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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sludenshomo Sep 17. 2017

시인의 사랑

사랑보단 시인의 이야기에 더 능숙한 성장담



 <시인의 사랑>은 김양희 감독의 첫 장편영화 연출작이며,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시네마프로젝트 지원작 3편 중 한 작품이다. 김양희 감독은 6년 전부터 제주도에서 거주중인데 그래서인지 관광객이 아닌 주민의 시선으로 바라본 제주도의 풍광과 일상이 영화 속에 잘 녹아들어 있다. 여전히 많은 관객들의 뇌리에 선명히 남아 있을 <똥파리>의 양익준이 푸근하고 순박한 제주 토박이 시인 '현택기' 역할을 맡았다. 영화는 택기가 마을버스를 타고 어딘가로 향하는 모습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때 현택훈 시인의 <내 마음의 순력도>가 양익준의 나긋한 목소리로 조용하게 깔리는데, 동시에 포근하고 따뜻한 바닷마을의 풍경이 펼쳐진다. 그리고 영화는 무기력하고 늘상 비슷한 택기의 일상을 따라간다. 그의 곁에는 자신을 잘 이해해주고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아내'가 있다. 세속적이지만 솔직하고,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아내와의 소소한 일상은 자연스러운 공감과 웃음을 자아낸다. 그러나 그런 택기에게도 고민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자신의 시에 삶의 고통이나 슬픔이 결여돼있다는 사실이다.




사실 그도 그럴 것이, 택기에게는 시를 잘 쓰고 싶다는 것 외에 큰 욕심이 없기 때문이다. 큰 돈을 벌어야겠다는 야망이나 시인으로서의 명예를 쌓겠다는 절박함 또한 찾아볼 수 없다. 처음엔 결혼만으로 만족했는데, 그 다음은 다른 사람들이 하는걸 보란듯이 다 해보고 싶다고 말하는 아내와는 사뭇 대조되는 모습이다. 어떻게 보면 비현실적으로 보일만큼 시라는 '꿈'만 좇는 택기. 그러던 그의 눈에 집 앞 도넛가게 알바생 '소년'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 슬픔과 고통을 늘상 지니고 사는 것만 같은 소년에게 택기는 다가가고 둘은 서서히 가까워진다. 김양희 감독은 이 영화를 퀴어영화로 단정짓는 것을 조심스러워하는 것 같지만, <시인의 사랑>을 이야기할 때 퀴어적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야말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모습일 것이다. 영화 제목에서 이미 명시하고 있듯이 이 영화는 사랑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인해서 현택기라는 인물이 겪는 성장에 관한 영화이다. 물론 그 사랑이 철저한 에로스적인 사랑이냐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 더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이 영화는 시종일관 따뜻하고 가벼운 분위기를 품고 있다. 그동안 한국의 독립퀴어영화들이 늘 어둡고 진중한 태도로 소재를 다룬 것과는 대비되는 지점이다. 그렇기에 영화의 중반부까지는 한국 영화에서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신선함을 띄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야기가 피해갈 수 없는 국면에 다다랐을 때 영화는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다. 기본적으로 등장인물들이 모두 현택기라는 인물의 성장담을 위해 만들어지고 배치됐다는 의심을 떨칠 수 없기에 관객들은 극 중 누구에게도 편히 마음을 기대지 못한다. 특히 소년이 원래 지니고 있던 치기와 자신과 시인의 관계, 성정체성에 대한 혼란스러움이 더해지면서 그가 보여주는 변덕스러운 행동은 관객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공감을 이끌어내는데 실패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아내의 택기를 향한 절절한 마음에 눈물 짓게 되는 몇몇 장면이 있는데, 순간 순간마다 번뜩이는 전혜진의 연기 덕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한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시인의 사랑>은 매력이 뚜렷한 영화이다. 관객의 마음에 인장을 남기는 사랑스러운 장면들이 적지 않으며 무엇보다 배우들의 연기가 매우 훌륭하다. 특히 이번 작품이 첫 번째 장편영화라는 것을 감안했을 때 김양희 감독의 차기작이 무척이나 기다려진다. 분명히 이 감독에게는 한국 독립영화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던 인물의 삶을 향한 진중한 시선과 태도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특히 감독이 현택기라는 인물을 다루는 태도가 인상적이었는데, 어떻게 보면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시인의 초상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지만 감독은 그런 그의 삶의 양식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 중에서도 특히 택기의 시를 향한 사랑과 집념을 우스갯거리의 소재로 삼지 않는다. 영화의 몇몇 순간에 나레이션으로 삽입된 시들도 과하지 않고 적절하게 사용되며 영화의 맛을 더욱 돋구어주었다. 특히 기형도의 <희망>과 양익준의 연기가 결합된 마지막 장면은 오래도록 내 마음에 남아 잔잔한 진동을 일으킬 것 같다. 시와 연기라는 서로 다른 형식의 두 예술이 만나 영화예술 그 자체가 된 장면에 저릿한 감동마저 받았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아주 오랜만에 시집을 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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