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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목포 위인좀 알려주세요!
인간 조회수 3,803 작성일2017.05.03

   목포의 위인좀 알려주세요 숙제로 목포의 위인 알아오라 했거든요

2017.5.7일까지 알려주세요 부탁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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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ngmaru
수호신
교육인 #강사 #복지관 한국사 12위, 한컴오피스 36위, MS워드 29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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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김지하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반체제 저항시인으로, 1980년대 중반 이후에는 생명사상가로 활동하고 있는 시인이자 사상가이다. 본명은 영일이며, 지하는 필명으로 '지하에서 활동한다'는 뜻을 안고 있다. 1941년 2월 4일 전라남도 목포의 동학농민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나 원주중학교 재학 중 천주교 원주교구의 지학순 주교와 인연을 맺은 뒤 서울 중동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문학의 길로 들어섰다.


1959년 서울대학교 미학과에 입학한 이듬해 4·19혁명에 참가한 뒤,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 남쪽 학생 대표로 활동하면서 학생운동에 앞장서는 한편, 5·16군사정변 이후에는 수배를 피해 항만의 인부나 광부 등으로 일하며 도피 생활을 하였다.


1963년 3월 《목포문학》에 김지하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시〈저녁 이야기〉가 처음으로 활자화되었고, 같은 달 2년 동안의 도피 생활을 청산하고 복학해 이듬해부터 전투적인 시를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이어 1964년 6월 '서울대학교 6·3한일굴욕회담반대 학생총연합회' 소속으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4개월의 수감 끝에 풀려난 뒤, 1966년 8월 7년 6개월 만에 대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번역과 학생 연극에 참여하는 한편, 1969년 11월 시 전문지 《시인》에 5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저항시인의 길로 들어섰다. 이듬해 《사상계》 5월호에 권력 상층부의 부정과 부패상을 판소리 가락으로 담아낸 담시 〈오적〉을 발표하면서 단숨에 박정희 군사 독재 시대의 '뜨거운 상징'으로 떠올랐다. 이 〈오적〉으로 인해 《사상계》와 신민당 기관지 《민주전선》의 발행인·편집인이 연행되었고, 《사상계》는 정간되었다.


김지하는 이때 '〈오적〉 필화사건'으로 구속되었으나 국내외의 구명운동에 힘입어 석방되었다. 이후 계속해서 희곡 《나폴레옹 꼬냑》, 김수영 추도시론 《풍자냐 자살이냐》를 발표하였고, 1970년 12월 첫시집 《황토》를 발간하였다. 1971년 이후에는 천주교 원주교구를 중심으로 계속 저항시 발표 및 저항운동에 전념하면서 연행과 석방, 도피 생활을 거듭하던 중 1974년 4월 체포되어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1주일 뒤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1980년 형 집행정지로 풀려났다.


1984년 사면 복권되고 저작들도 해금되면서 1970년대 저작들이 다시 간행되었고, 이 무렵을 전후해 최제우 ·최시형 ·강일순 등의 민중사상에 독자적 해석을 더해 '생명사상'이라 이름하고 생명운동에 뛰어들었는데, 이때 변혁운동 진영으로부터 '변절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이 당시의 시집으로 《애린》 《검은 산 하얀 방》과 최제우의 삶과 죽음을 담은 장시집 《이 가문 날에 비구름》, 서정시집 《별밭을 우러르며》 등이 있다.

 

1990년대에는 1970년대의 활기에 찬 저항시와는 달리 고요하면서도 축약과 절제, 관조의 분위기가 배어나는 내면의 시 세계를 보여주었는데, 《일산 시첩》이 대표적인 예이다. 1992년 그 동안 써낸 시들을 묶어 《결정본 김지하 시 전집》을 출간하였고, 1994년 《대설, 남》과 시집 《중심의 괴로움》을 간행한 뒤, 1998년에는 율려학회를 발족해 율려사상과 신인간운동을 주창하는 등 새로운 형태의 민족문화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1970년대 내내 민족문학의 상징이자 유신 독재에 대한 저항운동의 중심으로서 도피와 유랑, 투옥과 고문, 사형선고와 무기징역, 사면과 석방 등 형극의 길을 걸어온 작가로, 복역 중이던 1975년에 아시아·아프리카작가회의로부터 로터스상을 받았고, 1981년에 세계시인대회로부터 위대한 시인상과 브루노 크라이스키상을 받았다. 위의 저서 외에 시집으로 《꽃과 그늘》이 있으며, 산문집으로 《생명》 《율려란 무엇인가》 《예감에 찬 숲 그늘》 《옛 가야에서 띄우는 겨울편지》 등이 있다.

 

 

2.김진섭  

호 청천. 전라남도 목포에서 출생하였다. 1920년 양정고보를 마치고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가 호세이대학 독문학과를 나왔다. 1926년 손우성 ·이하윤 ·정인섭 등과 해외문학연구회에 참가하여 《해외문학》 창간에 참여, 카프의 프롤레타리아트 문학과 대결하여 해외문학 소개에 진력하였다. 평론 〈표현주의 문학론〉을 비롯하여 독일문학을 번역 소개하고, 귀국 후에는 경성제대 도서관 촉탁으로 있으면서 서항석 ·이헌구 ·유치진 등과 극예술연구회를 조직하였다. 이때부터 수필을 쓰기 시작하여 생활인의 철학을 재치 있게 표현하는 수필문학의 새 영역을 개척하였다. 8·15광복 후에는 서울대학교 도서관장, 서울대학교·성균관대학교 교수 등을 역임하였으며 1946년에 《독일어교본》을 엮어냈다.


1947년에 첫 수필집 《인생예찬》, 1948년에는 수필가로서의 그의 위치를 굳힌 본격적 수필집 《생활인의 철학》을 간행하였다. 1950년에 논문집 《교양의 문학》을 출판사에 남겨 놓고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1955년에 《교양의 문학》이 간행되었고, 1958년에는 유작 40편이 수록된 《청천수필평론집》이 출간되었다. 깊이 있는 생활관찰과 인생사색을 꾸밈없는 소박한 문체로 엮어낸 그의 수필은 한국 수필문학의 한 모델로 간주되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그는 수필을 문학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공로자라고 할 수 있다.

 

 

3.박화성
개화기에 목포에서 태어난 한국문학의 선구자 소영 박화성 선생은 개척자의 생애가 그러하듯, 외롭고 어려운 속에서도 끊임없는 도전과 정진으로 우리 문학사에 우뚝선 선구자요, 선각자였다.


남성위주의 사회에서 여성으로 15세에 소학교 선생으로 교단에 선 것을 비롯하여, 일본 여자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한 최초의 한국여성이었으며, 우리문단에 등장한 최초의 본격적인 여성 작가였고, 또한 장편소설을 집필한 최초의 여류작가로 줄곧 선구적 길을 걸었다. 또한 박화성 선생의 문학은 민족의 운명을 생각하면서 괴로움과 외로움을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으로 승화시켜 나갔는 점을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우리나라 근대문학의 태동기인 1925년 문단에 등장한 이후 60여 년의 작가생활을 통해 한국문단 의 대모로 칭송 받으며 남긴 수많은 역작과 그의 족적은 우리가 지키고 기려야 할 소중한 문화유산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4.이난영
1916년 목포시 양동에서 이남순의 장녀로 태어났다. 목포공립보통학교(현 목포북교초등학교)를 4학년까지 다니다가 집안이 어려워서 중도에 자퇴했다.


엄마와 함께 제주도의 생활이 시작되고 극장을 경영하는 주인집의 아이를 돌보면서 흥얼거리는 노래소리를 높이 평가하게 된 집주인이 그녀를 소위 막간가수(영화나 연극이 시작 되기전 나와 노래하는 가수)로 활동하게 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삼천리 가극단장의 권유로 특별단원으로 채용된 것이 1932년 열여섯살 되던 해였다. 이후 우연히 OK레코드 이철 사장의 눈에 띄어 작곡가 손목인에게 소개되어 목포출신문일석 작사인[목포의 눈물]을 부르게 된 것이 드디어 노래의 여왕 이난영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목포의 눈물은 이난영 특유의 목소리와 우리의 한이 서린 가사로 지금도 널리 애창되고 있다.


1965년 4월 11일에 세상을 등진 그녀는 4남3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모두 미국에서 가수로 활발하게 활동하여 어머니의 재능을 이어받았다.

 

 

5.이매방
호남예술의 거장'으로 일컬어지는 우봉 이매방은 전남 목포 출신으로 어릴적 집에 목포의 권번장 함국향이라는 기생이 세 들어 살아 자연스럽게 춤을 배우기 시작했다. 일곱살부터 6년간을 권번 기생들 틈에 끼여 입춤 등 전통 춤의 기본을 깨쳤다. 집안에는 가무를 즐기는 부모가 있었고 할아버지 이대조는 권번에서 기생들을 가르치는 선생이었다.그러나 그때의 춤은 재롱에 가까웠다. 소학교 때부터 ‘춤추는 머시마'로 불리던 그가 본격적으로 춤을 배우게 된 것은 열두살 때 배구자 무용단의 공연을 구경하면서부터 우연히 그의 재주가 눈에 띄어 무대에 오른 이후 임방울과 인연을 맺어 전국을 누비며 춤판을 벌였다.


뼈를 깎는 노력과 불같은 열정으로 그는 중요무형문화재 제97호 ‘살풀이춤'과 제27호 ‘승무' 예능보유자가 됐다.


여성적인 미를 기반으로 한 춤을 추는 그는 젊은 시절 중국 베이징에서 만난 미남 경극배우 매란방의 이름을 따 ‘매방'이란 예명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는“한국춤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정중동'이야. 여자같은 요염함과 애절함,슬픔과 원통함이 정이고,남성적인 박력을 통해 발산하는 것은 동이지.‘동'을 기본으로 하는 서양춤은 천만가지 감정의 변화를 표현하는 우리춤을 못 따라가.”라고 신념을 가지고 있으며, 한국무용의 제 맛은 ‘곰삭은 춤'에 있다고 말하면서 “젊은 한국무용가들이 창작을 할 때도 한국춤의 원형과 기본을 버려선 안된다”고 후배 무용인들에게 충고하기도 한다.


한국 무용계를 이끌어가는 대가들 중 상당수가 그의 춤을 전수받은 제자들이다.‘살풀이춤'은 안춘자, 홍금산, 이길주 등이 이수했고 ‘승무'는 신재자, 임이조, 양종승, 김호동, 박종필, 김지립 등이 맥을 이었다.‘승무'와 ‘살풀이춤'을 동시에 이수한 제자는 송수남, 오미자, 박소림, 김진홍, 채상묵, 송재섭, 최창덕 등이 있다.

 

 

6.장주원
장주원은 1937년 10월 5일 목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장중현(1915∼1970)이 목포에서 금은세공과 보석가공을 했으며 그 제자인 정길택씨를 통해 전수된 기능이 장주원에게 이어졌다


장주원은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최상의 품서에 비견되며 장신구, 보물 등 인간생활과 밀접히 관련을 맺는 옥을 가공하는 기술을 연마하였는데,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단절되버린 우리의 전통 옥공예를 복원하였다.


옥공예는 선사시대에의 여러 문화유적에서 출토되는 곡옥, 관옥 등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남자용 장신구로 옥로립·옥동곳·옥관자·패옥 등이 있고 여자용 장신구로 뒤꽂이 노리개 지환·비녀·단추 등에도 옥제품이 많이 사용되었다. 『경국대전』에는 경공장으로 상의원에 소속된 10명의 옥장이 있었을 정도로 옥을 다루는 기술은 매우 소중하게 여겨졌다. 현재 장주원 사택에 별관을 마련하여 옥공예전시관을 상설운영하고 있고, 갓바위 일대에 전수회관 건립이 추진되고 있다.


장남인 장석(1960년생, 경기대 교수)이 옥공예를 연구하며 가업을 이어가고 있다.

 

 

 

2017.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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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하늘
달신
#518전문가 #영화덕후 #자유로운영혼 한국사 54위, SF, 판타지 영화 77위, 생활영어, 회화 분야에서 활동
본인 입력 포함 정보
https://ko.m.wikipedia.org/wiki/김대중

https://namu.wiki/w/김대중

https://m.youtube.com/playlist?list=PLqNV8bSDHQ8jFkHO8pEOLBG8qY-07MNtA

김대중 대통령은 신안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을 목포에서 지냈습니다. 목포 출신 인물이라고 할 수 있죠. 보통 사람들에게는 김대중 대통령이 익숙합니다.

2017.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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