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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나비박사 석주명의 대해서 알려주세요.
seoj**** 조회수 1,220 작성일2009.09.02
나비박사 석주명의 대해서 재발좀 알려주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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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lll****
태양신
한국사 99위, 영어 독해, 읽기, 문화재 4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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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가지 자료(간단한, 자세한 답변) 로 답변합니다.

 

1- 간단한 답변

석주명은 나비박사이고, 75마리의 나비를 채집했다.

그런데 어느날 석주명이 한 나비가 너무 예뻐서 잡으려다가 넘어져서 무릎에 멍이 들고

피가 났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 나비를 잡아 그 나비의 이름을 지리산 팔랑나비라고 지었다.

또 석주명은 그 75마리의 나비 표본을 써서 영국에 보냈다.

그 일 덕분에 석주명은 아주 유명하고 훌륭한 나비박사가 되었다.

 

 

2 - 자세한 답변

 

<조선 나비> 박사 석주명(1908-1950 평양)

 

석주명은 1908년 11월13일 평안남도 평양의 대동문(大同門) 근처 이문리에서 아버지 석승서(石承瑞)와 어머니 김의식(金毅植) 사이에 3남 1녀 중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맏형 석주흥(石宙興)은 월남하지 못했고, 누이동생 석주선(石宙善)은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민속박물관장을 지내다가 1996년 타계했으며, 피부과 의사이던 막내 석주일(石宙一)은 1981년에 일찍 세상을 떴다. 평양 종로보통학교-숭실 고등보통하교-송도고등보통학교-일본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 박물과를 졸업하였다.

 

<조선 나비>에 목숨을 건 석주명은 그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조선 나비>를 채집, 분류, 표본을 만들고, 국내 학계는 물론 국제 곤충학계에는 에스페란토어로 논문을 작성하여 발표하였습니다.

석주명의 일생 동안 그의 손을 거쳐간 <조선 나비>는 무려 75만 마리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기를 꼭 10년 만에 석주명은 1938년 그의 나이 30세 되던 해, 영국왕립 아시아 학회로부터 <조선 나비 총목록을 집필해 줄 것>을 의뢰 받았습니다

.

석주명은 학교를 휴직하고 <조선 나비 연구>에 몰두 1940년(32세), 마침내 총 248종에 이르는 <조선 나비 총목록>을 만들어 출판하였습니다. 석주명은 요즈음 말로 정규 박사 학위를 받은 것도 아니었으나 세계 생물학계가 알아주는 진짜 박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일본 식 이름으로 된 우리 나비와 식물의 이름을 우리말로 바로잡고, 20여권의 책과 130편의 논문을 남겼습니다.

 

 

일화를 소개하면,

 

나비를 쫓아다니느라 피투성이가 된지도 모른 채 채집한 나비에 ‘지리산팔랑나비’라는 이름을 붙인 일화는 유명합니다. 그는 나비에 아름다운 한글이름을 달아준 것으로도 유명한데, 봄에 금방 나왔다가 사라져서 처녀처럼 수줍음을 탄다고 해서 ‘봄처녀나비’, 굴뚝처럼 까맣다고 해서 ‘굴뚝나비’(사진)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는 한 가지에 빠지면 완전히 미쳤습니다.

 

휴일이면 어김없이 나비 채집에 나갔으며 국립박물관에 근무할 때 점심 먹는 시간도 아까워 길을 가며 땅콩을 먹고 일했습니다. 송도고보의 학생에게 방학만 되면 나비 200마리씩 채집하는 숙제를 내 최근까지 있었던 초등학교 방학숙제의 원형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는 제주도 방언, 에스페란토 등의 연구에도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는 기타에도 일가견이 있어 ‘한국 최고’로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해방 후 세고비아의 기타 연주곡을 듣고는 탄식을 하며 다시는 기타를 잡지 않았다고 합니다.


석주명은 6.25 사변이 일어나는 해 1950년 10월경, 죽기전 국군 상사에게 자신이 나비 학자이고 대학교수라고 밝혔지만 상사는 이를 무시하고 총살했습니다. 그는 “나는 나비 밖에 모르는 사람이야”라고 외치며 숨졌다고 합니다.

 

2009.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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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gjg695, ellen1118 자료 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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