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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셨다. 나도...
sara**** 조회수 1,784 작성일2018.06.16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셨다.
나도 그렇게 믿는다고 동의하는 사람을 만난다.
또한 논리적으로 동의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만난다.

동의하는 사람 중 어떤이는 내가 만난 하나님이 실제하기에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는다고 한다.

동의하는 어떤이는 내가 속한 기독교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고 나는 믿는다는 전제하에 동의하고 있다고 말한다.

나는 두번째 사람에게서는 내가 원하는 답을 못 찾겠다.

나는 하나님을 만났고 그분을 경함한 사람에게서 답을 찾고 싶고 그것이 사실인지 확인하고 싶다.

하나님을 만난븐들이 답을 해 주십시오.
공부를 통해 아시는분들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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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개 답변
8번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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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
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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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모태신앙 기독교인데 솔직히 제대로 믿지않는 신앙인입니다. 어머니가 권사님이라 어머니의 양향을 많이받아서 어렸을때부터 찬송부르고 기도하고 교회나가는 것이 학교가는것 같이 익숙한 삶이였습니다. 제가 30년넘게 믿어본결과 확실히 종교는 믿는게 제 삶을 윤택하게하고 하나님을 믿고 보는 관점에서 보는 시선은 정말 삶을 행복하게 해주는데 엄청난 기여를 한다고 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말씀이시니라. 하나님은 인간이 어떻게 지헤롭고 행복하게 살아야할지 구체적으로 나와있고 그렇게 살아보려고 노력을 하면 정말 제자신이 계획하지도 않는 일들이 잘풀리고 있다는게 삶을 통해서 조금씪 느껴집니다. 참신기하죠.
사람은 정말 어떻게 생각하면서 살기에 삶이 달라지는데 기독교를 믿으면서 사는 삶은 정말 좋습니다. 그대신 내자신을 내려놓고 온전히 기독교정신과 일맥상통하면서 살아가도록 노력을 많이해야겠죠. 최근에 저의 애기가 태어났습니다. 저의 애기를 볼때마다 이거는 신이 만들지 않고는 이렇게 엄마 아빠랑 꼭 빼닮지 않을수없다는걸 보면 볼수록 너무 느낍니다. 아기를 통해 하나님이라는 신이 살아계신다는걸 정말 느껴져요. 너무 이쁘고 이것이 진화햇다고는 전혀 믿겨지지않을정도로 정말 탄생이라는게 신비롭고 오묘합니다. 그리고 제가 결혼하고 직장을 갖고 아름다운 와이프랑 토끼같은 아들이 있기까지 저의 삶을 되짚어보면 신이 살아계시고 아직도 제 삶에 주관하시며 저와 함께 있다는걸 살면서 계속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꼭 하나님을 믿으십시요. 하루아침에 믿음이 안생깁니다. 저처럼 신앙이없고 의심이많고 다니다가 안다니다가 대충 다니고 무신론자같이 행동하는 저같은 사람이 20년넘게 꾸준히 믿어야지 하나님에 실체에 대해 믿음이 생기더라구요. 기독교 즉 하나님을 믿는건 새뇌일수도있겠지만 이건 새뇌로 인해서 세상을 바로볼때 느껴지는 것 이상입니다.
하나님이 만든 작품들을 볼때 자연을 볼때 신께서 아름답게 창조했다는걸 느끼는것 처럼 말이죠.

2018.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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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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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초인
개신교 51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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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을 가진 사람의 생각으로는 믿어지지 않는 일이지요

그러나 나는 천국을 직접 눈으로 보고 주님을 만나고 성령체험을 하고 직접 하나님께 말씀을 배우면서

그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작품을 믿지 않을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고 무엇이든지 다 할수 있는 분이지만 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살롬

2018.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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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번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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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ndervirtue
초인
개신교, 철학, 심리철학, 정신건강의학과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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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변화를 통해, 지금껏 부모님 친구들 환경과 사고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셨음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예수님이니 나를 사랑하는자를 보는것은 예수님을 보는 것입니다. 창조는 목적이며 그자체로 사랑입니다. 당신께 하나님의 지혜가 가득하길 기도드립니다.

2018.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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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번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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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ki****
우주신 열심답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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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만났다고 말하는 사람들 많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 사기치는 거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싶으면 교회에 가는 게 가장 쉬운 방법입니다.

 

교회에 가면 목사님이 세뇌를 시켜서 하나님이 있다고 믿게 해주고, 예수가 구세주라고 믿게 해주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로 써진 진리라고 믿게 해줍니다.

 

세뇌가 되면 환청을 듣거나 환각을 볼 수도 있는데 이거를 illusion이라고 합니다.

 

세뇌가 되면 illusion과 실상을 분간할 수 없게 될 수도 있습니다.

 

Illusion을 진실이라고 믿는 거를 delusion이라고 합니다.

 

Delusion에 빠진 사람은 지가 야훼가 있다는 거를 확실하게 믿고, 지가 하나님이나 예수의 말을 들었다는 간증도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만난 겁니다.

 

그런데 이거는 진짜로 하나님이나 예수의 말을 들은 거는 아닙니다.

 

Delusion에 빠진 기독님들이 지 머리 속에서 왔다리 갔다리 하는 생각들을 하나님이 응답했다고 하는 겁니다.

 

그렇지만 이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거짓말하거나 사기치는 거는 아닙니다자기가 기독교 환자가 되었다는 거를 모를 따름입니다. 

2018.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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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번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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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7818
초수
본인 입력 포함 정보
님께 도움이 될것 같아 네이버까페 " 에끌레시아 " 에서 퍼온 글입니다 도움되시길 바랍니다

*이제 창세기부터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기록’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이론입니다. 실제는 ‘나’ 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인지하는 과정에 대한 기록입니다.

하나님이 창세를 하셨어도 영이 살지 못한 상태의 ‘나’ 라면 그것을 인지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영이 모두 살았다고 해도 내 영이 살지 못하면 나와 창세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를 따라 길을 가는 어떤 한 사람의 입장에서 보자면 다른 이의 구원의 문제, 즉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의 문제에 대하여 확인을 할 길이 없기 때문에 사실상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길은 혼자 가는 길이 됩니다.

그렇게 혼자 가는 길에서 성경은 하나님께서 어떤 한 개인에게 주신 편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어떤 한 개인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적용이 되게 읽혀야 합니다.

만일 당신 한 사람에게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성경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의 이해는 하나님과 각각의 개인 간의 이야기로 시작이 됩니다.

창세기를 어떻게 읽어야 나의 이야기로 읽을 수 있게 되는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3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4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먼저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내가 인지하는 과정에 대한 기록’ 이라 전제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1장은 숫자 1의 의미를 적용하여 ‘나 한 사람에게 주시는 말씀’ 으로 이해를 하고,

1절은 ‘나 한사람이 하나님의 빛을 영적인 눈으로 본 처음 시점’ 으로 이해를 합니다. 아기가 처음 빛을 보는 때와도 같은 이치입니다. 그 아기에게 있어서는 그때가 실제로 세상의 일부가 되는 때입니다.

그래서 1절의 내용은

태초에,(내가 영적인 눈을 뜨고 처음 하나님의 빛을 본 때에) 하나님이 천(天: 하늘 - 인생을 향하신 구원의 뜻이 담긴 하나님의 법) 지(地: 땅 - 마음 밭을 일군다는 표현처럼 사람의 마음을 뜻하기도 하며, 아울러 바다와 반대의 개념인 영이 산 자가 머물러야 하는 땅이나 뭍 혹은 섬과 같은 의미 - 여기서는 사람의 마음 밭)를 창조하셨음을 인지하게 되었다.

2절의 2는 ‘교회 세움의 수’ 입니다. 말씀은 그냥 알아지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겐가 가르침을 주는 선생이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선생은 예수님이 되셨고 그 다음은 사도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하나님의 공의가 완전히 사라져 회복시키시는 이때에는, 그 회복의 도구로 사용된 필자가 그 첫 번째 선생이 됩니다. 물론 ‘에끌레시아’ 안에 있는 글들은 필자가 쓴 것이지만, 필자의 손은 도구로 사용이 되었을 뿐이므로 그 첫 번째 선생은 여호와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가 바로 가르침을 받는 당신입니다.

성경 처음에는 ‘하나님’ 이라는 표현이 있고, 제가 ‘여호와 하나님’ 이라는 표현을 썼으므로 잠시 곁길로 가 하나님의 ‘위(자리)’ 에 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우리는 흔히 신학적 관점에서 “삼위일체” 라는 말을 사용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론이 되고 교리화가 되어 삼일론이냐, 삼위일체론이냐 하는 것이 이단이냐 아니냐의 기준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람의 생각일 뿐이었습니다. 삼위일체라는 말조차도 실은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위’ 란 자리 곧 역할을 뜻하며, 성경에 언급되어 있는 하나님의 역할은 세 가지만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법을 뺀 상태에서만 있을 수 있는 이해입니다.

성경에 언급된 하나님의 위는 다섯 가지입니다.

그 첫 번째는 창세기에 언급된 절대자이신 ‘하나님’ 이십니다.

두 번째는 인생에게 함께 하시는 하나님, 즉 불완전체인 인생이 완전체인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한 악과의 전쟁에서 도우시는 역할을 하시는 ‘만군의 주’ 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세 번째는 신약에 언급되는 ‘하나님의 마음’ 을 뜻하는 ‘성령’ 입니다. 영이란 ‘마음’ 을 뜻합니다.

네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 이 육신이 되어 오셨다고 표현되어 있는 ‘예수님’ 입니다.

다섯 번째는 잠언에 언급된 ‘나 지혜는…’ 으로 표현되는 하나님이 있습니다.

[잠언 8장]
22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23 만세 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나니
24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25 산이 세우심을 입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26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
27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으로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28 그가 위로 구름 하늘을 견고하게 하시며 바다의 샘들을 힘 있게 하시며
29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로 명령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시며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30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31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었느니라

이렇게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위는 5위입니다.

그런데 창세기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창세기 1장]
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이 5위의 모양이 있어야 합니다. 과연 있을까요?

당신에게는 이 하나님의 형상이 있습니까? 만일 없다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것이 아닌 것이 됩니다.

따져 보겠습니다.

1. 당신에게는 먼저 첫 번째 위, 구원을 받아야 하는 ‘나’ 라는 본체가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이십니다.

2. 그리고 그 나에게는 마음(영)이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 입니다.

3. 또한 ‘나’ 는 생각을 합니다. 이것이 ‘여호와’ 입니다.

[이사야 55장]
8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9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4. 그리고 생각과 다른 것이 있는데 그것은 곧 깨달음 혹은 아이디어입니다. 사람도 생각을 하다가 뭔가 깨닫거나 해결책인 아이디어가 떠오릅니다. 그것이 바로 ‘지혜’ 입니다. 그래서 앞서 보신 지혜에 대한 설명이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5. 그리고 당신이 당신 자신을 타인에게 나타낼 때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말’ 을 하는 육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으로 나타내어졌습니다.

당신에게도 동일하게 이 5위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5위 중에 어느 것 하나가 빠져 있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길을 갈 수 없습니다.

지금 당신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인생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래서 잠언은 다음과 같이 가르치십니다.

[잠언 3장]
18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 되도다

[잠언 8장]
35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나’ 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완성하시는 ‘성령의 법’ 입니다. 십자가로 완성하신 것이 곧 ‘결자해지(結者解之)의 논리’ 에 입각하여 ‘완전하게’ 하신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십자가의 죽음이 없었다면 부활도, 생명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7장]
39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요한복음 14장]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한복음 15장]
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한복음 16장]
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요한복음 20장]
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요한복음 20장의 말씀은 부활 후의 일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당신은 지음을 받았고, 이제 갓난아기처럼 빛을 보게 되면서 창세기 1장 1절에 언급된 ‘천지’ 를 분간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라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한 표현도 아닌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이단과 사이비를 가르는 기준이 될 수 있겠으며, 교리가 될 수 있겠습니까.

이런 교리를 가지고 있다면 반드시 그 교단은 불완전한 몽학선생(학교에 데려다 주는)의 역할을 하는 곳에 불과한 곳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곳이 어디든지, 여러분이 이전에 있던 곳이 그런 곳입니다.

이어서 창세기에 당신의 이야기가 적혀 있는 것인지 보겠습니다.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둘(2), 당신이 제게 말씀을 배운 순간, 여호와의 생각이 나타난 ‘에끌레시아’ 안의 말씀을 보고 하나님의 선택을 인지한 순간, 당신은 하나님으로부터 교회 세움을 입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에 땅이 혼돈하고, 즉 당신의 마음과 생각에는 하나님의 법, 즉 기준이 없는 상태였으므로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악인지 분별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공허, 즉 길을 알지 못하므로 삶이 공허한 상태였었습니다.

흑암이, 즉 길이 보이지 않음이 ‘깊음 위에’, 즉 스스로는 헤어 나올 수 없이 깊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 곧 성령은 수면, 곧 단물과 쓴물 등으로 표현이 되는 성경의 말씀 위에, 여전히 살아 늘 한결같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했다는 것을 이제 먼저 된 저에게 배우기를 시작하면서부터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2’ 절입니다.

성경에는 선인과 악인, 의인과 죄인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당신은 이 각각의 기준을 아십니까?

아담이 죄를 짓고 쫓겨납니다. 그러면 그 쫓겨난 곳은 죄를 짓고 간 곳이니 감옥이 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인생은 그래서 ‘죄인’ 입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하셨으므로 당신의 육체는 반드시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므로 흙으로 돌아갈 육신을 입고 있는 당신은 죄수복을 입고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 죄수복을 입고 있는 감옥이 곧 땅에 있는 감옥, ‘지옥’ 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 지옥에 간 부자는 거기서 ‘고민’ 을 받는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지옥이 만일 사람을 불에 튀기는 곳이라면 어찌 그 상태에서 ‘고민’ 이 있을 수가 있겠는지요.

고민이란 뭔가 방법을 궁리할 때에 하는 것입니다. 높음과 채움을 위하여 살며 순간의 짧은 행복을 위하여 달음질을 할 때에 하는 것이 곧 고민입니다. 그것은 육신을 입고 있는 인생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영이시다.” 라고 하셨고, “육은 무익하며 살리는 것은 영이다.” 하신 것입니다.

그 다음, ‘의인’ 이란 죄인이 하나님이 옳다하심, 즉 하나님의 의를 알고 그리 가기로 결정을 하면 의인이라 칭해 주시는 것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칭의’ 입니다.

이때에 사람의 노력이란 고작 ‘선택’ 이 전부입니다. 단지 손을 드는 것만으로 의인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했는데?’ 라는 생각을 하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의 오해에서 비롯된 생각입니다.

[로마서 3장]
9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이것은 행위의 율법 아래 있을 때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것이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성령의 법을 완성하신 뒤이므로 지금은 누구든지, 성령의 법 안에 다스림을 받게 되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것이며, 의인인 것입니다.

당신이 성령의 법으로 다스림을 받게 되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것이고, 성령의 법이 곧 하나님이 옳다하시는 기준이므로 당신은 하나님의 의에 속한 의인인 것입니다.

성령의 법은 마음의 할례를 받게 하는 마음의 법입니다. 그렇게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서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만 성령으로 잉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도 성령으로 잉태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잉태(孕: 아이 밸 잉, 胎: 아이 밸 태)가 되는 순간이 바로 당신의 태초(太: 클/통할 태, 初: 처음/시작 초)인 것입니다.

그 다음 선인과 악인이란 하나님의 법 앞에서 자신의 선택으로 판단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옳다하시는 것을 따르면 선인이 되는 것이고, 따르지 않는다면 악인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죄인은 악인도 의인도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의인만이 악인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신에게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법이 그 마음에 없었으므로 그저 죄인일 뿐이었으며, 영원한 길을 몰랐으므로 영이 죽은 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영이 영원한 길을 향하고 있으며, 길도 찾았으므로 산 자의 마음, 산 자의 영을 가진 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지혜를 바탕으로 한 가르침을 받고 있으므로 생명도 얻었으니 이제 남은 것은 아버지께로 가는 일만 남은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나감이 없는 하나님의 안식’ 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안식에 들기 이전에는 언제든지 다시 나갈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안식에 든 자는 하나님이 쉬신 것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하셨으니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일을 쉬고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이 주시는 기업을 받아 하나님의 일만을 하는 상태가 된다면 그것이 곧 다시 나감이 없는 하나님의 안식에 든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창세기입니다.

3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숫자 3의 의미는 ‘은혜’ 입니다. 인생에게 주시는 은혜란 생명을 얻게 하는 수단인 ‘말씀’ 입니다. 본 절의 빛이 곧 말씀입니다.

또한 앞에서부터 “가라사대” 라는 표현이 있어 왔는데 그것이 곧 하나님의 ‘나타내심’ 입니다.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도 이 ‘가라사대’ 의 결과인 것입니다.

아울러 빛이 “있었고” 라고 표현이 된 것은 “너는 이미 빛을 본 뒤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4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4는 ‘예수님의 범위’, 즉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세상에서 일을 하는 일꾼들의 범위 안의 일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수입니다.

따라서 3절의 빛은 원론적 하나님의 뜻이 되며, 4절의 빛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된 성령의 법을 뜻하는 것입니다.

물론 성령의 법이 하나님의 구원의 뜻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빛과 어두움을 나누었다는 표현이 본 절에 있는 것입니다. 빛과 어두움에 대한 분별은 그 기준 곧 법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4절까지의 범위 안에서만 이야기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문장이 여기에서 끝이 난 것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이 ‘절’ 의 의미는 그대로 적용이 되어 어떤 절은 길어도 문장 전체가 모두 담겨 있고, 어떤 절은 짧은데도 이렇게 잘려져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좋았더라.” 는 표현이 1장에 연속해서 등장하는데 이것은 창조의 목적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하나님도, 인생도 ‘좋게’ 하기 위하여 창조를 행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 가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천국과 지옥에 대한 기존의 인식의 오류입니다.

천(天: 하늘)은 앞서 보신 바와 같이 하나님의 법을 뜻하는 용어입니다. 그리고 국(國: 나라)은 하나님의 나라를 뜻합니다.

생각해 봅시다.

‘나라’ 라고 한다면 그 안에는 다스리는 법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스림을 받는 상태라면 국민들이 아직은 다스림을 받아야 하는 불완전한 상태라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하여 길을 가는 것이고, 우리가 영이 살아 땅에서 살다가 육이 죽으면 아버지의 아들로 아버지께 가는 것인데, 그때에도 만일 다스림을 받아야 하는 인생의 입장과 동일하다면 그것이 어찌 하나님의 아들일 수 있겠는지요.

게다가 다스리고 다스림을 받는 상태라면 상대적인 사고를 하고 살아가는 인생의 삶과 다른 것이 전혀 없는데, 그것이 어찌 아버지의 앞이 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천국이란 하나님의 의를 따라 가서 의인이 되어 하나님의 법에 다스림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영적인 조직체, 하나님이 모으신 ‘우리’ 가 일꾼으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소속이 되는 무리를 뜻합니다.

그리고 그 무리 안에서 하는 일은 자기 일을 온전히 쉬고 하나님의 일만을 하는 상태를 말하며, 그것이 곧 ‘다시 나감이 없는 하나님의 안식’ 에 든 상태가 됩니다.

그 상태는 이미 상대적인 사고를 하는 자기가 부인이 된 상태이므로 세상에서 인생들이 하는 높고 낮음에 대한 생각으로부터도 떠나게 될 뿐만 아니라, 다스림을 받는 상태가 아닌 오히려 하나님의 법을 관장하는 자가 되어 법을 집행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다음의 말씀처럼 되는 것입니다.
[시편 89편]
26 저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
27 내가 또 저로 장자를 삼고 세계 열왕의 으뜸이 되게 하며
28 저를 위하여 나의 인자함을 영구히 지키고 저로 더불어 한 나의 언약을 굳게 세우며
29 또 그 후손을 영구케 하여 그 위를 하늘의 날과 같게 하리로다

위 시편의 말씀처럼 땅에서부터 하늘의 날을 살기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구히 지킨다.” 혹은 “영구케 한다.” 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렇게 영원은 땅에서부터 인지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땅에서 살게 되는 천국의 모습인 것입니다. 열왕의 으뜸이 되고 하나님의 인자함이 필요한 이것은 육신이 살아 있을 때에 겪는 것입니다. 따라서 천국은 살아있는 상태에서 경험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지옥(地 : 땅 지, 獄 : 옥 옥)입니다. 땅에 갇힌다, 즉 흙으로 돌아가게 될 수밖에 없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육을 버리고 영이 살지 못하게 되면 결국 육 안에서 영이 살지 못하여 육이 흙으로 돌아갈 때에 그 영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영이 육을 벗어나지 못한, 갇힌 상태가 곧 지옥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이 죽어야 영이 산다는 가르침을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천국과 지옥은 땅에서 경험되는 것입니다.

지옥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황당한 것인지는 조금만 생각을 해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흙으로 돌아간 영이 죽은 자를 다시 데려다가 유황불에 넣고 튀기시는 분입니까? 그것을 행하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저는 그런 하나님 안 믿습니다. 악질도 그런 악질이 어디 있겠습니까?

또, 천국에 갔다고 합시다. 그런데 저쪽에서 불에 튀겨지는 자신의 자식이나 부모를 볼 수 있다고 합시다. 그 튀겨지는 당사자뿐 아니라 그것을 보고 있는 자의 마음이 과연 기존의 이해대로의 ‘천국’ 에 있는 자의 마음일 수 있겠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그 또한 악질 중에 악질일 것입니다.

이런 황당한 주장을 하는 자들이나 듣고 믿는 자들은 도무지 생각을 하지 않는, 그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들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만을 행하시는 분입니다. ‘좋음’ 을 위하여 창조를 하셨고, 세상을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인생들에게도 ‘좋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인생들 사이에는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는 이승이 낫다.” 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높음과 채움을 향해 살아가고, 그곳이 좋은 인생들은 그렇게 좋게 살다가 가게 하셨고, 그것이 ‘안 좋은’ 이들은 그들대로 하나님을 찾아 진정한 좋음을 향하게 하셨습니다. 이렇든 저렇든, 하나님은 인생들이 각각의 좋음을 향하고 누리게 하신 것입니다.

인생들이 느끼는 좋음은 순간적이며, 그것을 얻는 과정은 매우 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좋음은 달성은 어렵지만 한 번 얻으면 사라지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래서 전도서에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이 지혜가 아니니라.” 는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지혜의 깨달음을 통한 좋음은 뒤로 가는 법이 없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겪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무작정이 아니라 논리적 논증을 통한 전제를 하신 뒤에, ‘더하기’ 를 하면서 당연하게 인지될 수 있는 가르침을 통하여 옳다는 것을 보여 주시고, 진리적 좋음을 느낄 수 있다고 가르치십니다.

그렇게 말씀을 따라 가는 길에서는 더하기 정도를 할 수 있는 사고력만 있으면 누구든지 진리적 좋음을 느낄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들은 앞서 설명을 드린 너무나 당연한 천국과 지옥에 대한 이해, 그리고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이해조차도 더하기 빼기가 안 되어 그저 무작정 소경들의 말을 들으며 길을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직전까지 그런 상태였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향하여 진리의 말씀을 들고 가야 하는 일꾼이 되려고 길을 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것을 알고 있는 자만이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또 그들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면서, 절대적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 5절입니다.

5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5란 ‘죽음에 대한 인지(認知)’ 를 나타내는 수입니다. ‘죽음을 의미하는 수’ 라고 여겨도 되겠습니다.

빛을 보고 나니 무엇이 죽은 것이고, 무엇이 산 것인지를 이제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빛을 본 자만이 자신이 어두움에 거하고 있었고, 자신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지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죽음을 인지해야만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는 죽은 줄도 모르고 그저 살아가는 것입니다.

[전도서 9장]
5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며 다시는 상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라

본 절에 특이한 표현이 있습니다. ‘하루’ 라는 날은 본래 아침이 오고, 저녁이 오는 것으로 인지되는 개념입니다.

그런데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왜일까요?

‘이상하다?’ 라고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없을 것입니다.

목자라는 자들에게 물어보신 적은 있습니까? 아마 없을 것입니다.

말씀 안에서 ‘저녁’, ‘서편’, ‘해질 무렵’, ‘황혼’ 등은 모두 문제(問題)가 시작되는 때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아침’, ‘새벽’, ‘동편’ 등은 말씀이 오는 것, 빛이 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연결해서 말하면 이렇습니다.

“첫째 날, 즉 당신 한 사람이 구원의 길을 모르다가, 즉 저녁이었다가 빛을 보게 되었으므로 아침이 되었는데, 이것이 곧 당신이 하나님과 일대일의 상태가 된 때의 일이다.”

여기까지만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후로 이어진 에스더까지 모든 내용은 이렇게 각 권의 제목과, 각 장의 수의 의미와, 각 절의 수의 의미와, 사용된 용어의 뜻이 일치되며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구약이라 말하는 성경의 실제 내용입니다.

물론 이제까지 설명 드린 용어들의 뜻은 성경 전체에 동일한 의미로 사용이 되어 있습니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성경은 선과 악을 분별하게 하는 가르침이 들어 있는 책이므로 똑같은 용어가 서로 상반된 의미를 가지고 사용이 된 경우는 종종 있습니다.

소금이 좋은 예입니다. 소금은 멸하는 의미로도 사용이 되지만, 반대로 정하게 하는 의미로도 사용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불도, 칼도 각각 멸함을 나타낼 때도 사용이 되며, 승함을 나타낼 때도 사용이 됩니다.

이런 것을 일컬어 ‘방언’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신에 보면, “방언으로 말하면 저들이 미친 것이 아닌가 할 수 있으니, 다른 이들이 있는 곳에서는 방언을 쓰지 말라.” 는 가르침이 있는 것입니다.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는 그저 신경 정신과적으로 문제가 생겨 나타나는 현상일 뿐인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은 말씀으로 거듭난 자가 영적으로 처음 겪게 되는 현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2장은 말씀을 따라 가는 길에서의 첫 번째 하나님의 섭리인 교회 세움의 이치를 설명하는 글입니다.

그리고 3장은 어떤 방법으로 사람이 되돌아와야 하는 잘못된 첫 걸음을 걸었는가를 가르치시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에덴에서 쫓겨나 하나님의 은혜인 말씀이 필요하게 된 근본 원인이 무엇인가를 가르치시는 내용인 것입니다

4장은 교회 세움의 이치를 따라 세상에서 나그네의 길을 가는 과정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치시는 내용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그리스도의 성령의 법 안에서 하나님의 법을 받은 인생이, 길을 찾은 인생이, 빛을 본 인생이 그 길을 잃어버리게 되어 어둠에 다시 빠지게 되는 가장 큰 원인이 무엇인가를 가르치시는 내용입니다.

가인의 문제는 ‘자기 합리화’(合:합할/모을 화, 理:다스릴/손질할 리, 化:될/변천할/망할 화) 입니다. 사람이 자기 생각의 바탕 위에서 하나님의 법을 임의로 조작하는 것으로부터 뒤로 가는 첫 걸음이 시작됨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 모든 과정의 섭리를 가르치시는 말씀이 ‘창세기’ 인 것입니다.

2018.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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