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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제임스 먼로에 대하여
추모곡 조회수 1,485 작성일2013.07.06

 

   안녕하세요 제가 이번에 학교에서 제임스 먼로라는 미국5대대통령에 대해서 조사를 하는데요,

제임스 먼로의 인생에 있었던 위기 혹은 슬럼프 같은 것을 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내공 100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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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자의 나이를 알면 그 수준에 맞출텐데 모르니까 대략 고등학생 수준에 맞춰서 설명할께요.(더 어리면 난감하겠지만 내 책임이 아님 ^^)

고교생 수준에 맞추는 이유는 제가 가르치는 놈들이 대략 그 수준이기 때문이고, 우리 나라 평균 학력이 고졸은 되니까 나이가 많더라도 대충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입니다.

 

 

제임스 먼로의 약력은 간단하게

 

생몰년:1758년 4월 28일~ 1861년 7월 4일

재임기간:미국 5대 대통령 1817년~ 25년(재임기간이 8년이라는 뜻은 연임에 성공했다는 뜻)

 

 

정도만 할께요. 구태여 백과사전에 나오는 정보를 베낄 필요는 없다고 사료되거든요.

 

자 이제 이야기를 시작해볼까요.

 

 

1. 출생~ 청년 시절

 

 

1858년 버지니아 웨스트모어랜드 카운티 태생으로 대학에 진학했을 무렵 1876년 독립전쟁이 터지자 학업을 때려치고 독립군에 투신하여, 훗날 미국 초대 대통령이 되는 워싱턴과 함께 전선을 전전하였으며 1880년 전쟁이 끝나고 퇴역할 때 최종 계급은 육군 대령이었습니다.

이 시절에 워싱턴이 평가하길 '매우 용감하고 책임감 있는 젊은이'라고 극찬하기까지 했습니다.

 

독립군 시절에 그의 최초의 위기가 찾아오는데 그건 격전에 의한 것이 아니라, 78년 델라웨어에서 동사할 뻔 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편한 전장만 다닌 것은 아닌 것은 5년만에 하급장교에서 대령까지 진급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꽤 많은 격전지를 전전했으며, 훌륭한 전공을 세우기도 했죠.

 

전쟁 후 미국 3대 대통령이 되는 토머스 제퍼슨에 매료되어 그의 지도하에 법학을 공부하고 버지니아에서 변호사를 개업, 또한 그곳에서 상원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합니다. 정치적으로는 제퍼슨식 반연방주의를 표방하게 됩니다.

미국의 초대와 3대 대통령을 모두 선배 혹은 스승으로 두는 로얄로드를 걸은 셈이죠.

 

이후 워싱턴 대통령에 의해 프랑스 대사로 임명되었는데, 당시 위싱턴이 영국과 맺은 제이조약을 맹렬히 비난한 탓에 워싱턴의 눈 밖에 나서 해고 및 본국 송환을 당하게 됩니다.

워싱턴 입장에서는 싹수 보이는 놈이라 키워줬더니 뒤통수를 맞은 터라 감정적인 요소로 처리한 일이지만, 먼로는 과거 독립군 선배로 자기를 이뻐했던 말던 자기 주장을 굽힐 생각도 없었습니다.

 

워싱턴의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노선을 비난하고 신생미국은 친프랑스 정책을 펴야 한다는 일관된 주장을 했으며, 그걸 책으로 펴내기 까지 해서 워싱턴의 염장을 제대로 긁었습니다.

독립영웅이자 현직 최고 실세인 대통령과 맞짱을 뜨는 건 나름 소신있는 행동일지는 몰라도 출세길에서 멀어진다는 점에서는 두번째 위기를 자초한 셈이었습니다.

(독립군 선배고 대통령이고 간에 내 맘에 안들면 다 까는 거야! Is't my Load!!!!)

 

 

2. 장년시절

 

워싱턴과 맞짱을 뜬 터라 워싱턴과 정치적 견해를 같이하는 존 애덤스가 2대 대통령이 되었을 때도 정치적으로 요직에 임명되지 못한 채 겉도는 신세였습니다.

그래도 텃밭이라고 할 수 있는 버지니아에서 주지사를 할 정도의 영향력은 확보하고 있었죠.

(난 줄타기 따위 관심없다. 내 길은 내가 만든다!)

 

그러다가 제퍼슨이 3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슬슬 상황이 좋아지기 시작하였고, 1803년 로버트 리빙스턴과 함께 프랑스에 파견되어 나폴레옹 보나파트르(바로 그 나폴레옹!- 하긴 리빙스턴도 보통 인물은 아니다. 본격 쩌는 인맥빨!!)에게서 프랑스령 루이지애나를 구매하는데 성공합니다.

08년 대선후보지명전에서 제임스 메디슨과 대결하여 패배했는데, 그 사건으로 메디슨과도 사이가 벌어져 앙숙까지 발전하기에 이르죠(제임스 메디슨은 4대 대통령... 먼로는 대통령과 맞짱뜨는게 취미인 모양 후덜덜...)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메디슨과 먼로에게 공히 선배이자 멘토였던 제퍼슨이 직접 나서서 둘 사이를 화해켜서 먼로에게 세번째 위기가 될 수 있는 사태를 막았는데, 그 이유는 제퍼슨 자신이 정치적 견해 차이로 동년배 동지이던 애덤스와 사이가 벌어진 일이 있기 때문에 후배들도 같은 길을 걷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형이 싸워봐서 아는데 친구끼리 싸워봤자 남는 것도 없다. 존 말할 때 화해해라잉~)

 

결국 이 화해로 메디슨 시절에 주지사, 국무장관, 전쟁장관등 요직을 거치며 정치적 입지를 다질 수 있었고, 메디슨 차기 대통령 후보로서 성장하게 됩니다.

(친구야! 내 다음은 니가 해묵어라~ 우리가 남이가~ 이거 왠지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이야기같지만 우리나라의 전모 아저씨 노모 아저씨와 다르게 이 양반들은 착했다는 게 다른 점!)

 

1816년 대통령 선거에서 연방파를 압도적으로 누르며 승리, 재선 당시인 1820년 선거에서는 231대 1이라는 압도적인 스코어로 승리하여 이후 연방파를 완전 공중분해 시키는 위엄을 선보였습니다.

(이 양반 소시적부터 자기랑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과 양립하지 않더니 결국 씨를 말려버렸음. ㄷㄷㄷ)

 

 

3. 완숙기(대통령 재임시절)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의 정치적 행보가 좌충우돌식 철저한 마이 페이스였던데 반해,

대통령이 되어서는 놀랍도록 균형잡힌 조화노선을 걷게 되는데 서양판 괄목상대라고 할만 했죠.

 

대표적인 예로

첫째,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해서 과거의 무조건 때려잡기에 벗어나 연방 정부는 그들의 보호자로서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고 주장, 인디언 학살을 줄였으며,

둘째, 반 노예정책을 가지고 있어서 흑인노예들이 미 대륙에 정착하도록 도와야 한다고 주장했고, 일부는 해방하여 라이베리아에 정착 후 독립시키기 까지 했지만, 노예제를 주장하는 미주리주를 연방에 가입시키기 까지 했습니다.

여기서 특기할 점은 1. 반연방주의자답게 미국의 각주는 독립된 행정을 가지기에 연방정부는 조정자 역할에 충실할 것이며, 2. 연방 정부내에 각 주가 노예제 찬성과 반대로 양분된 상황에서 미주리의 가입으로 균형이 깨질까봐 반대 입장인 메사추세츠에서 메인주를 분리 연방에 새로 가입시킴으로써 균형을 맞추었다는 점입니다.

덤으로 각주가 딴지를 걸지 못하도록 이걸 미주리 협정이란 이름으로 명문화시키는 치밀함까지 보이죠.

(여담인데 훗날 꼴통 오브 꼴통 링컨이라는 작자는 균형따위는 개나 줘버리라는 듯, 자 세력만 보듬는 해방 정책을 밀고 나가다가 전쟁을 일으킵니다.)

 

조화와 균형을 모티브로 삼은 먼로의 재임기간은 대립이 아닌 방법으로 반대파(연방파)를 침묵시켜 반대하는 세력이 없는 시절이었기에 미국사에서도 이 시기를 '화합의 시대'라고 부를 정도였습니다.(Era of Good Feelings)

 

질문자께서는 위기를 좋아하시니 재임시절에도 위기상황을 꼽자면 재임초기인 1819년에 지가하락과 미국산 면화 가격 폭락에 덧붙여 과거 정부가 일으킨 미영전쟁의 전비를 메꾸기 위해서 지폐 발생을 늘릴 수 밖에 없었는데 인플레이션 위기에 봉착하기도 하였으나, 간신히 22년 경에는 경기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과거에 이모 아저씨가 과거 정부 설거지론 어쩌구 하면서 푸념한데 반해 이 양반은 결국 자기가 대통령이니 자기가 해결해야 한다며 꾹참고 이겨낸 성공신화를 써냈다는 게 비교할만한 점이죠. 남탓하는 놈은 지도자 자격이 없다!)

 

 재임기간 동안 조화와 균형을 모티브로 삼은 먼로의 정책중에 유일한 예외도 있었으니, 그것은 외교정책에서 '먼로 독트린'이라고 불리는 일련의 행보였습니다.

먼로 독트린은 아메리카 대륙에 대해서 유럽의 제국들이 간섭하는 것을 막고, 또한 미국과 대륙(유럽대륙)의 정세에 불개입을 원칙으로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쉽게 표현하자면 대서양에 선 그어놓고 우리도 니들에게 신경끊을테니 니들도 우리쪽에 개입하지 말라고 선언해버린 겁니다.

이것은 작게는 신생미국의 외세 간섭을 막은 것이며, 크게는 아메리카 대륙 전체의 신생독립국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목적이었습니다. 당시 남미에서 스페인의 세력권에서 벗어나 독립하려는 나라들에게 스페인이 재점령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님아 그냥 우리끼리 행복하게 살게 좀 냅두셈!)

 

이 먼로독트린은 2차 세계대전까지 미국의 주요한 외교정책으로 정착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미국이 안정적인 성장세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4. 말년~ 죽음

 

그의 인생 마지막 위기는 퇴임과 함께 찾아옵니다.

재임기간 동안 국가 정책을 추진하며 자기 돈을 때려박는 일도 서슴치 않은 결과 당시로서는 엄청난 금액인 7만 5천달러에 이르는 빚을 지기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반도의 어느 나라에서는 정치하면 한 살림 만들 수 있다는 것에 비해서 어떤 대륙의 대통령은 정치하고 쫄딱 망하는 참 부럽고 또한 존경스러운 일 ㅠㅠ

 

결국 버지니아에 있던 자기 재산을 모두 팔아도 모자라서 말년 내내 쪼들리고 궁핍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심지어는 자기 집까지 팔고 딸에 집에 얹혀 살아야 할 지경이었죠.(본격 청백리!)

헌데 먼로의 전임대통령이며 친구였던 메디슨도 상황은 매일반이어서 둘다 지지리도 궁상으로 살았다는...

 

(진짜 비교하고 싶지 않은데 최근 어떤 대머리 아저씨의 은닉 재산을 밝혀내는 기한을 늘려야 했던 특별법을 정한 것과 비교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양쪽 다 친구 사이 대통령이었는데, 어떤 쪽은 국가의 영웅이고 어떤 쪽은 도동넘들이니...)

 

참고로 그가 정치하면서 자기 재산 쏟아부은 걸 국가가 조금이라도 보상해주길 바랐지만, 국가가 시원하게 쌩까버려서 좌절했다능....(어떤 나라는 도동놈들도 세금으로 품위유지시켜주는데...)

 

독립유공자이자 정치가로서 큰 업적을 남긴 먼로는 마지막까지 미국을 위하기 바랐는지 61년 7월 4일(미국 독립기념일)에 조용히 눈을 감습니다.(이 형님은 곤조가 있으시다니깐)

 

 

여담인데 프랑스 외교관 시절 파리의 발전된 모습을 보고 딸이 미국과 비교하며 '왜 우리에게는 이런 거리가 없냐'고 푸념하자,

"미국은 새로 지어진 집처럼 부족한게 많지,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자유가 있잖니'라며 훈계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오 애국자 형님! 오~ 오~ 그러면서도 졸라 부럽다. 왜 우리는 이런 정치가를 얻지 못했을까...)

 

 

이상입니다.

 

 

덧붙이는 말-제임스 먼로는 세간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지만 그의 행보는 후세에 널리 알려야 할 만큼 멋진 인물이기에 무리를 해가면서까지 길게 썼습니다. 링컨 같은 양아치도 영화로 만들어지고 유명해지는 판에 이런 인물이 잊혀져서 안되기 때문에...

2013.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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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먼로James Monroe (1758.4.28-1831.7.4)

미국의 5대 대통령

재임기간 : 1817-1825 / 민주공화당

First Lady : 엘리자베스 코트라이트Elizabeth Kortright,1768-1849

1758 4 28일 버지니아 Westmoreland County에서 출생

1774년 윌리엄 앤 메리 대학에 입학

1776-80년 대륙군에 입대, 복무

1790년 버지니아주 연방 상원의원 당선

1794년 프랑스 대사

1799-1802년 버지니아 주지사

1803년 영국 대사

1807년 변호사 개업

1811년 버지니아 주지사에 다시 당선

1811년말 제임스 매디슨 행정부의 국무장관

1814-15년 전쟁장관 겸직

1816년 미국 5대 대통령(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당선

1820년 거의 만장일치로 재선

1831 7 4일 뉴욕 New York에서 사망

제임스 먼로 (1758 4 28일에서 1831 7 4일까지)는 미국 (1817-1825)의 다섯 번째 대통령이었다. 먼로는 미국의 건국 아버지였다 지난 대통령, 그리고 버지니아 왕조와 공화당 세대의 마지막 대통령

그의 대통령직은 모두 "좋은 감정의 시대 '에 의해 표시되었다 -. 상대적으로 약간의 기간 당파 싸움 - 그 후에 1819의 공황과 미주리 지역의 입장 넘는 치열한 토론회에 의해. 몬로는 대부분의 미국은 아메리카 대륙에 더 이상 유럽의 개입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명시 1,823에서 먼로의 교리 그의 선포, 유명합니다.웨스트 모어 랜드 카운티, 버지니아에서 태어난 먼로는 미국 독립 전쟁에서 싸웠다. 그는 어깨에 소총 공과 트렌 튼의 전투에서 부상되었다. 1780에서 1783로 토마스 제퍼슨 밑에 법률을 공부 후, 그는 대륙 회의의 대의원을 역임했습니다. 미국 헌법 비준 간주 버지니아 협약 안티 연방의 대리인으로서 먼로는 중앙 정부에 너무 많은 권한을 준 주장하며 비준을 반대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로는 새 정부에서 활약했고 1790 년에 그는 그가 Jeffersonians 참가 제 1 회 미국 의회의 상원에 선출되었습니다. 그는 버지니아 주지사 등 간부로 경험을 쌓았와 프랑스의 외교관으로서 그는 1803 년 루이지애나 매입을 협상 도운 때 국가 돌기로했다. 먼로는 프랑스와 스코틀랜드의 후손이었다.

1812의 전쟁 동안 먼로는 국무 장관과 대통령 제임스 매디슨 미만 전쟁 장관의 중요한 역할을 개최 하였다. 골절 연방 파티에서 약간의 저항에 직면 몬로 쉽게의 80 % 이상을 수상, 1816 년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선거인단 투표와 미국 정치의 첫번째 파티 시스템 시대의 마지막 대통령이되기. 회장으로서 그는 당파 긴장을 완화하고자하고 전국 투어에 착수하고 잘 도처에서 받았습니다.

민족주의가 폭등으로 당파 분노가 가라 앉과 1819의 공황이 막혀 때까지 "좋은 감정의 시대"는 일어 났죠 미주리의 입장 이상의 분쟁은 1820 년 국가를 혼란시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로는 거의 만장일치 재선거를 이겼다. 1823 , 그는 미국의 외교 정책에 랜드마크가 된 먼로 학설을 발표했다. 그의 대통령직은 Jacksonian 민주주의와 세컨드 파티 시스템 시대의 시작 전에 미국 대선 역사의 첫 번째 기간을 결론 지었다. 1825에서 자신의 은퇴 후, 몬로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괴롭혀되었다. 그는 1831 7 4일 뉴욕시에서 사망했다.

2013.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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