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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우리나라의 대통령들
비공개 조회수 45,418 작성일2018.12.09
우리나라의 대통령들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알고 싶은 점 : 

1. 우리나라의 대통령들의 이름
2. 재위 기간 (예 : ()대 대통령, 20XX년 ~ 20XX년)
3. 업적/우리나라에 어떤 변화를 주었는지

내공은 꽤 많이 걸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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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대 대통령

 

1~3: 이승만: (1948-1960)

초대 대통령이며 한국이란 최초의 현대적 국가의 대통령 

19489 9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19496 21국회락치사건이 일어남 

19506 25한국전쟁이 발발

19526 20국제구락부사건이 일어남

19527 4부산정치파동이 일어남

19537 27휴전 협정 조인

195411 17사사오입개헌

19581 13진보당사건이 일어남

19603 153·15 부정선거

19604 194·19 혁명

19604 26이승만대통령 하야


4: 윤보선 (1960-1962)

4.19혁명이 일어나자유당 정권이 몰락 과도정부 수반 허정 에의해

민주당 정권수립 5.16군사혁명으로 퇴진

19606 152공화국헌법이 공포,윤보선대통령 취임

19615 16박정희등이5·16 군사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

 

5~9: 박정희(1963-1979)

1961년 군사혁명으로 집권하여 18년간 경제적성과도 있었고 독재철권통치하다 19791026일 암살 당함

196312 263공화국헌법이 공포,박정희대통령 취임

196410 31월남간에 파병 협정이 체결

19656 22·협정이 조인되어 국교가 정상화

19697 21경인고속도로가 개통

19699 143선 개헌안, 국회 에서 날치기

19707 7경부고속도로가 개통

19727 4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

197212 27유신헌법이 공포

19748 15서울지하철 1호선이 개통, 영부인육영수가 피격당해 사거

19798월 11YH 사건

197910 2610·26 사건이 일어나박정희대통령이 피격당해 사망



10: 최규하(1979-1980)

박대통령의 서거로인하여 국무총리였던  최규하씨가 대통령직을 승계

1여년간 나라를 극도로 혼란스럽도록 유도한 장본인 이때 제대로 국가 권력을

제대로   장악했더라면 오늘날의 불상사가 없을을것이라는  가정을 해봅니다

197912월 1212.12 군사반란 

19805 18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남

198010 275공화국헌법이 공포

 

 

11~12: 전두환(1980-1988)

최규하시절 합동수사본부장 (보안사령관)으로써 권력에 탐닉하여 

군서열과 조직을 뭉게버리고 군부내 사조직을 이용하여 정권 찬탈한 군사 쿠테타의 주역

198310 9아웅산묘역폭탄테러사건이 일어남

19845 3교황요한바오로 2가 방한

19857 19부산지하철 1호선이 개통

19871 14박종철이 고문으로 사망

19876민주항쟁

19876 296.29 선언

198710 29현행헌법이 공포

198711 29대한항공 858테러사건 발생

 

13: 노태우 (1988-1993)

전두환의 영원한 2인자로써 전두환 후계자로써 그 후광을 엎고 대통령으로 자리확보

19889 17서울올림픽이 개막

19896 30임수경이 방북      

19901 22노태우·김영삼·김종필3합당을 선언하고 민주자유당을 결성

 

14: 김영삼(1993-1998)

자칭 문민정부라하여 민간 정부를 만들었지만 자식관리소홀과 측근정치

와 무대포 무신념 칼국수 대통령으로써 나라 지도원리 상실 IMF 환란으로 나라경제  폭삭하였음

19932 25김영삼대통령 취임,문민정부출범

19933 12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확산금지조약탈퇴를 선언

19947 8김일성이 사거,김정일국방위원장 집권

199410 21성수대교가 붕괴      

19954 28대구상인동가스폭발사고가 일어남

19956 29삼풍백화점붕괴사고가 일어남

19972 12황장엽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노동당서기가한민국으로 망명

19978 6대한항공 801이 괌에서 추락

199711 21대한민국정부가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

 

15: 김대중(1998-2003)

무려40년동안 정치무대 주변에서 맴돌다  호남 세력등에 엎고 대통령자리 확보 IMF 해결한다고 나라의 국부를 외국에 죄다 팔아치우고 아들 삼형제의  부정부패가 극에 다달았으며 측근정치를 강행 

햇볓 정책이라 하여 엄청남 돈을 퍼부어 주고 그공로로  남북협상 노벨평화상 획득

19982 25김대중대통령 취임,국민의정부출범

199911 18금강산관광이 시작          

20006 156·15 남북공동선언발표

20025 312002축구월드컵한국일본에서 공동 개최

20032 18대구지하철화재사고가 일어남

 

16: 노무현(2003- 2008)

적절하게 반미도하고 반일도하여  나라 입장을 어렵게하였고 그 측근들이 운동권 출신이다 보니 국가 보안법해제등 좌경 진보성향의 개혁한다고 하면서 아무것도 못하고 FTA비준이 최대의 걸림돌이되었으며 퇴임후 주변부패협의로 조사과정에  자살 한 비운의 전직대통령

20032 25노무현대통령 취임,참여정부출범

20043 12노무현대통령 탄핵 소추안이 국회를 통과

20044 1KTX가 개통

20045 14헌법재판소가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을 기각

200410 21헌법재판소행정수도이전법을 위헌이라고 확인

200710 2~10 4 2남북정상회담개최.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 발표



17:이명박(2008-20132)

집권전에 숭례문 화재사고부터 시작 곧이은 촛불집회 4대강유역개발 용산참사 미국발 금융위기로 국내경제 혼란 지금까지 혼돈속에서 천안함 사건  남북협상결렬 G-20 정상회담개최 연평도 폭격사건 집권이후 게속된 사회적불안 남북긴장사태 발생

2008 210일 국보1호 숭례문 화재전소

20082 25이명박대통령 취임,이명박정부출범

200852  소고기 광우병파동으로 촛불집회 전국민 저항운동

2009216일 김수환추기경선종

2009 525 일 노무현전대통령 자살로 서거 국민장

2009 822 일 김대중대통령 서거 국장

2009825  한국최초위성 나로호 발사

2010  210 세종시행정부이전수정발표

20103백령도근해해군초계함 천안함침몰42실종

20107국무총리실민간인사찰파문

201010월 한 유럽연합 FTA조인

201011G-20정상회담 개최

201011월 북한 연평도 폭격

201012월 한미 FTA협정체결

 

 

 

 

 

18대 박근혜(20153- 2017310)

집권초부터 북한의 핵위협  휴전협정 페기등 남북문제 로 정권표류

장관인선과정 부적합자 선발

대변인 방미기간 성추행사건 발생 도덕적 먹칠

국정원간첩조작사건

세월호 참사 학생들 집단 사망사고 발생

국정원장 안보실장 해임

안대희 총리후보자 변호사 수임료 문제로 자진 사퇴

문창극총리후보 지명철회

2기내각 전원 불량인사 (논문변조 위장전입 불법탈세 위장전입 위증 청문회두중 폭탄주 등등 역대최악후보)

대통령신임 40%미만으로 추락

정윤회사건 일파 만파

비서실장 인선 16개월 소요된 정권

이완구 총리 인선 과정 치부상 난맥

공안정국 회귀

최순실 국정농단

촛불집회1500만명 탄핵 요구

탄핵 결정 대통령 하야

 

19대 문재인 대통령(2017510~  )

 




2018.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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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대통령들
우리나라의 대통령들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알고 싶은 점 : 

1. 우리나라의 대통령들의 이름
2. 재위 기간 (예 : ()대 대통령, 20XX년 ~ 20XX년)
3. 업적/우리나라에 어떤 변화를 주었는지

제 1∼3대 대통령 이승만 [李承晩, 1875.3.26 ~ 1965.7.19] 

 

출생 : 1875년 황해도 평산 / 정치가·독립운동가·초대대통령. 독립협회, 한성임시정부,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광복 후 우익 민주진영 지도자로 1948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4선 후 4·19 혁명으로 사임했다.

초대에서 3대까지 권좌에 있었다. 대통령직에 오른 경로는 두 가지 방법이었다. 초대는 국회의원들의 간선(間選)이고 2,3대는 국민들이 직선(直選)이었다. 

전 대통령 이승만의 치적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평가가 다양하다는 것은 치적 재단(裁斷)에 사용한 자[尺]가 여러 종류라는 뜻이다. 첫째가 사상적인 자. 둘째가 주·객관의 자(개인적인 이해관계도 포함). 셋째가 부화뇌동(附和雷同)의 자. 이 밖에도 여러 종류의 자가 더 있을 듯하다.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극히 대립적이다. 그 대략을 열거하면 
이승만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없다. 남북 분단의 원흉이다. 청산했어야 할 친일파를 기용한 것이 돌이킬 수 없는 과오다. 정치기반이 없는 이승만이 친일파 기용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서울을 사수한다는 방송을 틀어 놓고 혼자 도망쳐 많은 국민을 희생시킨 민족 반역자다. 미국과 손을 잡지 않았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다.

찬·반 이론이 많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부정 선거의 원흉으로 많은 젊은이들의 목숨을 빼앗고 국민의 피를 보고서야 국민들의 원성에 추방당하여 시신마저 고국의 땅에 묻히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오만이었거나, 종신 대통령의 권좌를 놓지 않으려는 욕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사오입으로 개헌을 하지 않고 법을 따라 순리로 살았다면 반대는 있었겠지만 건국의 국부(國父)로 추앙받을 대통령 이었건만 지나친 욕심 때문에 평생 쌓은 공적을 무너뜨린 인물이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은 거의 신화적인 존재였다.
미국에 의해 독립이 됐는데 그 거대한 나라 미국의 후원으로 대통령이 된 것이고 머리는 희고 얼굴은 귀족풍의 노신사로 조선왕조시대의 왕 같은 풍모를 지녔다. 게다가 이승만은 족보상으로 양녕대군의 후손으로 어떻게 보면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으로 보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또 자질구레한 일은 장관에게 맡기고 본인은 큰 틀의 결단을 내리는 말하자면 큰 정치를 하였다. 

그래서 "반공포로석방"이라 던지 좀 억지가 있지만 대한해협에 평화선을 그어서 일본선박이 못 오게 한 사건, 또 대마도를 반환 하라는 성명 이라 던지 세인을 깜짝 놀라게 하는 사건을 만들기도 하였다. 그만큼 큰 정치를, 큰 것만 보고 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런데 그는 미국에서 배우고 미국의 민주주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인데 한국에서는 계속 욕심을 부리며 무리한 개헌을 하여 종신대통령의 길을 즉, 독재의 길을 걷는다. 당시 세간에는 이승만이 인의장막에 묻혀서 세상 물정을 몰라서 그렇다고 하는 말도 많이 퍼져 있었다. 그러나 그건 아니다 모든 걸 알고 지시하고 그랬다. 

종신대통령의 개헌도 국회에서 부결된 걸 본인이 직접 나서서 사사오입사건을 일으킨 걸보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 유리한 국면을 만들어갔던 것이다. 여하튼 그는 혼란기의 초대대통령으로 대한민국이 확실히 자유진영에 몸담도록 줄서기에는 성공했고 다만 말년의 욕심으로 독재자의 오명을 쓰고 물러난 것이다.
  

업적 : 거제도 반공포로 석방, 독립운동 외에는 업적이 없다.
이승만 전 대통령 저서 <한국교회 핍박>

제 4 대 대통령 윤보선(尹潽善)(재임기간 1960.08 ∼ 1962.03)

 

 출생 : 1897년 충남 아산 / 정치가. 4·19혁명으로 이승만정권이 붕괴된 후 대통령선거에 민주당후보로 입후보하여 제4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5.16군사정변으로 인하여 1962년 사임하고, 1963년 민정당을 창당하여 그 해 대통령선거에 후보로 출마, 박정희와 겨루었으나 실패하였다.

이승만이 하야하고 국민투표로 당선된 윤보선이 내각책임제 대통령에 취임하였으나 1961년 5월 16일 박정희의 군사 쿠데타로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1962년 3월 22일에 사임하였다. 사임 후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권한을 대행하였다. 윤보선은 대통령으로써 쿠데타 세력을 통제하지 못하고 본인이 물러난 유약한 면이 그가 남긴 거울이다.

윤보선 대통령은 4.19혁명으로 세운 2공화국에서 내각책임제하의 명목상의 국가원수로 실권을 잡은 장면총리와의 불화로 군사쿠데타가 일어나자 오히려 두둔하는 듯한 발언을 하여 후에 정치인들에게 의심의 눈초리로 보인다. 5.16후 더 이상 군부에 이용당하지 않으려고 사퇴하고 만다.
  

업적 : 대통령 이라기보다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퇴임으로 그 자리를 잠시 채워준 대통령이라고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약 1년 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만 최고 권력자 위치에 앉아 있었던 인물이다.

뭐 억지로라도 만들어 내자면, 이승만 전 대통령의 독재 청산을 하겠다는 의지 하에 사소한 이것저것을 많이 뜯어 고치려고 했었다.

윤보선 전 대통령 <구국(救國)의 가시밭길>

제 5∼9대 대통령 박정희(朴正熙)(재임기간 1963.12∼1979.10)

 

출생 : 1917년 경북 구미 / 군인·정치가. 5.16군사정변을 주도하였고 1963년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67년 재선된 후 장기집권을 위하여 3선 개헌을 통과시켰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저격으로 급서하였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뒤 국회를 강제 해산하고 야당 정치인과 재야인사들의 말문을 막고 1962년 3월 22일 대통령 윤보선의 사퇴 이후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하였다.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의 윤보선을 물리치고 당선되었다. 제6,7대에서도 선거를 통해 당선 되었으나 8,9대는 유신 체제로 헌법을 개정하여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의원들에 의하여 선출되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치적에 대한 평가도 이승만 못지않게 양극화 되어 있다. 그에 대한 평가를 보면 지금의 대한민국으로 성장한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덕분이다.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국법을 짓밟고 정권을 강탈한 무법자다. 1961년에서 1979년 까지 18년간에 경제를 11배로 성장시켰다.  애국지사들이 목숨을 걸고 투쟁하던 기간에 친일을 한 반역자다.  야당의 극열한 반대를 무릅쓰고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을 비롯한 시기적절한 정책으로 국가를 발전시켰다. 고급 장교로써 남로당과 관련이 있었던 간첩이다. 민족의식의 철학이 없었던 개인 주의자다. 대기업 위주로 경제를 성장시켜 빈부의 차를 극심하게 만들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장점과 단점이 많은 대통령이었다. 
이분처럼 명암이 엇갈리는 분도 없다. 쿠데타, 유신독재, 긴급조치의 과(過)와 오천년 역사 이래의 보릿고개 타파, 세계에 유래 없는 경제발전, 세계10대 공업국진입 등의 공(功)으로 아직도 의견이 나뉘는 분이다. 

그러나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나라의 가난을 물리치려고 노력하고 열정을 쏟고 국민을 단결하게 하고 그 힘으로 온 국민에게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안겨준 것이다. 가난을 없애고 우리나라를 경제대국으로 안착 시켰으며, 유신독재로 다른 면을 보이고 혁명가답게 측근에 의해 총격으로 서거 하였다.
  

업적 :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대한민국을 세계에서 11번째로 잘 사는 나라로 만들었다. 또한 '새마을운동'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상징적인 업적 이라고 할 수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저서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 <민족의 저력> <민족중흥의 길> <국가와 혁명과 나> <지도자의 길>

박정희 전 대통령은 대구사범을 나와 교사로 재직하다가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할 때는 일등의 성적이었으나 조선 사람에게 단독으로 일등을 줄 수 없다는 일인들의 간교(奸巧)로 일본인과 공동 일등으로 졸업했고, 다시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편입하여 일본인과 공동 일등으로 졸업한 우수한 수재였고 군사쿠데타를 일으킬 만큼 담대하고 강인한 의지력의 소유자다. 대통령에게 필요한 자질은 우수한 두뇌와 강인한 의지력이 필수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제 10대 대통령 최규하(崔圭夏)(재임기간 1979.12∼1980.08)

 

출생 : 1919년 강원도 원주 / 정치가·외교관. 1945년 서울대학 사범대학 교수에 취임하였다가 1946년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으로 옮기면서 농림행정에 종사, 1951년 농림부 농지관리국장 서리를 거쳐 1951년 외무부 통상국장이 되면서 외교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59년 외무부차관이 되었고 1967년에는 외무부장관에 발탁되었다. 1975년 국무총리에 기용되고 1979년 대통령권한대행을 거쳐 그해 제 10대 대통령에 취임했으나 8개월 만에 사임하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급서하자 같은 해 12월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최규하 전 대통령을 권한대행에서 10대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재임 기간도 짧았지만 앞의 두 분과는 달리 치적에 대하여 분분한 이론이 없는 분이다. 그에 대한 일부 자료를 보면 확실히 ‘능력은 있었는데 힘이 없던 분이다’라는 평이 있다. 
평생을 연탄보일러로 사신 깨끗한 대통령으로 기록된 분이고, 8개 국어를 구사할 능력을 가지신 분이다. 광주 민중 항쟁 사태의 수습을 끝내고 대통령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 사임에 대하여 의문을 가진 기자들의 질문에 “과오 없는 인간은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과오는 과오대로 반성하면서 미래의 삶에 시행착오를 줄이는 바탕으로 삼고 업적은 우리나라의 자랑으로 삼아야 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는 깨끗하고 유능하였으나 유약한 거울을 남겼다. 
그러나 전두환의 압력으로 1980년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1981년 4월부터 국정자문회의 의장으로 활약하였다. 사회로부터 최 주사라는 말을 들을 만큼 전두환의 그늘에 있던 대통령이다. 
  

업적 : 허수아비 대통령 이라는 소리만 들었다.
당시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중심으로 신군부 세력. 하나회 세력에게 당하며 살다가 결국 그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최규하 전 대통령 저서 <팔순기념문헌집 '玄石片貌'>

제 11∼12대대통령 전두환(全斗煥)(재임기간 1908.09∼1988.02) 

 

출생 : 1931년 경남 합천 / 군인·정치가. 신군부가 12.12 군사정변을 일으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81년 1월 창당된 민주정의당의 총재가 되어 2월 개정된 새 헌법에 따라 제1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재임기간 중 물가안정, 서울올림픽 유치, 무역흑자 등을 이루었으나 군부독재라는 비판을 받았다.

최규하 대통령의 사임을 계기로 11대 대통령으로 취임 하였고, 12대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 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에서 대의원들의 선거로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치적에 대하여는 법원의 판결에 따라 형을 살다가 나왔다. 다만 광주의 사태가 민주화운동으로 결정됨에 따라 그들의 명예 회복과 보상에 많은 비용을 국고에서 지출하였을 것이다.  그의 창안으로 국정을 개발한 정책개선은 없고 수천억 원을 긁어모아 탐욕의 흉한 거울을 남겼다.

79년 10.26으로 박정희가 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살해되자 국군 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은 박정희 암살사건 합동수사 본부장을 역임하였다. 박정희 살해 현장에 있던 계엄사령관 정승화를 조사하려다가 12.12사태가 일어나고 전두환은 일약 실력자로 전면에 나서게 된다. 그해 12월엔 서리였던 최규하가 대통령에 취임한다. 문제는 우리나라 정부나 정치계가 전두환을 실력자로 인정하고 대통령보다 그에게 모든 정치 현안을 보고하기 시작 한다. 그러니 전두환은 자신감이 생기고 권력 탈취를 시도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5월 17일 밤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하고, 전 현직국가원수 비방금지·정치활동중지·대학휴교 등 계엄포고 10호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학생, 정치인, 재야인사들이 구속된다. 그리고 18일 부터 광주에는 공수부대가 투입되고 이후 27일 광주민중항쟁이 끝날 때까지 광주는 군인들에 의한 학살이 자행된다. 이것이 광주 민주화운동이다. 

그 후 전두환은 특별기구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들고 대통령이 임명한 장관을 해임하고 정치 전면에 나서기 시작한다. 최규하 대통령은 허수아비 대통령으로 전락하여 사임을 하게 되고 전두환은 체육관에서 투표해서 대통령에 당선되어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다. 또 깡패를 없앤다는 명분으로 삼청교육대를 만들어서 깡패나 부랑자만이 아니라 체제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까지 마구잡이로 잡아다 마치 북한의 노동수용소처럼 만들었고 언론사 통폐합을 통한 언론탄압, 이때 TBC방송국이 KBS로 통합됐다.

언론사를 자기 마음대로 통폐합하고 자신의 집권에 반대하는 수많은 언론인들을 강제 해직하고 언론을 자기의 홍보 도구로 하여 당시 땡전뉴스가 유명하게 된다.
9시 땡하고 뉴스 시작하면 전두환 대통령 뉴스부터 시작한 걸 땡전뉴스라 한다.
7년 단임의 임기가 끝나갈 무렵 후임 대통령선거를 국민의 여망인 직접선거를 고치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것이 87년 4월 13일에 발표한 4.13 호헌조치다.

이런 와중에 박종철 열사의 고문치사사건이 알려지게 되고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발족하여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된다. 전두환은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에 계엄령으로 맞서려 했으나 요즘 미국의 발표로는 미국의 개입으로 더 이상 버틸 힘을 잃고 대통령후보 노태우가 6.29선언을 발표하면서 6월 항쟁은 끝나게 된다. 그는 재임 중 기업인으로 부터 수천억의 돈을 받아 아직도 환수 중에 있다.
전형적인 독재정권의 단면을 전두환은 보여주었다.
  

업적 : 88올림픽 개최권을 획득 하였으며 86아시안게임 개최를 성공적으로 치뤘고, 당시의 세계 경제의 3저 현상으로 경제 발전을 크게 이룩하였다.
또한 삼청교육대의 영향으로 우리나라 역사상 범죄, 살인, 성폭행 등의 사고가 가장 적었다. 
  

제 13대 대통령 노태우(盧泰愚)(재임기간 1988.02∼1993.02) 

 

출생 : 1932년 대구 / 군인·정치가. 제13대 대통령(재임 1988~1993). 내무부 장관, 국회의원 등을 지냈다. 대통령 재직 중 러시아, 중국과의 국교를 수립하였다. 무궁화대훈장, 보국훈장 국선장, 을지무공훈장 등을 수상하였다.

광주의 민주화운동을 치루고 시대의 흐름이 유신헌법은 개정이 불가피한 시기였으나 머무적거리다가 국민들 항의에 못 이겨 국민의 직접 선거로 당선 되었다. 노태우도 비자금이 뇌물로 판정되어 형을 살았으며 법원에서 언도한 추징금액이 무려 2628억9500원이다. 뿐만이 아니라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선거자금으로 3000억 원을 줬다고 하니 이로 미루어보면 이들은 국민의 재산을 보호하고 헌법을 수호하려고 대통령을 한 것이 아니고 한 몫 잡으려고, 장성 출신이면서 보통 사람으로 위장하였던 인면수심의 거울을 남겼다.

노태우는 전두환의 육사동기로 12.12사태 주역의 한사람으로 전두환 집권 후 항상 2인자로 군림하며 87년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 김영삼의 분열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노태우는 전두환보다 소심하고 어떠한 정책다운 정책을 펼치지 못하고, 당시 대통령이 되려는 욕심에 미국 등의 강대국 지지를 받으려는 목적으로, 한반도 비핵화선언을 한다. 이것은 한국은 영원히 핵폭탄을 갖지 않겠다는 약속을 세계를 향해 선언 해버린 것이다. 

북한은 그런 말을 한 적도 없는데 스스로 핵무장이라는 마지막카드를 아무런 대가 없이 포기한 것이다. 게다가 북진정책(북쪽으로 향하자 즉 공산권과의 수교)을 한다면서 소련에 수 십 억 달러를 차관으로 주어 아직도 그 돈을 못 받고 있는 형편이고 역시 전두환처럼 기업가로부터 수천억을 받았다. 그중 대부분은 환수됐다. 그를 가리켜 흔히 물태우, 물통이라 부르는 이유가 정책다운 정책을 펼치지 않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업적 : 88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였으며 남북 UN공동가입을 이뤄냈다.

노태우 전 대통령 저서 <회고록>

제 14대 대통령 김영삼(金泳三)(재임기간 1993.02∼1999.02)

 

출생 : 1927년 경남 거제 / 정치가. 9선 의원이었으며 1985년 김대중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직을 맡았고, 1987년 통일민주당을 창당하여 총재가 되었다. 1990년 민주자유당을 창당하고 대표최고위원이 되었다. 1992년 14대 대통령선거에 당선되어 문민정부를 출범시켰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9선 의원이라는 한국정치사에 특출한 인물이고 민주화의 화신인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자서전에는 그렇지 않고 말은 민주화이나 행동은 독재자로 기록되어 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주선한 3000억 원의 힘으로 대통령에 등장한 김영삼은 임기 중에 IMF를 불러들여 막대한 국부를 유출시켰고 중산층은 무너지고 서민들은 엄청난 고통을 치르게 하였고 국가 경제를 파탄시킨 거울을 남겼다.

김영삼은 노태우의 민정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 자신의 민주당을 3당 합당하고 민자당을 결성하여 대표최고위원이 되어 노태우의 후임으로 92년 대통령에 당선됐다. 즉 지역감정을 활용한 만들어진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다. 취임초기에는 엄청난 인기를 누리며 국민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으나 계속되는 실책이 거듭되면서 지지도가 내려앉더니 급기야 1987년11월 IMF를 겪게 만든다. 그의 재임 중엔 삼풍백화점 붕괴, 대구지하철공사장사고, 여객선 전복사고, 비행기 추락사고 등 사고가 계속 발생해 사고공화국이라는 별명도 그때 나온 것이다. 

그러나 김영삼은 모든 사고를 전임자들의 잘못으로 말하여 여론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또 그의 차남 김현철이 부정사건으로 대통령 아들로는 처음으로 구속되는 사건도 있었다. 그는 큰 사건이 터지면 국면전한용으로 다른 사건을 만드는데 그 대표적인 사건이 전두환 노태우 구속사건이다. 구속 직전까지 성공한 쿠테타는 역사에 맡기자면서 그들의 정당에 들어가 대통령이 된 사람답게 그들을 보호하려는 것으로 보였으나 지지도가 떨어지자 국면전환용으로 그들을 쿠테타사건으로 구속시킨다. 물론 그들은 부정부패 사건에도 연루되어 구속돼야 마땅하나 김영삼은 국면전한용으로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김영삼은 IMF이후 일 년 간 우리나라에 대통령이 없는 것처럼 지내다가 퇴임하였다.
  

업적 : 초반에는 전 세계에서 성공한 적이 없는 국가 경제에 있어서는 가히 개혁 이라 말 할 수 있는 금융실명제를 실시하였다,
그 모든 업적은 IMF 라는 엄청난 나라에 짐을  만들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 저서 
 <40대 기수론> <지도자의 길> <인생을 뜻있게 보내려면> <정치는 길고 정권은 짧다> 
 <나와 조국의 전신> <회고록>


제 15대 대통령 김대중(金大中)(재임기간 1998.02∼2003.02)

 

출생 : 1926년 전남 신안 / 정치가.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아태평화재단)을 조직하여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 50인' 중 공동 1위에 선정되었고, 200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평생 삶의 목표가 대통령인 듯 그는 세 번 실패하고 네 번째 출마로 뜻을 이루었다. 그 과정에는 몇 번의 번의(翻意)를 거듭하면서 소망을 이룬 것은 전라도 도민의 단결된 열망이 뒤를 받쳐주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 열망에는 경상도 출신의 대통령이 전라도를 홀대한다는 생각이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유는 어쨌든 칠전팔기(七顚八起)로 대통령에 취임하여 피로 갈라 선 북한을 찾아가 화해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많은 신어(新語)를 만들기도 했다. 그가 만든 신어 중에‘햇볕정책’이 있고, 세계적인 철학자 소크라테스(Socrates)는 악법도 법으로 인정하였으나 김대중은‘악법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남겼다. 전임 대통령 김영삼이 불러들인 IMF를 벗어난 것이 그의 업적 중의 하나다. 남북 화해의 과정에는 고 정주영 회장의 소떼도 한 몫을 했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 사형 선고를 받고도 집념을 성취시킨 거울을 남겼다.

김영삼의 국정실패로 다시금 회생한 것이 바로 김대중 대통령이다.
만약 김영삼이 실패를 안했다면 김대중은 김영삼의 퇴임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져 3김 시대가 막을 내렸을 텐데 김영삼의 실패가 김대중을 살린 결과가 된 것이다. 1997년 12월 대통령에 당선되고 1998년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그 역시 많은 지지를 받았다. 그의 치적으로는 유명한 햇볕정책으로 2000년 6월 13~15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대로 평양을 방문하여 6.15남북공동선언을 이끌어 냈다. 

또한 50여 년 간 지속되어 온 한반도 냉전과정에서 상호 불신과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평화에의 새로운 장을 여는 데 크게 기여한 공로로 200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러나 IMF처리과정에서 국민의 혈세가 공적자금으로 부실기업에 유입되어 많은 자금을 회수하지 못하게 되었다. 또한 경제를 살린다는 미명하에 크레디트카드를 남발하여 카드부실을 만들어 경제에 먹구름을 끼게 했다.
  

업적 : 김대중 대통령은 IMF 라는 국가 위기를 극복하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남북관계를 더욱 평화롭게 이끌어 나가고자 햇볕정책을 실시하였고 햇볕정책은 이곳저곳에서 의견이 상반되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아무쪼록 결과적으로는 남북정상회담을 함으로써 6.15 남북 공동성명발표로 통일에 있어서 한발자국 앞섰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노벨상 중에서 가장 권위가 있다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저서
<분노의 메아리> <내가 걷는 70년대> <독재와 나의 투쟁> <김대중 옥중 서신> <행동하는 양심으로> <대중경제론> <민족의 새벽을 바라보며> <공화국 연합제> <한국 민주주의의 드라마와 소망> <세계 경제 8강으로 가는 길> <한국의 통일>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나의 길 나의 사상> <김대중의 21세기 시민 경제 이야기> <나의 삶 나의 길> <대중 참여 경제론> <내가 사랑한 여성> <이경규에서 스필버그까지>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경천애인> <21세기와 한민족> <김대중 자서전 - 역사와 함께 시대와 함께>


제 16대 대통령 노무현(盧武鉉)(재임기간 2003.02∼2008.02)

 

출생 : 1946년 경남 김해 / 제16대 대통령. 인권변호사 출신으로, 1988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정치에 입문한 뒤 5공 비리특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1990년 3당 합당에 반대하여 민주당 창당에 동참하였고 해양수산부 장관을 거쳐 2002년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퇴임 후 고향인 봉하마을에 귀향하였으나 재임 중 친인척 비리로 조사받다가 부엉이바위에서 투신, 서거하였다.

서민 대통령으로 알려지고 김대중 전임자의 뒤를 이어 평양을 방문했으나 남북 교류의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본인이 돈으로부터 자유롭다 보니 누구도 할 수 없는 정치권의 개혁으로 돈 정치의 표상인 차떼기 정치의 진상을 파헤친 것과 사회의 각 분야와 소통할 수 있었다는 것이 업적이다. 

집권 당시 사건의 중압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운의 거울을 남겼다.
누구도 그가 대통령이 되리라 생각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여하튼 우여곡절 끝에 2002년12월 대통령에 당선 됐다.

그만큼 인지도도, 세력도 없는 돌출인물이다 보니 각처에 있는 보수(여야 기득권세력이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 같음)권들로부터 대통령으로 인정받지 못한 일들이 발생하게 된다. 상상 할 수 없는 평검사가 대드는가 하면, 취임 초기엔 신선한 서민 이미지로 환영 받았으나 취임 첫 행사가 신문사 고발이었고, 선거관리위원회로 부터 주의도 받았으나 사과하라는 야권의 공세에 특유의 오기로 버텨 국회로 부터 탄핵을 받았으나 국민들의 약자 편들기에 편승해 다시 기사회생 한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저서
<여보, 나 좀 도와줘> <노무현이 만난 링컨>

제 17대 대통령 이명박(李明博) (재임기간 2008.02∼2013.02)

 

출생 : 1941년 일본 오사카 / 제17대 대통령. 고려대학교 상과대 학생회장을 지냈으며 현대건설에 입사해 단시에 최고경영자에 올랐다. 제14·15대 국회의원, 2002년 서울시장을 지냈고 제17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7% 성장, 4만 불 소득, 7대 선진국'의 747성장을 목표로 내세우고 지속가능한 발전 위주의 녹색 성장을 패러다임으로 삼았다.

전임 두 서민위주의 대통령(김대중, 노무현)의 집권 기간을 잃어버린 10년으로 평가하고 대기업 위주의 경제를 일으키겠다는 공약으로 4대강개발, 청계천개발 등을 하였으며, 많은 국민의 지지를 받아 등장한 대통령이다. 그러나 남북문제와 대기업 특혜 정책으로 빈부의 차가 더욱 벌어지니 국론이 분열된 듯하다. 형의 형무소행을 지켜보는 거울을 남겼다.

이명박대통령 저서 
 <신화는 없다> <절망이라지만 나는 희망이 보인다> <청계천은 미래로 흐른다> <온몸으로 부딪쳐라> <어머니> <이명박의 흔들리지 않는 약속> <6·3 학생운동사>


제 18대 대통령 박근혜 (朴槿惠)(재임기간 2013.02 ~  현재)

 

출생1952년 2월 2일 대구 /신체B형 /수상2013년 영국 바스대십자훈장 
  
대한민국의 정치인, 사회사업가이다. 2013년 2월 25일부터는 대한민국의 제18대 대통령이다. 본관은 고령(高靈) 박정희 전대통령과 육영수의 딸로 경상북도 대구시 삼덕동(현 대구광역시 중구 삼덕동)에서 태어났다. 

1963년 부친 박정희의 대통령 취임 이후 청와대에서 성장하였고, 1970년 서강대학교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였다. 1974년 모친 사후부터 1979년 10·26 사건 이전까지 퍼스트 레이디의 직무를 수행하였고, 부친 서거 이후 청와대에서 나와 육영재단 이사장과 정수장학회 이사장 등을 지냈다. 1998년 정계에 입문하여 1998년 4월 2일에 실시된 재 보궐 선거에서 제15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이후 제19대까지 5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2004년부터 2006년까지 한나라당의 대표최고위원을 역임하였으며, 2007년 한나라당의 제17대 대통령 선거 후보 경선에 출마하였지만 이명박에게 석패하였다. 

이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을 지냈고, 새누리당의 대통령 선거 후보로 선출되어 2012년 12월 19일 실시된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51.6%의 득표율로 민주통합당의 후보 문재인을 누르고 당선되었다. 2013년 2월 25일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으며,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자 1987년 대한민국 헌법 개정 이후 최초의 과반 득표 대통령, 최초의 이공계 출신 대통령, 독신 대통령, 부녀 대통령으로 기록되었다. 어머니 육영수에게는 첫 소생이었으나 아버지 박정희는 이혼 경력과 전처소생의 장녀 박재옥이 있었으므로 박정희에게는 차녀가 된다. 여동생 박근령과 남동생 박지만이 있다. 
현직대통령으로 평가는 퇴임 후 하기로 한다.

대한민국 64년간에 대통령을 역임했던 사람들의 출생지를 지역 별로 보면
 황해도 1명(이승만), 충청도 1명(윤보선), 경상도 5명(박정희, 노태우, 전두환, 김영삼, 노무현)
강원도 1명(최규하), 전라도 1명(김대중), 일본 1명(이명박)
  
당선 시 연령 별로 보면, 70대가 2명(이승만, 김대중), 60대가 5명(윤보선, 최규하, 김영삼, 이명박, 박근혜)
50대가 2명( 노태우, 노무현), 40대가 2명(박정희, 전두환) 이다. 
대통령의 권한 별로 보면 윤보선 대통령은 내각 책임제였고, 총리는 장면이었다. 나머지 분들은 모두가 대통령 중심제였다.

2018.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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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