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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전북익산에서 B-29폭격기의 폭격이 이루어진 장소
오바다 조회수 2,974 작성일2006.11.05

6.25전쟁 당시 전라도에서도 민간인 학살 사건이 벌어졌었는데요,

 

그중,

 

전북익산에서 B-29폭격기의 폭격이 이루어진 장소좀 가르쳐 주세요.

 

제발제발제발제발제발 부탁부탁부탁부탁 합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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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9년, 노근리 사건이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시작하면서, 다른 지역에서도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 사건이 봇물처럼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99년 9월과 10월 즈음에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미군의 양민학살 사건 현장은, ‘충북 단양군 영춘면 상2리 3백여명, 경북 울릉군 독도 150명, 충북 영동군 황간면 120여명, 전북 이리시(현 익산시) 이리역 폭격 54명 사망,3백여명 중경상 등 17군데로 집계된다.

99년 11월 <한국전쟁과 양민학살>이라는 논문을 발표한 당시 동국대학교 사회학과 강정구 교수는 전쟁 중 양민학살에 대한 포괄적 양상으로 4가지를 정리했다. 그 첫째는 한국전쟁의 '작은 전쟁 시기'로 48년 2·7 구국투쟁에서 6·25 전쟁까지의 양민학살이며, 둘째는 6·25전쟁 초기의 양민학살이다.

전쟁 초기에 발생한 보도연맹원에 대한 이승만 정권의 조직적이고 집단적인 학살, 노근리나 이리역 폭격 사건과 같은 미군들에 의한 체계적인 학살, 인민군이 남한을 점령할 당시 토착 공산세력과 인민군에 의한 남한 양민의 학살등이 바로 전쟁 초기의 양민학살 양상이다.

동국대 강정구 교수는 ‘50년 7월 11일에 발생한 이리역 폭격 참사는 이 둘째 시기에 발생했으며, 미군에 의한 체계적인 양민학살사건’이라고 분류했다.

삐라처럼 새카맣게 뿌려진 폭탄

앞서 거론한 미군들에 의한 양민학살 사건이 발생한 현장 가운데 국가기관의 사료에서 미군기의 폭격으로 인한 참상 기록이 분명하게 남아 있는 현장이 바로 미군기의 이리역 폭격 참사다. 이리역 대참사는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을 구체적으로 입증해 낼 수 있는 정부 기관 간행 문서에 기록이 남아 있는 유일한 사례이다.

6·25 전쟁 직후인 1955년에 옛 교통부가 발간한 <한국교통동란기>에는 당시 참상을 4쪽 분량에 걸쳐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한국교통동란기> 145~147쪽에 기록돼 있는 이리역 참사 관련 내용을 일부 소개한다.

7월11일 아침부터 구름 개인채 몹시 무더운 날이었다. 이날 이른 새벽 작전상 이리에서 충주로 통하는 금호상의 교량이 아군에 의하여 폭파되었고, 원인도 모르게 강경, 대전간 통신이 두절되면서부터 이리시에는 전운이 가까워 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어 자못 긴장된 분위기에 쌓여 있었다. 원인을 알 수 없이 통신이 두절됨에 따라, 이리 지구 철도 종업원은 전원이 직장에 출근해서 기관차를 정비해놓고 하시하처에라도 이동할 수 있도록 대기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이날 오전 11시에 구름 덮인 서남방 상공으로부터 난데없이 중폭격기 두 대가 나타나더니 이리지구 상공을 순회하기 시작했다. 우군기 B29가 틀림없었다. 대기 중 종업원은 모두들 실외로 뛰어 나와 우군기를 맞으며 환호했다. 그러나 누가 생각하였으랴. 참전후 최초의 출동이었으리라. 지리에 어두운 우군기는 교통부 직원들의 환호를 적군으로 오인하였던 것이리라.

▲ 55년 발간돼 철도박물관에 보관중인 <한국교통동란기> 중 이리역 내용
ⓒ2003 최인

역사와 운전 사무소를 비롯하여 모든 철도 시설과 아울러 환호하는 종업원들 두상(頭上)에 그대로 폭탄의 세례를 주었던 것이다.
“B29야, B29야 하면서 모두들 좋아하였지요, 그러더니 기수를 아래로 돌려 저공으로 내려오면서 까만 덩어리들을 떨어뜨리기 시작하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어요, ‘빠라다, 삐라다,’하면서 모두들 외치는 순산 '쾅','쾅' 요란한 폭발과 함께 순식간에 먼지와 연기로 눈앞이 보이지 않는 생지옥이 되었지요, 삐란줄 알았지 누가 폭탄인줄 알았겠습니까?”

부상자 중 한 사람인 당시 이리운전사무소 기술주임 소 모씨는 후일, 그때의 체험담을 이렇게 말하였다. 공격목표는 구내 운전사무소였다. 일대에 산재하여 작업중인 기관차는 물론 구내시설에 대하여 가공할 폭격을 하였다. 폭격을 받으면서도 아방(我方)인 것을 표시키 위하여 피신할 생각은 않고 나서서 두 손을 내저으며 소리소리 외쳤으나 고도 수천리 상공의 비행기에 들릴 리가 없었다.

태극기를 몸에 두르고 외쳤으나…

생각다못하여, 태극기를 두르며 사무소로 뛰어갔다가 그대로 폭풍과 함께 멀리 산산히 흩어졌다.
…중략…
"'쾅' 소리와 함께 건너편 기관고에 기계 수선을 하던 B군은 50m 상공으로 날랐는데 그 육체가 하늘로 올랐다가 떨어질적에는 산산조각이 나서 저쪽 창고앞에 떨어졌지요. 나는 내몸은 어떻게 되었는지 생각도 못하고 그쪽으로 기어가려고 힘써 보았으나 웬일인지 몸이 움직여지지 아니했어요. 얼떨떨한 정신을 수습해 가지고 앞을 보니 내 다리 하나가 삐뚤어져 있었어요, 나는 놀랐다기 보다 하도 신기로웠어요. 다리가 없는데 목숨이 붙어 전우를 구출코져 달려 가려는 그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했어요.“ 병원에서 절명한 K씨의 말이다.

“아, 무서웠어요, 사람의 팔과 머리, 다리가 난데없이 내 머리위에 벼락을 쳤을때 나는 기절하고 말았어요. 그 뿐인가요. 더위에 못견디어 몇몇 친구들은 기관차 그늘에서 환담하며 B29가 왔다고 서로들 감격한 눈으로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아 어느새 옆에 서 있던 기관차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쓰러져 그들을 그대로 그 무거운 몸뚱아리로 눌러 죽여버렸어요.“ 이것도 한 부상자의 목격담이다.

아군의 오폭으로 이리역 구내에 이 불의의 참상이 일어났었다. 이 결과 이리지구 철도시설 전부를 산산히 부셔버렸고 54명이란 가공할 수의 순직자와 중경상, 무려 300여명이란 미증유의 참사를 일으켰다. 여기 그때 산화한 고인들을 들어보면 …이하 생략…

한국교통동란기는 이어 이리역 폭격 참사에 교통부가 구호반을 급파하고 구호활동을 전개하던 중 7월16일 대전지방 완전철수령과 아울러 이리지구 종업원의 후퇴명령을 내렸을 때 금강 하류를 도하한 적의 선발대가 강경, 논산에 이르게 돼 아슬아슬한 적전 구호작업은 도중에 포기하고 철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국교통동란기>를 비롯해 <한국철도백년사>, <철도 50년사> 등에는 이 사건과 관련해 당시 이리운전사무소 직원만 54명이 희생됐으며, 3백여 민간인이 중경상을 입는 대참사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국교통동란기>는 철도박물관에 단 한권만 남아 있는 희귀본이라고 박물관 관계자는 밝혔다. 또 정부 기관 공식문서에 미군기의 폭격으로 대참사가 있었음을 전달하는 부인할 수 없는 기록이다.

과연, 오인 폭격이었을까?

<한국교통동란기>는 오폭으로 수많은 희생이 발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한국철도백년사> 연표에도 오인폭격으로 기록돼 있다. 그렇다면 미군기가 과연 오인포격을 했을까?

오인폭격이 아니라는 정황을 차례차례 짚어보도록 한다.
첫째로 미군기의 이리역 폭격은 공식적인 기록에 비춰봐도 북한군이 당시 이리지역에 진입하기 훨씬 전에 발생했다. <전라북도지>에는 미군기의 이리역 폭격참사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전북지역에서의 북한군과 첫 교전 일시가 50년 7월 19일로 기록돼 있는 만큼 미군기의 이리역 폭격 참사가 발생한 7월 11일은 북한군이 이리지역에 진입하기 훨씬 전의 일이다.

그렇다면 북한군이 진입하기 8일전에 미군기가 이리역을 폭격할 이유가 있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한국전쟁에 투입된 미 제5공군의 임무와 투입시기를 살펴보면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전사편찬위원회>가 펴낸 <한국전쟁사> 3권에 기록된 미 제5공군의 활동 상황을 살펴 보면 미 제 5공군의 임무는 주요 교통로를 파괴해 후방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그로인해 교량과 철도를 공격 목표 삼아 집중적인 폭격을 했던 사실을 찾아 볼 수 있다. 이리역 폭격 하루전에 한국으로 이동한 미 제5공군은 북한군의 남침 저지를 위해 한강 이남을 중심으로 작전을 펼쳤으며 폭격기의 주 공격 목표는 교량과 철도, 기관차 등이었다고 <한국전쟁사>는 적고 있다.

전쟁 초기인 7월1일에는 당시 미 극동공군 사령관인 스트레트 메이트 사령관이 북한군의 남진 속도를 지연시키기 위해 B29승무원들에게 한강 이남의 주요 교량을 남김없이 모두 파괴하라는 명령을 미 5공군에 지시한 기록도 있다.

이리역 폭격 하루전인 7월10일부터 26일까지 17일동안 미군 폭격기의 출격 횟수는 모두 130회로 개전전부터 10월말까지 245회에 걸친 출격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미 공군은 이 작전을 통해 천백여개의 폭탄을 투하해 5백17개의 목표물을 파괴하는 ‘철도차단성과’를 거뒀다고 평가하고 있다. <한국전쟁사>는 이 작전을 '미 제5공군의 근접 항공지원작전'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이리역폭격 참사도 이 작전으로 인한 참사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CBS 전북방송 특별취재팀이 99년 10월부터 두달여에 걸쳐 취재한 결과, 오인폭격에 대한 두가지 가능성이 모두 앞뒤가 맞지 않는 것으로 확인됐다.

하나는 실제 목표지점이 대전역이었다는 주장이다. 만경강과 금강을 착각한 것이 이리역을 대전역으로 잘못 알고 폭격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미군기가 이리역을 폭격한 시점이 1950년 7월11일로 당시에는 모든 전폭기가 대전의 엔젤로 통제소로부터 지휘를 받고 미 24사단과 합동작전본부가 대전에 자리잡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성립될 수 없다.

둘째 수원으로 잘못 알고 폭격했다는 주장이다. 이 역시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리역과 수원역은 거리가 무려 200km 이상 차이가 나고 지형상으로도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수원역으로 오인폭격했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없다.

소방서 망루에서 목격한 이리역 폭격 상황

50년 7월11일 오전 11시쯤 우연히도 이리 소방서 망루에서 근무하다 미군 폭격기의 이리역 폭격 참상을 그대로 목격한 이근배(99년 당시 75세)씨는 ‘미군기 두 대가 이리 시내 상공을 몇차례 선회하다 군산쪽으로 날아갔다가 다시 이리역 상공으로 날아와 포격을 시작했다“고 당시 상황을 증언했다. 이씨는 미군기의 이리 상공 출현과 폭격을 목격하고 이리역으로 가보니 참상이 말이 아니었다고 술회했다.

"이리역에 가보니 플랫폼에도 민간인들이 자빠져 죽어 있었다. 당시 열차가 정차 중이어서 피해가 더 컸다. 철도 직원과 민간인 합해서 사망자가 108명이라고 들었다’고 증언했다. 당시 기관사이던 김봉태(99년 당시 75세)씨는 폭격현장을 생생하게 기억해냈다.

김씨는 "폭탄 떨어지는 것 육안으로 봤다. 맥주병같이 새까만 것이 '쉿','쉿' 하며 떨어지는 것을 보고 뭐 떨어진다, 뭐 떨어진다하는데 '쾅' 해서 이게 폭탄이구나하고 다 도망갔다"고 말했다.

미군기의 이리역 폭격 당시 기관차 사무소장이던 최석구(99년 당시 83세) 옹은 당시 폭격이 작전상 의도된 폭격였다고 주장했다. 최옹은 폭탄이 기관차고에 정확히 떨어지고 폭격 여파로 철로가 휘어지는등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뤄볼 때 단순한 폭격이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철도청 관계자도 ‘당시 육로보다는 철로를 이용한 이동이 가장 신속했기 때문에 교통요충지인 이리역 폭격은 북한군의 남쪽 진입을 막기위한 폭격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한국교통동란기>는 1950년 7월 11일 미군기가 이리역을 폭격하기 몇시간 전인 새벽에 아군측이 이리에서 충부로 통하는 금강의 교량을 작전상 폭파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미군기는 50년 7월 11일 새벽에는 금강의 교량을, 오전에는 이리역을 그 다음날에는 12일에는 금강철교를 폭파했다고 <철도백년사>는 기록하고 있다.

북한군의 빠른 남침을 차단하기 위한 미군기의 의도된 폭격일 가능성을 높게 하는 대목이다. 미군기의 이리역 폭격은 확인폭격이었다는 점에 비중이 실릴 수 밖에 없다.

의도된 폭격이었다.

앞서 지적했듯이 비교전 지역에서 군사작전의 하나로 교통요충지를 집중 폭격하면서 발생한 참사가 바로 이리역 폭격 참사이다. 비교전 지역에서 수백여 민간인이 몰려 있는 교통 요충지를 작전상 폭격할 계획이면서도 사전에 민간인 산개 조치등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갑자기 폭탄 세례를 퍼부은 사건이 이리역 폭격 사건인 것이다.

노근리 사건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을때 CBS 에 전화를 걸어 ‘지금 노근리 사건만 논란이 되고 있는데 사실은 이리역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다’고 알린 70대 노인도 바로 그날 자신은 이리에 있는 중학교에 갔다가 수업이 없다고 해서 이리역에서 다시 기차를 타고 한 정거장을 지나 내린 순간 이리역 쪽을 바라보니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었으며 그후 미군기의 폭격으로 수십여명이 죽었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제보했다.

당시 이리역에는 적어도 2백여명의 이리역 직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 당시 이리기관차 사무소에서 기관조사로 일했던 이동진씨가 98년에 펴낸 <한국전쟁과 기적의 인생>이란 수기에서도 알 수 있다. 이씨는 당시 이리기관차 사무소 직원들이 2교대로 나눠 비상근무를 했으며 대기 승무원이 2백여명으로 모두 초조한 심정으로 당국의 명령을 기다렸다고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이리역은 당시에도 수백여명의 직원이 근무하는 교통요충지였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얘기다.

세상에 알려진 지 5년이 지났건만

이리지구운전사무소 직원 54명의 희생을 추념하는 추모비는 수십년 전부터 이리역(현 익산역)구내에 서 있었지만 누구도 미군기의 이리역 폭격 사건이 공론화되기 전에는 말하기를 꺼려해 거의 잊혀져 있었다.

1999년 10월 재미사학자 방선주 교수는 6.25전쟁에 관한 기록이 공개될 시점이기 때문에 미 공군기의 출격기록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는 답변을 주고 받았지만 지금은 연락도 두절된 채 그 기록을 찾을 길이 없다.

1999년 10월11일과 18일 철도청과 국방부에 대한 국회 국정감사에서는 이 사건을 비롯한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인 진상조사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았고, 정부는 진상조사에 적극 나서겠다는 답변을 했지만 결국 상투적인 답변에 그쳤다.

정부의 진상규명 노력도 이제는 찾아 볼 수 없다. 한때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만 다시 확인하고 유가족의 마음만 아프게 했을 뿐이다.
오는 11일 이리역에서는 당시 이리역 폭격 사건으로 희생당한 원혼을 위로하는 추모제가 열린다. 1950년 미군의 이리폭격 희생자 유족회(회장 이창근)는 오는 11일 익산역 광장에서 '7·11 죽음을 넘어 평화로 나아가는 미군 익산폭격 희생자 추모제'를 열기로 했다.

미국과 한국정부는 유족들의 한맺힌 진상규명 요구에도 불구하고 진상규명은 커녕 문제해결을 위한 어떠한 의지도 보이고 있지 않은 상태다. 명확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도 우리는 아픔을 삭히고 살아야만 하는 현실인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미국에 가서 "53년 전 미국이 없었다면 자기 자신도 지금쯤 정치범 수용소에 있을지 모른다"고 한 말이 생각난다. 노무현 대통령은 미국 사람들이 한국을 칭찬하기에 자기도 모르게 미국을 칭찬한 말이고 조금 오버했었다고 해명했다. 아무래도 국민참여정부에서도 적극적인 해결의지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상 무극지존의 답변이었습니다아<!-- /div -->

2006.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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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자가 채택한 답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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