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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작가회의와 함께하는 전라북도 길 이야기] 어머니! 당신의 몸길 위를 걸어갑니다 - 김행인

옥산저수지 구불길에서

그림=신보름
그림=신보름

• 길에 대한 어느 추천사

몇 해 전 가을, 들길 하나가 내게 추천사를 써달라고 부탁해 왔다. 아! 길이 사람을 추천하면 모를까 감히 사람이 길을 추천하다니? 그럴 수는 없었다. 어쩌면 우리네 사람들을 낳았을지도 모를 길인데.

그즈음 나는 달이 바뀔 적마다 수십의 무리와 함께 이 산길, 저 들길을 밟으며 콧노래를 부르곤 했다. 꽤 많은 친구들이 언제든 내가 가자고 하면 가고, 걷자고 하면 나와서 걷던 호시절이었으니, 길이 내게 추천을 청한 게 무리가 아닐 수도 있었다.

이름 없는 들길 하나쯤 추천해 주고 소개비를 받아먹으면 어떠랴. 하지만 나는 감히 그에 대해 함부로 주절거릴 수가 없었다. 이름 없는 길도 아니었거니와, 감히 나 같은 소인배가 이러쿵저러쿵 평을 할 대상이 아니라 여겼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 정도는 될 만큼, 이 들길은 내게 숭모의 대상이었다. 우리 전라북도의 이 길 저 길 곳곳을 샅샅이 헤매고 다녔고 계절에 따라 날씨에 따라 새롭게 다가오는 길의 맛을 그래도 많이 아는 편이라 자부해왔음에도, 내가 이 들길에게서 받은 감동은 마치 아이에게 듬뿍 내려준 어머니 사랑처럼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

몇 해 동안 가슴 깊이 간직했던 이야기. 더 이상은 묵힐 수 없어 사모곡(思母曲)을 부르듯이 끝내 털어놓는다.

• 구불구불 내 어머니 몸 같은 구불길

이름이 구불길이라고 했다. 낮은 산등성이와 논배미를 구불구불 돌아서 가는 길이라 붙여진 이름일지 몰라도 나는 그 이름만으로 어머니를 연상하게 되었다. 어쩌면 내 어머니의 구불구불한 인생 여정 탓일 수도 있겠고, 어린 시절 보았던 어머니 가슴과 배의 포근한 느낌 탓일 수도 있겠다.

옥산저수지 수변산책로는 구불길에서도 다섯 번째 구간, 구불5길이라고 했다.

나는 늦은 가을날 이 길을 처음 만났다. 공식 명칭이 옥산저수지라 하지만 호수라 하는 게 더 어울릴 듯하다. 호수 초입에서 둑방으로 올라서면 맨 먼저 눈부신 억새 숲에 경탄을 멈추지 못한다. 둑방길에 발을 딛자마자 억새의 화려한 흔들림이 나그네 발길을 그만 붙든다. 잿빛 구름이 낮게 내려와 억새풀과 한 덩어리로 춤을 춘다. 저만치서 오색 바람개비가 자연의 풍력발전처럼 빙빙빙 돌아간다. 어릴 적 추억도 함께 돌아간다. 호수 위 하늘 높이 방패연이라도 띄우면 좋을 것처럼 바람은 세차다. 이 인공 언덕 위의 풍경은, 가을 끝자락에서 탈색한 나무와 빛들의 떨림이 한가락 자연의 노래를 들려준다.

둑방길을 뒤덮은 억새 숲길을 지나 수변산책로로 들어선다. 잘 단장된 산책로는 가을 내내 떨어져 길 위에 곱게 쌓인 낙엽들 덕분에 푹신푹신하다. 주변의 온 산을 뒤덮은 마삭줄은 낙엽과 함께 포근한 이불이 되어 촉촉한 마사포길을 만들어 주었다. 걷는 내내 나그네의 발은 안식에 젖어든다.

호수 옆으로 낙엽이 온통 다 떨어져 쌓인 갈숲 흙길은 구불길의 압권이다. 숲속의 은은한 나무 향은 길이 끝나는 지점까지 내내 건강과 치유의 향을 맘껏 나눠주고, 낙엽이 쌓인 포근한 길은 편안한 촉감으로 내내 발길을 감싸 준다. 나그네의 호사다.

가만 보니 길 주변에 습지가 잘 발달된 자연생태학습장이 형성되어 있다. 곤충과 야생화, 새 들이 공생하는 체험학습장이다. 곳곳에 표시된 안내판에는 서식하는 생물 종류의 다양성에 대해 잘 설명해주고 있다.

저수지의 물빛도 아름답거니와 나뭇잎 모양의 녹색 의자며 노란색 안내판, 둥근 통나무 의자, 나이테가 선명한 널빤지 모양의 긴 의자, 녹색 화살표가 선명한 빨래판 모양의 이정표 등 세심하게 공들인 시설들도 아름답다. 자연의 경치 못지않게 사람의 손길이 많이 간, 정성스러운 길이다.

이내 하늘을 향해 시원하게 솟아오른 대나무 숲길이 반겨준다. 두어 번 깊은 호흡을 하고 보니 머리에서 발끝까지 온몸이 맑아진다. 이산화탄소를 몽땅 빨아들이고 산소를 뿜어내는 대나무 숲은 그야말로 ‘하마’ 숲이라 할 수 있겠다.

호수 주변에는 물빛길, 꽃향기길, 대나무숲길, 소나무숲길, 단풍나무숲길, 왕비들나무 같은 다양한 활엽수와 침엽수가 무성하게 자라 군락을 이루고 있다. 호숫가 둑길을 걷다가 산자락으로 접어들면 위태로울 만치 바짝 좁아진 수변산책로를 걷기도 하고 아슬아슬한 낭떠러지 위 오솔길을 걷기도 한다.

호젓한 숲길을 걷노라니 늦가을 쌀쌀한 바람을 막아 주는 소나무 숲을 뚫고 황금빛 석양이 눈부시다. 한참을 걷다가, 몸 안 어디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며 솟구쳐 오르는 느낌에 파르르 떨고 만다. 가만 보니 나뭇가지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결이 나뭇잎에 비치는 햇빛에 부딪혀 떨리는 것이었다. 아! 나는 순간 가슴이 쿵 울리고 말았다. 어머니 숨결 같은 햇빛, 그 안에서 아주 작은 내가 태어나고 있었다.

• 이름마저 빼앗긴 굴곡진 역사

호수를 에워싸고 있는 청암산은 원래 취암(翠岩)산이었다. 푸르다는 의미의 취암산이던 것을, 일제 강점기에 푸를 청(靑) 자를 써서 청암산으로 이름을 둔갑시켰다니, 남의 땅 이름을 함부로 바꿀 정도라면 그만한 저의가 있었겠다. 산 주변을 물로 가득 채워 버린 대공사가 들판을 내려다보던 바위의 색깔을 아예 바꿔 버리지 않았겠는가? 주변이 온통 논이던 해발 116.8미터짜리 낮은 산을 파헤치고 둑을 쌓아서 저수지로 바꿔 놨으니 말이다.

일제 강점기 1939년 옥산ㆍ회현 일대에 수원지로 조성한 옥산저수지가 이 호수다. 해안을 끼고 비옥한 대지를 가진 옥산, 회현, 대야, 임피, 서수 들녘에서 많은 농산물이 생산된 곡창지대 군산. 이를 수탈하기 위해 전군도로와 철도를 만든 일제가 곡물을 더 많이 가져가기 위해서는 저수지가 필요했다.

이 호수는 오늘날 군산의 제2저수지다. 주변 농경지와 군산 시민의 상수도 역할을 한다. 1963년부터는 상수도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물이 깨끗한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호수 주변의 자연 생태까지 잘 보존되었다.

일제가 옥구 평야의 미곡을 퍼내가기 위해 산을 파헤치고 둑을 쌓고 논을 막아 만든 인공의 저수지가, 어언 80년이 지나는 동안 물 맑은 호수로 변모했다. 세월이 오늘날의 천연 작품을 만들어낸 것이다.

군산 옥산저수지, 아니 옥산호수의 수변산책로는 청암산 능선을 거쳐 정상으로 이어지는 길과 호수를 옆으로 끼고 도는 구불구불한 수변길이 나란히 그 아름다움을 뽐낸다. 14.8킬로미터에 이르는 구불 5길, 7시간은 걸려서야 다 걸을 수 있다는 군산 구불길 25킬로미터 중에서 절반을 넘는 길이다.

햇볕 창창한 가을 문턱이다. 나는 또다시 이 길을 찾아 일상의 무게를 물 위에 띄워 올리고 싶다. 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더욱 좋겠다.

둑방길 억새밭을 지나 숲의 호흡을 느끼며 타박타박 호수 둘레를 걷는 안식의 길. 굴곡진 역사를 살아온 내 어머니 구부러진 몸 같은 길. 알록달록 수풀이 우거진 호수 주변을 따라 이리저리 느릿느릿 구부러지고 싶다.

*김행인(본명 김수돈): 평화동마을신문 편집인/마을미디어 운동가/시인. 2010년 월간 『문학바탕』 신인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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