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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안상수의원이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 맡았던 검사로 나오는데 , 자세한 내용이 어떻게 되나요?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23,954 작성일2010.06.28

한나라당 당 대표로 나온다고 해서 안상수의원를 검색해보니,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 맡았던 검사로 나오는데 , 자세한 내용이 어떻게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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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종철 사건에 관한  내용입니다.

 

다음 글들을 읽어 보고. 박 종철 사건에 대한 인권 검사로 과대 포장된 안 상수의 실체를 보시기 바랍니다.

 

1. 안 상수 .
그는 요즘 입만 열면 ‘좌파 척결, 좌파 적출’을 말한다. 박군은 그의 논리대로 하면 좌파이다. 좌파인 박군이 흘린 피를 팔아 입신한 그를 보면, 한국 우파의 수준이 어디에 있는지 절망하게 된다.

 

상세 사항 :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412324.html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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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최근 인터넷을 달구고 있는 주인공 한나라당 안상수 의원을 가리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파헤친 검사라고 치켜세운다.


    미안하다 철저한 오해다.   이번에 명확하게 이해하자.

   이 사안을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안상수의 상관 최 환 검사가, 당시 정권이 시신을

   화장하라는 외압을 뿌리치고, 부검을 지시, 박종철 열사의 죽음은 우리에게 밝혀진다.

자세한 내용은  http://blog.ohmynews.com/curator/324812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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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염치 없는 선거 패배 책임자들  안상수와 정 두언 출마

     자세한 사항. http://www.vop.co.kr/A00000303123.html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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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군 면제와  개소리

    안상수와 봉은사 사태에 대한 비겁하고 치졸한 언행들.

   참고 사항  http://blog.ohmynews.com/savenature/261251 등등


 

2010.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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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식인 채택 답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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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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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수라는 이름 석자가 유명해진 이유는 1987년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 진상폭로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1975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검사의 길을 걸었던 안상수 원내대표는 젊었을 때부터 할 말은 하는 인물이었다.

1965년에는 한일회담 문제로 9일간 단식을 했고, 1967년에는 6·8 부정선거규탄시위를 주도하기도 했다. 군부 독재 맞서 고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을 수사하면서 사건을 폭로한 이후 변호사의 길을 걸었던 안상수 원내대표는 1991년 환경운동연합 지도위원, 경실련 입법위원, 박종철기념사업회 운영위원을 역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http://www.ansangsoo.or.kr

2010.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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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민

87년 6월 항쟁의 불씨는 고 박종철 고문사건에서 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말해 안상수 의원이 고 박종철 고문 사건을 밝혀 내지 않았다면 그리고 용감히 외부에 이야기 안했다면 6월 항쟁은 없었을 것이다.

6월 항쟁이 없었다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오랜기간 더 기달려야 했다고 볼 수있다.

김문수경기지사가 노동운동가을 하였다가 한나라당에 들어온것 처럼 안상수 의원도 비슷한 경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2010.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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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답변

1987년 1월 14일, 23세의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이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조사 받던 중 고문으로 숨진 사건.

당시 수사요원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는 서울대학교의 <민주화추진위원회사건> 관련 수배자의 소재 파악을 위해 박종철을 조사, 물고문하던 중 박종철의 상태가 이상하자 즉시 인근 중앙대 용산병원 응급실에서 의사 오연상씨를 불렀으나 오씨가 도착했을 때 이미 박종철은 숨진 뒤였다.

다급해진 경찰은 이날 오후 보호자와 이미 합의를 했다며 서울지검에 시신의 화장을 요청한다. 증거인멸을 위한 경찰의 이 요청은 거부됐다.

15일 석간신문에 조사받던 학생이 쇼크사했다는 기사가 나가자 가혹행위의 가능성이 조심스럽게 비춰졌다. 오후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변사사실을 공식 시인했으나 단순 쇼크사인 것처럼 발표했다.

다음은 당시 치안 본부장이 발표한 내용의 일부이다.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심문을 시작, 박종철군의 친구의 소재를 묻던 중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중앙대 부속 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하였다""

16일 신문에 오른쪽 폐에 탁구공 크기만한 출혈이 있었다는 부검입회 가족의 증언이 실리고 17일 사체를 첫 검안한 의사 오씨의 “조사실 바닥에 물이 흥건했다”는 등 고문 시사 증언이 신문이 보도됐다.

결국 치안본부 특수대는 17일 수사에 착수 19일 고문사를 공식인정하면서 조한경 강진규 2인을 고문 치사 혐의로 구속했다.

이어 2월27일 검찰은 공범이 3명이 더 있다는 자백을 들었으나 경찰의 방해로 수사에 착수하지 못했다. 5월18일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이 이 사실을 폭로하자 5월20일 황정웅 반금곤 이정호 등이 즉시 구속되고 5월 29일에는 2 억원 입금 통장 등으로 범인 축소조작에 나선 박처원 치안감, 유정방 경정, 박원택 경정 등 3명이 범인도피죄로 구속됐다.

이에 따라 정국은 고문정권 규탄 및 민주화투쟁에 들어갔으며, 그 뒤 고문가담 경관이 모두 5명이었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짐에 따라 국민의 반독재 민주화투쟁은 더욱 격렬하게 전개되어 6월항쟁으로 이어졌다.

사건발생 1년 후인 88년 1월15일 황적준 국과수 과장의 경찰 회유 메모가 보도되면서 강민창 당시 치안본부장이 직권남용 및 직무유기 혐의로 구속 되었다.

이후 박군의 유족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내, 2억4000여만원의 배상금을 지급받게 되었다. 그러자 국가는 다시 고문사건에 연루됐던 일선 고문경관들을 상대로 구상금 청구소송을 냈다. 대법원은 지난 2000년 12월 26일 ""배상액의 70%를 일선 고문 경관들이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2010.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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