻고 명나라가 도와준 은혜를 보답하자 하여 북벌론이 대두했으나, 실천에 옮겨지지는 못했고, 청나라를 본받자는 북학론이 대두했다.

정치 구도의 변화

중종은 1506년 음력 9월 2일, 연산군의 폭정에 반발한 성희안(成希顔), 박원종(朴元宗), 유순정(柳順汀)등이 일으킨 중종반정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다. 중종은 왕권 강화보다는 왕권의 안정을 이루는 데 주력하였는데, 그 방책으로 조광조 등 갑자사화로 밀려났던 사림파를 중심으로 철저한 유교적 개혁정치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과격한 조광조의 개혁 정책은 보수적인 기득권층인 훈구파 세력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을 뿐 아니라 그를 절대적으로 신임하고 지지하던 중종마저도 차츰 싫증을 내게 되었다. 결국, 중종은 1519년 조광조를 비롯한 다수 사림들을 실각시켰고, 조광조와 사림파는 죽음을 당하게 된다(기묘사화). 그 다음에는 외척 세력이 새로이 등장하여 중종의 치세 중기와 후기에는 크고 작은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 정국이 편안할 날이 없었다.

1545년, 명종이 조선 13대 임금으로 등극하자 어머니 문정왕후가 대왕대비로서 수렴청정했다. 이에 명종을 지지하는 소윤파가 인종을 지지했던 대윤파를 공격하면서 을사사화가 벌어졌다. 약 12년간의 섭정으로 정국은 상당히 문란해졌다.

1567년 왕위에 오른 선조는 이황, 이이 등 사림을 대거 중용하였다. 선조는 사림을 통해 자신의 취약한 권력 기반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또한, 기묘사화 때 당쟁으로 억울하게 희생된 조광조를 비롯한 수많은 유학자를 복권했으며, 훈구대신인 남곤, 윤원형 등을 대역죄로 단죄하여 관작을 추탈하고 삭훈하여 민심을 안정시켰다. 그러나 후에 사림이 김효원(金孝元)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모인 동인과 심의겸(沈義謙)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모인 서인으로 분리되어 붕당이 형성되자, 선조는 어느 한 쪽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하였고, 이에 따라 정국이 단번에 교체되는 일이 잦았다.

거듭되는 사화 속에서도 사림들은 서원과 향약을 토대로 발전하여 갔으며, 드디어 선조 때에는 재차 정치무대에 등장하였다. 그러나 이들 속에서 또다시 당쟁이 일어나게 되어 정쟁은 파노라마처럼 되풀이되었다. 당쟁의 발단은 심의겸과 김효원 양파의 전랑직(詮郞職)을 에워싼 암투에서 비롯되었다.

경제 체제의 해이

양반 관리들은 국가로부터 과전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공신전·별사전(別賜田)을 받았는데, 이러한 것들은 모두 세습되었다. 양반 관리들은 또 매입(買入)·겸병(兼倂)·개간 등의 각종 방법으로 그들의 소유지를 확대했다. 특히 비옥한 삼남 지방의 넓은 공전(公田)을 침식하였다. 직전법조차 폐지되자 그들의 토지에 대한 욕구는 농장(農莊)의 확대를 가져왔고, 토지를 잃고 유망(流亡)하는 농민의 증가는 점차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었다.

한편 양반 관리들의 사치를 위한 지방 특산물과 수공업 제품의 공납(貢納)이나 진상 또한 농민들의 커다란 고통이었다. 방납까지 생겨 그 피해는 극심해졌다. 이런 폐단을 개혁하기 위하여 사림의 이이(李珥)와 유성룡은 수미법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채용되지 않았다.

환곡 제도로 정부는 농민을 상대로 일종의 고리대를 하기도 했다. 환곡은 원래 의창이 담당하는 일이었으나 의창이 제구실을 다하지 못하자 상평창이 이를 맡게 되었다. 이리하여 원래 농민 진휼 정책(賑恤政策)에서 발단했던 환곡은 점차 변질되었다.

특수직에 종사하는 직역(職役) 외에 양인에게 부과되는 신역(身役)은 주로 군역이었다. 군역 또한 신역의 포납화(布納化) 경향을 촉진하여 제도가 붕괴되었다. 초기에 군역의 대가로 바치는 포(布)는 상당히 고가(高價)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수포 대역제(收布代役制)가 관행이 되면서 포납은 정남(丁男)에 대한 인두세(人頭稅)와 같이 되었으며, 평가도 절하되어 갔다. 그리하여 그 공정액이 당시 전세(田稅)의 약 3배에 해당하여 양인에게는 극히 과중한 부담이 되었다.

이와 같은 과정을 겪으면서 원래의 신역은 붕괴되었다. 그 결과로 농민들의 생활은 지극히 불안정해졌다. 많은 농민이 유민(流民)이 되어 농촌은 황폐하여 갔으며, 각지에는 도적의 무리가 횡행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임꺽정이 대표적이다.

2018.04.09.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
2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그랜드투어
고수
본인 입력 포함 정보

1393년에는 국명을 명으로부터 선택받아 조선으로 고치고 1394년에는 개경의 민심이 안 좋아 한양으로 천도하여 여러 개혁을 단행했다. 태조는 재위기간 동안 개국공신에게 권력을 거의 다 주어 특별히

한 업적은 없었다. 그러던 중 개국공신들이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못 본 이방원은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정권을 장악하다가, 1400년 정종의 선위로 집권했다. 태종 이방원은 왕권을 강화하고 임금 중심의 통치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관료 제도를 정비했다.

세종대왕은 학문 · 군사 · 과학 · 문화 등 모든 면에서 큰 업적을 이룩하였고 정치는 안정되어갔다. 세조는 태종처럼 신하의 권력을 제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호패법을 다시 복원하고, 《동국통감》, 《국조보감》 등을 만들기도 하였다. 성종은 개국 이후의 문물제도를 정비하였다. 15세기말부터 지방의 사림 세력이 정계에서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이때 우군 도통사를 맡았던 이성계는 좌군 도통사 조민수와 상의하여 평양에 있던 최영장군에게 회군을 거듭 청했다. 그러나 회군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성계와 조민수는 1388년 6월 24일 군사를 수도 개경으로 돌려 회군을 일으켰다 위화도 회군

이성계는 회군으로 수도 개경에 있는 모든 정권을 잡아 최영 세력을 숙청하고 우왕을 “신돈의 아들이다.”라고 폐위한 뒤 창왕을 왕위에 올렸다. 이듬해 공양왕을 왕위에 올렸다. 그리고 사전 개혁을 단행하여 과전법을 공포하였다. 

1392년에는 이성계의 5남인 이방원이 정몽주를 개경 선죽교에서 척살하고, 그 해 8월 5일 개경의 수창궁에서 공양왕에게 왕위를 받은 이성계가 마침내 조선을 건국했다.

이성계는 건국 후 1년이 되어서야 국호를 바꾸었다. 1393년3월 27일에는 나라의 이름을 고려에서 조선으로 바꾸었다

1,2차 왕자의 난

태조는 8번째이자 막내 왕자인 의안대인방석을 왕세자로 삼았으나 개국 당시 공이 컸던 5번째 왕자 정안대군 이방원은 이에 불만을 품고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1398년 이방원은 사병을 동원해 난을 일으켜 왕세자 방석과 7번째 왕자 무안대군 방번, 그리고 왕세자를 지지했던 정도전과 그의 일파를 무참히 살해했다. 그리고 당시 생존해 있던 태조의 아들 중 가장 위인 2번째 왕자 영안대군 이방과에게 왕세자 자리를 양보하였고 그해 음력 9월 태조는 왕위를 이방과에게 물려주었고, 이방과는 조선의 임금인 정종

이 되었다.

그러나 넷째 왕자 회안대군 방간은 제1차 왕자의 난에서 불만을 품은 박포와 공모하여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방원의 군사와 개경에서 맞붙어 패했으므로 방간은 유배되고 박포는 처형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종은 이방원을 왕세제로 삼고 음력 11월에 양위하여 태종이 왕위에 등극하였다.

등 여러가지 사건이 있었다고 합니다~

관련어가 대마도이니만큼 대마도의 관광지도와 여행일정표를 올려드릴테니 참고하셔서 즐거운 여행이 되시길 바랍니다~^&^


 1일차
부  산










히타카츠









대아고속
오션플라워

전용버스

07:30







09:30
10:40

부산 국제 여객 터미널 3층 대아고속 카운터 앞 집결
출국수속 후 오션플라워 탑승
  

부산항 출항 (오션플라워 - 소요시간 1시간 10분)
대마도 히타카츠항 도착 후 입국수속

① 대한제국의 운명을 가른 동북아 근대역사의 언덕 <도노자키 공원 >
② 아름다운 해변으로 일본100선 해수욕장에 선정된 <미우다하마 해변>
③ <조선국 역관사순난비>가 있고 부산이 보이는 <한국전망대>
  

④ <소서행장>, <대마도주 요시토시> 임진왜란 출항지 <오우라포구>
⑤ 히노끼와 스기목으로 만들어진 숲길 힐링 코스 <웰니스 타임>
⑥ <고려 금동불과 범종>, <보협인탑>, <통신사이예공적> 의 <원통사>
⑦ 대마도 360도 조망으로 107개의 섬을 볼 수 있는 <에보시타케 전망대 >
⑧ 일본 건국 신화와 용궁신을 모신 대마도 3대 절경 <와타즈미 신사>
  

⑨ 항로로 대마도에서 가장 오래된 사적지인 <소선월> (차중 관광)
⑩ 조선 침탈을 위해 동지나해 제해권을 확보한 운하 <만관교>
⑪ 1861년 최초 러일전쟁이 있었던 대마도 최초 운하 <대선월> (차중 관광)
  

⑫ 1685년 선진국 조선을 배우기 위해 세운 일본 1호 <소학교적> (차중 관광)
⑬ 조선통신사를 환영하기 위한 <고려문> (차중 관광)

☞석식 후 호텔 이동, 룸 배정 후 휴식

     점심식사 : 현지식     저녁식사 : 바비큐
 2일차

이즈하라









































부산


도보관광








































대아고속
오션플라워











































16:00
18:10


조식 후 숙소 출발

① 656년 백제여승이 건립하고 애국지사 최익현 순국비가 있는 <수선사>
② 춘향전, 최익현순국지, 사무라이 거리와 저택 <나카라이 기념관>
③ 종의지동상이 있는 종가 관아지 <나카무라 지>
  

④ <하치만구(팔번궁) 신사와 마리아 신사>
  

⑤ 식민지시대 일본제국주의가 세운 <덕혜옹주 결혼 봉축 기념비>
⑥ 대마도판 왕자의 난 <금석성>
  

⑦ 통신사의 섬 대마도를 상징하는 <조선국통신사지비>
⑧ 한일역사의 열쇠 <대마 역사 민속자료관>
  

⑨ 통신사 숙소 겸 접반통사를 양성한 한글학교 <한어사>
⑩ 대마도로 떠밀려온 우리나라 표류민을 집단 수용하였던 <표민옥적 터>

▶면세점 쇼핑 및 자유시간

대마도 이즈하라 항 출항 (오션플라워 - 소요시간 2시간 10분)
부산 도착 후 입국수속, 해산 (^-^) 안녕히 가십시오.
     아침식사 : 호텔식     점심식사 : 현지식



2018.04.09.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
3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kkev****
시민
본인 입력 포함 정보
대조선국
大朝鮮國

 

1392년 – 1897년
어기 "태극 팔괘도"
왕의 보
수도한성[표 1] 북위 37° 35′ 동경 127° 0′  / 북위 37.583° 동경 127.000°
정치
공용어한국어 (중세 한국어)
정부 형태군주제
주요 국왕

태조 (1392 ~ 1398)
태종 (1400 ~ 1418)
세종 (1418 ~ 1450)
선조 (1567 ~ 1604)
정조 (1776 ~ 1800)

고종 (1863 ~ 1897)
영의정

정도전 (1392 ~ 1398)
하륜 (1408 ~ 1412)
황희 (1431 ~ 1450)
류성룡 (1592 ~ 1598)[1]
서명선 (1779 ~ 1785)[2]

심순택 (1884 ~ 1894)
역사
 • 조선 건국
 • 훈민정음 반포
 • 임진왜란
 • 정묘호란
 • 병자호란
 • 나선정벌
 • 병인양요
 • 신미양요
 • 태극기 제작
 • 청일 전쟁
 • 을미사변
 • 대한제국 수립 선포
1392년 8월 5일
1446년 10월 9일
1592년 ~ 1598년
1627년 1월 ~ 3월
1636년 ~ 1637년
1652년 ~ 1689년
1866년 10월 ~ 12월
1871년 6월 1일 ~ 11일
1882년 ~ 1894년
1894년 ~ 1895년
1895년 10월 8일
1897년 10월 12일
지리
면적222,300km2
내수면 비율2.8%
인구
1753년 어림
기타
국교유교(성리학)
통화 (1633~1892)
(1892~1897)
현재 국가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 이동 1395년까지는 한양이라고 불렀다.

조선(朝鮮, 중세 한국어: 됴션, 문화어: 리조조선, 리씨조선, 약칭: 리조[3], 1392년~1897년(혹은 1910년))은 한반도를 다스렸던 왕조이다. 고려 말기 신진사대부의 지원을 받은 무관 이성계에 의해 건국되었으며, 이후 505년간 동안 존속됐다.[4]

추존된 임금 환조 이자춘의 아들이자 고려왕조의 신흥 무인세력이었던 이성계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군사정변을 일으켰다. 그는 창왕·공양왕을 왕위에 강제로 올렸다가 신씨인 신돈의 아들이라고 사건을 거짓으로 조작시켜서 폐위시키는 등 정권·군권을 장악하고 전제 개혁을 단행하였으며, 경제적인 실권까지 장악했다. 1392년 7월(음력, 양력으로는 8월 5일) 공양왕이 왕대비에게 준 옥새를 이성계가 받아들고 주변 측근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5] 1393년 2월 15일에는 국명을 “조선(朝鮮)”으로 정하였고[6], 1394년에는 한양을 도읍으로 하여 여러 개혁을 단행했다.[7]

태종 이방원은 특권층이 소유하고 있는 개인 사병들을 강제 해체하고 조선의 군대에 편입시키고, 호패법을 실시하는 등 왕권을 크게 강화하고 임금 중심의 통치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관료 제도(6조 직계제)를 정비하였다. 세종은 학문·군사·과학·문화 등 모든 면에서 큰 업적을 이룩할 정도로 지금 살아가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성군으로 추앙받을 정도로 엄청나다. 이 당시에 과학이 크게 발전했다. 세조(수양대군 이유)는 조카 단종 이홍위를 몰아내고 왕위 정통성에 문제가 있자, 반발하는 세력을 무마하고 힘을 키우기 위해 태종처럼 신권을 제한하여 왕권이 강력하게 강화되었고, 《동국통감》,《국조보감》 등을 만들기도 했다. 성종은 개국 이후의 문물 제도를 정비했다. 15세기 말부터 지방의 사림 세력이 정계에서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존 대신인 훈구와 신진 관료 세력인 사림이 대립하면서 정치는 혼란해졌으며, 이에 따른 전반적인 사회상이 혼탁해졌다. 선조 때에는 마침내 훈구파들이 정계에서 물러나고 사림들이 정계를 장악하게 되었다. 이후 사림들은 '붕당'을 형성하여 조선 정치의 꽃이자 역모 반란죄에 해당될 수 있는 붕당정치를 시행한다. 이어 16-17세기에 주변국인 일본, 청(후금)과 치른 전쟁 (임진왜란, 병자호란)으로 인하여 국토는 황폐해지고, 국가 재정은 고갈되었으며, 백성은 도탄에 빠졌다. 이후 청나라에게 당한 수치를 씻자는 북벌론이 대두되었으나, 실천에 옮겨지지는 못했고, 청나라를 본받자는 북학론이 대두되었으나 조선의 임금 효종이 얼굴에 났던 종기(부스럼)에서 피가 지혈이 안 돼서 세상을 갑작스럽게 뜨자, 청나라를 본받자는 북학론은 실행하지도 못하고 흐지부지 되었다.

조선 후기의 정치는 붕당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붕당은 학파적 성격과 정파적 성격을 모두 띈 일종의 정당으로, 각 붕당은 국가의 공론(여론)을 따름으로써 여당이 되려고 노력했다. 각 붕당은 학문적, 정치적으로 대립하였으나 상호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여 스스로 부패하는 것을 경계했다. 각 붕당은 지방의 서원을 통해 그들의 스승에 제사를 지내고 결속을 다졌는데, 이 서원의 교장 격인 '산림' 은 조선 중앙정부의 삼사 언관직 선비들과 함께 공론(여론)을 형성했다.

1680년경신환국으로 서인이 권력을 잡은 뒤 균형이 무너져, 서인은 남인을 철저히 탄압하였다. 이어 서인에서 분열된 노론소론이 대립하였고, 그기야 정국이 급격하게 바뀌는 환국이 일어나면서 견제와 균형을 통한 상호 공존이라는 '붕당 정치의 원칙'이 무너지고 특정한 붕당이 다른 정권의 붕당을 몰아내고 정권을 독점하는 일당 전제화의 경향을 띠면서 국왕이 사사로운 감정으로 정치에 개입이 되어 국정이 마비될 정도로 혼란스러웠고, 이 때문에 여러 붕당 간에 갈등과 오해로 벌어진 당쟁으로 인해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 이선이 뒤주 안에 갖혀 죽는 임오화변이 일어났다. 그래서 왕권이 신하들에 의해 약해지자 당쟁을 막기 위해 영조정조는 당파의 균형을 고려한 인재기용(탕평책)을 실천했다. 그러나 정조가 1800년에 갑작스럽게 종기의 염증으로 세상을 뜨자 노론세력이 독점하여 정국을 이끌었지만, 19세기의 순조·헌종·철종 등 3대에 걸친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등 외척 세력의 세도 정치가 60여 년 동안 계속되었다. 이들 외척가문은 왕위 임명에도 손을 대는 등 부정부패 속에서의 절대권력을 누렸다. 그리고 풍양 조씨의 가문의 대표였던 조대비)가 흥선대원군과 결탁하여 흥선대원군의 둘째아들 명복(고종)을 조선 국왕 자리에 올린다.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은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붕당의 근원인 서원을 철폐하고 외척 가문인 안동 김씨 세력들을 축출한다. 또한, 프랑스와 미국의 통상강요와 협박을 물리치고 통상수교 거부정책을 유지했다. 1873년 흥선대원군최익현의 탄핵으로 하야하고 친정을 하면서, 민씨 정권이 들어서자 마자 대외정책이 개방되었다. 1880년대에는 구식 군인의 차별대우에 따른 저항으로 임오군란이 일어났는가 하면, 개화정권을 수립하려는 시도인 갑신정변이 일어나기도 했다. 또한 무능한 개혁 정책은 조선을 근본적인 근대화로 이끌지 못했다.

1890년대에는 농민 수탈에 대한 저항으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고, 동학농민운동의 진압을 명분으로 조선에 들어온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가 충돌하기도 했다. 1894년에는 친일적인 성격을 지닌 갑오개혁이 실행되었다. 한편 일본이 친러파인 명성황후를 없애고, 친일 내각 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암살으로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 민씨를 살해하자, 고종은 1896년 몰래 아관파천을 감행하여 러시아 주한 공사관에 1년 동안 피신했다. 1897년 11월 경운궁(景雲宮)으로 환궁한 고종은 경운궁을 덕수궁으로 고쳐 쓰고, 원구단과 환구단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함으로써 '조선'이란 국호는 공식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황제의 국가인 대한제국의 국호로 사용하게 되어 지위가 격상되었다.

<input class="toctogglecheckbox" id="toctogglecheckbox" role="button" style="display: none;" type="checkbox">

목차

2018.10.28.

  • 출처

    네이버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