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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ojs7**** 조회수 37,055 작성일2002.11.29
좀 더 깊이있고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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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문제푸는양변호사
식물신
40대 이상 남성 법조인 #변호사 법학, 법이론, 강력범죄, 형벌, 형집행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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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탁!" 하고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고 조작했던 그 유명한 사건.

서울대 재학 중에 데모를 하다가 붙잡힌 박종철 군은 물고문으로 죽었습니다.

다음은 박종철 군 고문 치사사건에 대한 신문 기사들을 발췌한 것입니다.


1987년 경찰에 의해 불법 연행된 박종철이 수사과정에서 고문으로 죽은 사건.

4·19혁명과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 이어 현대 정치사의 한 획을 그으면서 20세기 후반 한국사회 변동의 복잡한 성격을 보여준 사건으로서 이른바 '1987년 6월민주화운동'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이 사건의 진행 과정은 박종철의 사망 경위가 은폐·조작되었음이 밝혀지고 고문 가담자가 드러나기까지의 1단계와 재차 행해진 축소·조작의 전모와 그 관련자들이 밝혀지기까지의 2단계로 나눌 수 있다.

1987년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에 다니던 박종철은 서울대학교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 관련 주요수배자인 박종운(朴鍾雲)의 소재를 알기 위한 참고인이라는 이유로 1987년 1월 14일 하숙집에서 치안본부 대공수사관들에 의해 영장 없이 불법으로 강제 연행되었다. 1월 15일 경찰은 조사받던 박종철이 자기압박(自己壓迫)에 의해 충격사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박종철의 부검의(剖檢醫)였던 중앙대학교부속 용산병원 내과전문의 오연상(吳演相)의 '고문치사일 가능성이 높다'는 증언이 알려지자, 1월 19일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박종철의 사망원인이 '물고문'에 의한 질식사이며 고문에 가담한 사람은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 2명이라고 다시 발표했다. 그러나 경찰의 정정발표에도 불구하고 고문 가담자인 두 수사관을 참여시키지 않은 채 사건현장이 치안본부 대공분실이라는 이유로 비공개 현장검증을 실시함으로써 연행시간과 결정적인 사망 경위, 고문 가담자의 수 등에 대한 의혹들이 그대로 남겨진 채 이 사건의 1단계가 마무리되었다. 박종철고문치사사건의 2단계 은폐·조작 경위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끈질긴 추적과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학 8과장 황적준(黃迪駿)의 일기 증언에 의해 드러났다.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사일 가능성이 높다'는 자신의 부검소견서가 당시 강민창 치안본부장의 요청으로 '외상 없음'으로 조작되었다는 황적준의 증언은 온 국민의 충격을 자아냈으며, 언론은 최초의 고문 가담자 2명에 대한 경찰간부들의 회유과정을 끈질기게 추적했다. 결국 여론의 압력에 밀려 고문치사의 은폐·조작에 관련했던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사임하고, 강민창 치안본부장을 비롯한 박처원 치안감, 유정방 경정 등 다수의 경찰간부가 구속됨으로써 이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아부지예...그동안 저 재수하는 동안 뒷바라지 하시느라 수고
하셨슴니더..지 서울대 가서 정말 열심히 한 번 해볼랍니더...."

빛나리 아저씨의 장기집권에 반발하여 도처에서 일어난 민중의 저항 속
에서, 당시 서울대 인류학과 3학년에 재학중인 박종철열사가 경찰의 고
문이 시작된 지 채 30분이 지나지 않아 탁치자 억하고... 목숨을 읽고
말았 다. 그네들 말대로라면 말이다. 이 사건은 민중의 개헌 요구를
개무시 하고 4,13 호헌조치를 취한 빛나리 아저씨 정권에 대해 그간의
반발심을 못내 속으로만 간직해오던 민중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고, 결국
6.29라는 선언 나름대로의 가시적 성과를 이끌어 냈다.

가시적이라는 말, .... 생각나는대로 그리고 손가락이 가는대로 우선
자판 을 눌러 보기는 했지만 과연 무엇이 가시적인가에 대해.... 다시
말해 무엇 이 6월 항쟁이 가져온 눈에 보이는 성과였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성과라 함은 민주주의를 피워 볼 수 있는 기회의
제공이었지만...그리고 그것은 박종철.. 이한열 열사들을 비롯한 수많은
고귀한 영혼들과 바꾼 것이었지만 우매한 당시 우리네 민중은
금권타락과 지역주의로 얼룩진 직선제 앞에서 그리고 이에 못지 않게
우매하면서도 탐옥스럼움까지 갖춘 쓰리김이으로 대표되던 당시
지도자들은 그들의 알량한 욕심을 위해 "분열"을 택했다. 결과적으로
남은 것은 6월을 "민주주의의 도화선!, "우리 역사를 바꾸어 나갈 수 있는
강력한 엔진의 시동"이라는 짜증을 불러일으키 기 충분한, 레토릭들을
부여한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그리 고 하나 더
유신본당과 신군부의 변태에 불과한 민주주의 군사정권의 연장과
함께..말이다.

지난 주인가 tv예고편만을 보고, 봐야지 봐야지만 생각하다가 그만 놓쳐
버린 mbc에서 만든 특집물 "순수청년 박종철"을 이제서야 주말을 이용해
vod로 보게 됐다. 시대 상황의 사실적 묘사라는 측면을 앞에두고서도,
나란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지 박종철 역할을 한 서울대생은 왜 그렇게
못생겼을 까? 그리고 박종철 열사 여자 친구역으로 나온 다혜라는
여자는 뭘 먹고 그 렇게 예쁜걸까 라는 생각이 우선 밀려왔다...^6^

다시 마음을 다잡고 앉아 생각해본다. 박종철을 고문한 5명은 각각
중형을 선고 받았고약 오년 전 후로 해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그
사람들이 지금 어느 곳에서 뭘해먹고 살든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의
피해자는 박종철을 위시한 몇몇 운동학생만이 아니라는 것과 덧붙여 이
사건의 가해자도 당시 소속경찰 몇명 그리고 책임을 지고 물러난 경찰
대가리 몇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시 시대를 살아가야만 했던 민중과
열사들 그리고 어쩌면 악랄한 고문을 가한 그 새끼들조차도 모두
피해자일지 모른다. 피해자만 남고 가해자는 사라진 상황이라고 나
할까..

그리고서는 발견한 재밌는 기사 하나! 87년 당시 `서울대생
박종철(朴鍾哲)군 고문치사사건' 당시 수배학생이었던 서울대생
박종운(朴鍾雲)씨를 비롯해 정태근(鄭泰根) 전 연세대, 고진화(高鎭和)
전 성균관대, 오경훈(吳慶勳) 전 서울대 총학생회장 등 학생운동권 출신
`386 세대' 4명이 21일 한나라당에 입당했다는 기사였다.

박종운이라는 사람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였지만 보도대로라면
박종철열사가 목숨을 버려서가면서까지 지켜준 사람이란다. 그런
사람이 박종철 고문에 적극 가담한 걸로 알려진 정행근이가 도사리고
있는 한나라당으로 갔다? 하여간 재밌는 나라다. 또 하나 아주 즐겁다
못해 우리 한 민족의 뛰어난 그러나 좆같은 "친화의식"을 여실히
보여주는 얘기가 흘러나온다. 연대 총학생회장이었던 정태근이라는
사람이 한나라당에 입당하면서 이사철의원과 겸연쩍은 악수를
나누었다고 한다. 이의원은 정씨가 검찰에 붙들려 왔을 때 그를
담당했단 공안검사였단다. 악명 높던 공안검사와 운동권 학생이 함께
손잡고 정권창달을 위해 힘쓴다.....정말 우리에게는 정겹기 그지없는
장면이다.

뭐가 옳은 것인지 그리고 뭐가 진실인지 머리가 상당히 벙쪄지는
새벽녘이다.

추신
드라마속에서 박종철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꽤난 고심한 것으로
나타나지는 안상수검사 그러니까 지금 한나라당 의원의 홈페이지를
가봤다. 서울대 법대라는 학력보다 검사 변호사라는 고귀한 직업보다...
"학생시위"를 주도 했다는 것을 더 큼지막하게 적어 놓았다.

何人必變 吾乎痛哉...

2002.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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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s****
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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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은 탁자를 탁 치니까 억하고 죽었다고 했다.
하지만 박종철군은 부검결과 물고문으로 죽었다고 하였다.

먼저 박종철은 나와 같이 경상도 부산 사람이였고, 서울대생으로 바르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친구가 민주화운동을 하는데 경찰에게 끌려가서 민주화 운동을 하게 되었다.
이름은 까먹었지만 어떤 검사가 박종철군의 고문사실을 밝혀 내면서 전국에서 시위가 일었났다.
단 확실한 것은 박종철군은 물고문으로 죽었다는 것이다.

2002.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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