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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조선은 방언의 나라?
yoos**** 조회수 2,616 작성일2003.08.15
조선은 방언의 나라라던데 사실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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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rn****
평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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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흘러흘러 지금은 일명 표준어라고 불리는 우리나라수도서울말을 잘 써야만 잘 먹고 잘 살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이른 바 지방인 중 어느 누구든 서울에서 잘 살려면 서울말을 꼭 배워야만 하는 그런 각박한 `방언침체시대` `표준어선호시대`가 열린 것이다.
하지만 필여[필자를 지칭하는 카리쑤마적인 언어: 筆余]가 수차례동안 누차 강조하는 거지만 방언은 우리에게 있어서 암적인 존재가 아니라 절대적 필요의 존재이다.
방언을 잘 사용하고 잘 지켜야만 우리의 언어생활 역시 활발히 발전이 되는 것이고 국어연구에 중요한 밑거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더욱이 방언은 늘 우리의 가슴을 따뜻하고 포근하게 해주는 고향의 참맛 그 자체아닌가.
그런 역할을 하는 방언이건만 왜 우리는 방송에서조차도 늘 방언을 경시하고 서울말을 선호하는지..
이것은 모두 잘못된 표준어사관[思觀]에서 나온 착각의 발상인 것이다.
그런데 얼마전 필여가 역사책 [조선왕조실록 별권 조선왕조방언실록]을 차츰차츰 펼쳐보다가 아주 놀라서 죽을 정도로 그런 경천동지의 사실을 대발견하고 말았다.
놀라지 마시라....
아~~~필여......감히 말하려니깐,
갑자기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리며 머리가 찌끈찌끈 아파오고 눈물이 찔끔찔끔 저려온다.
동시에 물밀려듯이 처들어오는 새초롬한 개드레날린또한 느끼면서...
아~~~ 그래도 필여 감히 말하겠노라!
바로 조선은 방언의 나라였다!!!

조선은 방언을 최고로 존중하였으며 제정일치사회였던 고대와는 달리 방정[방언+정치]일치사회였고 방언이 생활의 보편화가 되었던 그런 나라였다.
또한 방언소외시대인 지금과는 달리 조선은 엄연한 방어환영호황시대였다.
이것은 바로 조선왕조실록 별책부록지인 <조선왕조실록 별책 조선왕조방언실록>에서 전하고 있다. [ 이 책은 필여의 집안에서 발견된 유일무이한 국내최고의 진본사서별책부록지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조선은 방언이 판을 치는 사회였는지 또 시대에 따라 방언이 어떻게 발전했는지 필여 지금부터 상세히 근질근질한 입과 손가락을 나불거리도록 하겠으니 독자 두 눈을 꼬라보면서 함 읽어보기 바란다.



1392년 함경도 출신 이성계는 조선을 세우고 태조임금이 되었다.
당시 태조임금은 고려의 수도였으며 고려의 표준어였던 `개성방언`의 독주를 끝내고 고굉지신[총신]인 정도전의 의견을 받아들여 한양 즉 지금의 서울로 수도를 정하였다.
이성계의 책사인 충청방언권출신 삼봉정도전은 이성계의 고향인 함경방언권과 연합해 서로의 방언이 존중 받는 사회를 만들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태평하며 걱정없는 평화 속에서 불안이 엄습하는 법.....
평소 삼봉 정도전의 인간성을 극도로 미워했던 경상방언권출신인 하륜은 태조이성계의 5남 이방원과 결탁하여 삼봉정도전을 제거하고 그 일파들을 숙청하였다.
이 난을 역사에서는 왕자의 난이라고 하지만 방언학자들 사이에는 [제 1차 방언사태]로 명명되고 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과도기였던 당시의 방언사회가 일침의 타격을 받아 충격에 휩싸였다.
하지만 태종의 즉위로 방언사회는 곧 회복하여 평상시를 유지하였다.
태조조가 끝나고 정종조와 태종조를 거쳐 세종조에 와서는 방언사회는 더더욱 각광을 받으면서 새로운 발전을 도모하였다.
세종임금은 특히 호남방언권출신인 황희정승을 좋아하여 평소 내시들에게 [아그야 이리 오랑게] 라는 등등의 호남방언을 즐겨 쓰는 등 전국방방곡곡에서 방언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전개되면서 이른 바 방언의 시대가 활짝 꽃피게 되었다.
더욱이 세종임금은 집현전이라는 학문연구기관을 세우고 그 부속기관으로 조선방언연구소[집언전]를 설치하여 방언학 연구에 대해 더욱 심취하며 방언학 발전에 총력을 기울였다.

<柱: 집언전이란 집이나 동네에서 쓰는 말, 즉 방언을 연구하는 곳이다.>

한편, 세종때의 명정승 호남방언권출신 황희정승은 자신이 호남방언권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하여 자신의 호마저도 방촌이라고 지었다.
당시 황희정승의 최대 선의의 라이벌이었던 충청방언권출신 맹사성 정승도 방언에서도 황희정승에게 밀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충청방언이 호남방언보다 더 높으거늘 호남방언이 충청방언보다 더 좋다는 건 코끼리 코후비는 말이다.]하여 호를 고불이라 지었다.
고불의 뜻은 충청방언이 호남방언보다 더 좋고 더 높다라는 높을 高와 호남방언은 충청방언보다 좋지 않다라는 아닐 不로 이루어져 있다.
두 정승의 이러한 방언논쟁이 일어나자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방언지역감정을 우려했으나 두 정승은 워낙 성격이 좋은 양반들인지라 서로 곧 화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하홰의 의미로 고불 맹사성 대감은 호를 高彿이라 고쳐지어 호남방언권과 충청방언권의 우정을 나타내며 과시했다.
高彿이란 뜻은 높을 고 비슷할 불이란 뜻으로 호남방언권과 충청방언권은 그 높음이 비슷하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하여튼 세종조에서는 이토록 각 지방의 방언에 대해 서로 좋은 감정을 지니면서 범국민적으로 방언사용을 보편화하는데 힘을 모아 화합하였다.
국가와 국민이 하나되어 방언이 발전하고 그에 대해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면서 방언에 대한 여러 책들이 나오는데 대표적인 책들 중에는 정초의 [방언직설]과 더더욱 방언체계화를 도모토록 한 [방언록]등이 있다.
한편 세종은 집현전 학자들에게 사가독서와 방언학습이라는 명목으로 휴가를 내렸으며, 지금식으로 말하면 영어토익시험이 되는 `방언학습능력검진대회`를 해마다 개최케 하였으니 전국의 수 많은 방언학자들이 이 대회에 참가하여 문전성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조선왕조방언실록에서는 전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세종의 업적 중 가장 빛나는 것은 훈민정음을 선포할때 방언학을 더 연구하고 개발하며 체계화 해 지금도 방언학계의 기초입문교과서라 불리는 방언대사전[훈민방언]을 선포, 출판한 것이 되겠다.

훈민방언서문: 나라말씀이 지방동네마다 달라 얼빵한 백성들이 야부리고자 하는바가 있어도 제 뜻을 실어 펴지 못하니 내가 이것을 가엽게 여겨 방언대사전인 훈민방언을 만드고자 하니라.
이는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쉽게 익혀서 날마다 야부리기 편하기 위함이니라.


희망에 가득 넘쳤던 세종조가 끝나고 시대는 흘러흘러 중종~명종대에 이르렀다.
중종~명종대에는 철저한 서울방언사관지지론자였던 윤원형이 권세를 누리면서 애첩 정난정의 사주로 [표준천하] 라는 제도를 제정해 전국의 방언을 탄압한 사건[을사방언사화]도 있었으며 그 후대 선조 때인 1589년에는 호남방언권과 경상방언권이 서로 출동을 내면서 급기야는 정여립사건이 발발되기도 했었다.
이를 볼때 한번 정리해 보자면 조선 초의 전국의 방언권은 서로의 방언을 존중하면서 이른 바 방언중홍의 시대를 열었으나 점점 시대가 바뀌면서부터 방언지역감정을 가지게 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비극적인 정세속에서도 방언에 대한 연구는 지속히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이를 부러워한 일본의 풍신수길[도요토미히데요시]은 조선의 방언을 차지하기 위해 급기야 1592년 4월 14일 새벽, 15만 군대를 편성해 조선과의 전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당시 풍신수길은 일본의 일인자로서 어느 날 조선의 부산에 관광차 갔다가 경상방언권에 흠뻑 빠져 귀국한 한 측근지인의 경상방언권에 대한 소개를 듣고 곧 부산에 간첩을 보내 한 조선인[부산거주]을 납치 하도록 했다.
잡혀온 조선인은 경상방언권에 크게 매료된 풍신수길에게 [에헤이~언년 지기겠네?] [멀 꼬라보노? 이 원쉐이 같은 자스가야] [야~ 니 밥처먼나?][니 쪽바리쉐끼재?] 등등 여러가지 훌륭한 방언을 가르쳐 주었다.
그런데 이 풍신수길이 대저 누구던가?
욕심하면 천하가 다 알아주지 않겠는가?
하루하루 날이 갈수록 눈이 부실정도로 훌륭한 조선사투리에 흠뻑 빠져버린 풍신수길은 어떻게 하면 조선사투리를 좀더 체계적으로 배울수 있을까라며 갖은 생각을 하다가 생각 끝에 `침략`이라는 방법을 생각하게 된 바, 풍신수길은 아예 조선사투리를 가질 생각을 했던 것이다.
풍신수길은 곧 조정에 회의를 열어 조선침략이라는 안건을 제시하니 관료들이 모두 동의하자 곧 군대를 일으켜 조선을 침략하니 이것이 바로 임진왜란의 시작인 것이다.
그러나 풍신수길은 조선방언차지계획을 성공하지 못한 채 전쟁 중에 눈을 감고 부하들에게 본국철수를 명하였고 철수를 이행 할 시 조선의 명망있는 방언학자들을 생포 해 오라고 지시하였다.
이리하여 당시 명망있던 경상방언권의 강항선비가 일본으로 납치되어 최고의 대우를 받으며 일본국립 방언국민학교의 초대교장이 되기도 하는 등 일본전역에 조선방언의 열풍이 세차게 강타하였다.
당시 일본의 조선방언열풍이 불어 일본방언에 많은 영향을 끼쳐 일본방언학을 더더욱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나 그 반대로 조선방언사회는 방언에 대한 인식이 점차적으로 떨어져 갔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임진왜란발발 50년도 안된채, 청나라의 병자호란이 일어나기도 해 조선의 방언은 너무나 쇠퇴해졌다.
이토록 조선의 방언이 침체되자 의식있는 몇몇 방언학자들은 방언을 살리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 중 대표적인 분이 팔도방언도와 [동국방언도]를 저하신 신경준, 팔도의 온 방언을 집대성한 [택리방언]을 저하신 이중환, 한 방언권에 거주하는 어느 어부의 방언을 직접 채록한 [어부방언가]를 저하신 윤선도 선생들이다.
또한 정조때의 유명한 방언학자이며,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선생은 [방언속찬] [목민방언서] [방언강의] 등 많은 저술서들을 남겨 방언학 부활의 불씨를 꾀하셨다.
(조선문화의 중흥기라 일컫어지는 영.정조임금대에는 정조임금이 직접 [방언전서]라는 방언서적을 저술했지만, 당시 정조임금의 반대파인 벽파노론들의 결속저지로 인하여 크게 펼쳐지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러한 방언학자들의 수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선방언사회는 지속적으로 지역감정을 유발하였다.
특히 조선방언사회가 서울경기권을 제외한 경상,호남,충청등 삼남방언권으로 압축되자 타 방언권의 감정은 더더욱 나빠졌다.
강원지방은 말할것도 없었고 북방오랑캐로 취급받는 평안,함경방언권은 삼남방언권의 노골적인 횡포에 계속 항의했으나 거침없이 묵살되고 저지되었다.
이에 참다못한 함경방언권과 평안방언권은 평안도사람 홍경래를 주동으로 함경.평안통합방언협회[함평방협]를 결성하는 등 서울을 중심으로 한 '한강이북 방언살리기운동'을 추진했다.
그러나 잘못된 방언사관에 빠진 삼남방언추종자들에게 늘 탄압과 견제를 받아왔다.
그러자 함평방협은 계속되는 삼남방언권의 횡포에 결국 참다참다 못해 혁명을 일으키니 바로 이것이 유명한 1812년에 일어났던 홍경래의 난이다.
홍경래는 차별대우에 심히 분노를 일으키며 더 이상 참지못해 김창시, 우군칙, 홍총각등 함평방협의 임원들과 함께 손을 잡고 잘못된 표준어사관과 삼남방언권의 횡포를 타도하기 위해 혁명을 선택했던 것이다.
하지만 혁명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결국은 삼남방언권의 강한 결속력과 티격태격함을 거쳐오면서 지금에까지 이르러고 있다.
수 많은 격동의 세월을 거쳐 작금의 현실에 와서는 호남방언권과 경상방언권이 서로 대립을 이루어 천하를 양분하기에 급급하고 있다.


필여.....조선왕조실록 별책부록인 조선왕조방언실록의 마지막장을 넘긴 뒤 두 눈을 지금시 감고 깊은 눈물을 송알송알 흘려대었다. 눈물이 송알송알 쏟아져 필여는 도무지 주체를 할수 없었으니, 그 감동이 오죽했겠는가.
필여...잠시나마 눈물을 흘리며, 옛 조상님들의 일을 생각하니 더욱더 모골이 송연해졌다.
아울러 방언에 대한 잘못된 편견과 타지방방언의 배척은 나라를 망친다라는 것을 또 새삼스럽게 느껴 보며 앞으로 더더욱 방언에 대한 사랑을 감히 실천하여야겠다고 몇번이고 필여자신과 더불어 다짐하였다. 영원토록 방언을 사랑하리라~~..

필여의 저서: 방언으로 본 조선역사, 조선시대 조선방언,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방언실록, 표준어가 죽어야 방언이 산다, 방언! 일주일만 하면 내처럼 된다, 방언사랑 나라사랑, 조선방언의 발견등 외 다수
논문: 조선방언에대 한 고찰, 조선초기 방언 개설, 방언학의 이해.

2003.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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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 사진
myro****
고수
한국사, 비뇨의학과, 대학 입시, 진학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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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경상도와 함경도 쪽 방언은

조선시대때 많이 유명했었져...

경상도 방언은 고려와 조선을 거쳤고

함경도는 ,, 조선을 거치며..

음..대부분 방언이 조선에 많이 생겼져

서민사회가 발달하면서

방언이 많이 생겼져^^

조선은 방언의 나라^^

2003.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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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 사진
jiyu****
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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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이후로 활발해진 방언!

쉽게 해독하자면 사투리죠.

지금도 방언을 쓰는 곳이 많은 만큼,

옛날에도 방언은 지역마다 특징 등

그 지역에 잘지 않았던 사람이면

알아듣기가 힘들었답니다,

같은 민족이지만 서로 지역이 다르다 보니...--;;

또 조선 시대 왕이신 세종임금은

특히 호남방언권출신인 황희정승을 좋아하여 평소 내시들에게

[아그야 이리 오랑게] 라는 등등의 호남방언을 즐겨 쓰는 등

전국방방곡곡에서 방언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전개되면서

방언이 크게 떨치게 된 계기의 시대죠.

더욱이 세종임금은 집현전이라는 학문연구기관을 세우고

그 부속기관으로 조선방언연구소 '집언전'을 설치하여

방언학 연구에 대해 더욱 심취하며 방언학 발전에

심의을 기울였답니다.

"나는 안동사람이시더."

2008.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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