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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안평대군은 권력에 욕심이 있었나요?
비공개 조회수 13,178 작성일2014.01.09
요글래 사극에 심취해있는데요.

그래서 사극을 많이 보는데 각각 사극드라마마다 

뭐 수양대군이야 패륜을 저지른 것은 사실이니까 좋게는 안나오는데...

안평대군만 다르게 나오네요. 

<왕과비>, <인수대비>에서는 안평대군 역시 뒤에서 몰래 권력을 엿보다가 결국 수양대군에게

제거되는 인물로 그려지구요.

<공주의남자>에서는 되게 시,서,화등에 능하고 정의로운 사람으로 나오네요.

<관상>에서도 잠깐 나오지만 예술적인 면이 강하고 개미 한마리 죽이는 않는 아주

심성이 착한 사람으로 묘사되구요.

뭐 역사야 이미 과거고 또 모르는 거지만...

어느게 옳은 건지 알고 싶어지네요.

워낙 드라마에서 극과 극으로 묘사되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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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신

 안평대군의 실제 성격은 굉장히 호방하였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니 그 많은 식객들 많은 문인 예술인들과 교류를 하였겠지요.

다만 워낙 자유분방한 예술가적 기질을 가진 안평대군인지라 권력을 탐했다고 볼 수 없는게 맞습니다.

왕이란게 뭐든 할 수 있을거 같지만 의외로 이것저것 제약이 많은 자리입니다.

골머리 썩는 일도 많구요. 그러니 안평대군은 어쩌면 왕족으로서 왕에게 힘을 실어주는정도로 만족하고

자신은 예술을 하면서 자유롭게 살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호방한 성격과 사람들이 끊이지않는 인맥 때문에 수양대군측에서는 그가 권력욕이 없어도

굉장히 위험한 인물인것이죠.특히나 김종서와의 인맥은 굉장히 위협적인것입니다. 사육신들과도 친분이 깊었죠.어쩌면 김종서와 사육신들과 친분이 깊었다는것은 왕권에 욕심이 없었다는 얘기도 될것입니다.

어쨌거나 안평은 문신들과 친했고 수양은 무신세력을 포섭해서 수양이 이겼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인수대비나 왕과비는 결국 세조(즉 수양)와 그의 며느리 인수대비가 중점이 되는 드라마로 세조의 라이벌격이었던 안평대군을 좀 더 박하게 안좋게 그릴 필요가 있을겁니다.

 

반대로 공주의 남자는 단종측 인물인 김종서의 아들이 중심인 드라마로 상대적으로 수양대군은 악역으로 그려집니다 관상도 마찬가지구요 그러니 그의 라이벌격인 안평대군은 좀더 후하게 선하게 그려질 수 밖에 없습니다.

 

어떤게 진짜일지는 솔직히 저도 잘 모르겠지만 전자의 경우는 역시 승자로서의 시각으로 실제 역사사서에서 자주 나타나는 시각이긴 합니다. 이를테면 새왕조를 세우는데 전왕조의 폐단을 극렬히 부각하고 없던일도 있었다고 부풀리는거죠. 그래야 새왕조 창업의  정당성이 생기는 거니까요.

 

혹은 전왕을 폐위하면서 그의 부덕함을 크게 지적하는것이죠. 이를테면 후대에와서 새로운 시각으로 재평가받는 광해군같은 경우가 그렇습니다. 예전에는 연산군처럼 아주 패악했던 왕으로 그려졌지만 현재에와서는 그렇지 않았다 실리적인 왕이었다라는 평가를 받고있죠. 그의 부덕함으로 지적되었던 부분도 생존을 위한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다. 아무나 막죽인 연산군과는 다르다 라는 평가도 있고요.

 

후자는 역시 유교적 도덕적 관점의 시각인것입니다. 신하된 자로서(왕족이지만) 연산군처럼 패악하지도 실정을 하지도 않은 자신의 조카 단종을 자신의 욕심으로서 폐위해 죽인 수양은 부도덕하다라는 시각이죠.

 

어쨌거나 그 중심은 역시 수양대군 세조이기 때문에 그의 라이벌이라 할수 있는 안평대군또한 그 시각에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 밖에 없는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실제의 안평대군 성격은 사람이 호방하고 학문과 예술을 좋아하여 사람들이 끊이지않고

사람들과의 교류가 많았던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람들이 많아 세가 큰편이 이었지만 그 대부분이 학자나 예술가들이었고  안평대군 스스로가 예술가적 기질이 많은것으로보아 후자 즉 공주의 남자나 관상쪽이 더 신빙성이 있지않나 싶습니다. 권력욕이 있었다면 문인들 보다는 무인들을 더 모았겠죠. 수양처럼.

수양은 저자의 왈짜패까지 모음

2014.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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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루
우주신
클래식음악 5위, 음악이론, 작곡 4위, 개신교 92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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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평대군을 권력지향형으로 보는 시각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당대의 최고의 문필가로 꼽힐만큼 명필로 이름을 날렸고 시와 그림에도 뛰어난 문인이었지요.

수양대군이 정란을 일으켜 정권을 잡을 때, 그는 제거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걸림돌이 되기 때문에

죽음을 당하여야 했을 것입니다.

객관적인 판단을 돕기 위해 자료를 첨부합니다.

 

[이름 용(瑢). 자 청지(淸之). 호 비해당(匪懈堂)·낭간거사(琅居土)·매죽헌(梅竹軒). 1418년 세종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428년(세종 10) 안평대군에 봉해졌고, 좌부대언 정연의 딸과 혼인하였다. 1430년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을 쌓았다. 문종 때 조정의 배후에서 실력자로 역할을 하였으며, 1438년 함경도에서 문제를 일으키던 야인을 토벌하였으며 황보인, 김종서 등 주요 문신들과 친밀하게 지냈다. 인사 행정기관인 황표정사(黃票政事)를 장악하여 조정의 실력자로 부상하였고 이때문에 둘째 형 수양대군의 세력과 정치적인 대립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김종서(金宗瑞) 등을 죽이고, 이때 안평대군도 지지기반을 잃고 반역을 도모했다는 죄목을 받아 강화도로 귀양을 갔다. 그 뒤 교동도(喬桐島)로 유배되고, 그곳에서 36세를 일기로 사사(賜死)되고 말았다.

안평은 시문(詩文)·그림·가야금 등에 능하고 특히 글씨에 뛰어나 당대의 최고의 명필로 꼽혔다. 그의 서체는 조선 초에는 그의 서체가 크게 유행이 되었다. 대표작으로 《몽유도원도 발문》이 있다. 영조 때 복호(復號)되어 장소(章昭)라는 시호가 내렸다. 유필로 세종대왕영릉신도비(世宗大王英陵神道碑: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전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안평대군 [安平大君] (두산백과)

 

2014.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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